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연경은 자신이 소이연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마치 수년 동안 쌓여있었던 것처럼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강렬한 감정이었다.소이연을 생각하자 육연경의 심박질은 더욱 빨라져 그녀를 당장 만나고 싶은 감정에 휩싸였다. 심지어 그녀와 일분일초 함께 하고 싶었다.이건 그가 임아영에게서 느껴 본 적이 없던 감정이었다.일시적인 감정일 리가 없었다.마치 집착과도 같았다.육연경은 임아영과 헤어질 결심을 했다.그는 우유부단하게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더 이상 임아영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임아영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도 도와줄 것이다.그러나 사랑은 아니었다.그래서 임아영이 아무리 애걸볼걸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었다.육현경이 임아영과 헤어지고 호텔로 돌아가 소이연에게 자신이 솔로라는 사실을 알릴 심산이었다. 그때 임아영의 아버지가 딸이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을 알렸다.한순간 그는 가기 싫었다.이번에 타협한다면 임아영과 더욱 헤어지기 힘들 것임을 잘 알았다.마음속에 아무리 많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그러나 그는 임씨 가문이라면 임아영이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그리하여 그는 거절했다.전화를 끊으려 할 때 임아영의 아버지가 그를 위협했다.“루카스, 지금의 서울이 누구의 것인지 잘 기억해. 네가 소이연이랑 같이 한다면 살아남을 것 같아? 소이연은 너를 구해줄 수 없어. 천씨 가문은 천씨 어르신이 깨어나기전까지 누구도 소이연을 돌볼 수 없어. 아영이와 병원에 갈 건지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핸드폰을 쥔 루카스의 손을 부들부들 떨렸다.“자신과 다른 사람의 앞길을 망치지 말아.”그렇게 전화가 끊겼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지만 문을 두드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상황이 좋지 않은 천씨 가문에서 천씨 어르신이 깨어나지 않으면 가문 내의 갈등이 폭발하게 될 것이다. 아무도 소이연의 일을 해결하지 않고 임씨 가문이 이를 계기로 소이연을 친다면... 소이연은 혼자 임씨를 맞설 수 없
육현경이 깨어나자 이미 병원이었다.임 씨 사람들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허약해 보이는 임아영도 함께 말이다.임아영의 손목에는 이상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임아영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과 헤어져 자살을 택하게 한 그가 깨어나자 가만두려 하지 않았다. 임아영이 몸을 던져서야 겨우 말릴 수 있었다.결국 임아영의 아버지는 그를 내버려두었다.다시 한번 임아영에게 상처를 준다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육현경뿐만 아니라 소이연도 함께 말이다.임아영의 아버지는 문을 나서기 전에 자신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경고를 날렸다.그는 딸을 위해 병원에 남아 있었다.임아영이 자살 기도로 피를 많이 흘렸기에 의사는 병원에서 하루 더 남아있으라는 진단을 했다.병원에서 임아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육현경에게 이렇게 대할 거라 생각 못했다며 연신 사과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를 정말 사랑하고 그를 잃으면 자신도 목숨을 내놓겠다 했다. 육현경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그런 그를 임아영도 재촉하지 않았다.병원에서 그녀와 이틀을 지낸 후 육현경은 돌아가 옷을 바꿔입겠다고 했다.임아영은 그를 막지 않았다.육현경이 호텔로 돌아가 소이연을 마주쳤을 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나오지 않았다.어떤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어쩌면 망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랬다.임씨 가문의 세력, 임아영의 생명 위협에 소이연의 영향까지...그는 도무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미룰 수 밖에 없었다.오늘 병원에서 소이연을 마주친 건 정말 그의 예상 밖이었다.더욱 예상 밖은 심문헌이 서울에 온 것이다.그들이 함께 있는 모습에 육현경은 질투했다.이런 감정에 그는 소이연이 대한 자신의 사랑이 생각보다 강렬함을 느꼈다.“루카스, 화내지 않으면 안 돼요?”임아영은 조심스럽게 애교를 부렸다.“앞으로 당신 말을 들을게요. 당신이 소이연만 잊겠다 하면 무엇도 할 수 있어요. 소이연의 외모를 좋아하는 거라면 당신을 위해 성형을 할 수도 있어요.”육현경은 임아영이 이런 말을 내뱉을 거라 상상
육현경은 임아영의 모든 것을 무시했다.그는 어떻게 이 상황을 벗어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임아영도 그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그러나 임아영은 원하지 않았다.그녀는 루카스와 헤어지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어릴 때부터 자신이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은 임아영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루카스의 어깨에 기대었다.‘자신이 가질수 없으면 파멸하라’는 그녀의 철칙이었다.같이 공유하는 건 그녀의 사전에 없었다....병원에서 소이연과 천우진은 천씨 어르신을 뵈러 갔다.아직 깨어나지는 않았지만 며칠의 치료를 받은 후 어르신의 안색은 많이 좋아졌다. 의식을 잃은 걸 모르는 사람은 단순히 잠에 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의사도 이미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깨어날 거라고 했다.그러나 의사는 이런 말을 한지 꽤 오래되었다.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급해지지만 기다리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병원에서 나오자 심문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서울에 어쩌다가 왔는데 놀다 가죠?”소이연과 천우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민이도 놀란 눈이었다.이 사람은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슬픔에 빠져 있는데 이런 말을 하다니!10살짜리 아이만도 못하다니!“왜 이렇게 보는 거예요?”심문헌은 미간을 찌푸렸다.“눈치 좀 챙겨요.”천우진은 얼굴색이 어두워졌다.“기분이 좋지 않으니까 밖으로 나가서 놀아야죠. 이렇게 침묵해 있으면 천씨 어르신이 깨어날까요? 그 분은 여러분들이 조급해하기보다는 행복해 하길 바랄까요?”심문헌을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천우진도 뭐라고 하고 싶었으나 소이연이 들어줄 수 없다는 듯이 그에게 반박했다.“심문헌 씨랑 같이 서울에서 놀게요, 일 있으면 먼저 돌아가세요.”천우진은 심문헌을 째려보았다.그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한마디 했다.“오늘 아무 일도 없으니 같이 가죠.”소이연은 살짝 놀랬다.천우진은 원래 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냉정한
심문헌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천우진은 그야말로 그의 사랑에서의 걸림돌이었다.참으로 얄미웠다.“어디 가는 거예요?”천우진이 심문헌에게 물었다.심문헌은 잠시 멍했다.이렇게 적극적으로 그에게 묻다니 정말 의외였다.언제부터 이 사람이 자신에게 예의를 차렸단 말인가.“서울이 익숙지 않아서요.”그는 화를 냈다.“그럼 제가 일정을 짤게요.”심문헌은 천우진이 무슨 일정을 짤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그저 자신에게 대든 것일 것이리라.오늘의 일정은 알차게 꽉 찼기에 다른 일정을 추가할 수가 없었다.첫 일정은 서울의 가장 유명한 명성 고적에 가는 것인데, 명성 고적은 처음 도착할 때만 신선하고 한바퀴 돌고 나면 흥미가 떨어지기에 가이드의 생동한 해설을 추가했다.두 번째 일정은 서울의 가장 맛있는 음식집으로 예약했다. 밥을 먹고 식곤증을 대비하여 고급 유람 차를 예약하여 세 번째 일정으로 가는 길에 휴식하게 했다.세 번째 일정은 서울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이다.등산하는 것은 힘들기에 천우진은 케이블카를 예약했다. 도중에 쉬운 구간은 등산을 하고 힘든 구간은 다시 케이블카를 탈 계획이었다.그렇다 해도 산 정상에 도착하면 힘이 다 빠질 것이다.그래도 등산을 시작하자 일몰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했다. 소이연은 이렇게 철두철미한 천우진을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조금만 늦어도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수도 있었다.눈앞의 아름다움을 다 마치고 날은 어두워졌다.산의 기온은 빨리 내려갔다.천우진은 어디서 가져오는지 모를 외투를 가져왔다.외투는 모두 새 것이어서 몸을 덮으면 매우 따뜻했다.그들은 산 정상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심문헌은 여기에 온 적은 없지만 많이 들어봤다. 이 음식점은 예약하려면 반 개월 정도 걸렸다. 그런 음식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뷰를 차지했다.그래도 심문헌은 천우진을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았다.천우진의 신분으로 이런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그렇기에 그가 감동할 필요도 없었다.그저 그가 일 처리
그들은 모두 경악했다.그들은 다시 케이블카를 타는 것으로 예상했다.지금 이 시간에 케이블카가 운행하는 것도 몰랐기에 걸어 내려가는 것이 생각했다.그리고 산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도 있었다.그러나 천우진이 헬리콥터를 불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임시로 온 것이었기에 갈아입을 옷도 챙기지 않았고 갑자기 밖에서 밤을 묵는 것도 불편했다.그리고 케이블카를 타기엔 추웠기에 길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헬리콥터를 타면 자연스레 풍경도 같이 감상할 수 있었다.소이연은 자신이 천우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고 생각했다.이 사람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꽤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로맨틱이라는 단어로 천우진을 묘사하니 조금은 이상했다.‘됐어, 그냥 그의 뜻대로 가자.’헬리콥터는 산 아래의 온천에 멈추었다.직원이 그들에게 프라이빗 온천탕으로 안내할 때 심문헌은 천우진이 자신에게도 온천과 스파를 준비한 것을 알아차렸다.‘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던가?’“호들갑 떨지 말아요.”천우진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그냥 어쩔 수 없이 같이 준비한 거예요. 그들이 당신을 위해 힘들었으니 휴식이 필요해요.”“...”심문헌은 그런 천우진을 째려보았다.그도 결코 감동받지는 않았다.남녀가 갈린 온천이었기에 민이는 천우진과 심문헌과 같이 했다.“나체로 들어가는 건가요?”심문헌이 직원에게 물었다.“그렇습니다, 손님. 나체로 들어가야만 제대로 휴식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누구도 들어오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온천을 즐기실 때 스파 서비스를 준비하겠습니다.”직원은 상냥하게 답했다.심문헌은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았다.“다른 탕이 있나요?”“죄송합니다, 손님. 프라이빗 온천탕은 이미 자리가 없습니다.”“수영복만이라도 입고 들어가면 안 되나요?”“죄송합니다, 손님. 여기는 수영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고 탕에 들어가지 못합니다.”“할 수 없죠.”천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 돌아 민이를 불렀다.“민아, 스스로 옷
“복수하러 와.”심문헌이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유치하다 생각했다.천우진은 더 이상 봐줄수가 없었다. 심문헌은 어떻게 이렇게 눈치가 없단 말인가.‘이런 성격으로 사회생활이 되나?’심문헌은 갑자기 물을 튕겼다.“야, 아직도 어린애야?”심문헌을 기분이 나빠진 듯 말했다.“누굴 보고 어린애라고 하는 거야? 서른 살 먹고 열 살처럼 사는 주제에.”“나를 놀리는 거야?”“그럼?”“제기랄!”심문헌은 천우진에게 물을 뿌리며 입을 열었다.“애초부터 당신이 미웠어! 나의 혼길을 막고 지금은 내 미래 아들의 사이를 막다니!”천우진도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그는 재빨리 반격했다. 더욱 많은 물을 심문헌의 몸에 뿌렸다.삽시에 크지 않은 온천탕은 물보라가 일었다.민이는 피해자로 되어 피할 수도 없었다.둘이 합쳐 80이나 되는 어른들이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민이는 심문헌이 지금 매우 화가 난 상태임을 알아차렸다.민이도 심문헌이 자꾸 자신을 아빠라고 해서 좋아하지 않았기에 물을 맞는 그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그는 아빠가 있었다.엄마는 아빠와만 같이 있을 것이다.민이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오늘 마주친 아빠는 왜 다른 여자랑 같이 있은 거지?’‘아빠는 엄마가 기분 나빠하는 걸 모를까?’민이는 오늘 엄마의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낄 수 있었다.할아버지의 원인이 아닌 아빠의 우유부단함 때문일거라고 민이는 확신했다.“아!”생각에 잠기었던 민이는 심문헌의 갑작스러운 비명소리를 들었다.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심문헌이 온천탕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수심은 깊지 않았다.민이의 허리밖에 오지 않았다.이런 수심에 다 큰 성인 남자가 빠질거라 생각지 못 할 것이다.심문헌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해도 빠져 죽지는 못할 것이다.그렇게 십초, 이십초, 삼십 초가 지났다...아직도 심문헌은 나오지 않았다.천우진은 얼굴이 굳어졌다.민이는 그런 천우진을 바라보며 함께 긴장했다.
천우진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을 먹었다.그는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켜 심문헌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천우진을 물장난으로 이기지 못하니 이렇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아!”득의양양하던 심문헌은 천우진에게 물속으로 내팽개쳤다.예상 못 한 심문헌은 물을 많이 먹어 얼굴도 빨개졌다.천우진은 그런 심문헌이 우습다는 듯 냉소적으로 웃었다.그런 대접을 견딜 수 없었던 심문헌은 달려가 주먹을 내리쳤다.민이는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그런 그들과 멀리 떨어졌다.나이를 먹고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옆의 직원도 이런 손님들을 겪지 못했는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천우진과 심문헌은 서로 지지 않았다.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민이가 나지막이 내뱉었다.“나 안마받을래. 온 몸이 아파.”그제야 그들은 싸움을 멈추었다.어린아이 앞에서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 꽤 부끄러웠을 것이리라.그 순간 심문헌은 발을 헛디뎠다.이번은 진짜였다. 온 몸이 흔들려 천우진의 품에 안겨 왔다.놀랐는지 심문헌의 두 손은 천우진의 몸을 잡았다.그때 천우진의 차가운 말이 들려왔다.“좋아?”“꺼져!”심문헌은 천우진에게서 머리 떨어졌다.“남자한테 관심 없어!”천우진은 여전히 비웃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상냥하게 민이에게 말했다.“삼촌한테 와. 안마받으러 가자.”“좋아.”민이는 천우진을 따라 나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저 사람이 아빠로 되는 건 싫어, 너무 유치해.”“...”온천을 마치고 스파를 받으니 이미 밤 11시였다.모두 진이 빠졌고 차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차 안은 매우 조용했다.소이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소이연은 매우 피곤했으나 잠에 들지 않았다.육현경이 살아 있음을 알고 난 후 그녀의 수면의 질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그러나 아직도 악몽을 꿀 때도 있었다.모든 것이 꿈일까 봐 무서웠다.그녀는 임아영의 메세지를 보았다.임아영과 육현경의 사이좋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그 순간, 임아영은 메세지를 철회했다. 마치
천우진은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그는 옆에서 쌔근쌔근 자는 육민을 쳐다보며 소이연에게 말했다. “내가 민이를 업고 갈 테니까 깨우지 말아줘요. 대신 심문헌을 깨워줘요.”“그럴게요.”소이연은 심문헌을 천천히 깨웠다.심문헌은 몸을 조금 움직였다.그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방으로 돌아가서 자요.” 소이연이 그에게 현재 위치를 알려줬다. “천씨 저택에 도착했어요.”심문헌은 눈을 비비며 가까스로 일어났다.시간을 보니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충분히 졸릴 시간이었다.그는 하품을 크게 하며 소이연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천우진은 어디에 있죠?” 심문헌이 의아해했다.“우진 씨는 민이를 업고 먼저 방으로 돌아갔어요.”“앗! 또 내가 어필할 기회를 놓쳐버렸네요.” 심문헌은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지능이 마이너스가 되는 건가?두 사람은 천씨 저택으로 들어갔다.심문헌은 소이연을 방으로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소이연도 늦은 시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심문헌이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게 허락했다.“이연 씨.”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 할 때 심문헌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소이연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나는 이연 씨를 좋아해요.”“...” 소이연은 심문헌이 기습 고백할 줄 예상치 못했다.그것도 이렇게 진지한 고백을 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물론 예전에도 이런 고백을 했었지만 한 번 말했기 때문에 그 뒤로는 다시 언급한 적 없었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이렇게 고백할 줄이야.“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연 씨가 점점 저에게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요.”심문헌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답답한 감정을 말했다.이런 감정이 자꾸 생기니까 더욱 잃기 두려워했다.“문헌 씨도 알다시피 나는 문헌 씨에게...”“알아요.” 심문헌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지만 다음 순간에는 참지 못하고 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했는데도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