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라! 만약 서라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땐 네가 모든 책임져야 할 거야!”구연준은 어두운 얼굴로 날 향해 경고했고, 깊은 분노와 실망이 가득 찬 눈빛을 남긴 후 자리를 떠났다. 나는 한동안 무표정하게 서서 구연준의 그 표정을 머릿속에 되새겼다. 한때 나를 그토록 사랑한다고 맹세했던 사람이, 이제는 나를 한낱 가해자로 몰아세우고 있었다.‘구연준... 언제부터 저렇게 변한 거지?’ ‘언제부터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변한 거냐고.’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졌다.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언니, 괜찮아요?” 나는 다급하게 다가온 채유리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에 내가 흔들릴 필요가 있을까?’‘아니, 절대 그럴 필요 없어.’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바로... 장수현.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끊었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강해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순간, 불안한 기운이 스며들며 머릿속을 스쳤다.‘설마, 강서라가 버티지 못하고 죽은 걸까?’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귀청이 터질 듯한 강해성의 고함이 쏟아졌다. [강해라!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X야?!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몸도 약한 애를 밀쳐서 넘어뜨리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귀에서 잠시 떼었고, 강해성이 화를 다 쏟아내도록 가만히 기다렸다가 무심하게 말했다.“제 사무실에 CCTV가 있으니, 그것부터 보고 판단하시죠.” 사실, 나는 CCTV를 보여줘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 사람들은 애초에 진실에는 관심이 없고, 그냥 나를 비난한 구실이 필요할 뿐이니 말이다. 역시나, 강해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했다.[중요한 건 네 동생이 병을
나는 손수건으로 따가운 두 눈을 감싸 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옆에 누가 앉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해성이 나타나더니 극도로 공손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찬 도련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쪽에 귀빈석이 준비되어 있으니 자리로 이동하시죠.” “괜찮습니다. 여기 앉겠습니다.” ‘유찬 도련님’이라 불린 남자는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태도는 묘하게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했다. 강해성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무대에서 사회자가 양가 부모님을 초대하자 장수현이 급히 다가와 그를 끌고 갔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감정을 다잡았다. 손수건을 돌려줄 틈도 없이, 스피커에서 울려 퍼진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주실 강해라 씨, 무대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갑작스레 쏟아진 조명에 눈이 부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동시에 웅성거리던 장내는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다들 충격받았겠지...’ 당황, 동정, 조소...수많은 시선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게 선명히 느껴졌다.나는 곧바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단한 갑옷을 두른 듯한 태도를 취했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는 듯이. 그런데도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고, 주위의 수군거림이 더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강해성이 둘째 딸만 감싸고 도는 건 유명한 얘기였지만, 오늘 보니까 정말 대단하네.” “첫째 딸이 너무 잘났잖아. 얼굴도 예쁘고, 뭐든 완벽하니까 후처가 질투할 만하지. 그러니 저렇게 강해성 귀에 바람을 넣는 게 아니겠어?” “이번엔 강해성이 너무했어. 후처 들어오면 친부도 달라진다지만... 이건 친부라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야.” “편애하는 부모야 많지만, 둘째 딸이 언니의 약혼자를 빼앗도록 도와주는 건... 듣도 보도 못했어.” “하긴, 구 대표님 입장에선 어느 딸을 선택하든 장인이 같으니까 손해 볼 건 없지.” 비웃음과 조소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어차피 저 앞에 두 쌍
강서라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흐느끼며 말을 꺼냈다. ‘뭐야, 이건? 설마 지금 공개적으로 불쌍한 척하면서 도덕적 압박을 가하려는 거야?’ 나는 속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언니가 연준 오빠와 저의 사랑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마음의 짐을 덜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부디 우리 언니를 욕하지 말아 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언니니까요.” 강서라가 울먹이며 말을 마치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롱과 수군거림이 가득했던 하객들은 이제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객석을 천천히 훑었다. ‘어?’ 분명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한쪽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얼굴이 보였다. 잘생긴 외모, 차가운 눈빛,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강서라의 연기에 휘둘리지 않고, 흥미롭다는 듯이 비웃고 있었다. 강서라는 내게 돌아서더니,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고마워. 나... 언니 마음속 진심이 듣고 싶은데, 혹시... 나를 원망해?” ‘뭐?!’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게 진짜 미쳤나?!’ 강서라는 온 하객을 도덕적으로 묶어 놓고도 모자라, 이제는 내 입에서 강제로 ‘괜찮다’는 말을 끌어내려고 했다. ‘이 정도면 연기 대상감인데? 나보고 지금 여기서 뭐라고 하라는 거야? 감동적인 자매애라도 연출하라고?’ 순간에 나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사회자는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빨리 다른 마이크를 내밀었다. 참고 참았던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더는 못 참아.’ 나는 마이크를 받아 들고, 차분한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사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오?”“남편을 뺏긴 사람이 오히려 감사한다고?”“...”순간, 하객석에서 일제히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서라야, 네가 가져간 건 내 남자가 아니라, 내 골칫거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객들은 일제히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 바빴다. ‘아, 이거 완전 난장판이네. 그래, 더 망가져라.’ 나는 힘없이 맞고만 있었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다행히도 구연준 부모가 체면을 차리려는 듯 황급히 나섰다. “사돈! 사돈! 이건 아이들의 결혼식입니다! 하객들이 다 보고 있어요! 제발 그만하세요!” “사돈! 막지 마세요! 오늘 이 불효막심한 X을 당장 죽여버릴 거예요! 이 재수 없는 X! 태어나길 잘못 태어났어!” 강해성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은 광기에 휩싸였다. 주변에서 그를 말리던 사람들도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장수현의 외침이 퍼지자, 강해성의 동작이 딱 멈췄다. “그만해요! 서라가 쓰러졌다고요! 사람 좀 불러요! 어서요!” 강해성은 나를 거칠게 밀쳐내고 황급히 돌아섰다. “뭐라고? 서라야! 어떻게 된 거야? 119는 불렀어? 당장 불러!” 내 주변을 둘러싸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모두가 기절한 신부에게 몰려갔다. 구연준은 안절부절못하며 강서라를 안아 올렸다. “서라야! 버텨, 제발! 병원으로 데려갈게! 정신 차려!” 나는 무너진 결혼식을 바라보며 뺨의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속은 너무도 후련했다. ‘나, 결국 미쳐버린 건가? 왜 이렇게 짜릿하지?’ 나는 마이크를 낚아채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객 여러분,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하지만 오늘 준비된 식사는 아주 훌륭하니, 맛있게 드시고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그대로 무대를 내려왔다.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차에 올라탄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젖혔고, 햇빛 가리개를 내리고 작은 거울을 보았다. 양쪽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다행히 피부가 찢어지지는 않았다. 머리는 조금 헝클어졌지만, 손으로 몇 번 정리하면 될 정도였다. ‘뭐, 이 정도는 가벼운 수준이지.
‘내 결혼식이었던 곳에 그 사람이 직접 왔다고?’ ‘이해가 안 되는데? 혹시 뭔가 착각한 건가?’ ‘근데 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오랜만에 이런 대형 사고를 봤으니, 나름 볼만했겠네.’그 순간, 핸드폰이 울리면서 엉켜 있던 생각들이 단번에 끊겼다. 전화기 너머로 이윤서의 격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연준이랑 강서라, 진짜 역대급 쓰레기야! 나 지금 열 받아서 핸드폰 던질 뻔했다니까?! 근데 너도 안 밀리더라? 아주 제대로 참교육했어! 속이 다 시원해!] 나는 한숨을 쉬며 좌석에 기대어 이마를 짚었다. “설마 벌써 인터넷에 퍼진 거야?” [당연하지! 이런 희대의 막장 드라마가 어딨어?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지금 커뮤니티마다 난리도 아니야, 의견 갈려서 전쟁 수준이라고.] 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복수하고 싶었던 건 맞는데... 나까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건 원하지 않았어.’ ‘이렇게 퍼지면, 내 일에도 영향이 갈 텐데...’ [해라야, 너 괜찮아? 너 맞는 거 봤어.]격분하던 이윤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몇 대 맞았을 뿐이잖아.” [네 아버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것도 하객들 보는 앞에서? 말도 안 돼! 거기에 내가 갔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같이 싸워서 한 대라도 더 날렸을 텐데!]원래 이윤서는 내 결혼식의 들러리였다. 드레스까지 다 맞춰 놓긴 했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일부러 오지 못하게 했다. 외할머니와 작은이모도 마찬가지였다. “강해성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이미 인연을 끊었으니까.” 나는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잘했어! 그런 인간은 ‘아버지’ 불려선 안 돼. 그딴 인간이 네 아버지라는 건 네 인생 최대의 불행이니까.]“응...” 나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일을 어떻게든 조용히 마무리해야 하는데...’ ‘회사나 내 일
‘사람이 죽게 생겼다고?’ 나는 수면제 기운에 정신이 몽롱한 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구연준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 “강서라가 죽게 생겼니?” 내 말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해라, 너 너무 독한 거 아니야?” 구연준의 표정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도로 어두워졌다. 나는 짜증이 밀려와 인상을 찌푸렸다. 더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그를 밀어내고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구연준이 더 빨랐는데, 거칠게 문을 걷어차고 내 팔을 낚아챈 것이었다. “구연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불법침입으로 신고할 거야!” 나도 화가 나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분노에 찬 손바닥으로 그의 뺨에 내려쳤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호한 힘으로 나를 문 밖으로 끌어내더니 차에 밀어 넣었다. “구연준, 미쳤어? 당장 내려줘!” “서라 병세가 위중해.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구연준은 거칠게 액셀을 밟았고, 차는 한밤의 도로를 빠르게 질주했다. 나는 황당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난 의사도 아니잖아.” 구연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창에 비친 남자의 옆얼굴은 굳어 있었고, 속도를 높이기만 했다. 내 마음속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차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강서라가 갑자기 대량 출혈을 일으켜 응급 수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건, 강서라의 혈액형이 희귀해서 수혈용 혈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연준이 나를 강제로 끌고 왔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유를 듣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강서라한테 피를 줘야 하는데? 강서라 목숨은 소중하고, 내 목숨은 하찮다는 거야?” 구연준은 냉정하게 말했다. “수혈하지 않으면 서라는 죽어. 너야 피 좀 뽑고 회복하면 그만이지만.” 그러고는 더한 말을
나는 구연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젠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바로 비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았어? 강서라랑 강서혁, 나랑 같은 아버지를 둔 이복남매야.” 구연준의 눈이 더 크게 흔들렸다. “이복남매...? 그런데 쟤네와 너의 나이 차이는 고작 두 살인데...” “그렇지. 우리 개만도 못한 아버지가 내가 한 살 때부터 바람을 피웠던 거야.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였을지도 모르지.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든 쫓아내려고 갖은 수를 쓰더니, 결국 저 여우 같은 여자랑 그 자식들을 집에 들였지.” 구연준은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강해성과 장수현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런 이야긴 한 번도 한 적 없으셨잖아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마치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집안의 치부를 굳이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너, 평소에 그렇게 똑똑하다고 자부하더니, 한 번도 의심해 보지는 않은 거야?” ‘이렇게 희귀한 RH-혈액형인데, 나랑 강서라가 같은 혈액형이면 누가 봐도 수상한 거 아냐?’ 구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알겠어? 왜 내가 강서라를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강서라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지.” 나는 구연준이 진실을 알고 나면, 강서라에게 속았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나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빠르게 새로운 논리를 찾아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잘못한 건 서라가 아니잖아. 아무 죄도 없는 서라가 그런 몹쓸 병에 걸린 건 정말 억울한 일이라고.” ‘뭐??’ 나는 어이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강서라는 우리 집안에 들어오면서부터 내 것은 모두 빼앗으려 했어. 나는 언제나 양보해야 했고, 괴롭힘을 당했지. 그래도 죄가 없다는 거야? 지금도 내 약혼자,
간호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면제를 복용하셨어요?” “네, 자기 전에 두 알 먹었어요. 지금...’ 나는 수술실 문 위의 전자시계를 흘깃 바라보았다. “대충 4시간 정도 지났어요.” 간호사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안 돼요. 혈액 검사에서 바로 탈락이에요.” 나는 두 손을 들어 보이며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느긋하게 말했다. “죄송하게 됐네요. 제가 일부러 안 도와주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요.” 강해성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날뛰었다. “강해라, 너 우리한테 장난친 거야?! 수혈 못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진작 말하지 않았지?” ‘이게 억울할 일이야?’ 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대꾸했다. “저를 집에서 강제로 끌고 온 건 구연준이잖아요? 전 아무것도 몰랐다고요.” 이어서 시선을 천천히 돌려가며 세 사람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강해라...!” 구연준이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봤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 속이 다 시원하네.’ 세 사람의 꼴이 보기 좋을 정도였으니, 내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그때, 수술실 문이 벌컥 열렸고, 간호사가 다급하게 뛰쳐나와 외쳤다. “혈액이 모자라요! 헌혈자는 찾았어요? 1분 1초가 급하다고요!” 장수현은 그 말을 듣고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더니, 강해성을 붙잡아 앞으로 밀었다. “당신이 가서 뽑아요! 딸이 죽게 생겼잖아요!” 강해성은 눈에 띄게 망설였다. 자기 목숨은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장수현이 거칠게 강해성의 등을 때리자, 결국 어쩔 수 없이 간호사를 따라나섰다. 그때, 구연준이 팔을 걷어붙이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도 할게요. 제 피도 뽑아가세요!” ‘와, 정말 감동적인 희생정신이네.’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빈정거렸다. “근데 말이야, 네 몸속에는 내 피가 흐르잖아? 그러니까 네 피를 뽑는다는 건 결국 내 피를 간
“나 혼자 사는데 어디서 못 살겠어? 물건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변했잖아... 그 집에서 살면,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아.”나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 집 안의 모든 가구, 조명, 커튼 하나까지 전부 내 손으로 고르고 꾸민 곳이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애정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겐 그 어떤 것보다 어머니의 팔찌가 더 중요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금액이 얼만데?]“16억.” 사실 감가상각까지 계산하면 좀 더 낮춰야 했지만, 굳이 공정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날 먼저 배신한 사람이 누군데?’내가 굳이 구연준을 배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30억을 줄게. 대신 내일 바로 명의 이전하자. 그리고 네가 원할 때까지 살아도 돼.]‘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통 큰 척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필요 없어. 난 16억만 받을 거야. 한 푼도 더 안 받아. 그리고 최대한 빨리 나갈 거고.” 나는 추가로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괜히 더 받아 놨다가 나중에 ‘이 정도 줬으니 네가 나를 도와야지?’ 같은 헛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특히, 구연준의 병이 재발하면... 그 14억이 내 목숨값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연준은 내 단호한 태도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 그건 사실이잖아. 굳이 이렇게까지 선을...]“내일 보자.” 나는 남자의 감성팔이가 끝나기도 전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계산했다. 현재 내 손에 있는 돈은 30억 정도. 회사 계좌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 20억은 더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은 사실 합리적이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몇 년 전, 나는 구연준과 함께 비슷한 자선경매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본 재벌들은 체면을 위해 돈을 물 쓰듯 썼고, 한 점의 작품을 놓고도 원가의 몇 배를 들여 낙찰받는 일이 흔했다. 만약
‘진짜 악에는 악이 붙는 법이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강서라 같은 애들은 남자 다루는 데는 선수잖아? 지금은 화내도, 좀 있으면 또 징징거리면서 불쌍한 척하고, 몇 마디 달콤한 말 던지면 금방 풀릴걸?” 이윤서는 마치 전문가처럼 냉정하게 분석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난 차라리 둘이 엮여서 끝까지 잘 살길 바라.” 진심이었다. 이윤서는 내 얼굴을 가만히 살피더니,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해? 구연준이 다시 기어와도 진짜 안 흔들릴 자신 있어?” 나는 곧바로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 인간이 나를 그렇게 우습게 만든 걸 다들 아는데, 내가 다시 받아주면 바보가 되는 거지. 사람들한테 ‘없는 남자한테 미쳐서 매달리는 여자’로 보이기 딱 좋아.” 그리고, 나는 덤덤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너도 말했다시피, 걔가 나한테 다시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해서가 아니라, 강서라랑 비교해 보니까 나한테서 얻을 게 더 많기 때문’이잖아.”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구연준 같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오직 자기 자신만 사랑할 뿐.’ ‘그런 놈과 다시 엮이면,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을 거야.’ 이윤서는 내 확고한 태도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음 그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 혹시라도 이혼하면서 돈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 말하고. 내가 도와줄게.” “응, 고마워.” ...이윤서와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밤 10시쯤, 퇴근하려던 찰나에 작은이모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이모?” 그런데 작은이모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해라야! 네 엄마가 예전에 팔았던 양지백옥팔찌, 드디어 찾았어!]“정말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팔찌를 찾았다고요? 어디서요?” [이번 달 말에 노블옥션이 Y시에
‘그래, 내 처지는 힘들어. 어릴 때부터 그랬지.’ 강씨 집안이 아무리 부유해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단지 이름만 올려져 있는 강씨 집안의 장녀일 뿐이니까. 운 좋게 내 손으로 만든 패션 브랜드가 잘 자리 잡긴 했지만, 고작 몇 년 된 신생 브랜드였다. 여태 벌어들인 돈도 전부 그 ‘신혼집’ 인테리어에 쏟아부었으니, 내 손에 남은 건 없었다.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 어차피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괜히 강서라가 알면 또 소란 피울 테니까.” 나는 덤덤하게 말한 뒤, 구연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바닥을 쳤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가정법원 정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때, 핸드폰에서 ‘띵동’ 소리가 울렸다. 구연준이었다. [걱정하지 마. 서라는 모를 거야. 네가 나한테 해준 걸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보상이야.]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개X끼, 그래도 아주 조금은 양심이 남아 있긴 했네.’ 하지만... 나는 이 늦어도 한참 늦은 ‘양심’이 더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나쁜 놈이었다면, 나도 미련 없이 완전히 끊어낼 수 있었을 테니까. 이렇게 한 발 뒤늦게 후회하고, 미련을 보이고, 가끔 마음을 흔드는 태도가 나를 더 지치게 했다. ‘아니야. 정신 차려, 강해라.’ 나는 몇 초간 메시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시 이성을 붙잡았다. ‘이미 본색을 드러낸 놈이야. 아무리 미안하다는 듯 굴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구연준과의 대화창을 닫고, 오늘 예약했던 이혼 신청을 취소했다. 그리고 다시 날짜를 확인했다. ‘또 보름 뒤?’ 이젠 웃음도 안 나왔다. ...저녁.이윤서가 저녁을 먹자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싱글 복귀 기념 축하 파티야! 빨리 나와!] ...나는 축하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
장수현은 이미 잔뜩 화가 나 있었고, 하필 내가 타이밍 좋게 그녀의 분노를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저는 구연준한테 전화한 건데, 강서라가 제멋대로 받은 걸 왜 저한테 따지시는 건데요?” 억울함에 나도 바로 맞받아쳤다. “제발 그렇게 독기 좀 품고 살지 마세요. 괜히 딸한테 그 화가 다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강해라! 이 독한 X!]장수현은 고함을 질러대다 결국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 너는 평생 병원 신세 지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봐!] 나는 장수현과 더 말싸움할 기운도 없었다. 지겨웠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구연준이 병실에 핸드폰을 두고 갔는지.” [연준이는 이제 네 제부야! 조심해야 하는 관계라는 걸 왜 몰라? 할 말 있으면 다른 사람 통해서 전하던가! 너, 아직도 미련 못 버리고 연준이한테 기웃거리는 거잖아! 서라가 빨리 눈치채서 망정이지!]‘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억울함을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울컥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꼭 전해주세요, 그쪽의 사위이자 제 제부한테요!” “저, 지금 가정법원 앞에 있어요. 예약한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빨리 와서 이혼 서류에 도장 찍으라고 전하세요! 안 그러면 당신 딸을 죽을 때까지 불륜녀 꼬리표를 뗄 수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내 말이 제대로 박혔는지, 10분쯤 지나 구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라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오늘 갑자기 출장이 잡혔는데, 지금 다른 지역에 와 있어서 갈 수가 없어.]나는 화를 꾹 참으며 조용히 물었다. “내가 어제 미리 연락했는데, 그걸 알고도 오늘 출장을 갔다고?” [예정에 없던 일이었어. 다른 지사가 갑자기 문제를 일으켜서 직접 해결해야 했던 거야.] 그는 나름 진지한 말투였지만, 난 조금도 믿지 않았다. ‘GD그룹이 아무리 크다지만, 대표이사가 직접 내려가야 할 정도의 일이 생긴다고?’ ‘부대표, 임원들만 해도 수십 명인데, 그중에 해결할 사람이
“뭐...?”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곧 냉소가 터져 나왔다. “강서라, 이제야 드디어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네.” 그동안 순진한 척, 착한 척, 불쌍한 척 온갖 연기를 해왔던 사람. 내가 혼나고, 맞고, 벌을 받을 때마다 곁에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언니 잘못 없어요’라고 감싸던 사람. 이제 와서 그 가면을 벗어 던진 건가? [내가 언제 가면을 썼다고 그래? 난 원래 이랬어. 언니가 내 진짜 모습을 인정 못 하는 거겠지.]강서라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한숨을 내쉰 나는 더 이상 말싸움을 할 생각이 없어졌다. “됐고, 구연준한테 전해. 오늘 오후 2시, 가정법원에서 보자고. 예약 어렵게 잡은 거니까 또 미루지 말라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강서라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잠깐! 최근에 연준 오빠가 언니를 찾아갔었지?]강서라의 목소리가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처럼 나긋나긋한 척도 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둘이 싸웠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그래, 왔었어. 그게 왜?” [언니,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연준 오빠는 이제 내 남편이야! 감히 내 남편을 몰래 만나다니, 두 사람, 간통죄로 고소당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냐고!]강서라가 갑자기 폭발하듯 고함쳤다. 나는 황당해서 피식 웃었다. “간통죄? 그건 너랑 구연준한테나 해당되는 거지,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너 혹시 암세포가 뇌까지 번진 거 아니야?” [강해라, 감히 날 저주해?! 넌 진짜 못된 X이야!] 강서라는 악다구니를 퍼부었지만, 나는 지겨워서 한 마디만 던졌다. “이혼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넌 당당한 부인이 될 거고, 난 자유로워질 거야. 그러니까 구연준한테 빨리 좀 이혼하라고 해.”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진심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아침부터 재수 없는 X이랑 이야기해서 기분만 잡쳤네.’ ...내가 회사로 가는 길에서 구연준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짜증이
소유찬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며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손님은 귀한 분이고, 고객은 왕인데요...” 그러자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답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일반 사람이고 싶습니다.” 남자의 재치 있는 농담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사람, 의외로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구나.’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알겠습니다. 기억할게요, 유찬 씨.” “해라 씨, 오늘 고생 많았어요. 안녕히 가세요.” 남자의 말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절제된 품격이 느껴졌다. 우리는 인사를 마친 후, 소유찬은 운전기사에게 마지막까지 신신당부했다. “꼭 조심해 주십시오. 강 대표님과 보조 선생님을 안전하게 모셔다드려야 합니다.” “네, 도련님.” 소유찬은 내게 마지막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연스럽게 검은색 아우디로 향했다. 이미 열린 문을 지나 차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나는 순간 의아했다. ‘저렇게 권력 있고 재력 있는 사람이... 차는 의외로 평범하네.’ 겉으로 보기엔 그냥 흔한 외제차. 하지만 저렇게 검소한 모습이 오히려 소씨 가문의 신비로움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 같았다. ‘소문대로, 소씨 가문은 조용하고 절제된 사람들이었나 봐.’ ...차가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소유찬의 차는 내가 탄 차의 바로 앞에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채유리는 창밖을 보며 무도산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앞차를 따라가며 자꾸만 소유찬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이상했다. ‘이게 뭐라고...’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꼭 쥐었다가 살짝 풀었다. 그리고 소유찬의 허리를 감싸던 순간의 감촉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아니, 뭐야.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펼친 손을 무릎 위에 쓸어
나는 옷감 위로도 남자의 단단한 하체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탄탄하면서도 강한 힘이 깃들어 있는 하체는 아주 대단했다. ‘대략 봐도 허리-힙 비율이 0.8 정도겠는데...’ 넓은 어깨에 비해 날렵한 골반, 길게 뻗은 다리와 큰 키. 완벽한 체형이었다. 전문 남성 모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리야, 다 기록했어?” 나는 일부러 자연스러운 척하며 채유리를 향해 말을 건넸다. “네, 빠짐없이 메모해 뒀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구를 정리한 후, 손님들에게 각자의 의류 선호도를 하나하나 물었다. 예를 들면, 몸에 꼭 맞는 핏을 원하는지, 아니면 여유로운 핏을 원하는지 묻는 것이었다.원피스도 마찬가지였다. 연령대가 높은 분들은 롱드레스를, 젊은 층은 미니 원피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태블릿에 꼼꼼하게 기록하며 후속 디자인 작업을 준비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강 대표, 점심 같이하고 가는 게 어때?” 민현주가 자연스럽게 초대했지만, 나는 민폐가 될까 봐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직 할 일이 많아서요.” 소유찬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단정한 이목구비를 찡그렸다. “저도 점심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그래?” 민현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침 잘됐네. 유찬아, 강 대표를 배웅해 드려라.” “아, 괜찮습니다. 저는...” “강 대표님, 가시죠.” 내가 사양하려던 찰나, 소유찬이 손을 들며 자연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남자의 태도는 예의 바르고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넘볼 수 없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별다른 선택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마침 잘됐네. 이 기회에 손수건도 돌려줄 수 있겠어!’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가방을 채유리에게 건넸다. “유리야, 차에서 기다려.” 그리고는 조심스레 주머니에 곱게 접힌 손수건을 꺼냈다. “유찬 도련님, 돌려드릴 게
“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는 소유찬의 시선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채유리가 내 옆에서 서서 내 얼굴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어딘가 묘하게 장난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긴장되었다.“팔을 들어서 수평으로 맞춰 주세요.”나는 좀 더 긴 줄자를 집어 들고 공손하게 안내하며 몸을 돌렸다. 소유찬이 내 앞에 서자,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뒤로 돌아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이 사람, 키가 거의 190cm에 육박했다. ‘와... 엄청 키가 크시네.’ 나는 172cm라 그나마 나았지만, 조금만 더 작았으면 난장판이었을 터였다. 어쩌면 치수를 재려고 의자라도 가져와야 했을지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협조했고, 나는 무사히 상반신 치수를 쟀다. 문제는 허리랑 엉덩이둘레를 재는 것이었다. ‘앞에서 안아야 할까, 뒤에서 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여인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시선이 전부 내 쪽으로 쏠려 있는 게 느껴졌다. ‘왜, 왜 다들 나를 쳐다보는 거지...?’ 나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귀 끝이 괜히 뜨거워지더니,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강 대표님, 왜 그러세요?”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소유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아무것도... 그냥, 키가 너무 크셔서요.” 나는 얼떨결에 입을 열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후회했다. “그럼 제가 쪼그려 앉을까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결국 결단을 내렸다. 살짝 이를 악물고 남자의 허리 앞으로 몸을 기울여 양팔을 감싸듯 줄자를 둘렀다. ‘이렇게 가까이서 남자를 안아본 게 언제였더라...’ ‘아니, 동년배 이성 중에서는 구연준을 제외한 남자와 이렇게 밀착한 적이 없었는데...’ 물론 이전에도 남성 고객의 치수를 잰 적은 있었지만, 보통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내가 직접 할 필요는 없었
민현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 일은 강 대표와 상관없잖아. 강 대표는 피해자일 뿐이지.”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럼 강 대표는 아직도 구씨 집안 아들을 사랑하는 거야?” 나는 다음 사람의 치수를 재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니요, 지금은 오직 일만 생각하려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단 쪽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나도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말을 이었다. “유찬이가 내려오네? 혹시 일하는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이제 마무리됐어요.” 맑고 깨끗하면서도 낮게 울리는 목소리. 순간, 나는 결혼식장에서 내게 손수건을 건네던 ‘유찬 도련님’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남자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했으며, 소란스러운 공간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무심결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마침내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결혼식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저 사람이 저렇게 젊고 잘생겼었나?’ 칼같이 반듯한 짙은 눈썹, 깊고 또렷한 눈매, 단정하면서도 강렬한 분위기. 키는 크고 허리는 곧게 펴져 있어, 군인처럼 단정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는 온몸에서 강한 기품과 위엄을 뿜어냈다. 하지만 말투나 표정에서는 거만함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이었다. 나는 사실 예전부터 ‘소유찬’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연준이 소유찬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구연준이 사업에서 몇 번이나 중요한 계약을 놓친 적이 있었는데, 그 모든 건이 소유찬에게 돌아갔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소유찬? 조상 잘 만난 덕에 세상 쉽게 사는 놈이지. 권력 믿고 밀어붙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그 말을 들은 나도 자연스레 소유찬을 오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