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그들의 연애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기에 루카스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소이연이 몸을 일으키자, 할머니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맞다, 아영아.”시선은 모두 그들에게 집중되었다.소이연이 자리를 뜨려 했지만, 갈 수 없었다.이렇게 그냥 가는 것도 무례한 일이다.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타이밍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할머니.” 임아영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원래 본인의 말투인 것 같기도 했다.이렇게 다정한 여자에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할머니는 그녀를 아주 편애했다.“루카스랑 결혼할 거지?” 할머니가 말했다.“결혼 생각은 있어요.” 임아영은 쿨하게 인정했다. 이때 루카스를 보며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올해?”“가을에요. 가을에는 과일도 익고 의미가 좋잖아요.”“그래, 그럼 얼른 정하자. 이제 서울 연회장도 예약이 다 차고 있어.”“할머니 걱정 마세요. 루카스 부모님께서 돌아오시면 결혼 얘기할 거예요. 그리고 루카스 부모님께서도 반대하시진 않을 거예요.”“그럼 다행이고.” 할머니가 대답했다.할아버지도 입을 열었다. “아영이 결혼할 때 청첩장 먼저 줘, 외삼촌이 할아버지가 큰 선물 하나 준비해 줄게.”“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임아영은 거절하지 않고 신나 보였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이연을 보았다.“이연 언니, 그때 시간 되죠?” 임아영이 물었다.“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요.” 소이연도 얼버무린 것은 아니다.우선 그들은 날짜를 잡지 않았다. 가을이라고만 했는데, 가을은 길기에 정확히 어느 날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리고 그녀도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스케줄이 많다. 만약 오지 못한다면, 말만 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제가 청첩장 빨리 드릴게요. 시간 되면 꼭 오세요.” 임아영이 진심을 다해 말했다.“네, 최대한 가도록 할게요.”온 가족이 임아영과 루카스의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한창 하고 있을 때, 소이연은 몸을 일으켜 육민의 방
그는 골드바를 꺼내들었는데 정말 크고 무거웠다.소이연은 그대로 멍해졌다. “저한테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이걸 줬어요. 제가 가지고 있어도 쓸데없으니까 엄마 줄게요.” 육민은 선물을 소이연에게 주었다.소이연은 정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세상에 어느 누가 애한테 선물로 골드바를 주다니! 금 열쇠라면 또 몰라.소이연이 받아드는 순간 또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루카스가 그녀에게 준 것은 아닐까?그날 그녀에게 화를 내서 육민의 손을 빌려 그녀에게 전해준 것은 아닐까?아이들 것이라면 정말 육민에게 주는 걸로 알 텐데, 어른의 물건이라면......소이연은 함부로 추측할 수 없었다. 그게 맞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이렇게 큰 골드바는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거절할 이유가 당연히 없었다.장신구였다면 그녀는 정말 흥미가 없겠지만 말이다. 저녁에 임씨네 사람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그들을 배웅했다.다음날 아침 일찍 소이연과 육민은 천씨 저택을 나섰고, 천우진이 그들을 바래다주었다.저택을 나서는데, 할아버지가 멀리 입구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각도 때문인지, 소이연은 할아버지의 머리가 점점 더 하얗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분명, 염색을 잘 하셨을 텐데도 말이다. “그래도 조금 아쉽죠?” 천우진이 백미러로 소이연을 보며 물었다.소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혈연이란게 이런 거예요.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해도 이미 뼛속까지 새겨져 있는 거죠.”천우진은 이런 감성적인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말을 마치고는 스스로도 닭살이 돋았는지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비행기 안.소이연과 육민은 자신의 자리로 갔다.“이연 언니.”갑자기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은 그 순간 정말 진심으로 비행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인연이라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이상하다.육민도 임아영과 임아영의 뒤에 있는 루카스를 보았다.두 사람은 그들의 뒤에 앉아 있었다.“오늘 장안시로 가는 거예요?” 임아영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조금 민망했다.사실 소이연은 이렇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정말 싫어한다.하지만 심문헌은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못할 것이 없었다.그녀는 육민의 손을 잡고 심문헌을 향해 걸어갔다. “장안시에 돌아온 걸 환영해요.”“왜 장안시에 있어요?”“이연 씨 온다니까 특별히 왔죠.”“제가 탄 비행기는 어떻게 알았어요?”“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두려울 게 없죠?” 소이연은 아니라는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비서님께 여쭤봤어요.” 그러자 심문헌이 사실대로 말했다.명진 씨 팔이 너무 안으로 굽은 것 같은데.“가요. 데려다줄게요.”“이연 언니, 이분이 남자친구예요?” 임아영은 소이연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겨우 몇 발자국의 가까운 거리였다.심문헌을 보고 그들에게 다가왔다.“이쪽은?” 심문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임아영을 보고 있었다.기억 속에 소이연에게 이런 여동생 같은 친구는 없었는데.“안녕하세요. 임아영이라고 합니다. 이연 언니 사촌 동생이에요.”“사촌 동생이 있었어요?” 심문헌이 놀라며 말했다.“그럼 저는 어디 돌에서 나왔겠어요?” 소이연은 좋게 말하지 않았다.“집안에서 버림받은 거 아니었나요?” 심문헌은 거침없이 말을 해댔지만 소이연과 눈을 마주치고는 순간 두려웠다.“네네네, 제가 자세히 알지 못했어요. 반성할게요.” 심문헌은 잘못을 인정했다.“그럼 그쪽은 이연 언니 남자친구예요?” 임아영이 다시 그를 추궁했다.“아직 그쪽 사촌 언니 쫓아다니고 있는 중이에요.” “맞아요.” 소이연이 갑자기 심문헌에게 팔짱을 꼈다.임아영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그녀의 옆에 있던 루카스의 눈빛도 조금 흔들린 것 같았다.하지만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러자 육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당연히 엄마가 새아빠를 찾는 걸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육민은 자신도 모르게 루카스를 흘끗 보았다.하지만 루카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와 시선을 마주치니,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육민은 불쾌한 얼굴이었다.엄마가 다른 사
“알고 있었어요. 그치만 혹시나 진짜일 수도 있잖아요.”“그럴 일은 없어요.”“누가 그래요? 예전에는 제가 닿기만 해도 짜증 냈는데 이제는 저한테 먼저 팔짱 끼시잖아요?”소이연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자기가 방금 한 말은 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건가?“이유가 뭐든, 먼저 만졌잖아요.”이보다 더 애매하게 말할 수 있을까?“근데 이연 씨가 누구한테 신경 쓰는 거 잘 못 봤는데, 방금은 아영 씨가 싫어서 그러신 거예요?” 심문헌이 그녀를 보며 물었다. “싫은 건 아니에요.”“저 속일 생각 하지 마세요.”“아영 씨 같은 여자가 남자들의 워너비 아닌가요??”“나한테는 당신이 제 워너비에요.” 심문헌이 진지하게 말했다.“됐어요. 헛소리 그만해요.” 소이연은 애초에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아영 씨는 딱 봐도 그런.…. 뭐라고 딱 정의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제 스타일은 아니에요.” 심문헌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했다.처음 봤을 때 큰 호감은 없었고, 그렇다고 반감이 들지도 않았다.결론적으로 큰 인상을 주진 않았다.“그러면서 방금 아주 친절하시던데요?”“질투해요?”소이연은 눈을 뒤집었다.“그건 이연 씨 동생이니까 그런 거죠. 다른 사람이었으면 전 대꾸도 안 했을 거예요.” 심문헌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소이연이 웃었다.사실 심문헌도 가끔은 괜찮았다.친구 사이라는 전제하에. “왜 그렇게 아영 씨 싫어해요?” 심문헌이 추궁했다.“안 싫어해요.”“그럼 그 남자 때문이에요? 이름이 루카스던가?”“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소이연은 대꾸도 하기 싫어졌다.“그렇죠? 육현경 씨랑 닮았다고 그 사람 좋아하는 건 아니죠?!” 심문헌은 멘탈이 흔들렸다.삼촌이 엄마를 쫓아다니는 것도 하루 이틀 일도 아니어서 이제 놀랄 일도 아니었기에, 육민은 계속 창밖만 보고 있었다.이때 아빠 이름이 나오자 그는 고개를 돌려 그들을 보았다.“말도 안 돼!” 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 “저 그런 사람 아니에요.”“그렇지만 방금은 너무 강한
소이연의 저택.심문헌은 목이 마르다는 등 다양한 핑계를 대며 그들의 집에 들어가려 했지만 소이연에게 모두 거절당했다.매정한 여자! 하지만 다행히 장미는 받아주었다.비록 그가 강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는 만약 안 받으면 들어가서 잠시 앉았다가 가겠다고 했다.소이연은 결국 전자를 택했다.어쨌든 심문헌은 기분이 좋았다.소이연은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그 또는 그의 구애에 대한 배척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었다.예전의 그녀라면, 그가 죽을 듯이 노력해도 바보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했을 텐데.그러고는 뒤돌아서 가버렸겠지.하지만 이제는 비록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조그만한 희망이 생겼다.......장안시 방송국,《배우님 자리에 앉아주세요》 제2화 녹화 현장.1화가 방송된 후, 시청률은 순식간에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을 압도하였고 바로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인기 검색어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건 예수진이 아니었다.당연히 예수진도 어느 정도 화제는 되었지만, 그 당시 TOP 급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그녀에 대한 언급도 꽤 있었지만, 등장 신이 너무 적었다.기획팀에서 띄워주고 싶은 사람이 분명히 있었고, 개인적으로 돈을 주고 인기 검색어에 올려, 예수진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묻혔다.하지만 예수진 역시 화제성이 8위에 드는 배우였다.이 자리는 비교적 안전한 자리였다.그래서 예수진의 두 번째 무대는 첫 번째 무대보다 안정적이었다.평소대로만 하면 지금의 순위로 이번 라운드에서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모든 사람들이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사회자가 먼저 무대에 올라 오프닝을 하고 경기 규칙을 설명했다.이번엔 현장 투표 득표 수가 가장 적은 사람은 두 사람이 바로 탈락한다.또 현장 득표 수가 가장 적은 5명 중 4명의 선생님이 각 1명씩 뽑아 다음 라운드에 진출시키고, 남은 한 명은 그대로 탈락한다.이 말은 10위-15위는 모두 위험하다는 뜻이다. 경기 규칙이 발표되자,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
그녀 역시 스스로를 뛰어넘고 싶었기에 육가희가 만들어 둔 배역의 이미지도 깨고 다시 새로운 인물로 재해석하고 싶었다.하지만 이건 위험성이 있다. 관객들은 이미 익숙한 이미지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이미지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처참히 탈락할 가능성도 있다.그녀는 마지막으로 고심 끝에 결국 원래 육가희가 연기했던 원래 배역의 느낌으로 재해석하기로 마음먹었다.무대가 끝나고 먼저 관객 투표를 시작했다.투표가 끝나고 심사위원들이 평가를 했는데, 우선 이중 경력이 가장 많은 장혜성이 평가했다.그녀는 아주 엄격했는데, 무대를 본 후 더더욱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예수진, 원빈, 유청하는 모두 긴장한 채로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있었다. 무대의 완성도는 좋았다. 다만 관객들과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는 모른다.“우선,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거의 실수 없이 완성한 것은 아주 잘했어요.당연히 작은 실수들은 있었지만, 예를 들면 원빈 씨 입이 꼬였죠?”원빈은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현장의 관객들도 모두 웃었다.“유청하 씨는 동선도 틀렸고 한두 박자 빨랐죠.” 장혜성은 그들의 실수를 모두 잡아냈다.어쩔 수 없이 그녀가 아주 진지하고 자세하게 봤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무대에서는 아무도 그녀의 눈빛을 피해 갈 수 없다.“비록 무대에서 실수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고, 시간도 촉박하지만 전문적인 배우로서 이런 실수는 없어야 해요.” 장혜성이 직설적으로 말했다.“네.” 두 사람은 급히 대답했다.그래도 겸손한 태도였다.“근데 그거에 비해 예수진씨는 실수는 없었지만 이 무대에서는......”장혜성은 시선을 예수진에게 옮겼다. “제가 봤을 때는 가장 부족했어요.”말이 끝나자마자 현장은 소란스러웠다.실수가 하나도 없는데 가장 부족했다니! 충격적인 평가였지만 예수진은 계속 미소를 유지하며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었다.카메라에 안 좋은 모습이 찍힐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제가 왜 이렇게 말하는지 알아요?” 장혜성이 그녀에게 물었다
“이 작품이 계 감독님 영화여서 계 감독님이 정한 대로 수정도 안 하고 기회만 엿보면서 계 감독님한테 아부 떨어서 호감 사는 거예요?”장혜성은 기세등등한 말하면서 그녀의 체면을 죽였다.예수진은 정말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몰랐다.장혜성은 그녀에 대한 색안경을 쓰고 있기에 어떻게 얘기해도 다 핑계로 들릴 게 뻔했다.하지만 그녀는 정말 계지원을 그런 식으로 사들인 적이 없었다.그렇게 하래도 못할 것이다. 그녀는 단순히 관객의 흥미를 끌고자 했을 뿐이다.“예수진 씨 예전에 연예계에 그렇게 오래 있었으면서 정말 허투루 살았네요.” 장혜성이 차갑게 말했다.그녀에 대한 혐오감이 얼굴에 드러났다.예수진은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장혜성에게 미움을 샀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는 이미 자신이 본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다.“수진 씨 선생님께 드릴 말씀 있으신 가요?” 사회자도 더 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민망한 분위기를 깨고 멘트를 던졌다.“저는 계 감독님의 비위를 맞추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육가희 씨가 이 배역을 연기하실 때, 너무 완벽해서 거를 타선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제가 육가희 씨가 연기한 배역의 느낌을 잘 살렸다면, 이것도 성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예수진은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고 심지어는 모두의 비위를 맞추는 듯한 말투로 설명했다.“당연히 저도 선생님의 피드백이 다 저를 위한 말씀이신 것도 압니다. 다음에는 다른 모습의 저를 보여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다음번에 이런 기회가 또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장혜성은 애초에 예수진의 해명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그러자 예수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저도 심사위원 선생님과 현장 관객분들의 평가 결과를 받아들일 것입니다. 저는 이대로 끝나도 아주 만족하지만 다시 한 번만 무대에 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비록 오늘 저의 연기는 아쉬운 점이 많아묘지만,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이 말은 거의 무대와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사실 그녀도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
그녀는 이어질 계지원의 혹평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차피 장혜성에게 거의 모든 말을 다 들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었고,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이 무너지는 일도 많이 겪어서 그녀가 참을 수 없는 일은 없었다.심지어 그녀의 입꼬리에는 계속 웃음이 걸려있었다.거울을 마주하고 그녀는 자신의 가장 예쁜 웃음을 연습했다. 그녀를 원하는 사람이 있든 말든,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어쨌든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삶은 항상 정비례하지만은 않는다.바로 그때, 계지원이 평가를 이어갔다. “저는 정말 무대에서 연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대에서 실수 하나 없이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실수가 없다는 것은 컷 부분, 분위기, 감정, 감성, 제스처, 대사 심지어 작품, 상대 배우까지 모든 것에 완벽하게 숙지해야 합니다. 오늘 그걸 아무도 하지 못했지만 예수진 씨는 해냈습니다.”예수진은 계속 미소를 유지하며 계지원을 보았다. 사실 감사할 것도, 인정받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도 없었다.이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게다가 저번 녹화 이후로 일주일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이 정도까지 했다면,무대 뒤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렇게 말합시다. 예수진 씨는 항상 방송국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제일 늦게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쏟아부어서 이 무대를 준비했죠. 이렇게 고생한 덕에 여러분께 실수 없는 무대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겁니다.”연이은 호평에 계지원의 옆에 앉아있던 장혜성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당연히 예수진 씨의 이번 무대는 육가희 씨의 연기를 완전히 복제했고, 저도 찬성하는 바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모든 배역에 대해 각자 다르게 이해해야 하고, 그 배역에 불어넣는 생명과 영혼은 다 달라야 합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면 사람들은 그녀가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
백일잔치가 시작되기 전 예수진은 소이연과 친구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급히 다가왔다.“왜 혼자와?”“그럼 누구랑 와?”“우리 조카는?”“아, 엄마한테 맡겨놨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몰라서 재미없어.”“...”“그러는 너는 좀 어때?”“뭐가 어떠냐고?”“네 애 말이야.”예수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의 찻잔이 쨍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아직 파티가 시작되기 전이라 차만 마시고 있던 남자들이었는데 송문수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미끄러지면서 안에 있던 차가 흘러나온 것이다.송문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찻잔을 집어 들더니 휴지로 물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그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찻잔을 떨군 건 그저 우연이라는 듯 하도경, 육현경과도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그를 보며 하지수도 입을 열었다.“잘 있지. 전에는 좀 힘들었는데 이젠 잘 먹고 잘 자.”“너 살 좀 찐 것 같아.”“응, 2킬로 넘게 쪘어.”“그럼 됐어.”하지수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예수진은 파티가 곧 시작한다는 말에 계지원과 함께 자리를 떴고 그녀가 떠나가 테이블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아마도 얘기를 다 나눈 남자들 때문인 것 같았다.가만히 있기도 뻘쭘했던 하지수가 주전자를 들려 하자 송문수가 빠르게 그녀에게 차를 따라주었다.“고마워.”하지수의 인사에 송문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참 동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그러다가 결국 송문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너 임신했어?”“응.”“빠르네.”송문수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자신의 착잡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적어도 결혼한 다음에야 임신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송승우의 아이를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생각이 점점 커지는 게 싫어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너 혼자 온 거야? 송승우는?”“서울 갔어.”“몸은 괜찮아졌어?”“응, 의족 해서 이젠 잘 다녀.”오랫동안
예수진은 빠르게 소이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이연 언니, 송문수 왔어요. 진짜 올 줄은 몰랐는데 방금 안으로 들어갔어요!][내가 진짜 올 거라고 했잖아요.][내 매력이 그 정도일 줄 몰랐죠.]역시나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예수진에 어이없다는 이모티콘을 보내고 난 소이연은 송문수의 인영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하도 큰 키 덕분에 사람들 틈에 섞여 있어도 우뚝 솟아있는 송문수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문수야.”마찬가지로 그를 알아본 육현경이 인사를 건네자 송문수는 빠르게 그들에게로 다가갔다.“언제 왔어?”“어제 오후에.”“왔는데 왜 말도 안 해? 사업 잘된다고 이젠 우리도 모른 척하는 거야?”“아무리 잘 되봤자 내가 현경이만큼 돈이 많진 않아.”볼멘소리를 하는 하도경에 맞는 말로 반박하자 하도경도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언제 가?”“모레 비행기야, 내일 집 가서 부모님만 뵙고 가려고.”“그래서 우리 만날 시간은 없다 이거지?”“이번엔 시간이 좀 빠듯해, 거기 일도 많고. 오늘 보지 뭐, 술 제대로 마시자 한번.”“너 진짜 많이 변했어 송문수, 이렇게 진지하진 말아 줄래?”적응되지 않는 송문수의 말투에 하도경이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그럼 어쩌라고.”“나는...”판을 깔아주니 말하기 어려웠는지 하도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술 마셔 그냥.”“그래.”또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둘은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파티의 주인공이 자리하기도 전에 술부터 마시기 시작했다.육현경이 그런 그들을 말리려 할 때 송문수의 옆에 문득 한 여자가 앉았다.그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문수도 잠시 멈칫했다.굳이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것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며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송문수를 한번 보던 소이연은 하지수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수 씨, 왔어요?”“네.”“혼자예요?”“네.”혼자라는 말에 송문수의 손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질려버렸다.“혼자니까 더 조심해요 다닐 때.”“그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서야 송문수는 마침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캐나다에 있는 회사도 이제 정상적으로 흘러가자 귀국한 거였지만 그도 그냥 예수진 아들의 백일을 축하하러 온 것뿐이었다.시간이 어찌나 빠른지 송문수가 나갈 때까지만 해도 배가 부른 채로 있던 예수진이 벌써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백일까지 맞이하게 된 것이다.오랜만에 온 장안시였지만 송문수는 자신의 귀국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저 본인의 집으로 향했다.오랫동안 비워둔 집이라 그런지 온통 먼지투성이여서 일단 도우미부터 부른 송문수는 아주머니가 정리를 마친 다음에야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떠나기 전만 해도 이곳에서 사랑하던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었는데.이제는 그 모든 게 다시는 들춰선 안 될 과거가 돼버린 것 같았다.해외에 있던 시간 동안 송문수는 부단히 하지수를 잊으려 애쓰고 있었다.물론 정말 잊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가 반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었다.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할 때도 같은 집에 살던 하지수는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그저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모습이 화면에 스친 게 전부였다.몸을 뒤척이던 송문수는 내일의 백일잔치에 대해 생각했다.내일 가면 친구들이 무조건 술을 권할 텐데, 오랫동안 술을 마시지 않은 탓에 송문수는 지금 자신의 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그래도 푹 쉬면 조금은 낫겠지 싶어 그대로 잠을 청한 송문수는 이튿날 아침이 돼서야 눈을 떴다.언제부턴지 부모님처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버린 탓에 송문수는 이젠 밤을 새우는 게 오히려 힘겨웠다.그렇게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그는 한 번 더 깔끔하게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을 나섰다.너무 이르지도 않고 너무 늦지도 않은 딱 적당한 시각에 집을 나선 그는 문득 옛날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을 지었다.예전에는 어쩜 그리 특이하게 살아왔는지, 참으로 유치했던 것 같다.해외에서 반년 동안 혼자 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