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를 끊은 뒤, 나상준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그는 싸늘한 눈을 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창 밖을 바라보았다.“상준 씨.”주혜민이 그에게 다가왔다.나상준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가자. 뭐라도 좀 먹고 오자. 상희는 이제 괜찮아졌어.”나상준이 말했다.“돌아와서 할 일도 많을 텐데 비행기 티켓 예약해 줄 테니까 청주로 돌아가.”주혜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말을 마친 그는 뒤돌아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주혜민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하고 싶었던 말을 속에 삼켰다.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주먹을 꽉 틀어쥐고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띄운 그녀는 병실로 들어가려는 그의 등을 보며 말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난 은혜 언니 부탁을 받고 여기서 상희를 돌봐주기로 했어. 내가 있는 게 불편하면 은혜 언니한테 얘기해.”나상준은 그 말을 듣고도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주혜민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차우미.이혼한 사람들끼리 아직도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니!조금 전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그녀였다.한편, 차동수와 함께 호텔로 온 온이샘은 뜨거운 물을 끓여 커피를 타고 아까 사온 과일을 씻어 접시에 담았다.모든 일을 마친 뒤에야 그는 차동수에게 말했다.“아저씨,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저 불러요.”차동수는 그런 온이샘의 마음이 고마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 이제 필요한 거 없어. 자네는 최선을 다했어.”“아니에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저한테는 사양하지 말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할게요.”차동수는 그런 온이샘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고마워.”온이샘이 웃으며 말했다.“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안심이네요.”“자네도 힘들었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어.”“아저씨도 편히 쉬세요.”온이샘은 차동수와 연락처를 교환한 뒤에야 밖으로 나갔다.그는
“이번에 우연히 조금 겹쳤어. 상대 여자애가 그쪽 친척일 줄 누가 알았겠어? 우미랑 이혼하고 연락도 안 하던 사이인데 이렇게 되었지 몰라. 자네도 청주 사람이니 NS일가에 대해 잘 알겠지. 우미 전남편이 NS 오너 일가 사람이거든. 그쪽에서 우미가 이번 일로 다쳤다는 얘기를 듣고 극구 치료를 책임지겠다고 해서 말이야. 그래서 병원 옮기는 일은 자네가 나서줄 필요 없다고. 그 말하려고 전화했어.”“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그쪽이랑 더 이상 연락할 일 없으니까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처음에는 차우미가 잘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하선주는 오히려 자신이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차우미 대신 전화하게 된 것이었다.하선주는 온이샘 같은 남자라면 차우미를 잘 보살펴 줄 거라고 믿었다.그래서 해야 할 말은 정확히 전달하고 싶었다.온이샘이 웃으며 말했다.”아줌마가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야 안심이죠.”“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끊겠네.”그렇게 통화가 끝났다.온이샘은 착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이 자신을 지지해 주고 있으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그녀의 부모님은 NS일가에 미련이 없고 그를 무척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이제 우미 마음만 돌리면 되겠네.’온이샘은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에 탔다.차우미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손을 쓸 수 없으니 무료하고 갑갑했다.나상준이 오늘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라 혼란스러웠다.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이혼 전에 비해 사람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예전에는 항상 멀게만 느껴졌는데 오늘 만난 그의 모습은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참 이상한 기분이었다.문이 열리고 하선주가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들어왔다.“봐, 우미 저기 있어.”그러더니 카메라를 차우미에게 비췄다.여가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차우미가 당황한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병원에 입원한 일을 여가현에게 알린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연락이 온 걸까?
말투를 보아 하니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너 온이샘이랑 같이 산에 갔으면서 어떻게 나한테는 한마디도 안 해줄 수 있어? 강서흔 그 자식이 연락 오지 않았더라면 너 다친 것도 몰랐을 거잖아.”서운함이 가득 담긴 말투에 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별로 큰일도 아닌데 뭐 하러 일일이 연락해?”“이게 어떻게 별일이 아니야? 굳이 이혼한 네가 있는 안평으로 가서 도움을 핑계로 같이 산까지 올라갔는데 이걸 정말 우연이라고 생각해?”차우미는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녀가 말이 없자 여가현이 계속해서 말했다.“넌 이런 면에 너무 둔감해. 온이샘이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정말 몰랐어?”차우미는 그 말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말했다.“나는 아닌 것 같아.”그녀는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온이샘을 생각해 본 적 없었다.여가현이 말을 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은 것 같았다.온이샘은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좋은 학벌에 가정 환경, 인품, 어느 것 하나 나무랄데 없는 사람이었다.나상준에 비해도 많이 뒤처지지 않았다.만약 그녀가 결혼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여가현이 그런 말을 했을 때 믿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이미 이혼을 한번 한 사람인데 온이샘이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뛰어난 남자 주변에는 여자들이 넘쳐나기 마련이다.여가현은 그녀의 대답을 듣고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우미야, 넌 네가 얼마나 예쁘고 매력 있는지 정말 모르는 것 같아. 그렇다면 이 언니가 가르쳐주지.”“넌 화목한 가정에서 자랐고 부모님들도 모두 순박하고 좋은 분들이야. 그리고 신체 건강하시고 정당한 직업도 갖고 계시지. 얼핏 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자산도 많이 축적했을 거야. 내 말이 틀려?”“물론 온이샘처럼 타고난 재벌가들이랑은 못 비기지만 평범한 가정은 넘어섰다는 말이야. 그리고 넌 예뻐. 학벌도 최고라고 할 수는 없지만 어디 가서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는 아니잖아?”“게다가 넌 성격도 좋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 이
“그 인간이 어디가 좋다는 거야?”“그 집 어머니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그 인간이 조금이라도 중재를 잘했으면 나도 헤어지지 않았을 거야.”“그런데 그 인간 엄마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더라? 그런 인간을 뭘 믿고 같이 살아?”차우미는 한숨을 내쉬었다.강서흔과 온이샘, 나상준은 비슷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었다.하지만 그나마 자유분방한 NS일가에 비해 강서흔의 가족들은 그가 회사에 도움이 되는 결혼을 하기를 바랐다.그들은 여가현을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고 여가현도 만만한 성격이 아니었다.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지만 결국 결혼까지 가지는 못했다.“아니지. 지금 네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얘기가 왜 나와?”“참, 나 티켓 끊었으니까 내일 안평에 도착할 거야.”“난 다른 일엔 관심 없어. 너랑 온이샘 밀어주려고 가는 거야. 그럼 내일 봐!”여가현은 뭐라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차우미는 꺼진 휴대폰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데도 이 친구는 항상 그녀를 먼저 걱정해 주었다.그녀는 여가현이 했던 말을 다시 곱씹었다.“우리 둘 다 행복해지자. 내가 행복을 못 찾으면 네가 내 몫까지 행복해져야 해.”강서흔과 헤어지기로 결심했을 때 여가현이 했던 말이었다.그때 그녀는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며 이 말을 했었다.옛날 일이 떠오르자 차우미는 여가현이 안쓰러웠다.그녀도 친구가 행복해지기를 바라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안타까웠다.차우미는 어두워진 창 밖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선배가 정말 나한테 그런 마음인 걸까?’다음 날 아침, 온이샘과 차동수가 병원에 도착했다.퇴원 절차를 처리하려면 가족 사인이 필요했다.그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닐 필요 없이 의료진이 서류를 병실까지 가져다주었다.차우미네 집 근처에 있는 안평 병원은 안평에서 가장 좋은 대학병원이었다.온이샘이 어제 그녀를 대신해 알아봐준 병원이기도 했다.하지만 주치의가 바뀌었다.온이샘은 안평 병원에서 화상
차우미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문밖에는 V넥 티셔츠에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긴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서 있었다.주혜민이었다.나상준이 3년이나 잊지 못한 사람.차우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주혜민은 과일바구니와 꽃다발을 들고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를 잠시 바라보았다.임상희의 은인을 만나려고 아침 일찍 선물까지 사들고 찾아왔는데 그 상대가 차우미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주혜민은 잠시 차우미를 관찰했다. 긴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여자.주혜민은 붕대를 감은 그녀의 손을 보고 뒤로 물러서서 병실 번호를 확인하더니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잘못 찾아온 건 아닌 것 같네요.”주혜민은 꽃다발과 과일바구니를 들고 차우미에게 다가왔다.차우미는 담담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만 볼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병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상준 씨가 바빠서 비교적 한가한 제가 대신 왔어요. 상희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말을 마친 주혜민은 꽃다발을 차우미에게 건넸다.그리고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마치, 진심으로 차우미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차우미는 대놓고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에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해요.”말을 마친 그녀가 붕대를 감은 손을 내밀었다.주혜민은 그제야 깜빡했다는 듯이 사죄의 말을 건넸다.“죄송해요. 손이 불편한 걸 깜빡했네요.”상황을 조용히 지켜보던 하선주가 말했다.“저한테 주세요.”주혜민은 말없이 꽃과 과일바구니를 하선주에게 건넸다.차우미는 3년 만에 더 예뻐진 여자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주혜민은 그녀와 나상준의 결혼식에 참석했었다. 물론 그때는 그녀가 나상준이 마음에 품은 여자라는 것을 까맣게 몰랐다.그래서 그때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과 아련한 그녀의
차동수도 다가오며 말했다.“가자, 우미야.”차우미는 부모님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분노한 그들의 표정을 보아 하니 이제 숨길 수 없을 것 같았다.“알았어, 아빠.”차우미는 주혜민에게 눈인사를 한 뒤, 차동수를 따라 병실을 나갔다.담당자도 그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하선주는 꽃과 과일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주혜민에게 말했다.“아가씨, 다신 여기 찾아오지 마. 아가씨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아가씨가 좋아하는 그 사람, 우린 관심 없으니까 우리한테 그런 말할 필요 없어.”하선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일부러 나타나서 딸의 아픈 곳을 건드린 여자가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말을 마친 하선주는 그대로 병실을 나가버렸다.병실 밖, 온이샘은 복도에서 통화 중이었다.여가현은 안평에 도착했다며 그에게 구체적인 위치를 물었다.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안평 병원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해주었다.전화를 끊자마자 강서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여가현이 안평에 도착했는지 묻는 전화였다.그녀가 안평에 왔다는 얘기에 강서흔은 자신도 지금 출발하겠다고 알려왔다.온이샘은 친구가 아직 여가현을 놓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에 이번 기회에 잘해보라고 했다.“친구야, 만약 우리 넷이 같은 날 결혼식을 올리면 정말 장관일 것 같아!”강서흔이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말했다.생각은 참 그럴싸하지만 그게 과연 가능할까?온이샘은 친구에게 실망을 주기 싫어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알았어. 우리 출발해야 하니까 여기까지만 하자.”“그래! 도착하면 연락할게!”드디어 전화를 끊은 온이샘은 급하게 차우미 가족들을 쫓아갔다.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일가족 표정이 좋지 않았다.하선주는 아예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차우미와 차동수의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았다.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그는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참기로 했다.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일행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병실에 남은 주혜민은 떠나는 그들
검은색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나상준이 차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가 직접 왔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차우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지금 같이 이동하겠다는 건가?“우미야, 왜 그래?”하선주는 그녀가 움직임이 없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주혜민이 찾아온 일도 마음에 내려가지 않았는데 제대로 이야기할 기회도 없어 딸이 안타깝기만 했다.애지중지 키운 딸이 다른 사람에게 그런 취급을 당했을 것을 생각하니 괴롭기 그지없었다.차우미는 정신을 차리고 여전히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별거 아니야.”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차에 올랐다.이 시점에서 부모님에게 나상준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담당자는 차 문을 닫아주고 하선주 부부에게 말했다.“두 분은 뒤에 타시면 됩니다.”하선주는 차우미와 같이 타고 싶었지만 도움 받는 입장에 뭐라고 하기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뒷차를 타고 온이샘은 자신의 차로 가서 시동을 걸었다.온이샘은 차를 운전해 벤츠가 가는 방향으로 차를 꺾었다.창 밖으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출근 인파가 보였다. 창밖은 무척 시끄러웠지만 차우미가 탄 차량에는 무거운 정적만 흐를 뿐이었다.차우미는 여전히 서류에 파묻혀 있는 남자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는 이혼 전과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였다.여전히 일을 사랑하고 한번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차우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이혼한 뒤로 다시는 만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런 우연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게다가 그 여자가 그를 따라왔을 줄은 더욱 예상 밖이었다.하지만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결혼하고 3년 동안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떤 스킨십도 없었다.주혜민의 존재를 알기 전에는 그가 일을 사랑해서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그런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하지만 주혜민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는 생각이 바뀌었다.그는 사랑할 줄 모르는
긴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차우미의 모습은 생소하면서도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평소에 그녀는 머리를 깔끔하게 하나로 묶거나 올림 머리를 많이 했지 긴 머리를 그대로 풀어헤친 적은 별로 많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워낙 시간이 급박해서 머리를 묶는 대신 그대로 늘어뜨리는 스타일을 택했다. 귀로 빗어 넘긴 머리 사이로 그녀의 하얀 볼과 귀걸이 없는 작은 귓불이 보였다.그녀는 평소에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중요한 자리에 갈 때만 귀걸이를 착용하고는 했다.그녀에게서는 항상 샘물을 닮은 청량하고 수수한 향기가 풍기고는 했다.나상준은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입을 열었다.“필요한 거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차우미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지금… 나랑 얘기한 건가?’나상준은 생후 한 병을 따서 마시려다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목 말라? 물 마실래?”말을 마친 그는 생수병을 그녀에게 건넸다.차우미의 눈빛에는 의아함이 스쳤다.그녀가 기억하는 나상준은 자상한 사람은 아니었다.정확히 말하면 그는 자상함이나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그녀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한 뒤로 그에게 변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목 안 말라. 상준 씨 마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그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데 아무렇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누굴 좋아하든 그의 자유였고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 그녀가 통제할 수는 없었다.변화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초라해지기 싫어서 신경 끄고 살았을 뿐이었다.누구에게나 각자의 인생이 있고 이혼한다고 꼭 슬픔에 빠져 살아야 하는 건 아니었다.그녀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가 있고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웠다.나상준은 잔잔한 미소를 띤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전방으로 시선을 돌리고 물을 마셨다.청량감이 목을 적시자 기분이 조금 좋아진 것도 같았다.그렇게 둘은 아무런
온이샘은 차우미 앞에 부드럽게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왔다.자기 앞에 서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는 진정으로 차우미가 자기 손이 닿는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온이샘은 빠른 걸음으로 차우미의 앞으로 갔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잠깐 멍해 있었다.햇빛이 강렬한 관계로 그녀는 눈을 찌푸려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온이샘도 차우미의 이런 표정은 처음으로 보았는데 조금은 귀엽고, 또 조금은 매혹적이었다.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제야 눈썹을 흠칫하며 온이샘이 자기 앞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차우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선배,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살게.”차우미가 그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그에게 아침 사준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온이샘이 웃는 것을 본 차우미는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온이샘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다가 헛기침하며 웃음을 꾹 참았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치켜올라갔다.“우미야, 여기는 청주이니 내가 살게.”그의 진지한 표정에 차우미가 웃었다.“알았어. 안평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게.”“약속한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아침 사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온이샘은 특별히 차우미가 이번에 아침을 사주기로 한 것과 기존에 밥 사기로 한 것을 구분해서 강조했다.전에 약속한 것과 지금 약속한 것을 반드시 별도로 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차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차우미가 대답했다.“알았어.”“가자. 내가 먹어 본 중에서 아침을 제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좋아.”온이샘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차우미가 올라타자, 본인도 즉시 운전석에 타고 출발했는데 교통 체증은 여전했다.“오래 기다렸어?”교통 체증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차
나상준이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자기와 같이 안평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흰색 BMW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앞에 멈춰서자, 차우미는 고개를 들었는데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흰색 셔츠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내려왔다.시간은 8시가 넘어서 햇빛이 적당하여 너무 덥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몸 전체를 짱짱하게 따뜻하게 내리 비춰주었다.온이샘이 차에서 내리자 밝은 햇빛이 즉시 그를 감쌌는데 얼굴도 더욱 맑고 우아해졌다. 그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지그시 뜨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차우미를 보고 있었다.그건 만족의 눈빛이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사람으로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진심이라고 하는 데 진심은 분명히 통하게 된다.차우미는 온이샘이 자기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후로는 그 마음이 더 잘 보였다.온이샘은 차우미를 각별히 챙기고 돌봐주었는데 모든 면에서 온이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온이샘은 연인으로도 남편으로도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처음에 차우미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치 못 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은 남자로서 훌륭하고 심지어 나상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미는 만약 이혼한 경력만 없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온이샘과 함께했겠지만, 본인의 상황이 온이샘 인생에 흠집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본인은 자격이 없기에 온이샘은 자기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온이샘은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차우미의 호텔을 향해 달렸는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운전했을 것이다.청주의 7~8시는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이기에 자전거, 스쿠터,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어쩔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
순간 여가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차우미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무력함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현아, 난 괜찮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남은 생을 살면서 다시 결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원래는 선배와 잘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고 나중에 천천히 결혼 생각도 해보려고 했어. 이샘 선배와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선배가 좋으면 좋을수록 내가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선배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늘 선배한테 확실하게 얘기하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당분간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고 결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거야.”어떤 일들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산도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정작 가려면 엄청 멀듯이 말이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바로 그런 가까이에 있는 같지만 사실상 멀고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 같다.여가현은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며 속상해했다.“우미야, 나도 지금 세상이 이혼한 여자한테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현재로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혼을 한 사람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샘 선배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것도 믿어. 너도 이샘 선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인정하잖아. 더 중요한 건 이샘 선배의 마음속에서 너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야.”차우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현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얻지 못한 것은 언제나 좋아 보이는데 정작 얻고 나면 달라질 거라고. 너 그거 알아? 그날 나상준과 같이 예은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선배가 밖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보며 재혼이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왜냐하면 아무리 이전의
여가현은 서류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사인을 하려다가 차우미의 말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할 말이라는 건 뭐야? 무슨 뜻이야? 해야 할 말이 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이샘 선배가 고백하기 전에 네가 먼저 거절하겠다는 거야?”역시 차우미와 함께 자란 사람으로서 차우미의 간단하게 한 말에서 그 의도를 알아챘다.차우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탁!여가현이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거절한다고? 왜? 이틀 동안 나상준 씨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꼬셨는데 이샘 선배를 거절한다는 거야? 차우미,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마!”여가현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반응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이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차우미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의 다급한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렸다.여가현이 말을 다 하고 잠깐 숨을 쉬는 사이에 차우미가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진지하게 말했다.“가현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휴대폰으로 차우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가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래, 우선 진정하자.’차우미는 휴대폰 건너편이 조용해지고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가현아, 상준 씨랑 상관없이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얼마 전에 선배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 이번에 청주에 와서 선배 어머니를 또 뵀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분이셔. 상준 씨의 어머니보다도 엄청 좋았어. 그분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나도 선배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혼했고 선배의 가족과 배경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런
차우미는 스카이빌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거기에서 호텔까지 거리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이샘이 스카이빌리지에서 출발하는지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 놓고 짐을 준비했다.그녀가 모든 짐을 챙겼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익숙한 전화벨 소리에 차우미는 캐리어를 한편에 놓고 손잡이를 거둔 다음 휴대폰을 들었다.휴대폰에서 여가현이라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차우미는 온이샘이 도착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여가현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면서 전화를 받았다.“가현아, 무슨 일이야?.”“이틀 동안 괜찮았어? 나상준 씨가 괴롭히지 않았어? 너 다친 데 없지? 그 아이를 돌봐주는 건 이제 끝난 거야?”휴대폰 건너편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와 함께 여가현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녀는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제야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월요일인데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월요일은 모두에게 바쁜 날이다.“흠! 사실은 어제 너에게 전화하려다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참았어. 어차피 나상준 씨도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감히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까. 만약 나상준 씨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내가 직접 나씨 가문의 어르신을 찾아갈 거야. 그분은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감싸주는 분이 아니니까.”여가현의 말에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상준은 이미 여가현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믿음이라고 전혀 없었다.차우미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한 것 없어. 이틀 동안 나와 같이 나예은과 아주 잘 놀아 줬어. 상준 씨가 예은이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차우미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틀 동안의 나상준은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던 다른 사람이었다.“쳇! 그 아이는 나씨 가문의 아이니 당연히 친절하게 잘해주겠지. 그런데 너는 다르잖아. 너는 이제 나상준 씨의 전처일 뿐이잖아.”차우미는 입술을 살짝
차우미는 온이샘에게 할 일이 끝났다고 아주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었다.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온이샘이 오늘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대화창을 누르고 답변했다.[호텔에 있어.]윙윙.휴대폰 진동소리였는데 또 온이샘의 메시지가 왔다.[알았어. 호텔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온이샘이 오겠다는 말에 차우미는 깜짝 놀랐다.‘선배가 여기로 온다고?’차우미는 고개를 들고 창밖의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났고 청주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여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창밖의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찌그리더니 다시 온이샘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워낙 온이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짐을 정리한 다음 아침 먹으러 가려고 했다.그런데 온이샘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답변을 보내고 호텔까지 온다고 할 줄을 몰랐다.차우미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짐을 정리하면서 온이샘을 기다리기로 했다.스카이빌리지에서 온이샘은 7시에 강서흔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강서흔이 이른 아침에 온이샘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가 청주에 아직 있으면 만나서 차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강서흔의 말투에서 조금 다급하고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온이샘은 강서흔이 정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직 청주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 차우미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 만날지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온이샘은 강서흔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차우미와 식사하기로 한 것까지 모두 말했다.그런데 온이샘의 말을 듣고 강서흔은 더 다급해졌다.‘기다리면 어떡해? 주동적으로 연락해야지.’온이샘의 성격은 온화하고 횡포하지 않기에 차우미를 좋아하더라도 항상 차우미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강서흔은 그런 온이샘을 답답해하며 오늘 무조건 만나야 하니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확정되면 알려달라고 했다.그는 이런 일은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상준의 회사에서 멀지 않아서 20분 만에 호텔에 도착했다.차우미는 호텔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고는 캐리어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방 안은 청소를 해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마치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차우미는 차 키와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캐리어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욕실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더니 침대에 앉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때는 이미 매우 늦은 자정 12시 30분이었다.차우미는 오래 전부터 많이 피곤한 걸 애써 참고 있었는데 시간을 확인하자 참았던 피로가 순식간에 확 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하품하고, 휴대폰을 머릿장에 올려놓고 점등한 다음 바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점등하는 순간부터 방 안에 고요한 밤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우미는 곧바로 꿈속으로 들어갔다.다만 잠들기 전에 그녀의 눈앞에는 오늘 밤 나상준이 예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던 말을 할 때의 신중하고 담담하던 모습들이 떠올랐다.그의 눈빛 속에 많은 것이 숨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서 멀리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청주의 밤은 깊어졌고 도시 전체가 잠이 든 것 같았는데 도시의 혼잡함과 차들의 경적 그리고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새벽 시간이 되자 모두 사라졌다.같은 시각 스카이빌리지 서재에서 온이샘은 안경을 벗고 의자에 기대어 피곤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감았다.그는 서재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줄곧 일을 했다.겨우 일를 끝내고 눈을 감았는데 조금 지나자, 온몸의 피곤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아 눈을 뜨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시간을 확인하고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니 차우미와의 대화창이 나타났다.차우미는 그가 메시지를 보낸 다음 답장을 했는데 비록 아주 간단한 세 글자였지만 온이샘은 만족했다.온이샘은 다시 한번 차우미의 답장을 확인하고는 위로 올려 서로의 대화들을 훑어보았는데 마음이 두근거렸고 동시에 안정감을 느꼈다.‘주말이 지났으니, 내일은 그 아이도 학교에
하성우는 여전히 담담한 나상준의 목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여가현이라고 알지? 며칠 동안 너의 근황을 조사하고 있어. 대체 뭘 잘못해서 여가현에게 조사를 당하는 거야? 어쨌든 변호사이고 이 바닥에서 몇 년 동안 일해서 차우미 씨보다는 더 예민해.”하성우는 비록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그는 여가현이 온이샘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상준에게는 절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나상준은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더니 상관없다는 말투로 말했다.“조사하라고 해.”하성우가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하긴, 조사해서 네가 어떤 사람이고 옆에 다른 여자가 있는지, 없는지 제대로 상세하게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번 기회에 여가현이 너를 철저하게 조사해서 이미지를 세탁하면 좋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너한테 불리한 것을 유리하게 바꿀 수도 있잖아. 그래도 너니까 그렇게 당당할 수 있지, 나는 절대 안 돼.”하성우는 나상준을 아무리 조사해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을뿐더러 자신의 주제 파악도 잘했다.나상준이 눈썹을 치켜들며 말했다.“그만해.”“뭘 그만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네.”하성우는 나성준의 무의식적으로 던진 한마디에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나상준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나상준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는데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는 듯 말했다.“나연이가 옆에 있을 때 잘해.”어떤 말은 나상준도 직설적으로 할 수 없었다.그는 다른 사람의 연애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상대가 하성우라서 한마디 했을 뿐이다.게다가 이번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다.“...”하성우는 바로 굳어버렸다.나상준에게 전화한 것은 자기 문제가 아니라 나상준의 문제를 얘기하려고 했는데 갑작스럽게 불통이 자기한테로 튕길 줄을 생각도 못 했다.하성우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안 하고 조용해지자 나상준이 말했다.“나중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