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은 궁금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시 물었다.“진짜 감각이 없어?”흐릿한 조명 덕에 눈에 띄지 않았지만, 계지원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여긴 감각이 있어.”“그러니까 여기 아래부터 감각이 없다는 거네.”말을 하면서 예수진은 계속 계지원의 몸을 만졌다.몸이 굳어진 계지원은 지금 움직여야 할지, 움직이지 말아야 할지 고민됐다.예수진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취한 게 분명했다.속이 뒤집혀 참을 수 없던 하지수가 토하려고 화장실로 왔다가 두 사람의 광경을 보고 놀랐다.“수...수진아?”하지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예수진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지수야, 너도 와서 좀 놀아볼래?”“...”“계지원이 불구래, 여기 밑부터는 감각이 없대! 너도 만져볼래?”예수진이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계지원의 얼굴이 누렇게 변했고 하지수도 놀라서 허둥지둥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로 들어 온 하지수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봤다.술 때문이지 아니면 아까 예수진의 황당한 말 때문인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하지수는 문득 지난번에도 술에 취한 예수진이 육현경에게 향을 피우겠다고 난리 치다가 산을 통째로 태울 뻔하고 오늘은 계지원한테 무례한 행동까지 하자, 걱정되는 한편 술에 취하면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화장실 밖에서는 계지원이 예수진의 손을 잡아 그의 몸에서 떼어냈다.예수진은 허벅지 한 번 만졌다고 화가 난 계지원이 속 좁아 보였다.계지원은 화를 꾹 참으며 그녀의 귓가에 다가가 말했다.“예수진...”“웁!”속이 또 울렁거리기 시작한 예수진은 계지원을 밀쳐내고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화장실 안에서 나란히 토하다 눈을 마주친 예수진과 하지수는 마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동시에 웃었다.뒤이어 화장실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계지원의 목소리가 들렸다.“괜찮아? 나와, 내가 데려다줄게.”속이 괜찮아진 예수진과 하지수는 화장실을 나서며 입을 모아 말했다.“아직 마실 수 있어!
계지원은 술 마시려는 의지가 활활 타오른 예수진과 하지수를 말리고 싶었다.사실 하도경과 송문수도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다.계지원은 제정신이 아닌 네 사람을 보고 진절머리가 났다.주최자인 하도경이 떠나면, 다른 사람들도 순순히 집으로 갈 것 같아 계지원은 한숨을 쉬고 육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육가희는 30분도 안 되어 클럽에 도착했다.방 안을 한 번 둘러본 그녀는 하도경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다 모여있는 자리에 예수진도 같이 있는데 자기만 빠져있어 몹시 언짢았다.육가희를 발견한 계지원이 그녀를 불렀다.“가희야.”육가희는 계지원을 제외하고 다들 술에 취했다는 걸 파악하고 불쾌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계지원에게로 다가갔다.평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파악하는 계지원이기에 지금 육가희가 언짢다는 걸 눈치채고 설명했다.“오늘 도경이가 나랑 문수를 불러서 저녁을 먹자고 했는데 우연히 두 사람을 만나 같이 먹게 된 거야.”“네.” 육가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무리 기분이 언짢아도 예수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 적이 없는 육가희였지만, 계지원이 모든 걸 파악한 듯 말하자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계지원이 다시 말했다.“오늘 도경이가 술을 많이 마셨어, 네가 데려가지 않으면 오늘 그 누구도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어. 다들 나이도 있는데 이렇게 마시다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네, 알겠어요.”짧게 답한 육가희가 하도경쪽으로 가려다 계지원에게 물었다.“삼촌은 취한 거 아니죠?”“난 별로 안 마셨어.”계지원이 술이 약하다는 걸 알기에 웬만해서는 억지로 그에게 술을 주지 않았다.“삼촌은 누구 데려다줘요?”계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삼촌, 어른들 일에 어린 제가 참견할 건 아니지만, 우리 엄마의 마음도 알아주면 좋겠어요. 몇 년 동안 사랑하는 가족들을 많이 잃은 힘든 상황에서 엄마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삼촌과 멀어지고 싶지 않대요.”육가희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제가 수진 씨 데려다줄게요.”
“가희 씨가 어떻게 왔어요? 끄억!”트림을 크게 한 하도경에게서 진한 술 냄새가 풍겼다.육가희는 예전에 단역을 할 때 회식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지만, 그녀가 육씨 가문의 손녀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그 누구도 그녀에게 술을 강요하지 않았고, 평소 술에 관심이 없는 그녀였기에 이 술자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화가 난 육가희가 하도경에게 말했다.“도경 씨, 내가 당신이 술 마시는 걸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많이 마신 거예요?”하도경은 환하게 웃었다.“오늘 모처럼 기분이 좋아서 많이 마신 거예요. 앞으로는 조금만 마실게요.”“어서 가요.”육가희가 하도경의 팔을 잡아끌면서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술에 취한 하도경이 단호하게 말했다.“아직 다 안 마셨어요. 오늘 수진이가 항복하지 않으면 난 죽어도 먼저 못 가요!”육가희가 하도경을 몇 번 더 세게 잡아당겨 봤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늘 끝까지 수진 씨랑 술을 마시겠다는 거야?’육가희는 생각을 멈추고 시선을 돌려 예수진을 바라보았다.예수진도 술을 많이 마셨는지 눈빛이 흐릿해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육가희는 예수진을 매섭게 노려보면서 말했다“수진 씨, 앞으로 도경 씨랑 술을 마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도경 씨가 술에 취하면 괴롭거든요.”기분이 상한 예수진도 지지 않고 말했다.“이런 말은 나한테 말고 도경이한테 해야죠, 그리고 누구랑 술을 마시던 그건 도경이 자유죠, 가희 씨가 말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을까요?”예수진은 진심으로 하도경과 육가희가 잘되기를 바랐지만, 육가희의 기분 나쁜 말투와 술기운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참지 않고 말을 내뱉어 버렸다.육가희는 사실 아직 말도 몇 번 대화를 해본 적 없는 예수진이 이렇게 세게 나오자, 기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육가희는 최근 라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차분하고 유유자적한 성격의 예수진과는 거리가 먼 모습에 그녀가 프로그램에서 연기를 한 게 아닌지 의심했고 그녀가 계지원과 하도경 앞에서 일
예수진은 하지수의 말에 어이없었다.“난 네 남편이 아니야.”예수진도 마지막 정신 줄을 잡고 다시 한번 하지수를 불렀다.“지수야, 가자.”하지수가 일어나려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려고 했다.하지만 예수진이 혼자서 술에 취한 그녀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그 순간 옆에 앉아있던 송문수가 갑자기 손을 뻗어 하지수를 잡아주면서 말했다.“우리 먼저 갈게.”그러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하지수의 손을 잡아끌고 클럽을 나갔다.송문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예수진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 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 세웠다.“넌 내가 데려다줄게.”예수진은 확고한 태도로 말했다.“괜찮아, 난 지수랑 가면 돼.”“그건 안 돼.”“왜?”“지수는 문수가 데려다줄 거야.”그 말에 흥분한 예수진이 되물었다.“걔가 데려다주면 어떡해?”“부부잖아.”“근데...”“두 사람 본가에서 나와 단둘이 살고 있어.”“그래?”“그러니까 아까 네가 지수를 데려다주겠다고 한 건 쓸데없는 짓이야.”계지원의 말에 예수진은 할 말을 잃었다.“지수가 문수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게 넌 안 보여? 더 이상 두 사람 사이 방해하지 마.”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지원의 예수진의 팔을 잡아끌었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술기운과 계지원의 충격적인 말에 어지러워진 예수진은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결국 다들 가고 하도경과 육가희만 남았다.술에 취한 하도경은 계속 더 마시겠다고 난리 쳤다.육가희도 이 정도로 취해서 인사불성이 된 하도경의 모습은 처음이었다.그녀가 아무리 하도경을 잡아끌려고 해도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결국 육가희가 다시 말했다.“도경 씨, 정신 차려봐요! 다들 갔으니까, 우리도 돌아가야죠.”눈에 초첨도 없는 하도경이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물었다.“예수진도 갔어?”아직도 예수진의 이름을 부르는 하도경때문에 육가희의 기분은 더 언짢아졌다.“갔어요.”하도경이 중얼거렸다.“지원이랑 갔어?”술에 취한 하도경이 이 일을 기억할
그 순간 하도경이 충격적인 말을 했다.“예수진, 나 마음 아파...”멍해진 육가희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곧이어 두 사람 사이가 결코 평범한 친구가 아니라는 걸 느꼈다.육가희는 어이없어 웃음밖에 안 나왔다.‘그래서 자주 예수진의 이름을 불렀던 거야?’...차를 탄 예수진은 계지원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차에 기대어 앉아있다가 내려오는 눈꺼풀을 견디지 못하고 잠이 들어버렸다.술에 취하면 자는 게 예수진의 술버릇이기도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예수진의 집 부근에 도착했다.계지원이 깊게 잠이 든 그녀를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계지원은 머뭇거리다 기사한테 트렁크에 있는 휠체어를 꺼내달라고 부탁했다.휠체어에 탄 계지원이 예수진쪽의 차 문을 열자, 그녀가 힘없이 쓰러졌다.계지원이 놀라서 재빨리 그녀를 안아 들었다.아무리 큰 움직임에도 예수진이 계속 깨나지 않자, 계지원은 그녀를 다리에 올려놓고, 그녀의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아파트 앞까지 전동 휠체어를 끌고 왔다.예수진의 정확한 집 주소를 모르는 계지원은 할 수 없이 그녀를 깨웠다.예수진도 불편한 자세 때문인지 계지원의 품에서 뒤척였다.“수진아, 집 주소 뭐야?”예수진은 몇 개의 숫자를 중얼거리고는 또다시 잠에 들었다.계지원도 더 이상 예수진의 달콤한 잠을 깨고 싶지 않은지 등을 토닥여 주었다.예수진이 말한 주소대로 계지원은 한 집 문 앞에 도착했고 비밀번호에 그녀의 생일을 입력하자, 문이 너무 쉽게 열렸다.예수진을 안고 집 안으로 들어온 계지원은 문 앞에서 그림자를 보고 놀랐다.상대방도 놀랐는지 비명을 질렀다.갑작스러운 비명에 놀란 예수진이 어리둥절하면서 눈을 떴다.“무슨 일이야?”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가연이였다.평소 전등을 켜지 않는 습관이 있는 가연은 현관문이 열리고 희미한 불 빛 아래 두 사람의 실루엣이 보이자, 놀란 마음에 비명을 지른 거였다.가연은 넋을 잃고 앞에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다 계지원을 알아보고는 그를 불렀다
예수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정신이 번쩍 든 하연이 큰 눈을 뜨며 그녀를 보았다.“엄마, 나 방금 아빠 봤어요?”“아니야.”하연은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밖에 있잖아요, 나 아빠한테 인사할래요.”“그 아저씨는 하연이 아빠가 아니야.”“아니에요, 아빠가 날 보러 온 거잖아요.”말을 마친 하연은 내심 기뻤다.하지만 예수진은 높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하연아, 엄마가 말했잖아. 그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라고.”예수진은 가뜩이나 술에 취해 컨디션이 안 좋은 데다가 하연이까지 난리 치니 머리가 아파 났다.엄마의 단호한 말투에 하연이의 작은 얼굴에는 금방 억울함이 서렸다.“엄마 나빠요!”예수진은 더욱 못 되게 말했다.“맞아, 엄마가 제일 나빴어! 얼른 자, 안 자면 하연이 엉덩이 때릴 거야.”하연이는 할 수 없이 고분고분 침대로 올라갔지만, 자꾸만 머릿속으로는 자기를 보러 온 아빠를 엄마 때문에 못 본다는 생각을 하니 엄마가 더욱 미워졌다.예수진은 하연이의 침대 옆에 멍하니 앉아 계지원이 빨리 이 집에서 나가기를, 그가 하연이를 보지 못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그녀는 계지원에게 하연이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그더러 책임지라고 할 생각은 더욱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가연이가 하연이의 방으로 들어와 예수진에게 한마디 했다.“지원 씨 갔어, 떠날 때 숙취에 좋다고 너더러 꿀물 타서 마시래.”“네.”예수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떠날 때 다른 말은 안 했죠?”가연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예수진이 또 물었다.“혹시 하연이에 관해서 물었어요?”가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어두워서 못 봤을 수도 있지.”그제야 예수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어서 자, 술도 마셨으니 일찍 자야지. 꿀물은 네 방에 놔뒀어.”“네, 고마워요.”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계속 가연이와 거리를 두는 예수진이의 말과 행동에 그녀는 그냥 미소를 짓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얼마 뒤 예수진도 목욕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계지원이 하연이를 봤을 수도
갑작스러운 예수진의 전화에 소이연이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아니요, 방금 술 마셨더니 잠이 안 와서 연락했어요.”“누구랑 술 마셨어요?”“지수랑요.”소이연은 의심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단둘이 마셨어요?”“아니요, 하도경 일행들을 우연히 만나서 같이 마셨어요.”“하도경 일행들이라면 계지원도 있었다는 거네요.”예수진은 소이연 앞에서 무슨 일이든 숨길 수가 없었다.“저랑 계지원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당황한 예수진이 큰 반응을 보이며 극구 부인하자, 소이연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저도 별다른 뜻 없이 말한 거예요, 요즘 수진 씨 나온 예능 잘 보고 있어요.”“그래요? 저 괜찮았어요?”소이연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엄청 잘하던데요! 역시 지원 씨가 눈썰미는 있어요.”소이연이 계지원의 칭찬을 하자, 예수진은 못 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소이연은 계지원에 대한 칭찬을 계속 늘어놓았다.“첫 무대부터 그 후 모든 경기까지 꿋꿋이 수진 씨를 믿고 밀어줬잖아요. 암튼 지원 씨 안목은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매번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거겠죠?”시무룩해진 예수진이 말했다.“지금 누구를 칭찬하는지 모르겠네요.”소이연이 그런 예수진이 귀여운 지 웃으며 말했다.“둘 다 칭찬하는 거죠, 그런데 요즘 지원 씨랑 자주 만나는 것 같은데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 없어요?”예수진은 단호하게 답했다.“아니요.”“사실 그때 지원 씨가 수진 씨를 떠난 건...”“엄마!”소이연은 전화 너머로 갑자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자 물었다.“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갑작스러운 하연이의 부름에 놀란 예수진이 얼른 둘러댔다.“티비 소리예요! 대사를 봐야 한다는 걸 까먹었네요, 다음에 다시 통화해요.”소이연은 갑자기 부랴부랴 전화를 끊는 예수진이 수상하다고 느꼈다.예수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연이한테 물었다.“하연아, 한밤중에 안 자고 엄마한테 왜 왔어?”“오늘은 엄마랑 같이 자고 싶어요.”“엄마
예수진은 하연이를 재우고 통통한 볼에 입을 맞췄다.‘다행이야, 지원이를 안 닮아서.’생각을 마친 예수진도 잠에 들었다.다음날,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예수진은 눈도 뜨지 못한 상태에서 전화를 찾았다.그런 그녀를 보던 하연이가 전화를 찾아서 건네줬다.예수진은 귀여운 하연이에게 뽀뽀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지수야, 아침부터 웬일이야?”“아침이라니? 지금 오전 11시야, 곧 점심이라고!”“...”예수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하지만 하연이가 옷까지 다 갈아입은 걸 보니 하지수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전화 너머로 하지수가 물었다.“어젯밤에 나한테 왜 전화했어? 배터리가 없어서 못 받았어.”“내가 너한테 전화했었다고?”예수진은 그제야 어젯밤 하지수가 전화를 안 받아 소이연과 통화한 것이 생각났다.하지수가 어이없어서 되물었다.“너 어젯밤에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나한테 전화한 것도 기억 안 나?”“넌 적게 마신 것처럼 말하네, 어제 송문수한테 여보라고 했던 거 기억나?”“그래?”예수진의 말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졌다.하지수는 어젯밤 알딸딸한 상황에서 누구한테 안겨서 집에 돌아온 것 같았지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하지수도 당할 수 없다는 듯 어젯밤 있었던 일을 말했다.“넌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나?”“내가 뭐했는데?”“네가 지원이를 추행했어.”“내가? 그럴 리가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예수진은 계지원을 피해 다니기도 바쁜 상황에 자기가 먼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에 믿을 수 없었다.‘어젯밤 내가 잠이 들어서 지원이한테 안겨서 집까지 온 건 맞지만, 난 결코 아무 짓도 안 했어!’예수진이 부정하자, 하지수가 다시 그녀를 떠보았다.“네가 아무런 음흉한 짓도 안 했다고?”“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어떻게 기억나.”“네가 어제 지원이 거기를 만지면서 그 아래부터 감각이 없다고 했잖아.”하지수의 충격적인 말에 예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하지수는 계속 말했다.“나보고 같이 지원이 몸 만
“나는 지금 하연이 임신했을 때랑은 완전 달라요.”“성별이 다르면 입덧도 다르다던데.”소이연은 현재 임신 중인 예수진과 아이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그래요?”“가서 검사 안 해봤어요?”“당연히 검사해봤죠.”성격이 급했던 예수진은 진작에 아이의 성별이 궁금해 병원을 찾아갔었다.“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돌려 말하면서 나한테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보여줘요.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정말.”“하하하.”그럴 때마다 예수진의 표정이 얼마나 웃길지 상상하던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들을 원해요 아니면 딸이 더 좋아요?”“당연히 아들이죠.”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하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들이 더 중요하다 그런 거예요 설마?”“제가요? 그 반대죠 완전히. 지원 씨가 딸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매일 둘이 꼭 붙어 있는다니까요. 그거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나도 아들 낳아서 계지원 열 받게 하려고요.”역시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예수진이 웃겨 소이연은 이번에도 웃음을 흘렸다.“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딸 같아요.”“임산부의 촉은 보통 틀리지 않죠.”“또 아빠한테만 달려가겠네요.”“전생에 얼마나 잘 놀았으면 딸을 이렇게 줄줄이 낳아요. 다 키워야겠네.”“무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한마디에 한 번씩 한숨을 쉬며 말하는 예수진에 소이연과 하지수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언니는 배 속의 아기가 남자 같아요 여자 같아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난 다 상관없긴 한데 솔직히 딸이 갖고 싶어요.”“딸은 안돼요. 딸 낳으면 오빠가 계지원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걸요. 오빠랑 언니 둘 다 미모가 이렇게나 출중한데 딸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어요. 오빠가 죽고 못 살죠 아주.”“...”소이연은 예수진의 말이 그다지 신빙성은 없어도 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어쨌든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축하드려요!”제 아내가 또 남사스러운 말을 할까 걱정됐던 계지원은 발 빠르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그래요, 정말 축하해요!”곧이어 다들 축하하자 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육현경을 놀려주었다.“육현경, 아직 안 죽었다? 여행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문수보다 낫네, 문수는 지수 씨랑 저렇게 오래됐어도 아무 소식도 없는데. 너 진짜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입 다물어.”“내 실력 의심하는 거야 지금?”“뭐래.”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하도경의 발언에 송문수는 어이없다는 듯 화를 냈다.“솔로인 너는 나 비웃을 자격 없거든. 나는 결혼이라도 했지 너는 있는 게 뭐야?”“뭐?!”“우리 중에 너만 솔로야. 분발해 하도경.”이미 말문이 막힌 하도경을 향해 송문수가 한마디 더 하자 하도경은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닥치고 마셔, 오늘 내가 너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먹일 거야.”“누가 쓰러질지는 두고 봐야지.”서른 살 넘게 먹은 사람 둘이 아이처럼 싸우는 것도 그들의 일상인지라 그들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때 진정한 예수진이 소이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오빠가 그거 안 하고 했어요?”“네?”“아니, 그렇게 빨리 애 갖고 싶어 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아직 제대로 못 누렸잖아요.”예수진이 알고 있는 육현경은 소이연과의 둘만의 시간을 한 일 년은 더 누려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었기에 아까도 그녀는 소이연이 임신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두세 달밖에 안 됐는데 덜컥 임신을 해버리면 육현경은 만족을 못 할 게 분명한데.한편 이런 질문을 받은 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둘의 신혼여행을 되돌아봤다.사실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소이연은 아무리 급해도 안전조치는 꼭 하는 육현경에 의아해하고 있었다.둘은 합법적인 부부이니 아이가 생긴다 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도 없고 민이도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이 동생을 원한다고 했었는데 왜 굳이 그걸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참지 못하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