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헌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천우진은 그야말로 그의 사랑에서의 걸림돌이었다.참으로 얄미웠다.“어디 가는 거예요?”천우진이 심문헌에게 물었다.심문헌은 잠시 멍했다.이렇게 적극적으로 그에게 묻다니 정말 의외였다.언제부터 이 사람이 자신에게 예의를 차렸단 말인가.“서울이 익숙지 않아서요.”그는 화를 냈다.“그럼 제가 일정을 짤게요.”심문헌은 천우진이 무슨 일정을 짤 수 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그저 자신에게 대든 것일 것이리라.오늘의 일정은 알차게 꽉 찼기에 다른 일정을 추가할 수가 없었다.첫 일정은 서울의 가장 유명한 명성 고적에 가는 것인데, 명성 고적은 처음 도착할 때만 신선하고 한바퀴 돌고 나면 흥미가 떨어지기에 가이드의 생동한 해설을 추가했다.두 번째 일정은 서울의 가장 맛있는 음식집으로 예약했다. 밥을 먹고 식곤증을 대비하여 고급 유람 차를 예약하여 세 번째 일정으로 가는 길에 휴식하게 했다.세 번째 일정은 서울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산이다.등산하는 것은 힘들기에 천우진은 케이블카를 예약했다. 도중에 쉬운 구간은 등산을 하고 힘든 구간은 다시 케이블카를 탈 계획이었다.그렇다 해도 산 정상에 도착하면 힘이 다 빠질 것이다.그래도 등산을 시작하자 일몰의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했다. 소이연은 이렇게 철두철미한 천우진을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조금만 늦어도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수도 있었다.눈앞의 아름다움을 다 마치고 날은 어두워졌다.산의 기온은 빨리 내려갔다.천우진은 어디서 가져오는지 모를 외투를 가져왔다.외투는 모두 새 것이어서 몸을 덮으면 매우 따뜻했다.그들은 산 정상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심문헌은 여기에 온 적은 없지만 많이 들어봤다. 이 음식점은 예약하려면 반 개월 정도 걸렸다. 그런 음식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뷰를 차지했다.그래도 심문헌은 천우진을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았다.천우진의 신분으로 이런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그렇기에 그가 감동할 필요도 없었다.그저 그가 일 처리
그들은 모두 경악했다.그들은 다시 케이블카를 타는 것으로 예상했다.지금 이 시간에 케이블카가 운행하는 것도 몰랐기에 걸어 내려가는 것이 생각했다.그리고 산에서 하룻밤을 묵을 수도 있었다.그러나 천우진이 헬리콥터를 불렀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임시로 온 것이었기에 갈아입을 옷도 챙기지 않았고 갑자기 밖에서 밤을 묵는 것도 불편했다.그리고 케이블카를 타기엔 추웠기에 길에서 얼어 죽을 수도 있었다.헬리콥터를 타면 자연스레 풍경도 같이 감상할 수 있었다.소이연은 자신이 천우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고 생각했다.이 사람은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꽤 로맨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로맨틱이라는 단어로 천우진을 묘사하니 조금은 이상했다.‘됐어, 그냥 그의 뜻대로 가자.’헬리콥터는 산 아래의 온천에 멈추었다.직원이 그들에게 프라이빗 온천탕으로 안내할 때 심문헌은 천우진이 자신에게도 온천과 스파를 준비한 것을 알아차렸다.‘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던가?’“호들갑 떨지 말아요.”천우진이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그냥 어쩔 수 없이 같이 준비한 거예요. 그들이 당신을 위해 힘들었으니 휴식이 필요해요.”“...”심문헌은 그런 천우진을 째려보았다.그도 결코 감동받지는 않았다.남녀가 갈린 온천이었기에 민이는 천우진과 심문헌과 같이 했다.“나체로 들어가는 건가요?”심문헌이 직원에게 물었다.“그렇습니다, 손님. 나체로 들어가야만 제대로 휴식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는 누구도 들어오지 않으니 안심하십시오. 온천을 즐기실 때 스파 서비스를 준비하겠습니다.”직원은 상냥하게 답했다.심문헌은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았다.“다른 탕이 있나요?”“죄송합니다, 손님. 프라이빗 온천탕은 이미 자리가 없습니다.”“수영복만이라도 입고 들어가면 안 되나요?”“죄송합니다, 손님. 여기는 수영복이 없습니다. 그리고 옷을 입고 탕에 들어가지 못합니다.”“할 수 없죠.”천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 돌아 민이를 불렀다.“민아, 스스로 옷
“복수하러 와.”심문헌이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했지만 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유치하다 생각했다.천우진은 더 이상 봐줄수가 없었다. 심문헌은 어떻게 이렇게 눈치가 없단 말인가.‘이런 성격으로 사회생활이 되나?’심문헌은 갑자기 물을 튕겼다.“야, 아직도 어린애야?”심문헌을 기분이 나빠진 듯 말했다.“누굴 보고 어린애라고 하는 거야? 서른 살 먹고 열 살처럼 사는 주제에.”“나를 놀리는 거야?”“그럼?”“제기랄!”심문헌은 천우진에게 물을 뿌리며 입을 열었다.“애초부터 당신이 미웠어! 나의 혼길을 막고 지금은 내 미래 아들의 사이를 막다니!”천우진도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그는 재빨리 반격했다. 더욱 많은 물을 심문헌의 몸에 뿌렸다.삽시에 크지 않은 온천탕은 물보라가 일었다.민이는 피해자로 되어 피할 수도 없었다.둘이 합쳐 80이나 되는 어른들이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민이는 심문헌이 지금 매우 화가 난 상태임을 알아차렸다.민이도 심문헌이 자꾸 자신을 아빠라고 해서 좋아하지 않았기에 물을 맞는 그를 보며 속으로 웃었다.그는 아빠가 있었다.엄마는 아빠와만 같이 있을 것이다.민이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오늘 마주친 아빠는 왜 다른 여자랑 같이 있은 거지?’‘아빠는 엄마가 기분 나빠하는 걸 모를까?’민이는 오늘 엄마의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낄 수 있었다.할아버지의 원인이 아닌 아빠의 우유부단함 때문일거라고 민이는 확신했다.“아!”생각에 잠기었던 민이는 심문헌의 갑작스러운 비명소리를 들었다.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심문헌이 온천탕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수심은 깊지 않았다.민이의 허리밖에 오지 않았다.이런 수심에 다 큰 성인 남자가 빠질거라 생각지 못 할 것이다.심문헌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해도 빠져 죽지는 못할 것이다.그렇게 십초, 이십초, 삼십 초가 지났다...아직도 심문헌은 나오지 않았다.천우진은 얼굴이 굳어졌다.민이는 그런 천우진을 바라보며 함께 긴장했다.
천우진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물을 먹었다.그는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켜 심문헌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천우진을 물장난으로 이기지 못하니 이렇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아!”득의양양하던 심문헌은 천우진에게 물속으로 내팽개쳤다.예상 못 한 심문헌은 물을 많이 먹어 얼굴도 빨개졌다.천우진은 그런 심문헌이 우습다는 듯 냉소적으로 웃었다.그런 대접을 견딜 수 없었던 심문헌은 달려가 주먹을 내리쳤다.민이는 자신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그런 그들과 멀리 떨어졌다.나이를 먹고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옆의 직원도 이런 손님들을 겪지 못했는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천우진과 심문헌은 서로 지지 않았다.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민이가 나지막이 내뱉었다.“나 안마받을래. 온 몸이 아파.”그제야 그들은 싸움을 멈추었다.어린아이 앞에서 이런 추한 모습을 보인 것이 꽤 부끄러웠을 것이리라.그 순간 심문헌은 발을 헛디뎠다.이번은 진짜였다. 온 몸이 흔들려 천우진의 품에 안겨 왔다.놀랐는지 심문헌의 두 손은 천우진의 몸을 잡았다.그때 천우진의 차가운 말이 들려왔다.“좋아?”“꺼져!”심문헌은 천우진에게서 머리 떨어졌다.“남자한테 관심 없어!”천우진은 여전히 비웃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상냥하게 민이에게 말했다.“삼촌한테 와. 안마받으러 가자.”“좋아.”민이는 천우진을 따라 나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저 사람이 아빠로 되는 건 싫어, 너무 유치해.”“...”온천을 마치고 스파를 받으니 이미 밤 11시였다.모두 진이 빠졌고 차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차 안은 매우 조용했다.소이연의 핸드폰이 울렸다.소이연은 매우 피곤했으나 잠에 들지 않았다.육현경이 살아 있음을 알고 난 후 그녀의 수면의 질은 눈에 띄게 좋아졌다.그러나 아직도 악몽을 꿀 때도 있었다.모든 것이 꿈일까 봐 무서웠다.그녀는 임아영의 메세지를 보았다.임아영과 육현경의 사이좋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그 순간, 임아영은 메세지를 철회했다. 마치
천우진은 흐리멍덩한 상태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그는 옆에서 쌔근쌔근 자는 육민을 쳐다보며 소이연에게 말했다. “내가 민이를 업고 갈 테니까 깨우지 말아줘요. 대신 심문헌을 깨워줘요.”“그럴게요.”소이연은 심문헌을 천천히 깨웠다.심문헌은 몸을 조금 움직였다.그는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방으로 돌아가서 자요.” 소이연이 그에게 현재 위치를 알려줬다. “천씨 저택에 도착했어요.”심문헌은 눈을 비비며 가까스로 일어났다.시간을 보니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충분히 졸릴 시간이었다.그는 하품을 크게 하며 소이연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천우진은 어디에 있죠?” 심문헌이 의아해했다.“우진 씨는 민이를 업고 먼저 방으로 돌아갔어요.”“앗! 또 내가 어필할 기회를 놓쳐버렸네요.” 심문헌은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은 사랑에 빠지면 지능이 마이너스가 되는 건가?두 사람은 천씨 저택으로 들어갔다.심문헌은 소이연을 방으로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소이연도 늦은 시간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심문헌이 방문 앞까지 데려다주게 허락했다.“이연 씨.” 그녀가 작별 인사를 하고 문을 닫으려 할 때 심문헌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소이연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나는 이연 씨를 좋아해요.”“...” 소이연은 심문헌이 기습 고백할 줄 예상치 못했다.그것도 이렇게 진지한 고백을 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물론 예전에도 이런 고백을 했었지만 한 번 말했기 때문에 그 뒤로는 다시 언급한 적 없었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갑자기 이렇게 고백할 줄이야.“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연 씨가 점점 저에게서 멀어지는 느낌이 들어요.”심문헌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답답한 감정을 말했다.이런 감정이 자꾸 생기니까 더욱 잃기 두려워했다.“문헌 씨도 알다시피 나는 문헌 씨에게...”“알아요.” 심문헌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였지만 다음 순간에는 참지 못하고 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같이했는데도
심문헌은 천우진 옆을 스쳐 지나갔다.“저기요.” 천우진이 그를 불렀지만 심문헌은 깔끔하게 무시했다.자신을 그렇게까지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천우진의 옆을 스치는 순간, 손 하나가 심문헌의 몸을 강하게 붙잡았다.심문헌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반항할 틈도 없이 천우진에게 질질 끌려갔다.“이봐요, 지금 뭘 하자는 거죠?” 심문헌이 천우진에게 고함을 지르며 욕했지만 천우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붙잡고 끌어갔다.소이연은 그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심문헌이 나에게 고백했다고 천우진이 심문헌을 두들겨 패려는 건 아니겠지?’게다가 그녀는 그 고백에 아직 동의하지도 않았다.물론 소이연은 천우진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았다.천우진은 항상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적절한 행동을 하니까.만약 천우진이 심문헌을 때렸다면 그건 분명 심문헌이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그녀는 방으로 돌아갔다.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앉아 갑자기 움직이기 싫어졌다.하루 종일 피곤한 상태로 지냈는데 신기하게 이 늦은 시간에도 여전히 잠이 오지 않았다.그녀는 방금 심문헌의 고백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심문헌에게 어떤 태도로 대했든 사람 마음이라는 게 딱딱한 기계도 아니고 감정으로 꽉 찬 이상 심문헌을 거절한 것에 대해 그녀도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소이연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오늘 육현경과 임아영이 함께 있던 장면이 그녀 눈앞에 얼른거렸다.‘육현경, 내가 널 계속 기다릴 만큼의 가치가 정말 너에게 있기나 해?’...천씨 저택.심문헌의 방.테이블 위에는 맥주가 가득했다.심문헌의 고백이 소이연에게 거절당했는데 천우진이 왜 끼어들어 이 난리를 벌이는지 심문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백 실패가 술을 마시며 축하할 정도로 신나는 일인가?천우진의 사촌 여동생이 이제 더 이상 심문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되어서?‘X발,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비겁하지?’심문헌은 쌀쌀한 표정으로 천우진이 술병을 여는 모습을 지켜봤다. 아까부터 적어도 열 병은
하지만 술이란 건 마시다 보면 멈출 수 없게 된다.심문헌은 죽도록 인정하기 싫었지만 슬픈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소이연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육현경은 이미 한 줌의 재가 되었는데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지키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소이연의 마음이 진짜 강철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심문헌은 생각하면 할수록 슬퍼져서 술을 점점 더 많이 마셔댔다.“이봐요, 적당히 마셔요.” 천우진이 그가 목숨을 걸고 술을 마시려 하자 그를 제지하려 했다.“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군요. 방금은 분명히 나에게 술을 권했죠, 근데 이제 와서 마시지 말라고요? 이봐요 우진 씨, 내가 그렇게 재수 없는 놈인가요? 내게 태클을 걸어야만 속이 후련한 건가요?” 심문헌의 눈은 어느새 초점을 잃었고 눈앞의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취했다.“내가 문헌 씨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술을 권한 거지 목숨을 걸고 마시라고 권한 게 아니잖아요.” 천우진은 어느새 쌀쌀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마시고 일어나 자러 가세요.”“천우진, 내가 말이야... 억!” 심문헌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갑자기 자기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았고 다시 보니 그는 이미 천우진의 어깨에 들려져 있었다.‘이 자식이 이거... 내가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은데 아직도 날 이렇게 괴롭힌다고? 나를 죽이려고 작정한 건가?’ “잘 시간이에요.” 천우진은 심문헌을 큰 침대에 올려놓고 이불을 강제로 덮어주며 위협했다. “얼른 자세요. 자지 않으면 내일 당장 우리 저택에서 쫓아낼 겁니다. 문헌 씨가 다시는 이연 씨를 볼 수 없게 말이에요.”“너 진짜 잔인한 놈이구나!” 심문헌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분노했지만 이내 불만을 품고 눈을 감았다.원래는 조금도 졸리지 않았는데 눈을 감자마자 잠이 밀물처럼 몰려와 고작 10분 만에 심문헌은 스르르 잠들었고 심지어 코도 골았다.천우진은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나왔다.이 사람이 고집이 얼마
다음 날.예수진은 알람이 울리자마자 급히 일어나 하연이 깨나지 않게 알람을 꺼버리고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일어났다.그녀는 다시 잠들면 일어나지 못할까 봐 침대에 감히 더 누워있을 수 없었다.예수진은 일어난 후에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고 변기에 앉아서 최근에 일어난 뉴스를 확인했다.그녀가 휴대폰을 켜자마자 카톡에 읽지 않은 메시지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일반적인 그룹 채팅은 메시지 알림이 꺼져있는데 팝업으로 나오는 메시지는 누군가가 그녀를 찾거나 그룹 채팅의 중요한 정보일 것이다.예수진은 급히 메시지를 확인했고 메시지를 보자마자 그녀는 어리둥절해졌다.그 메시지는 다름 아닌 계지원이 그녀에게 보낸 음성 메시지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한밤중에 이런 메시지를 보내겠는가?하지만 그녀가 자세히 보니 뭔가 이상했다.왜냐하면 메시지는 그녀가 먼저 계지원에게 보냈고 그가 음성 메시지로 회답한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기억했다, 어젯밤에 절대 계지원에게 음성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어제저녁에 술도 마시지 않았으니 절대로 필름이 끊긴 경우일 수도 없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갑자기 하연이 생각났다.잠들기 전에 분명히 하연이 휴대폰을 보고 싶다고 했었다.맙소사.예수진은 순간 긴장해졌다.이 센스쟁이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예수진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계지원에게 보낸 음성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빠, 잘 자요.”예수진은 그 어떤 메시지도 받아들일 각오를 했지만 실제로 듣게 되니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하연이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하기나 할까.도대체 하연이 어떻게 계지원의 카톡을 지정했고 또 그가 하연의 아빠라는 걸 어떻게 알아챈 거지?예수진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켰고 계지원의 음성 메시지도 확인했다.“우리 하연이도 잘 자요.”예수진은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꼈다.계지원의 목소리가 얼마나 느끼하고 오글거리는지 참을 수 없어 그러는 게 아니라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게 미치도록
혼자 술을 마시던 하도경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먼저 나가떨어져 버린 셋을 비웃고 있었다.아무래도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던 사람들이라 주량이 턱없이 약한 것 같았다.알딸딸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도경은 몸은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정신줄은 잡고 있어 다행히 두 발로 걸을 수는 있는 정도였다.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하도경은 예수진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미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같아 그저 밖으로 나갔다.자신이 예수진을 완전히 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처도 무뎌지니 전만큼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온 하도경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술기운까지 더해져 잠에 들려던 찰나, 둘둘씩 짝을 지어 제 앞을 벗어나던 친구들이 떠올랐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씩씩거렸다.여자친구 있는 게 별것도 아닌데 혼자만 없으니 괜히 더 서러운 것 같았다....다음날, 효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진은 원활한 교류를 위해“비밀작전팀”이라는 단톡방을 개설했는데 거기에 소이연과 송문수를 초대하고 아침부터 문자를 쉴 새 없이 보내고 있었다.예수진이 보내온 로맨틱한 프러포즈 장소가 하도 많아 송문수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뭐가 이렇게 많아? 그냥 하나로 통일하면 안 돼? 나 이거 다하다가는 힘들어서 죽어.][누가 다하래? 여기서 고르라고.][조금 복잡하긴 하네요.]송문수가 어이없어하자 소이연이 나서서 정리하기 시작했다.[일단 셋 다 별로인 것부터 빼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로 몇 개만 추려보죠.][난 이연 씨말에 동의, 역시 이연 씨가 나서야 좀 믿음이 간다니까요.][송문수, 너 말 똑바로 안 하면 나 여기 나간다?][아, 미안해. 그놈의 성질 진짜.]예수진 앞에서는 늘 기고 들어가야 했던 송문수는 이번에도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계획 빨리 짜고 프러포즈에 필요한 도구
송문수가 나간 뒤 예수진은 계지원의 얼굴이라도 닦아주려고 수건을 가지러 가려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몸을 일으킨 계지원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수진아.”“깼어? 머리는 안 아파?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안 아파, 나 안 취했어.”걱정스런 아내의 질문에 계지원이 태연하게 답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진짜?”“응.”“그럼 연기였어?”“응.”“친구들 상대로 너무 한 거 아니야 당신?”“내가 취하면 너는 누가 챙겨? 배도 점점 불러오는데.”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계지원에 감동한 예수진은 잔뜩 부른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그럼 나 걱정돼서 그만 마신 거야?”“당연하지, 너 말고 내가 걱정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진 예수진은 큰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말했다.“내가 애만 낳으면 당신이랑 당신 친구들이랑 밤새 같이 술 마셔 줄게.”“...”거실에 남은 송문수와 하도경은 때를 모르고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하지수는 취하기 전에는 그만두지 그들을 알기에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하지만 소이연도 떠나고 예수진도 남편을 돌보러 들어가 버리니 심심했던 그녀는 영화나 찾아볼까 싶어 리모컨을 들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수 씨, 문수 취한 것 같은데요?”이미 테이블에 엎어져 버린 송문수는 그 와중에 하도경의 말을 들은 건지 갑자기 중얼거렸다.“나 안 취했어, 아직 더 마실 수 있다고. 하도경, 내가 오늘 너보다 먼저 취하면 나 이제 송문수가 아니야.”딸꾹질을 하면서도 오기를 부리는 송문수에 하도경이 그를 밀어내며 대꾸했다.“술도 못 마시면서 뭐 날 이긴다고 난리야, 너 한 10년은 연습해야겠다.”“너 나 무시하냐?”하도경의 말에 발끈한 송문수가 제대로 앉아보려 했지만 이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채 눈을 끔뻑이며 술잔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취했어, 이제 그만 가자.”힘겹게 송문수를 일으켜 세우던 하지수는 하도경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도경 씨는
친구인 계지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물어볼 게 있다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일단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해.”“뭔데 그래?”“나 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하려고.”망설임 없이 말하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송문수가 하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를 하다니, 예수진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표정은 왜 그래, 내가 프러포즈한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저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바로 입을 다물며 물었다.“너 진심이야?”“당연하지.”“진짜 지수랑 잘살아 보려고?”“응.”“밖에 나가서 이상한 짓도 안 하고?”도무지 송문수를 믿을 수 없었던 예수진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안 한다니까.”“어떻게 장담하는데.”“어떻게 하면 믿을래?”“남자들이 하는 말은 믿는 게 아니랬어.”제가 무슨 말을 해도 예수진이 믿지 않을 것 같아 송문수는 한숨을 쉬며 큰 용기를 내어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다.“나 감옥에서 나온 뒤로 여자들 만난 적 없어.”“뭐?”“그러니까 지수랑 우연히 한 거 말고는 여자 만져본 적도 없다고.”“진짜?”“내가 뭐하러 널 속여.”“그럼 맹세해, 거짓말하면 평생 남자 구실 못하는 거야.”자꾸 되묻는 것도 슬슬 짜증 나는데 저런 말까지 하는 예수진에 송문수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못하겠어?”“한다 해, 내가 한 말 다 진짜고 만약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난 이제 남자 아니야.”“대박이다, 송문수.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송문수가 맹세를 하자마자 예수진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 좀 도와줘. 전에 지수가 나랑 결혼한 건 지수를 위한 결혼이 아니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지수가 마음에 들어 할만한 결혼식을 하고 싶어.”“진작 그랬어야지.”“나는 이런 쪽엔 워낙 소질이 없잖아, 낭만적인 것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생각 좀 해줘.”송문수는 멋쩍은
“어머, 미리 준비하는 거야?”예수진이 또 장난을 치며 놀리자 하지수도 멋쩍게 웃어 보였다.“지수 씨도 아이 가질 마음 있으면 되도록이면 빨리 가져요.”“네, 그래야죠.”“우리 셋 다 술 못 마시게 됐으니 그냥 물이나 마셔요.”아무것도 마시지 않으면 식사가 제대로 끝난 것 같지 않았던 예수진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올렸다.“우리 다...”다 순산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려 했는데 아직 임신을 하지 않은 하지수 때문에 멈칫하던 예수진은 이내 말을 바꿨다.“우리의 순산을 위하여! 물론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는 지수 아이도 포함이에요.”“다들 원하는 일 다 이루길 기원할게요.”거기에 소이연이 한마디 덧붙이지 예수진은 웃으며 말했다.“역시 배운 사람이라니까요.”“그럼 다들 원하는 거 다 이루고 앞으로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서로의 가장 좋은 친구로 남길 기원하면서 우리 건배 다시 해요!”소이연과 하지수도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그 뒤로 식사 자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는데 소이연, 하지수, 예수진은 진작에 식탁을 벗어났고 술을 마시는 남자들만 거실에서 예능을 보며 떠들고 있었다.오랜만에 봐도 전혀 어색함 없이 수다를 떨어대던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말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서로 번갈아 가며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취하기 전까진 집에 가지 않기로 다들 약속이나 한 건지 그들은 끊임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그 넷 중에 가장 먼저 항복을 외친 건 육현경이었다.얼굴은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개져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아들 육민이 힘겹게 부축하며 나갔다.소이연도 육현경이 그토록 취한 모습은 처음 보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신났을 그를 알기에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아쉬웠다.그가 친구들을 만나 신난 것처럼 소이연도 사실 하지수와 예수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남편이 저렇게 인사불성이 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육민이 육현
“나는 지금 하연이 임신했을 때랑은 완전 달라요.”“성별이 다르면 입덧도 다르다던데.”소이연은 현재 임신 중인 예수진과 아이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그래요?”“가서 검사 안 해봤어요?”“당연히 검사해봤죠.”성격이 급했던 예수진은 진작에 아이의 성별이 궁금해 병원을 찾아갔었다.“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돌려 말하면서 나한테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보여줘요.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정말.”“하하하.”그럴 때마다 예수진의 표정이 얼마나 웃길지 상상하던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들을 원해요 아니면 딸이 더 좋아요?”“당연히 아들이죠.”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하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들이 더 중요하다 그런 거예요 설마?”“제가요? 그 반대죠 완전히. 지원 씨가 딸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매일 둘이 꼭 붙어 있는다니까요. 그거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나도 아들 낳아서 계지원 열 받게 하려고요.”역시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예수진이 웃겨 소이연은 이번에도 웃음을 흘렸다.“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딸 같아요.”“임산부의 촉은 보통 틀리지 않죠.”“또 아빠한테만 달려가겠네요.”“전생에 얼마나 잘 놀았으면 딸을 이렇게 줄줄이 낳아요. 다 키워야겠네.”“무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한마디에 한 번씩 한숨을 쉬며 말하는 예수진에 소이연과 하지수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언니는 배 속의 아기가 남자 같아요 여자 같아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난 다 상관없긴 한데 솔직히 딸이 갖고 싶어요.”“딸은 안돼요. 딸 낳으면 오빠가 계지원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걸요. 오빠랑 언니 둘 다 미모가 이렇게나 출중한데 딸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어요. 오빠가 죽고 못 살죠 아주.”“...”소이연은 예수진의 말이 그다지 신빙성은 없어도 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어쨌든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축하드려요!”제 아내가 또 남사스러운 말을 할까 걱정됐던 계지원은 발 빠르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그래요, 정말 축하해요!”곧이어 다들 축하하자 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육현경을 놀려주었다.“육현경, 아직 안 죽었다? 여행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문수보다 낫네, 문수는 지수 씨랑 저렇게 오래됐어도 아무 소식도 없는데. 너 진짜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입 다물어.”“내 실력 의심하는 거야 지금?”“뭐래.”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하도경의 발언에 송문수는 어이없다는 듯 화를 냈다.“솔로인 너는 나 비웃을 자격 없거든. 나는 결혼이라도 했지 너는 있는 게 뭐야?”“뭐?!”“우리 중에 너만 솔로야. 분발해 하도경.”이미 말문이 막힌 하도경을 향해 송문수가 한마디 더 하자 하도경은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닥치고 마셔, 오늘 내가 너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먹일 거야.”“누가 쓰러질지는 두고 봐야지.”서른 살 넘게 먹은 사람 둘이 아이처럼 싸우는 것도 그들의 일상인지라 그들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때 진정한 예수진이 소이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오빠가 그거 안 하고 했어요?”“네?”“아니, 그렇게 빨리 애 갖고 싶어 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아직 제대로 못 누렸잖아요.”예수진이 알고 있는 육현경은 소이연과의 둘만의 시간을 한 일 년은 더 누려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었기에 아까도 그녀는 소이연이 임신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두세 달밖에 안 됐는데 덜컥 임신을 해버리면 육현경은 만족을 못 할 게 분명한데.한편 이런 질문을 받은 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둘의 신혼여행을 되돌아봤다.사실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소이연은 아무리 급해도 안전조치는 꼭 하는 육현경에 의아해하고 있었다.둘은 합법적인 부부이니 아이가 생긴다 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도 없고 민이도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이 동생을 원한다고 했었는데 왜 굳이 그걸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참지 못하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