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류각으로 돌아오니, 단연이 이미 열쇠와 장부 등을 정리해 강미숙의 영복당으로 보내놓은 상태였다. 유모 김 어멈은 이를 지켜보며 가슴 가득 걱정을 안고 있었다.“아씨, 정말 결심하신 것이옵니까?”“결심은 이미 했어요. 어멈, 더는 말리지 마세요.”김 어멈의 마음속에는 여인이 혼인을 끊는다는 것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노지연은 그 인식을 당장 바꿀 수는 없으나, 시간이 흐르면 이혼이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그녀도 알게 되리라 믿었다.김 어멈은 한숨을 내쉬며 더는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노지연은 후부의 기어오르기조차 어렵게 높은 담장을 바라보았다.전생에 그녀는 이 담장 안의 모든 사람을 지키고 싶었지만...이번 생에선, 이 후부의 모든 것이 곧 그녀와 무관해질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가벼움이 느껴졌다.이튿날.집안일을 맡지 않아 노지연은 드물게 한가로웠고 기분 또한 매우 좋았다.하지만 이런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김 어멈이 안으로 들어와 알렸다.“아씨, 친정에서 사람이 왔사옵니다.”노지연은 눈가를 내리깔았다.그녀가 물에 빠진 후, 김 어멈은 분노와 걱정이 교차하며 노씨 집안에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녀의 ‘훌륭한'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나서주길 바랐던 것이다.전생에서도 그녀의 아버지는 확실히 사람을 보냈지만 그녀의 편이 되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곧 체구가 풍만한 한 부인이 안으로 들어왔다.“아씨께 문안드립니다.”노지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유 어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고 차도 대접하지 않자 유 어멈은 그저 말라붙은 듯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얼굴에 드러난 표정마저 불편해 보였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짓고 말했다.“하인은 어르신의 분부를 받들어 아씨께 전할 말씀이 있어 들렀사옵니다.”노지연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소리로 대꾸했다.“말하시오.”이는 유 어멈이 예상했던 대접과는 달랐지만, 지금으로서는 억지로라도 말을 이어갈 수밖
최운정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 머리 장신구는 총 8,888냥인데, 형님께서 이미 888냥의 전금을 치르셨고, 아직 8,000냥이 남았습니다.”최익만은 말문이 막힌 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했다.“얼마라고?”최운정이 다시 한번 말을 되풀이하자 최익만의 얼굴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도대체 어떤 머리 장신구이기에 그렇게 비싼 거냐?”그의 한 달 봉급이 겨우 100냥도 채 되지 않았다. 전장에서 3년을 온 힘을 다해 싸워도 8,000냥을 모으지 못했는데, 그녀가 감히 8,888냥이나 하는 머리 장신구를 사다니?그가 살 형편이 안 되는 건 물론이요, 설령 살 수 있다 해도 그런 헛돈을 쓰지 않을 거였다.강미숙 또한 아들에게 이 돈을 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 머리 장신구는 노지연이 운정이를 위해 주문한 것이니 이 돈은 당연히 노지연이 내야 할 것이다.”최운정이 최익만을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하지만 지금도 형님은 화가 나 계시잖습니까.”이것이 바로 강미숙이 난처해하는 이유였다.그녀는 원래 노지연을 한동안 차갑게 대하며 제 분수를 깨닫게 하려 했다. 그래서 나중에 더 쉽게 통제할 계획이었는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최익만의 얼굴이 굳어졌다.“취소하거라.”최운정이 목소리를 높였다.“안됩니다.”최익만이 얼굴을 찌푸렸다.“머리 장신구가 어떤 게 중요하냐? 꼭 이렇게 비싼 걸 사야 했냐 말이다.”최운정은 완고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건 형님이 사 주신 건데 제가 왜 못 받습니까.”두 사람이 다투려는 순간, 강미숙이 때맞춰 입을 열었다.“익만아, 이 머리 장신구는 정말로 반품할 수 없느니라. 지금 너와 조서녕은 모두 조정의 유명한 공신들이라 모두가 후부를 주시하고 있단다. 이 시점에 머리 장신구를 돌려보낸다면 후부의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우리가 그런 망신을 당할 수는 없다.”최익만의 표정이 흠칫하더니 당장 반박할 말이 없어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그러면...”막 말을 시작하려는 순
두 사람이 떠난 후에야 옆방에서 비로소 움직임이 일었다.한 남성이 앉아 있었는데 자세는 무척이나 편안하고 거침없었다.피부가 어두운색이었고, 짙은 검은 머리와 넓은 이마가 강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풍겼다.눈썹뼈 위에는 희미한 흉터가 자리했는데, 용모를 해치지도 않았고 추하지도 않았지만 오히려 그에게 살짝 불량한 기운을 더해주었다.그는 발을 들어 옆에 있는 사람을 툭 차며 말했다.“하균, 말해 보아라. 이번 겨울은 추울 것 같으냐?”하균은 부채를 들고 매우 열심히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전하, 지금 이 더위를 보십시오. 추울 것으로 보이시옵니까? 저는 지금 미칠 것 같사옵니다.”소연준은 손가락을 살짝 굽혀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렇게나 더운 날씨인데, 노씨 집안 딸이 갑자기 목면 옷과 숯을 대량으로 사들이려 하다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로구나.”하균은 헛웃음을 지으며 대충 말했다.“여자들이란 게 다 그렇사옵죠. 머리만 길고 식견은 짧사옵니다.”그는 다시 하윤의 다리를 걷어찼다.“왜, 여인을 얕보는 것이냐? 네가 누구 배에서 나온 줄 아느냐? 네 목숨을 누가 구했는지 기억나지 않느냐?”두 사람은 이번 행차에서 운이 없어 목숨을 거의 잃을 뻔했으나 마침 석기준의 상단에 발견되어 한경까지 올 수 있었다.정말 따지자면 노지연은 그들의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하윤은 즉시 입을 막으며 말했다.“제가 입이 거칠었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그런데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태창 상인의 주인장이 젊은 여자일 줄은...소연준이 물었다.“네게는 은전이 얼마나 있느냐?”하윤은 몸을 더듬어 초라한 주머니를 꺼내더니 안타까울 정도로 적은 은 조각들을 쏟아냈다.소연준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거지 같구나.“하윤은 울상을 짓고 대답했다.“...그건 다 전하 탓이옵니다.”전하께선 타고난 재물복이 없어 값진 물건이 손에 들어가도 한 시진을 못 버티시는데하윤이 돈을 맡아도 어김없이 사라지곤 했으니 아마도 조정에서 둘도 없이 가장
노지연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나를 찾으신 일이라도 있으신가요?”최운정이 말하려던 참에 강미숙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강미숙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마치 그녀를 위해 주장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어제 부엌에서 네게 보낸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다 들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사람을 시켜 단단히 혼을 내줬단다. 분수를 모르고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말이다.”노지연은 살짝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별일도 일인데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었습니다.”강미숙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네가 이 집의 안주인인데 감히 너를 소홀히 대하다니, 이게 어찌 별일 아니겠느냐? 앞으로는 이 집의 살림도 네게 맡기려 한다. 나도 이제 늙었으니 이 집은 네가 아니면 안 되겠다.”최운정이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그러게 말입니다. 아래 사람들을 보면 게으름 피우기 일쑤인데 형님만이 그들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 집안은 역시 형님이 맡으셔야 합니다.”강미숙은 일부러 성난 듯 최운정을 흘겨보며 말했다.“얘가, 네 눈엔 형님밖에 없구나.”“이 딸이 하는 말 모두 사실입니다. 형님께서 집안을 맡으실 때는 부엌 음식조차 더 맛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허접한 반찬뿐이라니...”노지연은 속으로 비웃었다.‘내가 집안을 맡을 때는 내 개인재산을 털어 보태줬으니 음식이 맛없을 수가 있겠어?'모녀의 주고받는 말을 다 들은 노지연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저는 물에 빠진 후로 아직 잔병이 남아있어 사실 집안일을 맡을 정신이 없습니다. 어머님, 좀 더 쉬게 해 주세요.”노지연은 그들과 말다툼하며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 과감히 ‘끌어내리기 전략'을 선택한 것이었다.3일 후, 그녀는 폐하에게 이혼 허가를 청원할 것이고, 그러면 모든 문제가 스스로 해결될 터였다.그녀의 태도는 평온했고, 직접 거절하지 않자 사람들 눈에는 받아들인 거로 비쳤다.최익만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렇게 강한 체하더니, 역시 집안일 권한을 차지하려는 거로군.'강미숙은
최운정은 체면이 말도 못 하게 구겨진 것 같아 목을 곧추세우며 버티었다.“형님이 분명히 제게 주시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이제 와서 뒤집다니요!”노지연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날 우리가 여의각에서 장신구를 고르던 때 구 공주마마께서 바로 옆방에 계셨습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시려면 공주마마를 모셔오면 될 일이니... 과연 아가씨는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최운정의 뻣뻣하게 세운 목이 굳어지며 눈동자에도 흠칫하는 빛이 스쳤다.구 공주는 덕종의 막내딸로, 폐하의 각별한 총애를 받는 데다 성격이 고약하기로 유명했다. 한 마디로 남의 체면 같은 건 눈곱만큼도 살피지 않는 사람이었다.실제로 그날 공주를 마주쳤지만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그분은 두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으셨다.노지연이 날카롭게 물었다.“어떠하시겠습니까? 감히 못 하겠지요?”“저... 전...”최운정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우물쭈물 대답을 못 했다.이런 반응은 이미 진실을 말해주고 있었다.최익만은 마치 세게 뺨을 여러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네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너, 너...”그는 너무 분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이 누이에게 실망한 것은 물론, 노지연 앞에서 체면을 구기게 만든 것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강미숙이 황급히 최운정을 변호했다.“운정이는 평소에 착한 아이였다. 분명 주변 사람들이 꼬드겨서 잠시 매혹된 것이다.”최운정은 억울하다는 듯 울음을 터뜨렸다.“형님은 예전엔 늘 제게 후하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뭐든 사 주셨잖습니까. 그날 저는 그 머리 장신구가 너무 갖고 싶었는데 왜 절대 사 주지 않으셨습니까... 사주셨으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모든 게 노지연의 탓인 양 둘러대고 있었다.노지연의 마음 한구석에서 깊은 서늘함이 피어올랐다.은혜가 적으면 고마워하지만 많으면 원수가 된다고 하더니, 역시 그 말이 맞았다.그들의 욕심은 바로 그녀가 조금씩 키워온 것이었다.그들은 그녀의 헌신을 당연하
최운정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소리쳤다.“그렇게 이기적인 년이 어디 있답니까! 후부의 명성이 무너지는 걸 그냥 지켜보다니! 애초에 체면이라도 차려줄 필요가 없었습니다!”최익만 역시 최운정에게 화가 나 있었다. “이기적인 건 너다. 후부의 명성이 무너진다면 전적으로 네 공로란 말이다!”이런 비난에 최운정은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오라버니는 외부인 편을 들다니요! 그년은 분명 재산이 많으면서도 8천 냥조차 내놓지 않습니다. 이게 어디가 이기적이 아니란 말입니까?”최익만은 그녀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더는 말을 섞기 싫었다.그가 소매를 휘날리며 떠나려는 순간 강미숙이 급히 불러세웠다.“지금은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최익만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지만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제가 생각해 보겠습니다.”강미숙이 어찌 자기 아들이 고생하며 돈을 마련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그녀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내게 한 가지 해결 방법이 있구나.”최운정은 황급히 재촉했다. “어머니! 방법이 있으시다면 빨리 말씀해 주세요!”강미숙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서녕이 어제 폐하께서 내리신 후 한 상을 받았는데...”그녀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최익만의 얼굴색이 변했다. “안 됩니다! 그건 서녕의 개인 물건입니다!”그러나 이미 마음이 들떠 있던 최운정은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분은 제 새 형님이잖습니까. 저에게 예물 정도는 당연히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그날 받은 상도 그렇게 많았는데 이 정도 은냥쯤이야 아깝지도 않을 겁니다.”누이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바라보며 최익만은 혐오감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서녕의 재산은 서녕이 처리할 일이지 네가 마음대로 처분할 권한은 없다!”아들이 그 여인을 그렇게 감싸는 모습에 강미숙의 눈빛에 어두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정체불명의 고아 년이, 노지연보다도 못한 주제에!”폐하의 눈에 들었다는 행운만 없었더라면 강미숙은 절대 그녀를 집
노지연은 외부의 소문에 대해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는 각처의 산업 장부를 모두 올려 검토하도록 지시하며 하찮은 일에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옥류각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해 질 녘 뜻밖의 방문자가 찾아왔다.최운정은 호수 빛을 머금은 은빛 비단 백합무늬 치마를 입고, 발에는 우윳빛 연기무늬에 비단 구슬을 수놓은 신을 신고 있었다. 머리에는 그 유명한 금과 옥으로 장식된 머리 장신구가 착용 되어 있었는데, 온몸이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속되지 않았고, 오히려 흐르는 빛과 화려한 꽃처럼 아름다운 인상을 풍겼다.여의각의 솜씨는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최운정은 마치 꼬리를 펼친 공작새처럼 거들먹거리며 노지연 앞을 몇 바퀴나 돌았다.“누군가는 너무 인색해서 머리 장신구 하나 제게 주기 아까워했는데, 다행히 새로 온 형님은 너그러우셔서 그 장식뿐만 아니라 예쁜 옷과 신발도 여러 벌 사 주네요. 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것들이랍니다.”노지연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축하합니다. 그렇게 통 큰 새 형님을 모시게 된다니, 참 복이 많으십니다.”그리고 옆에서 기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조서녕을 바라보며 더욱 진심 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생도 축하하네. 이렇게 돈 쓰기를 좋아하는 시동생을 두시다니 참 복이 많네.”조서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그렇게 빈정대지 않아도 될 텐데요. 저는 언니처럼 돈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요. 돈은 단지 몸 밖의 물건일 뿐이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야말로 진정으로 소중하고 대체할 수 없는 거예요.”그녀는 마치 자신을 설득하듯 힘주어 말했다.그러자 최운정이 자랑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형님은 우리 서녕 형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하려 들지 십시오. 우리는 친자매처럼 친하니까 서녕 형님이 나에게 돈을 써 주시는 겁니다.”노지연은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정말 다행이네요. 하나는 돈을 마음껏 쓰고, 하나는 돈을 기꺼이 내주니 천하일품의 훌륭한 시누이와 아가씨
노지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지었다.“지금이라도 그런 진짜 모습을 알아채는 건 늦지 않았다는 말이다. 두고 보거라. 앞으로 그 처자매끼리 시끄럽게 지낼 것이니.”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다시 주판알을 튕기며 장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이 후부 안의 사람들이 어떤 속성을 가졌는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그들은 그녀를 마음대로 우롱할 수 있는 머저리로 여겼다. 그녀가 떠나겠다면 그들이 어찌 쉽게 놓아주겠는가? 때가 되면 그녀의 재산을 가져가기조차 쉽지 않을 터였다.더욱이 노씨 집안 역시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비록 그녀가 무사히 이혼 교지를 받는다고 해도, 아버지는 표면적으로는 거역하지 못하겠지만 속으로는 결코 그녀를 편히 보내게 하지 않을 것이다.모든 면에서 그녀는 미리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정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 지금, 그녀에게 감정에 젖어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김 어멈, 우쇠를 시켜서 단필무 아저씨에게 긴급 연락을 부탁하십시오. 중요한 일을 처리해 달라고 전해달라고 말입니다.”우쇠는 김 어멈의 아들로 현재 후부의 바깥 행수로 일하고 있었다.단필무 역시 그녀 휘하의 오래된 심복으로, 주로 한경에 있는 그녀의 점포들을 관리해 왔다.과거 그녀가 내린 유일한 현명한 결정은 후부에 자신의 진정한 재정 상태를 숨긴 것이었다.후부는 그녀 명의로 얼마나 많은 산업이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그러나 표면상으로 알려진 그녀의 지참금 점포 중 가장 수익이 좋은 다섯 곳에는, 강미숙이 각종 이유를 들어 새로운 관리자와 인력을 배치했고, 오히려 그녀의 원래 인력들은 배제당하고 소외되어 있었다.그 사람들 손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래서 단필무에게 그들의 약점을 찾아내도록 조사하게 한 뒤, 당연한 절차대로 그들을 처리할 계획이었다.강미숙이 그녀의 이혼 요구를 알게 되면, 이 사람들을 시켜 그녀에게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김 어멈은 즉시 급히 나가서 일을 처리했다.한편, 최익만은 강미숙의 부름을
최학수는 말문이 막혔다.그는 열 번 다시 태어난대도 감히 폐하 앞에서 대질하려고 달려들 수 있는 담양은 없었다.노지연은 이 점을 확신했기에 이렇게나 당당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다.순간적으로 그들은 그녀를 조금도 제압할 수 없었다.최학수가 엄중한 어조로 경고하며 입을 열었다.“너와 익만은 부부다. 너도 알다시피 너희는 영광과 굴욕을 함께하는 관계다. 만약 네가 사사로운 이익 때문에 후부와 익만이의 앞날을 돌보지 않는다면 후부는 결코 너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최익만도 냉랭하게 협박했다.“부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걸 내가 알게 된다면 부인을 내칠 것이오.”최지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노지연에게 경고의 말을 퍼부은 뒤, 그들은 겨우 자비를 베풀듯 그녀에게 물러나라고 했다.돌아서는 순간 노지연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어렸다.영복당 안의 분위기도 썩 좋지 못했다.최학수가 강미숙을 바라보며 말했다.“부인이 노지연은 성품이 순종적이고 매우 얌전하다고 하지 않았소? 오늘 보니 완고하고 제멋대로에 눈에 뵈는 것이 없더군.”강미숙 역시 화가 난 듯했다.“제가 눈썰미가 부족했습니다. 예전의 순종적인 모습은 분명히 꾸민 거였습니다.”최익만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얼굴로는 정말 속일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그런 사람인 줄 몰랐으니 어머니께서 속으셨더라도 당연한 일이죠.”조서녕은 이 말을 듣고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언니의 얼굴을 말하는 겁니까? 정말 사람의 마음을 현혹할 만한 자본은 있더군요.”이 말은 신랄할 뿐만 아니라 악의에 찬 추측이 담겨 있었다.최익만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빛이 더욱 깊어진 채 냉랭하게 말했다.“부인은 현숙한 사람을 맞이해야 하오. 천한 시첩이나 거짓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법이오.”강미숙도 따라 말했다.“애초에 지연이를 며느리로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며칠 동안 걔 때문에 속이 상해 몇 년은 덜 살 것 같구나.”최학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최학수는 생각에 잠겼는데 이마의 주름은 계속 깊게 패 있었다.“그럼 이건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노지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부군께서는 비범한 공을 세우셨지만, 그 공은 이미 다른 데 쓰였습니다.”이간질이라면 그녀도 할 수 있다.그녀의 말은 조서녕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조서녕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뜻이에요?”노지연의 눈빛은 차분했다.“다른 뜻은 없네. 단지 아버님과 함께 이 일을 분석하고 있을 뿐이라네. 한 번 쓰인 공은 다시 쓸 수 없고 다 써버리면 끝인 거라네. 폐하께서는 밝으신 분이시니 공적부에 따로 장부가 있을 걸세.”여러 사람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스치며 마음속에도 수많은 생각과 추측이 떠올랐다.조서녕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언니가 화제를 돌리려는 게 틀림없어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왜 폐하께서 면담하련다는 거예요?”모두의 관심이 다시 이 문제로 쏠렸다.그녀가 이 일과 무관하다고 부인한다면 대체 무슨 이유로 면성을 하게 된 걸까? 그녀는 후부의 며느리인데, 후부의 미래에 불리한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최학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네가 내실 부인일 뿐인데 무슨 일로 성상께서 면담을 요청하셨다는 거냐?”노지연이 되물었다.“동생 또한 내실 부인이잖습니까. 동생은 면성을 하실 수 있는데, 저는 왜 안 된다는 겁니까?”조서녕이 모욕당한 표정으로 경멸 어린 어조로 말했다.“언니가 감히 나와 자신을 비교하다니요? 저는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 있는 의술이 있지만 언니에게는 뭐가 있어요?”노지연은 담담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세상에 의술에 모두 정통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네. 그렇다고 모두 동생보다 못하다는 것도 아니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하늘 위에 하늘 있는 법인데 동생이 이렇게 도량이 좁은 걸 밖에 알려지면 웃음거리가 될 걸세.”노지연의 말에 조서녕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반박하려는 순간, 최익만이 먼저 입을 열었다.“서녕이 틀린 말
노지연은 혼수가 많고 친정아버지도 종3품 호조참의였는데 이 모든 것은 고아 출신인 조서녕이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아들이 두 명의 정실을 두고 또 양쪽 모두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왜 굳이 하나만 선택하며 밑지는 장사를 한단 말인가?최학수는 탁자를 크게 내리쳤다.“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로다! 지연이는 우리 최씨네 며느리인데 이렇게나 분수를 모르고 시집을 배신하는 거냐! 정말 화근이 따로 없구나! 여봐라, 며느리 노지연을 내 앞으로 데려오거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후부는 이런 년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최익만은 아버지가 노발대발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 말리지 않았다.‘저 여인은 제대로 혼내줘야 해. 그래야 자기가 이젠 최씨네 며느리라는 걸 깨달을 테니까.’옥류각.노지연은 하인의 전갈을 받았다. 외출금지령을 받아 나갈 수 없다고 말했으나 하인은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마님, 소인은 선평후의 명을 받들고 왔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노지연은 의아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두 번의 인생을 살았지만 그녀는 이 시아버지와 거의 교류가 없었는데 왜 갑자기 그녀를 불렀을까?노지연이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틈을 타 김 어멈은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말을 전달하러 온 어멈에게 건넸다.“언니, 수고하셔요. 얼마 안 되니 술 한 잔 사드세요.”이 어멈은 일부러 사양하는 척하다가 결국 소매 속에 넣으며 누그러든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마님께서 집안을 맡으셨을 때 우리 같은 하인들을 항상 너그럽게 대해주셨어요. 오늘 선평후 외에 도련님과 작은 사모님도 있어요. 아마 도련님의 발령 때문에 말다툼이 일었나 봐요.”노지연이 준비를 마치자 김 어멈은 조용히 방금 알아낸 정보를 귀속말로 전하며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김 어멈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아마도 대 공자님께서 배정받은 관직이 좋지 않아 후작님과 부인님께서 불만을 품으셨고, 영부인께서 곁에서 부채질하시며, 아씨께서 황상 앞에서 고언(告言)을 하셨다고 점점 더
기분이 우울해서 후부에 돌아온 최익만은 곧바로 영복당에 불려갔다.모처럼 오늘은 선평후 최학수도 함께 있었고 조서녕이 옆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모두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좋은 소식이 있다. 이씨 집안에서 마침내 후부의 청첩을 받아들였단다. 이제 이 대인과 마님께서 직접 후부에 와서 너희 혼인을 축복해줄 것이다.”강미숙이 말한 이 대인과 마님은 이 귀빈의 오라버니와 형님으로서 이씨 가문의 가주이기도 했다. 이명원은 2품인 대제학이었고 이 부인은 명문가인 정씨 가문 출신이었다.이 귀빈이 낳은 여섯번째 황자는 유력한 태자 후보였다. 그러니 이씨 가문은 진정한 권문세가로서 선평후부에서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집안이었다.이제야 비로소 이씨 가문과 연줄을 맺게 되자 최학수와 강미숙은 자연히 기뻐했다.이 좋은 소식에 최익만의 우울했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조서녕을 바라보았다.“이 모든 건 부인의 공로였소.”최학수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조서녕을 칭찬했다.“네가 이번에 후부를 위해 공을 세웠구나. 익만이가 너와 혼인하는 건 정말 잘한 일이다.”강미숙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 제가 서녕이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집안을 흥성하게 할 수 있는 상이 보였는데 역시 우리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강미숙은 진심 어린 말이었다. 조서녕이 궁에서 일하며 귀인들과 교류할 기회가 많아진다면 앞으로 더 많은 공을 세울 수 있을 텐데, 그럼 후부가 출세하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최학수도 강미숙과 같은 생각을 하며 더없이 만족했다. 자신이 일찍이 조서녕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아들이 동등처 교지를 청하는 것을 묵인했었는데 지금 보니 이 결정이 옳았다.두 사람의 태도에 조서녕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녀의 자부심이 절정에 달했다.“아버님, 어머님, 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후부의 영광이 바로 저의 영광입니다.”“정말 착한 아이구나. 너를 더 일찍 맞아들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이 말에는 숨겨진
이 소식은 옥류각에도 전해졌다.부영과 단연은 질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운이 좋았을 뿐입니다.”“그럼요. 젊은 계집애가 의술이 얼마나 뛰어나겠습니까? 그저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지요.”노지연은 오히려 조서녕을 위해 변호했다.“다른 건 몰라도 의술은 좋은 편이다.”하지만 이 세상에 의술이 뛰어난 의녀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생각이 미치자, 노지연은 김 어멈을 불렀다.“어멈, 우쇠에게 분부할 일이 있습니다.”김 어멈은 즉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김 어멈은 즉시 진지한 표정을 지시를 기다렸다.“창고에 있는 인삼을 꺼내 단필무 아저씨에게 전해주세요. 만약 이조판서 현씨네 가문에서 오면 평소 가격의 3할에 되는 가격으로 파세요. 만약 5일 안으로 오지 않으면 아저씨더러 그 사람들이 오게끔 방법을 찾으라고 하세요.”“그리고 현씨 가문의 사람이 오면 한경의 서쪽에 있는 국자 거리에 의원이 한 명 있는데 중풍 치료에 능하다고 해요. 심지어 제때 치료를 하면은 완쾌할 수도 있다고 했어요.”전생에 현씨 가문의 어르신은 갑자기 중풍으로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현씨 가문에서는 조서녕을 불러 치료했지만 시간을 지체한 탓에 목숨을 건졌어도 입이 비뚤어진 반신불수가 되었다.부친상 때문에 아들이 관직에서 3년간 물러나 있어야 할까 봐 어르신은 존엄 없이 몇 년을 비참하게 버텼다.노지연이 현씨 가문에 국자 거리의 의원을 추천한 것은 조서녕의 공을 빼앗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더러 자신의 추천 덕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또 어르신이 더 나은 치료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이 외에도 그녀는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이 현 판서는 성격이 강직하고 사심이 없었다. 하지만 관리들의 승진을 주관했던 터라 많은 이들이 그에게 접근하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지만 거절당했다.아버지 노성현은 정3품 호조참의 자리에 오래 머물렀는데 현 판서를 통해 올라가려고 했어도 번번이 실패했다.노지연의 이 행동은 노성현을 위해 발판을 깔아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그녀가 이
노지연은 가슴이 철렁했다.우람진 체격을 가진 그가 다가오자 그녀는 불안해졌고 혐오감이 밀려왔다.그녀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그들은 아직 부부이기 때문에 만약 그가 정말로 원한다면 그녀는 거절할 권리조차 없었다.‘내 몸에 손을 댄다면 난 정말 구역질 나서 죽을 것 같아.’하지만 노지연은 당황한 기색이 없이 오히려 담담한 표정이다.“좋습니다. 제가 바라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조서녕 동생이 이 일을 알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군요. 아마 질투로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만약 제가 적장자를 낳게 된다면 다시는 저를 억누를 수 없을 겁니다.”이 말은 마치 머리 위로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그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다.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역겨운 듯 두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내 자식을 낳는다고 했소? 꿈도 꾸지 마오.”노지연이 소매 속에서 몰래 움켜쥐었던 주먹이 살짝 풀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긴장했다.최익만은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평생 부인은 내 자식을 낳을 수 없을 것이오. 내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소.”그렇게 말하고는 화가 난 듯 소매를 휘저으며 자리를 떠났다.독설을 내뱉었음에도 그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분노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방금 노지연의 비웃음 섞인 말들을 잊을 수 없었다.‘이 여자는 분명 나를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이런 말을 내뱉었을 것이야.’최익만이 씩씩거리며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노지연은 그제야 긴장한 마음을 풀 수 있었다.마침 부영은 곁방에서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고 단연은 부엌에서 다과를 만들었다.며칠 전부터 그녀는 뜰 안에 있던 작은 부엌을 정리해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이젠 원하는 음식을 마음껏 만들고 먹어야지.’식탐이 많았던 그녀는 요리 실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다과가 완성됐어도 좋은 기분이 사라져 입맛이 없어 하는 그녀를 보며 부영과 단연은 즉시 사과했다.“아씨, 용서해주십시오. 모두 하인들이 정신을 놓고 있어 도련님이 오신 것을 알아채지 못한 탓입
최익만이 본 것은 바로 그런 광경이었다. 가슴이 무엇에라도 강하게 부딪힌 것처럼 떨렸고 묘한 감정이 파도처럼 일었다.불쾌한 시선을 느낀 노지연이 고개를 들어 문 쪽을 바라보았다.최익만을 보자마자 그녀의 편안했던 자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최익만의 눈빛이 흔들렸다.“부인을 보러 왔소.”노지연은 속으로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라고 푸념했다.“이제 보셨으니 더 필요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이나마 피어올랐던 죄책감이 그녀의 냉담한 태도 때문에 순식간에 사라졌다.“여긴 후부이고 내 구역이니 난 가고 싶은 곳에 마음대로 다닐 수 있소. 오히려 부인은 자신의 자리를 잘 알아야 하오.”노지연은 표정을 다잡더니 공손한 태도로 바꿔 말했다.“제가 실수했습니다. 서방님, 무슨 분부가 있습니까?”그녀의 의도적인 거리감을 두며 공손하게 말하자 최익만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부인, 말을 제대로 하시오.”노지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저의 태도가 아직도 공손하지 않습니까?”최익만은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나한테 삐졌다고 해도 정도껏 해야 하오. 계속 이렇게 비꼬는 태도로 말한다면 얼마 남지 않은 부부의 정도 다 없어질 거요.”노지연의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일었다. 정이라고? 그들 사이에 정이 있단 말인가?그녀가 잠자코 말이 없자 최익만은 그녀가 고개를 숙인 것으로 착각하고는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부인이 나를 위해 상단을 만들고 정성껏 물건을 골라준 마음은 다 알고 있소. 나도 마음이 모진 사람이 아니오. 부인이 성질을 부리지 않고 대범하게 행동한다면 나도 부인의 체면을 세워줄 것이오. 다만 서녕이는 내가 아끼는 사람이니 절대 넘어서려고 하지 마오.”노지연은 말문이 막혔다.“아마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그런 일들을 한 건 서방님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최익만은 그녀의 속마음을 간파하려는 듯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상단을 만든 것이 나를 위한
최익만도 강미숙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최운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라버니가 훈적으로 서녕 형님에게 교지를 청해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면 오라버니도 큰 상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그럼 저도 예쁜 옷과 머리 장신구를 살 수 있었을 겁니다.”탐욕이 가득 담긴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했다.강미숙은 그 말에 가슴이 찔리는 듯 아팠다.‘생각 말아야지. 생각만 하면 가슴이이 피가 맺힐 정도로 아프구나.’최익만이 발걸음을 멈추고 매서운 눈빛으로 최운정을 바라보았다.“언제부터 이렇게 속물적이고 허영심에 찌든 것이냐? 눈에는 돈밖에 보이지 않느냐?”최운정은 당황했지만 꾸지람을 듣는 게 억울해 목소리를 높였다.“그냥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왜 갑자기 저를 속물이라고 합니까?”최익만은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서녕의 교지는 내가 자발적으로 청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금은보화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 서녕은 너에게 아낌없이 돈을 써주며 정성을 다했는데 네가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속상하겠느냐?”최운정은 꾸중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지만 속으로는 불만이 가득했다.강미숙은 곁에서 딸의 편을 들어주었다.“운정이 생각없이 한 말이잖느냐.”최익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강미숙을 바라봤다.“어머니, 운정이를 이렇게 감싸주면 점점 더 버릇없어질 겁니다. 이젠 어린아이도 아닌데 철이 들어야 합니다.”최운정은 화가 나서 다시 말대꾸하려고 했지만 강미숙이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달래주더니 또 최익만에게 말했다.“운정이는 아직 어린아이 같은 성격이지만 본성은 나쁘지 않다. 오라버니로서 조금 더 너그럽게 대해줘야지 이런 식으로 닦달하는 건 아니란다. 이러다 남매가 멀어질 수도 있어.”최익만은 차갑게 말했다.“저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품어줄 수 있지만 이 후부 밖에서도 여전히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아무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최운정은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맞받아 말했다.“오라버니는 이기적이지 않으십
조서녕은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었던 말은 이미 누군가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최익만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그 여자 얘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기분만 망칠 뿐입니다.”강미숙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익만아, 지연이를 너무 매몰차게 대하지 말아라. 지연이가 너를 위해 상단을 만든 것이다. 정말 정이 깊고 의리가 있는 행동이지. 지금 이런 소심한 행동도 다 너를 너무 신경 쓰기 때문이란다.”최익만의 표정이 굳었다.“어머니 무슨 말씀입니까? 저를 위해 상단을 만들었다고요?”강미숙이 고개를 끄덕였다.“서창은 가난한 곳이라 상단을 만들어봤자 돈을 벌지 못한다. 네게 물건을 보내주려는 목적이 아니었다면 어찌 상단을 꾸리고 3년 동안 유지했겠느냐? 번마다 너에게 보낸 물건은 모두 지연이가 직접 골라낸 것들이라 하나하나가 다 최상품이었다.”이 이야기를 처음 들은 최익만의 얼굴은 충격에 휩싸였다.지난 3년 동안 그는 매년 후부에서 보낸 물건을 받았었다. 단순히 두세 가지가 아니라 수레 몇 개에 가득 실린 물품들인데 그의 것뿐만 아니라 동료들을 위한 물건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그의 몫은 항상 가장 좋은 것이었다.어머니의 길고 정성스러운 서신과 달리 노지연의 서신은 항상 간결했고 내용은 항상 간단하고 담백했다.그래서 그는 그 모든 물건이 어머니가 준비한 후 상단을 통해 보낸 것이라고만 생각해왔다.개선해서 한경으로 돌아온 후 노지연과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던 그는 이 사실을 알 기회조차 없었다.이제야 갑작스럽게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의 얼굴에는 충격적인 표정이 드러났고 가슴 속에는 묘하게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조서녕은 갑자기 멍해진 최익만의 모습을 바라보며 답답한 감정이 넝쿨처럼 가슴 속에 퍼졌고 저도 모르게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을 꽉 쥐었다.작년 겨울, 그녀는 상단이 보낸 수레에 가득 실린 물건을 보았었다.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 등 종류별로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었다.최익만은 그때 매우 자랑스러워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