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시원과 안여옥의 혼사는 계속 미뤄지다가 결국 좋은 날을 잡아 혼례를 올렸다. 혼례가 비록 떠들썩하지는 않았지만, 태부의 손녀를 시집보내는 일이었으니 필요한 체면만큼은 갖추어져 있었다. 태후가 먼저 앞장서자, 후궁들도 차례차례 상을 내려 안여옥의 혼수품을 준비해주었다.아군여학의 학생들도 동참하여 안여옥에게 손수 만든 신혼 선물들을 보냈다. 여학의 학생들은 대부분 평민 가정의 아이들이었기에 비록 비싼 것은 없었지만, 손수 수놓고 만든 것들이라 특히 소중하게 느껴졌다.안여옥의 혼수는 일찍이 공방의 모 낭자에게 맡겼다. 그 혼례복은 공방의 자수점에서 전시된 적이 있었다. 그때 혼례를 앞둔 많은 처녀들이 그것을 보고 마음을 빼앗겼고, 자신도 그렇게 아름다운 혼례복을 입고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시집가기를 꿈꿨다.모 낭자는 본래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태부의 손녀도 그녀가 만든 혼례복을 입었으니, 그 누가 여전히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며 재수없다고 생각하겠는가? 이때부터 공방의 자수점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자수점에는 혼례복을 만드는 사람도, 일상복을 만드는 사람도 있었다.혼례 당일, 송석석은 시만자와 함께 방씨 가문에 가서 혼례 연회를 즐겼다.방씨 가문에는 형제가 많은 데다가 방시원이 무장이라 그런지,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신혼방을 어지럽히겠다고 말하며 놀려댔다. 그리고 다들 신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고 싶어 하였는데, 예상과 달리 신부는 당당하고 여유롭게 나서서 말했다. "신혼방을 어지럽히는 것은 좋지만, 먼저 시를 지어야 합니다. 혼례를 통해 인연을 맺는 것을 주제로 시를 한 편 지으면 홍봉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신혼방 정원에서 권법과 검술을 선보여야 합니다."그렇게 방시원과 안여옥은 처마에 앉아 여러 차례의 권법과 검술을 감상했고, 홍봉은 나가지 않았다.그렇게 신혼방을 어지럽히는 대신 신혼부부가 손님들에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는데, 이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태부부에서 태부 손녀의 혼례를 축하하는 손님들 중 대부분이
시끌벅적한 혼례를 마친 후 황실로 돌아온 송석석은 매화원이 유난히 고요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제가 생각났지만, 사제는 저 멀리 남강에 있다. 비록 헤어진 날들을 세진 않았지만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예전처럼 왕경루에 나가 사부도 찾고 싶었으나, 그가 이미 매산으로 돌아갔음이 기억났다. 마음속에 서서히 허전함이 몰려왔다.그러다가 또 아까 봤던 안여옥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본래 여자가 혼인할 때 이렇게 기뻐하고 기대하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넘쳐나는구나. 그 행복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니…...’송석석은 두번의 혼인 모두 평화롭게 진행했다. 그때, 보주가 송석석의 화장을 지워준 뒤 목욕물을 준비하려 하자, 송석석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앉히고 말했다. "보주, 예전에 네 혼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지?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 것이냐?"보주는 송석석을 한 번 보더니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씨, 혼례 때 먹었던 음식과 술이 입에 맞으셨나 봅니다. 또 드시고 싶으신가요?"송석석은 웃으며 답했다. "내가 그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냐? 다 너 좋으라고 하는 말이다. 계속 이렇게 있으면 나중에 늙은 처녀가 되고 말 테니깐. 만자에게 영향을 받아서 혼인을 안 하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지?"그러자 보주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혼인할 거예요. 그러나 혼인한 후에도 아씨 곁에 있을 거예요."송석석은 보주의 코끝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혼인하고 나서도 남편이 아닌 내 곁에 남겠다는 거야?"보주는 눈물이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씨, 저에게는 아씨 외에 아무도 없어요. 아씨가 어디에 있든지 저는 그곳에 있을 거예요. 괜찮은 하인이나 호위가 있다면, 다른 건 상관없어요. 인품이 좋고 황실에 충성하기만 하다면 혼인할 거예요."말을 마친 후 보주는 눈물을 흘렸다.송석석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니야. 가장 중요한 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해. 오늘
소부는 입성할 때 열 명 남짓한 사람만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모두 강건하고 체격이 건장했으며, 허리에 굽은 칼을 차고 있어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술과 고기를 먹기 시작하자, 그들의 검은 얼굴에는 어느새 화려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비록 군주 소부는 쉰이 넘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피부가 거무스름하며 광이 났고, 눈은 매우 총명하고 밝아 보였다. 또한, 그는 특별히 지혜롭고 치밀한 사람으로,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북명왕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그의 요구는 단 하나 뿐이었다. 이번 한 번만 협력하고, 사국을 물리친 후에는 즉시 초원을 떠나야 하며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초원의 핵심 지역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는 것이다. 사여묵은 그의 요구를 수락하고 즉시 협정을 체결했다. 협정 체결이 되자마자,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초원 부락은 상국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해마다 전쟁이 일어나 초원이 피해를 입곤 했기 때문이다. 초원에는 여러 부락이 있지만 하나로 뭉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은 상국이나 사국에 대항할 수 없었다.방천허는 그들을 성 밖으로 호송한 후, 곧바로 수부로 돌아가 이번 추격전을 어떻게 준비할지 논의했다.초원 부락이 땅을 빌려준다면 그들은 종심까지 추격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추격전은 성을 방어하는 전투와 달랐다. 후방 지원, 식량, 활과 무기, 그리고 군의와 치료약, 들것 등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해야 했다. 군대가 나갔을 때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하는 위험도 따랐다. 하지만 이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그 효과는 클 것이었다. 최소한 10년에서 8년간 사국은 다시는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터였다.모든 장수들이 밤새 논의한 끝에 기본 전략이 세워져, 군령을 내렸다. 당연히 황제에게도 급보를 보냈다. 급보에는 매번처럼 송석석에게 보낼 편지도 함께 끼워 넣었다. 외지에 있는 동안, 아무리 부부 사이라도 어전에서는 비밀이 없으니 불필요한
궁 안의 어서방에서는 지열이 아직 따뜻해지지 않은 탓에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스며들었다.비록 조서 처리는 이미 끝났으나, 숙청제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그는 그저 눈앞의 어두운 불빛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는 방금 전, 사여묵이 송석석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었다. 그 편지에는 다할 수 없는 그리움과 속마음이 담겨 있었는데, 마치 처음 혼인한 신혼처럼 달콤하고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사실 그들의 편지를 이번에 처음 본 것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리움이 담긴 편지를 읽었었지만, 이번처럼 이렇게 자유롭고 거침없는 내용은 아니었다.이런 내용은 입으로도 말하기 민망한데, 글로 쓴다는 건 더 민망하지 않겠는가?그는 황제의 동생이 이런 짓을 하다니 실로 부적절하고 경솔하다고 생각했다.여자들 달래는 방법은 많은데 왜 하필 이렇게 해야 했을까?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속에 작은 돌이 떨어진 듯,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 물결은 점점 커져만 갔고, 아무리 애써도 가라앉히지 않았다. 그가 황제가 된 후,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남녀 간의 정은 감히 생각할 수조차 없다.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그저 한순간일 뿐, 결국은 사라질 감정이라고 여겼다.그는 송석석에게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당당하고 뛰어난 여성인데, 어느 누구나 마음이 뺏기지 않겠는가?하지만 흔들린 마음도 결국 정치적 도구가 되었다. 송석석을 자신의 동생에게 시집보내면 그의 병권을 해제할 수 있다는 마음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이처럼 숙청제의 감정은 언제나 희생되어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 되엇다.“폐하, 오늘 밤은 어느 궁녀의 궁에 가시겠습니까?”오대반이 그가 조서를 다 처리한 후 한참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러자 숙청제가 시선을 돌려 서서히 초점을 맞추며 물었다. “최근 황후의 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오대반이
한편, 황후는 장춘궁에서 비녀와 귀걸이도 풀지 않고 얼굴의 화장도 지우지 않은 채,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오늘 어전에서 일찍부터 황제가 오늘 밤 후궁에 오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황제께서 아직 간택하지 않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간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이곳에 오시겠다는 의미였다."란주, 폐하가 오셨는지 한 번 확인해보거라." 그녀는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오늘 밤만 벌써 세 번째 재촉이었다.란주 상궁은 옆에서 시중을 들며 웃으며 말했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황제께서 오실 때는 반드시 사람을 먼저 보내 맞이할 준비를 하시라 알리실 겁니다.""그치, 그랬었지. 황제께서 너무 오랫동안 장춘궁에 오시지 않으셔서 벌써 다 잊어버렸지 뭐냐." 황후는 머리를 쓸어내며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본궁과 황제는 결국 부부인데, 부부 사이에 원한이 어찌 그리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 이제 대황자도 많이 성장했으니 황제도 마음이 부드러워지셨을 테지."“황제께서 오시면 잘 말씀드리십시오. 너무 급하게 대황자를 데려오겠다고 말하지 마시고요."란주 상궁이 당부하자,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다. 오늘 밤에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 아이를 하루빨리 돌아오게 해야 한다. 이제 대황자도 태부가 칭찬할 만큼 잘 하고 있으니, 더 이상 지안궁에 둘 필요가 없지. 대황자는 돌아와도 똑같이 잘 배울 수 있어. 만약 계속 지안궁에 둔다면 어쩌면 대황자가 어미인 나를 잊고 말 테야."란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사실 대황자께서 이제 말을 더 잘 듣고, 더 좋아지셨습니다. 지안궁에서 계속 지내게 하면 어떨까요? 황제께서 황후의 금지령을 풀어주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대황자를 보러 갈 수 있고, 대황자도 효심이 깊으니 결코 황후를 잊지 않을 겁니다."황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슬픔으로 가득찬 눈빛으로 말했다. "효심은 깊지만 아직 어리다. 그러니 누군
후비들 중에서 제 황후가 가장 꺼리는 사람은 덕비와 수빈이었다.덕비와 수빈은 각각 이황자와 삼황자의 어머니였다.사실 수빈의 삼황자는 친자가 아니고 나이도 어리기에 그녀가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수빈은 본래 성격이 거칠고 가문이 뛰어나며 권력을 휘두를 줄 아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최근 일년 동안 수빈은 덕비와 함께 후궁의 일을 관리하며 성격도 많이 수그러들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법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송석석의 공방과 여학을 지원하며 민간에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반면 덕비는 훨씬 더 조용히 지냈다. 수빈과 후궁의 일을 관리하며 간혹 그녀의 의견을 묻기도 했고, 정말로 그녀를 황후로서 존중하며 대해주었다.하지만 덕비의 이황자는 총명하고 예의가 발랐고, 심지어는 태후와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만약 지금 태자를 책봉한다면 당연히 적장자가 되겠지만, 황자들이 다 자라나면 누군가가 그 중 뛰어난 자를 태자로 삼자는 제안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대황자에게 강적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지금 덕비와 수빈 두 사람은 후궁의 일을 함께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아들들은 자연히 더 높은 대우를 받고 있었다.황후가 대황자를 데려와 키우기로 결심한 이유에는 단순히 앞서 말한 것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이유가 더 있었다. 제씨 가문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그녀의 발목을 잡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면 황후의 자리를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그러나 대황자가 황후의 곁에서 자라면 황제는 반드시 황후를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렇기에 황후는 이 말을 더더욱 감히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몹시 떨린 탓에, 밤새 뒤척이느라 한 숨도 자지못했다. 그렇게 다음 날, 황제가 혜의궁을 수빈에게 주어 살게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혜의궁은 당시 혜안태후가 황후가 되기 전에 살던 곳이었는데,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했다. 궁 앞에는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안
수빈이 궁을 옮기자, 각 궁에서 선물을 보내왔고, 황족과 왕족들도 이 소식을 듣고 몇 번이고선물을 보냈다. 어떤 것을 보낼지에 대해서 다른 저택은 모두 주모가 결정을 내리는 반면, 북명황실에서는 염선생과 노 집사가 결정권을 가졌다.두 사람은 창고에서 선물로 줄만할 것을 이것저것 찾았지만, 적당한 것을 찾지 못했다. 값비싼 금은보화 같은 보석들을 주기에도 그렇고, 금과 옥으로 된 은병을 주기에도 너무 인색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또한, 산호수나 병풍 같은 비교적 큰 물건들은 염선생이 잘 내놓지 않으려 했다. 산호수는 보기 드문 것이라, 황실에 있는 한 그루도 왕비의 혼례 때 만종문에서 선물한 것이었다.결국 그들은 창고에 가장 많은 물건을 눈여겨보았다. 그것은 바로 심청화 선생의 매화 그림이었다.이것은 내놓으면 매우 품격 있는 선물이 될 것이었고 값도 꽤 비쌌다. 그러나 황실에는 이런 그림이 많았다. 만약 부족하다면 곧 눈도 내리기 시작할 터이니, 매화도 피기 시작할 것이다. 심선생에게 다시 그려 달라고 부탁하면 되지만 그들은 심선생을 존중하여 먼저 허락을 구했고, 그는 아무런 이의 없이 허락하였다. 사실 이 매화 그림은 이미 너무 많이, 심지어는 여러 해동안 그려왔기 때문에 근육이 다 기억할정도였다. 종이를 펼치고 붓과 먹이 손에 있기만 하다면 한두 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일이었다.송석석은 저녁에 돌아와 이 광경을 목격했다. 심선생의 그림을 보내야 한다니 마음이 조금 아쉬웠지만, 다행히도 그것이 수빈에게 보내는 것이었으니 괜찮았다. 어쨌든 궁 안에 남아 있을 것이므로 쉽게 팔려 나갈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수빈도 아마 묵보를 아끼는 사람일 터이니, 보내야 한다면 보내면 되었다.그녀는 선물을 가져다주러 직접 궁으로 갔다. 혜의궁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기회를 이용해 궁에 들어가려는 내외의 명부들이 전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송석석도 잠시 기다렸다. 누군가 그녀가 왔다는 소식을 들어가서 알린 듯, 수빈은 송석석의 업무가
비록 혜의궁의 정원이 크지는 않았지만 어화원과 비교하면 결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였다.만약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꽃을 감상하거나, 잠시 잠깐 서서 꽃을 감상하려 한다면 반 시진 정도는 걸릴 것이었다. 하지만, 송석석은 빠르게 걷는 것이 익숙했기에 꽃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바로 지나쳤다. 그녀에게는 큰 차이 없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전에 온 산에 가득 피어 있는 갖가지의 꽃들을 본 적이 있었다. 서리를 맞은 차가운 매화꽃, 높은 산의 진달래, 3월에 피는 아름답고 화려한 복숭아꽃, 끝이 보이지 않는 각색의 동백꽃 등… 모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한 경이로운 장관이었다.그런데 지금 이곳에서 화분에 정성스럽게 키운 모란을 보고 있자니 그다지 큰 흥미가 생기지 않은 것이었다.한 바퀴 돌고 나니 몇몇은 차 한 잔도 다 마시지 못했고, 첩여 동씨가 막 공방 이야기를 꺼낼 때쯤 그들은 이미 혜의궁의 정전에 도착했다.첩여 동씨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그럼 들어가서 수빈 마마께 축하를 올립시다."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저는 일이 있어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아, 왕비님!" 첩여 동씨가 급하게 그녀를 불러 세우자, 송석석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소주께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그러자 첩여 동씨가 웃으며 말했다."아무 일도 없어요. 다만, 세상 모든 여성을 대신해 왕비께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왕비 마마는 넓은 마음을 가지시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려운 백성들을 염려하시니, 비첩들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송석석은 그 말에 다소 당황스럽고 의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백성들을 염려한다니? 자신은 그렇게까지 위대한 인물이 아니었다.게다가 부끄러우면 스스로만 부끄럽다 하면 됐지, 왜 굳이 비첩들이라고 말한 것일까? 이 말은 대체 누구를 의미하는 것이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후궁들한테 하는 말인가?그리고 정말로 세상의 여성을 대신해 감사하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을 불쾌하게 만들려는 의도일까? 이는 칭찬하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