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셔츠에 캐주얼한 정장 바지를 입고 하얀색 운동화를 신은 훤칠한 남자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살짝 걷어 올린 옷소매 사이로 그의 건장한 팔뚝 근육이 보였다.그의 손에는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저녁과 과일, 그리고 각종 일용품을 잔뜩 쇼핑하고 돌아온 온이샘이었다.그는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었는데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온이샘은 쇼핑백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강서흔의 전화였다.아마 이쪽 상황이 궁금해서 전화했을 것이다.마침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는 한 손에 짐을 들고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든 채, 엘리베이터를 나섰다.손에 든 짐에만 신경 쓰다 보니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남자와 마주쳤다.“여보세요.”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수화기 너머로 강서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미 씨는 어때? 깼어?”그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히 대답했다.“깼어.”“괜찮은 거지?”온이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괜찮아. 많이 좋아졌어.”“괜찮다니 다행이네. 그래도 이번 사고로 둘이 조금 가까워졌으니 너한텐 좋은 건가?”장난 섞인 목소리에 온이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그게 왜 나한테 좋은 거야?”“넌 우미 씨 좋아하는데 우미 씨는 너한테 관심 없었잖아. 한번 만나려고 해도 이 핑계 저 핑계 생각해야 하는데 마침 다쳤으니까 병문안을 이유로 대놓고 병실 드나들 수 있잖아?”“이번 기회를 잘 잡아야 해. 이런 기회 흔치 않아. 하늘이 널 도와주고 있는 거라고!”온이샘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그럴 싸하긴 하네. 하지만 이런 기회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아.”그는 차라리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쥐어짜더라도 그녀가 다치지 않는 게 좋았다.“순정남 납셨네. 야, 닭살 돋아. 이만 끊어. 사랑에 미친 놈!”말을 마친 강서흔은 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온이샘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으며 핸드폰을 도로 넣었다.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가던 그는 갑자기
주혜민은 임상희의 병실을 지키며 나상준을 기다렸다.하지만 나간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자 병상에 있는 임상희를 돌아보았다.임상희는 아직 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한 그녀는 간병인에게 임상희를 부탁하고 병실을 나섰다.복도를 둘러보았지만 나상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휴게실 쪽에서 주진수가 누구랑 통화를 하고 있었다.주혜민은 주변을 둘러보고 그에게 다가갔다.“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나 대표님께 전달하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주진수는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차우미를 보러 간 나상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같이 가려고 했는데 나상준이 위층에서 기다리라고 지시했기에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30분이 지났다.“상준 씨는요?”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주진수가 고개를 돌렸다.“나 대표님은 아래층에 가셨습니다.”“아래층에는 왜요? 의사가 아래층에 있어요?”주혜민이 예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주진수는 주혜민의 신분을 잘 모르기에 자세한 사정을 말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나상준과 같이 달려온 것으로 봐서 평범한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임상희 씨는 지나가던 행인에게 구해졌어요. 그분이 상희 씨를 구하다가 다쳐서 지금 6층 외과 병동에 입원해 있거든요.”주혜민은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임상희의 부모님은 해외에서 바로 올 수 없었기에 나상준이 모든 일을 맡아서 해결했다.솔직히 그녀와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상준의 사촌누나와 그녀는 해외에서 시간 내서 만날 정도로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다.임상희와도 몇 번 봐서 서먹한 사이는 아니었다.마지막으로 본 게 두 달 전이었나?물론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나상준이었다.그녀는 그의 옆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오는 길에 들은 바로 임상희는 죽을 뻔한 상황에 처했다가 극적으로 구조되었다고 들었다.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병실로 달려왔기에 위기의 순간에 임상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을 깜빡 잊고 있었다
한편, 하선주와 차동수는 나상준이 병실을 나온 것을 확인한 뒤에야 병실로 돌아갔다.병실로 돌아가자 셋 사이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이혼했다고 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딸은 딱히 슬퍼하거나 상심해 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하지만 딸을 잘 아는 부모로서는 3년 간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겨우 마음을 정리했는데 나상준이 다시 나타났으니 많이 혼란스러울 것이다.차우미는 조심스러운 부모님의 태도에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서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아빠, 엄마, 나 정말 괜찮아.”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에 그녀는 일단 부모님을 위로했다.하선주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아가, 답답하면 엄마한테 얘기해. 힘들면 울어도 돼. 엄마아빠 앞에서는 그래도 돼.”차우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엄마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아빠를 보자 차우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나 정말 괜찮다는데도.”그녀는 이미 마음을 정리했지만 부모님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힘든 걸 마음에 담아두지만 말아. 우리가 걱정하고 속상할까 봐 말을 아끼는 거 알아. 하지만 우린 가족이잖아. 우리한텐 너밖에 없어. 이럴 때는 엄마아빠한테 기대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그래, 우미야. 참지 마.”하선주는 여전히 딸이 자신들을 배려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이러다가 마음에 병이라도 들까 봐 걱정되었다.차우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뭔가 얘기하지 않으면 부모님의 시름을 덜어드릴 수 없을 것 같았다.그녀는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 우리가 이혼한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야. 그냥 그런 생활이 내가 바라던 삶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야.”“그 사람은 항상 바쁘고 출장 나가 있는 시간이 집에 있는 시간보다 길었어. 나도 집에서 일을 하다 보니 우리가 정작 소통할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어.”“처음에는 그런
똑똑!노크 소리가 울리자 정신을 차린 차동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내가 갈게.”하선주도 급하게 표정을 수습했다.차우미는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생필품 사온다고 나갔던 온이샘이 돌아온 것이다.아까와는 확연히 다른 노크 소리였다.문이 열리고 온이샘이 웃는 얼굴로 안으로 들어왔다.“다녀왔어요, 아저씨.”차동수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래. 어서 들어와.”온이샘은 물건을 들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쇼핑백을 본 차동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뭘 이렇게 많이 샀어?”하선주도 소리를 듣고 다가왔다.“뭘 샀길래 이렇게 많아?”온이샘이 웃으며 말했다.“많지 않아요. 두 분 저녁에 병실을 지켜야 하는데 생필품 좀 샀어요.”마음은 남아서 병실을 지켜주고 싶지만 차우미가 불편해할 것 같아서 참았다.“아이고. 섬세하기도 해라.”하선주는 쇼핑백에 담긴 수건과 치약, 칫솔들을 꺼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그의 정성이 엿보였다.이렇게 자상하고 섬세한 남자는 흔치 않았다.“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온이샘은 짐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먹을 음식을 꺼냈다.“오는 길에 식당에 들려서 먹을 것 좀 챙겨왔어요. 별거 없지만 오늘은 대충 끼니를 때워야 할 것 같네요. 내일 안평 병원으로 옮기면 좀 나을 거예요.”차동수 부부는 흐뭇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그들은 온이샘의 자상함이 마음에 들었다.가만히 듣고 있던 차우미가 입을 열었다.“선배, 부모님도 오셨으니까 선배는 어서 돌아가서 쉬어. 내일 학교도 나가야 하잖아. 난 걱정하지 않아도 돼.”“병원 옮기는 일도 아빠랑 엄마가 있으니 충분해.”온이샘은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그녀의 얼굴에서 평소에는 잘 볼 수 없었던 진지함이 보였다.“날 구하다가 손까지 다쳤는데 내가 어떻게 안심하고 출근할 수 있겠어? 내가 그렇게 야박한 사람으로 보여?”그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차우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온이샘의 성격을 알기에 지금 돌아가도 일
13층 VIP 병동.임상희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의사는 일련의 검사를 진행했다.나상준은 병실 밖에서 소식을 기다렸다.주혜민은 그의 곁을 지켰다.정신을 차린 임상희는 오기석을 죽여버리겠다며 난리를 피웠다.어려서부터 사랑만 받고 자란 임상희는 만만치 않은 성격을 갖고 있었다.그런데 남자한테 배신을 당했으니 당연히 가만히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주혜민은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걱정 마. 널 다치게 한 사람에게 삼촌이 변호사를 보냈어. 그쪽도 발뺌하지 못할 거야.”“변호사가 무슨 소용이야? 그 인간 죽여 버리라니까!”“그냥 감옥에 보내는 걸로는 부족해. 그런 인간은 사회의 악이야. 없애버려야 한다고!”임상희는 아픈 것도 잊고 침상에 누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나상준은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임상희가 주혜민을 밀치며 주혜민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나상준은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주혜민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를 돌아보았다.“죽여? 네가 뭔데 사람을 마음대로 죽인대?”주혜민에게서 손을 뗀 그가 차갑게 말했다.거대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한 마디에 임상희가 입을 다물었다.그녀는 한참 아무 말도 못하고 씩씩거렸다.친척들 중에 그녀가 가장 어려워하는 상대가 나상준이었다.“내가 이렇게 된 거 다 그 자식 때문이란 말이야! 대가를 받게 하는 건 당연하잖아?”임상희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그 인간이 날 배신하고 내 친구랑 붙어먹었어. 그것들 키스하고 호텔까지 갔다고! 생각만 하면 역겨워. 절대 용서 못해!”임상희의 두 눈이 증오로 번뜩였다.잠자코 듣고 있던 주혜민이 인상을 찌푸렸다.“그래서 그런 인간 때문에 자해를 한다고?”나상준은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주혜민은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나상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임상희를 내려다보았다.“그건….”임상희는 말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그 모습을 본 주혜민은 다가가서 임상희의 어깨를 안아주며 말했다.“울지 마.
발신자를 확인하니 차우미였다.익숙한 이름이 눈에 보이자 나상준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전화하기 전, 차우미는 나상준이 다녀가면서 했던 얘기를 숨김없이 하선주에게 털어놓았다.그리고 도움을 받는 게 불편하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하선주도 그녀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혼한 사이인데 자꾸 엮이는 건 좋지 않았다.비록 어쩌다가 차우미가 나상준의 조카를 구하긴 했지만 이 일로 그 집에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다.그래서 하선주는 차우미의 전화로 나상준에게 전화를 걸고 딸의 귓가에 핸드폰을 가져갔다.차우미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차우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그에게 물었다.“지금 바빠?”예전에도 먼저 전화를 걸면 항상 했던 질문이었다.나상준은 창 밖을 바라보며 담담히 대답했다.“아니, 안 바빠.”“그래. 내일 병원 옮기는데 필요한 절차는 우리가 마무리하기로 했어. 더 이상 날 위해 뭘 해줄 필요 없어. 이 말 하려고 전화했어.”“당신 마음은 알겠지만 정말 우연이었고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바쁜 사람인 걸 알기에 차우미는 길게 말하지 않고 용건만 간략해서 전달했다.그리고 말을 마친 그녀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잠시 침묵이 흘렀다.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간호사와 의사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아직 병원을 떠나지는 않은 것 같았다.차우미는 말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차우미, 뭐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가 물었다.차우미는 그 질문에 당황했다.뭘 두려워하냐니?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그게 아니라….”그녀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예전에는 한 번도 이런 식의 질문을 한 적 이 없었다. 병실에 왔을 때도 자신의 생각만 전달했을 뿐, 그녀의 의견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다.차우미는 남자가 뭔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하지만 왜?다시 만났을 때 일반
전화를 끊은 뒤, 나상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그는 싸늘한 눈을 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상준 씨.”주혜민이 그에게 다가왔다.나상준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가자. 뭐라도 좀 먹고 오자. 상희는 이제 괜찮아졌어.”나상준이 말했다.“돌아와서 할 일도 많을 텐데 비행기 티켓 예약해 줄 테니까 청주로 돌아가.”주혜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주혜민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었던 말을 속에 삼켰다.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주먹을 꽉 틀어쥐고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띄운 그녀는 병실로 들어가려는 그의 등을 보며 말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난 은혜 언니 부탁을 받고 여기서 상희를 돌봐주기로 했어. 내가 있는 게 불편하면 은혜 언니한테 얘기해.”나상준은 그 말을 듣고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주혜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차우미.이혼한 사람들끼리 아직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니!조금 전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그녀였다.한편, 차동수와 함께 호텔로 온 온이샘은 뜨거운 물을 끓여 커피를 타고 아까 사온 과일을 씻어 접시에 담았다.모든 일을 마친 뒤에야 그는 차동수에게 말했다.“아저씨,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저 불러요.”차동수는 그런 온이샘의 마음이 고마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이제 필요한 거 없어.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저한테는 사양하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할게요.”차동수는 그런 온이샘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온이샘이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네요.”“자네도 힘들었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아저씨도 편히 쉬세요.”온이샘은 차동수와 연락처를 교환한 뒤에야 밖으로 나갔다.그는
“이번에 우연히 조금 겹쳤어. 상대 여자애가 그쪽 친척일 줄 누가 알았겠어? 우미랑 이혼하고 연락도 안 하던 사이인데 이렇게 되었지 몰라. 자네도 청주 사람이니 NS일가에 대해 잘 알겠지. 우미 전남편이 NS 오너 일가 사람이거든. 그쪽에서 우미가 이번 일로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극구 치료를 책임지겠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병원 옮기는 일은 자네가 나서줄 필요 없다고. 그 말하려고 전화했어.”“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그쪽이랑 더 이상 연락할 일 없으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처음에는 차우미가 잘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하선주는 오히려 자신이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차우미 대신 전화하게 된 것이었다.하선주는 온이샘 같은 남자라면 차우미를 잘 보살펴 줄 거라고 믿었다.그래서 해야 할 말은 정확히 전달하고 싶었다.온이샘이 웃으며 말했다.”아줌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야 안심이죠.”“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끊겠네.”그렇게 통화가 끝났다.온이샘은 착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이 자신을 지지해 주고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그녀의 부모님은 NS일가에 미련이 없고 그를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이제 우미 마음만 돌리면 되겠네.’온이샘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차우미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을 쓸 수 없으니 무료하고 갑갑했다.나상준이 오늘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라 혼란스러웠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혼 전에 비해 사람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예전에는 항상 멀게만 느껴졌는데 오늘 만난 그의 모습은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참 이상한 기분이었다.문이 열리고 하선주가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들어왔다.“봐, 우미 저기 있어.”그러더니 카메라를 차우미에게 비췄다.여가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차우미가 당황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병원에 입원한 일을 여가현에게 알린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연락이 온 걸까?
온이샘은 차우미 앞에 부드럽게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왔다.자기 앞에 서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는 진정으로 차우미가 자기 손이 닿는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온이샘은 빠른 걸음으로 차우미의 앞으로 갔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잠깐 멍해 있었다.햇빛이 강렬한 관계로 그녀는 눈을 찌푸려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온이샘도 차우미의 이런 표정은 처음으로 보았는데 조금은 귀엽고, 또 조금은 매혹적이었다.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제야 눈썹을 흠칫하며 온이샘이 자기 앞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차우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선배,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살게.”차우미가 그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그에게 아침 사준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온이샘이 웃는 것을 본 차우미는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온이샘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다가 헛기침하며 웃음을 꾹 참았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치켜올라갔다.“우미야, 여기는 청주이니 내가 살게.”그의 진지한 표정에 차우미가 웃었다.“알았어. 안평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게.”“약속한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아침 사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온이샘은 특별히 차우미가 이번에 아침을 사주기로 한 것과 기존에 밥 사기로 한 것을 구분해서 강조했다.전에 약속한 것과 지금 약속한 것을 반드시 별도로 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차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차우미가 대답했다.“알았어.”“가자. 내가 먹어 본 중에서 아침을 제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좋아.”온이샘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차우미가 올라타자, 본인도 즉시 운전석에 타고 출발했는데 교통 체증은 여전했다.“오래 기다렸어?”교통 체증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차
나상준이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자기와 같이 안평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흰색 BMW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앞에 멈춰서자, 차우미는 고개를 들었는데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흰색 셔츠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내려왔다.시간은 8시가 넘어서 햇빛이 적당하여 너무 덥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몸 전체를 짱짱하게 따뜻하게 내리 비춰주었다.온이샘이 차에서 내리자 밝은 햇빛이 즉시 그를 감쌌는데 얼굴도 더욱 맑고 우아해졌다. 그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지그시 뜨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차우미를 보고 있었다.그건 만족의 눈빛이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사람으로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진심이라고 하는 데 진심은 분명히 통하게 된다.차우미는 온이샘이 자기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후로는 그 마음이 더 잘 보였다.온이샘은 차우미를 각별히 챙기고 돌봐주었는데 모든 면에서 온이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온이샘은 연인으로도 남편으로도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처음에 차우미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치 못 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은 남자로서 훌륭하고 심지어 나상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미는 만약 이혼한 경력만 없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온이샘과 함께했겠지만, 본인의 상황이 온이샘 인생에 흠집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본인은 자격이 없기에 온이샘은 자기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온이샘은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차우미의 호텔을 향해 달렸는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운전했을 것이다.청주의 7~8시는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이기에 자전거, 스쿠터,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어쩔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
순간 여가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차우미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무력함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현아, 난 괜찮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남은 생을 살면서 다시 결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원래는 선배와 잘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고 나중에 천천히 결혼 생각도 해보려고 했어. 이샘 선배와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선배가 좋으면 좋을수록 내가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선배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늘 선배한테 확실하게 얘기하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당분간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고 결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거야.”어떤 일들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산도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정작 가려면 엄청 멀듯이 말이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바로 그런 가까이에 있는 같지만 사실상 멀고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 같다.여가현은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며 속상해했다.“우미야, 나도 지금 세상이 이혼한 여자한테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현재로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혼을 한 사람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샘 선배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것도 믿어. 너도 이샘 선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인정하잖아. 더 중요한 건 이샘 선배의 마음속에서 너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야.”차우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현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얻지 못한 것은 언제나 좋아 보이는데 정작 얻고 나면 달라질 거라고. 너 그거 알아? 그날 나상준과 같이 예은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선배가 밖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보며 재혼이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왜냐하면 아무리 이전의
여가현은 서류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사인을 하려다가 차우미의 말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할 말이라는 건 뭐야? 무슨 뜻이야? 해야 할 말이 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이샘 선배가 고백하기 전에 네가 먼저 거절하겠다는 거야?”역시 차우미와 함께 자란 사람으로서 차우미의 간단하게 한 말에서 그 의도를 알아챘다.차우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탁!여가현이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거절한다고? 왜? 이틀 동안 나상준 씨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꼬셨는데 이샘 선배를 거절한다는 거야? 차우미,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마!”여가현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반응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이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차우미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의 다급한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렸다.여가현이 말을 다 하고 잠깐 숨을 쉬는 사이에 차우미가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진지하게 말했다.“가현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휴대폰으로 차우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가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래, 우선 진정하자.’차우미는 휴대폰 건너편이 조용해지고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가현아, 상준 씨랑 상관없이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얼마 전에 선배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 이번에 청주에 와서 선배 어머니를 또 뵀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분이셔. 상준 씨의 어머니보다도 엄청 좋았어. 그분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나도 선배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혼했고 선배의 가족과 배경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런
차우미는 스카이빌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거기에서 호텔까지 거리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이샘이 스카이빌리지에서 출발하는지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 놓고 짐을 준비했다.그녀가 모든 짐을 챙겼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익숙한 전화벨 소리에 차우미는 캐리어를 한편에 놓고 손잡이를 거둔 다음 휴대폰을 들었다.휴대폰에서 여가현이라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차우미는 온이샘이 도착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여가현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면서 전화를 받았다.“가현아, 무슨 일이야?.”“이틀 동안 괜찮았어? 나상준 씨가 괴롭히지 않았어? 너 다친 데 없지? 그 아이를 돌봐주는 건 이제 끝난 거야?”휴대폰 건너편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와 함께 여가현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녀는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제야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월요일인데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월요일은 모두에게 바쁜 날이다.“흠! 사실은 어제 너에게 전화하려다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참았어. 어차피 나상준 씨도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감히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까. 만약 나상준 씨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내가 직접 나씨 가문의 어르신을 찾아갈 거야. 그분은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감싸주는 분이 아니니까.”여가현의 말에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상준은 이미 여가현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믿음이라고 전혀 없었다.차우미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한 것 없어. 이틀 동안 나와 같이 나예은과 아주 잘 놀아 줬어. 상준 씨가 예은이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차우미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틀 동안의 나상준은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던 다른 사람이었다.“쳇! 그 아이는 나씨 가문의 아이니 당연히 친절하게 잘해주겠지. 그런데 너는 다르잖아. 너는 이제 나상준 씨의 전처일 뿐이잖아.”차우미는 입술을 살짝
차우미는 온이샘에게 할 일이 끝났다고 아주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었다.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온이샘이 오늘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대화창을 누르고 답변했다.[호텔에 있어.]윙윙.휴대폰 진동소리였는데 또 온이샘의 메시지가 왔다.[알았어. 호텔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온이샘이 오겠다는 말에 차우미는 깜짝 놀랐다.‘선배가 여기로 온다고?’차우미는 고개를 들고 창밖의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났고 청주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여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창밖의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찌그리더니 다시 온이샘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워낙 온이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짐을 정리한 다음 아침 먹으러 가려고 했다.그런데 온이샘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답변을 보내고 호텔까지 온다고 할 줄을 몰랐다.차우미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짐을 정리하면서 온이샘을 기다리기로 했다.스카이빌리지에서 온이샘은 7시에 강서흔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강서흔이 이른 아침에 온이샘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가 청주에 아직 있으면 만나서 차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강서흔의 말투에서 조금 다급하고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온이샘은 강서흔이 정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직 청주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 차우미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 만날지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온이샘은 강서흔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차우미와 식사하기로 한 것까지 모두 말했다.그런데 온이샘의 말을 듣고 강서흔은 더 다급해졌다.‘기다리면 어떡해? 주동적으로 연락해야지.’온이샘의 성격은 온화하고 횡포하지 않기에 차우미를 좋아하더라도 항상 차우미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강서흔은 그런 온이샘을 답답해하며 오늘 무조건 만나야 하니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확정되면 알려달라고 했다.그는 이런 일은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상준의 회사에서 멀지 않아서 20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차우미는 호텔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는 캐리어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방 안은 청소를 해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마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차우미는 차 키와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캐리어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욕실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더니 침대에 앉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때는 이미 매우 늦은 자정 12시 30분이었다.차우미는 오래 전부터 많이 피곤한 걸 애써 참고 있었는데 시간을 확인하자 참았던 피로가 순식간에 확 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하품하고, 휴대폰을 머릿장에 올려놓고 점등한 다음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점등하는 순간부터 방 안에 고요한 밤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우미는 곧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다만 잠들기 전에 그녀의 눈앞에는 오늘 밤 나상준이 예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을 할 때의 신중하고 담담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그의 눈빛 속에 많은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멀리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청주의 밤은 깊어졌고 도시 전체가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도시의 혼잡함과 차들의 경적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새벽 시간이 되자 모두 사라졌다.같은 시각 스카이빌리지 서재에서 온이샘은 안경을 벗고 의자에 기대어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그는 서재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줄곧 일을 했다.겨우 일를 끝내고 눈을 감았는데 조금 지나자, 온몸의 피곤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아 눈을 뜨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니 차우미와의 대화창이 나타났다.차우미는 그가 메시지를 보낸 다음 답장을 했는데 비록 아주 간단한 세 글자였지만 온이샘은 만족했다.온이샘은 다시 한번 차우미의 답장을 확인하고는 위로 올려 서로의 대화들을 훑어보았는데 마음이 두근거렸고 동시에 안정감을 느꼈다.‘주말이 지났으니, 내일은 그 아이도 학교에
하성우는 여전히 담담한 나상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여가현이라고 알지? 며칠 동안 너의 근황을 조사하고 있어. 대체 뭘 잘못해서 여가현에게 조사를 당하는 거야? 어쨌든 변호사이고 이 바닥에서 몇 년 동안 일해서 차우미 씨보다는 더 예민해.”하성우는 비록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그는 여가현이 온이샘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상준에게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나상준은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더니 상관없다는 말투로 말했다.“조사하라고 해.”하성우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하긴, 조사해서 네가 어떤 사람이고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상세하게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여가현이 너를 철저하게 조사해서 이미지를 세탁하면 좋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너한테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잖아. 그래도 너니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지, 나는 절대 안 돼.”하성우는 나상준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뿐더러 자신의 주제 파악도 잘했다.나상준이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그만해.”“뭘 그만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네.”하성우는 나성준의 무의식적으로 던진 한마디에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나상준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나상준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듯 말했다.“나연이가 옆에 있을 때 잘해.”어떤 말은 나상준도 직설적으로 할 수 없었다.그는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상대가 하성우라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게다가 이번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다.“...”하성우는 바로 굳어버렸다.나상준에게 전화한 것은 자기 문제가 아니라 나상준의 문제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불통이 자기한테로 튕길 줄을 생각도 못 했다.하성우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해지자 나상준이 말했다.“나중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