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다.그녀는 핸드폰을 밖의 연회장 테이블에 놓았기에 구조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소이연은 이를 악물고 화장실의 문을 미친 듯이 두드렸다.손님들은 이때 모두 연회장을 떠났기에 화장실에 다른 사람도 없었고 아무리 큰 소리도 누구도 듣지 못했다.마음속의 불안이 점점 커져 왔다.소이연이 힘을 주어 문을 두드렸다."사람 있어요? 밖에 누구도 없어요?"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소이연의 지금 상황은 아무리 봐도 누군가에 의해 꾸며진 상황이었다.임아영의 짓일 것이다.그러나 임아영은 그녀를 한순간 가두려고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아마...소이연은 마음속의 불안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밖에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나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소이연은 화장실의 구조는 관찰했다. 화장실 문과 칸막이는 천장까지 닿아 있었기에 화장실에서 뛰어나오는 건 말이 되지 않았고 문을 차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소이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불길한 예감에 그녀는 생각을 더 이상 할 여력이 없었다.그녀는 하이힐로 문을 힘껏 밀었다.몸의 아픔이 느껴졌지만 힘껏 참았다.저번 교통사고 이후 다리에 생긴 상처가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겨우 휠체어를 끌고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나 이번에 힘을 써서 다치지 않았던 다리도 아픔이 느껴졌다.그러나 소이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한 번 두 번 그녀는 화장실 문을 찼다.호텔의 문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욱 질이 좋았다.전에 그녀가 닫힌 화장실보다 더욱 견고했다.소이연은 숨을 연거푸 몰아쉬며 찼지만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밖에서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열리지 않는 것인가.소이연은 어렵사리 침착하게 만들었던 기분이 다시금 혼란스러워졌다.심문헌이 자신을 찾으러 오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으니 그도 걱정할 것이다.임아영은 얕볼 인물이 아니었다.이런 짓까지 했으니 그녀를 구하러 올 사람들을 이미 차
현장의 직원은 뛰어 들어가는 심문헌을 잡았다."지금 불길이 세서 너무 위험합니다. 우리와 함께 안정 통로로 나가시죠.""안에 사람이 있어요. 구해야 해요!"심문헌은 다급하게 소리쳤다.그는 직원과 몸싸움을 벌일 지경이었다.심문헌은 다시 한번 직원을 밀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손님."직원은 그런 그를 막아 세웠다."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호텔은 전문 구급대원들이 안으로 들어가 구급활동을 진행할 겁니다. 먼저 손님 본인의 안전을 확보하시면 나머지는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비켜! 내가 들어가야겠어!"심문헌은 눈시울이 붉어졌다.그에게 있어 소이연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소이연이 화장실에서 구출되지 않으면...다리에 상처도 아직 낫지 않았는데...심문헌은 생각할 수록 더욱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그는 직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밀쳐 들어가 미친 듯이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손님!"직원들은 그를 잡으러 따라 들어갔다.심문헌은 점점 더 빨리 안으로 뛰어갔다.그는 소이연이 이미 화장실을 떠나 안전 통로로 이동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자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 들어간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냥 소이연만 무사하다면 심문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그는 계속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그의 마음속에는 소이연만 가득해서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건장한 사내를 발견하지 못했다. 무방비 상태에서 사나이는 심문헌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심문헌은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하고 그렇게 쓰러졌다.사내는 심문헌을 둘러메고 불길이 타오르는 연화장을 나와 빠르게 밖으로 달려갔다.연회장 밖.대부분 사람들은 이미 안전한 곳에 대피했다.작은 불길은 아니었지만 고급 호텔 직원들의 잦은 훈련 덕분에 대부분 사람들은 제때 대피할 수 있었다.육현경은 벌써 인파에 묻혀서 계속 소이연을 찾고 있었다.소이연은 눈에 잘 띄었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볼 수 없었다.소이연뿐만 아니라 천씨 가문도 아직 볼 수 없었다.육현경의 마음속에 불안
육현경은 아무런 주저 없이 화장실로 뛰어갔다.이런 불길에서 빨리 구조를 하지 않으면 안전하게 탈출하기 어려울 것이다.임씨 가문에서 이렇게 큰 화재를 벌였다면 아마 구조할 수 없게 모든 준비를 마쳤을 것이다."소이연!"육현경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이연이 움찔했다.소이연은 절망했었다.농염한 연기자욱에서 화장실 안에 갇혀 탈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어 그녀는 거의 포기했었다.그런데 육현경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희망이 들끓었다.예상했던 심문헌이나 천우진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소이연은 빠르게 말했다."여기 있어요."소이연의 말이 들리기 전에 육현경은 이미 발견했다. 화장실의 한 문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밖에서 잠겨졌다.소이연은 누군가에 의해 위험에 빠진 것이다.누구란 말인가...육현경은 순간 생각이 떠올랐다.그러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이연은 구출해 내는 것이다."옆으로 서요."육현경은 말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있는 힘껏 문을 찼다.문은 현저히 덜렁거렸다.육현경이 다시 한번 차니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육현경은 눈이 빨개진 소이연을 보게 되었다.혼자 안에 갇힌 그녀는 그렇듯 무력했을 것이다.소이연은 그를 만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태연하게 물었다."밖에 불이 번졌나요?""네."소이연은 이를 악물었다.육현경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외투를 벗어 던지고 안에 입고 있던 셔츠를 찢으며 소이연에게 물었다."빨리 몸을 적시고 나갈 준비 해요."소이연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 몸을 적셨다.육현경도 빠르게 자신의 몸을 적시고 재빨리 셔츠를 찢어 소이연에게 건네주었다."이걸로 코를 막아요."소이연도 거절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했다.육현경이 물에 적신 외투를 소이연에게 덮어주자 그녀는 움찔했다."밖에 불길이 크니 놀라지 마요. 우리는 반드시 나갈 거니까."소이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둘은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육현경은
임씨 가문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을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임씨 가문의 잔인함은 정말 대단했다.화재로 살인을 덮으려 하다니.소이연과 천우진은 결코 이 수단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오늘 위험이 있을 줄 알았다면 그들도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이다.소이연은 이를 악물었다.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그녀도 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눈앞의 길은 이미 불길에 휩싸였다.소이연과 육현경은 앞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었다.주위의 불길은 점점 더 커져 연기 때문에 숨을 쉴 수 없었다.소이연이 머뭇거리던 그때 육현경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뛰어가요."소이연은 육현경을 힐끗 바라보았다."옷이 아직 축축해서 불길이 솟아오리지 않을 거예요."육현경의 위로에 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외투로 머리를 감싸요. 내가 데리고 나가줄게요."육현경은 단호하게 소이연의 손을 이끌고 불길에 뛰어들었다.소이연은 눈앞의 불길을 바라보았다.무섭지 않다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소이연은 불길에 뛰어들면 그들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들어갔는데도 계속 불길이 이어진다면 그들 앞에는 불타 죽는 결말만이 놓일 것이다.그러나, 지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다.소이연은 누구도 구조할 사람이 없다고 화신했다.구조한다고 해도 그들이 죽은 이후일 것이다.소이연은 육현경이 자신의 손을 더욱 힘 있게 감싸 쥐고 있음을 느꼈다.육현경은 다시 그녀의 손을 내려놓고 외투로 그녀의 머리를 완벽하게 감싸 쥐고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소이연은 반항하고 싶었다.그러나 이러면 육현경은 불에 탈 수 있었기에 그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소이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육현경은 그녀를 안아 불 속으로 뛰어들었다.그녀의 몸은 전부 감싸졌지만 여전히 뜨거운 불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감출 수 없는 아픔이었다.소이연은 너무 괴로워 소리를 질렀다.그러나 육현경의 소리는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소이연은 육현경이 자신을 잘 감싸 보호하고
육현경은 눈을 뜨기 힘들었다.갑작스러운 아픔에 정신을 잃을 뻔했다.그래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간신히 정신은 유지하고 있었다.그가 정신을 잃으면 소이연은 어찌할 것인가?그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 소이연이 땅에 버린 젖은 천을 집어 들어 그녀의 인중에 놓았다.소이연은 가슴이 아렸다.육현경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신을 차린 후 제일 먼저 자신을 보호하다니.소이연은 너무 놀라 옷이 떨어져도 주울 정신이 없었다.너무 많은 연기를 먹어도 사람은 죽을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때, 육현경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돌봐야 해요."그러나 육현경은 위험이 깃든 순간에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소이연은 그가 그녀의 안전을 위해 밀쳤기에 조명이 그의 등에 떨어진 것이다.소이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마음이 너무 복잡했다.하지만 지금 죽음의 위기에 직면했기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육현경은 바닥에서 기어 올라왔다.그가 상처를 입었어도 상처를 돌볼 시간도 없었고 휴식할 시간도 없었다.육현경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후 소이연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눈앞에는 불길이 더욱 거세졌다.물에 적셨던 옷은 이미 말라 온몸이 뜨거웠다.손에 쥔 젖은 수건도 큰 의미가 없었다. 코가 타들어 가듯 숨을 쉬기 어려웠다.'콰당!'소이연이 갑자기 바닥에 넘어졌다.무엇에 부딪힌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몸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육현경은 몸을 숙여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소이연도 몸을 일으켜 일어났다가 몸에 힘이 풀려 다시 넘어졌다.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몸이 너무 뜨거웠다. 아직 살이 타지 않았지만 온도가 너무 높아 피부가 견딜 수 없었다.그녀는 몸 전체가 아파왔다."날 신경 쓰지 말아요..."소이연은 바닥에 넘어졌다.그녀는 살고 싶었다. 절대 죽기 싫었다. 육민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그러나 더 이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그래서 육현경에게 부담이 될 수 없었다.육현
"날 내려줘요, 같이 죽을 필요... 없어요."소이연은 육현경을 다그쳤다."죽지 않아요."육현경은 단호하게 그녀에게 말했다."저번에도 구해줬듯이 이번에도 구해줄게요."소이연이 더 이상 뭐라고 할 수 있을까."말하지 말고 체력을 남겨놔요. 우리 죽지는 않을 거니까."육현경은 이 말만 남기고 발걸음을 더욱 빨리했다.등 뒤에서 소이연은 눈을 감았다.더 이상 그의 힘을 뺄 수는 없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을 업고 불길을 무릅쓰고 출구로 달려 나갔다.소이연은 온몸에 통증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소리를 내지 않았다.그녀는 육현경의 등에 기대어 그의 급박한 숨소리를 느꼈다.육현경은 여러 번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서며 매 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소이연은 기절 직전이었으나 육현경은 그녀를 업고 속도를 높였다.소이연이 혼미해지기 직전에 눈앞에 몇 개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천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임씨 가문의 사람이라면 육현경과 그녀는 모두 죽을 것이다.그러나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소이연은 의식을 잃었다.그때 육현경도 힘이 빠졌는지 바닥에 넘어졌다.바닥에 넘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소이연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꼭 붙잡았다.그림자의 사람들이 재빨리 그들에게 다가왔다.그들은 방화복과 마스크를 완벽하게 착용한 상태였다."그녀를 구해줘요..."육현경은 아직 의식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몸은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기에 말만 뱉어 소이연을 먼저 구해주게 했다."걱정마요."남성의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은 육현경과 소이연을 빨리 연회장 밖으로 들어 올렸다.밖으로 나가자 사람들 틈에 몇 대의 구급차가 세워졌다."소이연!"천우진이 재빨리 달려갔지만 심문헌의 속도가 더 빨랐다.소이연이 의식을 잃은 모습을 보자 심문헌은 심장이 빨라졌고 눈시울이 빨개졌다.소이연은 의식이 돌아온 듯 대답을 하려 했으나 눈도 열리지 않았고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구급
"소이연을 구하러 들어갈 사람을 보냈어요."천우진은 심문헌을 안심스키려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심문헌은 천우진을 바라보았다."들어가면 다 죽는 거예요."천우진의 말에 심문헌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천우진의 앞에서 그는 항상 이성을 잃는 모습이었다.천우진도 소이연을 그 누구보다 걱정할 것이다.소이연은 그의 사촌 동생이었고 그들의 감정은 친남매보다 더 돈독했다.그러나 천우진은 이런 일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반면에 심문헌은 반대였다."걱정 마요. 이연은 아무런 일도 없을 거니까요."천우진이 그를 위로하자 심문헌은 그를 힐끗 보았다.그의 위로에 말할 수 없는 안심이 느껴졌다.천우진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천우진이라면 소이연을 구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심문헌도 언제부터 천우진에게 이런 신뢰를 느끼지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다.그그러나천우진을 몇 번 만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너무 깊어 오래 사귈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심문헌과 천우진은 연회장 안에서 초조하게 구조를 기다렸다.임씨가문도 이때 질서정연하게 인원을 체크하고 사죄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그들은 아마도 적극적으로 구조 작업과 후 처리를 하는듯 보였다.한참 후.심문헌은 지금 이 기다림이 한 세기의 기다림처럼 길어 보였다.다시 불길로 달려 들어갈 충동이 일어날때 쯤 안에서 몇 명이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그중 두 명은 분명히 한 명을 안고 있었다.심문헌은 육현경과 소이연이 함께 할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마음속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렁거렸다.심문헌에게 소이연은 살아있으면 그걸로 족했다.그녀가 살아있기만을 바랐다.복도.심심문헌은쉬지 않고 끊임없이 갔다 왔다를 반복했다.천우진은 그런 심문헌을 힐끗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런 심문헌의 불안한 모습에 언짢았지만 여전히 소이연이 걱정되었다.심문헌의 모습에 천우진은 더욱 걱정이 되어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갔다.심문헌이 천우진을 막으며 물었다."어디 가
소이연이 큰일이라도 날까 봐 너무 무서웠다."이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천우진은 심문헌의 생각을 뀌뚫고 입을 열었다.심문헌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이연은 천우진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니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으리라.조용한 복도.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모든 기다림은 마치 지옥에 있는 것처럼 1분 1초가 괴로웠다.그때 응급실의 문이 열리며 의사가 걸어 나왔다.심문헌과 천우진이 빠르게 걸어가자 의사가 입을 열었다."걱정마세요. 환자는 생명의 지장은 없습니다. 짙은 연기를 과도하게 흡입하여 혈액이 산화되어 의식을 잃은 겁니다. 구급 조치로 현재 환자분은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호흡계통에 치명상을 입었고 몸에 열이 남아있기에 한동안 입원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가족분들은 입원 수속을 해주세요."심문헌과 천우진은 한숨을 돌렸다.살아있다.살아있으면 된 거다.소이연이 죽지 않으면 된 거다."입원 수속 하러 갈게요."천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줘요."심문헌이 천우진을 쳐다보았다.심문헌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천우진이 큰 걸음으로 떠났다.그도 빨리 소이연을 보고 싶겠지만 입원 수속을 하러 떠났다...갑자기 천우진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이연이 응급실에서 호흡기가 달린 채 나왔다.그녀는 말을 할수 없었지만 눈은 뜬 채였다.심문헌을 보면서 소이연은 눈빛으로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그녀의 모습에 심문헌은 눈물을 쏟아냈다.소이연이 아직 살아있음에 감동했고 그녀가 호흡기를 꽂은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이연씨, 괜찮아요. 우리 병실로 돌아가요."심문헌은 한 편으로 소이연의 손을 잡고 다른 한 편으로 그녀를 보호하며 그녀를 병실로 데려다주었다.그의 목소리에 소이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말을 하려 했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목이 너무 아파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말하지 마요. 다 낳으면 그때 얘기해요."심문헌은 말하려는 소이연의 모습을 알아채고 말을 덧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