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녹화 중이 아니었다면 하도경은 계지원을 한 대 내리치고 싶었다."우리도 곧 합법적인 관계로 될 거예요."육가희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이미 약혼을 한 거야?"계지원은 어른의 말투로 물었다."이미 정해졌어. 근데 아직은 외부에 비밀이야."육가희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했다.사실 연예인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육가희는 소속사의 허락 없이 일방적으로 대외에 발표한 것이다."그래."계지원도 연예계에 대해 잘 알았기에 더 깊게 묻지 않았다."빨리 들어가요."육가희는 계지원에게 재촉했다.예능이 나간 후 아마 화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안 가."계지원은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오늘 점심은 여기서 먹을 거야.""그만해요. 가희 씨 삼촌이기도 하지만 우리 어릴 때 친구이기도 했죠."하도경은 일부러 약 올렸다."그게 어때서? 가희와 결혼하면 내 조카사위인 거지."하도경은 그의 논리에 말문이 막혔다."오늘 힘들어서 요리하기 싫으니까 삼촌이랑 숙모에게 한 상 거하게 차려줘."계지원의 지시에 하도경은 이를 악물었다."진짜 어르신이 따로 없네."계지원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예수진에게 자상하게 물었다."우리 소파로 가서 앉아요."예수진은 하도경의 언짢은 얼굴을 힐끗 보며 눈치를 보았다."아니면 우리 돌아가서 해 먹어요...""괜찮아요, 가족끼리."담담한 그의 말에 예수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얼굴이 두꺼웠던가?하도경의 화난 얼굴을 못 본 건가?결국 예수진은 계지원과 함께 소파로 가서 앉았다.그 모습을 보며 하도경은 주방으로 가고 육가희 또한 그를 도우러 들어갔다.시간이 흘러 요리가 준비되자 네 사람은 식탁에 에워 앉았다.밥을 먹으며 계지원은 쉴 새 없이 예수진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그녀의 그릇은 그가 집어 든 반찬들로 넘쳐났다."이렇게 많이 먹을 수 없어요."" 맛없어요? 나는 괜찮은데."예수진의 말에 계지원이 물었다.그의 물음에 하도경도 고개를 들어 올렸다.하도경은
"나는 육씨 가문에서 입양한 거지."계지원은 여전히 그녀에게 체면을 주지 않았다.육가희는 분에 넘쳐 눈물이 났다.예수진도 강 건너 불구경하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건 하도경이었다.돈이나 인지도가 부족하지 않은 하도경은 육가희의 부름에 여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알고 출연했다. 그러나 이렇게 상처를 받다니.계지원과 예수진의 애정표현을 보고 이미 마음이 아팠다."계지원, 그만해요. 가희 씨도 더 이상 마음에 담지 말아요. 지금 충분히 예쁘니까 ."육가희는 하도경의 말에 화색이 돌았다."많이 먹어요. 통통해도 좋으니까."하도경은 육가희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내가 통통하다는 건가요?"육가희는 또 발끈했다."아니요, 아니요."하도경은 급히 말을 바꿨다."당신이 내가 해준 요리를 맛있게 먹는 게 좋아요.""그럼 자주 먹어야겠네요. 살찌면 운동하죠.""진짜 살 하나도 안 쪘어요."하도경은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삼촌의 말은 한 귀로 흘려요. 수진 씨에게 잘 보이려고 저러는 거예요."."그런 것 같아요."그들의 대화에 계지원과 예수진은 끼지 않았다.그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언뜻언뜻 슬며시 웃어 보였다.점심을 먹은 후 예수진이 계지원의 휠체어를 밀며 그들의 별장으로 돌아갔다."산책할래요?""그래요."예수진은 그의 물음에 선뜻 허락했다.그녀는 계지원의 휠체어를 밀며 주변을 걸었다.제작진들은 주위를 모두 정리했기에 아무도 없었다.하지만 전담 카메라맨은 계속 따라다녔기에 마음대로 말할 순 없었다.예수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카메라맨을 향해 부탁했다." 죄송한데 저희 부부만 있게 해 줄 순 없나요? 조금 있다가 다시 찍을게요."세 명의 카메라맨은 서로 눈치를 보며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우리는 그냥 멋대로 걷는 거예요. 찍을 것도 없어요. 그리고 점심도 안 드셨죠? 우리 30분이면 되니까 가서 드세요.""그럼 30분 후에 꼭 돌아오셔야 해요.""그럼요."예수진은 예의 바르게
계지원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나...이건 다 소이연 탓이다. 그녀만 믿으라더니..."나는 아니에요."계지원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예수진은 그의 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연기가 아니었다고요."예수진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둘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았다.한참 후에 계지원이 다른 화로 돌렸다."하도경과 가희가 사이가 좋은 것 같네요.""그러네요."예수진은 항상 하도경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그래서 그가 육가희와 사이가 좋아 보여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그렇게 다른 사람 앞에서 가희 씨가 뚱뚱하다고 하면 어떡해요? 당신도 연예계에서 일해서 알잖아요. 가희 씨를 찾는 감독이 없으면 어떡해요?""가희가 찍은 영화는 다 내가 감독이에요."계지원의 당당함에 예수진은 되받을 말을 팢을 수 없었다.계지원은 말로는 육가희를 나무랐지만 그녀를 참으로 아끼는 사람이었다.그래서 육가희를 감싸는 말은 예수진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가희를... 싫어하는 게 아니에요?"계지원은 의심스럽게 물었다."하도경과 함께 한다면 싫지는 않아요."예수진은 마음속으로 육가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다.하도경이 그대로 무너지길 바라지는 않았다."결국 하도경 때문이네요."계지원은 낮게 중얼거렸다."뭐라고요?"예수진은 제대로 듣지 못해 다시 되물었다.계지원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그녀는 서 있었기에 거리가 좀 있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계지원은 고개를 저었다."싫지 않으면 됐어요.""육씨 가문에 머리 숙일 생각은 없어요."예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우리 사이 때문에 당신처럼 육은숙을 모실 생각도 없어요.""필요 없어요. 육씨 가문에 대한 태도를 바꿀 필요 없어요."예수진은 가슴이 살짝 떨려왔다."나한테 시집 온거예요. 육씨랑 상관없어요."계지원은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예수진은 입술을 깨물며 아무
"수진 씨."계지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네.""우리 한번...시도 해보는 건 어때요?"계지원의 말에 예수진은 가슴이 떨려왔다.휠체어를 잡은 그녀의 손이 저절로 떨려왔다."연애를 해보자는 뜻이에요."계지원은 설명을 덧붙였다.덧붙인 말은 작은 소리로 말했지만 예수진은 똑똑히 들었다.정확히 그녀의 귀를 타고 들어갔다.그리고...분위기는 갑자기 어색해졌다.계지원의 손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힘을 주었다.너무 긴장한 탓인가?예수진은 아마 그에게 감정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하연이 아니라면 이미 하도경과...예수진이 예전에 하도경과 연애를 했었던 사실을 떠올리자 계지원은 가슴에 돌덩어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아프고 불편했다."수진 씨,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될게요. 우리 다시 시작해요."그는 예수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예전에 마음이 아팠어도 예수진과 하도경에게 축하를 보냈었던 그였다.그러나 지금은 할 수 없을 것이다.예수진이 그를 떠나 다른 남자와 함께한다고 생각하면 질투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녀가 어느 날 떠난다고 하면 그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었다.이런 아픔을 견디기보다는 그는 자신이 가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만약 성공한다면?예수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계지원의 빠르게 뛰던 가슴은 천천히 식어갔다.그가 너무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것인가.몇 년간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그의 한 마디에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그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예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요."계지원은 다시 심박수가 올라갔다.계속 이러면 심장이 멎을지도 몰랐다.기분이 너무 좋았지만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그는 예수진이 얼렁뚱땅 대답한 건지, 아무렇게나 대답한 건지 알 수 없었다.계지원은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다시 한번 확인하려 했으나 입을 열 용기가 없었다.그는 어쩌면 이렇게 애매하게 있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계지원이
계지원은 예전의 모든 기억을 내려놓기 시작했고 둘은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그때부터 둘의 관계가 미묘하게 변해갔다.변화가 너무나도 작아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기 힘들었지만 둘은 알 수 있었다.더 이상 거짓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모든 친밀한 행동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리고 잠을 잘 때도 억지로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안고 있었다. 원래도 촬영 중이었기에 다른 일은 없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예전보다 더욱 친밀해진 건 사실이었다.제1기 촬영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서 예수진은 잠에 들었다.여정이 많이 고달프지는 않았지만 카메라가 신경 쓰였기에 제대로 잠을 이룬 날이 없었다.누구의 감시도 없어져 예수진은 긴장감이 풀려 스르르 잠이 들었다.집에 도착할 때까지 예수진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계지원은 원래 그녀를 깨울 생각이 없었으나 그가 그녀를 안아 올리는 순간 예수진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폈다."도착했어요?""네.""빠르네요.""당신이 너무 오래 잔 거죠."계지원은 타이르는 말투로 말했다.예수진은 살짝 쑥스러웠다."당신은 안 잤어요?""침대에서 자는 게 좋아요.""...따지기는."그녀의 핀잔에도 계지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둘은 차에서 내린 후 집으로 돌아갔다.도착하자마자 하연은 계지원에게 달라붙었다.떨어진 지 4, 5일밖에 되지 않았으나 오래 떨어진 사람 같았다.하연과 계지원은 손을 꼭 붙잡고 떨어지지 않았다.예수진은 트렁크를 밀치고 계지원의 방으로 들어갔다.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그녀는 계지원과 자신의 짐을 함께 정리했다.금방 절반 정도 정리를 마치자 계지원이 휠체어를 밀며 들어왔다.그의 모습에 예수진이 의아하게 물었다."하연이가 놓아줬어요?""질투하는 거예요?"예수진은 살짝 움찔하다가 반박했다."세 살짜리 애에게 질투하는 유치한 사람 같아요?""그랬으면 좋겠네요."계지원의 중얼거림에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다."도와줄까요?"계지원은 화제를 돌렸다.
예수진이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계지원에게 안겼다."악!"그녀는 그를 행해 소리를 질렀다."지금 뭐 하는 건가요?""샤워하려고요.""날 놓아줘요. 혼자 씻어요.""내가 당신이랑 씻는 걸 거부한다고 뭐라고 했잖아요.""지금 후회 중이에요.""늦었어요."예수진은 그에 의해 샤워실로 끌려 들어갔다.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리도 불편한 그가 어떻게 이런 힘이 있는지.그의 힘에 압도당해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욕실 문을 잠그며 계지원이 입을 열었다."혼자 벗을래요? 내가 벗겨줄까요?"예수진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진심이란 말인가? 쑥스러워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육씨 가문에서 같이 살 때 예수진이 여러 번 덤벼들어도 그는 망부석이었다.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에 예수진은 혼란스러웠다."내가 할게요."계지원은 흠칫했다.원래 오늘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이미 그들은 서로를 허락했기에 그는 참을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참기도 싫었다.더 참다가는 그 자리에서 터질 것만 같았다.그런데 갑작스러운 예수진의 적극적인 태도에 그는 살짝 당황했다.그는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마지막 경험도 이미 몇 년 전 일이었다.그때는 너무 갑작스러워 달아오르기도 전에 자리를 떠났었다.그리고 지금.예수진은 그에게서 몸을 일으키며 멀지 않은 곳에서...그 모습을 지켜보며 계지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예수진은 그를 힐끗 쳐다 보았다."옷 다 입고 샤워할 생각이에요?"계지원은 그제야 자신이 옷을 벗는 것도 잊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음을 깨달았다."내가 도와줄까요?"예수진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아니요."계지원은 살짝 당황했다.어느 순간부터 예수진이 분위기를 리드하고 있었다.계지원은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잠시 후.둘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얼굴이 붉어졌다.갑자기 예수진이 그에게 다가갔다.그녀의 몸집에 계지원은 심작박동이 빨라져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예수진은
얼굴의 상처도 연예계에 몸을 담고 있기에 지운 것이지 아니었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이 몇 년간 계지원은 몸의 상처에 익숙되었고 심지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이미 잊고 지내왔다.그는 상처가 얼마나 추악한지조차 잊어버렸다.그는 고개를 숙여 예수진의 손가락이 훑어 지나간 자리를 보았다."더럽죠?"그녀는 아마도 더럽다고 생각할 것이다.여렸을 때부터 예수진은 예쁜 외모를 좋아했으니.육현경이 외국에서 지낼 때 어쩌다가 귀국해 만나면 그의 도도한 반응에도 예수진은 그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었다. 육은숙도 그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랐기에 좀체로 다른 이의 관심을 갈구하지 않는 그녀였다.그런 그녀가 육현경은 정말 잘도 따라다녔었다.후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육현경의 잘생긴 외모 때문이었다.계지원은 한동안 육현경을 질투하기도 했다.그리고 속으로 그 둘의 혈연관계라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했다.예수진이 자신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소식에서부터 없다고 판명 날 때까지..."만약 더럽다면...윽!"계지원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몸이 굳어버렸다.뜨겁고도 나른한 입술이 그의 상처 자리에 내려 앉았다.그 느낌은 마치 전류가 몸 곳곳을 흘러간 듯했다.그는 이 순간이 끝날까 봐 크게 숨을 쉬지도 못했다.그러나 이건 결코 꿈이 아니었다.그녀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뜨거운 그녀의 혀가 자신의 피부를 훑고 지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계지원의 몸은 부들부들 떨려왔고 주먹은 너무 꽉 쥐어 핏기가 사라졌다.한참 후에 예수진은 불그스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당시에 아팠죠?""아팠어요."사지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과 비할수 없었다.그때 그는 예수진과 헤어져야만 하는 사실에 슬펐다.시작하자마자 끝내야 하다니.불구가 된 몸으로 그녀에게 돌아갈수 없었다.자신을 역겹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그런데 예수진은 도리어 아프냐고 물어온다.한 사람의 인내심은 원래 한계가 있는 것이다.그는 예수진에 대한 인내심
예수진이 고개를 돌리니 계지원의 잘생긴 얼굴이 떡하니 보였다."지금 몇 시예요?"입을 연 예수진은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목소리가 왜 이렇게 된 거지?목소리가 갈라져 듣기 싫었다.계지원은 그녀의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그건 분명한 비웃음이었다."웃지 마요."예수진은 발끈했다.그녀가 화를 내면 낼수록 계지원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갔다.예수진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웃지 말라고!'그녀도 목소리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다.예수진에 의해 입이 막히자 그는 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웃음을 멈춘 후에도 작은 손이 여전히 그의 입을 막고 있었다.계지원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의 손에 입 맞추었다.따듯하고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자 예수진은 놀라 손을 빼냈다.대단한 테크닉은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에 그녀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미안해요. 어젯밤 참을 수 없었어요."계지원은 진지하게 사과했다.그의 말에 예수진은 어이가 없었다.계속 소리치며 거절했으나 계지원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바람에 목소리가 다 쉬어버렸다."다음엔 참아 볼게요.""칫."예수진은 할 말을 잃었다.함께 한 두 번 중 그는 한 번도 자제해 본 적이 없었다.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가 오랫동안 솔로였을 거라고 착각했을 것이다.순간 그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프로그램 녹화 중 계지원은 그녀와 처음이었다고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이후 계지원이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고 덧붙이지 않았지만 예수진은 그 인터뷰 내용이 거짓이었다고 혼자 단언했었다.그러나 지금.예수진은 자신 이외에 다른 여자는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배고파요?"계지원이 물어왔다.아까 자신의 행동에 미안했는지 다른 화제로 돌린 것이다.그제야 예수진은 정신이 돌아왔다.점심과 저녁 모두 먹지 않았으니 배가 너무 고팠다."조금 기다려요. 먹을 것 가져올게요."계지원은 안간힘을 쓰며 침대에서 일어났다."내가 갈게요."예수진이 그런 그의 모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
그 말에 더 신이 난 송문수는 평소에는 그냥 사진도 찍기 싫어하던 사람이 하지수와 함께 필터가 잔뜩 씌여진 카메라 앞에서 바보같이 웃어 보였다.사진을 다 찍은 두 사람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영화가 시작하기 전이라 하지수는 빠르게 인스타를 올려버렸다.아무 문구도 없이 올려버린 셀카에 하도경이 곧바로 댓글을 달았다.[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니죠?][이 바보같이 웃고 있는 게 진짜 송문수에요?]계지원과 육현경도 이내 좋아요를 눌렀고 예수진은 본인다운 댓글을 달았다.[이젠 남자 친구 생겼다고 나랑은 영화 안 본다는 거지?][송문수 웃는 거 진짜 바보 같긴 하다.][무슨 영화 봐요? 재밌어요?]소이연까지 댓글을 달고 회사 사람들도 수많은 좋아요를 보내며 각양각색의 축하 인사를 해오자 하지수는 깜짝 놀라버렸다.평소에 감명 깊게 본 문구나 올리던 하지수가 갑자기 일상을 올려버리니 사람들의 반응이 폭주해버린 것 같았다.그에 하지수는 답장이라도 하려 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송문수에 핸드폰을 가방에 찔러넣을 수밖에 없었다.“영화 곧 시작하는 데 뭐해?”“아무것도 아니야.”처음에는 송문수와의 데이트라는 생각에 설레어 영화에 집중을 못 했지만 영화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수록 하지수는 점점 그 내용에 깊이 빠져들어 버렸다.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도 넋을 놓고 있었는데 저를 흔드는 송문수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끝났으니까 이제 가자.”차에 올라타서도 아무 말도 안 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왜 영화 보고 나와서 한마디도 안 해?”미간을 찌푸린 채 묻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오히려 본인이 더 따져 묻고 싶었다.누가 데이트하러 나와서 를 보냐고.너도 날 죽일 거냐는 질문을 할 수는 없으니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하지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설마 나도 널 죽일 거냐 뭐 그런 질문이 하고 싶은 거야?”그런데 그때 송문수가 헛
처음에는 그냥 곁눈질로만 보던 송문수는 제 눈에 들어온 낯선 하지수의 모습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그녀의 옷차림에 그의 심장은 빠르게 쿵쾅대기 시작했다.이게 연애라는 건가 싶어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뻘쭘했던 하지수가 물어왔다.“나 별로야?”역시나 이런 여성스러운 원피스는 저한테 안 어울리는 건가 싶어 예수진의 말을 믿은 걸 후회하는 하지수였다.“나 옷 갈아입고... 아!”본인도 이런 착장이 어색해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송문수가 하지수의 팔을 잡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릴 것만 같아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문수 씨, 왜 그래?”제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며 물어오는 하지수를 바라본 송문수는 그녀와 한참 동안 시선을 맞추다가 말했다.“나 못 참을 것 같아.”“응?”“못 참겠어.”의문문이 서술문으로 바뀌는 순간, 둘의 상황도 완전히 변해버렸다.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안 그래도 괴로웠는데 치마까지 입으며 자신을 유혹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영화 보러 안 가?”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하는 그녀의 모습조차 예뻐 보였던 송문수는 그딴 영화는 개나 줘버리고 그저 그녀의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망할 놈의 생리 때문에 또 한 번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이 상황이 죽을 만큼 힘들었던 송문수는 예전에 누렸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벌을 이렇게 받는 건가 싶기도 했다.“가자.”“나가자 이제.”송문수와의 키스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더 있다가는 그가 이성을 잃고 자신을 덮쳐 피가 사방으로 흐르게 될까 봐 하지수는 그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잠깐만.”“왜?”하지만 송문수는 허리에 두른 팔을 풀 생각이 없는지 괜히 시간을 끌며 하지수 쪽으로 점점 더 다가갔다.훅 들어온 얼굴 공격에 볼이 빨개진 하지수는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