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은 젊은 시절, 남자든 여자든 모두 이성의 몸에 환상을 품기 마련이다. 심지어 그 짓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도 생긴다.그렇지 않으면, 그런 짓을 저지르면 안 되는 시절 사고 치는 어린 친구들이 왜 생겨나겠나?더군다나 주선영의 주변 친구들은 모두 남자 친구가 있어 심심할 때면 항상 남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그렇게 귀동냥으로 알게 된 게 많으니 주선영도 당연히 그 일에 호기심과 동격이 생겼다. 게다가 내가 마침 처음 접한 이성이니, 상대를 나로 가정하고 상상할 수밖에 없다.다만 그러면 안 됐다. 나는 애교 누나 남자 친구고, 주선영은 애교 누나 사촌 여동생이었으니까.여기까지 생각이 마친 주선영은 얼른 피어나는 생각을 부정했다.‘내가 대체 왜 이러지? 왜 언니와 수호 오빠가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지? 어쩜 이렇게 나쁠 수 있지?’주선영은 앞으로 절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그러면 언니한테 너무 미안하다고 속으로 맹세했다.그에 반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소파에 다시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참 뒤, 나머지 두 방을 끝낸 주선영은 나를 향해 말했다.“수호 오빠, 끝났어요.”“그래. 난 좀 휴식할게. 너도 얼른 들어가.”나는 주선영을 쫓았다. 하지만 어느새 머리가 맑아져 잠이 오지 않았다.핸드폰을 꺼내 든 나는 애교 누나한테 문자를 보내자니 누나의 아버지한테 발각될까 봐 두려웠고, 형수한테 문자를 보내자니 형수가 집에 돌아갔을까 걱정이 됐다.소여정과 남주 누나도 당연히 안 됐다.결국 고민 끝에 나는 백연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요?]백연우는 이내 답장했다.[아니. 지금 바빠.][뭐가 그렇게 바쁜데요?][당연히 일 때문이지. 그러는 넌 왜 갑자기 나한테 문자 했는데? 발정 났어? 여자 생각이 났어?]그 문자를 본 순간 왜 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결국 나는 색기 가득한 말투로 대답했다.[정말 내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네요.][그럼 우리 학교 올래? 원하
아직 잠이 들지 않았던 주선영은 내가 나가는 문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마음이 근질거렸다. 그와 동시에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었다.사실 주선영은 그 짓이 그토록 유혹적인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한밤중에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으니.주선영은 얼마전에 뜬금없이 핸드폰에 떴던 영상이 생각났다. 그때는 분명 그걸 지우려 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참지 못하고 그 영상을 찾아 재생했다.낯부끄러운 장면에 주선영은 한쪽 눈만 가늘게 뜨고 볼륨도 작게 틀었다. 그녀는 그저 그 짓이 대체 뭐가 좋은지 확인하자는 단순한 마음으로 영상을 재생했다.하지만 한번 보고 나니 새끼 고양이가 간지럽히는 것처럼 마음이 간질거리고 온몸이 불편했다.게다가 그런 영상을 봐서인지 갑자기 너무 하고 싶어졌다.이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하지만 주성영은 지금껏 자신을 억제하다가 이제야 천천히 마음을 연 거다. 영상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주선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옷 안으로 제 손을 쑥 넣었다. 그러고는 손을 천히 움직였다.이런 일은 한번 고삐 풀리면 주체할 수 없다. 주선영 역시 그러했다.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나는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차를 몰고 한의과대학으로 향했다.게다가 가면서 문자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곧 도착해요. 이따 제대로 혼내줄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요.]얼마 뒤 백연우는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섹시한 란제리를 입고 있는 사진이었는데 빨간색에 속이 다 비치는 레이스라 너무 섹시하고 자극적이었다. 심지어 백연우는 섹시한 자세를 하고 있어 사진만 봐도 마음이 근지럭렸다.나는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예뻐요. 엄청 마음에 들어요.][마음에 들면 얼른 와. 누나 기다리느라 목 빠져.]나는 핸드폰을 옆에 던지고 액셀을 밟았다.얼마 뒤 나는 한의과대학에 도착했다.지난번에 백연우 방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어 길은 무척 익숙했다. 게다가 늦은 시각이라 길에 아무도 없어 나는 당당하게 걸어 백연우 방 앞에
심지어 백연우는 속옷을 안 입어 뽀얀 가슴이 발간 옷감에 보일 듯 말 듯 드러나 너무 매혹적이었다.“너무 섹시한 거 아니에요? 전생에 요물이었죠?”나는 참지 못하고 백연우를 와락 껴안았다.백연우는 불여우가 환생한 게 틀림없다. 순간 숙종이 왜 장희빈에게 그토록 반했는지 확 와닿았다.이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가 앞에 있으면 내시도 마음이 흔들릴 거다.“대체 어디 숨어 있었어요?”나는 백연우에게 힘껏 뽀뽀하고 지그시 내려다보며 물었다.그러자 백연우는 키득키득 웃었다.“안 알려줄 거야...”“나를 놀리는 거예요? 제대로 혼날 줄 알아요.”나는 백연우를 번쩍 들어 안아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분위기가 적당히 무르익어 당장이라도 그녀를 범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때, 밖애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나는 흠칫 놀라 다급히 물었다.“누구예요?”백연우도 고개를 저었다.“몰라.”곧이어 밖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백 쌤, 괜찮아요?”백연우는 찌푸렸던 미간을 천천히 폈다.“부교장 선생님이셨군요. 저 괜찮아요.”“그래요? 아까 누군가 방에 들어가는 걸 봐서요. 늦은 시간인데 여자 혼자 조심해요.”백연우는 귀찮은 듯 대답했다.“잘못 보신 거 아니에요? 방에 들어온 사람 없어요. 제가 나갔다가 들어온 거예요.”“괜찮다면 다행이네요. 백 쌤, 제가 긴히 할 말이 있는데 문 좀 열어줄래요?”그 말을 들은 순간 살짝 내려놓았던 마음이 다시 불안해졌다.백연우는 오히려 차분하고 태연하게 대답했다.“시간도 늦었는데 여자 혼자 사는 방에 들어오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할 얘기 있으면 내일 해요. 지금은 우선 돌아가 주세요.”“하하, 뭐 별 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요. 그래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창밖에 있던 그림자가 멀어지자 나는 고개를 숙여 백연우를 바라봤다.“너무 놀랐어요.”“무서워할 거 뭐 있어? 정말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을 텐데.”“그래도 상대는 부교장이잖아요. 졸업장도 아직 못 받았는데, 부교장 쌤이 저를 알아보기라도 하면
“내가 저 인간 덕에 이 자리까지 온 것도 아닌데, 저 인간을 무서워할 필요가 뭐가 있어?”“학교에 그런 일도 있어요?”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백연우는 고개를 쳐들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은 언제나 매력적으로 느껴진다.“안 그러면 내가 왜 너 좋아하겠어? 난 네 몸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그 순진함이 좋은 거야. 네가 뭐든 다 아는 능구렁이라면 나도 너한테 흥미 못 느꼈을 거야.”“왜 그렇죠?”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그러자 백연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이런 일은 서로 잘 맞아야 하는 거야. 서로 즐거워야 하는 거잖아. 만약 나쁜 목적으로 접근한 거면 재미없어. 저 인간은 딱 봐도 목적이 불순해. 생각만 해도 역겨워. 이제 알겠어?”백연우는 말을 명확하게 하지 않고 은연중에 자기 생각을 내비쳤다.예전 같았으면 못 알아들었을 텐데, 남주 누나한테서 정계에 관해 많은 걸 배운지라 알아들을 수 있었다.사실 정계든 학교든 다 작은 사회판이라 본질은 비슷하다특히 권세가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곳이 어디든 늘 천당 같을 거다.그에 반해 권력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위로 올라가려고 결국 제 몸을 판다.이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어디 가든 다 비슷하니까. 그저 백연우가 그런 식으로 더럽혀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한 번 더 할래요?”백연우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나는 또 흥미가 솟아났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또 요구하자 백연우는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그럼 좀 새로운 걸 해보자.”‘새로운 거라니?’나는 살짝 어리둥절했다.다음 순간, 백연우는 뒤에서 밧줄을 꺼냈다.그걸 본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헐. 이렇게까지 한다고요? 이건 너무 화끈한 거 아니에요?”“뭐 어때? 화끈하게 놀아보자. 어때? 할 수 있겠어?”나는 살짝 망설여졌다. 무엇보다 백연우와 하면 항상 내가 당하는 기분이 드는 게 문제였다.사내대장부인 내가 여자한테 당하다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내가 백 쌤을 묶으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요? 우리는 결혼이 불가능한 것 같아요?”“내가 결혼한다고 해도 너랑 하지는 않을 거야. 차라리 집안 형편이 비슷한 사람을 찾지.”백연우의 말에 나는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그 순간 나를 언짢아하던 애교 누나 아버지의 말이 문득 떠올라 기분이 다운됐고 말도 하기 싫었다.백연우는 내 가슴에 엎드린 채 싱긋 웃으며 물었다.“왜 그래? 화났어? 기분 안 좋아도 할 수 없어. 내 말이 사실이니까.”나는 포기하지 못해 끈질기게 물었다.“돈 많은 사람들은 항상 그래요? 저처럼 가난한 사람은 본인과 겸상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백연우는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그런 것만은 아니야. 하지만 나나 애교나 결혼할 때 본인만 생각할 수 없어. 가족도 생각해야 하거든. 우리가 결혼하는 건 사랑 때문에 하는 것만이 아니거든. 함께 하면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해.”“네 애교 누나는 자기 짝이 어떤 사람이든지 신경 쓰지 않을 거지만 가족은 분명 엄청 신경 쓸 거야. 그 가족이 너무 현실적이라고 욕할 게 아니야. 원래 잘나가는 집안일수록 평범한 사위를 얻으면 뒤에서 말이 많아.”“너나 애교는 이상을 좋지만 난 좀 현실적인 사람이거든. 결혼의 본질을 알기에 결혼하기 싫은 것도 있고. 내가 지금 너를 빼앗아 오고 싶다는 건 그냥 널 소유하고 싶은 거지 결혼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야.”백연우의 설명은 명확했지만 내 기분은 말이 아니었다.신분 차이는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벽이라 항상 나를 열등감과 불안감에 허덕이게 한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래요, 알았어요.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자요. 전 이만 돌아갈게요.”“가지 마. 하루만 같이 있자.”백연우는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그 부드러운 모습에 나는 또 마음이 흔들렸다.애교 누나를 안고 잔 것도 벌서 오래전 일이라 그런 느낌이 고프기도 했다.하지만 애교 누나를 안을 수 없으니 백연우를 그 대신으로 생각하며 그리워할 수는 있
민우는 워낙 먹는 걸 좋아해 음식 얘기를 듣자마자 방금 했던 대화를 까맣게 잊었다.잠시 후, 민우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주선영도 민우와 함께 내려왔다.주선영은 머쓱한 듯 나에게 말을 걸었다.“수호 오빠, 저 오늘 늦잠 자서 늦었는데 학교까지 태워줄 수 있어요?”“당연하지. 타.”이젠 차도 있으니 가는 길에 바래다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때 민우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그럼 네 후배더러 조수석에 타라고 해. 난 뒷좌석에서 좀 더 잘게.”말을 마치자마자 민우는 뒷좌석에 앉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아예 코를 골기 시작했다.나는 결국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어제는 대체 뭘 했길래 이래?”“뭐 안 했어. 그냥 욕구 좀 풀었어.”민우는 무심코 말을 내뱉고는 문득 주선영도 차에 있다는 걸 인식하고 난감해했다.“저기, 그런 뜻이 아니라. 내 말은... 아니에요. 나 잘게요.”주선영은 부끄러운지 얼굴이 붉어졌다.나는 주선영더러 민우 말을 신경 쓰지 말라고 넌지시 말했다.“자. 고기만두야.”주선영한테 만두를 건네면서 보니 오늘 그녀의 옷차림이 예전과 많이 달랐다.주선영은 그동안 긴 바지에 짧은 티셔츠를 입고 치마는 거의 입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짧은 바지를 입었다. 게다가 몸매가 날씬해 애교 누나와 견줄 만했다.주선영이 오늘 입은 반바지는 핫팬츠라 늘씬하고 새하얀 다리가 드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다만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오늘 웬일로 그렇게 입었어?”주선영은 살짝 부끄러운 듯 말했다.“날씨가 더워서 너무 많이 입으면 땀띠가 날까 봐요.”‘진짜? 요즘도 분명 더웠는데 그동안 이렇게 안 입었잖아.’사실 내 짐작이 맞았다. 주선영은 오늘 확실히 변했다.그도 그럴 게, 이제는 남자 친구를 사귀어야겠다는 결심이 섰으니까. 안 그러면 영원히 바보같이 굴다가 속은 것도 모를 수 있다.나는 주선영을 의과대학에 바래다주고 곧장 화인당으로 향했다.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민우를 뒷좌석에서 일으켜
“상세한 건 나도 몰라. 왕정민이 방금 찾아와서 장인어른 손에 있는 증거를 우리 측에서 제공한 거냐며 따져 물었어. 원래는 잡아떼려고 했는데 왕정민이 수호 씨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이 일이 수호 씨랑 관련이 있냐고 했어.”“내가 물론 대답 안 하고 쫓아냈지만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알아도 상관없어요. 안 무서워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왕정민을 무서워하겠어요?”“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조심해. 뒤에서 뭔 짓할지 모르니까.”“알았어요. 고마워요, 사장님.”“참, 그러고 보니 화인당은 어때?”“괜찮아요. 제가 지키고 있으니 아무도 찾아와서 소란 피우지 못할 거예요.”나는 윤미화와 몇 마디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왕정민이 나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설령 그런다 해도 막을 방법은 있었으니까.나는 동료들과 함께 바삐 움직였다.그때 누군가 오후에 함께 정 사장님을 보러 가자고 제안했다.화인당의 평판은 그동안 정 사장님이 몇 년 동안 쌓아온 거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소동이 일었어도 장사에는 별 영향이 없이 여전히 잘 되고 있었다.다만 9시가 넘었을 때 익숙한 그림자가 나타났다.상대는 다름 아닌 오랜만에 보는 왕정민이었다. 하지만 그를 봤음에도 나는 여전히 평온했다.“무슨 일이야?”왕정민 역시 평온한 얼굴로 살짝 웃으며 말했다.“일 있지. 아주 큰일.”“따라와.”나는 왕정민을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그러자 그는 두말없이 순순히 따라왔다.뒷마당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왕정민을 빤히 바라봤다.“무슨 일인지 말해.”“혹시 지금 윤미화가 운영하는 탐정 사무소에서 일해?”“응.”나는 직접적으로 인정했다.그러자 왕정민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내 장인어른이 나 조사하라고 시킨 거 네가 맡았어?”“아니.”나는 그 일은 인정하지 않았다.이유야 간단했다. 왕정민한테는 내가 자기를 조사했다는 정거가 없을 테니까.내가 왕정민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번거로운
왕정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았다.“무섭지. 당연히 무섭지. 그렇게 대단한 분들 앞에서 난 고작 벌레에 불과해. 내가 왜 이애교는 모함하면서 전소희한테는 아무것도 못 하는지 알고 싶어?”왕정민이 마침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걸 물었기에 나는 말하지 않았다.그런데 갑자기 웬일인지 왕정민은 먼저 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유야 간단해. 이태웅 역시 딸과 마찬가지로 나를 너무 믿었어. 두 사람의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너무 감정적이라는 거야. 이애교의 약점은 나고, 이태웅의 약점은 딸이고. 내가 아무리 이애교를 모함해도 이태웅은 자기 딸 명성을 생각해서 나를 진짜 어떻게 하지는 않을 거야.”“만약 뒤에서 몰래 나를 공격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뒤에서 말이 나올 거야. 무엇보다 이태웅처럼 정직한 사람은 그런 일은 못 해.”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그렇게 말하면서 양심의 가책도 안 느껴져?”왕정민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심? 양심이 뭔데? 양심이 밥 먹여줘? 양심이 뭔 쓸모가 있는데? 내가 강북에서 혼자 구르는 동안 이태웅은 조금도 도와준 적 없어. 다 내 혼자 이룬 성과야. 그런데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이태웅은 계속 나를 못마땅해 했어. 내가 이애교와 이혼한 건 이태웅 때문도 있어.”“내가 왜 전소희를 선택한 줄 알아? 전소희 아버지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 말고도 그 여자한테는 희망이 보여.”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렇다면 왜 또 전소희까지 배신하는데?”나는 정말 왕정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말에 왕정민은 웃음을 터뜨렸다.“배신? 배신까지는 아니지. 난 전소희 배신할 생각 없어. 그 간호사와는 그냥 좀 즐기는 것뿐이야. 남자는 다 그렇잖아. 돈이 있으면서 밖에 애인 없는 남자가 어디 있어? 이건 체면과 신분의 상징이야. 내 능력을 입증할 수 있는 거기기도 하고.”왕정민은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는 담배꽁초를 바닥에 버려 발로 눌러 껐다. 이윽고 짙은 담배냄새를 풍기며 나에게 걸어왔다.“내가 왜 이런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