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육민이는 눈시울이 붉어진 소이연을 보고 어리둥절했다.때마침, 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리고 그녀는 눈물을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문헌 씨?”“이연 씨 지금 서울이죠? 나 주민등록증이랑 캐리어를 잃어버려서 갈 곳이 없거든요, 공항으로 마중 나올 수 있어요?”전화 너머로 들리는 신문헌의 불쌍한 목소리에 소이연은 눈살을 찌푸렸다.“문헌 씨가 서울에는 무슨 일로 왔어요?”“이연 씨 서울에 있는 거 아니에요? 당신이 어디 있으면 저도 같이 있어야죠 .”“...”“빨리 공항으로 와줘요, 기다릴게요!”전화를 끊은 소이연은 육민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소이연은 공항에서 심문헌을 데리고 나와 다시 호텔로 가려고 택시에 올라타고는 이 상황이 어이 없어서 그에게 물었다.“어쩌다 다 잃어버린 거예요?”“캐리어는 낙성 공항에서 짐을 붙이는 걸 까먹고 데스크에 맡겼고, 주민등록증은 서울 공항에서 화장실 갔다가 잃어버린 것 같아요, 공항 직원한테도 찾아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아직 못 찾았대요, 찾으면 연락한다고 했어요.”설명하다 보니 심문헌은 자기가 생각해도 이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혔다.소이연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비꼬듯 물었다.“용케도 자기는 안 잃어버렸네요?”“이게 다 내 탓은 아니죠, 내가 이연 씨 보려고 3일 내내 밤새워 야근하면서 겨우 받아낸 소중한 7일간의 휴가란 말이에요! 지금 너무 피곤한 상태라 날 어디에 팔아버려도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라고요.”소이연이 다시 물었다.“문헌 씨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어요?”심문헌은 꽤 득의양양했다.“나 그래도 남녀노소 모두한테 인기가 많아서 값이 꽤 나간다고요.”얼마 뒤,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하고 그들은 체크인하려고 데스크로 갔다.하지만, 호텔 직원은 오늘 예약이 꽉 차서 빈방이 없다고 했다.“오늘 성수기도 아니고 휴일도 아닌데 방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기가 막히는 이 상황에 흥분한 소이연에게 직원은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방금 해외에서 오신 단체 여행손
심문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이연의 뒤를 따랐다.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천우진은 소이연이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랐다.그리고 뒤따라 들어온 심문헌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심문헌도 천우진을 보고는 낯빛이 어두워졌다.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심문헌은 자기가 지금 소이연을 쫓아다닌 것만 아니면 천우진을 상대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천우진은 퉁명스럽게 물었다.“왜 다시 왔어요?”소이연은 천우진에게 심문헌의 상황을 얘기했다.“공항에서 주민등록증이랑 캐리어를 잃어버렸대요, 며칠만 여기 있게 해줘요.”천우진은 심문헌을 한 번 흘겨보았다.“그래도 용케 본인은 잃어버리지 않았네요.”“...”두 사람은 남매가 아니랄까 봐 비꼬는 말투도 똑같았다.심문헌은 화를 참으며 천우진을 따라 게스트룸으로 향했다.“이연 씨랑 민이 방은 어디예요?”“그건 문헌 씨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그냥 물어본 거예요.”“물어보지 마세요.”“이연 씨의 사촌 오빠라서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요, 당신이 지금 그녀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천우진은 시큰둥한 미소를 지었다.“난 이연이가 당신이랑 있으면 전혀 행복해질 것 같지 않은데요.”“저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우리 집안 사정이나 내 능력도 모르면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세요.”천우진은 더 이상 심문헌이랑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직언을 퍼부었다.“심문헌 씨, 당신의 성적 취향을 잊지 말아요.”당황한 심문헌의 표정에도 천우진은 냉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이연 씨가 불행해지는 게 불 보듯 뻔한 일인데, 내가 그걸 알면서 허락할 리가 없죠.”심문헌은 얼른 반박했다.“그건 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에요, 지금 내가 얼마나 상남자인데요!”심문헌은 하얀 피부 때문에 상남자의 느낌을 풍기지는 않았지만, 온화하고 우아한 다른 의미에서의 남자다운 멋있음이 있었다.심문헌은 자기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천우진의 시선이 맘에 들지 않았다.“뭘
소이연은 천우진에게 말했다.“참, 문헌 씨가 갈아입을 옷도 없을 텐데 우진 씨가 가정부한테 부탁해서 옷 좀 가져다주면 안 될까요? 내일은 그 사람더러 나가서 사도록 할게요.”“걱정하지 말아요, 문헌 씨가 당신을 쫓아다니는 게 맘에 들지 않아도 집안에 온 손님이니까 홀대하지는 않을 거예요.”“고마워요.”“그래도 문헌 씨랑은 같이 있지 말아요. 그 사람 옛날에...”천우진은 소이연이 심문헌의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에둘러 말했다.“아무튼 그 사람이랑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요.”소이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좀 쉬다가 내려와서 저녁 먹어요.”말을 마친 천우진은 그녀의 방을 나갔다.천우진은 소이연의 주변에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꼬이는 것 같았다.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옷 두 벌을 챙겨 다시 심문헌의 방으로 향했다.샤워을 마친 심문헌은 그제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대충 목욕 가운을 두르고 욕실 큰 거울 앞에서 근육 잡힌 자신의 몸매를 보고 만족스러운 듯 휘파람을 불며 밖으로 걸어 나왔다.욕실에서 나온 심문헌은 자기 방에 떡하니 있는 천우진을 보고 놀라 급히 몸을 감싸려고 했지만, 주위에는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었다.심문헌은 천우진에게 화를 냈다.“당신은 실례가 무슨 뜻인지 몰라요?”천우진은 빈정거리며 침대 옆으로 챙겨온 옷을 던졌다.“이연 씨가 당신한테 주라더군요.”심문헌은 말을 마치고 떠나려는 천우진을 불러세웠다.“거기 서요! 방금 그 눈빛은 뭐죠?”천우진은 심문헌을 차갑게 바라보면서 말했다.“내 눈빛이 얼마나 정상적인데요, 설마 내 시선에 부끄러워서 그런 거예요?”“어딜 봐서 내가 부끄러워한다는 거죠?”“지금 당신이 딱 그렇잖아요.”심문헌은 천우진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분한 마음에 그는 자신의 목욕 가운을 홱 잡아당겼다.천우진은 심문헌을 보고는 눈을 약간 움직이며, 얇은 입술을 가볍게 오므렸다.심문헌은 이를 갈며 다시 물었다.“누가 부끄러워한다고 그래요?”“너무 유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소이연은 천우진과 함께 천제진을 만나러 병원에 가려고 준비했다.심문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나도 같이 갈래요.”천우진은 단칼에 거절했다.“당신이 가서 뭐 할 거예요?”“천 씨 할아버지와 저희 할아버지도 친분이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저보고 서울에 가면 꼭 뵙고 오라고 하셨어요.”천우진은 할 말이 없었다.소이연은 천우진과 심문헌이 서로 기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했다.“그러면 어차피 온 김에 같이 할아버지 보러 가요.”심문헌의 까부는 표정에 천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유치하네요.”심문헌은 유치하다는 모욕적인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내가 뭐가 유치하다는 거죠?”천우진은 더 이상 심문헌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옆에 있던 소이연에게 말했다.“제가 먼저 차에 시동을 걸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먹고 나와요.””알겠어요.”심문헌은 천우진이 떠나자 자기를 노려보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에 약간 움찔했다.“우리가 지금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조용히 있으면 안 될까요? 천씨 가문이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틀에 박힌 집안은 아니더라도 명문가인데 누가 집에서 이렇게 큰 소리로 말을 해요!”“미안해요, 아까는 내가 흥분을 해서 참지 못했어요.”“그래도 참아야죠,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문헌 씨 혼자 호텔 가서 묵어요.”심문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육민이와 함께 천우진의 차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네 사람은 엘리베이터에서 육현경을 보았다.육민이는 육현경을 보고 너무 반가워했다.“루카스, 왜 병원에 있어요? 다리 보러 온 거예요?”육현경은 깁스한 다리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육현경이 답을 하기도 전에 곁에 있던 임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아니야, 혼자 병원에 오는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불편한데도 같이 온 거야.”육민이는 코를 찡그리며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루카스는 왜 또 이 아줌마랑 같이 있는 거지? 엄마
그리고는 육현경을 이끌고 걸어갔다.“실례하겠습니다. 이현 누나의 남자 친구 되시죠? 저번에 장안에서 본 적이 있는데, 기억나시나요?”“아니요, 기억 나지 않는데요.” 심문헌은 가차 없이 말했다.“소이연만 기억하거든요.”소이연은 오글거려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임아영은 더욱 거들었다.“와, 엄청 좋은 남자네요. 이연 언니가 이런 남자 친구랑 함께한다면 엄청 행복할 거예요.”“남자 친구가 아프다면 병원으로 데려주지 않아요?”심문헌은 깐족거렸다.임아영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네, 남자 친구가 잘해주는 해요. 한평생 그 사람만 있으면 돼요.”“오글거려서 더 못 듣겠네요.”심문헌은 더 이상 못 들어주겠는지 소이연에게로 관심을 돌렸다.“우리 할아버지 뵈러 가는 거예요?”천우진은 그제야 알아듣고 입을 열었다.“아영아, 몸조심해. 나는 할아버지 뵈러 갈게.”“그래요. 잘 다녀와요.”“그래.”그들은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소이연은 육현경을 다시 뒤돌아보았다.그러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임아양이 그의 팔을 껴안게 내버려두었다.소이연은 눈을 내리깔았다.자신의 모든 감정을 철저히 숨기었다.엘리베이터에서 심문헌은 그런 모습에 기가 찼다.“내숭은.”“어떻게 알아챘어요?”“척하면 척이죠.”“여자는 여자를 제일 잘 알죠.”천우진은 담담하게 조롱했다.심문헌은 그 뜻을 단번에 알아챘다.“천우진 씨, 무슨 뜻이에요? 그렇게 얘기할 필요가 있어요?”“도착했어요.”소이연은 그들의 싸움을 막았다.심문헌이 왜 그토록 천우진에게 적대적인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사이좋게 지내면 어디 덧나나?’...병원 밖에서 고급스러운 차 안에서 임아영은 루카스 리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루카스 리는 차에 오른 후 한 번도 그녀에게 시선을 돌린 적이 없었다.그녀는 분노를 감추고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미안해요, 루카스. 아까 기분이 안 좋았죠?”육현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을 잃을 수 없어
육연경은 자신이 소이연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마치 수년 동안 쌓여있었던 것처럼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강렬한 감정이었다.소이연을 생각하자 육연경의 심박질은 더욱 빨라져 그녀를 당장 만나고 싶은 감정에 휩싸였다. 심지어 그녀와 일분일초 함께 하고 싶었다.이건 그가 임아영에게서 느껴 본 적이 없던 감정이었다.일시적인 감정일 리가 없었다.마치 집착과도 같았다.육연경은 임아영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그는 우유부단하게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더 이상 임아영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임아영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도 도와줄 것이다.그러나 사랑은 아니었다.그래서 임아영이 아무리 애걸볼걸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육현경이 임아영과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가 소이연에게 자신이 솔로라는 사실을 알릴 심산이었다. 그때 임아영의 아버지가 딸이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을 알렸다.한순간 그는 가기 싫었다.이번에 타협한다면 임아영과 더욱 헤어지기 힘들 것임을 잘 알았다.마음속에 아무리 많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그러나 그는 임씨 가문이라면 임아영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그리하여 그는 거절했다.전화를 끊으려 할 때 임아영의 아버지가 그를 위협했다.“루카스, 지금의 서울이 누구의 것인지 잘 기억해. 네가 소이연이랑 같이 한다면 살아남을 것 같아? 소이연은 너를 구해줄 수 없어. 천씨 가문은 천씨 어르신이 깨어나기전까지 누구도 소이연을 돌볼 수 없어. 아영이와 병원에 갈 건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핸드폰을 쥔 루카스의 손을 부들부들 떨렸다.“자신과 다른 사람의 앞길을 망치지 말아.”그렇게 전화가 끊겼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지만 문을 두드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상황이 좋지 않은 천씨 가문에서 천씨 어르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가문 내의 갈등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소이연의 일을 해결하지 않고 임씨 가문이 이를 계기로 소이연을 친다면... 소이연은 혼자 임씨를 맞설 수 없
육현경이 깨어나자 이미 병원이었다.임 씨 사람들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허약해 보이는 임아영도 함께 말이다.임아영의 손목에는 이상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임아영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과 헤어져 자살을 택하게 한 그가 깨어나자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임아영이 몸을 던져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결국 임아영의 아버지는 그를 내버려두었다.다시 한번 임아영에게 상처를 준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육현경뿐만 아니라 소이연도 함께 말이다.임아영의 아버지는 문을 나서기 전에 자신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렸다.그는 딸을 위해 병원에 남아 있었다.임아영이 자살 기도로 피를 많이 흘렸기에 의사는 병원에서 하루 더 남아있으라는 진단을 했다.병원에서 임아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육현경에게 이렇게 대할 거라 생각 못했다며 연신 사과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를 정말 사랑하고 그를 잃으면 자신도 목숨을 내놓겠다 했다. 육현경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런 그를 임아영도 재촉하지 않았다.병원에서 그녀와 이틀을 지낸 후 육현경은 돌아가 옷을 바꿔입겠다고 했다.임아영은 그를 막지 않았다.육현경이 호텔로 돌아가 소이연을 마주쳤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나오지 않았다.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망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랬다.임씨 가문의 세력, 임아영의 생명 위협에 소이연의 영향까지...그는 도무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미룰 수 밖에 없었다.오늘 병원에서 소이연을 마주친 건 정말 그의 예상 밖이었다.더욱 예상 밖은 심문헌이 서울에 온 것이다.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에 육현경은 질투했다.이런 감정에 그는 소이연이 대한 자신의 사랑이 생각보다 강렬함을 느꼈다.“루카스, 화내지 않으면 안 돼요?”임아영은 조심스럽게 애교를 부렸다.“앞으로 당신 말을 들을게요. 당신이 소이연만 잊겠다 하면 무엇도 할 수 있어요. 소이연의 외모를 좋아하는 거라면 당신을 위해 성형을 할 수도 있어요.”육현경은 임아영이 이런 말을 내뱉을 거라 상상
육현경은 임아영의 모든 것을 무시했다.그는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임아영도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그러나 임아영은 원하지 않았다.그녀는 루카스와 헤어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자신이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은 임아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루카스의 어깨에 기대었다.‘자신이 가질수 없으면 파멸하라’는 그녀의 철칙이었다.같이 공유하는 건 그녀의 사전에 없었다....병원에서 소이연과 천우진은 천씨 어르신을 뵈러 갔다.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며칠의 치료를 받은 후 어르신의 안색은 많이 좋아졌다. 의식을 잃은 걸 모르는 사람은 단순히 잠에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의사도 이미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깨어날 거라고 했다.그러나 의사는 이런 말을 한지 꽤 오래되었다.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급해지지만 기다리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오자 심문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서울에 어쩌다가 왔는데 놀다 가죠?”소이연과 천우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민이도 놀란 눈이었다.이 사람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 있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10살짜리 아이만도 못하다니!“왜 이렇게 보는 거예요?”심문헌은 미간을 찌푸렸다.“눈치 좀 챙겨요.”천우진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밖으로 나가서 놀아야죠. 이렇게 침묵해 있으면 천씨 어르신이 깨어날까요? 그 분은 여러분들이 조급해하기보다는 행복해 하길 바랄까요?”심문헌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천우진도 뭐라고 하고 싶었으나 소이연이 들어줄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반박했다.“심문헌 씨랑 같이 서울에서 놀게요, 일 있으면 먼저 돌아가세요.”천우진은 심문헌을 째려보았다.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한마디 했다.“오늘 아무 일도 없으니 같이 가죠.”소이연은 살짝 놀랬다.천우진은 원래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냉정한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