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육민을 데리고 공항으로 갔다. "엄마,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육민이 긴장해서 물었다. 이렇게 심각한 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응. 외증조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입원하셨어.” "건강이 심각하신 거예요?” "응." 육민은 엄마가 지금 매우 초조해하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천우진이 마련해 준 차를 타고 곧바로 로열 병원으로 갔다. 로열 병원의 한 층은 전체가 천제진 한 사람을 위해 사용되었다. 소이연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천우진이 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지금 어떠세요?" 소이연이 물었다. "방금 긴급 수술 받고 중환자실로 옮기셨어요.” "그럼 위험한 상황은 아닌 건가요?” "아뇨, 아직 깨어나지도 못하셨어요. 의사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천우진의 표정이 어두웠다. 소이연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육민을 데리고 천우진을 따라 중환자실로 갔더니 밖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천씨 가문의 가족들 외에도 임씨 가문 사람들도 많이 와있었다. 임가 할머니를 포함한 임아영과 루카스도 와있었다. 소이연은 그들에게 인사하지 않고 바로 지나쳤고, 중환자실 창문을 통해 천씨 어르신이 산소호흡기를 쓰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다. 천제진이 갑자기 확 늙은 것 같이 보였다. 늙은 그의 모습을 보니 소이연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소이연은 자신이 천씨 가문에 대한 애정이 깊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 천씨 어르신이 이렇게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큰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것처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심각해지신 거죠?" 소이연이 참지 못하고 천우진에게 물었다. 지난번에 서울을 떠날 때는 분명히 천제진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제 겨우 보름정도 지났을 뿐이다."모르겠어요. 저도 오전에 집사한테 할아버지가 오늘 갑자기 소파에서 일어나시다가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지체
루카스는 임아영도 없이 혼자였다. 육민도 루카스를 보고 놀라 눈이 반짝였다. 조금 흥분한듯 해 보였다. 육민은 병원에서 루카스를 보았지만 다들 슬퍼하고 있어서 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이 시간까지 루카스가 돌아가지 않았다니! 하지만 육민은 루카스가 엄마를 버렸다는 생각에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루카스도 그들을 보고 순간 살짝 놀랐다. 이치대로라면 소이연은 천씨 저택에 머물러야 했다. 소이연 역시 루카스가 당연히 임씨 저택에서 머물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놀랐다. 같은 도시에 있는 한 그들은 반드시 만나게 될 운명 같았다. "소이연 님."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그녀를 불렀다. "여기 방 키입니다.” "체크아웃을 하고 싶어요." 소이연이 바로 결정을 내리자 루카스의 눈동자가 놀라 눈에 띄게 움직였다. "소이연 님, 체크 아웃하신다는 말씀이신 가요?"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확인했다. "네, 체크아웃해 주세요. 당분간 이곳에서 머물고 싶지 않아서요." 소이연이 솔직하게 말했다. "아,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친절한 태도로 말했다. "왜 체크아웃을 하는 거야?” 루카스가 물었다. “보고 싶지도 않은, 만나고 싶지도 않은 어떤 사람 때문에." 소이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루카스의 안색이 어두웠다. 소이연은 프런트 데스크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받아 육민을 데리고 호텔에서 바로 나갔다. "소이연.” 루카스가 뒤에서 그녀를 불렀지만, 소이연은 못 들은 척했다. 오히려 육민이 뒤들 돌아 그를 보았다. 육민은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아빠가 엄마를 달래주길 바라고 있었다. 아빠와 엄마가 다시 만나야 가족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이연!” 루카스는 약간 화가 났다. 이 여자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센 거야?! 이 밤중에 아이를 데리고 호텔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루카스는 소이연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성큼성큼 그녀를 뒤쫓아갔다. 루카
소이연은 육민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소이연의 본능은 정말 최선을 다해, 육민을 다치지 않게 보호했다. 그녀는 육민을 놓아주었다. 육민은 소이연의 품에서 벗어나 고개를 돌렸다. 육민의 작은 얼굴빛이 변했다. "루카스!” 육민이 루카스의 모습을 보고서는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소이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낀 그녀는 순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바닥에 쓰러진 루카스를 바라보았다. 통제 불능의 오토바이와 운전자는 한쪽으로 넘어졌고 루카스는 오토바이에 깔려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호텔 경비원이 앞으로 나오며 급하게 물었다. 호텔 입구 근처에 있던 사람들도 몰려들며 누군가가 말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이 남자분이 오토바이를 밀치지 않았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을 치었을 수도 있어요.” “정말 무서웠어요. 어떻게 이 지경까지 통제력을 잃은 건지, 호텔 안으로 들이받는 줄 알았어요.” "운전자가 술에 취한 것 같아요......” 소이연은 사람들 속을 헤집고 들어가 루카스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육민도 옆에서 긴장한 얼굴로 루카스를 쳐다보았다. 루카스는 몸에서 피를 흘리며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루카스?" 소이연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는 공포가 한없이 가득 차 있었다. 소이연은 자신이 왜 이렇게 두려운지 알 수가 없었다.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척이나 아팠다. 가슴이 쥐어 뜯기듯 아팠다."나 안 죽었어.” 루카스는 힘겹게 눈을 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성격은 죽지 않았다. 그의 이런 성격에서 알게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소이연은 호텔 경비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구급차 불렀어요?” "불렀어요, 금방 올 거예요.” "빨리 오토바이를 그의 몸 위에서 치워주세요." 소이연이 호텔 경비원에게 말하자 경비원들이 급히 달려가 루카스의 무거운 오토바이를 치워주었다. "어때요? 다리 움직일
루카스를 기다린 지 2시간 만에 그가 응급실에 나왔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다리에 깁스를 하고 머리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언뜻 보니 다소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 이 사람 정말 괜찮은 건가요?" 소이연이 다급하게 물었다.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서 철심을 박아 넣어서 한 3개월은 고정시켜 놔야 해요. 3개월 뒤 문제가 없으면 제거 수술을 하고 쉬면 될 것 같아요.” "설마, 다리를 절게 되는 건 아니죠?" 소이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루카스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그가 장애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걱정 마세요. 그럴 일은 없어요.” 그리고 의사가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경미한 뇌진탕이 있어서 일단 입원해서 지켜보다가 괜찮으면 내일 퇴원하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소이연은 마음을 놓으며 의사에게 인사했다. 어쨌든 루카스는 다쳤기 때문에 그녀는 바로 숙소로 갈 수 없었다. 소이연과 육민은 루카스를 데리고 병실로 갔다. 그를 안정시킨 후 소이연은 말했다. "간병인을 고용했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간병인을 부르면 돼.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나는 민이랑 먼저 갈게, 병원비는 내가 이미 지불했어. 나중에 드는 치료비도 내가 책임질게.” "알았어." 루카스는 소이연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소이연이 육민을 데리고 병실을 나오려는 순간, 육민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엄마." "응, 왜?” “루카스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 육민이 물었다. 루카스에 대한 육민의 집착이 도대체 얼마나 깊은 것일까? 육민은 고개를 떨구며 애처롭게 말했다. "루카스 혼자 병원에 두고 가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병원에 의사 선생님들이랑 간호사도 있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도 모두 다 낯선 사람들이잖아요.” 육민은 정곡을 찌르며 말했다. "루카스 혼자 외롭지 않겠어요?” 소이연은 말문이 막혔다. “엄마, 만약에 엄마가 병원에 있기 싫으면 저 혼자라도 있게 해 주면 안 돼요?"
"고마워요. 엄마”육민은 원래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인데, 이 순간만큼은 숨김없이 감정을 표현했다. 육민이 정말로 루카스를 아빠로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아빠 대역으로? !소이연은 더 이상 둘 사이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괜찮다면......”"난 상관없어.”루카스가 솔직하게 말했다."어차피 병실에 침대가 하나 더 있으니 육민과 한 침대에서 자면 돼."소이연이 말했다.최상급 vip 병실의 침대 크기는 무척이나 컸다. "응.""그럼 지금 필요한 게 뭐야?" 소이연이 오늘 이곳에 남아있기로 한 이상 그냥 환자를 돌본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오늘 밤 발생한 일에 대해 루카스에게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다. 소이연이 돌아서서 떠나려 했던 이유는 단지 임아영과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육민 때문이다. 육민과 임아영 중 당연히 육민이 더 중요하다. "필요한 건 딱히 없어.” 루카스가 대답했다. "그럼 먼저 민이 데리고 씻고 올게. 아직 성장기라 일찍 자야 해서.” "편한 대로 해." 루카스는 담담하게 말하고는 차분한 태도로 휴대전화를 보였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외로움을 타고, 같이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니! 잊자, 루카스도 육민의 마음을 꺾고 싶지 않아 했다. 소이연은 육민을 부르며 말했다. "민민, 샤워하러 가.” "네." 육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육민은 지금 마음이 너무 행복해서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웠다. 육민은 자신의 트렁크에서 속옷과 잠옷을 찾아 욕실로 가자, 병실에는 소이연과 루카스만 남았다. 두 사람만 있자 조금 어색했다.특히 저번에 임아영이 한 말은 소이연의 마음에 가시로 남아 본능적으로 루카스에 대한 거부감이 들었다.병실이 조용했다. "정말 임아영 씨에게 알리지 않을 거야?" 소이연이 물었다. "당분간 말하지 않을 거야. 루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조만간 알게 될 텐데.” "오늘은 너무 늦었어.” "만약 내가 네 여자친구라면, 나를 생각해서
“엄마, 저 다 씻었는데, 엄마 씻으실 거예요?”“응.” 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민이는 일찍 자.”“네.”소이연은 욕실로 들어갔고, 육민은 반듯하게 옆에 있는 간이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고개를 돌려 루카스를 보았다.루카스는 또 휴대폰에 집중하고 있었다.사실상은 같은 페이지를 30분 동안 보고 있었던 것이였다. 소이연과 육민이 와서 마음이 뜬 것 외에도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떠오르는데, 마치 병원에 입원한 것 같았다. 하지만 또 자세히 생각해 보려고 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3년 전, 그는 기억을 잃었다.교통사고로 쓰러졌고, 깨어나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그때 마주한 가족들과 친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낯선 느낌만 들고 익숙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그 외로움과 무력함은 그를 끝없이 무너지게 했다.마침 그때 같은 병원에서 심장 치료를 받던 임아영을 만났고, 그녀의 천진난만함과 순수함, 그리고 인생에 대한 열정이 그를 물들였다.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다.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매번 무엇인가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속에서 뭔가 잊어버린 것이 있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그는 마음을 온전히 열 수가 없었다.“루카스.”그때, 육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루카스는 정신이 팔려 있다가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랐다.그는 고개를 돌려 육민을 보았는데, 육민은 이불을 폭 덮고 작은 머리통만 밖에 쏙 내놓고 있었다.“놀랐어요?” 육민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를 보며 물었다.“아니.” 루카스는 급히 부인했다.육민의 작은 얼굴에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꽃이 피어 올랐다.“뭐해달라고? 방금 네 엄마 말 못 들었어? 일찍 자라고 했잖아. 넌 아직 성장기여서 네 엄마가 일찍 안 자고 나랑 떠들고 있는 거 보면 또 나한테 뭐라고 할 거야.” 루카스가 엄격하게 말했다.가르치려는 모양이었다. 분명 예전의 아빠와도 똑같았다. 그의 성격은 이렇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빨리 자신을 알아야죠.” 육민은 루카스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지금 계속 고민할수록 더 후회하게 될거예요.”“난 후회같은거 안 해.” 루카스는 단호하게 말했다.“왜 아직도 그렇게 고집을 부려요?” 육민은 애늙은이같이 말했다. “진짜 우리 엄마가 포기하길 바라요?”“나랑 네 엄마는 애초에 아무 관계도 없어!”“근데 아직도 엄마를 못 놓고 있잖아요. 아니면 왜 목숨까지 걸고 우리 엄마를 구하러 왔겠어요?”루카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네 엄마가 나 때문에 위험해진 거니까. 나도 그저 예의상 한 거야.”“그러니까 다 핑계잖아요.” 육민은 단호하게 말했다.“10살짜리 꼬맹이가 대체 뭘 안다고 그래?” 루카스는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꼬마 친구는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흥.” 육민은 루카스의 말에 화가 났다. “어차피 나중에 엄청 후회할텐데..! 저도 이제 안 도와줄 거예요.”루카스는 애초에 육민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육민은 이불을 폭 덮고 루카스를 등진 채 잠에 들었다.뒤통수만 봐도 그가 화난 게 보였다.루카스는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었다. 육민에게는 항상 말 못 할 호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욕실에서 나오는 소이연을 보고는 시선이 흔들렸다.그녀는 캐리어를 가지고 오지 않아 환자복을 아무렇게나 주워 입었다.샤워를 해서 그런지 얼굴에는 붉은기가 있었고, 몸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투명함이 느껴졌다. 루카스는 침을 꼴깍 삼키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소이연은 루카스의 작은 행동을 알아채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육민을 보았다.그리고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는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다.그녀는 병실의 조명을 어둡게 하고 육민의 침대에서 같이 잠을 청했다.소이연과 같이 수면의 질이 아주 나쁜 사람이 병원에서 잔다는 것은 아예 안 자는 것과도 같다.그냥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명상을 하는 것 뿐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루카스도 누워서
만약 갑자기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넘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는 넘어진 순간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건 도대체 누굴 위함인가?!“필요해?” 소이연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네 생각에는?” 루카스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혼자 일어나라니까 드디어 체면을 버리는 건가?!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부탁하는 사람이 이렇게나 당당하다니!그녀는 최대한 육민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루카스의 앞으로 가 힘겹게 그의 위에 쓰러져 있던 휠체어를 치웠다.그리고 또 힘겹게 루카스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진짜 너무 무거웠다.남자들은 다 이런가?살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정작 기대니까 마치 쇳덩이와도 같았다.예전에 육현경도 그랬는데......순간 육현경이 떠오르자 소이연은 마음 한편이 아파왔다. 그리고 갑자기 육현경이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누군가는 아무리 잊으려 노력해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한번 생각나면 가슴이 찢어지고 뼛속까지 아팠다.“묫자리 짚어?” 갑자기 루카스가 소이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소이연은 깜짝 놀랐다.육현경을 생각하다가 정신이 팔린 것이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흔들렸다.루카스는 한 발로 서있어서 위태로웠는데 소이연의 몸이 흔들리니까 같이 흔들렸다.“아!”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루카스는 정말 너무나도 무거웠다. 그가 이렇게 움직이니 그녀는 아예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와 함께 다시 “꽈당”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이번엔 결국 육민까지 깨워 버렸다. 그는 비몽사몽 눈을 뜨고 바닥에 누워있는 두 사람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이, 이게......소이연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심장이 빨리 뛰는 것만 느껴졌다.그리고 겨우 진정하고 나니 육민의 놀란 눈이 보였다.소이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육민은 빠르게 등을 돌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마치 이불 속으로 원숭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