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다시 말했다. “예전에 외국에서 학교 다닐 때 친구야. 집이 서울이라 연락은 자주 안 했는데.그래도 같은 지역이라서 졸업할 때 서로 연락처는 주고받았어.”“그 사람이 날 알아?” 루카스가 또 물었다.“내 인스타 사진 자주 봐서.” 임아영은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화를 냈다.“루카스, 네가 사고가 났어도 나한테 말 한마디 없는 거에 아직 화도 안 냈는데, 지금 나를 캐묻는 거야? 너 왜 나한테 사고난거 말 안 했어? 내 친구 아니었으면 계속 숨길 생각이었던 거야?”“내가 다 설명했잖아. 밤중에 너 걱정시키기 싫었다고. 게다가 난 너한테 못 숨겨. 나 이 다리도 반년은 있어야 다 낫는데, 너한테 반년 동안 숨길 수도 없잖아.”“반년 동안 숨길 생각까지 했어?!” 임아영은 화가 나서 얼굴까지 빨개졌다.“아니.” 루카스는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게 그렇게 큰일은 아니니까 네가 걱정 하지 않았으면 했지.”“이번엔 용서해 줄게. 그래도 다음엔 그러면 안 돼.” 임아영이 진지하게 말했다.“다음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제일 먼저 알려줘야 해.”“알겠어.”“그럼 의사 선생님이 언제 퇴원해도 된대?” 임아영은 계속 루카스에게 붙어있었다.마치 병실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소이연도 먼저 커플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다.갑자기 소이연의 전화가 울리기 전까지는!전화벨 소리에 임아영은 그대로 소이연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소이연을 본 순간 놀란 눈치였다.소이연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아주 긴장한 듯한 말투였었다. “할아버지가 왜요?”“긴장 풀어요.” 천우진이 위로했다. “비록 호전이 되진 않았지만, 나빠진 것도 아니에요. 의사는 아직 희망이 있대요.”“그럼 다행이네요.” 소이연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려올까 봐 두려웠다.“어디 갔어요? 호텔에 없던데?” 천우진이 물었다. “호텔에 갔었어요?”“이연 씨랑 민이 보러 갔었죠. 그런데 프런트에서 체크인 안 했다던데요
말투에서 그녀의 분노가 느껴졌다.사실 이해는 된다.어떤 여자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화가 날 것이다.소이연은 루카스를 흘끗 보았고, 결국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 “어젯밤에 내가 호텔에 갔는데, 소이연을 마주쳤어. 그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오토바이가 호텔 입구로 달려왔고, 내가 소이연이랑 민이를 막아줬는데, 조금 다쳤어. 소이연은 고마운 마음에 나 병원에 데려다줬고.”“근데 왜 간호까지 해야 해?” 임아영이 물었다. “병원에 데려다줬으면 됐지, 왜 밤새 간호까지 한 거지?”“내가 여기 있겠다고 했어요. 엄마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그때 갑자기 육민이 입을 열었다.임아영이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루카스가 아무도 모르는 병원에 혼자 있으면 쓸쓸해 할까 봐 내가 여기 있자고 했어요. 엄마는 저 혼자 병원에 있는 게 걱정돼서 같이 있던 것 뿐이예요.” 육민이 설명했다.“민이가 말한 그대로에요.” 소이연도 말했다. “이제 아영 씨가 왔으니까 저랑 민이는 갈게요.”임아영은 입술을 꽉 깨물었고, 낯빛은 굉장히 어두워 보였다. 소이연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이런 일은 루카스가 설명하는 게 더 맞다. 제3자는 그저 그들 감정의 골을 더 깊게 만들 뿐이다.소이연은 옷을 갈아입은 뒤, 육민을 데리고 빠르게 나섰다.육민은 아쉬운지 뒤를 돌아 루카스를 한번 보았다.그리고 루카스와 임아영이 같이 있는 그 모습을 루카스가 언젠가 내장까지 다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병실을 나서고, 복도에 들어서자 임아영이 소이연을 불렀다.“소이연.”예전에는 그래도 “이연 언니”라고 청했는데, 이제는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소이연은 발길을 멈추었다.육민도 방어적인 얼굴로 임아영을 쳐다보았다.“예전에 루카스랑 거리 유지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근데 어젯밤에는 왜 같은 방에서 같이 잔거죠? 저도 루카스랑 같이 자본 적 없…. ”“저랑 루카스는 결백해요.” 소이연은 흥분한 임아영의 말을 끊었다.“어젯밤 일은 방금 다 얘기했고, 더 많은 얘기가 듣고 싶
“더 솔직히 말하자면, 만약 아영 씨가 저한테 거리 유지하라는 말만 안 했어도 어젯밤에 저는 호텔을 나서지도 않았을 거고, 그럼 사고도 안 생겼겠죠!” 소이연은 조금 강한 말투로 말했다.그녀의 오해를 샀기도 하고, 임아영에게 정말 대답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진짜 똑똑하네.” 임아영은 더욱 차갑게 웃었다. “이제 모든 책임을 나한테 뒤집어 씌우다니. 하하. 소이연, 당신이 업계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지낼 수 있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네.”“믿으면 믿고, 안 믿으면 말아요.” 소이연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그리고 소이연은 육민을 데리고 가려 했지만, 임아영이 그대로 소이연의 앞을 막았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소이연, 내가 방금 말했지. 루카스를 좋아하는 여자가 그동안 너무나도 많았다고. 그렇게 많은 여자들 중에서 루카스를 꼬시는 데 성공한 여자는 없었어. 근데 그게 정말 루카스가 흔들리지 않아서, 다른 여자들한테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아니, 다 나 때문이였어.” 임아영은 차갑게 말했다.“전 두 사람 일에 끼어들 생각 정말 없어요.”“아무도 나한테서 루카스를 뺐어갈 수 없었다고! 당신이 얼마나 예쁘던, 남자를 꼬시는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던, 당신은 나 절대 못 이겨!” 임아영이 또박또박 말했다.소이연은 순간 임아영이 정신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아영 씨, 제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얘기하는데, 저 루카스 안 좋아해요. 아영 씨한테서 루카스 뺏으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고요. 근데 만약 아영 씨가 굳이 이렇게 악의적으로 저를 비난하시면, 저도 아영 씨 망상이 현실이 되게 해드릴 수 있어요.”소이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감히 나한테 협박을 해?” 임아영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정답이에요. 만약 저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조그마한 원한이라도 꼭 갚아준다는 것도 잘 알겠죠.만약 못 믿겠으면 제 과거 잘 찾아봐요.” 소이연도 지지 않고 말했다.말이 끝나자마자,
“아영 씨가 계속 나한테 내가 널 꼬신다고 그러네.”“아니야. 난 냥, 그냥 두 사람이 거리를 유지했으면 좋겠어서 그랬어... 루카스, 네가 그랬잖아. 거리 유지하겠다고. 근데 두 사람의 어젯밤 행동들이 나 진짜 이해가 안 돼서 이연 언니랑 얘기해 본 거야.” 임아영은 정말 억울한 듯 설명했다.“내가 말할게. 난 지금 널 꼬시고 있고, 우리가 이렇게 자주 의도치 않게 만나는 것도, 어젯밤 사고도,민이가 병실에 있겠다고 한 것도 다 내가 고의로 계획한 거야.” 소이연은 시원시원하게 다 말했다.좋은 사람인척 해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힘을 얻으려면 쟤지 말고 차라리 시원하게 나쁜 사람이 되는 게 낫지.사람은 한 번 나빠지면 피할 수 없다. 육민은 소이연의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엄마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안 좋은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 싫었다.하지만 어른들 말에 쉽게 끼어들면 안 되고, 그것은 버릇없는 행동이기에 그는 작은 입술을 꽉 깨물고 침묵을 유지했다.“방금 아영 씨가 다 까발렸어. 난 화가 나서 밀어버렸고. 이제 나도 숨기지 않을게. 난 루카스 좋아하고, 난 아영 씨한테서 너를 뺏으려...” 소이연은 담담하게 말했다.“소이연 그만해.” 그러자 루카스가 재빨리 소이연의 말을 끊었다.소이연은 애초에 신경도 쓰지 않았고 루카스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기왕 다 까발려진 거, 루카스 너한테 하나만 물을게. 넌 임아영이랑 헤어지고 나랑 만날래, 아니면 내 마음 거절할래?”임아영의 몸이 그대로 굳는 것이 느껴졌다.아마 소이연이 이렇게 세게 나올 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소이연을 정말 쉽게 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루카스를 바라보고 있었다.루카스는 의외로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루카스?” 임아영은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다.루카스는 침을 꼴깍 삼키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소이연 너 막말하지 마. 난 네가 나한테 아무런 감정 없는 거 다 아니깐.”비록 말로는 소이연이 항상
“루카스.” 임아영은 참지 못하고 그를 불렀고, 루카스는 얼굴도 변하지 않은 채 돌아보고 말했다.“가자.”“지금 내 탓을 하는 거야?” 임아영이 그에게 물었다.“아니.” 루카스는 담담히 말했다.“근데 너 지금 기분 나쁘잖아.” 임아영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루카스, 난 널 너무 사랑해서 네 아주 작은 표정 변화라도 네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있어.그래서 소이연이랑 거리 유지하라고 한 건데, 넌 그게 그렇게나 기분 나쁜 거야?”“아니야.” 루카스가 다시 부인했다.“3년의 우리 감정이 이제 막 너를 안 소이연보다 못하다는 거야?” 임아영은 점점 더 흥분해져 눈물이 미친 듯이 흘러내렸다.루카스는 임아영을 보며 말했다. “난 그냥 네가 날 위해서 너 스스로의 양심까지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그러자 임아영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루카스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이연이 너 안 밀었지?” 루카스가 확신에 찬 말투로 물었다.“이렇게 믿는다고?” 그의 물음에 임아영은 멘탈이 무너져 버렸다. “난 쟤 성격을 잘 아는 것뿐이야......”“대체 안지 얼마나 됐다고, 왜 쟤를 믿는 거야? 우리는 이렇게나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왜 난 못 믿고? 나는 너한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임아영은 말할수록 더 흥분했고, 창백하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호흡도 더 빨리진 것 같았다.루카스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다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오늘 일은 이만하면 됐어. 나랑 소이연이 아무 사이 아닌 거 정말 맞아. 이건 네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야.”“진짜 내가 깊게 생각한 거야?” 임아영은 굴하지 않았다.“넌 지금까지 누구한테나 항상 차갑고 매정하게 대했어. 근데 소이연한테만 유일하게 잘해줬잖아?! 소이연이 예뻐서야? 네가 쟤 얼굴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면, 나 성형하면 돼.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어......”“그만해 임아영.” 루카스는 결국 임아영의 말에 화가 나 버렸다. “난 너랑 싸우기 싫어. 만약 네가
임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찾아왔다.모두 갑작스러운 임아영의 소식에 긴장한 상태처럼 보였다. 임아영은 건강의 문제로 항상 임씨 가문의 무한한 보살핌을 받았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영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서울 온 지 겨우 몇 개월 만에 벌써 두 번이나 응급실에 왔어.”임씨 할머니는 책임을 묻는 듯한 말투로 말했지만, 사실은 걱정 어린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임아영은 고개를 저으며 평소와 같은 착한 여자의 모습이었다.“서울이 네가 요양하기에 적합하지 않은가 보다. 할머니는 너랑 루카스가 결혼하고 나면, 너 보내기 아쉬워서 외국에 안 나가고 서울에 같이 살자고 할 생각이었는데.”임씨 할머니는 마지못해 말했다. “이런 걸 보니, 역시 외국으로 가야겠지?”임아영은 조용히 루카스를 보았다. 마치 그의 의견을 듣고 싶어 하는듯해 보였다. 루카스가 돌아온 것은 비록 아직 계속 조사 단계지만 국내 사업 확장을 위해서였다.임씨 할머니는 임아영의 시선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루카스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루카스가 이렇게 널 사랑하는데 당연히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 함께 가지 않겠어? 그렇지 루카스?”하지만 디루카스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임씨 할머니는 이어서 말했다. “네가 서울로 오지 않았으면, 루카스는 아예 돌아오지도 않았을 거야.”“그래?” 루카스는 입술을 문지르더니 짧게 대답했다. “응.”처음 루카스가 귀국할 때, 국내 시장에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력 때문이었고, 다른 쪽으로는 임아영을 위해서긴 했다.“그럼 이제 만약 내가 너랑 같이 외국으로 가겠다고 하면, 넌 같이 가줄 거야?” 임아영은 루카스에게 간절한 눈빛으로 물었다.“지금은 건강이 가장 중요하니까, 넌 우선 좀 쉬고, 나중 일은 다시 얘기하자.” 루카스는 돌려서 말하고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았다.임아영은 실망한 눈치였다.임씨 할머니는 손녀의 기분을 알아채고 민망함을 피하기 위해 이 일을 더 이상 묻지 않았고, 화제를 돌려
임씨 할머니가 가고, 루카스는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병실에는 임아영이 홀로 남아있었다.의료진과 간병인도 그녀가 모두 내보낸 것이였다. 루카스가 돌아온 것을 보고 그녀의 얼굴에 찬란한 웃음이 다시 피어났다.마치 오늘 미친 사람처럼 흥분했던 그 여자랑는 온데간데 사라진듯 해보였다. “루카스, 왔어?” 그녀는 적극적으로 그를 불렀고, 목소리에는 콧소리가 섞여있었다.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마치 정말 그들이 싸운 사실을 잊기라도 했다는 듯.“혹시 기분 안 좋아?” 임아영은 차가운 얼굴을 한 루카스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니.”“할머니가 뭐라고 하셨어?”“아니.” 루카스는 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언제부터인지 그는 정말 변한 것 같았다. 모순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할머니도 나쁜 뜻은 없을 거야.” 임아영은 긴장한 채 급히 설명했다. “할머니가 날 너무 아끼셔서 그래. 마음에 담아두지 마. 애초에 다 우리 좋으라고 그러시는 거니까, 루카스도 화 안 내면 안 돼?”“나 화 안 났어.”그는 정말 화가 나지 않았다.임씨 할머니도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손녀를 위해 뭐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강경한 태도에 악랄하긴 했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다.그는 임아영에 대해 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단지 그녀는 몸이 약하니까 더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이제는......지금은 도대체 왜 이런 거야?진짜 소이연 때문인가?루카스는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졌다.알 수 없는 공허함이 그가 속으로 생각한 것이 진짜라고 확신할 수 없게 만들었다.“아니면 내가 오늘 소이연 모함해서 나한테 화내는 거야?” 임아영이 또 물었다.이번엔 바로 자신이 한 일을 인정했다.루카스는 그녀를 보고 있었는데, 임아영은 눈이 시뻘게져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미안해 루카스. 오늘은 내가 너무 흥분했어. 그래서 나 스스로도 믿기 힘든 짓을 한 거야. 소이연은 확실히 날 밀지 않았고, 내가 모함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럼 넌...... 나랑 헤어질 생각이야?” 임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카스를 보았다.루카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그는 그 순간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겠다는 자신을 발견했다.“앞으로,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약속해.” 임아영은 급히 잘못을 인정했다. “루카스 나 버리지 마, 응?”“나 너 안 버려.” 루카스가 말했다.그는 예전에 임아영에게 평생 보살펴주겠다고 말한적이 있었고, 한 번도 말로만 할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소이연만 아니었다면......그렇다.감정은 선후를 나누지 않는다. 하지만 예의는 나눠야 한다.그와 임아영은 3년의 연애를 했지만, 그는 그녀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루카스, 고마워.” 임아영은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루카스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앞으로 이상한 생각 하지 마.”“응. 나 앞으로 절대 이상한 생각 안 할 거야.” 임아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번 싸움은 이렇게 완전히 마무리된 셈이 되었다. ......서울 최고의 7성급 호텔.소이연과 육민은 호텔을 다시 잡았다.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육민은 계속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그만두기를 반복했다.소이연은 차마 보지 못하고 장난을 쳤다. “민아, 무슨 말 하려고? 참지 말고 말해 봐. 병나겠어.”육민은 한참 동안 소이연을 보다가 일부러 용기를 내 말 했다. “엄마, 저 녹음했어요.”소이연은 조금 깜짝 놀랐다.육민의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누굴 닮은 거지? 분명 육현경일 것이다.“엄마가 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고,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을 루카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 녹음했어요.” 육민이 당당하게 말했다.소이연이 살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이제 그녀와 키도 거의 비슷하고, 아니, 한 달 동안 또 큰 것 같았다. 그녀보다 조금 더 커졌다.그녀가 말했다. “엄마는 민이가 이렇게 똑똑해서 너무 기뻐. 시시비비가 확실한 것도. 근데 민아, 어른들 세상은 사실 민이 생각만큼 그렇게 순수하지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