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우리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방금 큰 룸으로 가자고 한 거야?”임여을이 놀란 얼굴로 도범에게 물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적어도 몇 억은 써야 하는 곳에 가고 싶다고 하다니.그들은 도범이 지금 앉아있는 이 룸도 부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도범은 더 큰 룸으로 가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거기 피아노 있다며, 우리 시율이가 피아노 치는 거 듣고 싶으니까 거기로 가야지.”도범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안돼, 거기 너무 비싸, 자기가 정말 듣고 싶으면 내가 기회 찾아서 들려줄게.”박시율이 도범을 밉지 않게 흘겨보며 말했다.“오늘 차 사는데 10억 넘게 썼으니 지금 돈도 얼마 없을 거 아니야, 더 이상 돈 낭비하지 마.”“포르쉐 911이 10억이나 한다고? 박시율, 너 포르쉐 본 적도 없는 거지? 다 들통났어.”박시율의 말을 들은 전대영이 말했다.“두 대라고 하지 않았어? 두 대면 그만한 가격이 나올만하지, 시율이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임여을도 박시율을 비웃으며 말했다.“그만하고 천만 원 내고 여기에서 밥이나 한 끼 사줘, 큰 룸은 나도 감히 갈 엄두를 못 내는 곳이야, 정말 중요한 손님이랑 비즈니스를 할 때에만 가는 곳이라고! 그런데 당신 와이프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을 보겠다고 그만한 돈을 쓴 다고? 당신 나보다 돈이 더 많은 거야?”도범의 말을 들은 정재영이 차갑게 웃었다.“그러니까, 있는 척 좀 그만해, 정말 못 봐주겠네!”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박시율의 전남친 방민석이 드디어 입을 뗐다.“둘이서 아주 난리가 났구만.”그리고 다시 박시율을 보며 말했다.“박시율, 네가 이러는 이유 그냥 나보다 잘 산다는 거 보여주기 위한 거잖아? 이럴 필요 있어? 몇 년 동안 연락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네 근황을 모를 것 같아? 그래서 우리를 다 속일 수 있을 것 같냐고?”“그러니까, 누가 당신이 박 씨 집안에서 쫓겨나서 일자리도 못 찾고 쓰레기를 주우러 다닌 사실도 모를 줄
“마음대로 지껄이지 마!”박시율이 자신의 아픈 곳을 건드리자 방민석은 불같이 화를 냈다.“나랑 혜민이 서로를 사랑해서 만나는 거야, 우리 사랑을 네가 더럽힐 자격은 없다고! 너야말로 저 남자랑 만나면서 고생 많이 했지? 사람이 예쁘면 뭐 하나, 돈 있는 남자를 찾을 줄도 모르는데.”“그건 내가 너랑 다르기 때문이야, 나는 다른 사람이 벌어다 주는 돈 쓰면서 살 생각 없거든. 그리고 나는 우리 남편 훌륭하다고 생각해, 내가 피아노 치고 춤추는 모습 보겠다고 2억을 들여서 큰 룸으로 가겠다고 하잖아, 이거면 이 사람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할 수 있지 않니? 이 사람 손에 2억 밖에 없다고 해도 나를 위해 기꺼이 쓰겠다는 거니까!”박시율이 주동적으로 도범 가까이에 다가가 그의 손을 잡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자기 말이 맞아, 우리야말로 정말 서로를 사랑하는 거지.”도범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기분이 좋았다, 박시율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동적으로 군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흥분을 이기지 못한 도범이 박시율의 뺨에 입을 맞췄고 박시율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도범이 이렇게 뻔뻔하게 굴 줄 몰랐다.박시율의 붉어진 얼굴을 본 남자들은 도범이 부러워졌다.도범이 실력도 없고 경호원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지만 박시율처럼 예쁜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두 사람의 사이도 제법 괜찮아 보였다.하지만 방민석은 더욱 화가 났다, 그때 박시율과 사귈 때, 그녀는 무척이나 보수적으로 굴어 만난 지 1년이나 되었지만 뽀뽀도 하지 못하고 손만 잡았었다.그랬기에 그는 화가 나 일부러 임여을과 하룻밤을 보내 박시율을 화나게 하려고 했었다.그런데 지금 눈앞의 광경을 보고 있자니 방민석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듣기 좋은 말은 하기 쉽지, 능력 있으면 큰 룸으로 가야지! 적어도 2억은 써야 할 거야, 적어도. 2억을 넘을 수도 있는데 정말 거기로 갈 수 있겠어? 계산할 때 돈 없다고 울지 마!”방민석이 화가 나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40억을 주고 경호원을 고용한 것이 용 씨 집안에서 땡잡은 거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너한테 40억을 주고 경호원을 고용한 것이 땡잡은 거라고? 그 돈이면 경호원 몇 백 명은 고용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것도 실력이 꽤 있는.”임여을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러니까, 용 씨 집안이 바보인 줄 아는 건가, 경호 팀장도 그만큼은 못 받을걸.”정재영도 한 마디 덧붙였다.방금 전, 박시율의 말은 도범이 자신들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뜻했기에 그는 기분이 언짢아졌다, 경호원을 자기처럼 일 년에 몇 십억은 버는 사람과 비교하다니.“믿든 안 믿든 우리 남편 월급 40억 받는 사람이야, 용신애 아가씨께서 직접 허락한 거라고, 그러니까 틀림없어.”박시율도 화가 났다, 그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생각이었는데 그들이 이렇게 돈만 밝히는 사람이 되어있을 줄 몰랐다.그리고 방민석과 임여을 부부가 이곳에 오는 줄 알았다면 박시율은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미 이곳에 발을 들였기에 그녀는 질 수 없었다.박시율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들을 감내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갈수록 심하게 굴었다. 군대에서 퇴역한 도범을 깔보고 있었지만 도범이 그의 전우들과 적들을 대적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그래, 알았어, 네 말이 다 맞아, 이제 됐지?”전동재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너도 일자리 찾았다며, 무슨 일이야? 어디 한 번 말해봐, 우리보다 좋은지 안 좋은지 한 번 들어보게.”전동재의 말을 들은 박시율은 미간을 찌푸렸다, 학교를 다닐 때에만 해도 그녀와 전동재는 사이가 꽤 좋았다. 이번에 오기로 마음을 먹은 이유도 전동재와 나호영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박시율은 두 사람 모두와 사이가 좋았었다.그런데 지금 전동재도 이렇게 나서서 자신을 공격할 줄은 몰랐다.“너 내일 부장 비서 자리 면접 보기로 했다고 했지? 한 달에 4, 5백만 원 받는다고? 무슨 회사
“증거가 필요해? 내 여자친구가 누구인지 알아? 용 씨 집안의 먼 친척이라고, 구매팀에서 오랫동안 일을 했는데 이번에 내 여자친구가 부장으로 승진할 거라고 했거든,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예쁘장한 여자가 부장이 된 거야. 용 씨 집안 큰 도련님이랑 무언가 없었으면 그런 대우를 받을 수나 있겠어?”전동재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전에 부장은 한 달에 겨우 2천만 원 받는다고 했거든, 그런데 이 부장은 오자마자 월급을 몇 억씩이나 받는데, 너희들이 들어도 이상하지?”“당연하지, 그 여자 도련님을 꼬신 게 분명해, 둘이 잤을 수도 있어, 아니면 어떻게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있겠어?”방민석이 말했다.“지금 자기 얼굴 믿고 기어올라가는 여자가 너무 많아.”“다른 사람도 다 너 같은 줄 알아?”박시율이 화가 나서 방민석을 쏘아보며 말했다.“너를 말한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야?”방민석이 굳은 얼굴로 박시율을 바라봤다.“증거도 없이 헛소리를 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러지.”도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옆에 있던 박시율은 주먹을 쥔 도범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충동적으로 굴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도범은 박시율을 보곤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임여을이 당신 완전 무섭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보네, 주먹까지 쥔 거 봐. 주먹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나호영의 여자친구가 도범을 흘겨보며 말했다.하지만 도범은 그 말을 듣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충분한 실력이 있다면 주먹으로 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어, 한 주먹으로 해결이 안 된다면 두 주먹으로 해결하면 돼.”도범이 말을 마치더니 웨이터를 불렀다.“여기요, 저희 룸 바꿔주세요, 제가 팁 두둑이 챙겨드릴게요.”“감사합니다, 손님!”도범의 말을 들은 웨이터가 신이 나서 말했다.“저를 따라오시죠!”“저기요, 너무 일찍 기뻐하지 말아요, 저 사람 그저 일개 경호원일 뿐이에요, 정말 월급 40억씩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정말 월급
“200만?”그 말을 들은 나세리가 숨을 들이켰다. 저 자식 지금 장난하나? 그녀는 한 달 꼬박 뼈 빠지게 일해야 고작 쥐꼬리만한 월급을 탈 수 있었다. 주임이라는 듣기 좋은 직책만 달았을 뿐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그런데 도범은 너무나 쉽게 웨이트리스한테 팁으로 200만 원이라는 큰돈을 준다는 소리를 해댔다. 200만은 너무 과하지 않는가!“감사합니다 사장님!”예쁘장하게 생긴 웨이트리스가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같은 웨이트리스들은 주요하게 술을 많이 팔아야만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었다. 인센티브 액수도 어찌나 적은지 평소라면 한 달을 꼬박 출근한 월급까지 다 합해도 200만 원이 채 되지 못했다.물론 일을 하다 보면 가끔 통쾌하게 팁을 주는 손님들도 있었는데 많이 준다고 해봤자 8만 원에서 10만 원이면 괜찮은 축이었다.삼류 가문의 도련님이나 이류 가문의 도련님이 온다고 해도 30만 원이나 50만 원 정도면 후하게 준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 웨이터 혹은 웨이트리스들은 그저 쓸모없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기분 좋으면 팁을 줬고 기분 나쁘면 욕설을 퍼부을 때도 있었다.“하하 괜찮아요!”도범이 씩 웃었다. 이번 웨이트리스는 느낌이 꽤 좋았다. 말을 가려서 할 줄도 알았고 줄곧 얼굴에 비즈니스 웃음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그녀가 이 일에 진심을 다하고 있다는 마음이 느껴졌다.“하하 하나는 저렇게 허풍 떨기나 좋아하고, 그런데 문제는 또 그걸 믿는 사람이 있다는 거야!”전동재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박시율은 전동재가 아직까지도 도범을 겨냥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전동재, 아까 네가 그랬잖아. 외국에 있을 때 공부는 하나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놀기만 했었다고. 그런데 그렇게 큰 회사의 팀장 비서로 들어갈 수 있다고 큰소리나 치고 말이야. 너 너무 자의식 과잉 아니야?”“하하 자의식 과잉이라고?”전동재가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그 여자 팀장이라는 작자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 내 여자친구가 이미 그전에 가짜 면접을
전대영이 그녀를 비웃었다.박시율은 그들을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무시하고 명함을 꺼내 나세리한테 건넸다.“내 명함인데 일단 넣어 둬. 만약 직장을 옮기고 싶으면 내일 우리 회사로 와서 날 찾아. 네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곳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제시해 줄 테니까 걱정 말고. 나 네 실력 믿어! 넌 착실하게 일 열심히 할 스타일이야!”“응 알았어. 일단 갖고 있을게!”나세리는 박시율이 허세를 부리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들추어내기 싫어서 어색하게 웃으며 명함을 받아들고 그대로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하하 정말 훌륭해. 너한테 직업을 소개해 주는 사람한테 오히려 반대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다니! 너 꽤 괜찮은 직장을 찾았나 봐!”방민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박시율은 그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곧이어 그들은 호화롭기 그지없는 커다란 룸에 도착했다.“대박 이게 아까 말했던 그 VIP 룸이야? 나 처음 들어와 봤어. 진짜 크다!”“이거 무려 야마하 피아노잖아! 스크린도 엄청 커!”나세리가 룸 내부를 둘러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좋네, 좋아!”다른 사람들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도범 씨, 오늘 여기 계산은 그럼 도범 씨가 하는 걸로 합의 본 거야. 우리는 돈 안 낸다?”이혜민이 다시 한번 도범에게 확인했다. 그녀는 이 남자가 언제까지 허세를 부릴 수 있을지 지켜볼 생각이었다.“물론이야. 모두들 마음껏 시켜!”도범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기회도 흔치 않으니 다들 마음껏 주문하고 마음껏 놀자고!”“좋네 좋아. 여기 주문하게 메뉴판 좀 주세요. 우리 와인 마시자. 비싼 걸로. 여기 최저 소비 금액만 해도 2억인데 너무 싼 건 급 떨어지잖아!”전동재가 자리에 앉으며 주문하기 시작했다.도범이 박시율을 보며 말했다.“여보, 나 우리 여보 춤추는 거 보고 싶어!”갑작스러운 말에 박시율은 순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춤을 추지 않은지 몇 년은 됐는걸. 역시 안 추는 게 좋을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춤을 추려면 누군가
박시율이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도범은 비록 때때로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해주어서 전혀 우둔한 남자로 보이지 않지만 피아노 연주라니, 그가 피아노를 연주할 줄 알 리가 없었다.그들과 같은 음악인들한테는 음악과 춤은 무척 신성한 것으로 영혼과 영혼의 소통과도 같았기에 절대 아무나 함부로 접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비록 그녀는 도범이 어떤 연주를 펼칠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만약 그가 엉망진창으로 연주한다면 아무리 그녀가 춤을 잘 춘다고 해도 맞춰주기 힘들었다.적어도 도범의 실력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그녀도 그 연주에 맞추어 춤을 출 수 있었다.“역, 역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따가 노래하고 술 마시면 되지!”박시율이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매우 완곡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발견하지 못할 실망한 기색이 어렴풋이 보였다.솔직히 그녀는 춤을 추지 않은 지가 몇 년은 되었었다. 이제는 예전에 무대 위에서 아름답고 유연한 자태를 뽐내며 마치 한 마리의 꾀꼬리와도 같았던 박시율의 모습은 가물가물해진 정도였다.그때의 그녀는 무대에만 서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곤 했었다. 예전 그녀의 무대를 보노라면 마치 그 무대가 온전히 그녀만을 위해 꾸며진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무대 아래의 박수 소리는 그녀를 더욱 만족스럽게 만들었었다.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고 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지금의 그녀는 다시는 예전과 같은 그런 느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와 춤을 추는 느낌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역시 그만두지 그래. 네 그 손에는 칼이나 총이 어울리지. 이런 우아한 문예활동 쪽은 정말이지 하하, 그런 추태는 부리지 않는 게 좋지 않겠어?”이혜민이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방민석, 예전에 네 피아노 연주 실력이 엄청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만약 네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시율이가 춤을 추면 분명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하게 어우러질 거야. 그래야만 음악과 춤이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전쟁이 터진 후 온 대지는 먼지로 뒤덮였고 곳곳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석양이 비친 하늘 아래 까마귀만이 슬프게 울고 있었다.도범의 연주에 모든 사람들이 넋을 놓고 있었다. 그들은 가슴이 세차게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심지어 그들은 전쟁의 매 순간순간의 화면이 자신들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순간 더 이상 아무도 도범을 우둔하다고 여기지 않았고, 아무고 그를 음악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오히려 도범과 마주 선 그들이 세상 물정 모르고 날뛰던 아이처럼 느껴졌다.박시율이 너무 놀라 멍하니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도범의 피아노 연주 실력이 이미 달인 급에 오를 지경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멍하니 서서 뭐해? 빨리 가!”겨우 정신을 차린 나세리가 가볍게 박시율의 등을 떠밀었다.떠밀려 나온 박시율은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곧바로 그녀는 1자로 다리를 찢으며 바닥에 앉았고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그 모습은 마치 상처 입은 한 마리의 백조와도 같았다.그녀의 몸은 너무나 유연했다. 두 손은 하염없이 나풀거리며 음표에 맞추어 하늘하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과 춤이 점차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했다.그녀가 두 다리로 바닥을 한 번 쓱 훑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박시율은 이미 이 음악과 춤에 주체할 수없이 도취되어 있었다.돌아왔다. 이제 모든 것이 돌아왔다.박시율은 마치 다시 예전 그 무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때의 그 익숙했던 감각과, 그 뜨거웠던 격정과, 그 집요한 마음까지 되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연주가 끝났고 춤도 막을 내렸다!모든 사람들은 그 춤과 음악이 주는 전율 속에서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브라보!”갑자기 전대영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곧바로 다른 사람들 역시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지금 이 순간 그들은 방금 전까지 도범을 얼마나 무시했었던지 그런 건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음악과 이 아름다운 춤에
도범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입을 열었다.“네가 오양수와 대결할 때, 나는 곽치홍이 너희 두 사람의 싸움을 계속 지켜보는 것을 발견했어. 그래서 곽치홍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곽치홍도 내가 본인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 하지만 내가 너무 멀리 있어서 곽치홍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어. 그런데 곽치홍이 나를 쳐다볼 때, 마치 독사에게 주시당하는 느낌이 들었어. 네가 전에 말했던 게 맞아, 곽치홍은 분명 우리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어.”도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곽치홍이 등장한 이후로, 온갖 의문들이 곽치홍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이전에 장로들이 했던 말은 전부 믿을 수 없었고, 이 안에 더 큰 비밀이 숨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도범이 숨을 고르고 막 입을 열려던 순간, 오수경이 먼저 말했다.“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나를 위로하려고 하지 마, 이제 다 이해했어. 내가 전에 했던 충동적인 행동들이 너에게 폐를 끼쳤다는 걸 알아. 앞으로는 항상 이 점을 명심하고, 더 이상 너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거야.”오수경의 이 말을 듣고 나니 도범은 한결 마음이 놓였다. 오수경은 단순한 순진한 바보였고, 팔 다리는 튼튼하지만 머리는 물에 잠긴 것 같아 항상 충동에 휘둘렸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나서 오수경도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그렇게 말하고 나서 오수경은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편안해졌다. 두 사람은 함께 4층으로 발을 내디뎠다.그곳은 희미한 빛으로 덮인 광활한 초원이었다. 초원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대부분은 풀밭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손에 든 수정구를 받쳐 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감고 명상하는 것처럼 보였고, 소수의 사람들은 낮은 목소리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분위기는 침묵과 압박감이 공존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한다 해도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여기가 바로 천엽7현탑의 4층이었으며, 겉보기에는 환상 세계와도 같았다.오수경은 눈을 깜빡이며 도범의 손에 들린 보라색 수정구를 한 번
이 말을 들은 오수경은 고개를 저으며 완강히 거부했다.“나는 3층에 남고 싶지 않아. 도범 오빠가 4층을 돌파하면, 분명히 5층도 갈 거잖아. 천엽 7현대는 총 7층인데, 도범 오빠가 7층까지 돌파할 수도 있잖아? 그럼 도범 오빠는 다른 곳으로 바로 전송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나 혼자 3층에 남게 되잖아. 그땐 난 어떻게 해야 하지?”도범은 오수경의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수경의 걱정도 일리가 있었다. 만약 도범이 정말 7층까지 한 번에 돌파한다면, 천엽 7현대는 자신을 완벽한 도전자로 간주할 가능성이 높았고, 보상을 주고 다른 곳으로 전송할 수도 있었다.그렇게 되면 오수경을 홀로 남겨두게 되는데, 도범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도범은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한편, 오수경은 도범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고 조급해졌다. 오수경은 도범의 팔을 잡으며 간절히 말했다.“난 도범 오빠의 인맥으로 천엽성에 들어온 거야. 인맥으로 들어온 만큼, 나는 어떠한 도전도 직면하지 않을 거고, 그저 도범 오빠만 따라가면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어떤 위험이 닥치더라도, 나는 절대 혼자서 떠나지 않을 거야. 정말 운 나쁘게 여기서 죽더라도, 제가 감수해야 할 일이니까.”오수경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도범을 처음 만난 이후, 오수경은 자신의 인생이 위험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일이었다.다른 것은 판단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도범은 매우 신뢰할 만한 사람이었고, 그 뒤를 따라가야만 생존의 가능성을 얻을 수 있었다. 오수경은 이곳에서의 2년을 버텨내어 바라문 세계를 떠나, 자금단방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도범은 오수경의 결심을 확인하자,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겨 4층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모두가 다소 망설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미래의 운명을 예측할 수 없기에 그들
도범은 냉소를 띠며 말했다.“전 당신과 싸울 생각 없어요. 다만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나게 해주러 왔을 뿐이죠.”도범의 말에 민경운은 순간 얼어붙었다. 민경운은 잠시 고민하며 무슨 의미인지 되새겼고, 이내 도범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깨달았다. 바로 얼마 전 자신과 도범 사이에 벌어진 내기 때문이었다.그 순간, 민경운의 가슴은 마치 여러 개의 큰 돌이 짓누르는 듯 답답해졌다. 그러나 민경운은 이를 갈며 분노를 삼켰다. 애초에 민경운은 도범이 절대로 이번 대결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내기를 걸었던 것이다.민경운은 도범이 처참하게 패배할 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의 손에 들어올 19만 영정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결과는 정반대였다. 도범이 승리한 것이다.이때, 도범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빨리 돈을 내세요. 저도 할 일이 있거든요. 그러니 제 시간 뺏지 마세요. 원래 9만 개의 영정으로 내기를 시작했는데, 본인이 10만 개를 더 얹어 19만 개의 영정으로 만든 거잖아요. 그러니 빨리 결제해요.”도범의 이 말에 민경운은 가슴이 터질 듯했다. 상황은 정말로 도범이 말한 대로였다. 도범은 9만 개의 영정으로 내기를 제안했고, 민경운은 도범이 분명히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여 곧바로 10만 개를 더해 19만 개로 올렸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발등을 찍고 말았다.지금 민경운은 자기 뺨을 세게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9만 개의 영정은 민경운에게 꽤나 큰 금액이지만, 19만 개의 영정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민경운이 이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만약 민경운이 결제하지 않으면 계약이 곧바로 발동하여, 결국에는 영혼의 역반작용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후의 일은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양수는 원건종의 제자들을 들것에 실어 나갔고, 도범은 마침내 세 번째 영패를 손에 넣었다. 이번 영패는 조금 특이하여 입탑 영패가 아닌 출성 영패로 바뀌어 있었다.이
관중석에는 각양각색의 무사들이 섞여 있었고, 불량배들도 많았다. 평소에 거리에서 욕을 퍼붓기 좋아하는 이들은 이제야 자신들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를 찾은 듯, 원건종의 제자들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일부 사람들은 진원을 목에 운용하여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크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온갖 더러운 말을 쏟아냈다. 이로 인해 도범의 귀는 무척이나 시끄러웠고, 고통스러울 정도였다.도범은 자신과 원건종의 제자들 사이에 오간 몇 마디 대화가 이렇게 사람들을 폭발시키게 될 줄은 몰랐다. 또한, 도범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이런 싸움은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몸싸움을 할 수도 없고, 계속 말다툼만 이어질 뿐이었다.그래서 도범은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고, 대련 무대의 한쪽 가장자리로 가서 조용히 서 있기로 했다. 도범은 아직 오양수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오양수가 자신에게 했던 그 약속, 즉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시간은 조금씩 흘러갔고, 싸움 소리는 계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오양수의 몸부림이 점점 약해지고, 장벽이 완전히 해제되자 원건종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몰려가서 오양수를 부축했다.한편, 진태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오양수의 코에 손을 대 그의 호흡을 확인했다. 비록 오양수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지만, 그 호흡은 매우 미약했다.민경운은 급하게 자신의 보관 반지에서 여러 개의 단약을 꺼내 오양수의 입에 넣었다. 그러나 이 단약들은 오양수의 현재 상태를 치료하기에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방금 도범이 사용한 참멸현공이 오양수의 영혼을 완전히 찢어놓았기 때문이다.영혼이 찢어진 상태에서 내상을 치료하는 단약이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민경운이 오양수에게 많은 단약을 먹였지만, 오양수의 상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이다. 민경운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오양수가 정말로 이 사건으로 인해 죽는다면, 그들 모두 책임을
“맞아! 당장 우리 오양수 선배를 풀어줘! 양수 선배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너는 천번 만번 죽임을 당할 거야! 오양수 선배는 도민수 선배가 아니야. 네가 도민수 선배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을 때는 우리도 나서서 협상할 여지가 있었어.그러나 네가 오양수 선배를 진짜로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다면, 염라대왕이라도 너를 보호할 수 없을 거야! 바라문 세계를 벗어나는 순간, 너는 원건종의 끝없는 추격을 받게 될 거야!”바깥에서 들려오는 원건종 제자들의 고함과 욕설은 도범의 귀에 전부 들렸다. 이는 이미 예상된 일이었기에 도범은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원건종은 일반적인 자유 무사들에게 충분한 위압감을 줄 수 있지만, 도범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상대가 아니었다. 원건종이 무엇이건, 자신의 힘이 충분히 강하다면 더 강력한 종문에 가담할 수 있을 테니, 원건종이 손해를 본다고 해도 도범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게다가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건종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도범은 결코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원건종 쪽에서 여러 번 도발하지 않았다면, 도범 역시 이들과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잠시 후, 도범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원건종의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원건종 제자들, 잘 들어! 8품 종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를 일으킨 건 너희들이었잖아. 그런데 패배하고 나니 이제와서 나를 협박하는 거야?만약 너희들이 먼저 건드리지 않았다면, 나 역시 너희들과 엮일 생각이 전혀 없었을 거야. 즉, 너희들은 본인들의 강력한 종문을 배경을 믿고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거야. 하지만 나는 너희들의 그런 행태를 전혀 묵인할 생각 없어!”도범의 이 말은 관중석에서 큰 박수갈채를 일으켰다. 관중들은 도범이 그들 마음속에 담아둔 말을 대신 말해준 것 같아 고무되었다. 이들 고급 종문의 제자들은 항상 약한 무사들 앞에서만 무력을 과시하며, 이
“오양수는 원건종의 친전 제자 아닌가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약할 수 있죠?”“당신 바보 아니에요? 이건 오양수이 약한 게 아니라 도범이 너무 강한 거에요! 아까도 말했잖아요? 빙봉천리는 지급 상급 무기에요.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몇이나 지급 상등 무기를 수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도범이 빙봉천리를 부순다는 건, 도범의 무기가 오양수의 무기보다 강하다는 걸 의미해요!”“설마 도범이 천급 무기를 수련한 건가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주변의 거의 모든 이들이 단번에 부정했다.“미쳤어요? 무슨 말이든 막하네요. 천급 무기가 어떤 개념인지 알고나 하는 소리에요? 수련 경지가 고신경에 도달했거나, 혹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영천 경지 후기에 이르러야만 천급 무기를 수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는 거에요.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라문 세계의 규칙을 지켜야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고요. 나이도 60세를 넘지 않아야 하죠. 그렇다면 60세가 넘지 않은 사람이 천급 무기를 수련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그렇네요! 아마도 지급 상급 무기를 수련한 거겠죠. 도범이 오양수를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도범이 지급 하급 무기를 대원만 단계까지 수련했기 때문일 거에요.”“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도범의 재능은 정말 두려운 수준이네요. 8품 종문의 친전 제자조차 도범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거잖아요!”“이번에 바라문 세계에 온 보람은 있네요. 이렇게 많은 천재들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니.”오양수와 관련 없는 관중들은 이런 논의를 흥미롭게 이어갔다. 이전에 도범을 비하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도범을 칭찬하며, 도범을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말하기 시작했다.8품 종문의 친전 제자들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원건종의 제자들은 차분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관중석에서 편안하게 앉아있던 그들은, 도범이 빙봉천리를 단칼에 베어내는 모습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오양수가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겪는 걸 보니, 분명 도범이
두 번째 방법은 고도의 신법을 필요로 하며, 일반적인 무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수준이다. 첫 번째 방법도 강력한 실력이 필요하기에, 주위 사람들이 도범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빙봉천리의 감금 아래에서 도범은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따라서 모두가 도범이 반드시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도범의 경맥이 감금되면 오양수가 도범을 결코 쉽게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한편, 도범은 한 손에 장검을 쥐고, 다른 손으로는 연달아 법진을 만들어냈다. 이윽고 백 개의 영혼검이 하나로 융합되어, 거대한 영혼 검이 되어 회흑색 장검 속에 흡수되었다.도범이 전승 상태로 참멸현공을 펼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빙봉천리가 지급 상급 무기일지라도, 도범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도범은 현재 참멸현공을 대원만 단계까지 수련한 상태였고, 영혼검과의 융합으로 생성된 힘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힘이다.도범은 분노에 차서 큰 소리로 포효하며 단칼에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회흑색 장검에서 거대한 검기가 날아가면서 하늘을 뒤덮은 얼음망이 도범의 앞에 닥쳐왔다.모두는 쾅쾅하는 몇 번의 뚜렷한 소리를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단해 보이던 빙봉천리가 도범의 한 줄기 검기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게다가 이 검기는 빙봉천리를 부순 뒤에도 힘이 전혀 소모되지 않은 채 여전히 앞으로 돌진했다. 이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뒤따라오던 오양수조차 반응하지 못했다.현재 도범의 참멸현공은 대원만의 경지에 도달했다. 비록 빙봉천리가 지급 상급 무기라 할지라도, 참멸현공 앞에서는 종이장처럼 부서질 뿐이었다.모두가 도범이 빙봉천리에 온몸이 봉쇄되어, 도살당할 어린 양처럼 될 것을 기대했으나, 그들의 모든 환상은 산산이 부서졌다. 검날이 빙봉천리를 부순 후, 곧장 반응하지 못한 오양수를 향해 돌진했다. 검날이 오양수의 면전 3척 앞에 닿기 직전에야 오양수는 자신을 보호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상황이었다. 평상시라면 오양수는 공격과 동시에
각양각색의 논조, 그리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끝없는 토론. 그러나 도범은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도범은 그저 담담한 눈빛으로 오양수를 바라보았다.잠시 후, 오양수가 무기를 꺼내들자, 도범도 천천히 자신의 회흑색 장검을 꺼내 손에 쥐었다. 이 장검은 오랫동안 도범과 함께한 무기로,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오양수는 청란골패를 가볍게 휘두르자, 뚜렷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한기가 청란골패에서 뿜어져 나오며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꾸었다.현재 오양수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존재했다. 그건 바로 도범을 쓰러뜨린 뒤, 잔인하게 고통을 주어 그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알게 하는 것이었다.오양수는 크게 포효하며 두 손을 뒤집어 법진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오양수의 손바닥에 육각형 모양의 얼음 화살이 생겨났고, 4초 후, 수백 개의 육각형 얼음 화살이 오양수의 앞을 가득 메웠다.오양수는 다시 한번 포효하며 앞을 향해 힘껏 밀어붙였다. 그러자 수백 개의 육각형 얼음 화살이 도범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고, 이 화살들과 함께 엄청난 한기가 도범을 덮쳤다.도범은 눈살을 찌푸린 채, 두 손으로 장검을 단단히 쥐고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조용히 검을 휘둘렀다. 이윽고 수많은 육각형 얼음 화살은 단숨에 두 조각으로 나뉘었다.그때, 관중석에서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도범 저 녀석, 실력이 정말 보통이 아니네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오양수가 수련한 무기는 지급 상급 무기, 빙봉천리에요! 그런데 도범이 단칼에 빙봉천리를 가르다니, 실력이 꽤 강한데요!”그 사람이 말을 끝내자마자 주변에서는 곧바로 반박이 나왔다.“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빙봉천리는 지급 상급 무기에요. 바라문 세계를 둘러봐도, 지급 상급 무기를 수련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방금 전의 공격은 단지 약간의 힘만 사용한 거에요. 오양수가 진심으로 도범을 죽이려 했다면, 반항할 틈조차 없었을 거에요!”오양수가 쏘
검은 옷의 대장부는 눈살을 찌푸린 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이 건방진 놈, 죽고 싶어! 마침 상대가 필요했는데, 너의 입탑영패를 가지고 와. 우리 한 판 붙자!”그러자 오수경은 콧방귀를 뀌며 태연하게 말했다.“내 앞에서 강자 흉내 내지 마. 내 가슴에 6품 연단사 휘장이 붙어 있는 걸 못 봤어? 그런데 네가 연단사인 나와 실력을 겨루겠다고? 차라리 연단술을 겨뤄보는 게 어때?”이 말에 검은 옷의 대장부는 말문이 막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규칙이 없었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오수경의 목을 조를 기세였다.오수경은 검은 옷의 대장부가 더 이상 말하지 않자, 더욱 신나서 비아냥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도범이 손을 뻗어 그를 막았다.“너는 왜 이렇게 매사에 신중하지 못해?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해. 알겠어?”도범의 꾸짖음에 오수경은 목을 움츠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전에 도범에게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더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이때, 검은 옷의 대장부는 냉소를 머금은 채 다시 도범을 바라보았다. 방금 그들의 대화를 일부 들었기에 도범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진 상태였다.“네가 정말 8품 종문의 친전 제자보다 강하다고 생각해?”도범은 눈살을 찌푸린 채 검은 옷의 대장부를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검은 옷의 대장부는 도범이 대답하지 않아도 화내지 않았다.이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아마도 내기 때문이거나 도범의 냉담한 태도 때문인지 상황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도발적인 말이 다시 들리지 않았다. 제73회 대결이 곧 시작되려 할 때, 도범은 더 이상 쓸데없는 소리를 듣지 않게 되었다.잠시 후, 도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숨을 내쉬고는 오수경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리고는 나지막이 말했다.“누구를 보든, 어떤 말을 듣든, 이 자리에서 떠나지 마.”그 말을 마치고 도범은 큰 걸음으로 대결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