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뻔뻔한 본성만큼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육현경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소이연의 헛웃음에 육현경은 눈살을 찌푸렸다.“왜 웃어?”“네가 어리다는 게 웃겨서.”“너무 기쁘지?”육현경은 득의양양하게 웃었지만, 소이연은 웃을 수 없었다.육현경은 다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말 돌리지 말고, 앞으로 심문헌 만나지마! 나 기분 엄청 나빠.”“아직 사업적으로 얽힌 게 있어서 그럴 순 없어.”소이연은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심문헌도 선을 넘는 사람은 아니었다.육현경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지만, 소이연은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그 사람을 만날 거였으면 뭣 하러 지금까지 시간을 끌었겠어.”육현경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앞으로 일 때문에 만나야 할 상황에 생기면 나도 같이 갈게.”소이연은 육현경이 속이 좁다고 생각했다.“업무상 비밀이 많아서 제3자가 옆에 있으면 불편해.”“둘이 얘기할 때, 난 밖에서 기다리면 돼.”“유치하게 굴지 말아줄래?”“난 그냥 내걸 지키려는 것뿐이야.”“뭐가 당신 건데?”“너!”육현경의 답은 소이연이 반박할 단어를 찾지 못할 정도로 확고하고 단호했다.한동안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육민이가 옆에서 낮게 웃었다.웃음소리에 두 사람은 뒤를 돌아보자, 육민이는 황급히 웃음을 멈추면서 말했다.“난 그냥 엄마랑 아빠가 사이좋게 지내는 게 너무 좋아요.”“난 네 아빠가 아니야...”육현경이 습관적으로 반박하던 말을 갑자기 멈추더니 회상하듯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내 나이에 민이만큼 큰아들이 있을 수 없지만, 네가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육현경은 정말 뻔뻔했다.저녁을 다 먹고 나서, 육현경은 소이연과 육민이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육민이가 갑작스레 제안했다.“아빠, 오늘 밤에 같이 잘래요?”“너무 빠른 거 아니야?”말은 이렇게 해도 육현경은 기대하는 눈치였다.소이연은 육현경을 노려보았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민아, 먼저 방으로 들어가.”
육현경은 참지 못하고 소이연의 입술에 키스했다.그 순간, 소이연이 고개를 기울이면서 말했다.“너 아직 여자 친구 있잖아.”소이연의 한마디에 육현경은 눈을 감고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이 자기를 너무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다.아직 연애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녀의 손아귀에 사로집힌 것 같았다.육현경은 키스를 멈추고 귀에 키스하고 나서 그녀를 놓아주었다.가벼운 접촉에도 온 몸이 전기가 통한 듯 찌릿찌릿한 이 느낌이 너무 고통스러웠다.육현경은 소이연에게서 몇 발짝 멀어졌다.소이연의 얼굴도 엄청나게 빨개졌다.육현경은 숨을 죽이고 말했다.“내일 아영 씨한테 찾아가서 말할게.”“응.”“잘자.”“잘자.”“소이연.”육현경이 또 그녀를 불렀다.“응?”“좋아해.”말 한마디에 소이연은 목까지 빨개졌다.육현경의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숨김없는 사랑이 소이연의 가슴을 터질듯하게 뛰게 했지만, 그녀는 애써 담담한 말투로 답했다.“응.”“응?”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데, 너무 담담한 그녀의 태도에 육현경은 불만이 가득했다.“헤어지고 나서 다시 얘기해.”“약속 지켜.”어린애처럼 약속을 지키라는 육현경이 유치해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알겠어, 약속할게.”말을 하고 나서 소이연은 방으로 들어갔다.방문이 닫힌 지 한참이 지나도 육현경은 떠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첫사랑이라기에는 너무 늦은 스물여섯 살에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행복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그가 오랫동안 기다린 행복 같았다.육현경은 소이연을 떠올리기만 해도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방안에 들어 온 소이연은 인터폰을 통해 육현경을 바라보다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그녀는 처음으로 자기가 운이 좋다고 느꼈다....장안시.예수진이 이번에 맡은 역할은 지난번보다 훨씬 무거웠다.연예계는 엄청 현실적인 곳이었다.새로운 대본을 들고 보던 예수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말했다.“이번에 나온 대본 너무 성의가 없
유청하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똑같은데요.”대본을 다시 한번 확인한 예수진이 말했다.“너무 다른데요, 이번 대본은 너무 간단해요.”유청하는 환하게 웃으면 말했다.“얼마나 복잡한 걸 원해요? 지난번에도 대사 몇 줄 없었잖아요. 이번 대본은 길지 도 않은데 대체 뭘 원하는 거죠?”본의 아니게 비아냥거리는 말투였지만, 유청하는 악의가 없었고 그냥 농담이었다. 얼굴을 찡그리던 예수진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참지 못하고 유청하에게 물었다.“청하 씨, 지난번 대본 보여 줄래요?”“잠시만요, 가방에 넣은 것 같아요.”유청하는 서둘러 가방 안에서 대본을 꺼냈다.“봐봐요, 저번 대본에는 대사가 두 장으로 꽉 찼었는데, 이번에는 반이나 줄었어요!다음부터는 없을 수도 있어요.”예수진은 하늘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했다.유청하의 대본을 들고 두 번이나 읽고 난 예수진은 자기 대본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다는 걸 알았다.계지원이 그녀에게만 다른 대본을 준 게 틀림없었다.1초의 설렘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너무 많은 생각을 했다고 느꼈다.계지원은 자기 안목을 증명하기 위해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지켰다. 그의 능력이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난 경기에서 그녀가 무조건 빛을 발해야 했다.예수진은 계지원에게 너무 기대했다가는 모욕감만 들 게 뻔하다는 걸 알았다.평소 줄곧 배우와 함께 리허설을 하던 계지원이 오늘은 나타나지 않고 실장님이 차를 타주면서 대본에 대해 말해줬다.예수진이 리허설을 마치고 떠나려 할 때 하지수에게서 연락이 왔다.“저녁에 바빠?”“무슨 일이야?”예수진은 하지수의 기분이 나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오늘 너랑 술 마시고 싶어.”“3년 만에 보니 지수 너도 많이 변했네. 술을 그렇게 싫어하던 네가 이제는 나랑 술을 마시겠다고 하고.”“너도 변한 건 마찬가지야, 술을 그렇게 좋아하던 네가 이제는 술을 마다하잖아.”예수진은 마지못해 말했다.“내가 어떻게 변호사를 이기겠어, 내일 리허설 때문에 술은 안되고 밥은
예수진은 차 문 앞에 기대고 서 있는 하지수를 발견하고는 화난 척했다.“언제 왔어?”“아까 그 아저씨랑 다정하게 사진 찍을 때 도착했어.”“다들 내 팬이래.”예수진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인기에 약간 득의양양했다.하지수는 기뻐하는 그녀를 보며 함께 차에 올라탔다.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레스토랑 앞에서 하도경을 만났다.하도경도 그녀들을 발견하고 놀라면서 물었다.“밥 먹으러 왔어?”“응.”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문수가 출소한 지 꽤 됐는데 못 만나서 오늘 지원이까지 셋이 모이기로 했거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먹을래?”예수진은 전에 했던 양심 찔린 일 때문에 쉽사리 하도경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옆에 있는 하지수가 거절하기를 기다렸다.“좋아.”하지수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예수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전에 하지수는 이런 식사자리를 싫어했고, 특히 송문수가 있는 자리는 더욱 피했다.‘3년 동안 하지수와 송문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동안 송문수가 감옥에 있어서 만나지도 못했을 텐데.’예수진은 평소와 다른 하지수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가자.”신이 난 하도경은 그녀들을 데리고 예약한 룸으로 향했다.이미 도착해 있던 계지원과 송문수는 룸 안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송문수가 고개를 돌려 하도경을 놀리기 시작했다.“하도경! 네가 술 마시자고 해놓고 제일 늦게 등장하다니...”송문수는 뒤따라 들어오는 예수진과 하지수를 보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옆에 있던 계지원은 예수진을 보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레스토랑 앞에서 두 사람을 만났어, 여기서 밥 먹는다길래 같이 먹자고 했지.”하도경이 방으로 들어오면서 말하자, 송문수는 가만히 있고 계지원이 한마디 했다.“난 괜찮아.”“다들 앉아! 지수는 문수 옆에 앉고 수진이는 내 옆에 앉으면 돼.”하도경은 아직도 서있는 예수진과 하지수에게 자리를 지정해 줬다.“그래.”하지수가 순순히 송문수의
눈을 마주치자마자 예수진은 얼른 시선을 피했고, 계지원도 따라서 고개를 돌렸다.예수진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이런 농담하지 마, 너 이제 유부남이잖아!”“유부남이니까 이런 농담을 하는 거지.”하도경의 웃음에는 짠함이 섞여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송문수가 잔을 들면서 말했다.“술 마시자! 술 마시자고 계속 노래를 부르더니, 다들 뭐 하는 거야!”술을 좋아하는 예수진이 옆에 놓인 물잔을 집어 들자, 하도경은 믿을 수 없었다.“헤이헤이헤이, 물 마시려고?”“내일 리허설 있어서 오늘은 술 마시면 안 돼. 걱정하지 마! 너희가 마시는 만큼 물로 대신할 테니까.”하도경은 결사반대했다.“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 조금이라도 마셔야지.”“내가 취하지 않으면 안 보낼 게 뻔한데 어떻게 널 믿어?”하도경은 술을 마셔야 한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예수진, 나도 예전의 하도경이 아니야! 몇 잔만 마시면 취한다고.”예수진은 당연히 하도경의 새빨간 거짓말을 믿지 않았다.술을 엄청 좋아하는 하도경이 술을 못 마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그녀는 아까 레스토랑 앞에서 하도경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 후회됐다.‘저번에도 술에 취해 계지원의 휴게실에서 하루 동안 자느라고 리허설을 못 했는데, 오늘 또 취해서 리허설에 지장을 주면 안 되지.’예수진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던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내가 수진이 대신 다 마실게.”그 말에 모두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하지수의 주량을 남편인 송문수조차도 모르고 있었다.하지만 예수진이 아는 하지수는 술을 잘 마시는 타입은 아니었다. 잠만 자면 숙취가 풀리는 자기와는 달리 그녀의 숙취는 엄청 심했다.다들 놀란 가운데 하도경이 말을 꺼냈다.“지수가 이렇게 세게 나오다니! 주량이 엄청난가 보네.”송문수는 술잔을 더욱 세게 쥐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보다 못한 예수진이 퉁명스레 말했다.“하도경, 누가 너보다 잘 마시겠어! 지수야, 내가 그냥 마실
문득 리허설을 망쳐 장혜성에게 혼났던 기억이 떠오른 예수진은 핑계를 대고 화장실을 갔다.예수진은 과음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정신을 차리려고 세수했다.그녀가 한참 만에 화장실 문을 열고나오자, 문 앞에 계지원이 서있었다.예수진은 계지원을 한 번, 그의 지팡이를 한 번 쳐다보다 그가 단순 골절이 아닌 한 쪽 다리를 평생 못 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예수진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계지원이 말을 꺼냈다.“내일 리허설 취소됐어.”“뭐?”“단체 카톡 안 봤어?”“술을 계속 마시느라 보지 못했어. 언제 취소됐어? 왜 취소됐어?”놀란 예수진은 휴대폰을 꺼내면서 계속 물었다.단톡방에는 내일 리허설을 취소하고 앞으로 힘들게 진행될 일정에 다들 컨디션 조절하라는 공지가 와있었다.계지원이 단톡방을 개설한 건 아니어도, 이런 공지를 낼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예수진을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취소했어? 진도가 빠듯하잖아.”“내가 술을 많이 마셔서 내일 일어나기 힘드니까.”“...”평소 일을 위해서라면 며칠 동안 술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는 일 중독자인 계지원이 개인적인 일로 일정을 미룬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예수진의 시선에 계지원이 말을 이어나갔다.“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밤을 새워서 술 마시는 건 힘들어.”예수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룸으로 향했다.“그래도 많이 마시지는 마, 술 마시면 살쪄서 화면에 예쁘게 안 나와.”말을 마친 계지원은 화장실로 들어갔다.예수진은 너무 마른 체형은 아니어도, 애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군살 하나 없었다.‘지금 나보고 뚱뚱하다는 거야?’예수진이 돌아오자, 하도경과 계속 술을 마신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술에 취해도 이성적인 하지수는 예수진의 기분이 나빠졌다는 걸 눈치챘다.“왜 그래?”예수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술에 취한 하도경은 예수진에게 자연스럽게 말했다.“화나서 엄청 뚱한 표정이잖아, 누가 우리 수진 아가씨를 화나
하도경은 예수진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감정이 격해졌다.“네가 뚱뚱하다고? 약한 널 보면 마음이 아파서 내 살을 떼어주고 싶을 정도야.”둘의 대화에 계지원은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하도경의 말에 예수진은 질색했다.“제발, 사양할게!”“예수진! 연예계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네가 뼈만 남을 정도로 마른다면 난 정말 받아들일 수 없어.”예수진은 어이없었다.“누가 너더러 받아들이래? 관객들만 좋아하면 되지.”“난, 난 관객이 아니야?”“넌 그냥 미미한 존재일 뿐이야.”“내가 너의 든든한 빽이 되어줄게.”“사양할게. 날 귀찮게 하지 말고 육가희한테나 든든한 빽이 되어줘.”술을 마신 예수진이 직설적으로 말하자, 하도경의 얼굴색도 조금 변했다.급변한 분위기에 송문수가 어색함을 풀려고 술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무슨 말을 그렇게 많이 해, 빨리 술 마셔야지.”하도경도 얼른 잔을 들었다.더 이상 육가희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그러나 하도경은 아까 예수진의 뚱뚱하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술을 몇 잔 마시고 나서 또 말을 꺼냈다.“예수진, 다이어트 하지 마!”“다이어트 안 해.”“아까 뚱뚱하다며?”“뚱뚱하다고 했지, 다이어트 한다고는 안 했어.”“정말?”“진심이야.”계속 따져 묻던 하도경이 갑자기 한마디 했다.“다른 건 몰라도 넌 살이 더 빠지면 만지는 느낌이 안 좋아.”어이없어하는 예수진을 무시하고, 하도경은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농담이 아니라, 지금 너의 몸매가 딱 좋아.”‘뭐가 딱 좋아? 오해할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아줄래?’계속 오해할 수 있는 말을 하는 하도경때문에 그녀는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다.예수진과 하도경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송문수는 예수진과 육가희의 사이가 안 좋아서 아까 분위기가 어색해진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두 사람의 대화가 심상치 않은 것 같아 의혹을 제기했다.“네가 어떻게 알아?”송문수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하도경이 말을 더듬었다.“난...그냥
“이제 시작인데 끝날 수 없지! 장소를 안 옮길 거면 여기서 더 시켜서 먹든가, 어차피 오늘 밤 취하지 않으면 다들 못 가!”“하도경...”“내 말에 다들 태클 걸지 마! 가자, 808킹클럽으로!””단호한 하도경은 의견도 묻지도 않고, 네 사람을 끌고 클럽으로 향했다.하도경의 강요에 모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예수진이 중도에 집을 갈 거라 여긴 하도경은 그녀와 계지원을 끌고 한 차에 탔고, 송문수와 하지수는 다른 차에 탔다.몇 번이나 가겠다고 하는 예수진을 하도경이 끝까지 잡자, 그녀는 오늘 밤 무조건 술로 하도경을 꺾어버리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다른 차 안에서는 송문수와 하지수가 뒷자석에 어색하게 떨어져 앉았다.불도 안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송문수가 창밖을 내다보다 불쑥 말했다.“먼저 데려다줄게.”송씨 가문을 나왔어도 둘 사이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송문수는 그녀가 아무리 먼저 호의를 표해도 다가갈 기회조차 안 줬다.송문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하지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무뚝뚝한 그의 뒤통수를 보았다.“너도 집 가려고?”“아니, 내가 가면 도경이가 날 죽일 거야.”송문수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고, 하지수가 말했다.“내일 출근 안 해도 되니까, 오늘 늦게 들어가도 괜찮아.”“...”송문수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알아서 해.”두 대의 승용차가 모두 클럽에 도착하고 다섯 사람은 함께 들어갔다.클럽에 들어서자, 분위기에 취해서인지 다들 술을 더 심하게 마셔댔다.특히 아까는 리허설에 지장을 주면 안 된다고 술을 마시지 않겠다던 예수진이 미친 듯이 술을 마셨다.하도경도 분위기에 취해 연거푸 예수진과 세잔이나 원샷을 하고도 부족한 듯 계속 술잔을 들며 건배를 했다.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었다.예수진은 계속되는 술에 아직 만취는 아니었지만,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취한 건 사실이었다.하도경 한 명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송문수도 술에 취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