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기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네 시를 넘기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봄의 시작을 알리며 아늑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초봄의 시작을 알렸다.시내의 어느 유치원.사무실을 나온 차우미는 처마 밑에 서서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우산을 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오늘은 시댁에 가족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시할머니는 가족간의 우애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다. 나 회장이 돌아가신 뒤로 가문에는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하루는 꼭 시간을 내서 본가로 돌아와 저녁을 같이 하는 풍습이 생겼다.이 풍습은 차우미가 NS그룹 며느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오십 년이나 전해져 내려온 풍습이었다.아침부터 비 온다는 예고는 있었지만 오후에 뒤늦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저녁이 되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차우미는 조용히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섯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나상준은 며칠째 출장 중이었다. 아침에 나상준의 비서인 허영우에게 문자를 보내 확인했을 때는 예정대로 세 시 사십 분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네 시가 넘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도착했을 것이다.차우미는 방향을 틀어 주차장을 벗어났다.청주에 있는 시댁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차우미는 직접 시댁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나상준이 집에 도착하면 그와 같이 시댁으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관강동은 청주의 유명한 부유층들이 사는 주택가였다. 나상준과 차우미가 결혼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창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금방 싹을 피워내기 시작한 비에 젖은 나뭇가지들이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차우미는 익숙한 길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서 검은색 롤스로이스 뒤에 차를 세웠다.차가 도착한 걸 보니 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시동을 끈 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집으로 들어갔다.“일단 그렇게 알고 진행해.”커다란 거실 창문을 통해 커튼 사이로 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
시댁은 청주시 남부의 교외에 위치해 있었다. 번화한 시내와 떨어져 산과 들을 등지고 지은 호화저택은 요양하기 최적인 곳이었다.차가 서서히 정원으로 들어서자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날은 이미 저물었고 저택에서는 밝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빗소리와 가족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아늑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겼다.최우미는 곱게 포장한 쿠키를 들고 나상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집 안에서 어린 소녀가 뛰어나오더니 앳된 목소리로 그들을 맞아주었다.“큰아빠, 큰엄마!”최우미는 미소 띈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박스를 아이에게 건넸다.“열어봐.”아이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더니 환호를 질렀다.“와! 백설공주랑 일곱 난쟁이다!”최우미는 동화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 취향을 고려해 동화 속 캐릭터를 닮은 쿠키를 만들어 아이에게 자주 선물하고는 했는데 여느 베이커리 전문가와 비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마음에 들어?”“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큰엄마!”“마음에 들었으면 됐어.”가족들은 이미 모두 도착해서 최우미와 나상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지각했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둘은 가족들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전하고 자리에 앉았다.나상준의 할아버지인 전대 회장님은 아주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네 아이와 함께 졸지에 든든한 가장을 잃었지만 이혜정 여사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네 아이를 돌보고 회사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회사는 점차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빚더미에 허덕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 회장이 사망한지 불과 3년이 되던 해에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막내아들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남편을 잃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식까지 잃은 이혜정 여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는 대신, 다시 일어서서 홀로 아이들을 길러냈고 지금의 NS를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장남인 나상준의 아버지 나명덕은 슬하에 1
“따라와.”문하은은 싸늘하게 한마디 던지고 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차우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시어머니를 따라갔다.시댁은 전형적인 전통식 궁전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기왓장 하나하나 신경을 썼고 목재도 은은한 나무 향이 풍기는 원목 자재를 사용했다.시할머니는 원래 청주에서 잘나가는 재벌가의 딸이었으나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가문이 몰락하여 당시는 아직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던 나동석과 결혼했다고 했다.빗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차우미는 문하은을 따라 서재로 들어가 열린 창문을 닫았다.방 안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앉아.”문하은이 먼저 자리에 앉고 차우미는 그녀와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에 시집온 지도 벌써 3년이 돼가는구나.”문하은은 대대로 교수를 배출한 학자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녀가 나명덕과 결혼할 당시, 이혜정 여사는 이미 혼자 힘으로 NS그룹을 일으켜 세웠기에 그녀와 나명덕의 결합은 잘 어울리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었다.이혜정은 돈보다는 자라온 가정환경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이 집에 3년을 살면서 눈칫밥에는 이골이 난 차우미였기에 문하은이 자신을 따로 불렀을 때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자식 문제.그녀와 나상준은 결혼한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이가 없었다. 품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어머니였기에 3년 동안 심한 말 한번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눈치를 준 것도 사실이었다.“네, 어머니.”남 얘기하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차우미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문하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참았던 불만을 토로했다.“처음부터 난 이 결혼 반대했다. 집안이나 학벌 어느 것 하나 우리 상준이에 비해 많이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어머님이 널 지목했고 상준이도 불만이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었어.”“하지만 3년 동안 기쁜 소식 한번 없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니?”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문하은이었기에 책망하는 말조차도 차분하고 부드러
서예를 사랑하는 나명덕은 유명 서예가였고 그의 부인 문하은은 화가였다. 나명석은 학술을 사랑해서 오랜 시간 연구원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논문을 써냈다. 그의 부인은 의사였고 유명 병원 원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나준우는 엄마의 재능을 물려받아 의사가 되었다. 판사인 나명희는 이혜정 여사를 꼭닮아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녀의 딸도 엄마를 동경해서 판사가 꿈이었다.나상준의 첫째 누나는 유명 피아니스트였고 둘째 누나는 고고학자였다. 이혜정 여사의 사업가 기질을 완벽히 물려받은 후대는 나상준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었다.나희연은 집안의 도움보다는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랐다. 승부욕이 강한 그녀는 혼자 힘으로 성과를 내려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다. 그런 그녀에게 나상준은 훌륭한 본보기였다.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나동석 회장의 조상은 장군 출신이었다. 그는 훤칠한 체격에 짙은 이목구비를 가졌으며 조상이 고위 관료 출신인 이혜정 역시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랬기에 그들의 자식들은 외형이나 능력적으로 어디 빠지는 것 없이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3세도 선조의 이러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각자의 영역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단연 나상준이었다.사실 나상준의 외모는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닮았다. 그는 190에 육박하는 훤칠한 키에 조각 같은 이목구비, 선이 분명한 입체적인 얼굴선을 가진, 전형적인 미남의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그는 창가에 서서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자 그의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이제 용건을 말해봐.”나희연이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영해만 부지를 구매했다고 들었어. 리조트에 들어갈 초목 공사 관련 사업은 나한테 좀 떼주면 안 돼?”나희연은 조경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넓은 땅을 구입해 나무와 각종 식물을 재배하고 인테리어 전문가를 고용해서 여러 건설 사업에 참여하여 조경 인테리어를 해주고 이윤을 챙기는 쉽고 간단하지만 이윤이 많이 남는
문하은이 서재를 나간 뒤, 차우미는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생각에 잠겼다.이 집안 사람들은 규칙적인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열 시가 되면 모두 씻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었는데 예은이는 차우미랑 같이 잔다고 투정을 부리다가 엄마인 서혜지가 겨우 달래서 방으로 데려갔다.“큰엄마, 안녕히 주무세요!”아이는 생기발랄한 얼굴로 차우미에게 굿나잇 인사를 했다.차우미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잘자.”서혜지가 아이를 재우고 난 뒤에야 남편 나준우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의문을 던졌다.“큰집 동서랑 아주버님 결혼한지 3년이 넘지 않았나요? 동서도 애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여태 아이가 안 생기는 게 신기하네요.”나준우는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건네며 무심하게 말했다.“우리가 상준이 형보다 결혼을 빨리했어도 바로 예은이가 생긴 건 아니잖아. 그래도 우린 2년만에 예은이가 태어나긴 했는데 3년이나 소식이 없는 건 좀 그러네. 아까 큰어머니가 형수를 따로 불러내신 것 같던데 아마도 그거 얘기하시려고 불렀을 거야.”서혜지는 남의 집안 사정을 주절주절 떠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저 차우미가 예은이를 예뻐하는 걸 봐서 애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여태 임신 소식이 없으니 궁금한 것뿐이었다.그런 아내를 이해하기에 나준우도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아마 문제는 상준이 형 쪽에 있는 것 같아. 사업 확장하느라 가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겠지.”서혜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상준 아주버님은 다 좋은데 너무 바쁜 게 흠이긴 하죠.”평소 말이 없던 아내가 푸념을 늘어놓자 나준우가 웃으며 물었다.“당신은 형수가 안타까운가 봐?”서혜지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남편을 흘겨보고는 다가가서 시계를 풀어주며 말했다.“동서지간에 잘 지내는 것도 지혜가 필요하죠. 형님은 성격도 좋고 현명한 분이에요. 출신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다른 재벌집 아가씨들보다 형님이 훨씬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그녀는
차가운 달빛이 커튼 사이로 비쳐들고 있었다.우지끈!소나기가 거세지며 정원의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을씨년스럽게 들려왔다.“이유는?”나상준은 전등을 켜고 소파로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는 분노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광도 없는 일이라는 듯이 한치 동요도 없는 모습이었다.차우미는 3년을 함께한 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시간 동안 한 번도 그에게서 색다른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희로애락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그에게는 어쩌면 이혼도 일과 별로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다.그는 뛰어난 사업가였고 여자들이 꿈꾸는 결혼상대였다.그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결혼 생활을 유지하려면 애틋한 감정이 필요하지. 당신은 할머니의 말씀 때문에 나를 아내로 맞았고 나 역시 그때는 당신이 가장 적합한 결혼상대라고 생각했어.”“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어. 조건이나 집안 어른의 말만 듣고 한 혼약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우리 사이에는 애틋한 정도 없고 아이도 없어. 이 상태로 3년을 유지한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해.”“난 이제 우리가 갈라서야 할 때가 왔다고 봐. 이혼은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최선의 선택이야.”차우미는 차분하게 준비했던 말을 마쳤다.3년이란 시간 동안 그에 대해서 충분히 알았고 눈빛 하나, 미세한 움직임 하나로도 그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에게는 어쩌면 이혼할 이유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말은 전부 일리가 있었으나 단지 하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나상준은 말없이 뚫어지게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렇게 진지하게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손바닥만한 얼굴에 반달 같은 눈썹, 선한 눈매와 오똑한 코, 복숭아빛이 도는 매력적인 입술. 화려하지는 않지만 봄에 피는 꽃처럼 싱그럽고 청순한 매력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차우미가 짐을 챙겨 나가려는데 통화를 마친 나희연이 다가왔다.이혜정이 말했다.“그래. 너도 나가려고? 그럼 네 새언니 좀 태워다 줘.”“잘됐네요! 어차피 나가는 길이었으니까 새언니 픽업은 저한테 맡기세요. 번거롭게 송 기사 아저씨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요.”“그래. 잘됐네.”나희연과 차우미는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 본가를 떠났다.가족이기는 하지만 각자 바쁜 사람들이다 보니 평소에 만날 일이 많지 않았다. 모임 때 말 몇마디 건네본 게 전부였다.그녀와 나희연의 관계가 그러했다.두 사람은 딱히 친하다고 할 수 없었다. 명절 때나 만나서 안부를 나눈 게 전부였다.운전하는 중에도 나희연은 업무 전화로 바쁘게 보냈다.조수석에 탄 차우미는 이미 익숙해져 버린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상념에 잠겼다.이혼 얘기를 친정에 꺼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양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차우미가 나상준과 결혼하게 된 계기는 할아버지 대에 쌓은 인연 덕분이었다.그녀의 할아버지는 아주 예전에 나동석 회장의 목숨을 구해준 적 있었다. 그가 세상을 뜨고 회사가 잠깐 주춤하면서 연락이 끊겼지만 이혜정은 그 은혜를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차우미가 이혜정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할아버지가 입원하신 병원에서였다. 마침 그녀가 일하는 곳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매일 시간 내서 할아버지를 돌봐주고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할아버지 병실을 찾아갔는데 그때 낯선 할머니가 한분 와계셨다.그 할머니가 바로 나상준의 할머니, 이혜정 여사였다.그렇게 알고 지낸지 반년이 흐른 어느 날, 할아버지는 이혜정에게 아주 괜찮은 손자가 있는데 한번 만나보는 게 어떠냐고 차우미에게 물었다.그렇게 둘의 혼사가 성사되었다.사실 차우미는 결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나이도 비교적 어린 편이었고 아직은 일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르신들이 그렇게까지 추천하니 적당한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제안을 받아들였다.그렇게 이어진
“쿨럭!”여가현이 당황한 표정으로 먹던 커피를 뿜었다.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연신 기침했다. 차우미는 서둘러 그녀에게 티슈를 건넸다.한참이 지난 뒤에야 여가현은 정신을 차리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이혼? 갑자기 잘 나가다가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네가 상준 씨랑 이혼하겠다고?”“우미야, 나 너무 혼란스러우니까 넌 집에 가서 찬물에 샤워 좀 하고 정신 똑바로 차린 뒤에 다시 나한테 연락해.”“아… 아니지! 이혼하더라도 우리 로펌은 절대 안 돼. 난 네 법률 대리인이 될 생각 없어 난 못해! 잘가, 멀리 안 나간다!”여가현은 커피를 뿜어 엉망이 된 책상을 휴지로 닦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차우미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도 동의한 일이야.”여가현이 멈칫하더니 속을 꿰뚫어 보려는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차우미를 노려보았다.차우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같이 지낸지 3년이야. 하지만 난 그 사람 마음을 돌리지 못했어. 이대로 시간 끌어봤자 서로에게 좋을 게 없어. 그래서 이혼하려는 거야.”“그래서 상준 씨가 바람이라도 피웠니?”여가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차우미의 표정 변화를 자세히 살폈다.차우미가 실소를 터뜨리며 말했다.“아니. 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야.”“그럼 왜? 설마 갑자기 어느 날 눈을 떠봤더니 이혼이 하고 싶어졌다는 황당한 소리는 하지 마. 네 마음이 어떤 건지 내가 너보다 더 잘 아니까! 사실대로 말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여가현은 차우미와 초등학교부터 함께한 20년지기 친구였다. 그녀보다 차우미에 대해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랬기에 차우미도 다른 로펌으로 가지 않고 이곳을 선택했다.차우미는 친구에게조차 거짓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조금 전 했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하루 아침에 갑자기 그에게 실망해서 떠나려는 건 아니었다.차우미가 안쓰러운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우린 3년 동안 한 번도 잠자리를 하지 않았어.”여가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온이샘이 눈을 뜨고 있었다.그는 자기 품 안에 있는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분명 그녀의 눈에서 걱정과 불안함을 보았고 또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기의 모습도 명확히 볼 수 있었다.너무 선명하고 유일무이했다.온이샘의 심장은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진동이 심했다.차우미는 맑은 샘물에 빠진 것 같았는데 샘이 어찌나 맑은지 그 안에 있는 수초, 돌덩이, 작은 물고기들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그녀는 온이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마음속의 깊은 사랑이 모두 보였는데 그 모든 것이 모두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고 그녀를 향해 솟구쳤다.차우미의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온이샘의 두 눈을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렸다. 온이샘의 두 눈에 그녀가 받을 수 없고 받아서도 안 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시선을 돌리면서 주변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고 색다른 기운에 의식도 되찾았다. 그때 서야 그녀는 자기가 아직도 온이샘의 품에 있고 온이샘의 팔이 자기의 허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차우미는 현재 상황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의식적으로 온이샘을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차우미가 움직이려고 할 때 뒤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이샘?”그 목소리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찼는데 그 외 예상치 못한 충격도 포함되어 있었다.차우미가 돌아서서 뒤에 있는 여자를 봤는데 나이는 자기보다 조금 많아 30대로 보이고 어깨까지오는 생머리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는데 소년 같은 외모를 가진 소탈한 성격의 소녀 같았다.순식간에 차우미의 머릿속에 조금 전 온이샘의 이야기 속에 있던 친구 유리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여인은 차우미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온이샘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차우미를 바라보더니 마지막에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온이샘의 팔에 시선을 멈췄다.그러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차우미는 여인이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고 서둘러 온이샘을 밀어냈다.그제야 온이샘은
차우미는 이런 인간미가 넘치는 거리는 오랜만이라 너무나도 활기차고 북적이는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온이샘은 차우미가 안전하게 미끄러운 골목을 벗어나자, 그때에야 손을 거두었다.그때 그녀가 멍해 있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온이샘은 차우미만 옆에 있으면 웃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너무 평온하고 행복했다그는 너무 행복했고 지금 순간에 만족했다.“어때? 이런 곳은 오랜만이지?”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렸다.“그러게,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 여기에는 와 본 적이 없어.”결혼 생활 3년 동안 그녀는 혼자서도 많이 다녔을 뿐만 아니라 가끔은 여가현과 같이 또 가끔은 서혜지와 같이 돌아다녔지만, 이곳에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다.특히 이렇게 인간미가 넘치고 너무나도 평범한 백성들이 사는 곳은 정말 처음이다.“잘됐네. 네가 와 봤다면 재미없을 거잖아.”온이샘은 차우미가 가보지 못한 곳을 데려가고 싶었다.“아침 식사 가게가 저기 앞에 있으니 얼른 가자.”“알았어.”온이샘은 앞에서 걸으며 길을 안내했고 차우미는 여전히 양산을 쓰고 뒤를 따라갔다.다만 미끄러운 골목길을 나오자, 그녀는 더 이상 고개를 숙여 길에만 주의하지 않고 양쪽의 가게들을 구경하며 온이샘이 말한 아침 식사 가게가 어디일지 생각했다.차우미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는 나무 간판을 봤는데 그 위에는 주가반점이라고 씌여 있었다.차우미가 말했다.“혹시 저기 주가반...”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양산도 따라 기울었다.온이샘은 비록 앞에서 걷고 있었지만 줄곧 차우미를 주시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넘어질 무렵 신속하게 손을 뻗어 안아주었다.“조심해!”그는 차우미의 허리를 감싸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러자 차우미가 손에 들고 있던 양산도 온이샘 쪽으로 기울렀는데 순간 양산이 바깥쪽으로 넘어가더니 우산 뼈의 끝이 순식간에 온이샘의 이마를 찔렀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눈까지 감았다.차우미는
온이샘은 차우미의 표정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그녀가 이제야 자기가 누군가와 싸웠다는 걸 믿어주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차우미는 자기의 질문이 어디가 잘못돼서 온이샘이 웃는지 생각하며 의아해했다.온이샘은 그녀의 멍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더 사랑스러웠다.그가 싸웠다는 말에 이토록 진지한 표정을 보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온이샘은 그런 차우미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그래. 같은 반 친구를 도와야 해서 싸운 거야.”차우미는 입을 살짝 벌리며 말했다.“선배도 싸울 줄 아네.”차우미의 눈에 온이샘은 아주 세련되고 우아하며 이성을 가지고 말로 사람을 설득하지 절대 싸우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온이샘은 차우미가 놀라는 모습을 즐기며 말했다.“왜, 놀랐어?”차우미가 고개를 저었다.“놀란 건 아니고 조금 의외여서. 나는 선배가 절대 싸움질 하는 사람 같지 않았거든.”온이샘이 웃었다.“그때는 어렸고 지금과는 상황도 다르잖아. 그리고 주변 친구들이 모두 뛰어갔고 게다가 상대가 모두 우리보다 커서 친구를 구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어.”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상황이었구나.”“그래, 상황이 상황인 것만큼 그런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어.”온이샘의 설명을 듣고 차우미는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게다가 그때 당시 모두 나이가 어렸고 청소년이니 많은 걸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차우미는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길을 살피며 걸어갔다.“그다음은 어떻게 됐어?”온이샘은 차우미가 평정심을 회복하자 눈을 지그시 뜨고 뒤를 따랐는데 여전히 조금 전과 같이 팔을 벌려서 차우미를 보호하며 걸었다.“혈기 왕성했던 우리가 미세한 차이로 이겼어. 비록 모두 부상을 입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기뻐하며 골목에 앉아 같이 웃었어. 우리가 도와준 친구의 이름이 유리였는데 그녀의 외할아버지가 골목길 맨 끝에서 아침 식사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거든. 유리는 우리를 거기로 데리고 가서 상처를 처리
차우미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양쪽의 건물과 도로 표지판, 그리고 낯설면서도 익숙한 주변을 구경하였고 온이샘은 예전에 이곳에 놀러 왔던 이야기들을 했다.그는 예전에 친구들과 같이 여기에 와서 맛있는 음식들을 많이 먹었다고 했다.차우미는 차 안에 있을 때처럼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흥미진진하게 온이샘의 이야기를 들었다.그렇게 두 사람은 무후문을 지나 조금 더 걷다가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골목거리는 매우 외진 곳이었는데 거의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었고 양쪽에는 엄청나게 오래된 성벽이었는데 도색도 되지 않아 벽 모서리의 가장자리에는 이끼층이 선명하게 보였다.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것 같았는데 낮에는 괜찮아도 밤에 다니기에는 위험할 것 같았다.온이샘은 차우미가 약간 놀라고 의아해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여기에는 와 본 적이 없지?”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 아닌 것 같아.”발 아래 길은 청색 돌길이었는데 어젯밤에 내린 비에 돌판들이 아직도 젖어 있었다.골목길은 구불구불하고 좁아서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습했던 것이다.차우미는 넘어질까 봐 고개를 숙이고 길을 보며 조심조심 걸었다.이런 길에서는 미끄러져 넘어지기 쉽다.온이샘은 차우미가 걷는 모습마저 너무 귀여워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아. 여기는 아는 사람이 적어서 많이들 오지 않아. 여기 주변에 사는 사람과 나와 같은 극소수의 아는 사람들만 다니는 곳이야.”온이샘은 말하면서 슬그머니 차우미의 가까이로 가더니 그녀의 뒤에서 손을 벌리고 넘어지려고 할 때 바로 부축할 수 있게 준비했다.사실 온이샘은 어젯밤에 비가 내린 줄도 몰랐고 이 길이 이렇게 습해서 미끄러울 줄은 더더욱 몰랐다.그가 차우미를 여기로 데리고 온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가 걸었던 길을 그녀와 함께 걷고 싶어서였다.하지만 온이샘도 도착해서 이렇게 미끄러운 것을 알았기에 가능한 차우미가 넘어지지 않게 보호하려고 신경을 썼다.차우미는 온이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
시간은 어느새 9시가 되어 태양이 점점 더 뜨거워졌는데 양산이 차우미의 머리 위를 가리는 순간 햇빛과 단절되어 약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이건 양산의 공로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온이샘의 공로였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서 있었는데 여름 바람이 살살 불면서 그의 몸에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감쌌다.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괜찮아.”“그냥 해.”온이샘은 양산 손잡이를 꼭 잡고 차우미를 바라보았는데 새하얀 피부에 버들잎 같은 눈썹을 보자마자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양산은 태양의 뜨거움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햇빛도 막아서 차우미 눈 밑에 있는 다크서클마저 잘 보였다.온이샘이 마음아파하며 물었다.“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어?”“왜?”차우미는 온이샘의 난데없는 질문에 의아했다.온이샘은 그녀의 다크서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심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한 것 같아.”차우미도 아침에 씻고 거울을 볼 때 봤었다.그녀는 밤에 늦게 자고 수면 시간이 짧기만 하면 다음 날에 곧바로 다크서클이 나왔는데 컨디션이 좋으면 그나마 조금은 괜찮았었다.지금 컨디션도 좋고 졸리지도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온이샘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차우미는 눈을 만지며 말했다.“어젯밤에 늦게 자서 그래. 혜지 씨가 관강동 별장에 예은이 데리러 왔는데 그때가 밤 10시였거든, 그리고 상준 씨와 얘기를 조금 하느라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어.”차우미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속이지 않고 온이샘에게 이야기했다.온이샘은 그녀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속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선명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했다.온이샘의 눈에는 온통 차우미로 가득 찼다.“그럼, 아침 먹고 호텔로 데려다 줄 거니까 한잠 자. 점심때 되면 연락할 테니 같이 식사하고 오후에 안평으로 가자.”온이샘은 차우미의 일이 끝나서 이제 나상준과 더 이상 엮일 일이 없으니 마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조금 전에 호텔 앞에서 봤던 표정인데 그때는 햇빛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차 안이어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순간 온이샘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조여왔는데 마치 뭔가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았는데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차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눈웃음을 지었다.“선배, 여기서 일은 다 끝났어?”차우미는 아무것도 생각한 적이 없다는 듯 표정을 회복했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조금 전의 표정이 보이지 않자 억지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말했다.“응, 어젯밤까지 다 처리했어.”온이샘은 정말 일했다는 것을 강조하듯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그의 대답은 차우미가 미리 예상했었는데 그녀는 온이샘이 정말로 일이 있었고 자기를 속이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그때 차우미는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앞을 바라보며 웃었다.“선배, 우리 어디 가서 아침 먹는 거야?”온이샘은 차우미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편안함을 들었다.그는 차우미에게 무슨 일이 있지만 별로 심각한 것 같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무후문으로 갈 건데 혹시 들어봤어?”차우미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거기가 옛날 건물들이 있는 곳이지?”온이샘은 차우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무후문은 청주에서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거리에 있는데 이 도시에서 3년 동안 생활한 차우미가 모를 리가 없었다.무후문은 소문이 많이 나서 청주에 여행 오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반드시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외부에서 여행으로 잠깐 오는 사람들도 아는 곳을 청주에서 생활했던 차우미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하지만 온이샘은 자기가 지금 차우미를 데리고 가려는 그곳은 절대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주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온이샘이 흐뭇해하며 웃었다.“거기는 아침 먹기에 조금 불편해. 내가 지금 가려는 곳은 그 옆
온이샘은 차우미 앞에 부드럽게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왔다.자기 앞에 서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는 진정으로 차우미가 자기 손이 닿는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온이샘은 빠른 걸음으로 차우미의 앞으로 갔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잠깐 멍해 있었다.햇빛이 강렬한 관계로 그녀는 눈을 찌푸려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온이샘도 차우미의 이런 표정은 처음으로 보았는데 조금은 귀엽고, 또 조금은 매혹적이었다.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제야 눈썹을 흠칫하며 온이샘이 자기 앞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차우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선배,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살게.”차우미가 그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그에게 아침 사준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온이샘이 웃는 것을 본 차우미는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온이샘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다가 헛기침하며 웃음을 꾹 참았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치켜올라갔다.“우미야, 여기는 청주이니 내가 살게.”그의 진지한 표정에 차우미가 웃었다.“알았어. 안평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게.”“약속한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아침 사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온이샘은 특별히 차우미가 이번에 아침을 사주기로 한 것과 기존에 밥 사기로 한 것을 구분해서 강조했다.전에 약속한 것과 지금 약속한 것을 반드시 별도로 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차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차우미가 대답했다.“알았어.”“가자. 내가 먹어 본 중에서 아침을 제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좋아.”온이샘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차우미가 올라타자, 본인도 즉시 운전석에 타고 출발했는데 교통 체증은 여전했다.“오래 기다렸어?”교통 체증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차
나상준이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자기와 같이 안평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흰색 BMW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앞에 멈춰서자, 차우미는 고개를 들었는데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흰색 셔츠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내려왔다.시간은 8시가 넘어서 햇빛이 적당하여 너무 덥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몸 전체를 짱짱하게 따뜻하게 내리 비춰주었다.온이샘이 차에서 내리자 밝은 햇빛이 즉시 그를 감쌌는데 얼굴도 더욱 맑고 우아해졌다. 그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지그시 뜨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차우미를 보고 있었다.그건 만족의 눈빛이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사람으로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진심이라고 하는 데 진심은 분명히 통하게 된다.차우미는 온이샘이 자기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후로는 그 마음이 더 잘 보였다.온이샘은 차우미를 각별히 챙기고 돌봐주었는데 모든 면에서 온이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온이샘은 연인으로도 남편으로도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처음에 차우미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치 못 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은 남자로서 훌륭하고 심지어 나상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미는 만약 이혼한 경력만 없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온이샘과 함께했겠지만, 본인의 상황이 온이샘 인생에 흠집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본인은 자격이 없기에 온이샘은 자기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온이샘은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차우미의 호텔을 향해 달렸는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운전했을 것이다.청주의 7~8시는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이기에 자전거, 스쿠터,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어쩔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