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 휴게실 있으니 가서 좀 자.” 계지원이 말했다.예수진은 그를 보고 있었다.정말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똑바로 들은거 맞아. 가서 조금 자.” 계지원이 다시 말했다.예수진의 마음을 읽은 것 같았다. 예수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계지원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 같았다. 예수진이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계지원은 이미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떴다.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방을 그녀에게 빌려주었다.예수진은 한참을 고민하고 휴게실을 몇 번이나 둘러보았다. 비록 크진 않지만, 아주 편해 보였다.그녀는 마치 영혼이 빠져나가 이미 누워있는 것 같았다.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들 것만 같았다.그래.영혼만 간 것이 아니라 사람도 갔다.그녀는 그대로 크지 않지만 부드러운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아주 깨끗했고, 고급 세제의 은은한 향뿐,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그녀는 계지원이 이 휴게실에서 잔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다행이다.아니면 그의 냄새가 나서 잠을 못 잤을 것이다.그녀는 편안히 몸을 돌려 신발과 외투를 벗고 잘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급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문을 나서자 방금 나갔던 계지원이 보였다.중요한 건 그가 지금 그녀가 방금 반 이상 남긴 영양죽을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계지원은 그릇째 먹고 있었고, 수저가 한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저는 그녀가 썼던 수저를 썼다. 분위기가 민망해졌다.예수진은 정말 땅속으로라도 들어가고 싶었다.그녀는 방금 도대체 뭐 때문에 나온 걸까.방금 먹은 아침을 치우지도 않고 당연히 치웠을 거라고 생각했다.분명히 치워주는 스태프가 있을 거라고, 계지원이 하지는 않을 거라고.이제 됐다! 그녀는 또 계지원에게 미움을 샀다.그녀의 운은 인생의 전반전에서 이미 다 쓴것만 같았다. “나도 아침 안 먹었어.” 계지원이 민망한 듯 입을 열었다.귀도 눈에 띄게 빨개졌다.“아.” 예수진은 짧게 대답했다.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예수진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그녀는 계지원이 휴게실의 고급 소파 의자에 여유롭게 앉아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예수진은 자신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물었다. "나 얼마나 잤어?” "하루 종일.” 점심시간 잠깐도 아니고 오후 내내도 아니고 하루라니! 이게 무슨 상황인거지? "지금 밤 10시야.”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 12시간을 잔 것이다. "왜 안 깨웠어?" 예수진이 놀라며 물었다. 그녀는 깜박하고 알람을 맞추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면 정말 하루종일 잘 수도 있다. 예수진의 수면의 질은 항상 좋았다. "혼자 잘자 놓고서 왜 화를 내고 그래." 계지원이 불쑥 말했다. "옛날에나 잘 잤지! 지금은 작은 소리로 날 부르기만 하면 벌떡 일어날 수 있다고!" 예수진은 얼른 반박했다. 계지원은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통제 불능으로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정말 기뻐서 웃는 것인지 그냥 순간을 넘기기 위해 웃는 것인지 감이 안 올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희미한 미소안에는 슬픔이 섞여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그는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계지원의 마음은 희로애락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닫혀 있는 듯했다. 아마도 그는 예수진을 그렇게 대하는 것 같았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깨워줄게.” 다음에 어떻게 감히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잘 수 있겠어? "신발부터 신어." 계지원이 말하자 예수진은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 맨발인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계지원을 보며 물었다. "돌아가자고?” "밤 10시인데 야근하라는 거야?” "아냐, 아냐, 아냐." 예수진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어디 감히 대 감독을 야근시킬 수 있겠는가? 방금 막 잠에서 깬 예수진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라 반응이 다소 느렸다. 지금은 밤 10시다. 예수진은 자고 일어나면 항상 오늘이
"예수진." 계지원이 그녀를 불렀다. 예수진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계 감독님, 감사합니다." "물건." 계지원 말했다. "무슨 물건이요?" 예수진이는 자신의 몸을 더듬으며 가방과 핸드폰을 확인했는데, 그녀에게 더 이상의 다른 물건은 없었다. "이거." 계지원이 포장된 음식을 그녀에게 건넸다. 예수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배상해야 할 죽." 계지원이 설명했다. 예수진은 순간 문득, 오전에 무심코 남은 죽을 포장 해 가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하지만 그 죽은 오전에 계지원이 샀던 죽이라 배상할 필요가 없었다. 예수진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인사했다. “계 감독님,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계지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예수진이 그에게 꼭 이래야 하는 것일까? 그는 자동차 창문 버튼을 누르며 운전기사에게 출발하라고 말했다. 예수진은 계지원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숨을 돌렸다. 방금 계지원이 조금 화가 났다는 것을 예수진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그들 사이의 왕래는 다소 좋지 않았다. 계지원이 그녀를 죽이고 싶다 해도 예수진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예수진은 영양죽을 들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매일 밤, 너무 늦게 들어와서 그녀들을 깨울까 봐 걱정되었다. 방금 집에 들어왔다. “수진아, 들어왔어?” 거실에 조명이 하나밖에 없어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소파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도 알기 힘들었다. 예수진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놀랐어?" 가연은 다소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에요." 예수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이렇게나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아직도 안 자고 있어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고 했잖아요. 당분간은 정말 바쁠 거예요.” 가연은 하연이를 돌봐야 해서 항상 일찍 잠에 들었다. 가연의 일과는 기본 적으로 하연이에게 맞춰져 있었다."며칠 뒤 하연이 세 번째 생일인데, 생일날 너랑 같이
하연과 가연의 방. 가연이 인기척에 놀라서 깼다. 그녀는 현재 어느 정도 나이가 들은 상태라 약간의 인기척만으로도 쉽게 잠에서 깼다. "하연이가 보고 싶어서요." 예수진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가연은 몸을 뒤척이며 다시 잠을 잤다. 예수진은 침대 곁으로 가서 자고 있는 하연이의 장밋빛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떨결에 엄마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하연이를 임신한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예수진은 심지어 3달이나 생리를 하지 않았고 아랫배가 눈에 띄게 나오기 시작했지만 자신이 임신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때 가연이 예수진에게 임신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예수진은 정말 놀랐다. 그녀는 드라마 캐릭터 때문에 자주 살을 빼거나 쪘기 때문에 생리불순인 적이 많았었다. 그런 생활이 이미 익숙해서 임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예수진은 한참을 망설이고 고민한 끝에 아이를 낳기로 했었다. 가연도 예수진이 아이를 낳는 것을 지지해 주었다. 그녀는 집에 아이가 있으면 더 활기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0개월의 임신기간은 예수진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순조로웠다. 임신 초기에 입덧도 하지 않았고, 임신 후기에도 잠을 잘 못 자지도 않았다. 심지어 진통이 시작되고 출산까지 3시간밖에 걸리지 않고 순산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거의 아프지도 않았다. 정말 천사 같은 아이 같았다.예수진은 참지 못하고 하연이에게 뽀뽀를 했다. 그녀는 하연이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것 같았고, 세상에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다 주고 싶어했다. 예수진이 연예계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한 이유 중 한 가지는 하연이를 위해서였다. 예수진의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하연이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육씨 가문에서 자라면서 의식주에 대한 걱정 없이 자랐다는 것을 몸소 느꼈고, 돈이 없을 때 무력감과 삶이 무너지는 것도 경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였다. "네. 계 감독님, 정말 감사해요.”예수진은 90도로 인사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빠르게 답장을 보냈고, 계지원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예수진이 문서를 열어보니 경합에서 연기할 역할 분석을 담은 내용들이였다. 캐릭터의 성격은 그녀가 본 오리지널 버전보다 훨씬 섬세하고, 시각적 감각도 매우 강렬했다. 언제 어떤 표정으로 연기해야 할지 기준을 정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진을 위해 캐릭터를 분석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역할이 작아도 캐스팅될 수 있으니 힘내.” 예수진은 괜히 웃었다.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계지원이 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비서가 준비해서 각 사람마다 보내준 것일거다. 캐릭터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섬세하게 분석했다면 계지원의 팀이 우승하지 못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예수진은 캐릭터가 분석되어 있는 대본을 들고 거울을 보며 여러 번 연기 연습을 했다. 역시 계지원이 자세히 분석한 대본으로 연습하지 이 캐릭터에 확실히 다른 영혼이 생긴 것 같았다. 분량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드라마에서 전체를 보면 이 캐릭터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연기를 잘한다면 시청자들에게 다시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예수진은 어제의 경험을 통해 알람 맞추는 걸 까먹지 않았고, 그렇게 오래 자지는 않았다. 예수진의 오늘 컨디션은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리허설실로 들어갔다. "예수진 씨." 유청하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유청하가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다. 예수진도 30분 일찍 왔는데 이미 배우 절반이 와 있었다. 보아하니 모두들 이번 경합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한쪽 구석에서 유청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예수진이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만약 계지원의 대기실에서 하루 종일 잠들었다고 한다면 내일 연예뉴스 헤드라인에 ‘한물간 여자 스타가 경합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기 위해 유명 감독을 유혹했다.’라는 기사가 뜰
계지원이 도착하자 모두가 그의 주의에 모여들었다. "어제 스케줄대로 오늘도 리허설을 계속해주세요.” 계지원은 이어 말했다. "일단 한번 해 보죠. 예수진 씨는 어제 불참했으니 일단 같이 진행해 보고 안되면 따로 가서 연습해주세요.” "네." 모두가 동의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예수진은 매우 배우들과 합을 맞추었는데, 어제 계지원에게 받은 대본이 매우 유용했다. 그녀는 어젯밤에 혼자 집에서 두 번 연습했고, 금세 캐릭터의 느낌을 찾았다. 오늘 다른 사람과 합을 맞추니 더 느낌이 살았다. 한 번의 연습 공연을 마치자 모두가 예수진의 연기에 놀랐다. 예수진의 연기가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제는 예수진의 연기는 정신없고 혼란스러웠지만 오늘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전에는 예수진의 캐릭터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부각되는 부분이 많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예수진의 캐릭터가 분명히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을 정도였다. 캐릭터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긴장감을 주었고 관객들에게 기억되기 쉬웠다. 또한 분량이 많지 않아 관객들에게 피로감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연기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나쁘지 않네요." 계지원은 다른 배우들의 칭찬을 인정했다. 모든 배우들은 계지원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의 계 감독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안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계지원의 카리스마였고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오늘 계지원의 기분은 모두가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분명 방금 연습 공연 중에 실수한 배우가 두 명이나 있었는데, 계 감독은 화를 내지 않고 따뜻한 말로 격려했다. 오늘은 계 감독님의 촬영운이 좋은 날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에서 저런 미소가 나오겠는가!하루 종일 리허설을 하고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조 감독이 와서 오늘 첫 방송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배우들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오늘 저녁을 총괄 PD
”수진 씨." 감독이 갑자기 예수진의 옆에 왔다. 예수진은 재빨리 일어났다. "앉아요, 앉아요." 감독이 그녀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오늘 밤 보니까 말도 별로 안 하고, 술도 안 마시던데 오랜만에 연예계에 복귀해서 적응이 안 돼요?” 사실 그녀는 예전에도 이런 회식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때는 각종 행사들로 바빠서 매니저도 그녀에게 이런 회식 자리에 참석하게 해 줄 방법이 없었다. "좀 적응이 안 되네요." 예수진은 웃으며 급히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고 말했다. "감독님, 제가 한 잔 올려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아요." 감독도 거절하지 않았다. 예수진은 그렇게 감독의 비위를 맞추었다. "수진 씨 주량이 세네요." 감독이 칭찬했다. "아니에요, 평소에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아요." 아무리 주량이 세더라도 밖에서 숨기지 않으면 술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영광이네. 자, 우리 한 잔 더 마셔요." 감독은 열정으로 말했다. 예수진은 그렇게 할 수 없이 감독이 따라 주는 술 두 잔 더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잠시 술을 마시다가 감독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수진 씨, 연예계를 떠난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요? 뭐 하고 지냈어요?""그냥 작은 도시서 쉬면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때 왜 갑자기 퇴출당한 거예요?” 감독이 물었다. 예수진은 그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작은 일이 있었어요.” "누구 미움이라도 샀어요?” 예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 씨는 아직도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네요. 나는 엄청난 압박을 이겨내고 수진 씨를 이 프로그램에 섭외했는데.” 감독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육씨 가문이요." 예수진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어쨌든 지금 육씨 가문은 연예계 일을 관여하지 않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을 이유도, 더 이상 그녀를 표적 삼을 이유도 없었다. "육씨 가문?"
예수진은 화장실로 들어갔고, 짜증이 난 상태로 거울에 비친 화장도 하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촬영장에서 화장을 두껍게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화장을 하지 않은 산뜻한 얼굴로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예수진은 감독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 중에서 그녀가 가장 예쁘지도 않고 사근사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진이 가장 배경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싶어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오늘 밤 만약 감독을 거절한다면 예수진은 다음번에 경합 이후 하차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발표할 것이다. 게다가 연예계는 인맥들이 서로 잘 연결되어 있었고, 이번에 예수진의 태도에 따라 향후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절대로 이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 위기가 정말 괴로웠다. 연예계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이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좋은 배경도 있었지만, 배경이 있는 없든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예수진은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두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3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화장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달팽이가 자신의 껍질에 틀어 박혀 있듯 아마 계속 화장실에 있었을 것이다. 예수진은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화장실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계지원이였다. "집에 데려다줄게.” 계지원이 그녀에게 말했다. 계지원은 거부하기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먼저 가세요." 예수진은 거절했다. "저번에 술 먹고 취한 다음날 컨디션이 어땠는지 잊었어?” "걱정 마요. 나도 내 위지를 잘 아니까.” 그 말을 하고 예수진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수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
예수진의 문자를 본 소이연은 바로 그녀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진정하고 일단 지수 씨가 뭐라고 하는지부터 봐요.][문수 씨가 꼭 서프라이즈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우리도 도와야죠.][알겠어요, 조심할게요.][수진이 너도 알고 있었어?][내가 뭘 알겠어, 난 아무것도 모르지]갑자기 달라진 예수진의 태도에 하지수는 바로 되물었다.[그럼 아까 한 말은 무슨 뜻인데?][그냥 송문수가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단 소리지, 전엔 망나니 같던 놈이 이젠 일도 잘하잖아. 지원 씨가 문수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러면서 하도경한테 분발하라고 맨날 뭐라 한다니까.]장문의 문자를 보내 아까의 실수를 만회한 예수진 덕분에 하지수도 더 이상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물론 말 자체는 의심스러웠지만 하지수는 오랜 친구인 예수진이 자신을 속일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일이 아니라 사생활 말이야.][사생활도 많이 정리된 거 아니었어? 둘이 잘 지냈잖아.][내 착각일 수도 있지 뭐.][그건 또 무슨 말이야?]예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하지수가 이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연 언니가 귀국한 날 나 사실 문수 씨랑 관계 할 뻔했거든, 그런데 그날 하필 생리가 터진 거야.][그래서?][못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문수 씨가 엄청 아쉬워했었어. 하도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어서 시한폭탄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계속해봐.][그런데 지금은 생리 끝난 지 며칠이나 됐는데 아무 말도 없는 거 있지? 내가 몇 번이나 슬쩍 말했는데 내 몸엔 손도 안 대더라.]이번에는 예수진이 답장하기도 전에 소이연이 먼저 문자를 보냈다.[혹시 문수 씨가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런 건 아닐까요? 남자들은 상황에 따라 몸 상태도 다르잖아요. 너무 힘들면 못 할 수도 있죠.][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죠, 요즘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니까. 그런데 내가 오늘 문수 씨 보려고 회사 왔거든요? 회사에 있다던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하지수를 마주한 송문수는 바람피우다 걸린 남자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그가 들어오기 전 하지수는 송문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 한순간에 고치긴 힘들었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사실 말은 안 해도 하지수는 그가 혹시라도 정말 중요한 일로 밖에 나간 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송문수의 표정이 꼭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 같아서 하지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붉기였지만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너, 언제 왔어?”“좀 됐어.”마침내 정신을 차린 송문수의 질문에도 하지수는 고개를 떨군 채 서류를 정리하며 바쁜 척을 했다.“엄마랑 파티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준비 끝났어, 다음 주에 예정대로 파티할 거야.”“아.”“앞으로 매일 출근할 거야?”온 힘을 다해 태연한 척하고 있는데 저런 속 보이는 질문을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안 왔으면 좋겠어?”“아니.”본인도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송문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하지수가 오면 소이연, 예수진과 함께 하는 프러포즈 준비에 차질이 생길까 봐 한 질문이었지만 하지수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에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었고 하지수도 당황한 송문수를 한번 보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송문수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하지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지수는 이제 더 이상 송문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그가 정말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만 볼 수 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고 그런 그를 자신이 계속 사랑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 곁을 지키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사랑에 빠지고 난 지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