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정신이 번쩍 든 하연이 큰 눈을 뜨며 그녀를 보았다.“엄마, 나 방금 아빠 봤어요?”“아니야.”하연은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밖에 있잖아요, 나 아빠한테 인사할래요.”“그 아저씨는 하연이 아빠가 아니야.”“아니에요, 아빠가 날 보러 온 거잖아요.”말을 마친 하연은 내심 기뻤다.하지만 예수진은 높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하연아, 엄마가 말했잖아. 그 아저씨는 아빠가 아니라고.”예수진은 가뜩이나 술에 취해 컨디션이 안 좋은 데다가 하연이까지 난리 치니 머리가 아파 났다.엄마의 단호한 말투에 하연이의 작은 얼굴에는 금방 억울함이 서렸다.“엄마 나빠요!”예수진은 더욱 못 되게 말했다.“맞아, 엄마가 제일 나빴어! 얼른 자, 안 자면 하연이 엉덩이 때릴 거야.”하연이는 할 수 없이 고분고분 침대로 올라갔지만, 자꾸만 머릿속으로는 자기를 보러 온 아빠를 엄마 때문에 못 본다는 생각을 하니 엄마가 더욱 미워졌다.예수진은 하연이의 침대 옆에 멍하니 앉아 계지원이 빨리 이 집에서 나가기를, 그가 하연이를 보지 못했기를 기도할 뿐이었다.그녀는 계지원에게 하연이의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그더러 책임지라고 할 생각은 더욱 없었다.얼마나 지났을까, 가연이가 하연이의 방으로 들어와 예수진에게 한마디 했다.“지원 씨 갔어, 떠날 때 숙취에 좋다고 너더러 꿀물 타서 마시래.”“네.”예수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떠날 때 다른 말은 안 했죠?”가연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예수진이 또 물었다.“혹시 하연이에 관해서 물었어요?”가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어두워서 못 봤을 수도 있지.”그제야 예수진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어서 자, 술도 마셨으니 일찍 자야지. 꿀물은 네 방에 놔뒀어.”“네, 고마워요.”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계속 가연이와 거리를 두는 예수진이의 말과 행동에 그녀는 그냥 미소를 짓고 자기 방으로 향했다.얼마 뒤 예수진도 목욕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계지원이 하연이를 봤을 수도
갑작스러운 예수진의 전화에 소이연이 물었다.“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아니요, 방금 술 마셨더니 잠이 안 와서 연락했어요.”“누구랑 술 마셨어요?”“지수랑요.”소이연은 의심스러운 듯 다시 물었다.“단둘이 마셨어요?”“아니요, 하도경 일행들을 우연히 만나서 같이 마셨어요.”“하도경 일행들이라면 계지원도 있었다는 거네요.”예수진은 소이연 앞에서 무슨 일이든 숨길 수가 없었다.“저랑 계지원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당황한 예수진이 큰 반응을 보이며 극구 부인하자, 소이연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저도 별다른 뜻 없이 말한 거예요, 요즘 수진 씨 나온 예능 잘 보고 있어요.”“그래요? 저 괜찮았어요?”소이연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엄청 잘하던데요! 역시 지원 씨가 눈썰미는 있어요.”소이연이 계지원의 칭찬을 하자, 예수진은 못 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소이연은 계지원에 대한 칭찬을 계속 늘어놓았다.“첫 무대부터 그 후 모든 경기까지 꿋꿋이 수진 씨를 믿고 밀어줬잖아요. 암튼 지원 씨 안목은 인정해 줘야 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매번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거겠죠?”시무룩해진 예수진이 말했다.“지금 누구를 칭찬하는지 모르겠네요.”소이연이 그런 예수진이 귀여운 지 웃으며 말했다.“둘 다 칭찬하는 거죠, 그런데 요즘 지원 씨랑 자주 만나는 것 같은데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 없어요?”예수진은 단호하게 답했다.“아니요.”“사실 그때 지원 씨가 수진 씨를 떠난 건...”“엄마!”소이연은 전화 너머로 갑자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자 물었다.“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요?”갑작스러운 하연이의 부름에 놀란 예수진이 얼른 둘러댔다.“티비 소리예요! 대사를 봐야 한다는 걸 까먹었네요, 다음에 다시 통화해요.”소이연은 갑자기 부랴부랴 전화를 끊는 예수진이 수상하다고 느꼈다.예수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연이한테 물었다.“하연아, 한밤중에 안 자고 엄마한테 왜 왔어?”“오늘은 엄마랑 같이 자고 싶어요.”“엄마
예수진은 하연이를 재우고 통통한 볼에 입을 맞췄다.‘다행이야, 지원이를 안 닮아서.’생각을 마친 예수진도 잠에 들었다.다음날,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깬 예수진은 눈도 뜨지 못한 상태에서 전화를 찾았다.그런 그녀를 보던 하연이가 전화를 찾아서 건네줬다.예수진은 귀여운 하연이에게 뽀뽀를 하고 전화를 받았다.“지수야, 아침부터 웬일이야?”“아침이라니? 지금 오전 11시야, 곧 점심이라고!”“...”예수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하지만 하연이가 옷까지 다 갈아입은 걸 보니 하지수의 말을 믿을 수 있었다.전화 너머로 하지수가 물었다.“어젯밤에 나한테 왜 전화했어? 배터리가 없어서 못 받았어.”“내가 너한테 전화했었다고?”예수진은 그제야 어젯밤 하지수가 전화를 안 받아 소이연과 통화한 것이 생각났다.하지수가 어이없어서 되물었다.“너 어젯밤에 도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나한테 전화한 것도 기억 안 나?”“넌 적게 마신 것처럼 말하네, 어제 송문수한테 여보라고 했던 거 기억나?”“그래?”예수진의 말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졌다.하지수는 어젯밤 알딸딸한 상황에서 누구한테 안겨서 집에 돌아온 것 같았지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하지수도 당할 수 없다는 듯 어젯밤 있었던 일을 말했다.“넌 어젯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나?”“내가 뭐했는데?”“네가 지원이를 추행했어.”“내가? 그럴 리가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예수진은 계지원을 피해 다니기도 바쁜 상황에 자기가 먼저 그런 짓을 했다는 거에 믿을 수 없었다.‘어젯밤 내가 잠이 들어서 지원이한테 안겨서 집까지 온 건 맞지만, 난 결코 아무 짓도 안 했어!’예수진이 부정하자, 하지수가 다시 그녀를 떠보았다.“네가 아무런 음흉한 짓도 안 했다고?”“아무 짓도 안 했는데 어떻게 기억나.”“네가 어제 지원이 거기를 만지면서 그 아래부터 감각이 없다고 했잖아.”하지수의 충격적인 말에 예수진은 눈살을 찌푸렸다.하지만 하지수는 계속 말했다.“나보고 같이 지원이 몸 만
멀쩡한 계지원이 어제의 일을 분명히 모두 기억할 거라고 생각한 예수진은 순간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그럼, 왜 날 피하지 않은 거야?’“사실 난 지원이가 너한테 잘해준다고 생각해, 네가 지원이를 좋아하면 차라리...”예수진은 하지수가 더 이상 말 못 하게 단호하게 말했다.“그만해, 평생 있을 수 없는 일이야.”하지수는 그런 예수진이 어이없었다.“너 뒤끝 엄청 심하네.”“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어.”“참나.”“그만 끊어, 나 좀 더 잘래.”“어떻게 알아, 네가 어제 한 짓을 지원이는 즐겼을지도...”하지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수진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3년 동안 지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왜 이렇게 밝히는 여자가 됐지?’예수진은 하연이가 옆에서 아까 했던 부적절한 통화 내용을 들었을까 봐 걱정되었다.때마침 하연이가 물었다.“엄마, 통화 끝났어요?”“응, 끝났어.”하연이는 커다란 눈으로 똘망똘망하게 예수진을 쳐다보면서 물었다.“그러면 나 엄마 휴대폰 조금 놀아도 돼요?”예수진은 평소 휴대폰에 관심 없던 하연이의 물음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거절했다.“외할머니 휴대폰을 노는 건 어때? 엄마한테 전화 오는 사람이 많아서 안 돼.”하연이는 계속 고집을 부렸다.“하지만 난 엄마 휴대폰을 놀고 싶은걸요.”“하연아, 엄마 말 들어!”단호한 예수진의 태도에 하연이는 억울해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엄마는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예수진은 하연이가 일부러 연기를 하는 걸 알았지만, 그런 하연이도 귀여워서 휴대폰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알겠어, 10분 만이야! 엄마는 피곤해서 조금 더 잘게.”하연이는 환하게 웃으며 휴대폰을 손에 주고 뛰어가다가 다시 돌아오며 말했다.“엄마, 잠금 풀어주세요.”예수진이 얼굴 인식으로 잠금을 풀어주자, 하연이는 그녀의 얼굴에 뽀뽀하고 총총 뛰어나갔다.“엄마, 고마워요!”예수진은 하연이가 휴대폰으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면서 그냥 자기 딸이 귀엽게만 느껴졌다.
“왜 전화를 건거야?”가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하연이가 계지원을 알던가?]“그냥요. 하고 싶었어요.”하연이는 큰 눈을 깜박이며 가연을 바라보더니 계속 말했다.“할머니, 전화하면 안돼요?”가연이가 어찌 이리도 귀여운 하연이의 눈빛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어쩌면 그저 어린 아이의 충동적인 생각일거라고 생각하고는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가연이는 예수진의 핸드폰을 들더니 계지원의 연락처를 찾아 하연이에게 물었다.“지금 당장 걸가?”“아니요, 지금 말고요. 전화번호 먼저 적을 거예요.”그녀의 물음에 하연이가 바로 대답했다.“그래.”가연이는 하연이가 단지 재미있어서 하는 행동이지 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왜냐하면 하연이는 늘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게임들을 혼자 놀기를 즐기는 아이였으니까.가연은 대답을 마치곤 포스트잇에 전화번호를 적어 하연이에게 건네주었다.“고마워요, 할머니.”그녀는 하연이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하연이는 포스트잇을 받아 자신의 옷 주머니에 넣고는 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 예수진의 방으로 향했다.그 시각, 예수진은 침대에 누워 도통 잠에 들지를 못하고 있었다.그러는 와중에 하연이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아이는 마치 자고 있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이 까치발을 들어 살금살금 걸어 들어오는 모습 이였다.이에 예수진은 아예 눈을 감아 자는 척 연기했다.[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궁금함을 참지 못한 예수진이 살짝 눈을 떠 확인했을 때, 하연이는 핸드폰을 그녀옆에 놔주고는 순순히 방에서 나가고 있었다.[어머...][진짜 예쁜 내 새끼...]하연이가 있어 예수진은 단 한 번도 외롭거나 “춥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다음날, 이른 아침.예수진은 일찍 일어나 방송국으로 가 리허설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엄마.”매일 유난히 일찍 깨어나는 하연이는 예수진이 외출 하려는 것을 보고 급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하연이 아침 먹었
가연은 하연이 뒤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한 채 유치원 앞에 도착하였고 하연이가 선생님이랑 인사까지 하는 것을 보고서야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가연은 집에서 끓고 있는 국이 생각나 행여 자신이 집을 비운 동안에 큰 사고로 번질 가봐 하연이가 정말 유치원안으로 들어가는지 확인도 안하고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똑똑한 하연이는 할머니가 떠나는 것을 보고 아주 황급히 선생님께 말했다.“선생님, 저 할머니랑 말 좀 하고 올게요.”“그래. 하연이 빨리 말하고 돌아와~”선생님은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하연이에게 대답해줬다.그리고는 몰려드는 많은 아이들 때문에 하연이한테 주의 할 겨를조차 없이 팽이 돌 듯 바빴다.그 시각, 하연이는 유치원을 몰래 빠져나와 거리로 나가서는 택시를 타려고 준비했다.[전에 할머니와 엄마는 이렇게 타고 가던데...]곧이어 한 대의 택시가 하연이 옆에 멈춰 섰다.하연이는 온 힘을 다해 택시 문을 열고 짧은 두 다리로 택시에 올라타고는 기사님에게 말했다.“아저씨, 저 방송국으로 가주세요.”“아가, 너 혼자니?”택시기사는 어린 아이 혼자 택시를 탄 것에 대해 의아해하며 물었다.“맞아요. 저 혼잔데요. 방송국으로 가주세요.”“너 이렇게 어린데 혼자 외출을 어떻게 하니?”택시기사는 진자하고 엄숙한 얼굴로 하연이를 바라보며 다시 되물었다.“저... 아빠 찾으러 갈 거예요.”하연이는 당차게 대답했다.“아빠는 어디 있는데?”“방송국에요.”[여기서 방송국까지는 거리가 너무 먼데... 어떡하지?]택시기사는 책임감 있고 정의로운 사람 이였다.“지금 진짜 너 혼자니?”“네! 진짜 저 혼자예요. 빨리 가주세요.”하연이가 머리를 끄덕이며 택시기사를 보채듯 말했다.“경찰서 앞까지 데려다줄게. 네 가족한테 연락하자.”어린 아이 혼자 먼 곳으로 가겠다는 말에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택시기사는 어쩔 수 없이 경찰을 찾아야만 했다.“저 경찰서 안가요. 거기는 나쁜 사람들만 가는 곳이잖아요.”하연이는 경찰서까지 데려다 준다는 택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자 울먹이던 하연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배시시 웃고 있었다.택시기사는 그런 하연이를 보고 흐뭇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역시 어린 애들의 감정이란...]대체 어느 집 딸이 이리도 예쁘고 귀엽게 생겼는지 기사는 운전하는 내내 내심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같은 시각, 방송국.계지원은 배우들과 함께 리허설을 하고 있었지만 아까의 통화내용이 맴돌 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원래 계지원은 일할 때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오늘은 몇 번이나 멍을 때리며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 이였다.“계감독님?”옆에 있던 실장이 넋이 나가있는 계지원의 이름을 불렀다.곧이어 정신을 차린 계지원은 고개를 돌려 예수진을 바라보았다.[왜 날 보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나?]계지원의 시선을 느낀 예수진은 미간을 찌푸렸다.“다들 먼저 연습하고 있으세요. 제가 일이 좀 있어서... 좀 있다 돌아와서 연습결과를 보도록 하겠습니다,”계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큰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지팡이를 쥐고 밖으로 나가버렸다.그가 나가자마자 리허설 장소는 급격히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감독님 오늘 왜 저러시지?”유청하는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평소에는 그렇게 엄하시던 분이 오늘은 도통 정신을 못 차리시네? 혹시... 연애하시는 것 아닐까?”말을 하던 유청하는 순간 흠칫하더니 자신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이런 확실치 않은 소문은 연예계에서는 절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아니아니, 저 그냥 맘대로 말한 거예요. 다들 진짜로 믿으시는 건 아니죠?”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려 부정하며 말을 이어갔다.사실 옆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는데 말이다.하지만 유청하가 아닌 다른 배우-오성진이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저 아까 복도에서 감독님이 누구랑 통화 하시는 거 들었는데요... 애기 목소리가 나던데요?”“어머, 설마 감독님 딸이나 아들?”대부
“네 이름이 하연이야?”계지원이 물었다.그도 하연이의 애교 섞인 목소리와 얼굴에 마음이 약해지고 있는 터였다.“네, 제 이름이 하연 이예요.”하연이는 계지원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너는 수진 씨 딸이야?”묻는 계지원의 심장은 너무나도 빨리 뛰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날 밤, 그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아이를 보았다.한눈에 봐도 여자아이는 식당에서 자기를 아빠라고 부르던 아이라는 것을 확신 할 수 있었다.하연이를 보았을 때,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였지만 실은 많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헤집고 있어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수진 씨가 딸이 있나?][그럼... 누구랑 낳은 딸이지?]하연이가 자신의 딸 일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계지원 본인도 감당하기 버거 워 보였다.계지원은 몇 차례나 예수진에게 전화를 걸려고 시도하였지만 뭐라고 말을 꺼낼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어제 하루 종일 이 일로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오늘 하연이가 이렇게 자기를 찾아 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질문을 던진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지만 긴장을 감출수가 없는 눈치였다.“맞아요. 우리 엄마 이름이 예수진이예요.”하연이는 계지원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아이의 대답을 들은 계지원의 심장은 멈출 기미도 없이 금방이라도 멎을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아빠, 왜 그래요?”계지원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 챈 하연이가 급히 물었다.그는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며 뛰지 않게 하려고 하였지만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이래도 있다가 죽을지도 몰라.]“아빠?”하연이는 조심스레 계지원을 불렀다.그는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하였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계지원은 지금 하연이에게 왜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는지조차 물어볼 용기가 없었다.그는 지금 자신의 심장에 과부하가 올 가봐 두려워하고 있었다.“아빠, 저 집에 안 갈래요. 오늘 아빠랑 같이 놀려고 왔는데... 하루만 저랑 같이 있어주시면 안돼요?”하
“나는 지금 하연이 임신했을 때랑은 완전 달라요.”“성별이 다르면 입덧도 다르다던데.”소이연은 현재 임신 중인 예수진과 아이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그래요?”“가서 검사 안 해봤어요?”“당연히 검사해봤죠.”성격이 급했던 예수진은 진작에 아이의 성별이 궁금해 병원을 찾아갔었다.“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돌려 말하면서 나한테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보여줘요.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정말.”“하하하.”그럴 때마다 예수진의 표정이 얼마나 웃길지 상상하던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들을 원해요 아니면 딸이 더 좋아요?”“당연히 아들이죠.”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하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들이 더 중요하다 그런 거예요 설마?”“제가요? 그 반대죠 완전히. 지원 씨가 딸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매일 둘이 꼭 붙어 있는다니까요. 그거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나도 아들 낳아서 계지원 열 받게 하려고요.”역시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예수진이 웃겨 소이연은 이번에도 웃음을 흘렸다.“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딸 같아요.”“임산부의 촉은 보통 틀리지 않죠.”“또 아빠한테만 달려가겠네요.”“전생에 얼마나 잘 놀았으면 딸을 이렇게 줄줄이 낳아요. 다 키워야겠네.”“무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한마디에 한 번씩 한숨을 쉬며 말하는 예수진에 소이연과 하지수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언니는 배 속의 아기가 남자 같아요 여자 같아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난 다 상관없긴 한데 솔직히 딸이 갖고 싶어요.”“딸은 안돼요. 딸 낳으면 오빠가 계지원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걸요. 오빠랑 언니 둘 다 미모가 이렇게나 출중한데 딸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어요. 오빠가 죽고 못 살죠 아주.”“...”소이연은 예수진의 말이 그다지 신빙성은 없어도 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어쨌든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축하드려요!”제 아내가 또 남사스러운 말을 할까 걱정됐던 계지원은 발 빠르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그래요, 정말 축하해요!”곧이어 다들 축하하자 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육현경을 놀려주었다.“육현경, 아직 안 죽었다? 여행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문수보다 낫네, 문수는 지수 씨랑 저렇게 오래됐어도 아무 소식도 없는데. 너 진짜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입 다물어.”“내 실력 의심하는 거야 지금?”“뭐래.”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하도경의 발언에 송문수는 어이없다는 듯 화를 냈다.“솔로인 너는 나 비웃을 자격 없거든. 나는 결혼이라도 했지 너는 있는 게 뭐야?”“뭐?!”“우리 중에 너만 솔로야. 분발해 하도경.”이미 말문이 막힌 하도경을 향해 송문수가 한마디 더 하자 하도경은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닥치고 마셔, 오늘 내가 너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먹일 거야.”“누가 쓰러질지는 두고 봐야지.”서른 살 넘게 먹은 사람 둘이 아이처럼 싸우는 것도 그들의 일상인지라 그들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때 진정한 예수진이 소이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오빠가 그거 안 하고 했어요?”“네?”“아니, 그렇게 빨리 애 갖고 싶어 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아직 제대로 못 누렸잖아요.”예수진이 알고 있는 육현경은 소이연과의 둘만의 시간을 한 일 년은 더 누려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었기에 아까도 그녀는 소이연이 임신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두세 달밖에 안 됐는데 덜컥 임신을 해버리면 육현경은 만족을 못 할 게 분명한데.한편 이런 질문을 받은 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둘의 신혼여행을 되돌아봤다.사실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소이연은 아무리 급해도 안전조치는 꼭 하는 육현경에 의아해하고 있었다.둘은 합법적인 부부이니 아이가 생긴다 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도 없고 민이도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이 동생을 원한다고 했었는데 왜 굳이 그걸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참지 못하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