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이 큰일이라도 날까 봐 너무 무서웠다."이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천우진은 심문헌의 생각을 뀌뚫고 입을 열었다.심문헌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이연은 천우진에게도 소중한 사람이니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두려웠으리라.조용한 복도.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모든 기다림은 마치 지옥에 있는 것처럼 1분 1초가 괴로웠다.그때 응급실의 문이 열리며 의사가 걸어 나왔다.심문헌과 천우진이 빠르게 걸어가자 의사가 입을 열었다."걱정마세요. 환자는 생명의 지장은 없습니다. 짙은 연기를 과도하게 흡입하여 혈액이 산화되어 의식을 잃은 겁니다. 구급 조치로 현재 환자분은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호흡계통에 치명상을 입었고 몸에 열이 남아있기에 한동안 입원 치료를 하셔야 합니다. 가족분들은 입원 수속을 해주세요."심문헌과 천우진은 한숨을 돌렸다.살아있다.살아있으면 된 거다.소이연이 죽지 않으면 된 거다."입원 수속 하러 갈게요."천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연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줘요."심문헌이 천우진을 쳐다보았다.심문헌이 뭐라고 입을 열기도 전에 천우진이 큰 걸음으로 떠났다.그도 빨리 소이연을 보고 싶겠지만 입원 수속을 하러 떠났다...갑자기 천우진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소이연이 응급실에서 호흡기가 달린 채 나왔다.그녀는 말을 할수 없었지만 눈은 뜬 채였다.심문헌을 보면서 소이연은 눈빛으로 그에게 인사를 전했다.그녀의 모습에 심문헌은 눈물을 쏟아냈다.소이연이 아직 살아있음에 감동했고 그녀가 호흡기를 꽂은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이연씨, 괜찮아요. 우리 병실로 돌아가요."심문헌은 한 편으로 소이연의 손을 잡고 다른 한 편으로 그녀를 보호하며 그녀를 병실로 데려다주었다.그의 목소리에 소이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말을 하려 했으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목이 너무 아파 입을 열 수조차 없었다."말하지 마요. 다 낳으면 그때 얘기해요."심문헌은 말하려는 소이연의 모습을 알아채고 말을 덧
그건 원망 어린 말투였다.소이연은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심문헌과 천우진이 더욱 가까운 사이로 되었음을 느꼈다."육현경을 보러 갔어."천우진이 입을 열었다.심문헌의 원망에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이미 습관 되었다.그의 고집을 받아주듯이 심문헌의 얼굴색이 조금 수그러들었다.그제서야 육현경과 소이연이 함께 불길에서 구해낸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육현경은 오래전에 연회장을 떠났지만 둘이 함께 있었던 건 그가 다시 소이연을 구하러 돌아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마음이 불편했다.매번 중요한 순간은 항상 육현경이 차지했다.심문헌의 모든 생각이 얼굴에 나타나 표정이 계속 변했지만 소이연과 천우진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소이연은 천우진을 바라보았다.뒷이야기가 알고 싶은 것이다.소이연이 응급실에서 나올 때 심문헌에게 육현경은 어떻게 되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심문헌이 모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천우진은 아마 그녀가 원하는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지내다 보면 그가 정말 세심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생명의 위험은 없고 몸이 상태는 너랑 비슷해. 지금 병실에 있어. 임아영이 그를 보살피고 있어. 너보다 화상이 더 심각해, 하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정도는 아니야. 보기 싫은 흉터가 남을 거야. 그리고 갈비뼈도 2개 부러졌어."소희연은 눈을 부릅떴다.그 순간 그녀는 육형경이 갈비뼈가 부러진 이유는 위에서 떨어진 조명 때문임을 알았다.육현경이 갈비뼈가 부러진 상황에서도 그녀를 업고 떠나다니, 정말 놀라웠다...가슴이 아려왔다.이런 감정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천우진은 소이연의 기분 변화를 알아채고 심문헌을 돌아보았다.심문헌도 천우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를 보았다.그의 얼굴에는 표정이 그대로 쓰여 있었다.천우진도 어쩔 수 없었다.소이연을 속일 수도 없었다.그녀는 지금 육현경의 상황을 관심할 게 뻔했다.그리고 육현경은 이번에 소이연을 확실히 구해줬다.천우진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나도 더 이상 다른 테스트를 할 필요 없이 스파이를 연회장으로 불러 직원으로 위장시켜 우리를 구하러 오게 한 거야. 우리가 이미 빨리 탈출했기에 임씨 가문에서 막으려고 했을 때는 우리는 이미 안전하게 홀을 나간 뒤였어. 임씨 가문이 자신들이 한 일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지. 먼저 할아버지를 돌려보낸 후에 네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너를 찾으러 사람을 보냈어."소이연의 두 눈은 분노로 일렁거렸다.그녀는 임씨 가문의 살인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임씨 가문은 천씨 어르신만 죽이려고 했으나 다른 사람들도 같이 있었기에 함께 손을 쓴 것이다. 더욱이 임아영은 소연을 미워했으니 더욱더 죽이고 싶었으리라."먼저 휴식해."천우진이 입을 열었다."후에 너랑 상의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증조할머니가 왜 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지, 단순히 권력 때문인 건지.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는데 갑자기 왜 이런 생각이 나타난 건지."소이연도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임씨 가문은 할아버지의 목숨을 원하고 있다.그러나 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어쩌면 이건 임씨 가문만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소이연이 눈을 감았다. 그녀도 쉬고 싶었다.오늘 죽음에서 탈출하느라고 참 힘들었다. 그녀도 기분을 전환할 시간이 필요했다."심문헌, 나를 따라와요."천우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연 씨와 함께할 거예요."심문헌은 조금 언짢았다. 자기가 가고 싶으면 혼자 가지. 그는 소이연의 곁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일을 겪고 난 후 그는 더욱더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뒤통수의 상처 치료해요."신문헌은 그제야 자신의 뒤통수에 상처가 있음을 발견했다.그는 뒤통수를 더듬었다."악!"느껴지는 아픔에 심문헌은 소리쳤고 얼굴도 일그러졌다."됐어요. 내가 4명이 보디가드를 불러 24시간 이연을 지키게 했으니까 이런 일은 생기지 않을
병실 안.천우진과 심문헌도 함께 있었다.심문헌은 소이연에게 과일을 깎아 주고 있었다.예전에 해본 적이 없는지 볼품없는 솜씨에 천우진은 비웃음을 던졌다.심문헌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이걸 내가 직접 깎은 사랑의 사과에요. 아무리 예쁘지 않아도 먹으면 달콤해요. 그거면 됐죠,이연씨?"소이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밖에 서 있는 육현경을 보게 되었다.들은 데에 의하면 그의 상처는 그녀보다 훨씬 심각했다.그녀가 아직 바닥에 내려오는 것이 어려운데 그는 어떻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단 말인가."여기 왜 왔어요?"심문헌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바로 나타났다."이연 씨를 보러 왔어요.""당신이 볼 필요 없어요. 당신은 당신의 몸만 챙겨요. 다른 사람이 일에 끼어들지 말고."심문헌은 강한 소유욕을 내비쳤다.육현경은 소이연을 힐끗 바라봤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심문헌은 이때 사과를 다 깎았는지 작게 다듬어 친히 포크로 찍어 소이연의 입에 갖다주었다.그 모습을 보며 소이연은 심문헌이 참 유치하다고 생각했다.그는 육현경의 앞에서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육현경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챘다.그리고 소이연도 심문원의 체면을 깎을 수 없었기에 입을 열어 받아먹었다.사과는 역시 달았다."맛있어요?"심문헌이 그녀에게 물었다."맛있어요.""그럼 많이 먹어요."심문헌은 한참이나 그녀에게 사과를 먹여주었다.육현경은 문 앞에서 그 둘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소이연이 사과를 다 먹자 심문헌이 물었다."더 먹을래요?""아니요.""그럼 화장실 갈래요?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아니면 밖에 나가서 산책할래요? 오늘 날씨도 괜찮은데 햇볕 좀 쬐고 신선한 공기도 마시고.""아니요.""의사 선생님이 당신이 몸이 많이 허약해서 누워서 많이 휴식하라고 했어요. 나도 조용히 있을 테니까 필요 없는 사람들은 다 나가라고 할게요."심문헌은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뱉었다.육현경은 문 앞에서 문신처럼 움직이지 않았다."문헌 씨.
육현경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말했다."당신의 몸이 얼마나 회복됐는지 궁금해서 왔어요.""많이 좋아졌어요. 아마 내일쯤이면 퇴원할 거예요."소이연이 대답을 하고 둘은 또 침묵했다."당신은 어때요?"소이연이 먼저 물었다."나는 괜찮아요.""오늘 임아영이 없나 봐요?""없어요.""24시간 함께하는 것 아니었나요?""임씨 가문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갔어요.""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소이연은 인내심을 다 썼다. 더 이상 육현경과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찾아온 이유를 듣고 싶었다."나 조금 후회돼요."육현경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하지만 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당신을 밀어낸 것, 후회해요."소이연은 그의 말에 화가 나서 헛웃음을 지었다.육현경은 대체 그녀를 어떤 여자로 생각했단 말인가.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야 하는 건가."미안해요. 내가 모든 일을 깨끗하게 해결하고 당신의 곁에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죽음 앞에 나의 마음이 약해졌어요.""지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소이연이 물었다."불길 속에서 어느 순간 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너무 무서웠어요. 죽는 날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게 너무 무서웠어요.""그래서 바람이라도 피겠다는 건가요?"소이연은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담담했기에 더 슬펐다."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를 유혹하다니. 육현경씨, 나는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어요. 당신이 이런 행동을 할 줄."소이연의 말은 육현경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그가 이 말을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미 예상했었다.그는 소이연의 성격을 잘 알았다.그가 어떤 이유로 이야기를 해도 소이연은 절대로 바람을 피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로 무서웠다. 소이연이 죽을까 봐 무서웠고 소이연과 심문헌의 애정 행각을 보기도 두려웠다.그가 자신이 모든 것을 내던졌지만 결국 그녀가 점점 멀
육현경이 침묵했다.갑자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몰랐다."아마 오래전이겠죠? 적어도 우리가 바다에 갔을 때 이미 기억이 돌아온 거죠?"소이연은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그녀가 얼마나 애를 썼던가. 그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기 위하여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소니연은 그 때문에 친자 검사를 하고 자신의 존엄을 내려놓았다. 심지어 루카스의 신분으로 자신과 육민을 책임지라고까지 했다.사실 그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 혼자 우스운 꼴이 된 셈이다."나는 그저...""미안한데 당신 변명 듣고 싶지 않아요."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을 끊었다."내 분노만 더해질 뿐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해요."육현경은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당신과 연을 끊을 거예요.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네요."육현경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그는 그저 고개 끄덕였다.그렇다.소이연은 항상 이성적인 사람이었다.한번 결정한 일은 하늘이 두 동강 나는 한이 있어도 바꾸지 않았다.육현경만 혼자 이번 일이 끝나면 소이연과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고 김칫국을 마셨다.그 자신을 영웅의 캐릭터로 승격화하면 소이연도 용서해 주리라 생각했다..."지금 문헌 씨와 잘 만나고 있어요. 당신이랑 만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어요. 육현경 씨, 우리 이제 그만하죠."소이연이 냉정하게 말했다."...네."낮게 잠긴 목소리는 겨우 한 글자를 뱉었다.그리고 육현경은 몸을 돌려 떠났다.문 앞에 천우진과 심문헌이 함께 있었다.육현경이 떠난다고 하자 문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그들은 쉴 새 없이 떨어지는 그의 눈물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한 사람이 너무 슬프면 그 감정을 숨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육현경은 자신이 잘 인내하고 감추는 사람이라 여겼다.하지만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심문헌이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열자 천우진이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심문헌은 미간을 구기면서 천우진을 째려보았다.천우진이 말하지
사실 심문헌은 천우진과 병실을 나갈 때부터 최악의 시나리오를 예상했었다.육현경이 목숨으로 소이연을 구해줬으니 육현경이 조금만 표현하면 그녀가 그와 함께 줄 알았다.그러나 소이연은 생각보다 강했다.육현경의 설명도 듣지 않고 그가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도 소이연은 칼같이 거절했다.이미 사랑하지 않는 것인지, 너무 사랑해서 더 이상 상처를 받기 싫은 것인지.소이연은 아무렇지 않게 눈물을 닦아냈다.마음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이겨내야 했다.천천히 육현경에 대해 잊어갈 것이다."미안해요."소이연이 갑자기 심문헌에게 사과했다.심문헌은 가슴이 철렁였다.소이연이 육현경을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후회하는 것인가?심문헌의 행복은 고작 이 몇 분짜리인 것인가.심문헌은 소이연의 눈치를 보며 차마 답하지 못했다.그는 절망 어린 눈빛으로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이제부터 다른 남자를 위해서 울지 않을게요. 나한테 시간을 좀 줘요."소이연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그녀의 모습에 심문헌은 다시 한번 놀랐다.그러니까, 그는 소이연을 오해한 것이다.소이연은 그와 헤어지기 위해 사과를 한 것이 아니었다."화났어요?"소이연은 심문헌이 아무런 답이 없자 다시 한번 물었다."화 안 났어요. 나는..."심문헌은 북밪쳐 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이연씨, 내가 정말 잘해줄게요. 그 사람 생각나지 않도록.""알아요.""그날 화재가 났을 때 당신을 찾으러 들어가려 했어요. 그런데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정신을 잃는 바람에..."심문헌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았다."그리고 당신 오빠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어요. 아니면 내가 당신을 구해줬겠죠.""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심문헌이 자신을 놓지 않을 것임을 그녀는 잘 알았다.그리고 임아영이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으면 만반의 준비를 했음을 잘 알았다."이연 씨,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심문헌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얼버무렸다."육현경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심문헌이 더 물어보려고 했으나 소아연이 일부러 화난 척을 했다."그래서 나를 육현경에게 보내고 싶은 거예요?"심문헌이 길길이 날뛰며 입을 열었다."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소이연은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그도 잘 알았다.그녀가 상처받을까 봐, 아플까 봐 심문헌은 소이연에게 너무 잘 대해주었다.모든 것은 그녀가 위주였다."당신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심문헌이 손을 뻗었다.소이연과 손을 잡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허공에 손을 뻗었다.심문헌도 부끄러워하는 것인가?그럴 만도 했다.그도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쑥스러운 것도 이해가 갔다.소이연이 먼저 심문헌의 손을 잡아당겼다.심문헌이 그런 그녀를 초롱초롱하게 바라보았다.그녀가 혹여라도 손을 빼낼까 봐 심문헌은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그들의 모습의 천우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그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천우진은 병원의 베란다로 가서 담배를 피웠다.이 기간 동안 일이 너무 많아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담배 반대를 피웠을 때였다." 천우진 씨."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니 육현경이 서 있었다.천우진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하늘을 바라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에요?""당신과 힘을 합치고 싶어요.""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잖아요."천우진은 단박에 거절했다. 육현경에 대한 반발심을 현저하게 내비쳤다.육현경이 천우진의 곁으로 가서 낮은 소리로 말을 뱉었다."항상 그래 왔어요.""당신이 아무리 그렇게 해도 이연의 마음을 내가 돌릴 순 없어요.""그녀와는 관련 없는 일이에요."육현경이 말에 천우진은 그를 돌아보았다."임씨 가문에서 천씨 가문에게 이미 손을 쓰고 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천우진은 굳은 얼굴로 육현경을 직시했다.육현경과 소이연의 과거가 있기 때문에 그는 현재 임씨 가문의 중시를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만약 임아영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에 임씨 가문에서 쫓겨났을지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