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대장군을 기다리며원경릉이 사기이 말에 웃으며, “사람이 어떻게 초능력이 있어? 너무 과장한 거 아냐?”“초능력까지는 아니어도 분명 체격이 건장하고 무공이 느껴질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여 장군이라니 까요.” 사식이가 받아 치며 말했다.원경릉이 ‘풉’하고 웃으며, “사식아, 너희 원씨 집안도 여장부 집안이라고 하던데 원씨 집안 사람도 다들 체격이 건장하고 무공이 느껴지는가 보지?”자기 집안 얘기를 하니 사식이도 자랑스럽지만: “우리 원씨 집안은 당연히 대단하죠. 하지만 진근영 군주만큼은 아니예요. 진근영 군주는 직접 병사를 데리고 내란을 평정했을 뿐 아니라, 여러차례 선비족과 싸우는 지휘관이 여장군인 거니까요. 그리고 단번의 전투로 이름을 날리다니 남자들도 못하지 않을까요?”단번의 전쟁으로 명성을 얻는 것은 확실히 대단하다. 원경릉도 능력 있는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에 진대장군 부인에게 상당히 기대하는 것도 사실이다.성문 입구에 도착하자 예부의 영접 인력들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요 며칠 타국의 사신들이 줄지어 도착하므로 영접을 담당하는 예부는 일찍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파견했던 사람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 도착하는 사람은 대주의 사신이라고 한다.우문호가 오자마자 예부 시랑에게: “오늘 사신단은 내가 맞으면 되니 다들 돌아가시게.”시랑 대인이 웃으며: ‘태자 전하, 같이 맞으시지요. 소신은 사절을 접대하러 보내야 하거든요.”우문호가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보고 말하려다 말고 우물쭈물했다.원경릉이 보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우문호가 원경릉을 끌고 한쪽으로 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만약 내가 정정을 초왕부에 초대해도 당신 괜찮겠어? 싫지 않을까?”원경릉이, “싫지 않아요. 초왕부에 머물 곳도 있잖아요. 만약 초왕부로 초대하고 싶으면 초대하면 되죠.”가까이 있으면 더 좋지, 적어도 좀더 볼 수 있고.우문호가 뛸 듯 기뻐하며, 좋아서: “원 선생, 진짜 최고야.”원경릉은 우문호가 이렇게 좋아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정신차려 정후원경릉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 사식이에게, “왜 그렇게 생각해?”사식이가: “그냥 느낌이요, 지금 정화군주의 유일한 짐이라면 위왕 전하일텐데, 정말 다 벗어 던지려면 위왕 전하를 찾아가서 얘기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얘기할 게 뭐가 있다고?” 원경릉은 위왕이 그녀를 죽이려 했던 것을 생각하고 위왕이 정화군주의 인생에 더이상 얽히지 말기를 바랬다.“모르죠.” 사식이는 남녀 간의 사랑을 모르고 그저 생각하길, 여자 혼자 갈 데가 어디 있어?원경릉이 한걸음 앞으로 나가자 사식이가 얼른: “원 언니, 앞으로 가시면 안돼요, 위험해요.”원경릉이 사식이를 돌아보며, “괜찮아, 바람 좋아, 바람 좀 맞고 싶어.”“희상궁이 있으면 분경 또 그랬을 거예요, 이제 막 산후조리하고 나왔는데 바람 맞으시면 안된다고.” 사식이가 말했다.“괜찮아, 날씨가 따듯해.” 원경릉이 말했다.사식이가 웃으며, “따듯한 것까지는 아니죠, 어제 탕대인이 옥중에 이불 넣어드렸다고요, 정후께서 감옥이 춥다고.”황제는 계속 조사중이다. 정후가 최선을 다해 변명을 했지만 어디 황제를 속여 넘길 리가 있나? 황제는 일단 정후를 경조부 관아에 있는 감옥에 투옥 시켰다. 하지만 황제가 깊이 파고들 리가 없다는 게 우문호 생각이다. 혜선생(惠先生)이 혀를 깨물고 죽은 것은 자신의 의사였다는 조사결과 때문이다. 그리고 혜선생이 날조하길 우문호에게 개인적인 복수를 하고 싶어서 안왕의 말투를 흉내내 정후와 연락을 취하고. 관직을 미끼로 찰떡이를 안고 나오라고 했다는 것이다.황제가 정후를 압송해 투옥한 이유는 아마 그게 본인에게 교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천자의 어심을 감히 누가 가벼이 속여넘길 수 있을까? 철저히 조사하라는 성지를 내리지 않았지만 안왕이 이미 남영(南營)까지 조사했으나, 정후의 꺼림칙한 일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서 좋을 게 뭐가 있을까? 정후는 태자비의 친정이고, 태자비가 되자마자 친정에서 문제가 터지면 보기 좋지 않다. 이것도 다 원경릉의 체면을 봐서 넘어가
정정 대장군의 첫인상엄마 같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친 엄마를 그리워할 필요가 없다.하지만 이건 다르지.“온 거 아닌가요?” 사식이가 갑자기 말했다.두 사람은 얼른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니 과연 도로에 말과 마차를 이끈 무리가 서서히 오는게 보인다. 앞에서 말을 달리는 것은 척 보니 팔기군(八騎軍)이고, 뒤에 마차 2대를 끌고 오는데 대주(大周)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진짜 왔어!” 우문호가 기뻐하며 말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내버려두고 혼자 ‘두다다다’ 달려가서 아래에 있는 예부 사람들에게 “왔네, 왔어. 붉은 양탄자 준비하고 귀빈을 맞을 예포를 준비하라.”원경릉은 우문호가 아이처럼 폴짝폴짝 신난 걸 보고, “저 사람이 정정 대장군이야? 태자는 어째서 갈수록 ‘바부탱’ 같아 질까?”“바부탱이 뭔데요?” 사식이가 물었다. 원경릉이 재밌다는 듯이 “바부탱은 말이야, 귀엽기도 하고 바보짓도 하는 사람이란 뜻이야.”사식이 생각에 바부탱은 구체적인 느낌이라 원경릉과 같이 내려가면서 “정사를 보실 땐 ‘바부탱’이신 걸 본 적이 없으니 우리 태자 전하는 역시 총명하세요.”원경릉이 성문으로 내려가자, 사식이가 총명하다고 했던 그 태자 전하께서 말을 달려 맞으러 가셨다. 말발굽이 ‘다다다’ 울리고 하늘이 온통 모래바람으로 가득해서 우문호와 말이 거의 모래 바람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거의 도착할 무렵 우문호는 이젠 아예 말에서 뛰어 내려 곧바로 달려갔다.원경릉이 얼굴을 가리며, 맙소사, 자기는 좀 자중하면 안돼?하지만 손가락 사이 벌어진 틈사이로 똑같은 모습으로 진중하지 못하게 말에서 뛰어내려서 우문호에게 달려가는 사람이 보였다.원경릉은 순식간에 둘이 끌어 안는 줄 알았다.다행히 끌어안지는 않고 그저 서로 어깨를 부여잡고 이글이글 쳐다봤을 뿐이다.사식이도 감동해서, “태자 전하와 정정 대장군이 정말 이렇게 사이가 좋으셨군요?”원경릉이 한숨을 쉬며, “보아하니 적어도 나랑 보다는 좋은 거 같네.”사식이가 원경릉을 의식하며 솔직하게: “확실히
진근영과 일행의 첫 인상마차에 탄 여인도 내렸는데 아름답고 영웅의 기세가 얼굴에서 풍겨 나왔다. 헐렁한 비단 옷을 입고 있는 게 배가 불러 있는 듯 했고 자기가 스스로 마차에서 뛰어 내리더니 여전히 멍하니 대장군을 바라봤다.마차에서 한 명 더 내렸는데 대략 스무 살 남짓 된 여자로 포니 테일 머리에 입고 있는 옷도 비교적 헐렁하고 허름한 것이 약간 피곤한 기색이다.원경릉의 눈은 두번째로 내린 여자에게 쏠렸는데 특히 그녀의 머리스타일이나 옷, 그리고 마차에서 내리는 걸 자세히 보니 긴 치마 밑에 드러난 그녀의 구두는 무려 토오픈 슈즈다.원경릉은 그녀의 전체적인 차림을 보니 야릇한 기분이 들어서 자기도 모르게 몇 번이고 보게 되었다.이 사람은 예쁘게 생긴 건 아니지만 깔끔하고 시원스런 느낌으로, 이런 느낌은 진정정 부인 진근영에게서도 느껴졌지만 약간 다르다.일종의 말할 수 없는 친숙한 느낌이다.“진근영이 태자비를 뵙습니다!”원경릉이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진근영이 나와서 예를 취하자 원경릉도 얼른 답례하며 진근영의 손을 잡고, “군주 예는 됐어요,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죠?”진근영도 원경릉을 훑어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는, “아뇨, 태자비를 만나 뵈니 기뻐요.”“군주를 뵙게 돼서 저도 기뻐요.”두 여인은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일행은 우문호가 앞장을 서서 위풍 당당하게 입성하여 바로 초왕부로 갔다.예부에서 원래 객잔을 마련해 사람들이 도착하자 마자 우선 객잔에서 쉬게 하려고 했으나 태자가 조급하게 초왕부로 이끌고 가니 예부에서도 대처하기 난감해서 우문호를 쫓아가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우문호가 크게 손을 흔들며: “우선 초왕부로 모셔갈 테니 자네는 입궁해서 그렇게 보고하도록.”예부 시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 “예!”우문호는 오늘 나오면서 탕양에게 대장군이 여독을 풀도록 연회를 준비하라고 시켜 놨다.그래서 초왕부에 도달하자 음식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아직 점심때라 일단 술은 마시지 않기로 했는데 이는 우문호가 상당히
질투에 불타는 제왕“사람은 계속 그 사람인데……” 우문호가 이리저리 생각하더니, “하지만, 그 사람이 아니기도 해.”진정정이 웃으며, “우문 형(宇文兄),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우문호가 웃으며 손을 내젓더니, “나중에 다시 이 일에 대해 설명할 게. 이리 와, 우리 아들 보러 가자.”진정정이 흥미롭다는 듯 기뻐하며: “그래.”그리고 이때 원경릉도 진근영을 데리고 아이를 보러 가서 네 사람이 같이 똑같은 세 녀석을 보더니 대주의 진정정 부부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세 아가도 대주의 손님을 보고도 표정이 별로 달라지지 않는 것이 이렇게 사람들이 들여다보는 것에 익숙해져서 신경이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저녁 연회 때 제왕 부부가 왔다.원용의가 오고 싶다고 해서 제왕은 하는 수없이 따라온 거지만 말이다.원용의는 진근영을 존경해서 자연스럽게 와서 봤다.서로 안면을 트고 원용의가 계속 정정 대장군을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제왕에게 “대장군이 이렇게 젊고 잘생기셨을 줄 몰랐어요, 우리 북당에도 대장군에 견줄 만한 남자가 드물 거 같은데요? 잘 사귀어 두셔야 할 거예요.”제왕이 삐쳐서 입을 실룩거리며, “누가 젊지 않다는 말 같네, 잘 생긴 것도 남자한테는 절대 칭찬이 아니거든. 난 오히려 저 사람 여자 같기만 하네.”원용의가 의아하다는 듯 제왕에게, “여자 같다고요? 뭘 어떻게 보면 그렇게 보여요? 심지어 당신보다 키도 크고, 당신보다 건장한데. 숨소리 좀 들어보세요, 침착하고 내향적인 것이 딱 봐도 내공의 고수인 데다 이 뿐만이 아니에요, 저 무쇠 같은 팔뚝 봐요, 무공이 얼마나 높은 지 알 수 있잖아요.”제왕이 비웃으며, “무공이 높으면 팔이 잘리지 않았겠지, 무공이 안되니까 잘린 거 아냐.”원용의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그건 저 사람이 그만큼 많은 전쟁을 겪어왔다는 거예요, 듣자 하니 아주 어릴 때부터 전장에 나가기 시작해서 수십 차례 전투에서 이겼다고 하더라고요. 진짜 대단해요.”“다섯째 형도 아주 어릴 때부터 전장을 누볐잖아? 왜 다
대장군 환영 술자리그리고 제왕이 도발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진정정이 힘도 들이지 않고 대충 한 사발을 마셨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게 물 한 사발 들이킨 것 같다.제왕이 입술을 깨물며 진정정이 겉으로만 그렇게 꾸미는 거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 사발을 따라, “존경의 의미는 자고로 세 잔 아니겠습니까, 또 마십니다!”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더니 또 꿀떡꿀떡 한 사발을 마셨다.진정정은 제왕을 칭찬하며, “제왕 전하 주량이 좋으십니다!”제왕은 약간 비틀거린 게 너무 급하게 마셔서 벌써 하늘이 뱅뱅 돌았지만 사발에 술을 가리키며, “대장군 차례입니다, 제 체면을 봐서 드시지요.” “제왕께서 정성을 다해 주시는데 어찌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진정정이 또 술 한사발을 마셨지만 여전히 얼굴색도 안 변하고 심지어 실실 웃고 있다.제왕은 이번엔 자신이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자만심에 차서 상대방의 주량이 이렇게 센 줄 상상도 못했다.하지만 방금 세 잔을 약속했으니 아직 한 사발 남았다. 그러나 그 한 사발을 마시면 취할 게 틀림없다. 사내대장부는 눈 앞에 손해를 절대 보지 않는 법이라고, 제왕은 눈을 굴리더니 우문호에게 “다섯째 형, 와서 대장군에게 건배 안하고 뭐해.”제아무리 진정정도 건배를 돌다 보면 취하지 않을 리 없다.우문호가 어찌 제왕의 꿍꿍이를 모를 수가 있을까? 곧 아무렇지도 않게 “술은 천천히 마셔야 제 맛이지. 넌 술고래라 밑 빠진 독에 술 붓기도 아니고. 우선 요리부터 먹고 있다가 다시 마시자.”“그건 안 돼지, 세 잔이라고 약속했으니 한 잔이라도 빼 먹으면 쓰나.” 제왕이 고집을 부렸다.진정정이 이 말을 듣고 스스로 술을 따르니 맑은 액체가 잔에 가득한 게 반 근은 족히 넘을 양이다. 웃으며 사발을 들더니, “제왕 전하의 보살핌을 받았으니 소장이 왕야께 한 잔 올립니다!”진정정은 말을 마치고 단숨에 비우고 술잔을 아래로 털더니 웃으며 제왕을 바라봤다.제왕은 순간 경악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 “그…..그 너무 급하게 드시는 거
주연의 하이라이트말하는 사람이 더 흥분해 있고, 듣는 사람은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다.진근영이 아예 “두 분이 싸우기 전엔 몰랐다가 맞서 싸운 뒤 서로를 알아보게 되셨으니, 그때 기분을 되살려 한바탕 싸워 보시는 게 어떠 신지요.”우문호와 진정정이 듣더니 안성맞춤 제의라는 생각에 얼른 마당을 치우고 장검 두 개를 가져오라고 해서 옛날의 꿈을 되살리고자 했다.마당에는 풍등이 여럿 걸려 있어 몽롱하고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우문호는 흰색 옷을 입었고 진정정은 푸른 색 옷을 입었는데 두 사람이 날아올라 장검이 허공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검무가 꽃처럼 피어나는 가운데 살기는 한 가닥도 없이 오직 말할 수 없는 진심만이 오고 갔다.원경릉이 나지막하게, “그만 좀 하라고!”마침 진근영이 쳐다보자 원경릉은 뻘쭘한데 진근영은 오히려 회심의 일소를 날리며, “진짜 그만 좀 하라고.” 사식이와 원용의는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엄청난 비무를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어라, 줄곧 두 사람의 검무를 봐도 누가 더 우아하게 춤을 추나 같은 느낌이라 전혀 흥이 나질 않았다.결국 진근영이 참다 못해 탁자를 치고 일어나 사식이의 허리에 찬 칼을 들고 날아오르며, 두 사람을 떼어놓고 낭랑하게 “제가 어떻게 싸우는지 두 분께 알려드리죠.”진근영의 장검이 우문호를 향하자 진정정이 얼른 칼을 뻗어 막아 서고 진근영이 뒤를 돌아 진정정을 찌르려고 하자 우문호가 얼른 앞으로 나와 진정정을 돕는데 이렇게 주고 받는 게 오히려 두 사람과 진근영이 대결하는 것처럼 보였다.진근영이 화가 치밀어서 한풀이라도 하듯이 아이를 벤 것도 잊고 입신의 경지로 검을 휘두르는데 두 사람은 그저 피하기만 할 뿐이라 진근영은 우위를 점했다.이렇게 몇 초식을 하다 보니 흥이 올라서 두 사람이 실력 발휘를 시작해 맹렬한 검법과 내공이 넘쳐흘렀다. 검법이 스쳐지나는 곳마다 낙엽이 미친듯이 춤을 추고 검에 차가운 빛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순간 오르락 내리락 했다.진근영이 칼을 거두고 내려오자
썸 타는 두 사람제왕은 두 사발을 마신 후 사실 밤새 골아 떨어졌다.원용의는 제왕을 마차에 태우고 “마차에 타세요, 제가 말 탈 게요.” 둘이 외출할 때는 대체로 이렇다. 원용의는 말 타는 걸 좋아하지 막힌 마차안에 갇혀 있는 건 질색이다.원용의가 가리개를 젖히고 나가려 하자 제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고, “기다려.”원용의가 고개를 돌려, “왜요?”원용의는 빛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고 그저 어슴푸레 눈빛만 반짝였다. 제왕은 용기를 끌어 모았지만 순식간에 푸시시 꺼지며, “아, 아니 그냥 좀 어지러워서.”원용의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누가 그렇게 마시라고 했어요? 세 사발 권한다고 큰 소리 치더니, 만약 제가 대신 한 사발 안 마셨으면 당신은 오늘밤 업혀갔어요.”“넌 왜 내 대신 마셨어?” 제왕이 원용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원용의가 손을 펼치며, “어쨌든 당신이 취해서 쓰러지는 걸 볼 수 없으니까요, 당신은 진대장군의 적수가 아닌 게 분명하거든요.”제왕이 욱해서, “넌 왜 항상 날 무시해?”원용의가 놀라며, “그랬다고요? 제가 언제 무시했는데요?”“그럼 아니야?” 제왕이 반문했다.원용의가 “당연이 아니죠, 제가 어떻게 당신을 무시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죠?”제왕이 옆에 빈 자리를 툭툭 치며, “여기 앉아 봐, 오늘밤 너랑 얘기하고 싶으니까.”원용의는 술을 마셔서 바람을 쐬며 술기운을 좀 날리고 싶어서 “제왕부 가서 얘기해요, 저 답답해요.”말을 마치고 바로 말을 타려고 마차에서 뛰어 내렸다.제왕은 자기가 성심성의껏 오라고 했는데, 원용의가 조금도 체면을 살려주지 않은 점에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얘기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누가 신경 쓴데.”마차가 움직이자 휘날리는 가리개 사이로 말을 달리는 원용의의 자태가 보이는데, 자세에서 영웅의 기백이 느껴지는 것이 제왕의 마음이 두근거렸다. 제왕은 화난 것도 잊고 몰래 가만히 원용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그러다 원용의가 부득부득 가려고 한 게
자시가 다 되어 갈 때, 그녀는 바로 소월궁으로 돌아갔다.궁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자마자, 다섯째가 돌아왔다. 녹주가 그의 옷을 걸어주고, 목여 태감이 차를 준비한 뒤 물러갔다. 기라는 복도 앞의 불을 하나만 남긴 채 모두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우문호는 원경릉을 안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기다리지 말고 피곤하면 먼저 자지 그랬소.""마침 연구를 확인하려 했소. 일부러 기다린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피곤할 텐데 오늘은 씻지 말고 바로 쉬시오."하지만 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화가 너무 나서 잠이 오지 않소. 그건 그렇고, 아이들에 대한 얘기 좀 해주시오."그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로 뉘었다. 약간 피곤해 보였지만, 그보다도 화가 난 것 같았다. 평소 아무리 바빠도 오늘처럼 피곤해 보인 적은 없었다.원경릉은 그의 허리 쪽에 부드러운 베개를 끼워주고, 반쯤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눈썹과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우문호는 화를 낼 때면 두통이 자주 생겼다."계란이는 어떤가? 워낙 바쁘다 보니 자세히 듣지도 못했소."그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원경릉을 바라보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사지하지 못하게 했다.그러고는 팔을 크게 펼쳐 그녀를 품에 안았다."당신도 피곤했을 텐데 그만하시오. 조금 쉬다가, 당신의 어깨를 눌러주겠네."원경릉은 그의 품에 기대며 웃으며 말했다."계란이는 괜찮소.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앞으로 혼사를 하더라도 당신이 좋아하는 자와 하겠다고 했소."다섯째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피곤함이 말끔히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정말? 정말 그렇게 말했소?!""물론이네. 당신은 그녀의 우상이오."그러자 우문호는 곧바로 기운을 차린듯 허리를 곧게 폈다."우상이라. 그렇다면 앞으로 무공을 갈고닦는 것 외에도 책을 많이 읽고 지식을 쌓아야겠군. 우상이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 실력이 없으면 아이가 실망할 것 아닌가.""실력이라..."원경릉은 그의 품을 떠나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 옷가지를 정리하고 궁으로 오시니, 전하는 이미 군영으로 떠나셨지요. 마침 마마께서도 외출하신 터라, 이곳에서 폐하를 보살피고 계신 것입니다.""그래."원경릉은 직접 어서방에 가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로하신 희 상궁에게 밤새도록 지키게 할 수 없었다.어서방에 도착하자, 목여 태감과 희 상궁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다가왔다."마마,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이십니까?""다섯째가 저녁을 먹었는지 보러 왔네.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이렇게 늦도록 의논을 한다니."단단히 닫혀 있는 어서방의 문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익숙한 얼굴도 보였다. 탕양, 냉 대인, 홍엽, 이리 나리와 다른 사람들이 보였다.목여 태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길주(吉州)에서 과거 시험 부정행위 사건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폐하께서 크게 노하셨습니다."원경릉이 미간이 찌푸렸다. 다섯째는 조정의 인재 등용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고, 재위하는 동안 부정행위에 대해서 엄격하게 처벌해 왔다. 그런데도 누군가는 감히 이런 짓을 벌였단 말인가? 돈에 눈이 멀어도 정도가 있지!길주에서 이런 일이 터졌으므로 다른 지역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보일 가능성이 컸기에, 지금 바로잡지 않으면 불길 번지듯 확산할 것이었다.다섯째는 문인을 매우 중시하며, 늘 무장은 나라를 지키고, 문인은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해왔다. 그런 마음 가짐으로 황제의 자리에 앉았으니, 당연히 문인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게다가 그는 백성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방법은 십여 년간의 힘든 공부 끝에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라 말했었다. 그런데 부정행위가 만연하면 실력 있는 자들이 탈락할 테고 그렇게 되면 문인을 중시하는 정책이 무너질 것이다.더 나아가, 억울하게 탈락한 자들은 조정에 대한 불만을 품을 것이고, 문인이 불만을 가지면 나라의 기운은 쇠퇴할 것이다."식사는
아이들과 밤새 각자 도성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원경릉은 다음 날 아침 서둘러 경성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경천의 혈액과 호수 에서 채취한 얼음물에 얼음 벌레가 존재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기화가 아직 돌아가지 않았기에, 원경릉은 그를 불러내어 계란에게 그 일을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기화는 가슴을 두드리며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하지만 원경릉은 그의 진지한 모습을 보며 더욱 불안해져, 왠지 모르게 그가 말실수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서 다시 한번 당부하자, 기화는 슬슬 짜증이 나는 듯했다."정말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분명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원경릉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예. 꼭 비밀로 하십시오.""예. 어서 아이들과 인사나 하시지요."기화는 성가신 듯 손을 휘저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나이도 어린 황후가 어쩜 이렇게 잔소리가 많지?'원경릉은 아이들과 작별을 마친 후, 바로 경성으로 떠났다.하루도 채 걸리지 않아, 그녀는 황궁으로 돌아왔다.그녀는 돌아오자마자 간단히 다섯째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바로 실험실로 향했다.경천의 혈액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니, 역시나 얼음 벌레가 있었다. 비록 과거 다섯째의 혈액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긴 했으나, 다섯째의 것보다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이어서 호수에서 가져온 얼음물을 현미경으로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얼음 벌레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호수 근처에서 채취한 물도 마찬가지이므로, 호수에서 감염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얼음 벌레의 감염원을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원경릉은 꽤 실망스러웠다.하지만 우선 경천의 혈액 속 얼음 벌레를 연구할 수 있기에, 그녀는 벌레를 분리하여 다양한 온도에서 번식력과 생존력을 실험해 보려 했다.이 일을 마무리한 뒤, 원경릉은 드디어 다섯째에게 능력에 대해 알려줄 때가 왔다는 결정을 내렸다.그저 그가 놀라서 기절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소월궁으로
기화가 말했다."형인 경천보다 크게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직 경천만큼의 패기는 없습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경천과 대등해질 것입니다!""성격은 어떻습니까?""괜찮습니다."기화는 대부분의 사람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 정말 괜찮은 사람일 것이었다.이후 기화는 원경릉과 함께 다른 도성을 방문했다. 원경릉은 미리 능력으로 소식을 보내 그들을 한곳에 모이게 했다. 한편 기화는 계란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동행했다. 그도 어쩌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소년들은 어머니가 오자 무척 기뻐했다. 하지만 저녁이 되자, 그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그녀가 이유 없이 이렇게 먼 곳까지 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원경릉은 아이들에게 아버지에 대한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약을 잘못 쓰고, 얼음 벌레에 감염되고 현대에서 사용한 약까지, 모든 것을 알려주었으며, 경천의 저주까지 전부 털어놓았다.경단과 찰떡은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그들은 위기에 처한 아버지의 상황에 대해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환타와 칠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원경릉은 이 두 아이가 떡들보다 신비로운 일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이 능력은 정말 타고난 것 같았다.잠시 후, 칠성이 입을 열었다."사실, 경천이 감염된 얼음 벌레가 저주의 일종일 가능성이 큽니다. 비록 기화 스승께서 연관 없다고 하셨지만, 저주도 일정한 형태와 매개체를 가지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태나 매개체가 있으니, 분명 저주를 풀 방법도 있지요. 큰 공덕을 지닌 자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어쩌면 어마마마일 수도 있습니다. 어마마마가 얼음 벌레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연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내가?"원경릉은 깜짝 놀랐다."아니면 아바마마일 수도 있습니다."옆에서 듣고 있던 환타가 말을 보탰다."아바마마 혈액 속 마커가 사라졌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원경릉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녀는 기화가 말한 고차원 문명이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다.인류는 고차원 문명에 대해 단지 추측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심지어 그 존재 여부조차 검증할 수 없다.누군가 고차원 문명이 신계 문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신계 문명을 접할 방법조차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신계의 시선으로 이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겠는가?그녀는 점점 자신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원경릉은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화제를 경천 황제에게 돌리려 했다."그를 구할 방법이 없습니까? 아직 젊은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건 너무 아깝잖습니까?"아깝긴. 큰 공덕을 쌓았으니, 그는 죽고 윤회할 것입니다.""윤회라..."원경릉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미간을 문질렀다."아까는 고차원 문명 얘기를 하시더니, 이번엔 윤회라. 사고방식이 너무 빠르게 바뀌시니, 따라가기가 힘듭니다."하지만 기화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뭐가 어렵습니까? 과학의 끝엔 결국 신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십니까?""그럼, 고차원 문명의 관점에서 이 저주에 관해 설명해 주시지요."이렇게 특별한 이유를 과연 그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기화가 답했다."사실 이해하기엔 쉽습니다. 저주라는 건 하나의 힘이고, 그 가문은 힘을 어지럽혀 반작용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저주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지요. 하지만 가문의 기운이 달라지며 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지게 되고, 이 세대에서 거의 끝이 보입니다. 그를 큰 공덕을 쌓은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나라를 다스리고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고, 나라 발전에도 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가 쌓은 덕이 반작용보다 커지면, 반작용의 힘도 점점 약해질 것이고, 결국 동화될 것입니다. 그럼, 윤회한다 해도 그는 복이 가득한 사람일 것입니다."원경릉은 그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는데, 그때 기화가 한마디 덧붙였다."누군가는 화를 입으려 태어났고, 누군가는 운명을
"생사도 팔자에 달린 것인데 무서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사람은 언젠가 죽는 법입니다. 완안 가문은 저주를 받아, 대대로 한 명씩 열여덟 살 이전에 모두 죽었지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운명이 정해져 있었고, 그래서 사원에 보내졌습니다. 이 저주를 피하려 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지요.""추측입니까?"원경릉이 물었다."아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알려준 것입니다.""그분도 여기 계십니까?""아니요. 이 대륙의 나라들, 그리고 이 근방의 연안까지, 전부 용인 그들이 관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온 이유도, 택란이 금나라 어린 황제가 혼사를 이야기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기 전, 안풍친왕의 장인 라진이 경천을 황제가 되도록 도와주라 했습니다. 금나라의 정권을 안정시킨 후, 그의 동생을 후계자로 키우라고요. 아시다시피, 그들은 모든 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국사, 대사, 법사, 그리고 도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장군을 파견하여 권력을 쥐고 하지요. 역사를 공부했으니 아시잖습니까? 시대마다 등장한 엄청난 인물들은 대부분 그가 보낸 자들입니다. 각 나라에 다 있지요."원경릉은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용이라니요? 안풍친왕의 장인이 용이고, 여러 나라를 관장한다고요?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 아닙니까?""아직 한 잔도 마시지 않았습니다!"기화는 다시 수염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모습이 원경릉에게는 너무나도 어색하고 위화감이 들게 만들었다.털털하던 사람이 국사 행세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습관 되지 않았다."어쨌든 상황은 이러합니다. 경천은 열여덟이 되기 전, 죽을 운명이지요. 하지만 죽기 전에 금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만들 능력이 있지요. 나라가 안정되면, 그도 죽을 것입니다."원경릉이 숨을 들이쉬었다."그 사실을 본인은 알고 있습니까?"어찌 상황이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되는 걸까?"모르지요. 알고 있다면 택란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백 살까지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기화는 피식 웃었
찾아온 사람은 바로 택란의 스승인 기화였다.하지만 원경릉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금나라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넉넉한 옷자락에 얼굴도 훨씬 희고 깨끗해졌으며 수염까지 길렀기 때문이다. 그의 날카롭고 빛나는 눈빛이 아니었다면, 정말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스승님, 어찌 이곳에 계십니까?"택란이 기쁘게 묻자, 기화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이곳에 온 지 좀 됐다. 금나라에서 국사를 하며, 네 사모를 잠시 피할 겸 말이다. 금나라에 무슨 일로 온 거냐?""금나라에 온 지 오래되셨습니까? 어찌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까?"택란이 물었다."그동안 조금 바빴다."기화는 예전보다 훨씬 더 신중해진 모습이었다. 말투에서 마저도 국사의 위엄이 느껴질 정도였다. 원경릉은 문득 예전에 양여혜가 그를 이상한 사기꾼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보니 꽤 그럴싸한 평가였다."택란아, 네 어머니와 함께 내 저택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꾸나."기화가 말을 이었다.택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이제 저택까지 있으세요?"기화는 여전히 태연하게 말했다."국사인데 저택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예. 스승님의 저택도 구경하고, 며칠 머물면서 스승님과 함께 한잔... 과일주 한잔해야겠습니다."택란은 너무 기쁜 나머지 실수로 '술 한잔'이라고 말할 뻔했다.기화는 눈치를 보며 원경릉을 힐끗 보았다. 원경릉에게 택란과 술을 마시는 걸 들키면 안 된다.원경릉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사실 택란이 어린 나이에 술을 즐기는 것이 신경 쓰였지만, 직접 나설 필요는 없었다. 이 문제는 양여혜에게 전해, 기화의 부인에게 귀띔하라 말하면 된다.기화의 부인 월아는 보수적인 성격이라, 택란이 술 마시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마차를 타고 국사인 기화의 저택으로 향했다.저택은 아주 컸고, 내부는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금나라 황제가 기화를 상당히 신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기화는 택란에게
하지만 얼음 벌레의 발원지는 금나라 아닌가? 그렇다면 경천이 물을 다루는 능력은 다섯째보다 더 뛰어나야 할 텐데, 어찌 반대일까?원경릉은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그럼 이 잔 속의 물이라면, 넘치게 할 수 있겠느냐?"경천은 고개를 끄덕였다."한 잔이라면, 가능합니다."그가 생각을 집중하자, 찻잔 속의 물이 서서히 넘쳐흘렀다. 일정한 속도로 보아, 그가 통제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그러니 바깥의 호숫물은 마음대로 조종하기 어렵다는 것이냐?"원경릉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가끔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물을 얼리기가 훨씬 쉽습니다."경천이 솔직히 대답했다.원경릉이 다시 물었다."그럼, 언제부터 이런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느냐?"경천이 답했다."다섯 살 때부터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능력을 갖추게 됐는지는 모릅니다. 어릴 때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고요.""혹시 큰 병을 앓은 적이 있거나, 특별한 만남을 겪은 적이 있느냐? 예를 들면, 아주 대단한 인물을 만난다든가."경천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특별한 만남은 없었다만, 병에 걸린 적은 있습니다. 유모의 말로는, 어릴 적에 큰 병을 앓았고, 거의 죽을 뻔했다고 합니다."그러자 원경릉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그럼 그 큰 병을 앓은 이후부터, 이 물을 다루는…… 즉, 물을 얼리는 능력이 생긴 것이더냐?"경천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즈음이었을 것입니다."원경릉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너의 피를 조금 뽑아도 괜찮겠느냐? 많지는 않을 것이다."경천은 그녀의 말에 덤덤히 시중을 불렀다."여봐라, 비수와 사발을 가지고 오거라."원경릉이 웃으며 말했다."괜찮다. 채혈 도구가 있으니, 네가 동의만 하면 된다."경천은 짧게 대답한 후,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작은 약상자를 들고 돌아온 후, 경천이 전혀 본 적 없는 물건들을 꺼냈다. 그녀는 가느다
다음 날이 되자마자 모녀는 바로 금나라로 떠났다.택란은 원경릉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황후로서 금나라에 방문한다면, 책봉 문제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서 논란이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경릉도 그런 택란의 말에 동의했다. 어차피 그녀의 옷차림이 워낙 소박하여 전혀 북당의 황후처럼 보이지 않기도 했다. 경천이 그녀의 신분을 눈치채더라도, 입 밖에 내지 않게 하면 그만이다.모녀는 초능력을 사용하여 빠르게 량주에 도착했다.택란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고 곧장 황궁으로 가서 황제를 만나겠다고 밝혔다.황궁 호위들은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어, 감히 태만히 할 수 없었기에, 즉시 두 사람을 궁 안으로 안내했다.경천은 택란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정무를 마친 후 그녀를 만나러 광명전으로 향했다.문에 들어설 때, 그의 눈에는 오직 택란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흥분한 채로 빠르게 다가와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왔느냐?""예.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택란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리며 말했다."인사드립니다."경천은 그제야 원경릉을 보았다. 그는 서둘러 기쁨 어린 눈빛을 거두고 공손해졌다. 그러고는 즉시 궁인들을 나가라고 명한 뒤, 문을 닫고 원경릉에게 정중히 예를 올렸다."북당의 황후마마를 뵙사옵니다!"그는 택란에 대해 오래전부터 조사해 왔기에, 북당 황제와 황후의 초상화도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만나본 적은 없어도 그들의 얼굴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한편, 원경릉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침착한 태도로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준수한 외모와 온화한 눈매 속에 황제의 위엄이 은은하게 배어 나오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예를 갖추지 않아도 된다. 앉아서 이야기하자꾸나.""예!"경천은 잔뜩 긴장이라도 한듯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먼저 앉으시지요."원경릉이 먼저 자리에 앉자,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택란을 흘깃 바라보았다.그는 황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