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