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파, 못 일어나겠어.” 루카스의 말투는 그리 곱지 않았다.소이연은 깊게 호흡을 했다.스스로에게 루카스는 자기 때문에 다친 거라고, 루카스는 자기가 힘이 부족해서 넘어진 거라고 되뇌이며 더는 그와 말다툼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몸을 숙여 또 루카스를 부축했다.루카스는 소이연에게 몸을 기대 그의 몸무게가 소이연을 눌렀다.소이연은 이 사람이 복수를 하는 건지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었다.겨우 그를 변기 옆에 일으켜 세웠다. “내가 바지도 벗겨 줘야 돼?”“소이연 이 변태!” 루카스가 흥분해 말했다.“갑자기 왜 흥분하고 그래?!” 소이연은 갑작스러운 루카스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슬슬 성질도 났다.“설마 속마음을 들킨 거야?!”“당장 나가!” 루카스가 성질을 냈는데, 의외였던 것은 반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소이연도 당연히 그렇게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루카스와는 세 마디도 못하고 매번 싸웠다.그녀는 이번 생에 이렇게 어이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소리연은 욕실에서 나올때, 문을 쾅 닫아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 싶었지만, 육민이 자고 있다는 걸 생각하니, 꾹 참고 결국 문을 살짝 닫았다.“엄마.” 육민은 소이연이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게진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소이연은 순간적으로 평온함을 되찾았다.다른 사람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미안해, 깨웠지?”“괜찮아요.” 육민이 웃으며 말했다.그는 평소에 잘 웃지 않았지만 웃을 때마다 마치 봄에 꽃이 피는 것 같았다.육민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연기처럼 사라졌다.“루카스랑 싸웠어요?”“싸운 건 아니지.” 소이연이 설명했다. “상관없는 사람이랑은 싸울 것도 없어.”“엄마는 말을 너무 심하게 해요.” 육민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말투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있었다.어린 나이에 이런 모습을 보이니 마치 여자를 꼬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하지만 그의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여자친구를 사귀지 못할까 봐 걱정도
그녀는 그가 바지를 입었는지 확인한 뒤에야 문을 열었다.욕실 안, 루카스는 변기 앞에 서서 미동도 않고 있었다.아마 방금 넘어진 뒤 교훈을 얻고 지금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임이 틀림 없었다. 소이연이 루카스를 부축하자 그는 바로 그녀의 몸에 기댔다.이 자식, 진짜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건가?아주 당연하게 나를 이용하고 있잖아? 소이연은 그를 부축해 휠체어에 앉히고는 침대로 향했다.그리고 또 엄청난 힘을 들여서 루카스를 부축해 침대에 올려주고 자기 침대로 돌아가 쉬려고 하던 순간, 루카스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소이연.”“왜 또?”“갑자기 좀 씻고 싶어졌어.”“......” 소이연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너랑 민이는 깨끗하게 씻어서 좋은 냄새가 나는데, 나만 땀 냄새가 날 수는 없으니까. 몸 좀 닦는 것도 안 돼?”루카스는 소이연이 불쾌해하는 것을 보고 목소리를 키웠다.“조용히 할 수 없어? 민이 자잖아.” 소이연이 화를 참으며 말했다.“나 진짜 씻고 싶어. 너무 찝찝해.” 루카스는 전혀 굴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간호사 불러줄게.”VIP 병실에는 방이 두 개가 있다. 밖에는 간병인이 잘 수 있는 소파가 있다.방금 간병인을 부르지 않은 것은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간병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이런 일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기에 루카스도 거절하지 않았다.소이연이 방에서 나갔지만, 간호사는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간병인의 연락처도 없었다.소이연은 이를 악물고 병실로 돌아갔다.루카스는 이미 입고 있던 환자복을 벗고 씻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만약 간병인이 없으면, 오늘 몸 안 닦으면 안 돼?” 소이연이 물었다.루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옷도 다 벗었는데 못 닦는다고?!오늘 잘 수나 있을까?그는 정말 간절히 씻고 싶었다.그냥 몸 한 번 닦아주기가 그렇게 힘드냐는 생각도 들었다. “간병인이 없어.” 소이연은 루카스의 바보 같은 모습
고요함 속에서 공기마저 뜨거워진 것 같있고, 마치 서로의 심장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소이연도 왜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그냥 환자를 보살피는 것뿐이고, 다만 이 환자의 몸이 조금 좋은 것뿐이였다. 그녀는 최대한 자기 손이 루카스의 몸에 직접 닿지 않게 했다.상반신을 닦고 난 뒤, 그의 다리를 닦기 시작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 전체를 다 닦았고, 고개를 드니 얼굴이 새빨개진 루카스가 보였다.여태 닦는거에만 집중하며 다른 곳에 집중하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가만히 누워있던 사람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을 줄은 몰랐다.소이연은 그 순간 멍해졌다.이건 도대체 순진한 거야 아니면......?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고, 그와 마주친 순간 갑자기 뭔가 눈을 마주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말했다. “다 닦았어, 거기는 내가 안 닦아줘도 되지?!”루카스의 얼굴은 더 빨개졌다.그도 왜 갑자기 자신이 이렇게 부끄러운지 알 수 없었다.예전에도 이런 적은 없었다.비록 다른 여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지만, 이렇게까지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얼굴과 귀가 빨개진 적이 없었다.소이연을 만난 건 정말 귀신을 본 것 과도 같았다.“생각도 하지 마!” 루카스는 악랄하게 말했다.그러자 소이연은 그를 깔보며 “쯧” 소리를 냈다.그녀는 수건을 루카스에게 건네며 말하고는 뒤돌아섰다. “빨리해.”루카스는 빠르게 받아들고 닦았다. “다 됐어.”소이연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더러운 것을 보게 될까 봐 두려웠지만 그렇지 않았다.루카스는 그녀가 볼 세라 이미 자신을 꽁꽁 싸맸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닦아달라고 하면서 또 보여주기는 싫어하는 게 정말 어이가 없었다.그는 소이연이 수건을 받기 전에 따뜻한 물이 담긴 바구니에 넣었고,그 바구니를 통째로 들고 욕실로 가 집게손가락으로 수건을 건져 쓰레기통에 던졌다.정말 더러웠다.소이연은 아주 열심히 손을 깨끗이 닦고 다시 병실로 돌아와 육민의 옆에 누웠다.어린아이의 수면의 질은 굉장히
“별거 아니야. 얼른 자.” 루카스는 곱게 말하지 않았다.하지만 자세히 들으니, 그의 호흡이 가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소이연은 애초에 대꾸하기도 싫었지만 루카스는 오늘 다친 사람이니, 만약 몸에 문제라도 생겼더라면 또 고집을 부릴 게 뻔했기에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루카스에게 다가갔다.루카스는 소이연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그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놀라서 침대에서 떨어질 뻔했다.“소이연, 너 귀신이야?! 어떻게 발소리도 안 내고 와?”“조용히 해.” 소이연은 루카스의 깐깐함에 어이가 없었다.그녀는 육민이 자고 있으니, 당연히 조심스럽게 행동했을 뿐이다.“왜 왔어. 빨리 네 침대에 가서 자.” 루카스가 명령했다.소이연은 루카스의 말을 무시했다.꼿꼿이 그를 보니, 얼굴은 심각하게 빨갰고, 호흡은 가빴다. 아무리 봐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다.“너 열나는 거 아니야?” 소이연이 물었다.방금 얼굴이랑 귀가 빨개졌던 게 열이 나서 그런 거였어?루카스는 그녀를 밀어내는데 왜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지겠어! 소이연은 열이 나서 빨개진거라고 생각이 들어 급히 다가가 그의 이마를 만져보았다.“너 뭐 하는 거야?!” 루카스는 온 얼굴을 가리며 소이연을 피하기 바빴다. “나 열 안 났어! 네가 열이 올랐겠지!”“......” 열이 나서 멍청해진 건가? “루카스.” 소이연은 화도 내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환자면 환자처럼 행동해. 잘난 척은 왜 해!상처가 감염돼서 열나는 거 아니야?”“열 안 났다고!” 루카스는 굉장히 흥분했다.“그 열 말고!” 소이연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어쩜 고집이 이렇게 세지?“그 열도 안 났어.” 루카스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소이연은 심호흡을 하고 스스로 자신 때문에 다친 환자와 싸우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그대로 호출 벨을 눌렀다. “잠시 와주세요. 환자가 열이 나는 것 같아요.”“네.”호출 벨 저 편에서 급히 대답했다.“소이연, 나 열 안 난다고 했잖아.” 루카
공기는 순식간에 고요해졌다.모든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카스만 쳐다보고 있었다. 쪽팔려!방 안에는 민망함만이 맴돌았다.“당장 이불 내놔!” 루카스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소이연은 급히 루카스에게 이불을 돌려주었다.루카스는 화를 내며 이불을 다시 머리끝까지 덮었다.“그게... 정상입니다.” 의사가 입을 열어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소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랐다.“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요?!” 루카스는 이불을 두르고 화를 내며 말했다.의사는 급히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빨리 가세요!” 루카스는 짜증 난다는 듯 재촉했다.“가족들께서 잘 챙겨주세요.” 의사는 간호사를 데리고 나가면서 말했다.“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소이연은 조금 민망했다.의사가 간호사를 데리고 나간 뒤, 소이연은 번데기처럼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루카스에게 말했다. “이불에서 나와.”“신경 쓰지 마.”“방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정상이라고.”“정상인지 아닌지는 당사자인 내가 알아. 넌 조용히 해!” 루카스는 막말을 파 부었다.소이연은 그 누구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그럴 것 같다고 생각했다.게다가 루카스처럼 이렇게 체면을 차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창피해할 것이다. 소이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루카스의 침대 옆을 떠났다.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루카스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버티다가 그제서야 이불 밖으로 나왔다.이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몸은 조금 편해졌다.하지만 오늘 그 장면을 떠올리기만 하면 심장이 조여왔다. 그는 도대체 전생에 소이연과 원수지간이었는지, 그녀를 마주칠 때마다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엔 심지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고요함 속에서 소이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루카스는 깜짝 놀랐다.이 여자의 의도는 고의가 분명했다. 고의로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를 놀래 킨 것이다.그는 어느 날 그가 죽는다면, 반드
게다가 비록 그는 3년 전 기억을 잃었지만, 그의 인생과 지금의 그는 하나도 변함이 없었고, 어디서부터 뭘 의심해야 할지도 감히 잡히지 않았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에 몸을 뒤척이며 계속 잠에 들지 못했다. 머리속에서는 지금의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니냐던 육민의 말이 떠올랐다. 루카스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고, 그는 스스로 고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알아챘다. 이런 문제는 더 이상 생각하면 안 된다.더 생각하면 정말 정신병에 걸리기라도 한 듯 비정상적일 것이다.소이연은 옆 침대 사람의 멘탈이 계속 무너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민망한 것뿐인데 그렇게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이제 최소 새벽 3시는 됐을 텐데 아직도 안 잔다고?비록 조금 쪽팔린 건 사실이지만, 루카스는 이렇게 작은 일 때문에 밤새 우울해서 잠도 못 잘만큼 연약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소이연도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그를 위로하지는 않았다.그 역시 원치 않았다.이런 사람은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소이연은 몸을 일으켰고, 여전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그녀는 화장실을 갔다.자기 전에 물 한 컵을 마시면 안 됐다.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루카스도 당연히 소이연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이렇게나 늦은 시간인데 아직도 안 잔다고?!오늘 저녁에 민망한 사람이 본인도 아니면서!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갑자기 소이연이 불면증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녀가 또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지, 자기도 모르게 걱정이 되었다. 루카스는 얇은 입술을 문질렀다.분명 이 여자에게 신경 쓰면 안 되는데, 왠지 모르게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심지어 관심을 안 가지려고 할수록 정반대로 오히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두 신경 쓰고 있었다.이제는 그녀가 아직도 안 자니까 그의 마음은 더더욱 급해졌다.도대체 소이연한테는 왜 이런 걸까?!소이연은 화장실을 다녀왔고, 여전히
소이연은 결국 루카스의 옷을 집어 들었다.당연히 몸 건강이 우선이다.솔직하게 말해서, 그녀는 이미 한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집에 있는 루카스의 옷과 이불의 냄새가 사라지면서 그녀의 수면의 질 역시 점점 더 나빠진 상태였다.소이연은 잠들기 전, 루카스의 옷을 자세히 살펴보았다.아마 디자이너의 본능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옷이길래 루카스가 이렇게 신경을 쓰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한 눈에 그녀는 알 수 있었다.자신이 디자인한 옷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익숙했다. 이 옷은 은하 그룹의 럭셔리 브랜드에서 전 세계 한정판으로 나온 옷이다.이 옷의 브랜드는 비록 은하 그룹에 소속되어 있지만, 은하 그룹에 완전한 권한을 넘긴 것이 아니기에 은하 그룹의 대중적인 브랜드 방향성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그래서 같은 회사 소속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놀란 거 아니지?” 루카스는 소이연이 자신의 옷을 보는 모습을 보고 당당히 말했다.소이연은 대꾸하지 않았다.“인정해. 이 브랜드 옷은 네가 디자인한 것 보다 예뻐.”소이연은 침대에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옷에서 익숙한 냄새가 나서 소이연도 조금 잠이 왔다.“왜, 네가 생각해도 그래?” 루카스는 여전히 뿌듯한 듯 말했다.꼭 소이연을 이겨야겠다고 생각한 듯 해보였다. 소이연은 정말 루카스가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그녀는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마치 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소이연, 그래도 다른 사람이 잘 하는 건 인정해야 돼. 계속 너만 잘났다고 생각하지 말고.”“내가 언제 내가 대단하다고 했어?!” 소이연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이 옷 유행도 다 지났는데, 그렇게 자랑할 건 또 뭐야/”“베이직은 유행을 타지 않아. 넌 이런 베이직한 옷이 없으니까, 갖고 싶어도 못 가져서 그런 말을 하는 거겠지.”소이연은 정말 루카스에게 대꾸를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지금 오로지 잠을 자고 싶었졌다. “조용히 해. 그리고 만약 네가 이 디자이너 옷 좋아하면
“아니면 내가 직접 마린한테 전화해서 증명해 줘?” 소이연은 일부러 비꼬며 말했다.“됐어, 나 졸려. 잘래!” 루카스는 고의로 소이연에게 등을 돌렸다.그러자 소이연은 피식 웃었다.쫄보같으니라고!밤은 드디어 온전한 고요함을 되찾았다.모든 사람이 모두 잠에 들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소이연도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쉬지 못한 탓인지, 루카스의 옷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아주 깊게 잘 잘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직원들이 방에 왔을 때도 깨지 않았다.하지만 육민은 아주 일찍 일어났다.그리고 그는 살금살금 침대에서 내려와 직원이 방에 왔을 때에도 엄마의 잠을 깨울까 봐 직원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VIP 병실이니 직원들은 당연히 환자를 더 존중했고, 모두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루카스도 아주 졸려 보였다.어젯밤 너무 늦게 잔 탓이다.직원들이 여러 가지 검사를 한 뒤 루카스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조용한 병실에는 육민만 혼자 남아, 병원에서 주는 아침밥을 먹고 난 뒤에 휴대폰으로 온라인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었다.화목한 병실 안, 갑자기 문이 열리자 육민이 고개를 들었다.간병인이 있으면 아빠랑 엄마가 사랑을 나누는데 방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 그가 몰래 간병인을 보냈기에 들어오는 사람이 간병인인줄 알았다. 윤민이 재빨리 입을 열려던 순간, 그 사람은 그대로 루카스에게 돌진해 아주 다급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루카스, 너 왜 그래?!”루카스는 비몽사몽 눈을 뜨고 가까이에 있는 임아영을 보았다.임아영은 그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마치 그를 잃을까 봐 두려운 것처럼 말이다.그의 품에 안겨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몸을 들썩였다.그러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그녀는 진심으로 조금 더 자고 싶었다.정말 이렇게 편안하게 자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울음소리가 결국 그녀를 깨워 버리고 말았다.그녀도 비몽사몽하며 눈을 뜨자, 루카스에게 안겨있는 임아영이 보였다.“네가 여긴
예수진의 문자를 본 소이연은 바로 그녀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진정하고 일단 지수 씨가 뭐라고 하는지부터 봐요.][문수 씨가 꼭 서프라이즈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우리도 도와야죠.][알겠어요, 조심할게요.][수진이 너도 알고 있었어?][내가 뭘 알겠어, 난 아무것도 모르지]갑자기 달라진 예수진의 태도에 하지수는 바로 되물었다.[그럼 아까 한 말은 무슨 뜻인데?][그냥 송문수가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단 소리지, 전엔 망나니 같던 놈이 이젠 일도 잘하잖아. 지원 씨가 문수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러면서 하도경한테 분발하라고 맨날 뭐라 한다니까.]장문의 문자를 보내 아까의 실수를 만회한 예수진 덕분에 하지수도 더 이상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물론 말 자체는 의심스러웠지만 하지수는 오랜 친구인 예수진이 자신을 속일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일이 아니라 사생활 말이야.][사생활도 많이 정리된 거 아니었어? 둘이 잘 지냈잖아.][내 착각일 수도 있지 뭐.][그건 또 무슨 말이야?]예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하지수가 이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연 언니가 귀국한 날 나 사실 문수 씨랑 관계 할 뻔했거든, 그런데 그날 하필 생리가 터진 거야.][그래서?][못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문수 씨가 엄청 아쉬워했었어. 하도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어서 시한폭탄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계속해봐.][그런데 지금은 생리 끝난 지 며칠이나 됐는데 아무 말도 없는 거 있지? 내가 몇 번이나 슬쩍 말했는데 내 몸엔 손도 안 대더라.]이번에는 예수진이 답장하기도 전에 소이연이 먼저 문자를 보냈다.[혹시 문수 씨가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런 건 아닐까요? 남자들은 상황에 따라 몸 상태도 다르잖아요. 너무 힘들면 못 할 수도 있죠.][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죠, 요즘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니까. 그런데 내가 오늘 문수 씨 보려고 회사 왔거든요? 회사에 있다던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하지수를 마주한 송문수는 바람피우다 걸린 남자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그가 들어오기 전 하지수는 송문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 한순간에 고치긴 힘들었을 거라고 애써 합리화를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심장이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사실 말은 안 해도 하지수는 그가 혹시라도 정말 중요한 일로 밖에 나간 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송문수의 표정이 꼭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람 같아서 하지수는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붉기였지만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감정을 숨겼다.“너, 언제 왔어?”“좀 됐어.”마침내 정신을 차린 송문수의 질문에도 하지수는 고개를 떨군 채 서류를 정리하며 바쁜 척을 했다.“엄마랑 파티 준비하는 거 아니었어?”“준비 끝났어, 다음 주에 예정대로 파티할 거야.”“아.”“앞으로 매일 출근할 거야?”온 힘을 다해 태연한 척하고 있는데 저런 속 보이는 질문을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안 왔으면 좋겠어?”“아니.”본인도 말을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송문수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하지수가 오면 소이연, 예수진과 함께 하는 프러포즈 준비에 차질이 생길까 봐 한 질문이었지만 하지수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기에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었고 하지수도 당황한 송문수를 한번 보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송문수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하지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하지수는 이제 더 이상 송문수를 믿을 수가 없었다.그가 정말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만 볼 수 있는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고 그런 그를 자신이 계속 사랑할 수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다.그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남자 곁을 지키는 게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사랑에 빠지고 난 지금에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