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금 여자 친구를 말하는 건데, 본인이랑 뭔 상관이래?’나는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윤지은이 질문했으니 진지하게 대답했다.“당연히 장점이야 있죠. 예쁘고, 몸매도 좋고, 재벌가 아가씨고. 이거 다 윤지은 씨 장점이잖아요.”“그거 말고는?”윤지은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것들은 그녀가 볼 때 장점에 속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출발선이 다른 것뿐이지.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의술도 뛰어나고 환자한테 책임지잖아요, 이건 엄청 기특한 거예요.”윤지은은 그제야 내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묵묵히 옷을 입었다.윤지은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나는 그저 그녀를 바라봤다.그때 옷을 다 입은 윤지은이 뒤돌아 떠났다. 보아하니 나한테 더 이상 뭘 하지 않을 모양이었다.‘이제는 나 풀어주려는 건가?’처음에는 살짝 의아했지만, 윤지은이 완전히 시선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그녀가 나를 이대로 놓아주는구나 실감이 났다.하지만 이 순간 내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왠지 이상했다.이렇게 또 엉겁결에 윤지은과 또 자버렸다니.게다가 윤지은이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다니.나는 침대에 앉아 아무리 생각해도 윤지은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밖에 서 있던 두 경호원이 갑자기 안으로 들어왔다.나는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아가씨께서 말씀하셨는데, 계속 여기 있으랍니다.”진작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이런 통보를 받으니 나는 풀이 죽었다.“혹시 이유라도 말해줬나요?”나는 상황을 알고 싶었다.그런데 두 경호원이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왜 그런지 모르겠습니까?”‘젠장...’‘내가 알면 물어봤겠냐?’‘그리고 왜 그렇게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는데?’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숙인 순간, 그제야 바지 지퍼가 열려 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나는 얼른 허리를 숙여 지퍼를 올리고 속으로 은근히 으쓱해했다.‘내가 방금 윤지은과 한 걸 다 들었겠지? 그래서 이상한 눈
“나 정말 구제 불능이네.”윤지은은 씩씩거리며 떠났다.“지은아, 너 왜 여기 있어?”그러다 가던 길에 어머니 이영미를 만났다.평소 시끌벅적한 곳이라면 질색하던 딸이 왜 노래방에서 나오는 건지 이영미는 못내 의아했다.윤지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닌 거예요. 엄마, 나 피곤해서 그러는데, 돌아가 휴식할래요.”말을 마친 윤지은은 바로 뒤돌아 떠났다.이영미는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돌았다.앞쪽이 바로 노래방이었다.이영미도 젊을 때 노래 부르는 걸 매우 좋아했다.하지만 결혼한 이후로는 거의 끊다시피 했다.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노래할 때 너무 자신을 놓아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해철 앞에서 항상 여성스럽고 점잖은 이미지를 유지해야 했기에, 자연스레 노래를 하며 자기 이미지를 깎을 일은 없었다.다만 지금 남편이 곁에 없으니 더 이상 이미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이영미는 곧장 노래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큰 룸 하나를 예약해 혼자 마음껏 노래할 생각이었다.“응? 여기서 뭐 해?”이영미는 호텔 경비원을 발견하고 의아한 듯 물었다.두 경비원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사실대로 말해야 할지 말지 각을 재고 있었다.“묻잖아, 말 못 해?”이영미는 두 경비원 뒤를 바라봤다. 두 사람 뒤는 바로 큰 룸이었다.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리 봐도 이곳을 지키는 모양새였다.이영미는 의아한 듯 물었다.“여기 사람 가뒀어?”“사모님, 묻지 마세요.”“어디서 감히! 내가 사모님인 걸 알면서 묻지 말라고?”이영미는 버럭 소리쳤다.두 경비원은 흠칫 놀라며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그 순간, 이영미는 반항심이 생겨 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문 열어. 들어갈 거니까!”“그건...”“그건 뭐? 나 사모님이야. 여기 내 구역이라고. 그런데 내가 못 들어가?”“아니, 아닙니다. 사모님, 아가씨께서 여기를 지키라고 하셨습니다.”“그렇다면 더 들어가고 싶은데. 내 딸이 이틀 동안 정신을 못 차쳤는데, 왜 그런지 알아야겠어.”계속 몰아붙
이영미는 안으로 들어온 뒤 주위를 빙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이상하네? 어디 사람이 있다는 거야?”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이영미가 돌아가려던 그때, 커튼이 살짝 흔들렸다.그 순간 이영미는 커튼 뒤에 누군가 숨어 있다고 확신했다.‘누구지?’‘지은이 이제야 사랑에 눈뜨고 남자를 숨겼나?’이영미는 호기심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기습 공격을 하려고 했다.그렇게 살금살금 커튼 앞에 도착해 허리를 숙이니 남자 다리가 보였다.이영미는 자기 딸이 수긴 남자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이영미는 커튼을 확 걷었다.하지만 그 시각, 나는 밖의 상황을 몰랐다.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자 윤지은이 떠난 거라고 생각한 그때, 갑자기 커튼이 걷혀 지자 혼이라도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나는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윤지은이라고 생각했다.그와 동시에 윤지은이 나를 놀렸으니, 나도 상대를 놀려야겠다고 생각해 ‘윤지은’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고는 그녀의 몸에 내 몸을 마구 비벼댔다.“뭐 하는 거예요? 놀랐잖아요. 나 겁쟁이라서 이러면 놀란다고요. 내 심장에 문제라도 생기면, 책임질 거예요?”하지만 상대를 안는 순간 나는 이상하다고 느꼈다.그동안 윤지은과 몇 번이나 몸을 섞었기에 윤지은의 몸매를 나는 잘 알고 있다.윤지은은 아주 마른 체형인데, 커야 할 곳만 큰 여자다. 하지만 내 품에 있는 이 여자는 왜 살집이 있지?이영미도 낯선 남자의 품에 안겨 무의식적으로 놀랐다.“아아, 누구야? 이거 놔!”상대의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듣고 난 뒤에야 나는 사람을 착각했다는 걸 알아챘다.나는 얼른 상대를 놓아주며 거리를 두었다.이영미도 너무 놀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눈앞에 선 낯선 여자를 본 순간 나는 너무 난감하고 당황했다.‘젠장, 윤지은인 줄 알았는데 왜 다른 사람이야?’“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친구인 줄 알았어요.”나는 말하다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원래대로라면 내가 이 방에 갇힌 건 윤지은만 알 텐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앉아 상대를 동정하는 말투로 말했다.“그럼 그쪽도 이젠 끝이네요. 여기 갇히면 나갈 생각 마세요.”“왜요? 저 사라들이 왜 그쪽을 여기 가뒀죠? 누구예요? 이름은 뭐고?”“정수호라고 해요. 여기 호텔 주인 아가씨의 미움을 사서, 그 여자가 저를 여기 가뒀거든요.”나는 낯선 여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나랑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 숨김없이 내 사정을 말했다.그 말을 들은 이영미는 내가 자기 딸과 아는 사이라는 걸 알고 더 궁금해졌다.“아하, 여기 주인 아가씨한테 미움받았군요. 무슨 짓을 했는데요?”이영미는 가십거리에 관심 있는 사람처럼 질문했다.물론 나랑 같은 처지인 상대가 안쓰러웠지만, 뭐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때문에 나는 일부러 얼렁뚱땅 넘겼다.“사실 잘못이라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부잣집 아가씨라 성격이 까다로워 내가 하는 짓이 눈에 거슬린다고 가둔 거예요.”다만 이영미는 대충 얼버무리는 내 대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때문에 아예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말했다.“제대로 좀 말해 봐요. 왜 거슬렸다는 건데요? 이 호텔 주인 아가씨 성이 윤 씨거든요. 겉보기에는 쌀쌀맞지만 마음씨는 착한 사람이에요.”자기 딸이 못났다고 생각하는 어머니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이영미 눈에도 딸은 뭐든 훌륭했다. 물론 표정이 항상 뚱하고 쌀쌀맞게 구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나도 심심하던 참에 상대와 잡담을 나누기 시작했다.나는 윤지은을 헐뜯으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요. 가끔 겉모습이 화려하고 빛나는 사람일수록 속이 아주 시커멀 수 있고, 겉보기에 나쁜 사람도 실제로 좋은 사람일 수 있어요. 다만 윤지은 씨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어요.”이영미는 더욱 의아해서 되물었다.“그럼 한 번 얘기해 봐요. 뭘 모르겠다는 거예요?”이렇게 상대와 잡담을 나누다 보니 지루하던 시간도 금방 지나갔다.그 시각, 윤지은이 내 핸드폰을 가져간 탓에 나는 아무하고도 연락할 수 없었다.전에 애
하지만 질투가 나고 화가 나면서도 윤지은은 계속 해서 앨범을 확인했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언짢았지만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내가 이 사진들을 모든 건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가끔씩 감상하기 위해서 기념으로 남긴 거다.때문에 사진마다 제목도 달아두었다.윤지은은 자기 사진 몇 장을 클릭했다. 내가 그 사진에 적어둔 이릉은 ‘내 처음’이다.윤지은과 한 게 내 처음이었으니까.그때는 정말 황홀하고 기분 좋았다.윤지은은 자기를 묘사하는 꽤 좋은 단어들을 보고 기분이 조금 풀렸다.“내 사진은 언제 또 이렇게 많이 찍었대? 뭐, 예쁘네.”윤지은은 자기 사진을 감상하다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되는 사진 두 장을 자기 폰에 전송했다.그런데 한창 감상하고 있을 때, 내 핸드폰이 울렸다.이번에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형수였다.윤지은은 나와 형수의 사이를 알 리 없었기에 형수라는 이름을 보자 자연스럽게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은 탓에 가족이 걱정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몹시 당황하고 폰을 돌려줘야 할지 망설여졌다.하지만 결국 이대로 돌려주는 건 너무 후한 처사라는 결론을 내렸다.윤지은은 내가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이에 결국 전화를 대신 받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형수님 되시죠? 수호 씨 찾으세요?”전화 건너편의 형수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적잖이 당황했다.심지어 멍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애교 누나를 바라봤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다.형수는 다급히 전화 건너편에 대고 물었다.[누구시죠? 수호 씨는요?]“지금 샤워 중이에요. 저더러 대신 전화 받으라고 했거든요.”윤지은은 일부러 이렇게 대답했다.내가 여자 친구가 있든 말든 윤지은과 상관없었다. 게다가 내 식구가 내 여자 친구 존재를 알든 말든 자신을 내 가족 앞에서 여자 친구라고 소개하고 싶었으니까.그렇게 되면 내가 진짜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갔을 때 아주 난감한 상황에 놓일 테니까.윤지은은 그저 내가 괴로운 걸 보
“우리도 심심한데 용천 호텔이나 갈까?”형수가 제안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고개를 저었다.“됐어. 수호 씨가 알면 우리가 자기 감시하러 온 줄 알 거야.”형수는 화가 나 헛웃음을 쳤다.“뭐든 수호 씨만 생각하지 마. 너부터 생각해. 요즘 네 상태 이상한 것 같던데, 왕정민과 이혼한 거 가족한테 말 못 했지?”애교 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것 때문에 애교 누나는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혼한 것도 모자라 나이도 훨씬 어린 남자와 사귀고 있으니, 어떻게 가족한테 얘기해야 할지 막막했다. 때문에 요즘 계속 머리가 복잡했던 거고.그동안 애교 누나가 나를 풀어준 것도, 나에게 자유를 준 것도 모두 나와의 미래가 확실하기 않아서였다.확신할 수 없는 관계인데, 이것저것 강요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본인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나타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형수는 애교 누나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러니까 더 기분 전환해야 하는 거야. 기분 다 풀어야 제대로 된 결정도 내릴 거 아니야. 나도 마침 골치 아팠었는데, 이참에 여행이나 가자.”형수의 설득 끝에 애교 누나는 끝내 동의했다.외부 상황을 모르는 나는 형수와 애교 누나도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그저 이영미와 세상모르고 수다를 떨었다.나는 지금껏 여러 스타일의 여자를 만나 봤지만 이영미처럼 이렇게 귀엽고 발랄한 스타일은 또 처음이다.무엇보다 이영미의 발랄함과 귀여움은 일부러 꾸며낸 게 아니라 안에서부터 뿜어나온 거다.이런 여자와 대화하니 몸과 기분이 모두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그렇게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이영미가 갑자기 말했다.“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가봐야겠네요. 나중에 찾아올게요.”“네? 어떻게 나가려고요?”“내가... 일부러 쳐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이 정도는 봐주겠죠.”이영미는 계속 연기했다.하지만 상황을 모르는 나는 그녀가 걱정되기만 했다.이영미는 당당하게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두 경호원은 다급히 허리 굽혀 인사했다.하지
윤지은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게다가 지금 이랬다가 다음 순간 바로 돌변해서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들거나 쌀쌀맞게 굴지도 몰랐으니까.윤지은은 조용할 때는 분명 아름다운 요정 같은데, 미치면 정신병자나 다름없다.그런 미친 텐션을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윤지은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팜므파탈’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이 단어로 윤지은을 형용하기에는 다소 합당하지 않았지만, 이 순간 내가 본 윤지은은 팜므파탈 그 자체였다.미소가 무서울 정도로 섬뜩했으니까.“대, 대체 뭘 하려는 거예요?”나는 너무 긴장해서 말까지 더듬었다.물론 얼마 전에 윤지은과 잤지만, 또 그게 후회돼서 내 거시기를 잘라버리겠다고, 혹은 내 껍질을 벗겨버리겠다고 달려온 것일까 봐 무서웠다.그런데 그때 윤지은이 나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그 핸드폰은 다름 아닌 내 것이었다.갑자기 핸드폰을 돌려주는 윤지은의 뜬금없는 행동에 나는 어안이벙벙했다.‘이 여자가 이렇게 착하다고? 분명 목적이 있을 거야. 절대 착한 마음으로 나한테 잘해줄 사람이 아니야.’때문에 나는 핸드폰을 받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 이제 나 풀어주는 거예요?”나는 윤지은의 생각을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그러자 윤지은이 씩 웃으며 말했다.“폰은 돌려줄게. 받아. 싫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망가뜨려 줄 수도 있고.”나는 얼른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내 핸드폰인데, 당연히 가져야지.나는 핸드폰을 받은 순간 통화 내역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애교 누나가 나한테 전화를 십몇 통 걸고, 문자도 수두룩하게 보냈다는 걸 발견했다.애교 누나는 분명 나를 걱정했을 거다. 때문에 나는 얼른 누나한테 전화했다.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고 연결이 됐다.“여보세요? 애교 누나, 저 괜찮아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실수로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방금 찾았어요.”나는 애교 누나한테 거짓말했다. 애교 누나가 나를 걱정하는 게 싫었으니까.
[왜 그래요? 왜 울어요?]애교 누나는 나를 걱정했다.나는 여전히 흐느끼며 말했다.“너무 기뻐서 그래요. 정말 너무 보고 싶어요.”이 말은 내 진심에서 우러나온 거다. 나는 정말로 애교 누나와 형수가 보고 싶었다.두 사람이 오면 윤지은이 더 이상 어떻게 날 괴롭힐지 두고 보자는 오기도 동반됐다.이 나쁜 여자는 항상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지만, 애교 누나와 형수는 다르다.두 사람은 나를 항상 예뻐한다. 때문에 애교 누나와 형수가 빨리 오기를 바랐다. 그러면 두 사람이 내 편을 들어줄 테니까.애교 누나와 한창 통화하니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버렸다.하지만 내 기분은 많이 좋아졌다.나는 웃으며 윤지은을 바라봤다.“내 형수랑 여자 친구가 좀 있으면 도착한다는데, 아직도 안 풀어줄 거예요?”“애교 누나라는 여자가 여자 친구야?”윤지은은 팔짱을 낀 채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나는 부인하지도 대답을 피하지도 않고 바로 인정했다.“그래요, 왜요?”“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가 봐.”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뭐라고요?”“가 보라고.”이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 이제야 겨우 풀려나는 건가?나는 한시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윤지은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때문에 한창 망설이다가 결국 물었다.“또 무슨 꿍꿍이에요? 정말 이대로 놓아주는 거예요?”윤지은은 귀찮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대체 갈 거야 말 거야? 안 갈 거면 영원히 여기 있던가.”“가요, 당연히 가야죠.”나는 황급히 도망쳐 단숨에 내 방으로 돌아갔다.커다란 침대에 누우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지금껏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이렇게 편한 건 줄 몰랐는데, 이 순간 침대와 사랑에 빠질 것만 같았다.“이제야 돌아왔네? 대체 어디 갔던 거야?”내가 방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연우와 사모님이 따라 들어왔다.두 사람은 나를 보고 따라온 거였다.하지만 이 순간, 나는 침대에서 꿈쩍도 하기 싫었다.그동안 너무 피곤했으니까.꼬박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 만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윤해철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다만 윤지은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 쓰레기가 얼굴에 쓰레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잣집 도련님 중에 쓰레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요? 아빠는 그동안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봤잖아요. 그럼 아빠가 한번 말해 봐요. 평소 만났던 부잣집 도련님 중에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요?”“다 싸잡아서 욕하지 마. 부잣집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누군가는 네가 말한 그런 사람이 있겠지...”“저는 싸잡아서 욕한 적 없어요. 그저 어떤 신분의 남자든 쓰레기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그 누구도 저를 강요할 수 없어요.”“아빠가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저를 위해 생각한다면 제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게 아니라...”“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래? 몇천억짜리 회사를 그냥 주겠다는데 그게 왜 강요야?”두 부녀가 싸움 날 것 같자 이영미는 얼른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그만 싸워. 어쩜 부녀라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 지은아, 가업을 잇고 싶지 않으면 잇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엄마가 네 편 들어줄게. 오늘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해. 엄마 체면 봐서라도. 알았지?”윤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성으로 대답했다.“나중에 주소 보내줘요.”그 말에 이영미는 활짝 웃었다.“그래. 레스토랑 예약하면 바로 알려줄게.”“여보, 나 짐 싸는 거 좀 도와줘.”이영미는 윤해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윤지은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움직였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얘기 좀 해요.”“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던가?”“아무 거나 얘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요.”“차라리 평생 내 눈앞에서
윤지은은 오늘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벨 소리에 문을 연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있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었다.나 역시 잠옷을 입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윤지은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윤지은은 평소 병원에 있을 때 항상 머리를 높게 얹고 흰 가운을 걸치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때문에 윤지은이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이웃집 동생 같은 모습을 한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손에 의학서적 한 권을 들고 있어 박학다식한 학자 가문 집 딸내미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이건 너무 큰 반전이었다.그때 윤지은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홱 째려봤다.“뭘 봐? 여긴 왜 왔어?”나는 얼른 생각을 정리한 뒤 해명했다.“저도 윤지은 씨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왔어요.”이영미는 얼른 내 편을 들었다.“지은아, 엄마랑 아빠가 화해한 거 다 수호 씨 덕분이야. 오늘 저녁 수호 씨한테 밥 사주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와.”“저는 됐어요. 바빠요.”윤지은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색다르게 보였다.그때 이영미가 친근하게 딸의 팔짱을 끼며 애교 부렸다.“가자. 우리 가족이 오붓하게 식사하는 거 오랜만이잖아. 엄마가 부탁할게. 응?”이영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윤지은도 더 거절할 수 없었다.그때 윤해철이 대뜸 물었다.“넌 여기서 언제까지 살 거야?”“그게 아빠랑 뭔 상관인데요?”“지은,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저 원래 이런 거 알잖아요. 듣기 싫으면 듣지 말던가요.”윤지은은 말을 마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보며 윤해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부녀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오랜만에 만나는데 가족애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네. 하.”나는 이 상항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윤지은이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게 아니라 친아버지한테도 쌀쌀맞게 구는 것 같았다.‘원수를 스스로 만드네.’윤지은은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
강용재라면 바로 임천호 곁을 지키던 그 덩치다.전에 백조의 호수 근처에서 강용재가 나를 미행했던 적이 있다. 다만 내가 정신없을 때 양동준이 나타나 위기를 넘긴 거였다.나는 이제야 임천호가 나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윤지은이 양동준더러 은밀히 나를 지켜주라고 한 덕에 그동안 내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거였다.그런데 이제 양동준이 출장 갔으니 강용재는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분명 불안했을 테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두려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사람들은 상대가 두려워한다고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길 사람이 아니다.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요즘 나와 윤지은은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양동준더러 나를 보호하라던 것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내 목숨은 윤지은이 구해준 것이기에 나는 윤지은한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나는 그저 이영미 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영미가 나를 도와 좋은 소리 몇 마디 해주면 나와 윤지은의 관계도 완화될 수 있으니까.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침 이영미와 윤해철을 만났다.이영미는 다정하게 윤해철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한눈에 봐도 사랑을 듬뿍 받은 티가 났다.윤해철 역시 활기가 차 넘치는 게 전에 여색에 관심조차 없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두 사람 사이가 더 화목해진 걸 보니 나는 흐뭇했다.“사모님, 윤 회장님.”나는 먼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러자 이영미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수호 씨 정말 대단하더라? 우리 남편 지금 엄청 끝내줘. 호호호...”이영미는 말하는 와중에도 흐뭇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나는 이내 겸손하게 말했다.“별말씀을요. 다 윤 회장님이 꾸준히 단련하고 보양에 신경 쓴 덕분이에요. 그 기초에 제가 약물로 조금 치료해 드리니 바로 나은 거예요. 기반이 좋지 않으면 제가 아무리 약을 들이부어도
하정현의 아버지 하대철은 재직할 때, 많은 지역의 거물들에게 미움을 샀었다. 때문에 하대철이 무너지자마자 그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하정현과 하정현의 어머니 진수향을 잡으려고 쫓아다녔다.그래서 진수향은 할 수 없이 몸을 숨겼고 하정현 역시 강북으로 도망쳐 와서 윤지은을 찾았다.하지만 하정현은 이런 일들을 윤지은한테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윤지은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하정현은 평소 털털하고 덤벙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섬세했다.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아직 강북까지 쫓아온 건 아니기에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밤 용천 호텔에서 하정현은 아버지를 구해내라는 진수향의 전화를 받았다.하정현도 답답한 마음에 푸념했다.“제가 무슨 수로 아버지를 구해요? 제 코가 석 자인데...”[그런 건 모르겠고 우리가 너를 힘들게 키워 놨으니 이제 너도 은혜를 갚을 때가 됐어. 만약 네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너 같은 딸 둔 적 없다고 생각할 거야.]진수향의 말은 너무 모질고 무자비해 하정현은 기분이 계속 안 좋았다. 심지어 그때 하정현은 생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하지만 나와 사모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하정현은 스스로 자멸할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정현은 나쁜 놈 손에 유린당할 바에는 차라리 처음을 원하는 사람한테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강요는 아니니까.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정현은 나를 찾아왔었다. 진실을 끝까지 얘기하지 않은 건 단순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하정현은 자신의 비참한 가정사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 때문에 자기를 동정해서 도와줄까 봐 싫었다.매일 가슴 확대 수술을 입에 달고 사는 듯하지만 사실 그건 하정현이 스스로를 속이려는 말이었다.생존조차 어려운 여자가 가슴 확대 수술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하정현은 단지 몸매를 더 예쁘게 만들어 모델 일이라도 하거나 아니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
“내 상체는 이미 봤지? 그러면 하체를 보여 줄게.”하정현은 말하면서 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섹시한 망사 스타킹을 신어 보일 듯 말 듯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지만 망사 스타킹 아래는 새하얗기만 할 뿐 문신 같은 건 없었다.그럼 하정현도 배제할 수 있었다.그러면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유미 사모님만 남게 된 셈이다.그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정현은 또 뜸을 들이며 말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나는 너무 초조해서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만 뜸 들이고 얼른 말해요. 대체 누군데요?”“사실, 사실 그날 수호 씨랑 몸 섞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네?”그 대답은 내 예상 범위를 너무 벗어나 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 했다.“그럼 유미 사모님이 있었는지만 말해줘요.”“있었어. 하지만 사람을 착각해서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뒤 도망가 버려서 실질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어.”그 대답을 들으니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나와 사모님이 잔 게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도 사장님께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나와 사모님이 나눴던 스킨십을 간과했다.그런 일은 나와 사모님만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점점 잊힐 테니까.“진짜 수호 씨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 궁금해?”하정현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사모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요.”“만약 나라면?”나는 멍하니 하정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진짜예요? 농담이죠?”“난 우선 수호 씨 진심이 듣고 싶어. 수호 씨는 누구였으면 좋겠어?”하정현은 문제를 나한테 던졌다.하지만 나는 누구이길 바란 적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절대 사모님만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그 때문에 하정현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소여정? 설마 그 여자인가
하정현의 말을 들으니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하정현은 평소 무심하고 털털해 보이고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얘기를 농담하듯 가볍게 꺼냈지만 사실 그 모든 건 가짜였다. 나는 이제야 그간 하정현이 지은 미소가 모두 가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정현은 사실 그 일로 계속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바보라고 하기에는 효심이 많고 똑똑하다고 하기에는 인터넷 대출을 받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지금은 대출 빚을 갚으려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고.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하정현은 분명 망가질 거다.“이 일은 지은 씨한테 얘기해 볼게요.”나는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하지만 하정현은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지은한테 알려주지 마. 지은이는 안 돼.”“왜요? 지은 씨한테 2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인데 왜 본인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숨기는 거예요?”그 말에 하정현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내가 지은이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빚지면 안 돼.”“그러 알아? 애초에 지은과 준휘를 연결해 준 사람도 나야. 준휘가 쫓아다닐 때 지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서 기호를 만들어 준 것 때문에 지은이는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고 믿게 된 거라고...”하정현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지은 씨도 정현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현 씨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나도 지은이가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지은이는 착한 사람이야. 말을 좀 독하게 해서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더 이상 폐 끼칠 수 없어.”“하지만 이 일은 정현 씨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돼요.”“아무튼 이 일은 지은이한테 말하지 마. 동의하면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전 정현 씨의 비밀에 관
‘진짜 약도 없네. 지은 씨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그걸 또 몰래 찍었다고?’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하정현이 갑자기 제 핸드폰을 내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다급히 액정을 가렸다.“미쳤어요? 이렇게 노골적인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가족이 볼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하정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게 뭐가 노골적이야?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렸잖아.”‘이게 가린 거라고?’이런 사진은 섬나라에 수출해 봤자 삼류 축에도 못 낄 거다.나는 하정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가 관직에 계셨고 가정 형편도 괜찮았으니 돈이 모자라면 집에 말하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사진들 당장 삭제해요. 이 사진은 얼굴도 나왔잖아요. 이 사진이 퍼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요?”“하. 난 이런 말 들으려고 수호 씨 부른 거 아닌데. 나랑 같이 커플 사진 찍자...”“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저는 절대 이런 사진 찍지 않을 거예요.”나는 하정현의 생각을 아예 싹 잘라버리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하정현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돈 주는데도 안 한다고? 사진 한 세트 찍으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아?”“저 지금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현 씨야말로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나 친구한테 말해야지 왜 이런 짓을 해요?”“하.”하정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나 자이언트 베이비 아니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한테 손 벌려야 하는데? 나도 내 능력으로 먹고사는 거니까 부끄러울 거 없다고 생각해.”그 말을 들으니 하정현이 궁하긴 궁했나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이런 사진은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절대 찍지 않았을 거다.그 순간 뭔가 머리를 스쳐지나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설마 어디서 대출받은 건 아니죠?”하정현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