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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작가: 오색별빛
구연준이 굳어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장수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야 사람답게 말하네. 어차피 한집안 식구인데, 언니가 동생한테 양보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냥 네가 동생한테 주는 결혼 선물이라고 생각해!”

나는 연달아 냉소를 터뜨리며 장수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한 가지 더 선물해야겠네요.”

“뭐라고?”

장수현이 눈살을 찌푸리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이요.”

“결혼식장 한가운데에 놓을 관.”

“강해라!”

장수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장수현은 분노에 휩싸여 나를 노려보았지만, 나는 더욱 부드러운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옛날에는 여자가 시집갈 때 친정에서 혼수로 관을 준비했다잖아요. 신부가 시댁으로 갈 때 함께 가져가는 물건 중 하나였죠. 제가 언니로서 전통을 지키는 게 못마땅하다는 말씀이세요?”

논리적으로 완벽한 나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고, 그저 쓴맛을 삼키듯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조금 전 내가 터뜨린 폭죽처럼, 이건 엄연히 ‘축하’의 의미였다.

물론 속내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액운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기에, 결국 그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 사람들은 나를 힘으로 짓누르며 억울함을 삼키게 했다.

‘저 사람들은 나한테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항변할 기회를 준 적이 없었어.’

‘이젠 저 사람들도 분하고 화나는 감정이 뭔지 똑똑히 알아야 할 차례라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장수현이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당장 나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는지, 장수현은 강해성에게 화살을 돌렸다.

“당신 딸 좀 보세요! 저 독사 같은 심보를 좀 보라고요! 자기 동생을 미친 듯이 저주하는데, 당신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예요?!”

강해성의 얼굴도 잔뜩 일그러졌다.

강해성이 장수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친 기세로 나를 향해 다가오자, 구연준이 긴장한 표정으로 급히 나섰다.

“장인어른, 진정하시고 대화로 해결하시죠.”

강해성은 구연준에게 가로막히고도 나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서 서라한테 사과하지 못해?!”

‘사과? 웃기시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교양도 없고, 장례 예법도 모르는 당신들 잘못이지, 저는 잘못한 게 없다고요!!”

내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강해성은 갑자기 손을 들어 내 뺨을 내려치려 했다.

“장인어른!!”

하지만 구연준이 그 앞을 가로막았고, 그 덕에 강해성의 손바닥은 나 대신 구연준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그 순간, 강서라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아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구연준은 순간적으로 멍해진 듯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나를 보호하며 말했다.

“장인어른, 폭력이 해결책이 될 순 없습니다. 이건 제 잘못이에요. 해라를 제대로 안심시키지 못한 제 책임이라고요. 시간을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강해성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원래부터 고혈압과 당뇨가 있던 강해성에게 이 정도의 분노는 상당한 부담이었을 터였다.

강해성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헐떡이며 말했다.

“네가... 네가 알아서 해결해.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땐 저 X의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야!”

구연준은 연신 고개를 끄덕인 후, 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해라, 우리 잠시 얘기 좀 하자.”

“아니, 난 너랑 할 얘기 없어.”

나는 몸을 돌려 나가려 했지만, 구연준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러면 해결이 안 돼. 우린 다 같은 가족인데...”

‘가족?’

그 한마디에 나는 속이 뒤틀렸다.

“네가 감히 가족이란 단어를 입에 담아?”

나는 구연준의 손을 뿌리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놔.”

“얘기 좀 하자니까?”

“놓으라고!”

나는 힘껏 팔을 뺐지만, 구연준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나는 반대편 손을 들어 구연준의 뺨을 후려쳤다.

찰싹!

병실 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강서라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언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연준 오빠를 왜 때려!! 오빠한테 시집가겠다고 한 건 나야. 그러니까 화풀이ㅎ해도 나한테 해야 한다고!!”

나는 병상에 앉은 강서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쓰레기를 때리는 데도 이유가 필요한가?”

“그리고 너? 너한텐 굳이 손 안 대도 돼. 곧 저승사자가 널 데리러 올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표정이든, 얼마나 분노하든 나는 문을 세차게 열고 그대로 병실을 나섰다.

차에 올라탄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머릿속이 서서히 진정되기 시작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 밀려오는 서글픔은 가라앉지 않았다.

저런 가족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비참했다.

‘나는 구연준을 만나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

‘하지만 그 사람이 나한테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긴 거라고.’

지난 몇 년 동안, 구연준을 살리기 위해 내가 감당했던 모든 희생이 떠오르자, 내장이 죄어들 듯 고통스러웠다.

마치 심장을 찢어 먹는 맹수의 발톱이 내 몸속을 휘젓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갑자기 울린 핸드폰 벨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이윤서였다.

“여보세요...”

[사모님, 혹시 우리 점심 약속을 잊으신 거예요?]

[지금 어디세요? 혹시 구 대표님께 붙잡히신 건 아니죠?]

이윤서는 내가 이틀 동안 겪은 일을 모른 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참, 며칠 전에 윤서랑 점심을 약속했었지?’

‘원래는 결혼식 리허설에 관해 이야기하려던 자리였지만...’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야.”

이제 결혼식 리허설은 필요 없게 됐지만, 이 일은 절친인 이윤서에게 꼭 알려야 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이윤서는 나를 보고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뭐야, 얼굴이 왜 그래? 또 집안일로 싸운 거야?”

이윤서가 걱정이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이윤서는 내가 가족들과 어떤 관계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절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윤서야, 결혼식은 없던 일로 할 거야.”

차를 따르던 이윤서는 손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뭐? 장난하지 마. 결혼식이 당장 다음 주인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마음이 텅 빈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결혼식은 그대로야. 신부만 바뀌었거든.’

이윤서는 찻잔을 내려놓더니, 테이블을 돌아 나에게 다가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너 열 있는 거 아니야? 정신 나간 소리 좀 그만해.”

나는 이윤서의 손을 잡아 내리고, 의자에 앉혔다.

이제 곧 충격을 받을 테니, 미리 넘어지지 않게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이틀 동안의 일을 짧게 정리해 들려주었고, 이윤서는 점점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떡 벌린 채 굳어버렸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미친! 구연준 완전히 미친 거 아니야? 강서라 이마에 ‘남자에 미친 여우’라고 쓰인 게 안 보이는 거야? 결혼식 신부를 바꾸면, 하객들한테 조림돌림 당하는 건 생각도 안 한 거냐고! 스스로 무덤을 파도 정도가 있지!!”

이윤서는 격분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그 소리에 주변 테이블이 손님들이 놀라 나를 쳐다보았다.

“안 되겠다, 당장 전화해서 따져야겠어!”

이윤서는 불같이 성을 내며 핸드폰을 들었지만, 지친 나는 차를 홀짝이며 이윤서를 말리지 않았다.

이윤서는 전화를 받자마자 분노를 토해냈다.

“구연준, 너 강서라한테 주술이라도 걸린 거야? 걔가 병에 걸리든 말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

“해라가 너랑 6년이나 함께하면서 네 병 고치려고 어떤 헌신을 했는지는 벌써 다 잊은 거야?”

“해라가 피를 얼마나 뽑아가며 널 살린 건지 알기나 해?! 해라가 없었으면 네 묘비엔 잡초가 한가득이었을 거야, 이 배은망덕한 X자식아!”

“그리고, 너 언제부터 강서라랑 붙어먹은 거야? 혹시 이미 갈 데까지 간 거 아니야? 내가 나쁜 놈은 수도 없이 봤지만, 너처럼 뻔뻔한 놈은 처음이야!”

“네가 아무리 유명한 놈이어도 그렇지, 결혼식에서 창피당할 생각은 안 하는 거야? 아, 아니지. 네 정신머리로는 그런 상상도 못 하려나?”

“...”

이윤서는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고, 무려 5분이 넘도록 멈추지 않았다.

바로 그때, 레스토랑 직원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손님,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나는 더 이상 창피를 당하고 싶지 않아, 이윤서의 핸드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었다.

“왜 끊어?! 난 아직 할 말이 남았다고!”

이윤서는 발끈하며 다시 전화를 걸려고 했다.

“구연준만이 아니라, 강서라한테도 욕을 해줘야 한다고! 병에 걸리면 다인 줄 알아? 감히 친언니의 약혼자를 빼앗다니, 그게 사람이야?!”

이윤서는 통제력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난 듯했고, 나는 이윤서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조용히 차를 따라주었다.

“됐어, 남들 밥맛 떨어지게 하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해.”

이윤서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사람들이 우리를 흘끔거리는 것을 보고서야 억지로 화를 참았다.

“그나저나, 구연준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설마... 강서라를 사랑하는 걸까?”

이윤서는 호기심 어린 어투로 조용히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 하지만 확실한 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비열하고 기괴한 짓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강서라는 정신병자야. 어린 시절부터 네가 가진 건 뭐든 뺏으려 했잖아. 근데 그걸 구연준이 모른다고?”

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

“구연준은 늘 내가 예민하게 구는 거라고 했어. 강서라한테 편견을 갖지 말라고도 했지.”

이윤서는 화가 치밀어 계속해서 차를 들이켰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떠올랐는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근데... 구연준은 강서라랑 강서혁이 네 이복동생인 건 알고 있어?”

“글쎄, 내가 말한 적은 없지만,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어.”

나에게 가족 문제는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모든 상처를 보이고 싶진 않을 정도로.

사랑이 식는 날이 오면, 가족 문제라는 치부는 모두에게 알려진 것이고, 결국 상대방이 나를 해치는 무기가 될 것이었다.

“모를 수도 있다고?”

이윤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 기대되는데? 언젠가 구연준이 강서라의 민낯을 알게 된다면, 무릎 꿇고 후회하면서 오열하는 날이 오겠지?”

나는 말없이 웃었다.

‘구연준이 후회하든 말든, 이젠 나랑 아무 상관 없어.’

식사를 마친 후, 이윤서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회사라도 건졌다는 거야. 남자 따윈 잊어버려. 이제 본격적으로 커리어에 집중해야지!”

그 말에 나는 문득 잊고 있던 법인 변경 절차를 떠올렸다.

“맞아, 넌 정말 현실적이야. 이젠 남자 따위로 감정 소모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윤서야, 나 이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번 일이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된 걸지도 몰라. 사람을 제대로 알아볼 기회가 된 거니까.”

이윤서와 헤어진 후, 나는 오후에 구연준을 만나 법인 변경 절차를 진행하기로 했고, 구연준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약속을 받아들였다.

약속 장소에서 구연준을 마주했을 때, 구연준의 반쪽 얼굴에는 아직도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깔끔한 외모에 우스꽝스러움이 더해진 모습은 더욱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

“빨리 움직여. 이 일을 처리하는 대로 가정법원에 가서 이혼 신청도 해야 하니까.”

나는 느릿느릿 걸어오는 구연준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재촉했다.

혼인 신고를 한 지 이제 막 한 달.

이럴 줄 알았다면, 괜히 5월 20일에 맞춰 기념일 타령하며 일찍 줄 서는 게 아니었다.

구연준은 우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법인 변경을 마친 후, 우리는 곧장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이혼 신청이 바로 되는 게 아니란다.

먼저 예약하고, 그 후에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이혼 숙려 기간이 지나고 나서도 쌍방이 여전히 이혼을 원해야만 최종적으로 이혼이 성립된다고 했다.

‘뭐? 바로 안 된다고?’

당황스러움과 짜증이 밀려온 나는 핸드폰을 꺼내 즉시 예약을 시도했지만, 가장 이른 날짜는 보름 후 오후였다.

즉, 구연준과 강서라가 결혼식을 올리는 날, 나는 법적으로 여전히 구연준의 아내라는 뜻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X같은 상황이야?’

나는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화가 났는데, 옆에서 구연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급할 필요는 없어. 서라가 재촉하진 않으니까.”

나는 눈을 번쩍 뜨며 구연준을 노려보았고, 구연준은 차마 내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흠칫 놀랐다.

나는 한참 동안 구연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피식 웃었다.

“재촉하진 않는다고? 그날까지 본인이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건가?”

순간, 구연준의 얼굴이 굳었다.

이혼 절차가 이렇게 복잡한 이상, 내가 조금이라도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1년이고 2년이고 이혼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강서라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어도 상관없다. 법적으로 강서라는 남의 남편을 가로챈 불륜녀일 뿐이니 말이다.

구연준은 이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지만, 내게 한 걸음 다가서며 특유의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냥... 우리 헤어지지 말까? 어차피 나중에 재혼할 텐데, 불편하게 여길 왔다 갔다 할 필요는 없잖아.”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동안 멍하니 구연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서라가 죽으면 나랑 재결합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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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서라는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흐느끼며 말을 꺼냈다. ‘뭐야, 이건? 설마 지금 공개적으로 불쌍한 척하면서 도덕적 압박을 가하려는 거야?’ 나는 속으로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언니가 연준 오빠와 저의 사랑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마음의 짐을 덜고 세상을 떠날 수 있게 되었어요. 부디 우리 언니를 욕하지 말아 주세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언니니까요.” 강서라가 울먹이며 말을 마치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롱과 수군거림이 가득했던 하객들은 이제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객석을 천천히 훑었다. ‘어?’ 분명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한쪽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얼굴이 보였다. 잘생긴 외모, 차가운 눈빛,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 그 남자는 다른 사람들처럼 강서라의 연기에 휘둘리지 않고, 흥미롭다는 듯이 비웃고 있었다. 강서라는 내게 돌아서더니,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고마워. 나... 언니 마음속 진심이 듣고 싶은데, 혹시... 나를 원망해?” ‘뭐?!’ 나는 온몸이 얼어붙었다. ‘이게 진짜 미쳤나?!’ 강서라는 온 하객을 도덕적으로 묶어 놓고도 모자라, 이제는 내 입에서 강제로 ‘괜찮다’는 말을 끌어내려고 했다. ‘이 정도면 연기 대상감인데? 나보고 지금 여기서 뭐라고 하라는 거야? 감동적인 자매애라도 연출하라고?’ 순간에 나도 구역질이 올라왔다. 사회자는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재빨리 다른 마이크를 내밀었다. 참고 참았던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더는 못 참아.’ 나는 마이크를 받아 들고, 차분한 미소를 띠며 몸을 돌렸다. “사실...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오?”“남편을 뺏긴 사람이 오히려 감사한다고?”“...”순간, 하객석에서 일제히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서라야, 네가 가져간 건 내 남자가 아니라, 내 골칫거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9화

    결혼식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객들은 일제히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기 바빴다. ‘아, 이거 완전 난장판이네. 그래, 더 망가져라.’ 나는 힘없이 맞고만 있었고,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다행히도 구연준 부모가 체면을 차리려는 듯 황급히 나섰다. “사돈! 사돈! 이건 아이들의 결혼식입니다! 하객들이 다 보고 있어요! 제발 그만하세요!” “사돈! 막지 마세요! 오늘 이 불효막심한 X을 당장 죽여버릴 거예요! 이 재수 없는 X! 태어나길 잘못 태어났어!” 강해성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빛은 광기에 휩싸였다. 주변에서 그를 말리던 사람들도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장수현의 외침이 퍼지자, 강해성의 동작이 딱 멈췄다. “그만해요! 서라가 쓰러졌다고요! 사람 좀 불러요! 어서요!” 강해성은 나를 거칠게 밀쳐내고 황급히 돌아섰다. “뭐라고? 서라야! 어떻게 된 거야? 119는 불렀어? 당장 불러!” 내 주변을 둘러싸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지고, 모두가 기절한 신부에게 몰려갔다. 구연준은 안절부절못하며 강서라를 안아 올렸다. “서라야! 버텨, 제발! 병원으로 데려갈게! 정신 차려!” 나는 무너진 결혼식을 바라보며 뺨의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속은 너무도 후련했다. ‘나, 결국 미쳐버린 건가? 왜 이렇게 짜릿하지?’ 나는 마이크를 낚아채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객 여러분, 죄송합니다.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드렸네요. 하지만 오늘 준비된 식사는 아주 훌륭하니, 맛있게 드시고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그대로 무대를 내려왔다. 미련도, 후회도 없었다. 차에 올라탄 나는 크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젖혔고, 햇빛 가리개를 내리고 작은 거울을 보았다. 양쪽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다행히 피부가 찢어지지는 않았다. 머리는 조금 헝클어졌지만, 손으로 몇 번 정리하면 될 정도였다. ‘뭐, 이 정도는 가벼운 수준이지.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10화

    ‘내 결혼식이었던 곳에 그 사람이 직접 왔다고?’ ‘이해가 안 되는데? 혹시 뭔가 착각한 건가?’ ‘근데 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오랜만에 이런 대형 사고를 봤으니, 나름 볼만했겠네.’그 순간, 핸드폰이 울리면서 엉켜 있던 생각들이 단번에 끊겼다. 전화기 너머로 이윤서의 격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연준이랑 강서라, 진짜 역대급 쓰레기야! 나 지금 열 받아서 핸드폰 던질 뻔했다니까?! 근데 너도 안 밀리더라? 아주 제대로 참교육했어! 속이 다 시원해!] 나는 한숨을 쉬며 좌석에 기대어 이마를 짚었다. “설마 벌써 인터넷에 퍼진 거야?” [당연하지! 이런 희대의 막장 드라마가 어딨어?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하면 어쩌라는 거냐고. 지금 커뮤니티마다 난리도 아니야, 의견 갈려서 전쟁 수준이라고.] 나는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복수하고 싶었던 건 맞는데... 나까지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건 원하지 않았어.’ ‘이렇게 퍼지면, 내 일에도 영향이 갈 텐데...’ [해라야, 너 괜찮아? 너 맞는 거 봤어.]격분하던 이윤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몇 대 맞았을 뿐이잖아.” [네 아버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것도 하객들 보는 앞에서? 말도 안 돼! 거기에 내가 갔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같이 싸워서 한 대라도 더 날렸을 텐데!]원래 이윤서는 내 결혼식의 들러리였다. 드레스까지 다 맞춰 놓긴 했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 엮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내가 일부러 오지 못하게 했다. 외할머니와 작은이모도 마찬가지였다. “강해성은 내 아버지가 아니야. 이미 인연을 끊었으니까.” 나는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잘했어! 그런 인간은 ‘아버지’ 불려선 안 돼. 그딴 인간이 네 아버지라는 건 네 인생 최대의 불행이니까.]“응...” 나는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 일을 어떻게든 조용히 마무리해야 하는데...’ ‘회사나 내 일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11화

    ‘사람이 죽게 생겼다고?’ 나는 수면제 기운에 정신이 몽롱한 채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구연준을 보며 비웃듯 말했다. “강서라가 죽게 생겼니?” 내 말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해라, 너 너무 독한 거 아니야?” 구연준의 표정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정도로 어두워졌다. 나는 짜증이 밀려와 인상을 찌푸렸다. 더 말싸움하고 싶지 않아 그를 밀어내고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구연준이 더 빨랐는데, 거칠게 문을 걷어차고 내 팔을 낚아챈 것이었다. “구연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불법침입으로 신고할 거야!” 나도 화가 나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분노에 찬 손바닥으로 그의 뺨에 내려쳤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호한 힘으로 나를 문 밖으로 끌어내더니 차에 밀어 넣었다. “구연준, 미쳤어? 당장 내려줘!” “서라 병세가 위중해.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구연준은 거칠게 액셀을 밟았고, 차는 한밤의 도로를 빠르게 질주했다. 나는 황당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난 의사도 아니잖아.” 구연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창에 비친 남자의 옆얼굴은 굳어 있었고, 속도를 높이기만 했다. 내 마음속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차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나는 강서라가 갑자기 대량 출혈을 일으켜 응급 수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건, 강서라의 혈액형이 희귀해서 수혈용 혈액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구연준이 나를 강제로 끌고 왔다는 점이었다. 나는 이유를 듣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내가 왜 강서라한테 피를 줘야 하는데? 강서라 목숨은 소중하고, 내 목숨은 하찮다는 거야?” 구연준은 냉정하게 말했다. “수혈하지 않으면 서라는 죽어. 너야 피 좀 뽑고 회복하면 그만이지만.” 그러고는 더한 말을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12화

    나는 구연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젠 숨길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 바로 비웃으며 말했다. “이제 알았어? 강서라랑 강서혁, 나랑 같은 아버지를 둔 이복남매야.” 구연준의 눈이 더 크게 흔들렸다. “이복남매...? 그런데 쟤네와 너의 나이 차이는 고작 두 살인데...” “그렇지. 우리 개만도 못한 아버지가 내가 한 살 때부터 바람을 피웠던 거야.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였을지도 모르지.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든 쫓아내려고 갖은 수를 쓰더니, 결국 저 여우 같은 여자랑 그 자식들을 집에 들였지.” 구연준은 충격을 받은 눈빛으로 강해성과 장수현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런 이야긴 한 번도 한 적 없으셨잖아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복잡한 표정이었다. 마치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은 사람처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집안의 치부를 굳이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잖아? 그런데 너, 평소에 그렇게 똑똑하다고 자부하더니, 한 번도 의심해 보지는 않은 거야?” ‘이렇게 희귀한 RH-혈액형인데, 나랑 강서라가 같은 혈액형이면 누가 봐도 수상한 거 아냐?’ 구연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좀 알겠어? 왜 내가 강서라를 본능적으로 밀어내고, 강서라가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지.” 나는 구연준이 진실을 알고 나면, 강서라에게 속았다는 걸 깨닫고, 자신이 나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빠르게 새로운 논리를 찾아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잘못한 건 서라가 아니잖아. 아무 죄도 없는 서라가 그런 몹쓸 병에 걸린 건 정말 억울한 일이라고.” ‘뭐??’ 나는 어이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머릿속이 하얘졌다. “강서라는 우리 집안에 들어오면서부터 내 것은 모두 빼앗으려 했어. 나는 언제나 양보해야 했고, 괴롭힘을 당했지. 그래도 죄가 없다는 거야? 지금도 내 약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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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30화

    “나 혼자 사는데 어디서 못 살겠어? 물건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변했잖아... 그 집에서 살면, 기분이 더러워질 것 같아.”나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 집 안의 모든 가구, 조명, 커튼 하나까지 전부 내 손으로 고르고 꾸민 곳이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여전히 애정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겐 그 어떤 것보다 어머니의 팔찌가 더 중요했다. [그래, 네가 원하는 금액이 얼만데?]“16억.” 사실 감가상각까지 계산하면 좀 더 낮춰야 했지만, 굳이 공정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날 먼저 배신한 사람이 누군데?’내가 굳이 구연준을 배려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30억을 줄게. 대신 내일 바로 명의 이전하자. 그리고 네가 원할 때까지 살아도 돼.]‘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통 큰 척이야?’ 나는 피식 웃었다. “필요 없어. 난 16억만 받을 거야. 한 푼도 더 안 받아. 그리고 최대한 빨리 나갈 거고.” 나는 추가로 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괜히 더 받아 놨다가 나중에 ‘이 정도 줬으니 네가 나를 도와야지?’ 같은 헛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특히, 구연준의 병이 재발하면... 그 14억이 내 목숨값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구연준은 내 단호한 태도에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 그건 사실이잖아. 굳이 이렇게까지 선을...]“내일 보자.” 나는 남자의 감성팔이가 끝나기도 전에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나는 냉정하게 현실을 계산했다. 현재 내 손에 있는 돈은 30억 정도. 회사 계좌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면 20억은 더 만들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은 사실 합리적이지 않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몇 년 전, 나는 구연준과 함께 비슷한 자선경매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본 재벌들은 체면을 위해 돈을 물 쓰듯 썼고, 한 점의 작품을 놓고도 원가의 몇 배를 들여 낙찰받는 일이 흔했다. 만약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9화

    ‘진짜 악에는 악이 붙는 법이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강서라 같은 애들은 남자 다루는 데는 선수잖아? 지금은 화내도, 좀 있으면 또 징징거리면서 불쌍한 척하고, 몇 마디 달콤한 말 던지면 금방 풀릴걸?” 이윤서는 마치 전문가처럼 냉정하게 분석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난 차라리 둘이 엮여서 끝까지 잘 살길 바라.” 진심이었다. 이윤서는 내 얼굴을 가만히 살피더니, 살짝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확실해? 구연준이 다시 기어와도 진짜 안 흔들릴 자신 있어?” 나는 곧바로 단호한 태도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 인간이 나를 그렇게 우습게 만든 걸 다들 아는데, 내가 다시 받아주면 바보가 되는 거지. 사람들한테 ‘없는 남자한테 미쳐서 매달리는 여자’로 보이기 딱 좋아.” 그리고, 나는 덤덤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너도 말했다시피, 걔가 나한테 다시 집착하는 이유는 ‘사랑해서가 아니라, 강서라랑 비교해 보니까 나한테서 얻을 게 더 많기 때문’이잖아.”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구연준 같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아. 오직 자기 자신만 사랑할 뿐.’ ‘그런 놈과 다시 엮이면,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는 거나 다름없을 거야.’ 이윤서는 내 확고한 태도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마음 그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 혹시라도 이혼하면서 돈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 말하고. 내가 도와줄게.” “응, 고마워.” ...이윤서와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밤 10시쯤, 퇴근하려던 찰나에 작은이모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이모?” 그런데 작은이모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해라야! 네 엄마가 예전에 팔았던 양지백옥팔찌, 드디어 찾았어!]“정말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팔찌를 찾았다고요? 어디서요?” [이번 달 말에 노블옥션이 Y시에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8화

    ‘그래, 내 처지는 힘들어. 어릴 때부터 그랬지.’ 강씨 집안이 아무리 부유해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 단지 이름만 올려져 있는 강씨 집안의 장녀일 뿐이니까. 운 좋게 내 손으로 만든 패션 브랜드가 잘 자리 잡긴 했지만, 고작 몇 년 된 신생 브랜드였다. 여태 벌어들인 돈도 전부 그 ‘신혼집’ 인테리어에 쏟아부었으니, 내 손에 남은 건 없었다.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 어차피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야. 괜히 강서라가 알면 또 소란 피울 테니까.” 나는 덤덤하게 말한 뒤, 구연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바닥을 쳤다. 나는 운전석에 앉아 가정법원 정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다. 그때, 핸드폰에서 ‘띵동’ 소리가 울렸다. 구연준이었다. [걱정하지 마. 서라는 모를 거야. 네가 나한테 해준 걸 생각하면, 이건 당연한 보상이야.]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개X끼, 그래도 아주 조금은 양심이 남아 있긴 했네.’ 하지만... 나는 이 늦어도 한참 늦은 ‘양심’이 더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나쁜 놈이었다면, 나도 미련 없이 완전히 끊어낼 수 있었을 테니까. 이렇게 한 발 뒤늦게 후회하고, 미련을 보이고, 가끔 마음을 흔드는 태도가 나를 더 지치게 했다. ‘아니야. 정신 차려, 강해라.’ 나는 몇 초간 메시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시 이성을 붙잡았다. ‘이미 본색을 드러낸 놈이야. 아무리 미안하다는 듯 굴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구연준과의 대화창을 닫고, 오늘 예약했던 이혼 신청을 취소했다. 그리고 다시 날짜를 확인했다. ‘또 보름 뒤?’ 이젠 웃음도 안 나왔다. ...저녁.이윤서가 저녁을 먹자며 메시지를 보내왔다. [싱글 복귀 기념 축하 파티야! 빨리 나와!] ...나는 축하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7화

    장수현은 이미 잔뜩 화가 나 있었고, 하필 내가 타이밍 좋게 그녀의 분노를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저는 구연준한테 전화한 건데, 강서라가 제멋대로 받은 걸 왜 저한테 따지시는 건데요?” 억울함에 나도 바로 맞받아쳤다. “제발 그렇게 독기 좀 품고 살지 마세요. 괜히 딸한테 그 화가 다 돌아갈 수도 있잖아요?”[강해라! 이 독한 X!]장수현은 고함을 질러대다 결국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래, 너는 평생 병원 신세 지지 말고 건강하게 살아봐!] 나는 장수현과 더 말싸움할 기운도 없었다. 지겨웠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제가 어떻게 알아요, 구연준이 병실에 핸드폰을 두고 갔는지.” [연준이는 이제 네 제부야! 조심해야 하는 관계라는 걸 왜 몰라? 할 말 있으면 다른 사람 통해서 전하던가! 너, 아직도 미련 못 버리고 연준이한테 기웃거리는 거잖아! 서라가 빨리 눈치채서 망정이지!]‘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억울함을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울컥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꼭 전해주세요, 그쪽의 사위이자 제 제부한테요!” “저, 지금 가정법원 앞에 있어요. 예약한 시간은 이미 지났지만, 빨리 와서 이혼 서류에 도장 찍으라고 전하세요! 안 그러면 당신 딸을 죽을 때까지 불륜녀 꼬리표를 뗄 수 없을 겁니다!” 아무래도 내 말이 제대로 박혔는지, 10분쯤 지나 구연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해라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오늘 갑자기 출장이 잡혔는데, 지금 다른 지역에 와 있어서 갈 수가 없어.]나는 화를 꾹 참으며 조용히 물었다. “내가 어제 미리 연락했는데, 그걸 알고도 오늘 출장을 갔다고?” [예정에 없던 일이었어. 다른 지사가 갑자기 문제를 일으켜서 직접 해결해야 했던 거야.] 그는 나름 진지한 말투였지만, 난 조금도 믿지 않았다. ‘GD그룹이 아무리 크다지만, 대표이사가 직접 내려가야 할 정도의 일이 생긴다고?’ ‘부대표, 임원들만 해도 수십 명인데, 그중에 해결할 사람이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6화

    “뭐...?”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곧 냉소가 터져 나왔다. “강서라, 이제야 드디어 가면을 벗고 본색을 드러내네.” 그동안 순진한 척, 착한 척, 불쌍한 척 온갖 연기를 해왔던 사람. 내가 혼나고, 맞고, 벌을 받을 때마다 곁에서 눈물까지 글썽이며 ‘언니 잘못 없어요’라고 감싸던 사람. 이제 와서 그 가면을 벗어 던진 건가? [내가 언제 가면을 썼다고 그래? 난 원래 이랬어. 언니가 내 진짜 모습을 인정 못 하는 거겠지.]강서라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한숨을 내쉰 나는 더 이상 말싸움을 할 생각이 없어졌다. “됐고, 구연준한테 전해. 오늘 오후 2시, 가정법원에서 보자고. 예약 어렵게 잡은 거니까 또 미루지 말라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강서라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잠깐! 최근에 연준 오빠가 언니를 찾아갔었지?]강서라의 목소리가 확실히 달라졌다. 예전처럼 나긋나긋한 척도 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둘이 싸웠네.’ 나는 속으로 웃으며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답했다. “그래, 왔었어. 그게 왜?” [언니, 양심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연준 오빠는 이제 내 남편이야! 감히 내 남편을 몰래 만나다니, 두 사람, 간통죄로 고소당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거냐고!]강서라가 갑자기 폭발하듯 고함쳤다. 나는 황당해서 피식 웃었다. “간통죄? 그건 너랑 구연준한테나 해당되는 거지,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너 혹시 암세포가 뇌까지 번진 거 아니야?” [강해라, 감히 날 저주해?! 넌 진짜 못된 X이야!] 강서라는 악다구니를 퍼부었지만, 나는 지겨워서 한 마디만 던졌다. “이혼 서류에 도장만 찍으면 넌 당당한 부인이 될 거고, 난 자유로워질 거야. 그러니까 구연준한테 빨리 좀 이혼하라고 해.”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진심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아침부터 재수 없는 X이랑 이야기해서 기분만 잡쳤네.’ ...내가 회사로 가는 길에서 구연준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의 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짜증이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5화

    소유찬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며 유머러스하게 말했다. 순간,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손님은 귀한 분이고, 고객은 왕인데요...” 그러자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답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일반 사람이고 싶습니다.” 남자의 재치 있는 농담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이 사람, 의외로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구나.’ 어색했던 분위기가 한결 풀렸다. “알겠습니다. 기억할게요, 유찬 씨.” “해라 씨, 오늘 고생 많았어요. 안녕히 가세요.” 남자의 말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절제된 품격이 느껴졌다. 우리는 인사를 마친 후, 소유찬은 운전기사에게 마지막까지 신신당부했다. “꼭 조심해 주십시오. 강 대표님과 보조 선생님을 안전하게 모셔다드려야 합니다.” “네, 도련님.” 소유찬은 내게 마지막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연스럽게 검은색 아우디로 향했다. 이미 열린 문을 지나 차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모습은 무척 자연스러웠다. 나는 순간 의아했다. ‘저렇게 권력 있고 재력 있는 사람이... 차는 의외로 평범하네.’ 겉으로 보기엔 그냥 흔한 외제차. 하지만 저렇게 검소한 모습이 오히려 소씨 가문의 신비로움을 더욱 부각시키는 것 같았다. ‘소문대로, 소씨 가문은 조용하고 절제된 사람들이었나 봐.’ ...차가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소유찬의 차는 내가 탄 차의 바로 앞에서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달렸다. 채유리는 창밖을 보며 무도산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앞차를 따라가며 자꾸만 소유찬을 떠올리게 되는 것도 이상했다. ‘이게 뭐라고...’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꼭 쥐었다가 살짝 풀었다. 그리고 소유찬의 허리를 감싸던 순간의 감촉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아니, 뭐야.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펼친 손을 무릎 위에 쓸어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4화

    나는 옷감 위로도 남자의 단단한 하체 근육을 느낄 수 있었다. 그 탄탄하면서도 강한 힘이 깃들어 있는 하체는 아주 대단했다. ‘대략 봐도 허리-힙 비율이 0.8 정도겠는데...’ 넓은 어깨에 비해 날렵한 골반, 길게 뻗은 다리와 큰 키. 완벽한 체형이었다. 전문 남성 모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리야, 다 기록했어?” 나는 일부러 자연스러운 척하며 채유리를 향해 말을 건넸다. “네, 빠짐없이 메모해 뒀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구를 정리한 후, 손님들에게 각자의 의류 선호도를 하나하나 물었다. 예를 들면, 몸에 꼭 맞는 핏을 원하는지, 아니면 여유로운 핏을 원하는지 묻는 것이었다.원피스도 마찬가지였다. 연령대가 높은 분들은 롱드레스를, 젊은 층은 미니 원피스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태블릿에 꼼꼼하게 기록하며 후속 디자인 작업을 준비했다. 그렇게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강 대표, 점심 같이하고 가는 게 어때?” 민현주가 자연스럽게 초대했지만, 나는 민폐가 될까 봐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직 할 일이 많아서요.” 소유찬이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단정한 이목구비를 찡그렸다. “저도 점심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그래?” 민현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침 잘됐네. 유찬아, 강 대표를 배웅해 드려라.” “아, 괜찮습니다. 저는...” “강 대표님, 가시죠.” 내가 사양하려던 찰나, 소유찬이 손을 들며 자연스럽게 길을 안내했다. 남자의 태도는 예의 바르고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넘볼 수 없는 위압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는 별다른 선택 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마침 잘됐네. 이 기회에 손수건도 돌려줄 수 있겠어!’ 밖으로 나오면서 나는 가방을 채유리에게 건넸다. “유리야, 차에서 기다려.” 그리고는 조심스레 주머니에 곱게 접힌 손수건을 꺼냈다. “유찬 도련님, 돌려드릴 게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3화

    “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는 소유찬의 시선을 마주 볼 용기가 없었다.채유리가 내 옆에서 서서 내 얼굴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어딘가 묘하게 장난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긴장되었다.“팔을 들어서 수평으로 맞춰 주세요.”나는 좀 더 긴 줄자를 집어 들고 공손하게 안내하며 몸을 돌렸다. 소유찬이 내 앞에 서자,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뒤로 돌아가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보니 이 사람, 키가 거의 190cm에 육박했다. ‘와... 엄청 키가 크시네.’ 나는 172cm라 그나마 나았지만, 조금만 더 작았으면 난장판이었을 터였다. 어쩌면 치수를 재려고 의자라도 가져와야 했을지도.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순순히 협조했고, 나는 무사히 상반신 치수를 쟀다. 문제는 허리랑 엉덩이둘레를 재는 것이었다. ‘앞에서 안아야 할까, 뒤에서 해야 할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여인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시선이 전부 내 쪽으로 쏠려 있는 게 느껴졌다. ‘왜, 왜 다들 나를 쳐다보는 거지...?’ 나는 순간 온몸이 굳었다. 귀 끝이 괜히 뜨거워지더니,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강 대표님, 왜 그러세요?”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소유찬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아, 아무것도... 그냥, 키가 너무 크셔서요.” 나는 얼떨결에 입을 열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후회했다. “그럼 제가 쪼그려 앉을까요?”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결국 결단을 내렸다. 살짝 이를 악물고 남자의 허리 앞으로 몸을 기울여 양팔을 감싸듯 줄자를 둘렀다. ‘이렇게 가까이서 남자를 안아본 게 언제였더라...’ ‘아니, 동년배 이성 중에서는 구연준을 제외한 남자와 이렇게 밀착한 적이 없었는데...’ 물론 이전에도 남성 고객의 치수를 잰 적은 있었지만, 보통은 다른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내가 직접 할 필요는 없었

  • 배신당한 날, 재벌이 날 지켰다   제22화

    민현주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 일은 강 대표와 상관없잖아. 강 대표는 피해자일 뿐이지.”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네.’ “위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모님.” “그럼 강 대표는 아직도 구씨 집안 아들을 사랑하는 거야?” 나는 다음 사람의 치수를 재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아니요, 지금은 오직 일만 생각하려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계단 쪽에서 키가 훤칠한 남자가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나도 처음엔 신경 쓰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말을 이었다. “유찬이가 내려오네? 혹시 일하는데 방해가 되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이제 마무리됐어요.” 맑고 깨끗하면서도 낮게 울리는 목소리. 순간, 나는 결혼식장에서 내게 손수건을 건네던 ‘유찬 도련님’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남자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했으며, 소란스러운 공간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는 무심결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마침내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결혼식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인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저 사람이 저렇게 젊고 잘생겼었나?’ 칼같이 반듯한 짙은 눈썹, 깊고 또렷한 눈매, 단정하면서도 강렬한 분위기. 키는 크고 허리는 곧게 펴져 있어, 군인처럼 단정한 느낌이 들었다. 그 남자는 온몸에서 강한 기품과 위엄을 뿜어냈다. 하지만 말투나 표정에서는 거만함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부드럽고 온화한 느낌이었다. 나는 사실 예전부터 ‘소유찬’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인상은 썩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연준이 소유찬을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구연준이 사업에서 몇 번이나 중요한 계약을 놓친 적이 있었는데, 그 모든 건이 소유찬에게 돌아갔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소유찬? 조상 잘 만난 덕에 세상 쉽게 사는 놈이지. 권력 믿고 밀어붙인 게 한두 번이 아니라니까?”그 말을 들은 나도 자연스레 소유찬을 오만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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