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당연히 싫죠.”“그러면 그 옷을 입고 국제 런웨이 쇼를 나가라고 하면요?”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그건 괜찮을 것 같아요. 런웨이 쇼에서는 항상 과한 의상을 입으니까요.”“여기도 똑같아요. 이름이 파라다이스인데, 그저 평범한 휴식 공간, 오락 공간이나 바가 있으면 다른 장소랑 뭐가 달라요? 이곳만의 특별함을 나타내려고 섹시하게 드레스코드를 맞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곳 테마와도 맞지만 그렇다고 도가 지나치지는 않잖아요.”‘그러면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거랑 뭐가 다르지?’하지만 인정해야 하는 건, 이곳 방식이 매우 고급스럽다는 거다. 우리 마사지숍처럼.마사지숍은 합법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객이 마사지사를 마음에 들어 방문 서비스를 원한다면 그건 마사지숍이 관계할 일이 아니다.나는 이제야 이곳이 왜 이토록 인기가 많은지 알 것 같았다.우선, 이곳에 와서 소비할 수 있는 고객층은 중상층이다. 만약 돈이 없다면 용천 호텔에 올 리도 없으니까그리고 이곳 고객은 모두 명예와 위신이 있는 사람들이라 선을 지키기에, 절대 술집 같은 곳에서처럼 꽃뱀에게 걸릴 일이 없다.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모두 섹시한 차림으로 있는 데다 미모도 빼어난 선남선녀들만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눈이 즐겁다.물론 애교 누나와 형수가 이런 곳에 온 건 단순히 심심풀이라고 믿는다. 절대 잘생긴 남자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고.“애교 누나, 형수, 이따가 같이 춤춰요.”나는 신이 나서 말했다.그런데 형수의 대답이 의외였다.“애교랑 가요, 난 됐어요.”“그럼 어디 가려고요?”형수가 우리와 같이 가지 않겠다는 말을 들으니 나는 왠지 마음이 아팠다. 형수가 어디 가서 젊고 잘생긴 남자를 만날까 봐.형수는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혼자 휴식하려고요, 안 돼요?’‘당연히 되죠.’‘그런데 어디서 휴식하겠다는 거지?’‘왜 자꾸만 저쪽을 보는 것 같지? 저기에 마침 잘생긴 남자가 앉아 있잖아.’
“저분도 두 사람처럼 그저 릴렉스하러 왔을 수도 있잖아요.”내 말에 형수는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수호 씨 스스로 그 말 믿어요?”나는 웃음이 나왔다.확실히 믿기 어렵다.특히 남자라면 상황이 다르니까.“형수, 도움이 필요해요?”나는 걱정스레 물었다.형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필요 없어요. 가서 놀아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형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뭐라고 하기도 곤란했다.나는 애교 누나와 함께 댄스 플로어에 가서 춤을 추었다.하지만 가끔 형수 쪽을 흘긋거렸다.형수는 먼저 다가가지 않고 계속 제부라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얼마 지나지 않아 등이 훤히 드러난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형수의 제부 옆으로 다가갔다. 심지어 그의 다리 위에 앉았다.그 모습을 본 나는 참지 못하고 애교 누나에게 투덜거렸다.“애교 누나, 저기 봐요. 형수 생각이 맞았어요.”애교 누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남자는 똑같아요. 진짜 정직하고 점잖은 사람은 별로 없어요. 하, 정말 여자들만 불쌍하지.”나는 순간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애교 누나, 왜 저한테 하는 말 같은데요?”“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요. 수호 씨한테 한 말 아니니까. 우리가 결혼한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수호 씨가 정직하든 말든 난 개의치 않아요. 하지만 이미 결혼한 남자는 다르죠. 결혼한 남자가 그러면 용서 못 하죠.”“그게 뭐가 달라요?”나는 의아해서 물었다.“많이 다르죠. 남자와 여자는 마인드 자체가 달라요. 여자는 결혼하기 전에 남자를 많이 참아 주고, 심지어 어떤 여자는 남자 마음에 자기가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결혼하면 남자는 무도건 가정에 충실해야 해요. 바람은 절대 용납 못 하죠.”“하지만 남자는 여자랑 반대예요. 사귈 때 남자는 여자 친구한테 엄청 집착하는데 결혼하면 오히려 여자를 힘들게 쫓아다니며 구애하던 감정은 잊고 소홀해져요.”애교 누나의 일리 있는 말에 순간 감탄이 나왔다.나도
형수가 괴롭힘당하는 걸 본 나는 곧장 그쪽으로 달려가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그러고는 형수를 안타깝게 쳐다봤다.“형수, 괜찮아요?”형수는 씩씩거리며 대답했다.“수호 씨, 저놈 얼른 잡아요. 오늘 저 자식이 한 짓 다 촬영해서 수연한테 보내야겠어요.”나는 곧장 그 중년 남자를 잡아왔다. 그러자 형수는 그를 마구 촬영했다.그때 진용진이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내가 이런 곳에 오는 게 문제된다고 하는데, 그러는 처형은? 여자가 이런 곳에 오는 게 더 더러운 거 아닌가?”형수는 그 자리에 뻗뻗하게 굳어 차가운 표정으로 진동권을 바라봤다.형수가 이곳에 온 걸 동성 형은 모른다. 때문에 진용진의 말은 형수를 혼란스럽게 했다.형수가 난감해하는 걸 보자 나는 바로 진용진의 머리통을 후려 갈겼다.“형수가 이곳에 온 건 그저 릴렉스하기 위해서거든. 당신처럼 여자와 물고 빨고 하러 온 게 아니라.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젠장, 당신은 또 누구야? 뭔데 나를 때려?”진용진은 오기가 생겨 버럭 소리쳤다.나는 차갑게 대꾸했다.“내가 누군지 알아서 뭐 하게? 방금 형수 머리채 잡아당겼지? 당장 사과해?”진용진은 여전히 화를 내며 바락바락 소리쳤다. 그 소란에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임자까지 나타났다.“무슨 일입니까?”진용진은 오히려 먼저 나서서 일러바쳤다.“문 지배인, 이 사람들이 여기서 소란 피우며 주먹을 휘둘렀어요. 내 얼굴 좀 봐요. 이 사람들한테 맞아서 이렇게 된 거라고요.”나는 다급히 해명했다.“아닙니다, 이 사람이 여기서 허튼짓을 벌여 때린 거예요.”“내가 언제 허튼짓을 버렸다는 거야? 내가 여기 즐기러 왔다는데 당신과 무슨 상관인데?”우리가 또 싸우려고 하자 문 매니저는 차갑게 끼어들었다.“자, 소란 그만 피우세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진용진은 곧바로 헤실거리며 대답했다.“진용진입니다. 용감할 때 용, 베풀 진.”“민증 좀 보여주세요.”진용진은 두말없이 민증을 꺼내 싱글벙글 웃으며 문 지배인한테 건넸다.그때
“물론이죠.”문 지배인은 시종일관 빙그레 웃으며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상대가 사람을 착각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가이 들었다.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착각한 게 뭔 상관이야? 난 그냥 조용히 즐기면 돼.’아무튼 이곳에 오래 있을 것도 아닌데, 나중에 발견하더라도 내가 이미 떠난 뒤일 거다.“그럼 천천히 즐기세요. 저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문 지배인은 이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문 지배인이 떠난 뒤 애교 누나가 다급히 물었다.“수호 씨, 어떻게 된 일이에요? 문 지배인이 돼 수호 씨를 왜 그렇게 깍듯하게 대해요?”“몰라요. 사람 착각했나 보죠. 신경 쓰지 마요. 어쨌든 우리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줬잖아요.”“하, 그렇게 점잠아 보이던 사람의 실체가 이렇다니.”형수는 머리가 아픈 듯했다.문제는 동생과 진용진한테 아이가 둘씩이나 있어, 진용진의 본 모습을 알았더라도 쉽게 동생한테 말해줄 수 없었다.하지만 말하지 않자니 또 동생한테 미안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나는 이런 상황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직 결혼도 해보지 않아 그렇다 할 건의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애교 누나와 형수가 상의하는 걸 볼 수밖에.“난 말해야 한다고 봐. 어떻게 선택할지는 네 동생 몫이지. 말하지 않는다면 네 동생은 평생 속고 살아. 그러면 남편에 대한 경계심도 없을 거고. 그러다가 진용진이 갑자기 네 동생한테 이혼하자고 하면, 네 동생은 어떡해?”형수도 애교 누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어쨌든 바람피우는 남자를 믿으면 안 되니까.진용진의 일 때문에 형수는 놀 기분도 아닌 듯했다. 결국 우리는 1시간 정도 있다가 이곳을 떠났다.나는 왠지 아쉬웠다.하지만 형수와 애교 누나가 떠나는데 혼자 남을 수는 없었다.파라다이스에서 나온 뒤, 형수와 애교 누나는 온천욕을 기러 갔다. 나한테도 가겠냐고 물어봤지만 갈 마음도 없고, 피곤했던 나는 방에 돌아가 휴식했다.윤지은한테 이틀 동안 감금당했던 탓인지,
나는 불안한 마음에 이불로 나를 돌돌 감았다.“내가 무슨 배짱으로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요? 그리고 이곳은 지은 씨 구역이잖아요. 난 이렇게 일찍 죽기 싫다고요.”윤지은은 갑자기 내 침대에 앉더니 명령조로 말했다.“이불 치워.”“왜요?”“치우라면 치워. 뭔 말이 그렇게 많아?”윤지은은 나한테 늘 이렇게 차갑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이불을 치웠다.윤지은은 내 가슴을 세게 꼬집었다.“잘 들어. 앞으로 내 친구들 건드리지 마. 내 엄마는 더더욱. 어느 하나라도 거역하면 아주 처참하게 죽을 줄 알아.”꼬집은 자리가 너무 아파,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막았다.“꼬집지 않으면 안 돼요? 이거 지은 씨 가슴 아니거든요.”여자 가슴과 마찬가지로 남자 가슴도 민감하다.‘고통 한번 느껴보게. 나도 꼬집어 보고 싶네.’나는 속으로 생각했다.그때 윤지은이 나를 풀어주더니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이건 경고야. 내 말 새겨두라는 경고.”“네, 알았어요. 지은 씨 말대로 할게요. 됐죠?”나는 윤지은과 더 이상 말 섞기도 싫었다. 그저 당장 나갔으면 좋겠다.하지만 윤지은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불을 들추더니 침대에 앉았다.그 헹동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뭐 하는 거예요? 지은 씨 말대로 하겠다는데, 왜 안 가요?”“이 호텔 전체가 우리 집 건데, 내가 어디서 자든 뭔 상관이야?”나를 쏘아붙이는 윤지은을 보니 순간 어이없었다.“그런데 여긴 내 방이거든요? 돈도 냈어요.”“그 돈 직접 냈어? 소여정이 대신 내준 거잖아. 그런데 어디서 직접 낸 것처럼 굴어?”윤지은은 나를 매섭게 째려봤다.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이따가 내 돈으로 다시 방 잡을 거예요.”‘내가 돈이 없는 줄 알아? 나도 여기 묵을 수 있다고.’나는 속으로 내가 직접 방을 잡으면 윤지은이 어떻게 또 꼬투리 잡나 두고 보겠다고 중얼거렸다.윤지은은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인어
“이게 다 지은 씨 탓이잖아요. 지은 씨가 나를 가두지 않았으면 이곳에 이렇게 오랫동안 묵을 일도 없었을 거고, 돈 낭비할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나는 화가 나서 윤지은을 째려봤다. 내가 억울한 걸 생각하니 두려울 것도 없어졌다.윤지은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그럼 어쩔 생각이야?”항상 쌀쌀맞게 굴던 윤지은이 갑자기 매력적으로 다가오니 견딜 수가 없었다.나는 몸을 흠칫 떨며 말했다.“어떻게 할 생각 없어요. 그냥 지은 씨가 여기서 빨리 나갔으면 좋겠어요.”윤지은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뭐? 다시 말해 봐!”‘이 여자는 뭔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지?’“아무 말도 안 했어요.”나는 결국 타협했다.이길 수 없으면 피하면 되지.내가 침대에서 내리려고 할 때 윤지은이 갑자기 말했다.“내려가지 마, 이리 와.”“윤지은 씨, 또 뭐 하려고요?”나는 할 말이 없었다.‘대체 무슨 생가인 건지?’그때 윤지은이 새하얀 발을 나에게 내밀었다.“마사지해 줘. 좀 뻐근해.”‘난 또 뭐라고.’‘마하지하러 왔으면 마사지나 받을 것이지 꼭 나를 먼저 괴롭힌다니까.’‘이 여자는 영원히 이렇겠지?’“마하지는 해줄 수 있어요. 하지만 쓸데없이 트집 잡지 마요.”“내가 언제 트집 잡았는데? 누가 우리 엄마랑 그러래? 내 친구랑 붙어먹으래? 그러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러겠어?”윤지은은 끝까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됐어요. 못 들은 거로 해요.”나는 더 이상 윤지은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싸우기도 싫었다.나는 조용히 윤지은 발 옆에 앉아 그녀의 발을 들어 마사지하기 시작했다.윤지은은 눈을 감은 채 즐기고 있었다.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기에, 방은 고요함이 맴돌았다.하지만 그 시각, 808호실에서 백연우가 핸드폰으로 CCTV 영상을 보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그도 그럴 게, 백연우가 보고 있는 건 내 방의 화면이었으니까.백연우한테 내 방 CCTV
임천호를 떠나면 그나마 사람이 된 것 같지만, 그의 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소여정은 자신이 산송장이 된 기분이었다.살든 죽든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그때 벽연우가 다급히 말했다.“네가 돌아가서 심심할까 봐 내가 재미 좀 불어넣어 주려는 거 아니냐. 얼른 봐. 보고 나면 아마 피가 끓어오를걸.”백연우의 말에 소여정은 너무 궁금했다. 그녀는 얼른 영상을 재생했다.그리고 다음 순간, 생기가 없던 텅 빈 눈이 다시 반짝반짝 빛났다.백연우가 보낸 영상은 윤지은이 내 침대에 앉아 나한테 이불을 치우라고 명령하고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꼬집은 부분이었다.그 부분만 보면 내가 마치 윤지은의 스폰을 받는 기생오라비 같았다.윤지은이 나를 마음대로 괴롭히는데, 불쌍한 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으니까.형소 친구들 앞에서 윤지은은 항상 무뚝뚝하고 차가운 모습이다.게다가 소여정이 임천호 정부 노릇을 하는 게 싫어, 늘 소여정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심지어 친구 셋 모두 윤지은이 남자 친구를 사귀었다는 걸 몰라, 윤지은이 남자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이 영상은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었다.영상 속 윤지은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차가웠지만 눈빛이 여성스럽고 매력적이었다.심지어 먼저 나를 유혹하기까지 했다.소여정은 너무 놀라 소리쳤다.[이거 진짜 윤지은 맞아? 윤지은과 수호 씨가 그렇고 그런 사이었어?]백연우는 웃음을 터뜨렸다.“어때? 대박이지? 자극적이지?”소여정은 연신 감탄했다.[완전 대박인데? 정말 자극적이야. 이 영상이 없었다면 윤지은한테 이런 모습이 있다는 걸 모를 뻔했네.]“하하, 이제 윤지은 비밀을 알았으니까, 앞으로 윤지은이 너한테 뭐라고 하면 반박해.”소여정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그런데 이 영상 어디서 난 거야? 너 설마 수호 씨 방에 카메라 설치했어?]“응, 왜?”소여정은 바로 미간을 좁혔다.[너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윤지은이 알면 네 가죽을 벗기려고 할걸?]백연우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마음대로 하라
“난 사람이지 애완동물이 아니에요. 옆에 묶어두고 있으면 언젠간 우울증 걸릴 거예요. 내가 우울증 걸려 죽으면, 앞으로 누가 회장님 모시겠어요?”임천호는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죽으면 안 되지. 네가 죽으면 내가 슬퍼.]“그러니까 내보내 달라고요. 기분이 좋아야 우울증도 안 걸리죠.”임천호가 물었다.[내 곁에 있는 게 그렇게 싫어? 예전에는 내 옆에 꼭 붙어 있는 걸 좋아했던 것 같은데?]소여정은 입을 삐죽거리며 애교 부렸다.“회장님도 말했다시피 그건 예전이에요. 예전에는 같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장님 마음을 몰랐으니까 오래 같이 있어야 안심이 됐거든요.”[너도 참, 내가 너를 너무 예뻐했어. 해달라는 건 다 들어주니 이젠 점점 막 나가네.]소여정은 이내 생긋 웃으며 말했다.“회장님이 저를 예뻐하는 건 알죠. 하지만 나도 자유가 필요해요.”[그래, 네 마음은 알았어. 바쁜 일 끝내면 같이 나다니자.]임천호의 말에 소여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따라서 얼굴에 걸렸던 미소도 눈에 띄게 굳어버렸다.“그럼 됐어요. 안 나갈래요.”소여정은 아예 전화를 끈헝버렸다.소여정이 먼저 전화를 끊었지만 임천호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있던 백발의 남자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남자의 이름은 정태곤, 임천호의 경호원이다.임천호는 정태곤에게 말했다.“강북에 다녀와서 소여정이 그동안 뭘 하고 다녔는지 조사해.”소여정은 예전에도 밖에 나가겠다고 떼쓰곤 했지만 한 번도 오늘처럼 짜증을 낸 적은 없었다.때문에 임천호는 소여정이 강북에 간 게 단지 친구 만나러 간 게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정태곤은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때까지 나는 곧 닥칠 위험을 알지 못했다.그 시각 나는 여전히 윤지은을 도와 마사지해 주고 있었다.하지만 한창 마사지하고 있는데 윤지은이 잠들어 버렸다.나는 윤지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을 갔다.소변을 보고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 내 방의 문손잡이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진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쉽게 돈을 주는 거지?”주해진이 오늘 이 사달을 벌이느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을 썼을 텐데, 나한테 2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까지 배상하니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됐다.“이 전에는 이대로 넘어가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댔는데, 두 사람 실력을 보니 승복했거든. 두 사람 말대로 나도 젊을 때는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한 번도 두 사람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는 사람을 못 봤거든.”사실 주해진은 말을 아꼈다. 그가 가장 두려운 건 우리의 믿기지 않는 전투력이 아니라 궁지에 몰렸으면서 상황을 역전한 거였다. 그거야말로 가장 두려운 거였으니까.주해진은 우리를 맹수라고 느꼈다. 그것도 싸울수록 더 미쳐 날뛰는 맹수. 심지어 궁지로 몰아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오히려 피에 굶주린 모습을 드러냈다.주해진은 제 체면을 회복하고 싶어 그동안 승복하지 않은 거였는데, 우리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저항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미 손을 씻었고, 이제는 그저 장사를 하며 지내기에 어렵게 얻은 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민우는 나더러 먼저 돈을 받으라고 계속 눈을 깜박거렸다.나도 민우의 뜻을 알고 있었다. 이걸 나중에 우리의 사업 자금에 보태자는 뜻이었다. 18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보니 나도 확실히 마음이 동해 결국은 말없이 받았다. 주해진은 김진호와 안명훈더러 우리에게 사과하게 했고, 두 사람은 찍소리 못하고 순순히 사과했다.떠나갈 때 주해진은 제 차를 나에게 주면서 몰고 가라고 했다.그 순간 나는 오히려 경계심이 곤두섰다.“돈도 배상했으면서 차는 왜 주는 거야? 설마 또 해코지하려고?”주해진은 호탕하게 웃었다.“경계심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냥 친구 삼고 싶어서 주는 거야.”“그런데 난 그쪽이랑 친구하기 싫은데.”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주해진은 여전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친
김진호는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지만 실력은 별로 없다. 특히 일이 터지면 항상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난다.그런데 주해진이 자기를 내밀자 안명훈보다 더 겁을 먹었다.“싫어요... 안 돼요... 해진 형, 저 자식 차를 망가뜨리라고 한 건 형이잖아요. 저더러 형 대신 뒤집어쓰게 하면 안 되죠.”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김진호는 제가 한 짓에 책임지지 못하고 주해진의 체면을 바닥에 짓밟았다.주해진은 너무 쪽팔려서 김진호의 뺨을 내리치면서 버럭 소리쳤다.“사과하라면 해. 어디서 말이 그렇게 많아? 젠장. 내가 널 돕지 않았다면 수호 동생한테 미움 살 일이 있었겠어?”한창 화를 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수호 동생? 지금 나를 말하나?’‘젠장, 내가 언제 제 동생이 됐다는 거야?’“어디서 친한 척이야? 너희 셋 다 내려와.”나는 차를 또다시 쾅쾅 내리쳤다.민우 역시 차 위에서 나를 협조해 주었다.승합차가 우리 때문에 완전히 뒤집힐 지경이 되자 주해진은 우리와 연맹을 맺으려는 듯 은근슬쩍 나를 회유했다.“수호 동생, 그만해. 내려갈게. 우리 사이에는 원한이 없잖아. 수호 동생이랑 원한 있는 건 김진호잖아. 그리고 안명훈 저 자식도 자기 여자 친구더러 동생 친구 꼬시라고 했어. 저 둘 중에 좋은 놈 하나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이 두 놈 내려 보내겠으니까 마음대로 처리해.”주해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김진호와 안명훈을 끌어내 앞에 내팽개쳤다.내 분노는 사실 김진호와 안명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장 큰 원인은 내 차가 박살 난 것 때문이다. 그리고 주범은 바로 주해진이다.때문에 나는 화가 잔뜩 나서 주해진을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다.“이 자식들 빚은 내가 천천히 받을 거야. 하지만 내 차를 망가뜨린 건 어쩔 건데?”주해진은 고개를 돌려 내 차를 흘긋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배상할 수 있는 저렴한 차라 안도한 듯했다.“수호 동생, 저 차는 1600만 정도 하지? 내가 나중에 새 차 하나 뽑아줄게.”주해진이
사실 오늘 안명훈은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주해진이 기어코 자기 위엄을 보여주겠다고 불러냈다.그런데 주해진의 위엄은 못 보고 오히려 나와 민우의 미친 모습만 보게 된 거다. 그러니 혼비백산이 되지 않을 리가 있나?안명훈은 필사적으로 차 문을 흔들었다.“나 내릴래. 내려줘...”주해진은 안명훈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사내자식이 내리긴 어딜 내려? 네가 문을 내리면 저놈들이 올라올 거잖아. 문 열면 안 돼. 얌전히 앉아 있어. 설마 저 자식이 문을 부수겠어?”펑!나는 승합차를 향해 쇠 파이프를 세게 휘둘렀다.그러면서 속으로는 방금 전의 울분을 토해냈다.‘내 자식 같은 새 차, 아직 할부도 안 끝나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네놈들 때문에 고물이 됐잖아.’나는 승합차를 내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나와. 차 안에 숨어 있는 게 겁쟁이랑 뭐가 달라?”차 안 세 사람 눈에 나는 충혈되어 시뻘게진 눈을 가진 분노한 맹수나 다름없었을 거다.안명훈은 완전히 겁을 먹어 나한테 끊임없이 간청했다.“오늘 밤 일은 나랑 상관없어... 제발 살려줘. 제발...”주해진도 솔직히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안명훈이 저 하나 살려고 자신을 배신한 걸 보자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렸다.안명훈은 그 힘에 못 이겨 옆으로 벌러덩 굴러 넘어졌다.그때, 마침 유리창을 깨뜨린 나는 쇠 파이프로 주해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셋 셀게, 당장 내려. 안 그러면 죽이는 수가 있어.”주해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럴 필요까지 있어? 내가 사람을 불러 모으긴 했지만 무기는 안 들었잖아. 게다가 저놈들은 겁을 먹고 이미 도망쳤어. 너희 둘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먼서 꼭 미친 짐승처럼 나를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겠어?”나는 이를 악물었다.“난 짐승처럼 네 놈을 물고 늘어지는 거로 안 끝나. 아주 뼈도 안 남기고 씹어 먹을 거야. 내가 얼마나 어렵게 산 차인데, 평소 아까워서 조심조심 다뤘는데, 네 놈 때문에 폐차하게 생겼잖아. 내 차 물어
나는 여전히 손에 든 쇠 파이프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분명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수도 없었다.민우가 말한 적이 있는데,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건 싸우기 전부터 겁을 먹는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한참 싸우다 보니 나는 점점 힘에 부쳤다. 놈들 인원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인체에는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을 자극하는 혈 자리가 있는데, 그 혈 자리가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이 폭발했다가 나중에 한동안은 몸이 나른해진다.하지만 이 상화에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나는 고민 없이 혈 자리를 눌렀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솟아나면서 내가 마치 거인이 된 느낌이었다.“야! 다 죽었어!”나는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달려갔다.나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은 내가 더 이상 전투력이 없다는 걸 보고 모두 긴장을 푼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놈들의 코뼈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심지어 손이 무척 매웠다.나는 피가 들끓어 끊임없는 힘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매번 파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한방에 놈들 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것에 흥분됐다.‘만약 동준 형님이 이 모습을 본다면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싸울수록 피가 끓고 힘이 솟아났다. 놈들은 심지어 나를 보자 연신 뒷걸음쳤다.옆에 있던 민우마저 나를 보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물었다.“수호야, 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난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나는 혈 자리를 가리켰다.그러자 민우는 바로 눈치챘다.민우 역시 의학을 전공한 지라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민우 역시 스스로 한 대 치더니 갑자기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흥분했다.“하하하, 나도 다시 회복했어. 너희들 죽었어.”우리는 서로 협조하면서 놈들한테 달려가 퍽퍽, 주먹을 날렸다.우리를 끝장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놈
전에는 누가 와서 소란을 피울까 봐 민우더러 나와 함께 가게에서 지내자고 했지만, 지금 사장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민우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다. 때문에 뭐든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민우를 집에 데려다 두는 길에 그는 나에게 함께 사장님 댁에 있어 달라냐며 물었다. 그러면 서로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서.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적 없어. 하지만 사장님을 돌보려고 그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너까지 데려가면 이상하잖아.”“난 그 개자식들이 또 너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러지.”“나도 무서워. 하지만 이미 준비해 뒀어.”나는 의자 밑에서 도구 몇 개를 꺼냈다.민우는 그 도구들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이 도구들은 조금 도움이 될 뿐이야. 그래도 내가 너한테 가르쳐준 방법을 사용해.”민우는 말하면서 손을 움켜쥐는 동작을 했다.그 동작에 나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그 방법 확실히 좋더라...”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백미러에 언뜻거리는 차 한 대가 비쳤다.무의식적으로 뒤에 따라붙은 사람이 운전할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챘다. 그도 그럴 게, 뒤에서 달려오는 차는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마치 나를 강제로 세울 것처럼 굴었으니까.“잘 앉아.”나는 불안한 예감에 다급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다만 내 차의 유일한 단점은 속도를 너무 빨리 낼 수 없다는 거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뒤 차에 따라잡혔다.놈들은 내 차를 강제로 멈추게 할 작정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 차량은 승합차였는데, 그런 승합차는 용량이 커 적어도 열댓 명을 태울 수 있었다.만약 차에서 열 몇 명이 우르르 내리면 나와 민우 둘이 대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때문에 나는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승합차 두 대는 좌우에서 협공하며 내 차를 가운데 몰아 끼긱끼긱, 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분명 차가 내는 소리였지만 내 살점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아직 차 할
내가 한창 망설이고 있을 때 사장님도 말을 보탰다.“수호 씨, 남아서 좀 도와줘. 우리 마누라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이런 고생 언제 해 봤겠어? 이것 봐, 피곤해하는 거 보이지? 나도 솔직히 마음 아파.”사장님과 사모님이 모두 나를 남으라고 설득하는 상황이라 나도 더 이상 거절하기 곤란했다.“그래요. 제가 남아서 도와드릴게요.”사장님이 드시고 사용해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 확실히 번거롭긴 하다. 때문에 나도 사모님 혼자 사장님을 케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다.사모님은 내 말에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수호 씨는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어요. 여기 모두 있으니까. 전처럼 계속 객실에서 자면 돼요. 그곳 채광이 좋고 공기도 좋아요...”사모님은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해할까 봐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사장님 내외가 사는 집은 모두 고급 가구를 사용했는데, 내가 이곳에 남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걸 누려볼 기회가 어디 있을까?사장님 내외는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다 미안할 따름이었다.사장님 몸은 우선 한약으로 며칠간 보양해야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사실 힐 것도 없어 나는 가게 일을 돌볼 수 있었다.요 며칠간 주해진은 소란 피우러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대로 포기했다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동료들한테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한편 주해진은 그날 도망치듯 가게를 떠난 뒤 마음이 계속 안 좋았다.하지만 최근 일손을 구해봤지만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주해진이 깡패라 정계와 연이 닿는 지인이 적었고, 두 번째 이유는 사촌 형이 다시는 화인당을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주해진은 입으로는 싫다고 했지만 요 며칠간 그래도 제 분수를 지켰다. 다만 김진호 병문안을 간 뒤, 마음이 또 바뀌었다.김진호는 나를 여자 등에 빨대 꽂고 출세한 놈으로 말하면서, 깡패인 주해진이 나 같은 등신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웃음거리
어르신도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너도 잘했어. 처방한 게 거의 다 맞췄으니까. 새내기 같지가 않아. 네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웠나 보네?”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럭저럭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어려 할아버지의 모든 재능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괜찮아. 앞으로 내가 네 할아버지니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어르신과 약처방을 확인한 뒤, 나는 화인당에 가 이틀 치 약을 짓고 동료들에게 사장님이 퇴원했다는 사실을 말했다.다들 사장님이 다 나은 줄 알고 기뻐하는 눈치였다. 특히 민우는 슬그머니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돌아오면 우리 따로 나가는 거지?”나는 얼른 민우의 말을 잘랐다.“사장님이 돌아와도 이런 말은 급하게 하면 안 돼. 화인당이 안정되고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 때 떠날 수 있어.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건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지만, 화인당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지. 사장님이 우리 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민우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앞으로 절대 함부로 말 안 할게.”“참, 요즘 태진 선배는 어때? 가게에서 본 적 있어?”나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모태진이 오늘 없다는 걸 발견했다.내 말에 민우가 대답했다.“누가 알겠어? 또 그깟 일 때문에 가게에 피해 갈까 봐 안 나왔겠지. 상관하지 마. 다 큰 어른이 본인 몸 하나 건사 못 하겠어? 수호야, 아직은 따로 나가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천수당을 관찰하는 건 괜찮지?”“관찰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마.”나는 신신당부했다.그러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나는 약을 가진 후 다시 사모님 댁으로 돌아갔다.이 약 일부는 목욕용이고 일부는 마시는 약이라 나는 위애 상세하게 적어 따로 분리했다. 그리고 먹는 약은 모두 달여 진공 포장한 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이렇게 하면 마실 때 데
윤지은은 보기 드물게 이번만큼은 내 편에 섰다.“동의하기 싫어도 동의해야지. 내가 진작 서약이 부작용이 있고 중독성이 커서, 장기적으로 이렇게 치료하면 환자가 오히려 탈탈 털릴 거라고 말했는데. 유미한테는 내가 말할게. 걔네 부모님은 아무튼 B시에 계시잖아? 한동안 돌아올 수 없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지 뭐.”윤지은이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건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의학 의사면서 서의학이 안 좋다고 하면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거다.하지만 친구 남편인 정호섭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 임유미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만약 정호섭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임유미는 어떡하라고?나는 사장님을 바라봤다.“그래도 되겠어요?”사장님은 효심이 강한 분이라 장인 장모를 속이는 게 안 좋다고 여겼다. 게다가 두 분이 지금껏 사장님을 길러왔으니.하지만 사장님이 고민하는 동안 윤지은은 이미 사장님 대신 결론을 내렸다.“뭐 그렇게 생각할 게 많아요? 두 분한테 말하면 절대 동의 안 할 거예요. 이 일은 내가 말한 대로 해요. 나도 한의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파악이 없으면 이런 말 안 해요.”나와 사장님 모두 머뭇거렸는데, 윤지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오히려 감화되었다.나는 윤지은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뭐든 엄격하고 신속하게 하는 모습은 내가 따라 배울 점이었다.윤지은은 나더러 병원에 남아 사장님을 돌보게 하고 본인은 유미 사모님을 모셔 오면서 한의 치료 방법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했다.그사이 나는 사장님이 아침 식사를 드시는 걸 도와드렸지만, 사장님은 입맛이 없다면서 조금밖에 드시지 않았다.요즘 매일 많은 양의 약을 먹어 위장이 망가져 음식을 먹는 것조차 무리였다.이렇게 부작용이 큰 게 바로 서양의학의 가장 큰 단점이다.나도 사장님을 강요하지 않았다.환자가 입맛이 없다는데 억지로 먹게 하면 오히려 위장의 부담을 더해주기 때문이다.나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 사장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
어르신은 내가 보인 자신감에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을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침술 하기 전에 모든 서약을 끊고 한동안 몸보신해야 해. 지금 너의 사장님 몸은 너무 나약해서 기혈이 거의 다 사라진 거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침술 할 수 없어. 이 일은 먼저 환자 가족들과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뒤 진행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윤지은이 회진하러 와서 나는 그녀더러 사장님을 잠시 봐달라고 하고는 어르신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됐어.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이 부근에 마친 공원이 있으니 나도 좀 산책하다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네 사장님 상황은 서둘러서 가족과 상의해. 더 지체되면 천지신명이 와도 어쩔 수 없어.”어르신의 긴박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할아버지.”나는 진심으로 어르신께 감사했다. 90세가 넘는 분이 내 전화 한 통에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거니까.이 은혜는 꼭 마음에 새길 거다.어르신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이건 나를 위해 덕을 쌓는 거야. 너도 얼른 가 봐.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거 잊지 말고.”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이 뒤돌아 떠난 뒤에야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다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윤지은만 병실에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사장님께 방금 전 상황을 말씀드렸다.“수호 씨, 한의학 치료법으로 정말 내 병을 완화할 수 있어?”사장님은 나를 조금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아까 보신 분이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한 명의세요. 젊을 때 저희 할아버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셔서 엄청 유명해요. 저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정말 방법이 있다더라고요.”“사장님이 입원한 뒤 몸 상태가 확실히 점점 나빠지셨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서약은 비록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도 커요. 사장님 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