장군부는 민씨를 밖에 두었다.장군부에 대해 양 마마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진복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진복은 마부에게 말을 넘겨주고 왼쪽 다리 근육을 풀었다. 오늘 돌아다닌 곳이 많아, 다친 다리가 조금 부어올랐다.“회왕비는 아가씨가 군주에게 보낸 선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진복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도록 조심스레 속삭였다.양 마마는 잠시 멈칫했다.“왕비와 우리 부인은 자매였고, 평소 돈독한 사이였는데... 알겠습니다.”비록 황제가 진국공부의 지위를 주었지만, 이혼 이후로 외부에서는 험담이 끊이질 않았다.게다가 부인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이모와 조카의 정도 끊어진 셈이다.명문대가의 시선 속 아가씨는 아버지와 형제의 보호를 받았기에 황제의 특별한 관심을 받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무도 아가씨를 존중하지 않았다.진복이 말했다. “그 선물은 별채의 옆방에 두었습니다. 오늘 밤에 떠나는 아가씨는 발견하지 못할 것이니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맞습니다, 속상할 테니까 알리지 않겠습니다.” 양 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민씨가 왔다 간 일도 양 마마는 알리지 않았다. 오늘 밤에 멀리 떠날 예정이라 장군부의 잡다한 일로 그녀에게 영향 주고 싶지 않았다.진복은 단신의 약을 영롱각에 있는 송석석에게 건넸다. 다양한 약들과 고급 한약들이 들어 있었고 그중에는 단설환(丹雪丸)도 한 병 있었다. 이것은 심장병에 좋은 약으로 매우 비쌌다.“이건 비싼 약이다. 돈은 지불했느냐?” 송석석이 물었다.“그분이 받지 않으시며 그냥 가져가라고 했습니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가 돌아와서 갚도록 하겠다.”그녀는 또 다른 보따리를 열었다. 그 속에는 몇 가지 과자와 식량이 들어 있었다. 진복이 말했다. “눈이 많이 내릴 것 같습니다. 큰 눈으로 여관에 묵지 못할 때를 대비한 것입니다.”송석석은 조용히 말했다. “고맙다.”진복은 고개를 돌렸다.“아가씨, 짐은 다 챙기
이 훈련은 반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녀는 두 다리를 공중에 펼치고, 민첩하고 가벼운 몸을 빠르게 몇 번 회전시킨 후, 내력을 동원하여 창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돌덩이가 즉시 가루가 되었다.진복이 감탄하며 다가가서 보니, 모든 낙엽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예외는 없었다.진복은 기뻐하며 말했다. “아가씨의 실력은 장군들보다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거의 국공부의 주군과 맞먹는 수준입니다.”손에 창을 든 송석석은 만족스러워했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그녀는 얼굴에 홍조가 띠어 피어나는 붉은 매화 같았다. 한 달간의 고된 훈련 끝에 드디어 하산했을 때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이번에 출발할 때는 이 매화 창을 가지고 가야겠다.”지원군은 분명히 올 것이다. 다만 늦을 수도 있었기에 만종문의 사람들과 옛 친구들을 소집해 먼저 전장에 가서 북명왕과 함께 시간을 벌려는 것이었다.북명왕은 지금 남강에서 사국과 싸우고 있다. 사국의 움직임은 그도 알 것이다. 첩자가 사국 깊숙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정보를 얻었다 해도 신속하게 전술을 조정하기 어려울 것이고 병력도 제한적이다.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가지에 소복이 쌓였다.오후를 지나 신시 하늘은 온통 하얗게 변했다.아름다운 설경이었지만, 송석석은 감상할 마음이 없었다. 그저 남강 전장으로 최대한 빨리 도착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조랑말(棗紅馬)이 하루에 천 리를 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하루에 오백 리는 가능할 수도 있었다.밤낮으로 달릴 수도 없었고 반드시 휴식 시간도 줘야 했다.보수적으로 잡아도 남강에 도착하는 데 다섯 날이 걸렸다. 말의 속도가 빠르면 나흘이면 도착할 수도 있다.그녀가 매화 창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자 설주가 뜨거운 차를 올려 주었다. 송석석은 몇 모금 마신 후 말했다. “보주에게 내 비둘기 우리를 가져오라고 하고 종이와 붓을 준비하여라.”만종문에 있는 8년 동안 천방지축 뛰어다니기만 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눌려 반격도 못하고 나서야 열심
이 첫눈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멈췄다.송석석은 여전히 순백의 옷을 입고, 흰 꽃을 꽂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옷은 거의 흰색이었고, 부모상을 치르기 위해 세 해 동안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그녀는 여전히 장군부에서처럼 행동하며,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와 먼저 둘째 노부인께 절했다. “둘째 노부인께 인사드립니다.”그리고 민씨에게 평례(平禮)를 하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자리에서 일어선 둘째 노부인은 그녀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을 보니 한결 나아 보였고 장군부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았다.그제야 마음을 놓인 그녀는 장군부에서의 날들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간 잘 지내고 있었느냐?”“저는 잘 지냈습니다.”송석석은 그녀를 부축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잘 계셨는지요?”“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다.”자리에 앉은 둘째 노부인은 전북망과 이방에 결혼한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그녀를 보고 마음이 놓였다.“석아.”민씨가 인사했다. “사실은……”“뭘 그렇게 서두르느냐!”둘째 노부인이 그녀를 힐끔 보며 말했다. “네 시어미가 당장 죽지는 않으니, 나와 석석이 이야기를 좀 나눠야 겠다.”노부인의 병이 다시 도졌음을 송석석도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둘째 노부인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둘째 노부인은 손을 앞으로 모았다. 파란색의 여의문양(如意紋樣) 외투는 작년 가을에 송석석이 그녀를 위해 만들어준 것이었고, 옆에 놓인 흰 여우 목도리도 마찬가지였다.“밖에서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쓰지 말거라. 사람들은 잘 잊어버리니까, 해가 지나면 기억도 못 할 것이다. 그러니 그런 헛소문 때문에 마음을 상하지 말아라.”송석석이 말했다.“밖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그녀의 말에 둘째 노부인은 더욱 안심하며 더 이상 같은 주제를 다루지 않았다. 밖에 왜 금군이 있는지 묻지도 않았고, 그저 그녀의 일상과 취미에 대해 물었다.두 사람은 차 한 잔을 마실
초조해하는 민씨의 모습에 송석석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니 말씀하세요.”그녀는 오늘 밤 진성을 떠날 예정이었기에,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내일이나 모레 그녀는 다시 올 것이다. 매일 부문 앞에서 송석석을 만나지 못해 소란을 피우는 일은 피하고자 했다.송석석은 민씨가 노부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것 외에도 친정이 힘이 없었고, 지참금도 많지 않았으며, 귀족 집안의 여성들처럼 기개와 풍모도 없었다.민씨는 그녀를 괴롭힌 적도, 윗사람의 체면을 내세운 적도 없었기에, 그녀의 고충을 들어주기로 했다.민씨의 눈물은 끊어진 구슬처럼 계속 흘러내렸다. 그녀는 울먹이며 혼인식의 혼란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들은 도망간 손님과 불쾌하게 돌아간 병사들이 모두 그녀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남편인 전북경도 마찬가지였다.첫날밤에 식탁을 뒤엎은 이방을 떠났던 전북망은 이 일을 알게 된 노부인의 설득에 다시 돌아갔다.“이 정도면 말도 하지 않겠다.”화가 난 민씨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오늘 아침에 손수건을 가지러 신혼 방에 들렀는데 피가 묻지 않은 것이다. 어머님은 그들이 싸워서 밤을 보내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방은 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미 잠자리를 가졌다고 고백하며 그들과 함께 돌아온 장병들도 모두 알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어머님이 바로 기절하신 것이다.”옆에서 듣고 있던 양 마마는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이런 일들까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아가씨는 아직 그런 일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듣기 좋지 않습니다.”고고한 우리 아가씨께 어떻게 이런 무례한 말을 한단 말인가? 장군부가 지금은 몰락했지만, 노부인은 체면을 매우 중시하였다. 지참금을 탐낸 그녀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댔고 이혼한 후에도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아가씨를 나무랐다.밖에서 돌고 있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녀가 퍼뜨린 것이고, 헛소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살을 붙여 엉뚱한 루머가 되었다.양 마
민씨의 절망적인 눈빛을 바라보던 송석석은 당시 장군부에서 민씨를 내쫓으려 했던 일을 떠올렸다.그녀는 그것 때문에 잔뜩 겁먹은 것이다.그만 울음을 터뜨린 그녀는 급히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그리고 한참 후에야 말을 이었다.“제가 속이려는 게 아니고 어머님은 장군부가 지금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시며 이제 진성의 명문가에 들 수 있다고 여기는 눈치입니다. 제가 가문을 관리할 때, 어머님은 제가 큰며느리의 기품이 없다고 불평하면서 저를 들인 것을 후회한다고도 했습니다.”“저는 아가씨와 다릅니다. 거기서 쫓겨나면 친정에도 돌아갈 수 없고, 오히려 저를 꾸짖고 그로 인해 동생들과 조카들의 혼사에도 악영향을 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쫓기더라도 장군부에서 죽어야 합니다. 절에도 갈 수 없는 몸이지요.”민씨의 친정에 대해 송석석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녀의 아버지는 추밀원의 7품 편수로, 비록 높은 직책은 아니었지만, 학문을 중시하는 가문으로서 예의와 명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딸이 내쫓겼다는 것을 알면 민씨의 아버지는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노부인은 이제 장군부가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결혼식이 엉망이었지만, 그저 한순간일 뿐, 전북망과 이방의 앞길에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장군부는 점점 더 높은 위치로 올라갈 것이며, 장남 전북경도 그 혜택을 받을 것이다. 하여 장군부에는 내외를 안정시킬 수 있는 종부가 필요했다.민씨는 그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가 집안에 들어왔을 때 노부인이 그녀에게 가문을 맡겼을 것이다.둘째 노부인은 민씨의 말을 듣고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도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런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살아온 것은 그녀의 일생 최대의 오점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문에도 훌륭한 인재가 없었고, 장군부는 단 하나였으며, 여러 해 동안 분가하지 않아 모든 수입이 공적으로 모였다. 작은 집이라도 살 여유도 없어 장군부를 떠날 수 없는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아무도 보호할 수 없었다. 송석석도, 민씨도...잠시 생각하던
둘째 노부인과 민씨가 떠난 후에도 송석석은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고, 어두워지면 출발해야 했으므로 오늘은 자지 않기로 했다.민씨가 말한 전북망의 결혼식 이야기를 떠올리니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알고 보니, 이게 전북망이 좋아하는 진정성이었구나.하지만 이는 결국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고, 장군부의 체면을 완전히 잃게 만들었다. 모든 손님이 떠난 결혼식...전례가 없는 일이었다.‘이방…’이 두 글자를 낮게 읊조리자 억누르려던 증오와 분노가 다시 솟구쳤다.만약 그녀가 공을 탐내지 않고 항복한 자들을 학살하지 않았다면, 후부의 모든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전에는, 그녀가 남편을 빼앗고 무시하고 모욕해도, 서경과 상국의 평화를 위해 전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여전히 존경했었다.하지만 이제 송석석은 이방이 미워 죽겠다.이방이 항복한 자들을 학살한 일에 대해 외할아버지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황제는 모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모든 보고서에 이 일이 언급되지 않았고 병부가 이와 관련된 보고서를 은폐하지 않았다는 보장도 없었다.이 문제는 더 조사해야 했지만, 남강으로 가는 일은 시급했다.깊은 밤, 야행복을 입고 긴 창을 든 그녀는 보주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길을 떠났다.금군은 정문을 지키고 있었고, 이 시간에는 대부분 졸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송석석은 후문으로 나가 어둠 속에서 경공을 발휘하여 빠르게 떠났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성 외곽의 별장에 나타났다. 정원으로 뛰어 들어가니, 적갈색 말이 정원 외곽에 묶여 있었다. 진복이 준비한 것이었고, 말에게 먹이도 준비해 두었다. 그녀는 먹이를 한 줌 집어 말에게 주었다.말을 쓰다듬으며 송석석은 조용히 말했다. “섬광, 이제 남강으로 출발해야 해. 아주 먼 길을 가야 하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 힘들겠지만 잘 부탁할게.”섬광은 코로 그녀의 이마를 톡톡 건드리더니 계속 먹이를 먹었다. 그녀는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편당의
밤에는 여관에 투숙해서 섬광이와 그녀 모두 푹 잘 수 있었다. 외출할 때부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기에,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 세수하고, 얼굴에 검은 천을 두른 후 다시 출발했다.여정은 험난하고, 날도 추웠다. 얼굴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어도 바람에 거칠어 피부가 많이 거칠어졌다.밤에 여관에 투숙했을 때, 거울 속 원래 뽀얀 자신의 피부가 붉게 변하고 갈라질 것 같은 징조를 보이자, 차씨 기름을 꺼내어 얼굴에 발랐다.이는 예쁘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정말로 갈라지면 아프기 때문이다.출발한 지 다섯째 날 아침, 그녀는 남강에 도착했다.그녀가 느낀 불안한 점은 관도에서 양곡을 운반하는 행렬을 전혀 볼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는 북명왕이 승리를 확신하여 더 이상 양곡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했다.하지만 곧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남강에 도착해 알아본 결과, 이제 일리와 시몬만 남아 있었다.북명왕은 병법에 능해 이미 잃어버린 남강의 국토 90%를 회복했으며, 이 두 도시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양곡 운반 행렬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현재 북명왕의 군사는 모두 일리에 주둔해 있으며, 일리를 회복한 후 사국인을 시몬으로 몰아넣고, 계속 공격하여 몰아내면 남강의 전 지역이 상국의 영토가 될 것이다.그녀는 말을 타고 일리로 직행했다. 말은 이미 너무 지친 상태였지만 마지막으로 속도를 내도록 했다.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는 오늘 안에 북명왕을 만나야 했다.어둠이 깔린 뒤, 그녀는 전방의 전투 지역에 도착했다. 북명왕은 일리 성 밖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고, 아직 일리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남강에 다다르자, 주위는 온통 비참한 광경이었다. 전쟁의 참혹함이 가득했다.송석석은 이 땅을 사랑했지만,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부친과 오라버니들은 이 땅에서 희생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그녀는 진영으로 향하며, 도화창을 높이 들고 외쳤다. “송회안의 여식 송석석이, 북명군 주사령관과
말을 타고 사여묵을 따라가던 송석석은 열 걸음마다 하나씩 있는 모닥불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남강에는 원래 삼십만 병력이 있었고, 성릉관에서 십만 병력을 빌려와 총 사십만 병력이었다.그러나 현재 이십만도 안돼 보인다.북명왕은 남강의 스물세 개 성을 회복했고, 이제 두 개 성만 남았다. 당연히 많은 장병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주사령관의 진영에 도착하자, 선봉장과 부장들이 각각 진영 양쪽에 서 있었다. 송석석은 그들을 한 번 힐끔 보았다. 그들 역시 낡고 부서진 갑옷을 입고 얼굴이 거무스름하며, 수염이 얽히고설켜 있었다.주사령관의 진영에서 십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무장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을 송석석은 알아보았다. 그는 방천허(方天許)였고, 그녀 아버지의 부하였다. 그녀가 어렸을 때 그는 그녀를 안아 주기도 했다.방천허는 성큼성큼 송석석에게 다가가 그녀를 살피며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석석이냐?”“아저씨!”송석석은 순간 울컥했다.입술을 떨고 있는 방천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얼굴을 돌렸다. 송석석을 보니 후작과 일곱 명의 장군들이 생각나 눈물이 날 것 같았다.방천허 외에도 다른 몇몇 송회안의 부하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모닥불의 불빛이 그들의 붉어진 눈시울을 밝혔다.그중 한 노장이 물었다.“부인은 안녕하신가요? 한쪽 다리는 아직도 발작이 있으신지요?”송석석은 갑자기 목이 메어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빠르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재빨리 말했다. “저는 장군님께 중요한 말씀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저씨, 우리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 나눠요.”사여묵은 주사령관의 진영 앞에 서서 송석석을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군사 정보가 있다면 들어와서 보고하라.”그는 천막을 들어 올리며 먼저 들어갔고, 도화창을 진 송석석이 그 뒤를 따랐다.진영 안은 매우 추워서 밖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중앙에 놓인 책상에는 지도가 있었고, 모래 더미는 전술과 전략을 연습하는 데 사용되었다.남쪽 구석에는 침대가 있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