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였다. "네. 계 감독님, 정말 감사해요.”예수진은 90도로 인사하는 이모티콘과 함께 빠르게 답장을 보냈고, 계지원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예수진이 문서를 열어보니 경합에서 연기할 역할 분석을 담은 내용들이였다. 캐릭터의 성격은 그녀가 본 오리지널 버전보다 훨씬 섬세하고, 시각적 감각도 매우 강렬했다. 언제 어떤 표정으로 연기해야 할지 기준을 정해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진을 위해 캐릭터를 분석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역할이 작아도 캐스팅될 수 있으니 힘내.” 예수진은 괜히 웃었다.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계지원이 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비서가 준비해서 각 사람마다 보내준 것일거다. 캐릭터마다 이렇게 하나하나 섬세하게 분석했다면 계지원의 팀이 우승하지 못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예수진은 캐릭터가 분석되어 있는 대본을 들고 거울을 보며 여러 번 연기 연습을 했다. 역시 계지원이 자세히 분석한 대본으로 연습하지 이 캐릭터에 확실히 다른 영혼이 생긴 것 같았다. 분량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드라마에서 전체를 보면 이 캐릭터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에 연기를 잘한다면 시청자들에게 다시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예수진은 어제의 경험을 통해 알람 맞추는 걸 까먹지 않았고, 그렇게 오래 자지는 않았다. 예수진의 오늘 컨디션은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리허설실로 들어갔다. "예수진 씨." 유청하가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유청하가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다. 예수진도 30분 일찍 왔는데 이미 배우 절반이 와 있었다. 보아하니 모두들 이번 경합에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 것 같다. "어제 어디 갔었어요?" 한쪽 구석에서 유청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예수진이 이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만약 계지원의 대기실에서 하루 종일 잠들었다고 한다면 내일 연예뉴스 헤드라인에 ‘한물간 여자 스타가 경합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기 위해 유명 감독을 유혹했다.’라는 기사가 뜰
계지원이 도착하자 모두가 그의 주의에 모여들었다. "어제 스케줄대로 오늘도 리허설을 계속해주세요.” 계지원은 이어 말했다. "일단 한번 해 보죠. 예수진 씨는 어제 불참했으니 일단 같이 진행해 보고 안되면 따로 가서 연습해주세요.” "네." 모두가 동의하고 연습을 시작했다. 예수진은 매우 배우들과 합을 맞추었는데, 어제 계지원에게 받은 대본이 매우 유용했다. 그녀는 어젯밤에 혼자 집에서 두 번 연습했고, 금세 캐릭터의 느낌을 찾았다. 오늘 다른 사람과 합을 맞추니 더 느낌이 살았다. 한 번의 연습 공연을 마치자 모두가 예수진의 연기에 놀랐다. 예수진의 연기가 어제와는 완전히 달라졌다. 어제는 예수진의 연기는 정신없고 혼란스러웠지만 오늘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전에는 예수진의 캐릭터가 별로 중요하지 않고, 부각되는 부분이 많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순간에는 예수진의 캐릭터가 분명히 뛰어나다는 생각이 들을 정도였다. 캐릭터의 분량은 많지 않지만 긴장감을 주었고 관객들에게 기억되기 쉬웠다. 또한 분량이 많지 않아 관객들에게 피로감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연기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나쁘지 않네요." 계지원은 다른 배우들의 칭찬을 인정했다. 모든 배우들은 계지원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의 계 감독은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안색은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계지원의 카리스마였고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오늘 계지원의 기분은 모두가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 분명 방금 연습 공연 중에 실수한 배우가 두 명이나 있었는데, 계 감독은 화를 내지 않고 따뜻한 말로 격려했다. 오늘은 계 감독님의 촬영운이 좋은 날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눈에서 저런 미소가 나오겠는가!하루 종일 리허설을 하고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순간, 조 감독이 와서 오늘 첫 방송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배우들에게 감사하는 의미로 오늘 저녁을 총괄 PD
”수진 씨." 감독이 갑자기 예수진의 옆에 왔다. 예수진은 재빨리 일어났다. "앉아요, 앉아요." 감독이 그녀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오늘 밤 보니까 말도 별로 안 하고, 술도 안 마시던데 오랜만에 연예계에 복귀해서 적응이 안 돼요?” 사실 그녀는 예전에도 이런 회식자리에서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때는 각종 행사들로 바빠서 매니저도 그녀에게 이런 회식 자리에 참석하게 해 줄 방법이 없었다. "좀 적응이 안 되네요." 예수진은 웃으며 급히 자신의 술잔에 술을 채우고 말했다. "감독님, 제가 한 잔 올려드리겠습니다.” "하하. 좋아요." 감독도 거절하지 않았다. 예수진은 그렇게 감독의 비위를 맞추었다. "수진 씨 주량이 세네요." 감독이 칭찬했다. "아니에요, 평소에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아요." 아무리 주량이 세더라도 밖에서 숨기지 않으면 술로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밤은 영광이네. 자, 우리 한 잔 더 마셔요." 감독은 열정으로 말했다. 예수진은 그렇게 할 수 없이 감독이 따라 주는 술 두 잔 더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잠시 술을 마시다가 감독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수진 씨, 연예계를 떠난 몇 년 동안 어디 있었어요? 뭐 하고 지냈어요?""그냥 작은 도시서 쉬면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때 왜 갑자기 퇴출당한 거예요?” 감독이 물었다. 예수진은 그가 이런 일에 관심을 갖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작은 일이 있었어요.” "누구 미움이라도 샀어요?” 예수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 씨는 아직도 나한테 아무것도 말하지 않네요. 나는 엄청난 압박을 이겨내고 수진 씨를 이 프로그램에 섭외했는데.” 감독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육씨 가문이요." 예수진은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어쨌든 지금 육씨 가문은 연예계 일을 관여하지 않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을 이유도, 더 이상 그녀를 표적 삼을 이유도 없었다. "육씨 가문?"
예수진은 화장실로 들어갔고, 짜증이 난 상태로 거울에 비친 화장도 하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촬영장에서 화장을 두껍게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화장을 하지 않은 산뜻한 얼굴로 다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예수진은 감독이 왜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배우들 중에서 그녀가 가장 예쁘지도 않고 사근사근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진이 가장 배경이 좋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싶어서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오늘 밤 만약 감독을 거절한다면 예수진은 다음번에 경합 이후 하차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발표할 것이다. 게다가 연예계는 인맥들이 서로 잘 연결되어 있었고, 이번에 예수진의 태도에 따라 향후 활동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았다. 절대로 이를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 위기가 정말 괴로웠다. 연예계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이 길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좋은 배경도 있었지만, 배경이 있는 없든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예수진은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모두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렇게 30분이라는 긴 시간동안 화장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면, 그녀는 달팽이가 자신의 껍질에 틀어 박혀 있듯 아마 계속 화장실에 있었을 것이다. 예수진은 심호흡을 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화장실 입구에 서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멈칫했다. 계지원이였다. "집에 데려다줄게.” 계지원이 그녀에게 말했다. 계지원은 거부하기 힘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먼저 가세요." 예수진은 거절했다. "저번에 술 먹고 취한 다음날 컨디션이 어땠는지 잊었어?” "걱정 마요. 나도 내 위지를 잘 아니까.” 그 말을 하고 예수진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예수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
"됐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이미 오래된 일이고, 나도 더 이상 신경 안 써." 그러자 예수진이 계지원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이번에 복귀하면서 일부러 네 앞에 나타난 거 아니니 네가 미안해하고 동정할 필요도 없어. 나는 나한테 주어진 운명에 맞게 잘 살고 싶을 뿐이야. 그리고 네가 나에게서 떨어져 있기를 바라.” 예수진은 있는 힘껏 계지원의 손을 뿌리쳤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계지원은 지금 예수진의 힘에 몇 걸음 뒤로 밀렸다. 그리고 예수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계지원은 주먹을 세게 쥐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수진이 술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감독은 예수진을 기다리다 지쳤는지, 이미 다른 배우가 그의 옆에 앉아 술을 권하고 있었다. 예수진은 잠시 그 옆에 있다가 감독이 반응하지 않아 옆에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방금 계 감독을 만나서 몇 마디 얘기를 나누느라고요." 예수진은 아무 핑계나 댔다. "여배우들은 계지원을 참 좋아해.” 감독이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했다. "하긴, 잘생기고 재능도 있는데 안 좋아할 수 있겠어요? 우리 같은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감독님, 농담하시는 거죠? 감독님께서도 얼마나 유능하신대요! 여배우들이 감독님께 다 몰려들고 있잖아요.” "그럼 거기에 수진 씨도 포함인가?" 술을 세잔이나 원샷으로 마신 감독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예수진을 쳐다보며 능글맞게 물었다. "물론이죠." 예수진이 먼저 감독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감독은 예수진에게 술을 받으며 일부러 예수진의 손을 만졌고,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었다. 그녀가 감독에게 술을 마시려고 권할 때, 낯익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진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감독은 황급히 예수진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계 감독님, 앉으세요.” 계지원은 감독과 예수진의 사이에 앉았다. 계지원이 앉으며 예수진의 다리를 건드리자 그녀가 옆으로 움직
예수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는 마음속으로는 이미 계지원을 욕하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 감독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해 이 위기를 지나가려 했는데, 지금 그가 그녀의 계획을 방해한 것이다. "감독님, 제가 예수진 씨를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요?" 계지원이 입을 열자 예수진도, 감독도 순간 당황했다. "내일 우리 팀 리허설이 있는데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면 컨디션에 영향을 줘서요. 우리 팀 다른 배우들도 함께 데리고 갈 거예요. 문제없죠?" 계지원의 말에 예수진은 살짝 흥분된 감정을 재빨리 숨기기에 바빴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돌아가니 괜찮다. 그렇지 않으면 이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10시도 안 됐는데 너무 이르지 않아요?” 감독이 재빨리 핑계를 대며 말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보통 12시 넘어서 자잖아요.” "12시에 자면 컨디션에 영향을 줘서 안 돼요. 게다가 배우들 얼굴이 부은 상태로 촬영하면 촬영에도 영향을 주고요.” "리허설일 뿐 정식으로 촬영도 아니잖아요.” "모든 무대를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배우죠.” 계지원은 강경한 태도로 말하자 감독은 더 이상 계지원에게 반박할 수 없었다. 감독은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래요, 그럼. 다른 팀 사람들에게 먼저 간다고 인사나 하고 가세요. 수진 씨는 제가 따로 데려다 줄게요.” "왜 수진 씨를 따로 데려다 준다는 거죠?" 계지원이 대놓고 물었다. 연예계 사람들은 계지원이 일부러 이렇게 한다는 것을 다 알았다. 감독은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계 감독님, 배우의 사적인 일은 보고 안 해도 되지 않을까요?”"앞으로는 이런 말 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 팀에서는 어떤 상식 밖의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계지원은 확고하게 말했다. "이건 다른 배우들에게도 불공평한 일이예요. 저는 감독님이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뜻 인지 이해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그녀는 감독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그녀의 집은 시내에서 가장 먼 것일까? 다른 두 배우가 없었다면 차 안은 매우 조용했을 것이다. "닦아.” 계지원이 갑자기 물티슈를 건네며 말했다. 물티슈를 건네받은 예수진은 본능적으로 입을 닦았다. 그녀는 방금 입에 뭐가 묻었는지 알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손." 예수진은 무슨 말인지 몰라 잠시 당황했으나 곧 자신의 손이 감독의 손에 닿았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계지원은 여전히 이렇게 결벽증이 있다. 예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묵묵히 손을 물티슈로 닦았다. "나중에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프로그램을 하고 한 네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할 거야. 장담할 수 있어.” 계지원이 말했다. "고마워요." 예수진이 고맙다고 대답했다. 오늘 밤 계지원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고, 감독은 더 이상 그녀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설령 감독이 다시 그녀를 찾는다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변명거리가 있으니 감독은 예수진을 난처하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옛날에 말이야……" 계지원이 말했다. "옛날 얘기는 하지 마요.” 예수진은 그의 말을 끊었다. “좋지 않았던 일은 그냥 넘어가. 나는 이미 다 잊었어.” 계지원의 목젖이 움직였다. 좋지 않은 일들이라.. 그녀에게 과거는 정말 모두 좋지 않았던 일인가? 잠시 후, 예수진의 동네에 도착했다. 예수진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떠났다. 계지원은 예수진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망가진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다. ……한편, 은하 그룹. 소이연은 감기가 나아서 임원 회의에서 업무를 배정하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가 울리자 그녀는 휴대전화 화면을 한번 보고 거절버튼을 눌렀다. 카톡이 왔다. "급한 일이예요. 전화 받아요.” 소이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천우진이 이렇게 급하게 그녀를 찾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소이연은 전화를 받기 위해 임원들에게 말했다. "다음 시즌 의상 출시 계획에 대해 상의하고 있으시겠어요? 전 잠깐 전화 좀
소이연은 육민을 데리고 공항으로 갔다. "엄마,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육민이 긴장해서 물었다. 이렇게 심각한 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응. 외증조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입원하셨어.” "건강이 심각하신 거예요?” "응." 육민은 엄마가 지금 매우 초조해하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천우진이 마련해 준 차를 타고 곧바로 로열 병원으로 갔다. 로열 병원의 한 층은 전체가 천제진 한 사람을 위해 사용되었다. 소이연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천우진이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떠세요?" 소이연이 물었다. "방금 긴급 수술 받고 중환자실로 옮기셨어요.” "그럼 위험한 상황은 아닌 건가요?” "아뇨,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셨어요. 의사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천우진의 표정이 어두웠다. 소이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육민을 데리고 천우진을 따라 중환자실로 갔더니 밖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천씨 가문의 가족들 외에도 임씨 가문 사람들도 많이 와있었다. 임가 할머니를 포함한 임아영과 루카스도 와있었다. 소이연은 그들에게 인사하지 않고 바로 지나쳤고, 중환자실 창문을 통해 천씨 어르신이 산소호흡기를 쓰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다. 천제진이 갑자기 확 늙은 것 같이 보였다. 늙은 그의 모습을 보니 소이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소이연은 자신이 천씨 가문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천씨 어르신이 이렇게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큰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심각해지신 거죠?" 소이연이 참지 못하고 천우진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서울을 떠날 때는 분명히 천제진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제 겨우 보름정도 지났을 뿐이다."모르겠어요. 저도 오전에 집사한테 할아버지가 오늘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시다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지체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