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리허설을 망쳐 장혜성에게 혼났던 기억이 떠오른 예수진은 핑계를 대고 화장실을 갔다.예수진은 과음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세수했다.그녀가 한참 만에 화장실 문을 열고나오자, 문 앞에 계지원이 서있었다.예수진은 계지원을 한 번, 그의 지팡이를 한 번 쳐다보다 그가 단순 골절이 아닌 한 쪽 다리를 평생 못 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예수진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계지원이 말을 꺼냈다.“내일 리허설 취소됐어.”“뭐?”“단체 카톡 안 봤어?”“술을 계속 마시느라 보지 못했어. 언제 취소됐어? 왜 취소됐어?”놀란 예수진은 휴대폰을 꺼내면서 계속 물었다.단톡방에는 내일 리허설을 취소하고 앞으로 힘들게 진행될 일정에 다들 컨디션 조절하라는 공지가 와있었다.계지원이 단톡방을 개설한 건 아니어도, 이런 공지를 낼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예수진을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취소했어? 진도가 빠듯하잖아.”“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내일 일어나기 힘드니까.”“...”평소 일을 위해서라면 며칠 동안 술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는 일 중독자인 계지원이 개인적인 일로 일정을 미룬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예수진의 시선에 계지원이 말을 이어나갔다.“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밤을 새워서 술 마시는 건 힘들어.”예수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래도 많이 마시지는 마, 술 마시면 살쪄서 화면에 예쁘게 안 나와.”말을 마친 계지원은 화장실로 들어갔다.예수진은 너무 마른 체형은 아니어도, 애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 없었다.‘지금 나보고 뚱뚱하다는 거야?’예수진이 돌아오자, 하도경과 계속 술을 마신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술에 취해도 이성적인 하지수는 예수진의 기분이 나빠졌다는 걸 눈치챘다.“왜 그래?”예수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술에 취한 하도경은 예수진에게 자연스럽게 말했다.“화나서 엄청 뚱한 표정이잖아, 누가 우리 수진 아가씨를 화나
하도경은 예수진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감정이 격해졌다.“네가 뚱뚱하다고? 약한 널 보면 마음이 아파서 내 살을 떼어주고 싶을 정도야.”둘의 대화에 계지원은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하도경의 말에 예수진은 질색했다.“제발, 사양할게!”“예수진! 연예계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네가 뼈만 남을 정도로 마른다면 난 정말 받아들일 수 없어.”예수진은 어이없었다.“누가 너더러 받아들이래? 관객들만 좋아하면 되지.”“난, 난 관객이 아니야?”“넌 그냥 미미한 존재일 뿐이야.”“내가 너의 든든한 빽이 되어줄게.”“사양할게.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육가희한테나 든든한 빽이 되어줘.”술을 마신 예수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하도경의 얼굴색도 조금 변했다.급변한 분위기에 송문수가 어색함을 풀려고 술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해, 빨리 술 마셔야지.”하도경도 얼른 잔을 들었다.더 이상 육가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그러나 하도경은 아까 예수진의 뚱뚱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서 또 말을 꺼냈다.“예수진, 다이어트 하지 마!”“다이어트 안 해.”“아까 뚱뚱하다며?”“뚱뚱하다고 했지, 다이어트 한다고는 안 했어.”“정말?”“진심이야.”계속 따져 묻던 하도경이 갑자기 한마디 했다.“다른 건 몰라도 넌 살이 더 빠지면 만지는 느낌이 안 좋아.”어이없어하는 예수진을 무시하고, 하도경은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농담이 아니라, 지금 너의 몸매가 딱 좋아.”‘뭐가 딱 좋아? 오해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아줄래?’계속 오해할 수 있는 말을 하는 하도경때문에 그녀는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예수진과 하도경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송문수는 예수진과 육가희의 사이가 안 좋아서 아까 분위기가 어색해진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대화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의혹을 제기했다.“네가 어떻게 알아?”송문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하도경이 말을 더듬었다.“난...그냥
“이제 시작인데 끝날 수 없지! 장소를 안 옮길 거면 여기서 더 시켜서 먹든가, 어차피 오늘 밤 취하지 않으면 다들 못 가!”“하도경...”“내 말에 다들 태클 걸지 마! 가자, 808킹클럽으로!””단호한 하도경은 의견도 묻지도 않고, 네 사람을 끌고 클럽으로 향했다.하도경의 강요에 모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예수진이 중도에 집을 갈 거라 여긴 하도경은 그녀와 계지원을 끌고 한 차에 탔고, 송문수와 하지수는 다른 차에 탔다.몇 번이나 가겠다고 하는 예수진을 하도경이 끝까지 잡자, 그녀는 오늘 밤 무조건 술로 하도경을 꺾어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다른 차 안에서는 송문수와 하지수가 뒷자석에 어색하게 떨어져 앉았다.불도 안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송문수가 창밖을 내다보다 불쑥 말했다.“먼저 데려다줄게.”송씨 가문을 나왔어도 둘 사이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송문수는 그녀가 아무리 먼저 호의를 표해도 다가갈 기회조차 안 줬다.송문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무뚝뚝한 그의 뒤통수를 보았다.“너도 집 가려고?”“아니, 내가 가면 도경이가 날 죽일 거야.”송문수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고, 하지수가 말했다.“내일 출근 안 해도 되니까, 오늘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송문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두 대의 승용차가 모두 클럽에 도착하고 다섯 사람은 함께 들어갔다.클럽에 들어서자,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다들 술을 더 심하게 마셔댔다.특히 아까는 리허설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 술을 마시지 않겠다던 예수진이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하도경도 분위기에 취해 연거푸 예수진과 세잔이나 원샷을 하고도 부족한 듯 계속 술잔을 들며 건배를 했다.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었다.예수진은 계속되는 술에 아직 만취는 아니었지만,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취한 건 사실이었다.하도경 한 명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송문수도 술에 취해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도경과 예수진이 술을 다 마시자, 송문수도 예수진을 향해 술잔을 들었다.송문수가 고의로 그녀를 향해 술잔을 든 게 분명했다.예수진은 그런 송문수를 보면서 하지수가 아깝다고 느꼈다.예수진의 주량으로 술을 엄청 잘 마시는 송문수까지 상대하기에는 버겁다는 걸 아는 하지수는 하도경을 부르며 술잔을 들었다.“하도경, 우리가 언제 이렇게 마셔보겠어. 오늘 진탕 마시고 앞으로 법률 상담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그런 소리 하지 마! 난 영원히 법률 상담 받을 일이 없었으면 해.”이런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셔본 적이 없는 하지수가 어렵게 꺼낸 말을 하도경이 맞장구쳐주지 않자,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하지수가 난처해하는 걸 느낀 예수진이 하도경을 불렀다.“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빨리 술 마셔! 여자가 주동적으로 술 마시자니까 두려운 거야? 왜 자꾸 시간을 끄는데.”“그래, 마셔!”하도경은 예수진의 도발에 잔을 들어 원샷했다.그걸 본 하지수도 망설이지 않고 시원하게 원샷했다.이렇게 쉴 새 없이 한두 시간을 마시자, 네 사람은 술에 흠뻑 취했고 계지원은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고 조용히 그들이 마시는 걸 지켜봤다.송문수의 주량에 견디지 못한 예수진이 화장실로 가서 토했다.예수진은 문득 자기를 도와주느라 술을 꽤 마신 하지수의 상태가 걱정되었다.그녀는 토한 후 입을 헹구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말했다.“하도경, 오늘 너 죽고 나 죽자!”술을 많이 마셔서 자제력이 없는 상태인 게 분명했다.“수진아.”계지원이 화장실 앞에서 예수진의 팔뚝을 잡아끌었다.“늦었어, 내가 데려다줄게.”“돌아가서 뭐 해?”술에 취한 예수진이 힘껏 계지원을 밀치자, 그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계지원이 서둘러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지 않았더라면 예수진 앞에서 크게 망신을 당할 수도 있었다.뒤이어 예수진이 계지원을 보면서 물었다.“너 불구야?”“응.”계지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예수진은 그의 다리를 노려보면서 직설적으로
예수진은 궁금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진짜 감각이 없어?”흐릿한 조명 덕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계지원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여긴 감각이 있어.”“그러니까 여기 아래부터 감각이 없다는 거네.”말을 하면서 예수진은 계속 계지원의 몸을 만졌다.몸이 굳어진 계지원은 지금 움직여야 할지, 움직이지 말아야 할지 고민됐다.예수진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취한 게 분명했다.속이 뒤집혀 참을 수 없던 하지수가 토하려고 화장실로 왔다가 두 사람의 광경을 보고 놀랐다.“수...수진아?”하지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예수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지수야, 너도 와서 좀 놀아볼래?”“...”“계지원이 불구래, 여기 밑부터는 감각이 없대! 너도 만져볼래?”예수진이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계지원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하지수도 놀라서 허둥지둥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로 들어 온 하지수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술 때문이지 아니면 아까 예수진의 황당한 말 때문인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하지수는 문득 지난번에도 술에 취한 예수진이 육현경에게 향을 피우겠다고 난리 치다가 산을 통째로 태울 뻔하고 오늘은 계지원한테 무례한 행동까지 하자, 걱정되는 한편 술에 취하면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화장실 밖에서는 계지원이 예수진의 손을 잡아 그의 몸에서 떼어냈다.예수진은 허벅지 한 번 만졌다고 화가 난 계지원이 속 좁아 보였다.계지원은 화를 꾹 참으며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예수진...”“웁!”속이 또 울렁거리기 시작한 예수진은 계지원을 밀쳐내고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화장실 안에서 나란히 토하다 눈을 마주친 예수진과 하지수는 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동시에 웃었다.뒤이어 화장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계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 나와, 내가 데려다줄게.”속이 괜찮아진 예수진과 하지수는 화장실을 나서며 입을 모아 말했다.“아직 마실 수 있어!
계지원은 술 마시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른 예수진과 하지수를 말리고 싶었다.사실 하도경과 송문수도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다.계지원은 제정신이 아닌 네 사람을 보고 진절머리가 났다.주최자인 하도경이 떠나면, 다른 사람들도 순순히 집으로 갈 것 같아 계지원은 한숨을 쉬고 육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육가희는 30분도 안 되어 클럽에 도착했다.방 안을 한 번 둘러본 그녀는 하도경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다 모여있는 자리에 예수진도 같이 있는데 자기만 빠져있어 몹시 언짢았다.육가희를 발견한 계지원이 그녀를 불렀다.“가희야.”육가희는 계지원을 제외하고 다들 술에 취했다는 걸 파악하고 불쾌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계지원에게로 다가갔다.평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파악하는 계지원이기에 지금 육가희가 언짢다는 걸 눈치채고 설명했다.“오늘 도경이가 나랑 문수를 불러서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나 같이 먹게 된 거야.”“네.” 육가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기분이 언짢아도 예수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없는 육가희였지만, 계지원이 모든 걸 파악한 듯 말하자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계지원이 다시 말했다.“오늘 도경이가 술을 많이 마셨어, 네가 데려가지 않으면 오늘 그 누구도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 다들 나이도 있는데 이렇게 마시다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네, 알겠어요.”짧게 답한 육가희가 하도경쪽으로 가려다 계지원에게 물었다.“삼촌은 취한 거 아니죠?”“난 별로 안 마셨어.”계지원이 술이 약하다는 걸 알기에 웬만해서는 억지로 그에게 술을 주지 않았다.“삼촌은 누구 데려다줘요?”계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삼촌, 어른들 일에 어린 제가 참견할 건 아니지만, 우리 엄마의 마음도 알아주면 좋겠어요. 몇 년 동안 사랑하는 가족들을 많이 잃은 힘든 상황에서 엄마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삼촌과 멀어지고 싶지 않대요.”육가희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수진 씨 데려다줄게요.”
“가희 씨가 어떻게 왔어요? 끄억!”트림을 크게 한 하도경에게서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육가희는 예전에 단역을 할 때 회식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지만, 그녀가 육씨 가문의 손녀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았고, 평소 술에 관심이 없는 그녀였기에 이 술자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화가 난 육가희가 하도경에게 말했다.“도경 씨, 내가 당신이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많이 마신 거예요?”하도경은 환하게 웃었다.“오늘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많이 마신 거예요. 앞으로는 조금만 마실게요.”“어서 가요.”육가희가 하도경의 팔을 잡아끌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하도경이 단호하게 말했다.“아직 다 안 마셨어요. 오늘 수진이가 항복하지 않으면 난 죽어도 먼저 못 가요!”육가희가 하도경을 몇 번 더 세게 잡아당겨 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늘 끝까지 수진 씨랑 술을 마시겠다는 거야?’육가희는 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예수진을 바라보았다.예수진도 술을 많이 마셨는지 눈빛이 흐릿해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육가희는 예수진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수진 씨, 앞으로 도경 씨랑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경 씨가 술에 취하면 괴롭거든요.”기분이 상한 예수진도 지지 않고 말했다.“이런 말은 나한테 말고 도경이한테 해야죠, 그리고 누구랑 술을 마시던 그건 도경이 자유죠, 가희 씨가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예수진은 진심으로 하도경과 육가희가 잘되기를 바랐지만, 육가희의 기분 나쁜 말투와 술기운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참지 않고 말을 내뱉어 버렸다.육가희는 사실 아직 말도 몇 번 대화를 해본 적 없는 예수진이 이렇게 세게 나오자, 기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육가희는 최근 라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차분하고 유유자적한 성격의 예수진과는 거리가 먼 모습에 그녀가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한 게 아닌지 의심했고 그녀가 계지원과 하도경 앞에서 일
예수진은 하지수의 말에 어이없었다.“난 네 남편이 아니야.”예수진도 마지막 정신 줄을 잡고 다시 한번 하지수를 불렀다.“지수야, 가자.”하지수가 일어나려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고 했다.하지만 예수진이 혼자서 술에 취한 그녀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그 순간 옆에 앉아있던 송문수가 갑자기 손을 뻗어 하지수를 잡아주면서 말했다.“우리 먼저 갈게.”그러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하지수의 손을 잡아끌고 클럽을 나갔다.송문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예수진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 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세웠다.“넌 내가 데려다줄게.”예수진은 확고한 태도로 말했다.“괜찮아, 난 지수랑 가면 돼.”“그건 안 돼.”“왜?”“지수는 문수가 데려다줄 거야.”그 말에 흥분한 예수진이 되물었다.“걔가 데려다주면 어떡해?”“부부잖아.”“근데...”“두 사람 본가에서 나와 단둘이 살고 있어.”“그래?”“그러니까 아까 네가 지수를 데려다주겠다고 한 건 쓸데없는 짓이야.”계지원의 말에 예수진은 할 말을 잃었다.“지수가 문수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넌 안 보여? 더 이상 두 사람 사이 방해하지 마.”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지원의 예수진의 팔을 잡아끌었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술기운과 계지원의 충격적인 말에 어지러워진 예수진은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결국 다들 가고 하도경과 육가희만 남았다.술에 취한 하도경은 계속 더 마시겠다고 난리 쳤다.육가희도 이 정도로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하도경의 모습은 처음이었다.그녀가 아무리 하도경을 잡아끌려고 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결국 육가희가 다시 말했다.“도경 씨, 정신 차려봐요! 다들 갔으니까, 우리도 돌아가야죠.”눈에 초첨도 없는 하도경이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물었다.“예수진도 갔어?”아직도 예수진의 이름을 부르는 하도경때문에 육가희의 기분은 더 언짢아졌다.“갔어요.”하도경이 중얼거렸다.“지원이랑 갔어?”술에 취한 하도경이 이 일을 기억할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