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원래 그런 거예요. 죽든 살든 별의별 일들이 다 있는 거예요.”“누가 죽는다고 했어요!”천우진의 말에 심문헌은 반박하며 덧붙였다.“그래도 당신도 나이가 적지 않은데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죠.”“...”천우진은 심문헌과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단지 한 사람은 30대, 다른 사람은 40대일 뿐이었다.심문헌은 천우진의 손에서 맥주를 빼앗아 들며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당신이 죽던 말던 상관은 없는데, 나를 같이 있다가 죽으면 안 되죠. 천씨 가문도 나를 찾아올 텐데, 저는 감당이 안 돼요.”심문헌은 천우진이 마시지 못하게 그의 잔의 술을 마셔 버렸다.천우진도 자신이 술을 마실 상황이 아님을 알았기에 그런 그를 말리지 않았다.그래도 적당양은 괜찮다고 생각되었다.그러나 그는 더 이상 심문헌과 언쟁하기 싫었다.천우진은 심문헌이 그의 잔으로 술을 꿀꺽꿀꺽 다 마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술을 빌리는 것은 좋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아니였지만 다른 방법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그냥 그를 내버려두었다.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취한 심문헌은 책상에 엎드려 천우진을 향해 웅얼거렸다.“내가 소이연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아요?”“몰라요.”“내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걸 알잖아요.”“네.”심문헌의 웅걸거림에 천우진이 답했다.“그런 내가 소이연을 좋아해요.”심문헌은 눈시울이 붉어졌다.“이연 씨가 남자든 여자든 좋아했을 거예요.”“알겠어요.”“나는 내가 기회가 있을 줄 알았어요.”심문헌은 눈이 더욱 빨개져 억울함이 가득한 불쌍한 소년 같았다.“그런데 육현경이 아직 살아 있었다니. 폭탄이 터졌는데 어떻게 살아난 거죠?”심문헌은 말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천우진도 몰랐다. 이건 정말 운명일 것이다.“나는 평생 행복할 수 없어요.”심문헌은 마치 이번 생은 끝나는 듯 침통하게 말했다.“그건 모르죠.”“당신은 잘 모르겠죠. 아내와 아이, 그리고 행복한 가정을 가졌으니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겠죠. 게다가 나는
간병인이 나간 후 천우진은 심문헌을 한 방에 일으켜 세웠다.심문헌은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그는 눈을 떠 앞을 바라보자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끌려가는 것 같았다. 자신을 잡은 손에 힘이 너무 많이 실려 아파왔다.“천우진 씨, 좀 부드럽게 안 될까요?”“안 돼요.”“당신의 아내가 정말 불쌍하네요.”천우진은 심문헌을 힘겹게 옆의 침대로 옮겨 놓았다. 그가 내려놓으려는 찰나 심문헌은 그의 옷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천우진이 한순간 정신을 판 사이에 심문헌의 위로 넘어졌다.순간 공기가 경직되었다.심문헌은 만족스럽게 웃었다.“천우진 씨, 나에게 당할 줄은 몰랐죠?”“...유치해. 놓아줘요.”“싫어요.”심문헌은 그의 옷을 더욱 힘줘 잡아당겼다.“심문헌!”“협박해도 소용없어요.”심문헌은 그의 모습에도 꼼짝하지 않았다.“어차피 나를 죽일 수도 없잖아요.”천우진은 그런 그를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몸을 일으켜려 했지만 심문헌이 다시 잡아당기는 바람에 꼼작할 수 없었다.“도망가지 못하겠죠?”“심문헌 씨, 후회하지 말아요.”“후회는 무슨...”심문헌의 눈이 크게 떠졌다.그는 자신이 심하게 취했다고 생각했다. 취하지 않으면 이런 환각을 볼 리가 없을 것이다.한참이나 지나서 천우진은 심문헌에게서 멀어졌다.심문헌은 조용해져 잠에 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천우진은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옆 병실 안.소이연은 침대에 누워 아무런 말도 없었다.육민은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으나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엄마가 걱정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걸 잘 알았다.엄마는 정말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아빠 때문인가? 아빠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고 하는 것 때문인가?“엄마, 삼촌 방에 가 볼게요.”“그래.”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육민이 뭐 하러 가는지도 물어보지 않았다.육민은 어릴 때부터 예민한 아이였기에 소이연의 기분을 알아채고 혼자 있을 시간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사실 육민은 육현경을 보러 갔다.아빠가 기억을 잃
임아영은 루카스가 자신에 대한 냉담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밖에 있는 사람이 소이연이 아니니 견딜 수 있었다. 적어도 그는 소이연이 아닌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임아영은 이 점으로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었다.병실 밖.육현경이 육민의 앞으로 다가와 많이 자란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날 찾으러 온 거야?”“네.”“무슨 일이야?”“이 사람의 병실 밖에 서 있기 싫어요. 루카스 병실로 가면 안 돼요?”육민은 임아영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들어냈다.“그래.”육현경은 그런 육민을 데리고 자신의 병실로 들어갔다.“물 마실래? 아니면 과일 먹을래?”“다 싫어요.”육현경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임아영 그 사람이랑 결혼한다면서요?”“그래.”“엄마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요?”육현경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육민은 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어른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만 하는 게 아니야.”“임아영을 좋아하기 때문인가요? 아니죠, 엄마를 먼저 좋아했잖아요. 기억을 잃었을 뿐이지.”“당신은 내 아빠예요. 친자 검사도 했어요. 믿지 않는다면 가지고 올게요. 아니면 다시 검사를 해도...”“됐어.”“아직도 믿지 못하는 거예요?”“믿어.”그의 말에 육민은 눈을 크게 떴다.육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과 태도는 예전의 아빠의 모습과 같았다.“아빠, 기억난 거야?”육현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육민은 어릴 때부터 육현경과 함께 자랐기에 그의 성격을 잘 알았다.부정하지 않으면 긍정인 것이다.“아빠.”육민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의 모습에 육현경은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감추려 노력했다.“모든 게 생각났는데 왜 임아영과 결혼하려 하는 거예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엄마는 계속 아빠를 기다렸어요.”“어쩔 수 없다고 말했잖아.”“아빠는 예전에 이렇게 우유부단하지 않았어요.”“잃어 봤기 때문에 모험을 하기 싫은 거야.”“무슨 뜻이에요, 아빠?”“내가 없을 때 엄마를 잘 보살펴 줘.”“그럼 언제 돌아올 거예요
이튿날 천우진은 소이연의 병실로 갔다.“문헌 씨는요?”심문헌은 어제 그녀의 병실을 나간 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답지 않았다.육현경이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렇게 가만있을 그가 아니었다.“자고 있어요.”“어디 아픈 거예요?”“아니요, 취했어요.”“...”“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술 좀 먹고 잠들었어요. 그리고 아직 깨우지 않았어요. 만나고 싶으면 가서 깨울게요.”“괜찮아요.”소이연은 다급히 거절했다. 그냥 그의 안부를 물은 것이다.답을 하며 그녀는 천우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왜요?”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천우진이 물었다.“문헌 씨한테 지극정성이네요.”천우진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그냥 딱해 보여서요.”천우진의 대답에도 소이연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크서클도 심했다. 어젯밤 잘 휴식하지 못했을 것이다.심문헌이 병실에 있는데 잘 쉬지 못했다고?“할 말이 있어요.”천우진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말해요.”“할아버지를 대체할 사람을 찾았어요.”그의 말에 소이연은 깜짝 놀랐다.“많이 찾아봤지만 똑같은 사람은 찾지 못하고 비슷한 사람만 찾았어요. 가까이에서 보면 할아버지가 아닌 걸 보아낼 수 있어요.”“그래서요?”“오늘 할아버지를 비밀리에 안전한 곳으로 모실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을 부를 거예요. 구체적인 건 내가 준비할 거예요.”소이연은 별다른 말 없이 천우진의 말을 따랐다.“당신과 육현경은 어떤 생각이에요?”어제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어 물어보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의 생각을 물어야 했다.“노력할게요.”소이연은 천우진에게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숨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노력한다면 문제에 맞서도 되나요?”“괜찮아요.”소이연은 강경하게 답했다.“마음대로 해요.”“반대하는 건가요?”“반대하면 들으실 건가요?”천우진이 반문했다.“아니요.”“다른 건 다 괜찮은데 당신이 나를 밀어내는 건 견딜 수 없어요.”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은 감동을
천우진은 소이연이 천씨 가문에게 적대적이기에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그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냉담했다.“나를 인정하는 건가요?”천우진은 한참이나 진정한 후 입을 열었다.“항상 인정했어요.”“이제야 표현하나요?”“자만할까 봐요.”그녀의 대답에 천우진은 낮게 웃었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했다.“먼저 몸조리해요. 육현경이랑 다시 시작하든 아니면 천씨 집 일을 해결하든지 모두 건강이 우선이에요.”“당신도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뭐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맞다, 문헌 씨가 깨어나면 나한테 오라고 해요. 할 얘기가 있어요...”“여기 있어요.”문 앞에서 들리는 심문헌의 목소리에 소이연과 천우진이 돌아보았다.“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잘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대화를 엿듣지 못했어요.”“들어도 상관없어요. 속일 얘기도 없어요.”“먼저 나가 볼게요.”천우진은 그들을 두고 병실을 나왔다.“민아, 삼촌이랑 나갈래? 병원에서 며칠이나 지냈잖아.”“좋아요.”육민도 눈치가 빨랐다.병실에는 소이연과 심문헌 두 사람만 남았다.소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내 선택을 알거라고 생각해요.”“이제 나는 끝인가요?”심문헌은 그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가볍게 말했다. 그의 모든 아픔을 그녀에게 숨긴 것이다.“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낭비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지도 않아요.”심문헌의 말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육현경이 함께 하겠다고 해요?”“...”심문헌은 조금 고소했다.“임아영과 결혼할 건데 뺏을 자신이 있나요? 임아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에요.”심문헌의 말에 소이연은 반박할 수 없었다.“육현경이 임아영과 결혼하면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그럴 필요는 없죠. 죽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결혼 한 건데,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심문헌의 말은 너무나 냉정했다.“육현경의 죽음은 나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에요. 죽지도 않은 그가
이틀 후, 소이연은 천우진의 부름에 천씨 어르신 병실로 갔다. 정확히 말하면 천씨 가문 모두가 불려 갔다.그러나 어르신은 소이연과 천우진만 보려 했고 다른 이들은 밖에서 기다렸다.중환자실은 유리로 막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유리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그래서 어르신이 일어난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등을 대고 있었기에 얼굴은 볼 수 없었다.어르신이었기에 누구도 돌아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천우진이 똑똑한 점이었다.아무도 어르신이 다른 사람일거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어르신과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소이연은 천우진과 중환자실에서 가짜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었다.그렇게 반 시간이 지나 둘은 병실을 나왔다.어르신은 피곤한지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그들이 병실을 나오자 집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할아버지가 뭐래?”천정엽이 다급히 물었다.“피곤하셔서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네요. 이제 깨었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몸이 괜찮아지면 천씨 집으로 갈거라고 해요. 걱정 말고 하실 일 하시래요.”천우진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를 만날 거야.”“삼촌, 할아버지가 명확하게 말했어요. 피곤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대요. 휴식을 원하시는데 들어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요.”“내 아빠가 어렵게 깨셨는데 아들로서 보러도 못가? 그저 얼굴만 보겠다는데.”“이건 할아버지의 뜻이에요. 왜 이렇게 준비하셨는지는 퇴원하고 물어보세요.”“왜 퇴원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지금 가도 되잖아.”“삼촌.”“우진이 네가 계속 막는 걸 보니 무슨 비밀이 있나 본데?”천정엽은 비아냥거렸다.“할아버지 곁에서 수년간 돌봤는데 삼촌이 나를 의심하다니. 이건 나를 의심하는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를 의심하는지 모르겠네요.”천우진의 강한 말투에 천정엽은 말을 멈추었다.그러나 천정엽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나는 아빠를 관심하는 거야. 나는 보러 가야겠어. 비켜.”말을 마치며 천정엽은 밀고 들어
“네가 뭔데...”“잊었나 본데 할아버지가 다친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어쩌면 천씨의 누군가에 의해 다치신 거예요. 모든 조사를 마치기 전에 할아버지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어요.”“왜? 나를 의심하는 거야?”천정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그 정도는 아니지만 삼촌이 지금 할아버지의 화를 돋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진실이 들어난 후에 만나도 늦지 않아요.”천우진의 말에 천정엽은 얼굴이 굳어졌다.그러나 더 이상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어르신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시는 건 누구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계속 들어간다면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이다.천정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아까 할아버지가 말하셨어요. 자주 올 필요 없다고요. 할아버지의 몸이 나으시면 퇴원하고 돌아가실 거예요.”“다른 얘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천정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다른 일은 전달할 필요가 없으시대요.”“천우진!”천정엽은 화가 났다. 어르신은 천우진을 더욱 신뢰하여 다른 사람은 안중도 없이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삼촌, 할아버지는 다 계획이 있으세요. 존중하셨으면 좋겠네요.”“천우진, 아버지가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긴 거지?”천정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아니요, 할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으면 직접 해결하실 거예요.”“거짓말하지 마!”천정엽은 믿을 수 없었다.“그래, 너는 장손이고 아버지가 키우셨으니 너를 더 좋아하시겠지. 앞으로 네가 천씨의 권력을 쥐면 삼촌을 잊지 마라.”“삼촌, 너무 갔어요.”천우진은 너무 비굴하지 않게 천천히 말했다.“할아버지가 아직 건강하시니 은퇴하시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 삼촌은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니까.”“너는 정말 아버지를 닮았네. 됐어, 너랑 얘기 그만할거야. 아버지가 만나기 싫으면 가야지.”천정엽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돌아갔다.“형님, 할
천우진은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소이연은 침착했다.“포기하지 않을 거예요.”“같이 가 줘요?”“괜찮아요.”소이연은 웃으며 답했다.“있으면 더 불편할 것 같아요.”“뭐 할 거예요?”천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얼굴이 정말 빨리 바뀌네요.”“소이연, 적당히 해요.”“...그래요.”소이연은 천우진의 안색이 나빠지자 꼬리를 내렸다.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진지하다니.“먼저 갈게요. 민이 부탁해요.”“아들도 버리네요.”“나는 엄마를 응원해요.”육민이 곁에서 거들자 소이연은 웃음이 터졌다.그녀는 스스로 휠체어를 끌고 떠났다. 어떻게 이미 다른 여자가 생긴 육현경을 대해야 할지도 몰랐다.지금 가서 육현경과 임아영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소이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육현경은 이미 기억을 잃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대담하게 행동해도 된다고 주문을 걸었다.임아영은 확실히 육현경의 생명의 은인이었다.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힘겹게 육현경의 병실에 도착했다.역시 그는 없었다.아마 옆 병실에 있을 것이다.그래도 그녀는 병실로 들어갔다. 임아영의 병실에서 육현경이 있는 모습과 갖은 노력으로 그를 남기게 하는 그녀의 행동이 더욱 싫었다.소이연은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한 번도 자신이 남자를 빼앗기게 될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인생관에서 남자를 뺏는 것은 제쳐두고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그녀가 고귀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남녀 간의 관계에서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이건 어린 시절 가정의 영향 탓이다.지금은 육현경이 다른 여자와 놀고 난 후 자신한테 돌아오길 바라는 지경에 도달했다.소이연은 육현경의 침대에 앉아 핸드폰으로 연예 뉴스를 들여다보았다.요새 자신의 교통사고, 천씨 가문의 사건, 육현경 때문에 다른 일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지금 정신이 돌아와 예수진의 일에 대해 알고 싶었다.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예수진 관련 뉴스는 가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 말에 허영지는 대성통곡을 했고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끄떡없던 송기명마저 아들 일에 눈물을 보였다.평소에 사이는 안 좋았지만 그래도 친형이었기에 송문수도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고 하지수 역시 송승우가 다리를 잃는다는 말에 눈물을 떨어뜨렸다.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어릴 때부터 본인 잘난 멋에 살던 사람이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되려 죽겠다고 난리를 칠 것 같아 하지수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목숨이 다리 한쪽보다는 더 중요했기에 결국 사인을 한 송기명은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기분 좋게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갑작스레 닥친 비극에 송문수도 아버지를 부축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수술에 다들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요한 복도에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더니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걸어 나왔다.가족들 못지않게 속을 태우던 장지석은 피곤한 듯 마스크를 벗는 의사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물었다.“승우는 좀 어떻습니까?”그제야 가족들도 정신을 차리고 하지수와 송문수가 어머니 아버지를 부축한 채 의사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다른 말보다 먼저 나온 게 의사의 한숨이라 허영지는 쓰러질뻔한 걸 간신히 버텨내며 물었다.“왜 그래요 선생님, 우리 아들 잘못된 거 아니죠?!”“생명엔 지장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데...”“그런 데라뇨!”“환자분이 다리를 잃었으니 깨어나시고 나서도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할 겁니다. 가족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습니다. 오른쪽 다리 외에도 몸 각 부위가 다 강한 충격을 받아서 일단은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의식 돌아오고 모든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때 일반병실로 옮길 겁니다.”의사의 말에 허영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송기명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들은 전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그들도 송승우가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
만약 하지수가 송승우의 교통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가 그런 하지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나 있을지 송문수는 지금 모든 게 미지수였다.송승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정말 친오빠처럼 생각했던 하지수는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서울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해 있대.”“나 서울 가야겠어.”“그래요 여보.”마침내 정신을 차린 허영지가 입을 열자 송기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갈 거면 다 같이 가야죠. 오늘 파티는 일다 취소하죠.”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문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파티장 취소할 테니까 지수 너는 서울 가는 티켓이랑 차량 좀 준비해줘.”“알겠어.”이미 혼이 반쯤 나간 부모님을 모시려면 본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하지수는 바로 기사에게 연락하며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그리고는 한 시간 뒤에 출발인 항공편까지 끊어놓았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송문수는 서둘러 파티를 취소하고 있었는데 직원을 시켜 손님들께 나중에 아버지와 직접 찾아뵙고 취소이유를 말씀드리고 사과까지 드린다는 말도 전하게 했다.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송문수는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느라 바삐 돌아치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하지만 다들 송승우를 걱정하고 있어서 확 달라진 송문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린 송씨 일가는 바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나와 있던 송승우의 동료가 그들을 맞아주었다.“아주머니, 아저씨 오셨어요? 저는 승우 형 직장 동료 이찬혁이라고 합니다. 형은 안에서 수술 중이에요.”“우리 아들 많이 심한가요 지금?”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걱정을 멈출 수 없었던 송기명이 이찬혁을 붙잡고 묻자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저도 좀 전에 연락받고 온 거라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몰라요. 형이 실려 올 때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도...”
문자를 본 허영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사모님,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왜 그러십니까?”특종을 잡은 것마냥 달려드는 기자들에 송씨 일가 사람들도 다 같이 허영지를 주목했다.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그를 보며 송기명이 물었다.“여보, 왜 그래요?”아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시울만 붉히고 있자 조급해 난 송기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엄마, 무슨 일 있어요?”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긴장한 채로 물어왔지만 허영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그에 미간을 찌푸린 송문수는 아직 켜져 있는 엄마의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는데 그 역시 문자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송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핸드폰으로 뭘 봤길래 사모님이 저러시는 겁니까?”기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그는 바로 허영지의 핸드폰을 들고 기자회견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 한 말씀 해주세요!”하지만 그런 무시에도 굴하지 않는 기자들이 송문수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시작했다.송문수의 표정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챈 하지수도 입술을 말아 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복도로 나오자 송문수는 이미 통화 중이었는데 통화가 거듭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송문수의 표정이 저 정도로 굳어있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뜻이었다.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본 적 없던 표정이라 하지수는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음주운전으로 잡혀갈 때도 침착하기만 하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하지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은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갔다.밖으로 나온 허영지와 송기명도 그저 장난 전화이길 바라며 송문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
“오해 아닙니다, 전에는 저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변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송 회장님의 입원 때문입니까?”“제 우상이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도 하나의 이유죠. 제 눈에 아버지는 늘 이 집안을 지키는 영웅이셨고 절대 늙지도 않을 것 같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니까 그때 이 집안을 책임질 사람은 저뿐이더라고요.”이젠 다 커서 자신의 고초도 이해해주는 어엿한 아들을 보며 송기명은 아주 감동스러워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아내인 하지수 씨입니다.”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모든 카메라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갑작스러운 이목에 놀랄 새도 없이 송문수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아내가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회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밤을 새우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던 사람입니다. 성격 안 좋은 저를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면서 제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를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진짭니까?”“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저희 사이좋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철이 없어서 아내한테 상처 주는 일도 많이 해서 사이가 위태로웠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지금 혹시 사모님한테 고백하시는 겁니까?”기자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붉히는 송문수를 보며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파파라치한테 찍힐 때도 이미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까지 휘두르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쑥스러움이 많아졌나 싶어 다들 당황해하고 있는데 하지수는 그의 모습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그간의 이상하던 태도와 관계를 피했던 이유도 더 이상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송승우 씨는 왜 오지 않으신 겁니까, 오늘은 불참하시나요?”“두 분은
화장을 마치고 머메이드 드레스로 갈아입은 하지수는 불빛 아래에서 더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며 아무래도 자신이 허영지를 가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송문수를 불러보았다.“문수 씨, 이게 진짜 괜찮다고?”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한 질문이었지만 송문수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 이거 네 거 맞다니까.”“진짜 어머님이 준비하신 거 맞지?”“너 나 안 믿을 거야?”송문수가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하지수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입을게.”정말 허영지의 뜻이라면 하지수도 걱정할 게 없었다.사실 평소 하지수에게 검소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허영지였기에 그녀가 이런 드레스를 준비했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이번 기회에 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인가보다 하며 하지수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가자 이제.”“엄마가 인터뷰 있다고 빨리 오래. 사진도 찍어야 한대.”“그래.”차에 탄 뒤에도 송문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리를 덜덜 떨며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하지수가 그를 부르자 송문수는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문수 씨.”“어?”“더워?”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차 안에서도 땀을 흘리는 게 이상해서 한 질문인데 송문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아니.”“땀 나는데?”“그래?”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던 송문수가 또 말을 바꾸자 하지수는 그를 수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좀 더운 것 같기도 해.”“오늘 왜 이래? 당신 좀 이상한 것 같아.”“아무것도 아니야.”송문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하지수가 아니었다.“어디 아파?”“그럴 리가, 나 소처럼 건강한 남자야, 병도 잘 안 걸린다고.”“...”누가 봐도 오바하는 것 같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싶어 하지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매체들에서는 더 빨리 와 있었기에 기자들과 송기명, 허영지 모두 그들 부
아침 일찍 디자이너를 불러 단장을 마친 송기명과 허영지는 나이 들면 가만히 잊지 못한다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른 시간부터 호텔로 향했다.그리고는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차피 송문수는 전화를 잘 받지 않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하지수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이미 습관처럼 몸에 배 있었다.좀 전에 일어나서 스타일링을 받고 있던 하지수는 시부모님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네, 저희 일어났어요. 문수 씨는 씻고 있고 저는 화장하고 있어요.”“네, 먼저가 계시면 저희도 금방 갈게요. 8시 전엔 도착할 거에요.”통화를 마친 하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본인이 주인공도 아닌데 화장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았다.게다가 원래는 송문수와 커플룩으로 어머니께서 맞춰주신 복고풍 드레스를 입기로 했으니 어찌저찌 의상을 수정하다 보니 오늘 입어야 할 건 민소매인 머메이드 드레스가 되어버렸다.예쁘긴 예쁘지만 꾸민 티가 너무 많이 나서 고민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불렀다.“문수 씨, 나 진짜 이거 입어? 이거 어머니가 골라주신 것도 아닌데...”오늘 아침은 하지수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 송문수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있었다.그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하지수는 제 옆에 없는 송문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출근할 때도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서야 화를 내며 일어내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60세 생일파티라 신경을 쓰는 건가 싶어 하지수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었다.“뭐라고?”그런데 제가 한참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낸 송문수가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자 하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오늘 뭐 발언이라도 할 거야?”“아니, 왜?”“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해?”“내, 내가? 아, 아니야! 그럴 리가!”“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송문수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고 하지수는 또
아내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괜히 사람을 붙였다가 제 프러포즈를 망칠까 봐 겁났던 송문수는 결국 자신이 소이연, 예수진과 함께 꾸미는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러자 친구들의 놀림은 당연했고 육현경과 계지원은 임신한 사람을 부려먹는다고 구박까지 했지만 프로젝트가 이미 막바지에 돌입했기에 송문수는 온갖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이면서 도와달라고 읍소를 했다.그렇게 가장 성가신 친구들한테까지 알리고 나니 모든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송기명의 생일파티 당일이 되자 세상은 아주 시끄러워졌는데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 기사를 내대는 기자들 때문에 언론도 시끌벅적했다.그런데 기사의 대부분은 송기명이 아니라 송문수에 대한 것이었다.그에게 송승우라는 훌륭한 형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송 씨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게 망나니 같은 송문수라는 기사에 다들 놀라고 있었다.그러면서 그에 대한 찬양기사가 일파만파 퍼져나가자 송승우도 그걸 보게 되었다.아버지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야근을 몰아 한 덕에 오늘 시간을 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송문수를 추앙하는 기사들이 늘어나자 점점 언짢아졌다.몇 년 전만 해도 송문수는 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망나니였는데 이제는 제가 그의 배경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사람들이 제가 아닌 송문수에게 관심을 쏟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운전을 하면서도 방송을 듣고 있던 송승우는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송기명보다 송문수에 대한 말이 더 많이 나오자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미간을 펴지 못했다.지금 시간은 6시지만 비행기는 7시 출발이라 호텔에 도착하면 10시는 넘을 것 같아 송승우는 부모님께 먼저 연락을 드려 양해를 구했다.송승우에게 너그러웠던 부모님은 역시나 안 좋은 소리 한마디도 없이 오히려 서두르지 말라며 그를 걱정해주었다.어릴 때부터 받아왔던 편애였지만 오늘의 송승우는 왠지 그게 저에 대한 방치 같았다.이젠 부모님에게도 송문수라는 대단한 아들이 하나 더 생겼으니 저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수 씨의 의심을 풀어주는 거예요.]허를 찌르는 소이연의 말에 송문수는 조심스레 하지수를 바라보았다.하지수도 송문수에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던 터라 제게 보내지는 시선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들어버려 둘은 의도치 않게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하지만 찔리는 게 있었던 송문수가 먼저 눈을 피하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송문수 역시 잘못한 것도 없는 제가 왜 하지수를 피하는지 몰랐지만 몸이 먼저 한 반응이라 어쩔 수 없었다.[그건 저도 모르겠어요.][아니면 오전에 어디 갔었다고 대충 둘러대기라도 해봐.][안돼요, 그럼 더 수상하잖아요. 우리가 방금 지수 씨 달래주자마자 문수 씨가 해명하면 지수 씨도 우리가 알려줬다는 거 눈치챌 거에요. 지수 씨가 우릴 탓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별로 인 것 같아요.][그럼 어떡해요?]예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소이연이 말했다.[그냥 이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 ?][? ? ?][서프라이즈는 원래 이런 거에요. 실망을 하면 할수록 감동이 큰 법이죠. 어차피 다음 주가 디데이인데 며칠만 더 버티다가 프러포즈 잘하면 되죠.]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왠지 불안했던 송문수가 물었다.[그게 서프라이즈가 될까요? 괜히 놀래키는 거면 어떡해요? 그리고 지수가 나 안 받아줄 수도 있는데...][너 진짜 바보냐? 아니다, 너한테는 바보라는 말도 아까워. 진짜 지수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야?][걱정 마요, 절대 거절은 안 할 거예요.]예수진의 핀잔과 소이연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그들을 믿으며 대화방을 나왔다.[알겠어요 그럼.]여자들과의 대화를 마치자 남자들의 단톡방에서 또 송문수를 찾아댔다.[문수야, 지수 씨는 요즘 괜찮아?][뭐가?][이연이랑 수진 씨 요즘 지수 씨 자주 불러내진 않아?][아니? 왜 그러는데.][수진이랑 이연 씨 요즘 이상한 것 같아서, 둘이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