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네. 들어와 앉았다 갈래요?”“그러죠.”서윤기는 사실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냉큼 기회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방금 봤던 여자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만 실수하면 속살이 다 노출될 지경이었다.여자는 이런 상황과 장소가 매우 익숙한 듯했다.그때 서윤기가 여자에게 돈을 한 웅큼을 던져주며 나가라는 눈치를 주자 여자는 아무 말없이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방을 나갔다.서윤기는 그제야 나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수호 씨는 강북에서 생활하지 않아요? 설마 호텔에서 지내요?”나는 서윤기가 나를 찔러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이제 사업하는 사람이니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호텔에 머무는 건 불가피한 일이에요. 집에 가는 게 오히려 더 어렵다니까요. 그런데 이곳에서 서 사장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큰 사업을 하는 사장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가끔 재미를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나도 아예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아니다.서윤기는 내 말에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하지만 몇 분만 더 일찍 왔더라면 큰일 났을 거예요.”‘늙은 여우 같은 것.’서윤기가 상회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으면 내가 끌려다닐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기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내가 결국 먼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만 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 사장님, 전에 조천석 사장님한테서 의서를 구매하셨죠?”“조천석? 어디 보자...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네.’나는 결국 직접적으로 힌트를 줬다.“강북 경진당 사장 조천석 말이에요. 책 이름이 ‘고의문’인데 기억나시나요?”내가 이 정도로 알기 쉽게 말했는데 계속 모
서윤기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긴, 서윤기 같은 사장한테 몇천만 원은 돈도 아니다.만약 서윤기가 거래할 마음이 없다면 내가 모든 재산을 준다고 해도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하지만 이렇게 포기하려니 내키지 않아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의서를 저한테 팔 건데요?”“이 의서는 나한테 필요해서 안 판다고 했을 텐데요.”서윤기는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나는 계속 서윤기에게 끌려가기만 했다.“서 사장님은 그 의서로 저와 거래할 생각이죠?”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그러자 서윤기가 담담하게 웃으며 자기 잔에 와인을 따랐다.그 동작은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충분히 증명했다.하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서윤기를 보니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강북 한약 상회 일이라면 전 결정권이 없어요. 정 사장님도 이미 건강을 회복했으니 상회 일은 사장님이 다시 맡고 있으니까요.”나는 먼저 내 생각을 내비쳤다.그제야 서윤기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돈은 나도 많아요. 돈 벌 루트가 필요한 거지. 하지만 난 내 파트너한테는 항상 관대하거든요. 파트너들과 함께 돈 버는 것도 좋아하고요.”서윤기는 애매모호하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서윤기는 내가 자신과 손을 잡으면 의서를 바로 주겠다는 뜻이었다.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윤기를 바라봤다.“전 이제 상회 일도 관여하지 않는데 저랑 손잡아서 서 사장님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수호 씨가 상회 일에 관여하지 않지만 정 사장과 사이가 좋은 건 상회 사람들이 다 알고 있죠. 수호 씨가 나서면 정 사장의 뜻을 대변할 수 있을 거예요.”‘이 너구리 같은 인간이 이걸 노린 거였네.’나는 이제야 서윤기의 속내를 완전히 알았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다면 실망하시겠네요. 저는 정 사장님께 미안한 일은 안 해요.”서윤기는 의서를 꺼내 테이블 위
그 행동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뭐 하는 거예요?”서윤기는 라이터를 의서에 가까이 가져갔다.“호텔 에어컨이 좀 춥지 않아요? 우리 따뜻하게 해요.”나는 다급히 의서를 빼앗았다.“미쳤어요? 의서에 얼마나 많은 난치병 치료 방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걸 태우면 사람들의 희망을 태우는 거나 다름없어요.”서윤기는 라이터를 내려놓고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난 장사꾼이지 의사가 아니에요.”“이...”나는 전에 서윤기가 유순하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이 사람도 그저 돈만 밝히는 악덕 상인이라는 걸 알았다.나뿐만 아니라 정 사장님도 그동안 서윤기에게 깜빡 속았다.손에 든 의서를 그대로 포기하자니 나는 너무 아쉬웠다.이건 할아버지의 심혈이다. 의서 한 권을 집필하려고 우리 정씨 가문이 대대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이 의서를 건지려면 서윤기와 손을 잡아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내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그때 문득 대담한 생각이 떠올라 나는 의서를 챙긴 뒤 이를 악물고 밖으로 도망쳤다.하지만 얼마 못 가 호텔 직원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어쩐지 내가 의서를 갖고 도망쳐도 서윤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했더니 호텔 안팎에 이미 서윤기의 사람이 가득했다.나는 절대 잡히면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 듯이 도망쳤다. 호텔 직원이 쫓아오면 그 사람을 발로 차고 때리면서 의서를 꼭 지켜내려고 아등바등했다.그와 동시에 나는 윤미화에게 전화했다.“지금 어디 있어요?”[호텔이지. 무슨 일인데?]“지금 누가 절 죽이려고 해요. 윤 사장님이 좀 도와줘요.”나는 도망치면서 되도록 일을 심각하게 설명했다. 그건 윤미화가 빨리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헉.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몇 층이야?]“8층에서 내려가는 중이에요.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와요”나는 신속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그러자 윤미화는 잠깐 생각하더
윤미화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막았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막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방을 한 칸 한 칸 수색하다가 결국 내가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잡았다.그러고는 곧장 나를 8층 808호실로 끌고 갔다.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기뻤다.내 계획이 성공했으니 말이다.서윤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내가 말했잖아.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내가 전에 사람 잘못 봤네. 서윤기 당신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눈에 돈밖에 없는 인간이었어.”나는 서윤기를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서윤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돈 버는 게 나빠? 뭐 문제 있어? 난 상인이야. 상인이 돈 벌지 않고 설마 사람을 구할까?”“아무리 돈을 벌고 싶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약재 가격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안 좋은 약재와 좋은 약재를 섞어서 팔고 가짜 약재로 진짜 약재를 바꿔치기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이건 내가 가장 참지 못할 부분이다.약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약재상이 질이 안 좋은 약재를 섞어 팔고 가짜 약재로 수만 채운다면, 약은 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그때 서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정 사장이랑 같이 일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약재를 가장 싼 가격에 팔았어. 그렇게 매일 개처럼 일했는데 결국엔 고작 몇 푼밖에 못 벌었다고.”“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이 동종업자들이 1년 동안 번 것보다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놀리고 비꼬아 댔는지 알아? 병에 걸린 환자들도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의사한테 고마워하지, 누가 약재상한테 고마워해?”“양쪽에서 모두 찬밥 신세 당하면서 내가 왜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정 사장과 협력하지 않은 이후로 한 달에 얼마씩 버는 줄 알아?”“4억 가까이 돼. 전에는 1년에도 이 정도 못 벌었어. 매달 4억이면
때는 밤 11시.형님 집 아래에 있는 공원에서 야간 러닝을 하던 중, 풀숲 속에서 들려오는 남녀의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진동성, 설마 안 되는 거야? 집에서는 느낌 안 산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더니, 왜 아직도 안 돼?”‘저거 우리 형수님 목소리 아니야?’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여자가 내 형수님 고태연이라는 걸 알아버렸다.‘형과 형수는 밥 먹으러 간다고 했는데? 왜 공원 풀숲에 있는 거지?’여자 친구는 한 번도 안 사귀어 봤지만 동영상은 그래도 많이 봤다고 자부하기에, 나는 곧바로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버렸다.‘형과 형수님이 이런 스릴을 좋아할 줄은 몰랐네. 그것도 공원에서.’순간 몰래 엿듣고 싶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다.형수는 얼굴도 예쁘장한데 몸매는 더 끝내준다. 그런 형수의 신음소리라니 이건 꿈에 그리던 일이었다.살금살금 수풀 쪽으로 걸어가 몰래 머리를 내밀었더니 형수님이 형 위에 앉아 있었다. 물론 나를 등지고 있었지만 등 라인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순간 입이 바싹 마르고 아랫배에 열기가 올라왔다.하지만 이렇게 매력적인 형수님 앞에서 형은 영 맥을 못 췄다.“태연아, 나 여전히 안 되는데.”그 말에 형수가 버럭 화를 냈다.“약도 없네, 정말. 이제 고작 서른다섯이면서 왜 이렇게 쓸모가 없어? 안 서면 싸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무것도 없으면 애는 어떻게 가져? 계속 이러면 나 다른 사람 만난다? 당신은 애 싫을지 몰라도 나는 엄마가 되고 싶다고.”잔뜩 화가 난 형수가 바지를 입고는 수풀 밖으로 걸어 나오자 놀란 나는 헐레벌떡 도망쳤다.집에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쾅’ 닫히는 문소리에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다.‘깜짝 놀랐네. 형과 형수님 사이가 이렇게 안 좋을 줄이야.’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여자는 나이가 들수록 욕구가 많아진다더니 형수님도 욕구 불만인 게 틀림없었다. ‘하긴, 형처럼 비실비실한 몸으로 형수님을 어떻게 만족시키겠어?
“애교야, 왔어? 얼른 들어와.”내가 한참 답답해하고 있을 때, 형수가 다가와 낯선 여자를 친절하게 맞이했다.여자는 형수의 초대로 곧장 집 안에 들어섰다.그러자 형수가 우리를 소개했다.여자는 형수의 친한 친구인데, 이름은 이애교, 바로 옆집에 살고 있었다.“애교야, 이 사람은 동성 씨와 같은 마을에 살던 동생이야, 정수호라고, 어제 왔어.”애교라는 여자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동성 씨한테 이렇게 어리고 잘생긴 동생이 다 있었어?”“수호 씨 이제 막 대학 졸업했어. 그러니 당연히 젊지. 젊을 뿐만 아니라 엄청 튼실해.”내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형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무척 의미심장했다. 심지어 눈길마저 내 아래를 흘끗거렸다.그 동작에 나는 더 불편해졌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물었다.“태연아, 네가 말했던 마사지사가 설마 이 사람이야?”“맞아. 수호 씨가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마사지를 배웠대. 솜씨가 엄청 좋아.”형수는 말을 마치자마자 나를 봤다.“아까 미처 말하지 못했는데, 사실 내 친구가 허리와 척추가 아프다고 해서요. 가끔 가슴도 답답하대요. 원래는 한의사를 불러 마사지 좀 받게 하려고 했는데, 수호 씨가 마침 마사지할 줄 알잖아요. 그래서 한번 받아보게 하려고요.”‘그런 거였군.’나는 단번에 승낙했다.‘형과 형수가 나를 이곳에서 머물게 해주고 일자리도 알아봐 줬는데, 이런 일 정도야 당연히 도와야지.’그때, 애교 누나가 부끄러운지 형수를 옆으로 끌고 갔다.“이건 좀 아니지 않나? 너무 젊은데?”“젊은 게 뭐 어때서? 젊을수록 좋은 거 아니야? 젊어야 힘이 좋고, 그래야 너 같은 유부녀를 편하게 모실 수 있잖아.”“무슨 헛소리하는 거야. 나 그런 사람 아니거든.”애교 누나는 얼굴을 붉혔다.그러자 형수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농담이야. 네가 그쪽으로 생각하니까 그렇지. 솔직히 말해봐, 네 남편 반년 동안 집에 안 왔는데, 그동안 하고 싶지 않았어?”“너 계속 이러면
나는 마치 나쁜 짓을 한 어린애처럼 벌떡 일어났다.“형수님, 형수님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애교 누나도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양 볼은 어느새 사과처럼 빨갛게 무르익었다.“태연아, 그런 거 아니야. 나랑 수호 씨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마사지해 준 것뿐이야.”애교 누나가 구구절절 설명하자 형수가 피식 웃었다.“내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해? 아니면 나 몰래 정말 나쁜 짓이라도 했어?”나와 애교 누나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그와 동시에 당혹스러웠다.‘내가 감히 형수님 친구를 어떻게 하려 하다니, 만약 형수님이 알면 분명 쫓아낼 거야.’그때 애교 누나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일이 있다는 핑계로 서둘러 집을 나갔다.형수는 그런 애교 누나의 뒷모습을 보며 멍해 있다가 한참 뒤에 나를 보며 물었다.“수호 씨, 내 친구 어떻게 같아요?”“네?”형수한테서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으니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말까지 더듬었다.“좋죠. 예쁘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잖아요.”“그럼 내 친구 꼬시라고 하면 그럴 의향 있어요?”형수의 말에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마음도 혼란스러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문제는 형수가 방금 내가 형수 친구를 어떻게 해보려던 걸 발견하고 일부러 떠보는 것일까 봐 걱정되었다.내가 긴장하고 있을 때, 형수가 내 팔을 잡으며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긴장할 거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돼요.”“형수님, 저 난처하게 하지 마세요. 애교 누나는 형수님 친구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마음을 품겠어요?”“감히라고요? 아래가 이렇게 단단해졌으면서.”형수는 내 아래를 흘긋거리며 말했다.순간 너무 쪽팔리고 난감해 나는 얼른 허리를 숙였다.“와, 사이즈 보통 아니네요.”내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내 아래를 본 순간 형수의 눈빛이 변했다.그때 형수가 말을 이었다.“나 농담 아니에요. 애교와 잠자리를 가져요. 형 도와주는 셈 치고.”‘뭐지? 애교 누나와 자는
팬티는 부드럽고 나른한 데다 심지어 형수의 냄새까지 배어 있었다.손에 감각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아침에 몰래 엿들었던 소리가 뇌리에 재생되며 점차 흥분되었다.‘형수와 뭘 진짜로 할 수는 없지만 팬티로 상상하는 건 괜찮잖아.’나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벨트를 풀고 팬티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내 손이 아래에 닿으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고,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그대로 뿜을 뻔했다.‘집에 나와 형수님 둘뿐이니 노크한 사람은 형수님이겠지?’나는 서둘러 그 팬티를 꺼내 목욕 타월 선반 위에 올려다 놓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형수님, 왜 그러세요?”“수호 씨, 안에서 무슨 나쁜 짓 했어요?”‘이런 말을 묻는다고?’“네? 아, 아니요.”나는 찔려서 말을 더듬었다.“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요?”형수의 한마디에 나는 가슴이 철렁해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형수가 아무리 개방적이라고 해도 본인과 나는 안 된다고 명확히 말했는데, 만약 내가 형수의 팬티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한 걸 들키면 내가 본인 말을 안 듣는다고 생각해 쫓아내면 어떡하지?’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나는 애써 설명했다.“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가 아파서 식은땀이 난 것뿐이에요.”“갑자기 식은땀이 왜 나요? 혹시 어디 아파요?”형수는 이내 나를 걱정했다.“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좀 불편해요.”“문 좀 열어봐요. 어디 봐봐요.”“이, 이제 괜찮아요.”“내외할 거 뭐 있어요? 수호 씨 내 눈에는 아직 애예요. 그러니 얼른 문 열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실망감이 휘몰아쳤다. ‘내가 형수님 눈에 고작 애였다니. 어쩐지 내 앞에서 거침없더라니. 나는 그런 상대로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나 보네.’나는 허리를 숙여 화장실 문을 열었다. 형수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목욕 타월을 놓은 선반 위를 확인했다.나는 마음이 찔려 형수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그때 형수가 선반 쪽으로 걸어가더니 나한테 웃으며 물었다.“혹시 내 팬티 건드렸어
윤미화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막았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막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방을 한 칸 한 칸 수색하다가 결국 내가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잡았다.그러고는 곧장 나를 8층 808호실로 끌고 갔다.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기뻤다.내 계획이 성공했으니 말이다.서윤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내가 말했잖아.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내가 전에 사람 잘못 봤네. 서윤기 당신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눈에 돈밖에 없는 인간이었어.”나는 서윤기를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서윤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돈 버는 게 나빠? 뭐 문제 있어? 난 상인이야. 상인이 돈 벌지 않고 설마 사람을 구할까?”“아무리 돈을 벌고 싶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약재 가격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안 좋은 약재와 좋은 약재를 섞어서 팔고 가짜 약재로 진짜 약재를 바꿔치기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이건 내가 가장 참지 못할 부분이다.약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약재상이 질이 안 좋은 약재를 섞어 팔고 가짜 약재로 수만 채운다면, 약은 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그때 서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정 사장이랑 같이 일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약재를 가장 싼 가격에 팔았어. 그렇게 매일 개처럼 일했는데 결국엔 고작 몇 푼밖에 못 벌었다고.”“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이 동종업자들이 1년 동안 번 것보다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놀리고 비꼬아 댔는지 알아? 병에 걸린 환자들도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의사한테 고마워하지, 누가 약재상한테 고마워해?”“양쪽에서 모두 찬밥 신세 당하면서 내가 왜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정 사장과 협력하지 않은 이후로 한 달에 얼마씩 버는 줄 알아?”“4억 가까이 돼. 전에는 1년에도 이 정도 못 벌었어. 매달 4억이면
그 행동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뭐 하는 거예요?”서윤기는 라이터를 의서에 가까이 가져갔다.“호텔 에어컨이 좀 춥지 않아요? 우리 따뜻하게 해요.”나는 다급히 의서를 빼앗았다.“미쳤어요? 의서에 얼마나 많은 난치병 치료 방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걸 태우면 사람들의 희망을 태우는 거나 다름없어요.”서윤기는 라이터를 내려놓고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난 장사꾼이지 의사가 아니에요.”“이...”나는 전에 서윤기가 유순하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이 사람도 그저 돈만 밝히는 악덕 상인이라는 걸 알았다.나뿐만 아니라 정 사장님도 그동안 서윤기에게 깜빡 속았다.손에 든 의서를 그대로 포기하자니 나는 너무 아쉬웠다.이건 할아버지의 심혈이다. 의서 한 권을 집필하려고 우리 정씨 가문이 대대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이 의서를 건지려면 서윤기와 손을 잡아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내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그때 문득 대담한 생각이 떠올라 나는 의서를 챙긴 뒤 이를 악물고 밖으로 도망쳤다.하지만 얼마 못 가 호텔 직원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어쩐지 내가 의서를 갖고 도망쳐도 서윤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했더니 호텔 안팎에 이미 서윤기의 사람이 가득했다.나는 절대 잡히면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 듯이 도망쳤다. 호텔 직원이 쫓아오면 그 사람을 발로 차고 때리면서 의서를 꼭 지켜내려고 아등바등했다.그와 동시에 나는 윤미화에게 전화했다.“지금 어디 있어요?”[호텔이지. 무슨 일인데?]“지금 누가 절 죽이려고 해요. 윤 사장님이 좀 도와줘요.”나는 도망치면서 되도록 일을 심각하게 설명했다. 그건 윤미화가 빨리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헉.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몇 층이야?]“8층에서 내려가는 중이에요.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와요”나는 신속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그러자 윤미화는 잠깐 생각하더
서윤기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긴, 서윤기 같은 사장한테 몇천만 원은 돈도 아니다.만약 서윤기가 거래할 마음이 없다면 내가 모든 재산을 준다고 해도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하지만 이렇게 포기하려니 내키지 않아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의서를 저한테 팔 건데요?”“이 의서는 나한테 필요해서 안 판다고 했을 텐데요.”서윤기는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나는 계속 서윤기에게 끌려가기만 했다.“서 사장님은 그 의서로 저와 거래할 생각이죠?”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그러자 서윤기가 담담하게 웃으며 자기 잔에 와인을 따랐다.그 동작은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충분히 증명했다.하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서윤기를 보니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강북 한약 상회 일이라면 전 결정권이 없어요. 정 사장님도 이미 건강을 회복했으니 상회 일은 사장님이 다시 맡고 있으니까요.”나는 먼저 내 생각을 내비쳤다.그제야 서윤기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돈은 나도 많아요. 돈 벌 루트가 필요한 거지. 하지만 난 내 파트너한테는 항상 관대하거든요. 파트너들과 함께 돈 버는 것도 좋아하고요.”서윤기는 애매모호하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서윤기는 내가 자신과 손을 잡으면 의서를 바로 주겠다는 뜻이었다.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윤기를 바라봤다.“전 이제 상회 일도 관여하지 않는데 저랑 손잡아서 서 사장님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수호 씨가 상회 일에 관여하지 않지만 정 사장과 사이가 좋은 건 상회 사람들이 다 알고 있죠. 수호 씨가 나서면 정 사장의 뜻을 대변할 수 있을 거예요.”‘이 너구리 같은 인간이 이걸 노린 거였네.’나는 이제야 서윤기의 속내를 완전히 알았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다면 실망하시겠네요. 저는 정 사장님께 미안한 일은 안 해요.”서윤기는 의서를 꺼내 테이블 위
“아, 네. 들어와 앉았다 갈래요?”“그러죠.”서윤기는 사실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냉큼 기회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방금 봤던 여자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만 실수하면 속살이 다 노출될 지경이었다.여자는 이런 상황과 장소가 매우 익숙한 듯했다.그때 서윤기가 여자에게 돈을 한 웅큼을 던져주며 나가라는 눈치를 주자 여자는 아무 말없이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방을 나갔다.서윤기는 그제야 나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수호 씨는 강북에서 생활하지 않아요? 설마 호텔에서 지내요?”나는 서윤기가 나를 찔러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이제 사업하는 사람이니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호텔에 머무는 건 불가피한 일이에요. 집에 가는 게 오히려 더 어렵다니까요. 그런데 이곳에서 서 사장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큰 사업을 하는 사장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가끔 재미를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나도 아예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아니다.서윤기는 내 말에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하지만 몇 분만 더 일찍 왔더라면 큰일 났을 거예요.”‘늙은 여우 같은 것.’서윤기가 상회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으면 내가 끌려다닐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기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내가 결국 먼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만 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 사장님, 전에 조천석 사장님한테서 의서를 구매하셨죠?”“조천석? 어디 보자...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네.’나는 결국 직접적으로 힌트를 줬다.“강북 경진당 사장 조천석 말이에요. 책 이름이 ‘고의문’인데 기억나시나요?”내가 이 정도로 알기 쉽게 말했는데 계속 모
현성과 민우는 내가 혼자인 게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되어 돌아온 거엿다.무엇보다 내가 이번에 건드린 사람은 임천호다. 바로 그 S시 전체를 주름잡고 수많은 용병을 거느리고 있는 효웅이라 불리는 남자 말이다.우리는 그런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지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다.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우리 같은 새내기한테 그런 사람은 닿을 수도 없고 두려운 존재다.하지만 현성과 민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 곁에 있기로 했다.이건 단지 감동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목숨을 나눈 우정과도 같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수백 마디로도 우리의 우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나는 방 두 개를 현성과 민우에게 내어주고 혼자 거실에 누워 속으로 감탄했다.이 순간 흥분과 감동, 두려움과 무서움이 한데 섞여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하지만 이렇듯 신맛이 났다 단맛이 났다 쓴맛이 났다 매운맛이 나는 이런 과정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우리 셋은 함께 천수당에 출근했다.나는 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10시가 넘었을 때쯤 윤미화가 서윤기의 행방을 찾았다며 전화해 왔다.“어디 있는데요?”[샹젤리호텔. 내가 지금 마침 그곳에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 볼게.]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뭐 하러 가는데요?”[고객이 거기서 기다려. 설마 내가 수호 씨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어?]나는 순간 머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오해한 건 미안해요.”나는 윤미화를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자각하고 다급히 사과했다.그러자 윤미화가 웃으며 말했다.[말만으로 미안하다면 다야? 실제 행동을 보여줘야지.]“사장님, 우리 한 식구 아니었어요? 뭐 하러 조목조목 다 따져요? 거리감 들게.”[누가 한 식구라는 거야?]“아니에요? 우리 탐정 사무소는 한 가족 아
“하지만 우리 언니 병 반드시 고쳐야 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그러자 서지예는 다급히 나를 막아섰다.“뭐 하자는 거지?”“지예 씨 언니는 마음에 병이 있어요. 제가 심리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무조건 낫게 한다고 장담하겠어요?”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서지예도 자신의 요구가 좀 지나치다는 걸 알았는지 한발 물러섰다.“그럼 우리 언니랑 대화 많이 하면서 설득해 봐. 더 이상 죽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이제야 말이 되네요.”하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나는 한의학을 전공했지 심리학을 전공한 게 아니다. 더욱이 심리학 의사도 아니라 어떻게 서나연을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서지예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특별히 몸에 좋은 약재를 몇 가지 사갔다.그렇게 하루를 바삐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었다.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온종일 의미 없는 일만 한 것 같다. 다행히 민우와 현성은 뭐라 하지 않았지만.그날 저녁, 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며 S시에 다녀온 일을 얘기했다.그때를 떠올리니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임천호 때문에 몇천만 원 손해 본 것도 모자라 앞으로 다른 사람한테까지 영향이 미칠지 모르겠어.”그 말에 현성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분명 해결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우리랑 같이 이겨내면 되지.”민우도 내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랑 같이 일하기로 했으니 절대 널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두 사람의 감동적인 말에 나는 갑자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민우와 현성이 옆에 있으니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너희밖에 없다. 자, 짠하자.”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그러던 그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내가 가게에 있으면 임천호는 절대 우리 가게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난 가게 나가는 횟수를 줄일 테니까
“마음 가는 대로 얘기해도 내용이 있을 거 아니야. 어떤 내용으로 대화했는데?”서지예는 끈질기게 추궁했다.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나는 그날 대화 내용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별것도 아닌 얘기를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결국 마음이 조급해진 서지예는 무의식적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잘 좀 생각해 봐. 나한테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우리 언니 평소 남들과 얘기 안 해. 내가 뭘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한다고.”“그런데 길게 대화했다는 건 진짜 놀라운 일이야. 정수호, 아니면 네가 우리 언니 좀 봐줄래?”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서씨 가문이 S시에서 어떤 가문인데요. 돈 있고 권력 있는 집안에서 설마 의사 하나 찾지 못하겠어요? 날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라면 포기해요.”나는 흙탕물 싸움에 끼어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게다가 임천호가 만약 그 일을 알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거다.그때 서지예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우리 언니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두고 볼 거야? 의사라며? 사람 살리는 게 의사의 본분 아니야?”“전 의사지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해줄 수는 없잖아요.”나는 이내 반박했다.그러자 서지예가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그런데 이미 알면서 구하지 않으면 의사 자격 없는 거지.”“지예 씨도 의사면서 왜 본인이 구하지 않아요?”‘그리고 말은 왜 또 이렇게 듣기 거북하게 한담?’서지예는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내가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와서 입 아프게 설득하겠어?”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서지예는 이내 말을 이었다.“우리 언니를 치료해주면 내가 큰 고객 많이 소개해 줄게.”만약 서지예가 돈을 준다고 했으면 난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큰 고객을 소개해 준다고 하니 내 마음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내가 필요한 건 인맥이지 눈앞에 보이는 돈이 아니었다.서지예는 서씨 가문 둘째 딸이고
나는 속으로 오늘 왜 이토록 재수 없는지 한탄했지만 결국 서지예를 따라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서지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너 S시에 다녀왔어?”“네.”“뭐 하러 갔는데?”“돈 받으러 갔어요.”“거짓말. S시에서 우리 언니 만났잖아.”“지예 씨 언니를 만난 거랑 돈 받으러 간 거랑 모순되지 않잖아요.”나는 사실을 말했지만 서지예는 나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흥. 누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언니에 대해 조사하러 갔겠지.”나는 너무 억울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제가 왜 지예 씨 언니를 조사해요?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요.”“너랑은 상관없지만 소여정과 상관있잖아. 솔직히 말해, 소여정이 우리 언니를 조사하라고 했지?”서지예의 엉뚱한 생각에 나는 화가 나 헛웃음이 나왔다.“증거 있어요? 소여정 씨가 저더러 지예 씨 언니 조사하라고 한 증거 있냐고요? 있으면 꺼내고 없으면 좀 가요.”나는 상대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그러자 서지예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나도 증거가 없으니까 따지러 왔잖아. 하지만 증거를 찾으면 그땐 죽을 줄 알아.”“우리 언니가 임천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나 해? 소여정이 자기를 조사하라고 했다는 걸 언니가 알면 죽으려고 할 거야.”서예지는 어찌나 걱정됐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서예지가 언니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서나연의 상태를 떠올리니 확실히 안타까웠다. 귀하게 자랐을 부잣집 아가씨가 남자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하다니.그때를 떠올리니 내 태도도 서서히 누그러졌다.“임천호는 지예 씨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동생이면 언니가 그런 남자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걸 내버려두지 말고 포기하게 설득해야죠.”“말이 쉽지. 너 같은 사람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 없지? 너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봐, 놓겠다고 쉽게 놓아지나.”서예지는 여전히 언니 편을 들었다.역시나 친자매 아니랄까
서윤기의 행방을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인지한 나는 윤미화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탐정 사무소로 향했다.윤미화는 강북에 돌아온 뒤로 계속 잠을 보충하다가 내가 찾아오니 그제야 나른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얇은 잠옷 바람에 나를 맞이하는 윤미화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윤 사장님, 이미지 좀 생각하면 안 돼요?”윤미화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다른 애들 다 일하러 나갔어. 여기 수호 씨뿐이야. 전에 못 봤던 것도 아닌데, 조심할 게 뭐 있어?”“그래도 조심해야죠. 사장님이잖아요.”나는 여전히 귀띔했다.그제야 윤미화는 대충 외투를 몸에 걸쳤다.“그래. 알았어.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저 대신 사람 좀 조사해 줘요.”나는 곧바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윤미화는 눈이 커다래졌다.“뭐야? 나 사장이야. 직원이 사장한테 일 시킨다고?”“돈 낼게요.”“누가 돈 달래? 안 해. 얼른 나가.”윤미화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에 나는 싱긋 웃으며 윤미화 곁에 앉았다.“윤 사장님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분 아니잖아요. 항상 말만 독하게 하지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거 알아요. 제발 도와줘요. 이 사람 저한테 정말 중요해요.”“흥. 난 돈에 매수당할 사람 아니야. 돈으로 날 매수하려 했다면 날 정말 얕잡아봤어.”나는 다급히 물었다.“그럼 뭘 원하는데요? 뭐든 말해요. 할 수 있는 거면 무조건 할게요.”“다리 좀 두드려 봐. 다리 아파.”“네.”나는 얼른 윤미화의 다리를 두드렸다.“이 정도 강도면 괜찮아요?”윤미화는 눈을 감고 빙그레 웃으며 마사지를 즐겼다.“좋네. 딱 좋아. 역시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다르네.”“그럼 아까 일은...”“아, 다리가 또 아프네.”나는 윤미화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리를 두드렸다.그러자 윤미화는 아예 나를 시종 취급하면서 차를 따르게 했다가 음식을 사 오게 했다가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켰다.그렇게 약 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