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할 수 없는 부부우문호가 냉정언의 집으로 가자, 냉정언이 술을 꺼내더니 안주를 몇 개 내놨다. 우문호는 안주는 입에 넣지 않고 ‘깡술’만 연거푸 몇 잔을 마시더니 냉정언에게, “내가 아무도 안 데려와서, 미안한데 사람을 시켜서 원 선생한테 나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 좀 전해줘.”냉정언이 고개를 끄덕이고 시종에게 분부해 초왕부에 가서 통보하도록 했다.냉정언은 우문호의 굳은 얼굴을 보고, “무슨 일 있어?”우문호는 두 손으로 탁자를 잡고 고개를 들어 슬픈 미소를 띤 채, “내가 소씨 집에 불을 지른 일 알고 있지?””냉정언이, “어떻게 몰라? 온 성안에 쫙 퍼졌는데. 다들 난리야. 태후 마마께서 책망 하셨어? 너무 걱정하지 마. 태후 마마는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분이시니 조금 있으면 화가 누그러지실 거야. 소씨 집안에서 그동안 한 짓을 태후 마마께서 다 아셔도, 친정이다 보니 순간 분노가 치밀수도 있지. 너무 괴로워 마.”우문호가 심호흡을 하며, “황조모께 혼나는 건 피치못할 상황인 거 나도 알아, 소씨 집에 불을 지를 때 이미 어떻게 황조모의 용서를 구할까 생각 했어. 하지만 어마마마께 이 일이 새 나갈 거라고 요만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우문호는 냉정언을 보고 산산이 부서진 듯한 눈동자로, “어마마마께서 황조모를 찔렀어!”‘쨍그랑’ 소리와 함께 냉정언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려 술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냉정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우문호를 멍하니 바라보고 한동안 있다가 천을 뜯어서 몸에 튄 술을 닦았다.냉정언은 바닥에 떨어진 잔을 치우고 파편을 한쪽에 모아뒀다. 말재주로는 따라올 사람이 없는 냉정언도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냉정언은 정치에 수년간 몸담고 있었지만 이런 국면은 해석하기가 결코 쉽지 않으니 아예 말없이 우문호와 같이 술을 마실 뿐이다.냉정언 집에서 소식을 전하자 만아가 원경릉에게 보고하고 이와 동시에 귀영위도 와서 궁안에서 있었던 일을 알렸다.원경릉이 다 듣고 알았다고 하고 방으로
취한 우문호오경(새벽3시~5시)이 되었을 때 냉정언부에서 우문호를 데리다 주었다.우문호는 떡이 되도록 취해서 들어올 때부터 이미 인사불성으로, 원경릉은 사람을 시켜 우문호를 침대에 눕히고 만아를 시켜 뜨거운 물을 가져오라고 한 뒤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몸에서는 술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냉정언부 사람 말이 우문호가 술 5근을 마셨다고 한다.원경릉은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둘이 함께 한 시간은 앞뒤로 따져도 대략 2년 가량으로 한 이불을 덮고 서로 익숙해지면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따지고 보면 진정한 위기는 지금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우문호 곁에 앉아 손가락으로 우문호의 얼굴을 매만지는데, 그동안 우문호도 힘들어서 얼굴 피부도 전에 비해 많이 상했다.경조부에 발령받고 매일 일찍 나가서 늦게 들어오는 나날에 쉬는 날도 거의 없고, 우연히 짬이 나면 다른 일로 바빴다.정말 고생이 많았다.마음이 얼마나 괴로우면 이렇게 취하도록 마셨을까?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우문호가 천천히 눈을 떴다.처음엔 막연하다가 일말의 복잡한 눈빛이 되더니 원경릉의 손을 잡고 자기 얼굴에 대더니 울먹이며, “왜 아직 안 잤어?”우문호는 원경릉을 끌어 당겨 가슴에 묻고 원경릉의 귓불에 턱을 대고, “얼른 자, 눈가까지 벌게졌어.” 원경릉은 우문호의 품을 파고들며 손을 그의 어깨에 올렸는데 몸이 노곤해서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우문호는 다시 잠들었는지 숨소리는 고르지만, 원경릉의 이마에 닿은 우문호의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우문호는 잠들지 않았다.원경릉은 부부 사이에 이렇게 평온을 가장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두 손을 우문호 가슴에 올리고 우문호를 보며, “궁에서 벌어진 일 나 다 알아.”우문호가 낮게 ‘응’하더니 눈을 감고 잠시 후 눈을 떠서, “엉뚱한 생각하지 마,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어.”원경릉은 눈가가 젖은 채로, “날 원망해?”우문호가 약간 놀란 듯, “
폐태자 되면?원경릉이 우문호에게, “실망할 리가 없지. 자기가 태자가 되길 바란 적도 없고.”우문호가 웃으며, “그럼 됐어, 누구를 다치게 하고 누구를 실망시키던 상관없는데 당신이 다치거나 실망할 까봐 두려워.”우문호가 말을 마치고 원경릉을 품에 안았다.원경릉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 말을 듣고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와, “난 자기가 이 일때문에 나랑 멀어질 까봐 무서웠어.”우문호는 원경릉의 등을 쓸어주며 중얼거리듯, “그럴 리 없어. 난 시비를 가릴 줄 알아, 원경릉이 나를 위해 했던 모든 일을 전부 마음에 새겨 뒀는 걸. 원래는 내가 당신한테 미안하지. 당신이 아이를 낳을 때, 어마마마께서 당신한테 그럴 때도 내가 나서서 당신을 위해 뭔가 하지 못했지만 당신은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 내가 어떻게 당신이랑 멀어질 수가 있어?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지 못해. 이생엔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화롭든 몰락하든 당신은 나랑 하나로 묶여 있어. 누구도 먼저 손 놓기 없기야.”원경릉은 우문호의 가슴에 엎드려, “응, 누구도 먼저 상대방의 손 놓기 없기.”이 순간 원경릉은 생각했다. 우문호를 위해서 어떤 일을 겪는다 해도 충분히 감내하리라.궁에서는 아무 소식도 없이 며칠이 갔다.밖에서는 저마다 의견이 떠들썩한 게 모두 현비가 태후를 찌른 걸 알고 있어서 대세를 관망하고 있는 중이나, 그 중엔 일부는 악한 마음이 꿈틀대며 조정 대신들과 사통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월 초파일 조정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태자를 연좌제로 끌어내리려는 폐위 상소를 준비하고 있었다.현비 소식은 자연스럽게 세상에도 전해져 백성들이 경악했고, 소씨 집안도 당연히 이 일을 알았다. 기왕이 원래 소씨 집안에 집을 한 채 먼저 줬는데 더는 주지 않았다. 다행히 소씨 집안사람들이 이사 들어가지 않고 먼저 다른 집을 사두었다.소씨 집안 쪽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소식이 전해진 후 아무도 감히 큰소리를 내지 못하고, 소씨 집안은 그대로 몰살일지도 모른다며
설치는 기왕기왕부.확실히 기왕은 좋아서 죽는 중이다. 연일 심복인 대신들과 만나 탄핵 상소를 올릴 상의를 했다.기왕은 전에 갖은 계책을 동원해도 우문호를 끌어내릴 수 없었는데 현비가 자기를 이렇게 도와줄지 몰랐다.기왕은 주명양을 주씨 집안으로 돌려 보내 그쪽 상황을 알아보고 주재상이 어떻게 말하는지 살폈다. 태상황과 주재상 쪽에서 우문호를 변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기왕은 되도록 일찍 전략을 알아챈 뒤 그에 맞는 처방을 내려야 했다.주명양은 요즘 기왕에게 상당히 냉담했으나 이 말을 듣고 기왕이 태자가 될 희망이 있다는 생각에 기민하게 친정으로 돌아가 스파이 역할을 맡았다.기왕은 기왕비의 도움을 구하길 마다하지 않은 게 기왕비의 인맥은 여전히 기왕비의 수중에 있어 우연히 기왕을 한 번 돕기는 했지만 전심을 다하지는 않은 걸 알 수 있었다.기왕비는 기왕이 투지가 불타올라 큰소리 치는 것을 듣고 무표정하게, “응? 그래서? 탄핵 상소 뒤에는요? 우문호를 끌어 내린 뒤에는요?”“그럼 내가 태자가 될 기회가 생기지.” 기왕비의 이 무관심한 표정은 정말 적응이 안된다. 꼭 기왕이 매사를 기왕비에게 구걸하는 것 같다.“당신이 기회가 있는 거예요, 아니면 넷째가 기회가 있는 거예요? 아니면 일곱째가 기회가 있는 거예요?” 기왕비가 매정하게 반문했다.‘넷째의 야심은 이미 아바마마께 들켰는데 무슨 기회가 있다는 거야? 안왕부에 데리고 있던 여자 참모를 죽여서 아바마마께서 본보기를 보이셨다고. 일곱째는……” 기왕은 말없이 옷자락을 떨치고 앉아 표독스럽게, “수저가 좋을 뿐이야. 황후의 몸에서 태어났다 거 뿐이라고. 내가 그랬으면 벌써 태자가 됐지. 걘 영 쓸모가 없는데 아바마마가 어떻게 태자 자리를 걔한테 물려주실 수가 있어? 원래부터 기회는 있었지, 적자에 주씨 집안이라는 뒷배에 원씨 집안 계집애까지 후궁으로 맞았으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바보가 소중히 여길 줄을 모르더니 이젠 다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어. 두 눈 멀쩡히
기왕비의 방문아이들이 기왕비를 알아보고 달려오며 ‘큰어머니’하고 부르는데 기왕비가 웃으며 아이들에게 가서 손에 약과를 하나씩 쥐어 주었다, “가서 놀아라!”아이들이 같이 예를 취하고 폴짝폴짝 뛰어갔다. 만두가 이리 나리에게 약과 하나를 던져 주었다.이리 나리가 입에 넣으려고 달려오는데 눈늑대가 날름 가로채서, 이리 나리는 계속 달리다가 나무에 부딪혀 눈더미를 맞았다.기왕비가 깔깔 웃고 말았는데, 초왕부는 이렇게 생기가 넘치니 여기 오는 게 점점 좋아진다.누군가 와서 기왕비를 본관으로 모시고 갔다.잠시 후 원경릉이 손난로를 든 채 꽤 두툼하게 꽁꽁 차려 입은 것이 북극곰 같다.기왕비가 웃으며, “새로 좋은 모피를 구했는데 줄게요. 태자비라는 분이 이렇게 입고 초라하지도 않아요?”원경릉이 아무렇지도 않게 기왕비에게 눈을 흘기며, 가볍게 인사하고 같이 들어가자고 하더니, “됐어요, 전 기왕비 마마의 모피를 누릴 복이 없네요. 이렇게 입는 게 어디가 초라한 데요? 일반 백성들은 좋은 솜저고리 하나도 못 해 입는데, 이 목화 솜 괜찮아요.”“아무리 좋아도, 모피만큼 따듯하진 않죠.” 기왕비가 앉아보니 너무 추워서, “어떻게 본관에도 난로를 안 피워요? 여긴 하루 종일 아무도 안 와요?” “찾아오는 분이 뜸해서 좋죠, 조용하니까요.” 현비가 태후를 찔렀다는 소식이 퍼지고 누가 세배를 하러 오고 싶겠어? 그 중엔 약점을 잡으려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덩달아 재수 옴 붙을 까봐 피했다. 정초에 누가 이런 대역무도한 일에 끼고 싶을까?기왕비가 웃으며, “맞아요, 고요해서 좋네요.”원경릉이 눈을 치켜 뜨며, “어떻게 온 거예요?”기왕비가 맥이 탁 풀려서 의자에 기댄 채로 눈살을 찌푸리며, “기왕부는 아주 시끌벅적해요. 쓸데없이 떠들썩한 게 문제지만. 혼자 고민하느니 여기와서 얘기나 하려고요.”원경릉은 기왕비가 온 이유를 짐작하고 ‘돌직구’로, “위로할 필요 없어요. 전 괜찮으니까. 다섯째도요.”기왕비가 서서히 웃음을 지으며, “괜찮은 거 알아요. 위
현비를 찾아간 우문령기왕비가 듣더니 눈을 내리깔고, “다섯째가 다 알고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까지 전부 생각했군요, 그러니 그 책을 필사하죠.”원경릉은 불경에 대해 잘 몰라서, “지장보살 본원경이 무슨 내용이예요?”기왕비가, “지장보살은 무량겁 전에 인도의 브라만 여자였는데, 어머니가 불·법·승 삼보(三寶)를 믿지 않아 악한 길을 걸었기로 사후에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어요. 브라만 여자는 죄에 빠진 중생을 제도해 해탈 시킴과 동시에 돌아가신 엄마의 속죄를 위해 돌아가신 엄마를 제도하겠다고 불상 앞에서 서원했어요. 지장보살 본원경은 본래 이렇게 한없는 효와 서원을 대표하는 거예요.”기왕비가 말을 마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원경릉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마음이 순간 꽝꽝 얼어붙었다.우문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기왕비가, “현비 마마는 이제 기회가 없지만 태자 건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폐태자는 후폭풍이 심하기 때문에 아바마마께서는 그 길을 택하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아바마마께서 어떻게 하실 지 대략 짚이는 데가 있어요.” 원경릉도 기왕비 말에 동의했고, 아마 우문호도 그럴 거다.경여궁.태후를 찌른 후 현비는 경여궁으로 보내졌는데 원래 시중을 들던 현비 사람들은 전부 전출되었고, 내무부에서 새 사람을 몇명 보내 시중을 들게 했다.현비는 막 보내온 사람들이 시중을 들자 한동안 소란을 피우며 물건을 던지고 부쉈지만 어제부터 조용해져서 여우 털을 두른 망토를 걸치고 종일 바람이 아무리 심해도 몸이 굳어질 때까지 계속 문 앞에 앉아 있었다.이때 우문령이 몸종을 데리고 들어갔다. 우문령이 은덕을 베풀어 한 번만 만나 뵐 수 있게 해달라고 아바마마께 빌었기 때문이다. 우문령은 현비가 멍하니 복도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현비가 고개를 들어 우문령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왜 울어? 나 아직 안 죽었어.”우문령이 다가와 현비의 손을 잡고 울며, “어마마마, 들어가요, 여긴 추워요.”현비는 우문령의 손
현비의 발악“그럴 리 없어!” 현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음험한 표정으로, “날 죽이면 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게 되는 걸. 폐태자를 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그런데 폐태자는 국본을 동요해 나라의 근간을 흔들어 상하게 하는 일이니, 매사에 나라와 천하를 중히 여기는 네 아바마마께서 그런 위험한 길을 택하실 리 없어. 설령 분을 꾹 누르더라도 이 일을 덮으실 것이야.”우문령은 현비가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 상상도 못했는데 슬프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큰언니 말이 아마 정월 초파일 아침 일찍 다섯째 오빠를 폐하라는 상소가 올라올 거라고 하던 걸요.”“누가 감히 그런 짓을?” 현비가 고개를 돌려 우문령을 보더니 악에 받쳐서, “그런 상소를 올리면 네 아바마마께서 목을 베실 거다. 부부생활이 몇 년인데 내가 그이 성격을 몰라? 네 아바마마께서 국본을 흔드는 꼴을 허락하실 것 같아? 그리고 내가 태후 마마를 다치게 했어도 태후 마마도 소씨 집안 사람인데 태후 마마께서 캐묻지 않으시겠다면 누가 따지고 들 수 있어?”“맞다,” 현비가 우문령에게, “황조모는 뭐라고 하시든? 따지겠다고 하셨어? 넌 가서 내 대신 태후 마마께 사죄 드리고 내가 한 모든 일은 전부 소씨 집안을 위해서 였다고, 태후 마마도 소씨 집안 딸이니 내가 한 일을 전부 이해해 주실 줄 안다고 전해라.”우문령이 고개를 흔들며 한손으로 눈물을 닦고, “아바마마께서 소녀가 황조모를 뵙도록 허락하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황조모께서도 화가 나셨을 거예요.”“나도 태후 마마께 화를 안 내는데 태후 마마께서 나한테 화날 게 뭐가 있어?” 현비는 우문령의 손목을 잡고 날카롭게, “그리고 사람을 시켜 우문호에게 전해라. 소씨 집안 사람 목숨을 이렇게 많이 죽였으니 소씨 집안에서 조만간 복수하러 올 거라고. 얼른 소씨 집안 대문에 가서 무릎 꿇고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말이야.”우문령이 입이 딱 벌어지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마마마, 소씨 집안에 죽은 사
현비의 굳은 생각궁인들이 황후에게 현비가 공주를 인질로 잡고, 공주를 찔러서 다치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 두 눈이 홀딱 뒤집어질 지경인데 그렇다고 졸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현비가 얼마나 독한 인간인지 태후를 찌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마음 속엔 오직 소씨 집안만 중요하다.“마마, 공주를 구해주소서, 공주께서 심하게 놀라서 울고 만 계십니다. 현비 마마는 이미 광증으로 정말 공주를 다치게 하셨어요. 현비 마마께서 태자비가 와야 공주를 풀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궁인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울부짖었다.황후는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 얼른 폐하를 청하라고 분부했다.태자비를 입궁 시킬지는 황제가 결정할 일이다.그런데 뜻밖에도 이 순간 명원제와 주요 신료들은 어서방에서 회의 중으로,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정월 초파일 태자 일을 상의하는 것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에 목여태감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저지당했다.황후는 황제 쪽에서 보기 싫다는 말이 없으니 일단 가마를 준비하라고 시키고 본인이 직접 가는데 피를 토할 심정이다. 만약 오늘 이렇게 소동을 부릴 줄 알았으면 당초에 현비에게 계책을 쓰지 않는 거였는데, 현비가 소씨 집안을 위해 이렇게 모질고 매정한 짓을 벌일 줄 누가 알았어?만약을 대비해 경여궁으로 가는 길에 황후는 사람을 출궁시켜 태자비를 오라고 했다.경여궁에 새로 온 시위들은 현비가 손을 삐끗해서 공주를 다치게 할 까봐 꼼짝도 하지 못했다. 현비는 마음속으로 이미 거의 절망했다.우문령에게 소씨 집안이 이번 대화제로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현비는 분명 음모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불을 내서 전체 소씨 저택을 다 태웠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어떻게 믿을 수가 있어?’ 현비의 친정이다, 그들 목숨이 얼마나 중한데? 폐하께서 소씨 집안 사람들의 죽음의 진상을 은폐하기로 선택한 이상 소씨 집안을 위해 나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현비가 낳은 아들이 소씨 집안을 거의 멸문에 이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