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토론회에서 엄마의 부검 소견을 듣고 난 후 참석한 경찰관들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내가 하도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얼굴을 대조할 수가 없었고 시신이 버려진 폐건물은 처음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도 아니었기에 사건 해결의 어려움이 커졌다.아빠는 경찰관들에게 시신 유기 장소 인근으로 가서 수상한 사람의 단서가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법의관들은 수고스러운 대로 다시 한번 시체를 살펴보고 새롭게 나온 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추출한 DNA를 가능한 한 빨리 보내서 검사해 보세요.”아빠는 엄마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서둘러 팀원들을 따라 나갔다.엄마와 아빠는 내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지극한 관심을 내 시체에 돌렸다.엄마는 임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법의학자는 죽은 자를 대변할 수 있는 멋진 직업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임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다가 엄마가 돌아서자 싫은 기색으로 머리를 닦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날 난 임설아의 뺨을 때렸고 아빠는 벌로 내 머리를 밀었다.그리고 지금, 엄마는 다소 마음이 아픈 듯 시체가 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이렇게 처참하게 죽어서 가족들이 얼마나 슬플까.”나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 가족들은 내가 죽으면 무척 기뻐하겠지, 기껏해야 오빠 혼자 슬퍼하려나.엄마의 장갑 낀 손이 내 등을 스쳤고 거기엔 납치된 후 생긴 큰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집으로 돌아온 뒤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 엄마는 놀라면서도 다소 불쾌한 듯 말했다.“등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 역겨워 죽겠네. 설아 놀라게 하지 마.”혹시 엄마가 이 흉터로 날 알아보는 걸까?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긴장한 탓에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이윽고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번에 생긴 게 아니야.”조수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법의관님, 고인 배 속에 종이가 있어요!”엄마는 커다란 눈으로 종이를 집어 들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위산에 부식됐네. 나중에 국과수에 보내서 분석해 보자.”
임설아에게 일찍 쉬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 엄마는 오빠의 전화를 받았다.“임설우, 너 출장은 언제 끝나? 네 동생이 대회 보러 오길 기다리고 있어!” 오빠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엄마가 다급하게 물었다.내가 집으로 돌아오던 날 부모님은 울고 있는 임설아와 함께 집에 계셨고 오빠만이 내 손을 잡고 겁내지 말라며 집으로 데려다주었다.내가 집에서 느낀 유일한 온기는 오빠가 건넨 다정함이었다.전화기 너머 멈칫한 오빠가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유설이 올림피아드요? 그거 다음 달인데...”엄마는 화를 내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유설이 유설이, 설아야말로 너와 몇 년을 같이 지낸 동생이잖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엄유설은 남의 손에서 자란 애라 우리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고!”오빠는 나에 대한 엄마의 악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엄마, 너무 설아 말만 듣지 마세요. 유설이가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 애인지 평소에 관심 좀만 기울이면 보이실 거예요. 아까 유설이한테 전화했는데도 안 받고 이틀째 답장도 없는데 집에 없어요?”엄마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무심하게 말했다.“사지 멀쩡한 애를 내가 끌고 오기라도 해야 하니? 또 밖에 싸돌아 다니는 거겠지. 내일 설아 테니스 대회인데 넌 못 오면 관둬.”잠시 멈칫하던 엄마가 독한 말을 덧붙였다.“유설이한테 죽은 척 그만하고 내일 설아 테니스 대회 보러 안 갈 거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해. 아무튼 우리 집에 그런 애는 없으면 더 좋으니까!”전화기 너머로 나 대신 해명하는 오빠의 말을 무치한 채 그녀는 무심하게 전화를 끊었다.마침 팀을 이끌고 돌아오던 아빠가 화난 표정의 엄마를 보고 물었다.“시체가 다루기 까다로워?”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엄유설 때문이지. 또 설우한테 전화해서 일러바쳤나 봐. 오빠랑 같이 실종 놀이라도 하려나 봐.”아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우리가 일 때문에 바쁜 걸 알면서도 이런 쓸데없는 장난을 치다니, 정말 철이 없네! 당장 전화해서 혼내야겠어
엄마는 위산에 부식된 종이를 수사관에게 건네주었고 다소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아빠에게 말했다.“이 종이가 도움이 되길 바라. 설아한테 집 문 잠그라고 말해줬어?”아빠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소 망설이며 말했다.“여보, 엄유설이 전화도 안 받고 설우 문자도 답장 안 한다는 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내가 사람 보내서 한번...”엄마는 짜증스럽게 말을 가로챘다.“그만해, 걔를 아직도 몰라? 숨어서 우리가 찾기만 기다리고 있잖아. 이런 일 한두 번이야? 설아 대회 보러 가기 싫어서 저러는 거야. 적어도 내일 저녁이면 울면서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연락할 거야.”내가 지난번에 사라진 건 여름방학 때 임설아가 화장실에 가뒀기 때문이었다.방학이라 학교는 텅 비어 있었고 도와달라는 내 외침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온 힘을 다해 밖으로 나온 나는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쓴 채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갔고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빠의 따귀와 엄마의 화난 꾸중이었다.“설아 말로는 네가 양아치 놈이랑 모텔로 들어갔다던데? 내가 어떻게 너 같은 걸 낳았을까!”나는 할 말을 잃고 임설아가 능청스럽게 웃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오빠는 약을 발라주면서 부드럽게 다독였다.“엄마 아빠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와 잘 지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야.”하지만 나는 똑똑하고 영리한 임설아에 비해 말수가 적은 내가 엄마 아빠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애정의 저울은 항상 부모님이 더 사랑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안타깝게도 그 상대는 내가 아니었다.내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부모님이 일로 바빠서 집에 돌아오지 못할 때 국이라도 끓여 경찰서로 가져다주려 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부모님의 생각처럼 나타나서 사과하지는 못할 것 같다.난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조사과에서 알아본 결과 종이는 쇼핑 영수증이었고 범인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그 종이를 내 입에 밀어 넣으며 삼키라고 강요했다.“부모님을 위해 산 거야? 그 사람들이 받았어
엄마는 무언가 예감한 듯 아빠의 팔을 꽉 움켜잡고 있었고 손톱이 그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사망자는 법의관님 딸 엄유설 씨입니다.”엄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엄유설? 어떻게 걔가...”아빠는 엄마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꼭 안아주었고 팀에 경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형사님, 범죄 현장이 발견됐는데 폐건물 근처 자택이랍니다.”아빠는 단호하게 말했다.“일단 현장부터 가보자, 감식과에서 실수한 게 틀림없어.”경찰차에서 거듭 내 번호로 연락을 걸었고 아빠는 다른 곳에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운전하며 위로를 건넸다.“겁내지 마. 엄유설이 경찰서로 가서 감식과와 짜고 우릴 속이는 걸지도 몰라.”이런 일을 꾸며낼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이게 무슨 느낌일까, 독사가 내 몸을 감싸는 것처럼 질식할 것 같았다.자택에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심지어 몇몇은 위조 신분증을 가지고 있어서 경찰의 수색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엄마와 아빠가 도착했을 때 집 앞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고 문이 열리자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진동했다.침대 시트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벽과 바닥은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영혼이 된 지금도 죽기 전에 당한 고문을 생각하면 몸이 떨렸다.내가 끌려가던 날 임설아가 나한테 연락했었다.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는데 내일 경기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했다.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가격했고 눈을 가린 천을 걷어냈을 때 임설아와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임설아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내가 얘를 유인했으니까 약속대로 날 보내줘. 난 그 두 늙은이 상대하러 가야 해.”남자는 그 말에 뺨을 몇 번 씰룩거리더니 능글맞게 손을 흔들었다. “입단속 잘해.”임설아는 뒤돌아 떠나며 코웃음 쳤다.“이 문만 나서면 우리는 만난 적도
수사관도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임 형사, 아내와 먼저 경찰서로 돌아가. 부대장과 내가 수사에 진전이 보이면 연락할게.”그러나 엄마는 못 들은 척 장갑 낀 손으로 바닥에 묻은 혈흔을 쓸었다.“유설이가 얼마나 아팠을까.”경찰관들은 이미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고 부모님은 넋을 잃은 채 차에 탔다.영혼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둘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시큰거렸다.집에 돌아오고부터 죽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부모님이 유설이라고 부르는 걸 듣지 못했다.검사과 이지영이 검사 결과를 아빠에게 내밀면서 동정 어린 눈빛으로 넋이 나간 엄마를 슬쩍 보았다.“임 형사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아빠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보고서를 꼼꼼히 넘기며 이름을 반복해서 확인했다.한참 후, 그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이지영이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아빠의 어깨를 두드렸다.“임 형사님, 범죄 현장도 이미 확인했고 시신은 부검실에 있어요. 가짜일 리가 없죠.”엄마는 갑자기 앞으로 돌진하며 검시 보고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아까 시신에서 빼낸 반지를 뒤적거렸다.반지 안쪽에 희미하게 새겨진 내 이름 알파벳을 바라보며 엄마의 눈물이 투명한 증거물 봉투 위로 뚝뚝 떨어졌다.경찰서 사람들은 처음에 반지에 새겨진 이름이 시신의 이름이라고 분석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임 씨 저택으로 돌아온 뒤 돌려받길 바라던 이름이었다.아빠는 엄마를 부축하며 힘겹게 걸음을 옮겨 부검실로 들어갔다.끔찍하게 훼손된 내 시신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울림이 목구멍으로 새어 나왔다.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왜 아파하는 거지?분명 내가 떠나길 고대했으면서.내 등에 있는 화상 흉터를 쓰다듬는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유설아, 엄마가 왜 이런 곳에서 너랑 만나게 됐을까. 네가 처음 집에 왔을 때는 말괄량이처럼 까맣고 말라서 앞으로 네 아빠랑 너 살 통통하게 찌우겠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나쁜 짓 하는 네
내 죽음을 알게 된 오빠는 끝내지 못한 출장을 뒤로하고 서둘러 돌아왔다.오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빠는 무거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눈에는 고통이 가득했다.그 옆에는 눈물을 흘리는 임설아가 있었는데 두 눈은 울어서 붉게 물들고 코끝이 붉어져 있었다.“오빠, 드디어 왔네요. 언니가 죽었어요! 범인은 아직 못 잡았어요. 언니가 평소에 사람들에게 밉보이는 행동을 많이 했는데 이번엔 혹시...”아빠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만해! 이 사건의 범인은 이미 확정되었고 경찰이 총출동해서 잡고 있어. 네 언니와 그놈은 아무 접점이 없어.”말하며 그는 엄마와 서로를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살인범이 동생을 데려간 것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와 아빠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기 직전이었다.그들이 가장 싫어했던 딸이 그들 때문에 죽었다.이 말을 들은 임설아의 눈에 긴장감이 역력했고 그녀는 치마를 꽉 움켜쥐며 이마에 식은땀을 떨구었다.“이렇게 빨리 범인을 찾았어요? 그럼 언니를 왜 죽인 거예요?”엄마가 그림자가 드리운 눈으로 초췌하게 입을 열었다.“설아야, 엄마 아빠가 네 경기를 보러 가지 못해서 대회에 영향을 줬네. 미안해.”오빠가 콧방귀를 뀌었다.“유설이가 평생 돌아오길 바라겠죠. 슬픈 기색이 하나도 없잖아요.”임설아는 불쌍한 눈빛으로 오빠를 보고는 엄마의 품에 파고들었다.“오빠, 언니와 피를 나눈 남매인 건 알지만 언니의 죽음으로 나한테 화풀이하진 마요. 내가 꼭 언니 몫까지 엄마 아빠 잘 모실게요!”엄마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엄마가 나를 위해 우는 모습에 풀린 내 마음이 감동적이면서도 아팠는데 임설아를 옹호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임설아는 나를 심연으로 밀어 넣었고 내 죽음을 초래한 공범이었다.살아있을 때는 엄마가 임설아의 거짓말을 알아채고 나를 부드럽게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젠 사실을 알고 난 뒤 부모님의 반응만 기대되었다.아
임설아는 객석에 있는 엄마, 아빠, 오빠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내가 없으면 자신이 가족들의 애정을 독차지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중간 휴식 시간이 되자 임설아는 애교를 부리며 아빠의 팔짱을 감쌌다.“엄마, 아빠, 오빠, 와줘서 너무 기뻐요.”시상대에 오른 임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가족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앞으로도 엄마 아빠의 자랑이자 오빠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되고 싶어요!”자랑스러워하는 임설아를 보며 나는 왠지 역겨움을 느꼈다.내 아픔을 딛고 서서 행복해하는 모습이라니.임설아는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으면서 왜 본인은 박수 속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는 걸까.객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전에 언니가 죽었다며, 참 안쓰러우면서도 대단해.”“쟤 언니는 공부도 못하는 양아치야. 바람피우다가 남자한테 죽었다던데.”임설아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만족스러운 듯 더욱 찬란하게 웃었다. 날 죽인 승리의 미소 같았다.그런데 갑자기 여러 명의 경찰이 나타났고 미소가 굳어진 임설아에게 다가갔다.“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난 이번 대회 우승자라고요!”오빠가 피식거렸다.“너 잡으러 온 거 맞아. 우승자도 더러운 속셈은 숨길 수 없는 거지.”임설아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빛날 때 그녀의 추악한 본색이 드러났다.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부릅떴다.“증거 있어? 아빠, 엄마 살려줘요, 오빠가 미쳤어요!”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지막이 물었다.“안우진이 녹음 펜을 넘겼고 우린 이미 네가 했던 말 다 들었어.”임설아가 날 죽이라는 말도, 부모님을 두 늙은이라고 한 말까지 전부 녹음되어 있었다.안우진은 장난스럽게 녹음기가 숨겨져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내가 왜 그 여자를 놔줬는지 알아? 너희가 애지중지 키운 가짜 딸이 너희 딸을 죽였으니까, 너희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었어!”임설아는 그 말에 잿빛이 된 얼굴
임설아는 객석에 있는 엄마, 아빠, 오빠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내가 없으면 자신이 가족들의 애정을 독차지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중간 휴식 시간이 되자 임설아는 애교를 부리며 아빠의 팔짱을 감쌌다.“엄마, 아빠, 오빠, 와줘서 너무 기뻐요.”시상대에 오른 임설아는 미소를 지으며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해맑게 웃었다.“가족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앞으로도 엄마 아빠의 자랑이자 오빠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 되고 싶어요!”자랑스러워하는 임설아를 보며 나는 왠지 역겨움을 느꼈다.내 아픔을 딛고 서서 행복해하는 모습이라니.임설아는 나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으면서 왜 본인은 박수 속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는 걸까.객석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얼마 전에 언니가 죽었다며, 참 안쓰러우면서도 대단해.”“쟤 언니는 공부도 못하는 양아치야. 바람피우다가 남자한테 죽었다던데.”임설아는 수군거리는 소리에 만족스러운 듯 더욱 찬란하게 웃었다. 날 죽인 승리의 미소 같았다.그런데 갑자기 여러 명의 경찰이 나타났고 미소가 굳어진 임설아에게 다가갔다.“사람 잘못 보신 것 같은데? 난 이번 대회 우승자라고요!”오빠가 피식거렸다.“너 잡으러 온 거 맞아. 우승자도 더러운 속셈은 숨길 수 없는 거지.”임설아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빛날 때 그녀의 추악한 본색이 드러났다.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두 눈을 부릅떴다.“증거 있어? 아빠, 엄마 살려줘요, 오빠가 미쳤어요!”엄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나지막이 물었다.“안우진이 녹음 펜을 넘겼고 우린 이미 네가 했던 말 다 들었어.”임설아가 날 죽이라는 말도, 부모님을 두 늙은이라고 한 말까지 전부 녹음되어 있었다.안우진은 장난스럽게 녹음기가 숨겨져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내가 왜 그 여자를 놔줬는지 알아? 너희가 애지중지 키운 가짜 딸이 너희 딸을 죽였으니까, 너희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었어!”임설아는 그 말에 잿빛이 된 얼굴
내 죽음을 알게 된 오빠는 끝내지 못한 출장을 뒤로하고 서둘러 돌아왔다.오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와 아빠는 무거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눈에는 고통이 가득했다.그 옆에는 눈물을 흘리는 임설아가 있었는데 두 눈은 울어서 붉게 물들고 코끝이 붉어져 있었다.“오빠, 드디어 왔네요. 언니가 죽었어요! 범인은 아직 못 잡았어요. 언니가 평소에 사람들에게 밉보이는 행동을 많이 했는데 이번엔 혹시...”아빠가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만해! 이 사건의 범인은 이미 확정되었고 경찰이 총출동해서 잡고 있어. 네 언니와 그놈은 아무 접점이 없어.”말하며 그는 엄마와 서로를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살인범이 동생을 데려간 것에 대한 복수를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엄마와 아빠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하기 직전이었다.그들이 가장 싫어했던 딸이 그들 때문에 죽었다.이 말을 들은 임설아의 눈에 긴장감이 역력했고 그녀는 치마를 꽉 움켜쥐며 이마에 식은땀을 떨구었다.“이렇게 빨리 범인을 찾았어요? 그럼 언니를 왜 죽인 거예요?”엄마가 그림자가 드리운 눈으로 초췌하게 입을 열었다.“설아야, 엄마 아빠가 네 경기를 보러 가지 못해서 대회에 영향을 줬네. 미안해.”오빠가 콧방귀를 뀌었다.“유설이가 평생 돌아오길 바라겠죠. 슬픈 기색이 하나도 없잖아요.”임설아는 불쌍한 눈빛으로 오빠를 보고는 엄마의 품에 파고들었다.“오빠, 언니와 피를 나눈 남매인 건 알지만 언니의 죽음으로 나한테 화풀이하진 마요. 내가 꼭 언니 몫까지 엄마 아빠 잘 모실게요!”엄마는 감격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엄마가 나를 위해 우는 모습에 풀린 내 마음이 감동적이면서도 아팠는데 임설아를 옹호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임설아는 나를 심연으로 밀어 넣었고 내 죽음을 초래한 공범이었다.살아있을 때는 엄마가 임설아의 거짓말을 알아채고 나를 부드럽게 보호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젠 사실을 알고 난 뒤 부모님의 반응만 기대되었다.아
수사관도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임 형사, 아내와 먼저 경찰서로 돌아가. 부대장과 내가 수사에 진전이 보이면 연락할게.”그러나 엄마는 못 들은 척 장갑 낀 손으로 바닥에 묻은 혈흔을 쓸었다.“유설이가 얼마나 아팠을까.”경찰관들은 이미 작은 목소리로 흐느끼고 있었고 부모님은 넋을 잃은 채 차에 탔다.영혼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둘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시큰거렸다.집에 돌아오고부터 죽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부모님이 유설이라고 부르는 걸 듣지 못했다.검사과 이지영이 검사 결과를 아빠에게 내밀면서 동정 어린 눈빛으로 넋이 나간 엄마를 슬쩍 보았다.“임 형사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아빠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움찔하더니 보고서를 꼼꼼히 넘기며 이름을 반복해서 확인했다.한참 후, 그는 이를 악물고 물었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이지영이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아빠의 어깨를 두드렸다.“임 형사님, 범죄 현장도 이미 확인했고 시신은 부검실에 있어요. 가짜일 리가 없죠.”엄마는 갑자기 앞으로 돌진하며 검시 보고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는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아까 시신에서 빼낸 반지를 뒤적거렸다.반지 안쪽에 희미하게 새겨진 내 이름 알파벳을 바라보며 엄마의 눈물이 투명한 증거물 봉투 위로 뚝뚝 떨어졌다.경찰서 사람들은 처음에 반지에 새겨진 이름이 시신의 이름이라고 분석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임 씨 저택으로 돌아온 뒤 돌려받길 바라던 이름이었다.아빠는 엄마를 부축하며 힘겹게 걸음을 옮겨 부검실로 들어갔다.끔찍하게 훼손된 내 시신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울림이 목구멍으로 새어 나왔다.나는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왜 아파하는 거지?분명 내가 떠나길 고대했으면서.내 등에 있는 화상 흉터를 쓰다듬는 엄마의 목소리가 떨렸다.“유설아, 엄마가 왜 이런 곳에서 너랑 만나게 됐을까. 네가 처음 집에 왔을 때는 말괄량이처럼 까맣고 말라서 앞으로 네 아빠랑 너 살 통통하게 찌우겠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나쁜 짓 하는 네
엄마는 무언가 예감한 듯 아빠의 팔을 꽉 움켜잡고 있었고 손톱이 그의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사망자는 법의관님 딸 엄유설 씨입니다.”엄마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엄유설? 어떻게 걔가...”아빠는 엄마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꼭 안아주었고 팀에 경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임 형사님, 범죄 현장이 발견됐는데 폐건물 근처 자택이랍니다.”아빠는 단호하게 말했다.“일단 현장부터 가보자, 감식과에서 실수한 게 틀림없어.”경찰차에서 거듭 내 번호로 연락을 걸었고 아빠는 다른 곳에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운전하며 위로를 건넸다.“겁내지 마. 엄유설이 경찰서로 가서 감식과와 짜고 우릴 속이는 걸지도 몰라.”이런 일을 꾸며낼 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이게 무슨 느낌일까, 독사가 내 몸을 감싸는 것처럼 질식할 것 같았다.자택에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심지어 몇몇은 위조 신분증을 가지고 있어서 경찰의 수색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엄마와 아빠가 도착했을 때 집 앞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고 문이 열리자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진동했다.침대 시트는 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벽과 바닥은 핏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영혼이 된 지금도 죽기 전에 당한 고문을 생각하면 몸이 떨렸다.내가 끌려가던 날 임설아가 나한테 연락했었다.넘어져서 다리를 다쳤는데 내일 경기에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했다.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말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뒤에서 나를 가격했고 눈을 가린 천을 걷어냈을 때 임설아와 이상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나는 그 남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임설아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내가 얘를 유인했으니까 약속대로 날 보내줘. 난 그 두 늙은이 상대하러 가야 해.”남자는 그 말에 뺨을 몇 번 씰룩거리더니 능글맞게 손을 흔들었다. “입단속 잘해.”임설아는 뒤돌아 떠나며 코웃음 쳤다.“이 문만 나서면 우리는 만난 적도
엄마는 위산에 부식된 종이를 수사관에게 건네주었고 다소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아빠에게 말했다.“이 종이가 도움이 되길 바라. 설아한테 집 문 잠그라고 말해줬어?”아빠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소 망설이며 말했다.“여보, 엄유설이 전화도 안 받고 설우 문자도 답장 안 한다는 데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내가 사람 보내서 한번...”엄마는 짜증스럽게 말을 가로챘다.“그만해, 걔를 아직도 몰라? 숨어서 우리가 찾기만 기다리고 있잖아. 이런 일 한두 번이야? 설아 대회 보러 가기 싫어서 저러는 거야. 적어도 내일 저녁이면 울면서 우리한테 미안하다고 연락할 거야.”내가 지난번에 사라진 건 여름방학 때 임설아가 화장실에 가뒀기 때문이었다.방학이라 학교는 텅 비어 있었고 도와달라는 내 외침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온 힘을 다해 밖으로 나온 나는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쓴 채 절뚝거리며 집으로 돌아갔고 날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빠의 따귀와 엄마의 화난 꾸중이었다.“설아 말로는 네가 양아치 놈이랑 모텔로 들어갔다던데? 내가 어떻게 너 같은 걸 낳았을까!”나는 할 말을 잃고 임설아가 능청스럽게 웃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오빠는 약을 발라주면서 부드럽게 다독였다.“엄마 아빠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와 잘 지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야.”하지만 나는 똑똑하고 영리한 임설아에 비해 말수가 적은 내가 엄마 아빠의 관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애정의 저울은 항상 부모님이 더 사랑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안타깝게도 그 상대는 내가 아니었다.내가 아직 살아있었다면 부모님이 일로 바빠서 집에 돌아오지 못할 때 국이라도 끓여 경찰서로 가져다주려 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부모님의 생각처럼 나타나서 사과하지는 못할 것 같다.난 이미 죽은 사람이니까.조사과에서 알아본 결과 종이는 쇼핑 영수증이었고 범인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그 종이를 내 입에 밀어 넣으며 삼키라고 강요했다.“부모님을 위해 산 거야? 그 사람들이 받았어
임설아에게 일찍 쉬라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 엄마는 오빠의 전화를 받았다.“임설우, 너 출장은 언제 끝나? 네 동생이 대회 보러 오길 기다리고 있어!” 오빠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엄마가 다급하게 물었다.내가 집으로 돌아오던 날 부모님은 울고 있는 임설아와 함께 집에 계셨고 오빠만이 내 손을 잡고 겁내지 말라며 집으로 데려다주었다.내가 집에서 느낀 유일한 온기는 오빠가 건넨 다정함이었다.전화기 너머 멈칫한 오빠가 다소 의아한 듯 물었다.“유설이 올림피아드요? 그거 다음 달인데...”엄마는 화를 내며 그의 말을 가로챘다.“유설이 유설이, 설아야말로 너와 몇 년을 같이 지낸 동생이잖아!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엄유설은 남의 손에서 자란 애라 우리 가족이 될 자격이 없다고!”오빠는 나에 대한 엄마의 악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엄마, 너무 설아 말만 듣지 마세요. 유설이가 얼마나 착하고 성실한 애인지 평소에 관심 좀만 기울이면 보이실 거예요. 아까 유설이한테 전화했는데도 안 받고 이틀째 답장도 없는데 집에 없어요?”엄마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무심하게 말했다.“사지 멀쩡한 애를 내가 끌고 오기라도 해야 하니? 또 밖에 싸돌아 다니는 거겠지. 내일 설아 테니스 대회인데 넌 못 오면 관둬.”잠시 멈칫하던 엄마가 독한 말을 덧붙였다.“유설이한테 죽은 척 그만하고 내일 설아 테니스 대회 보러 안 갈 거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해. 아무튼 우리 집에 그런 애는 없으면 더 좋으니까!”전화기 너머로 나 대신 해명하는 오빠의 말을 무치한 채 그녀는 무심하게 전화를 끊었다.마침 팀을 이끌고 돌아오던 아빠가 화난 표정의 엄마를 보고 물었다.“시체가 다루기 까다로워?”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투덜거렸다.“엄유설 때문이지. 또 설우한테 전화해서 일러바쳤나 봐. 오빠랑 같이 실종 놀이라도 하려나 봐.”아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우리가 일 때문에 바쁜 걸 알면서도 이런 쓸데없는 장난을 치다니, 정말 철이 없네! 당장 전화해서 혼내야겠어
사건 토론회에서 엄마의 부검 소견을 듣고 난 후 참석한 경찰관들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내가 하도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 얼굴을 대조할 수가 없었고 시신이 버려진 폐건물은 처음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도 아니었기에 사건 해결의 어려움이 커졌다.아빠는 경찰관들에게 시신 유기 장소 인근으로 가서 수상한 사람의 단서가 있는지 확인하도록 지시했다.“법의관들은 수고스러운 대로 다시 한번 시체를 살펴보고 새롭게 나온 건 없는지 확인한 다음 추출한 DNA를 가능한 한 빨리 보내서 검사해 보세요.”아빠는 엄마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서둘러 팀원들을 따라 나갔다.엄마와 아빠는 내가 살아있을 때보다 더 지극한 관심을 내 시체에 돌렸다.엄마는 임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법의학자는 죽은 자를 대변할 수 있는 멋진 직업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임설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다가 엄마가 돌아서자 싫은 기색으로 머리를 닦는 모습을 발견했다.그날 난 임설아의 뺨을 때렸고 아빠는 벌로 내 머리를 밀었다.그리고 지금, 엄마는 다소 마음이 아픈 듯 시체가 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이렇게 처참하게 죽어서 가족들이 얼마나 슬플까.”나는 비스듬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 가족들은 내가 죽으면 무척 기뻐하겠지, 기껏해야 오빠 혼자 슬퍼하려나.엄마의 장갑 낀 손이 내 등을 스쳤고 거기엔 납치된 후 생긴 큰 화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집으로 돌아온 뒤 내가 옷을 갈아입을 때 엄마는 놀라면서도 다소 불쾌한 듯 말했다.“등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 역겨워 죽겠네. 설아 놀라게 하지 마.”혹시 엄마가 이 흉터로 날 알아보는 걸까?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 긴장한 탓에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지만 이윽고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이번에 생긴 게 아니야.”조수가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법의관님, 고인 배 속에 종이가 있어요!”엄마는 커다란 눈으로 종이를 집어 들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위산에 부식됐네. 나중에 국과수에 보내서 분석해 보자.”
망가진 내 시신이 폐건물에서 발견되고 공사 인부들은 구토를 참지 못하면서 경찰에 신고했다.임설아의 축하 파티를 마치고 현장에 도착한 엄마와 아빠에게 수사관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마스크를 쓰라는 신호를 보냈다.아빠는 경찰이 뽑은 최고의 수사 전문가였고 엄마는 강성 최고의 법의학자였다.그들은 수많은 살인 현장을 목격했지만 시신 앞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무더운 여름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시신은 얼굴이 뭉개지고 찌그러져 피투성이가 되었고 이목구비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한 점 남은 살점에 의지해 목과 머리가 겨우 붙어 있었다.심하게 부패한 시신에서 코를 찌르는 역겨운 악취를 풍겼다.엄마는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한 후 장갑을 끼고 초기 부검을 시작했다.내 시신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는 연민이 가득했다.살아있을 때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엄마의 다정함이었다.나는 엄마가 내 손에서 피 묻은 반지를 빼는 모습을 다소 긴장하며 지켜보았다.가족들에게 선물하려고 똑같은 반지를 여러 개 만들었는데 임설아 것만 치수가 맞지 않아 부모님이 된통 혼냈었다.“네가 심술궂은 마음으로 일부러 네 동생 괴롭힐 줄 알았어. 엄유설, 네가 비록 친딸이지만 설아는 18년 동안 이 집안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너보다 더 중요한 존재야!”그때의 분노에 찬 욕설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내가 준 선물을 알아볼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엄마는 전혀 변함없는 표정으로 조수에게 내 반지를 증거 물품 보관 주머니에 넣으라고 했다.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엄마 아빠의 마음속엔 영원히 나란 존재가 없었다.아무리 내가 친딸이어도 말이다.오빠는 엄마 아빠가 유괴된 나를 찾을 수 없어서 임설아를 입양했고 그래도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했지만 집에 돌아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내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남의 집에 빌붙어 사는 객식구 같았다.현장을 둘러본 아빠는 한숨을 쉬며 엄마에게 물었다.“시체 상태는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