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아영이 때문에 오랜만에 재회한 두 가족의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참, 이 사람은 네 남자 친구니?" 천씨 어르신이 루카스를 쳐다보며 묻자 루카스는 곧 바로 정중하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루카스 리라고 합니다.” "얼굴이 훌륭한데! 근데 왠지 낯이 익은 것 같네." 천씨 어르신께서 그를 한참을 쳐다보았다. "증조할아버지, 루카스가 할아버지 증손자와 닮았다는 걸 모르시겠어요?" 임아영이 육민을 보았다. 그러자 천씨 어르신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 민민이랑 닮은 것 같네.” "이것도 인연이네요.” 루카스는 겸손하게 말했다. "오빠, 여기가 외손녀예요?” 임가 할머니는 소이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맞아. 평소에는 장안에서 일하느라 서울에 올 시간이 많지 않아. 이연아, 이분은 네 이모할머니야." 천씨 어르신은 소이연에게 임가 할머니를 소개했다. "이모할머니 안녕하세요.” "이연, 잘 알지. 사업이 그렇게 잘 되고 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 자주 봤는데 우리 가족인 줄 몰랐네." 임가 할머니는 소이연을 칭찬하며 말했다. "우리 집안사람이 이렇게나 훌륭해." "이모할머니, 과찬이세요. 그저 운이 좀 좋았을 뿐이에요.” "과찬은 무슨! 네 엄마처럼 디자인 능력이 대단하던데…."임가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소이연도 옅은 미소를 지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분위기가 좀 가라앉았다. "예쁜 언니가 우진 오빠 부인이 아니었어요?" 임아영이 갑자기 놀라며 물었다. 천우진은 재빨리 답했다. "아영아, 어떻게 그렇게 생각한 거야?” "그때 오빠랑 계속같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예쁜 언니 아니, 이연 언니를 잘 챙겨주길래.” "아니야, 이연이가 서울에 오는 시간이 많지 않아 내가 같이 데리고 나간 거야.” 천우진이 설명했다. "아이고, 내가 멍청하게 잘못 생각했네요." 임아영은 어색해하며 말했다. “이연 언니,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녀도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낯
내 눈에 거슬리려고?“그게.” 루카스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침묵했다.소이연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엄마.” 갑자기 육민이 말했다. “나 방에 가서 태블릿 좀 하고 싶어요.”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육민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는 게 아닐까?그녀는 루카스와 단둘이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소이연이 입을 열기도 전에 육민은 스르륵 자리를 떴다.소이연은 꾹 참고 말했다.“Lee 선생님,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걱정 마세요. 예전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친척인데, 저도 두 집안 감정 건드리기 싫어요.”루카스는 소이연을 보고 있었다.소이연은 그가 또 말을 함부로 못하게 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비록 그는 소이연과 자주 어울리진 않았지만, 소이연의 성격은 대충 알고 있었다.그녀는 자기가 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어서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었다.그는 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예전엔 내 오해였어.”“뭐?” 소이연은 답답했다.“예전에 너한테 여자가 지조 없이 행동한다고 했었잖아.” 루카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자세히 보니 귀도 빨개져 있었다.소이연이 웃었다.예전에 루카스는 계속 그녀가 양다리나 걸치고 육민에게 모범을 보이지도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이제 천우진이 그의 오빠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마음이 안 좋은 건가?진심으로, 그녀는 루카스가 이럴 줄 몰랐다.이런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고민도 안 하지 않나?!“넌 왜 해명도 안 해?!” 루카스가 사과를 하더니 또 갑자기 화를 내며 물었다.“내가 해명한다고 하면 넌 믿을 거야?”“......” 루카스는 벙어리가 되었다.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는 한번 인정한 일은 거의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안 중요해.” 소이연이 담담히 말했다.루카스를 위로하려는 것도 아니었다.정말 아무 상관 없는 사람에게 더 설명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그렇게 많은 일을 겪었는데, 다른
“아무것도 아니야.” 루카스는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임아영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두 사람은 함께 뒤뜰로 가 질릴 때까지 산책을 했다.소이연의 방, 육민이 발코니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빠가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돌려 엄마를 한 번 보았다.“왜?” 소이연은 육민의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아니에요.”“깊게 생각하지 마. 나 하나도 신경 안 써. 네 아빠도 아니고.” 소이연은 육민의 마음을 읽었다.“만약 맞으면요? 엄마는 다시 아빠 뺏어올 거예요?” 육민이 생각 없이 말했다.소이연은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만약 그렇다면......“그럴 리 없어.” 소이연은 단호했다.그럴 가능성은 없다. 헛된 생각으로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다.육민은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그는 갑자기 다시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엄마 말대로 아빠가 없어도 잘 살수 있는 건 맞다.하지만, 그는 진실을 알고 싶었다.이건 그의 원칙이다.결심을 하고, 저녁을 먹을 때 육민은 스스로 루카스의 옆에 앉았다.어른들도 말리지 않았고, 이것도 다 인연이라며 농담을 했다.그리고 소이연은 자연스럽게 육민과 같이 앉았고, 루카스의 옆 옆자리였다.“입에 안 맞아?” 소이연은 깨작거리는 육민을 보고 걱정하며 물었다.육민은 루카스에게 집착했고, 소이연도 어이가 없었다.예전에 장안시에서 본 적이 없었으면 괜찮았을 텐데.이렇게 만나니까 스스로 제어하지 못했다.그녀가 어떻게 말해도 육민은 그를 가까이했다.“아니요.” 육민은 급히 고개를 숙이고 밥을 마구 퍼먹었다.루카스는 육민에게 반찬을 조금 집어 그의 그릇에 놓아주며 말했다. “성장기에는 많이 먹어야 돼. 아니면 키 안 커서 아무도 너 안 좋아해.”“......” 육민은 조금 억울했다.분명 작은 키가 아닌데.반에서 제일 큰 사람들 중 하나인데.루카스에 비하면 한참 작을 뿐이었다.“장난이야. 많이 먹어.” 루카스는 육민의 표정을 보고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
루카스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조금 아픈 느낌이 들었다.그는 고개를 들어 육민을 보았다.육민은 얼굴이 살짝 빨개져 배가 부르다며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이연은 육민의 수상한 행동을 보고 있었다.그녀는 육민이 루카스의 머리를 만지는 것을 보지 않았고, 육민이 뭘 했는지 알 수 없었다.육민이 갑자기 자리를 뜨는 것을 보고 육민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는 예전에 이러지 않았다.하지만 다행히 그들은 메인테이블에 앉지 않았다.메인테이블에는 거의 어른들이었고, 다른 테이블에서는 그렇게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었다.임아영은 육민의 뒷모습을 흘끗 보고 고개를 돌려 루카스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너 민이 좋아?”“왜 그렇게 말해?” 루카스는 임아영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테이블에 앉을 때부터 계속 그녀를 신경 써 주고 있었다.다른 사람들도 몇 번이고 비웃었다.임아영은 부끄러워하며 얼굴까지 빨개졌다.“엄청 부드럽게 대해주길래.” 임아영이 말했다.“너한테는 안 그랬어?”“그거랑 다르지.” 임아영이 말했다. “난 네 여자친구잖아.”“쟤는 어린애잖아.”“아기 좋아해?”“그럭저럭.”“좋아하면 내가 낳아줄 수 있어......”“착하지, 많이 먹어. 회복을 해야 낳을 수 있지.”“미워.” 임아영은 순간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소이연은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그녀는 그들에게 목소리를 더 낮추라고 다 들린다고 하고 싶었다.당연히 소이연은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는다.밥을 먹고 난 뒤, 할머니도 바로 가시지 않았다.아마 연세가 있으셔서 가족에 대한 애정이 점점 더 깊어지시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고 계속 저택에 있었다.루카스는 아마 없는 것 같았다.당연히 그녀도 그를 찾아보진 않았고, 루카스는 임아영과 항상 붙어 다니는데,임아영이 혼자 거실에서 휴대폰을 하는 것을 보니, 당연히 먼저 갔을 것이다.아마 다른 일이 있었겠지.소이연도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겸
소이연은 케이크 한 조각을 다시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이제 막 올라갔는데,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소이연은 임씨 집안사람들이 가는 줄 알고 예의상 배웅을 하려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계단으로 향하자, 누군가 소리쳤다. “큰일 났어요, 큰일. 아영 씨 큰일 났어요.”소이연은 가슴이 떨렸다.임아영이 큰일 날 일이 뭐가 있지?그 순간 발걸음을 빨리해 성큼성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같은 시각.루카스도 외부 거실에서 걸어 들어왔다.빠르게 사람들 틈을 헤집고 흥분한 채 숨쉬기 힘들어하는 임아영을 안고 있었다.그녀는 호흡이 가팠고, 얼굴도 빨개져서 엄청 힘들어 보였다.마치 갑자기 무슨 큰 병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소이연은 순간 임아영이 원래 몸이 안 좋았던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특히 임아영의 건강을 물었다.루카스가 그렇게 임아영을 알뜰살뜰 보살피던 것도 떠올랐다.하지만 그때, 소이연은 임아영이 이러는 것이 그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심지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루카스의 목소리만 들렸다. “빨리 구급차 불러요, 빨리!”“불렀어요. 곧 구조헬기가 올 거예요.” 임아영의 오빠가 긴장한 채 말했다.“좋아진 거 아니었어요? 갑자기 왜 발작한 거예요? 도대체 왜 이래요?”루카스는 간단하게 임아영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의 목에 갑자기 붉은 점들이 생긴 것을 보고 얼굴이 싹 변해서 크게 화를 냈다.“누가 망고 먹였어요?”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며 서로만 쳐다보고 있었다.천우진이 급히 입을 열었다. “망고 안 먹었는데, 오늘 아영 씨 알레르기 있는 거 알아서 망고는 안 샀어요. 특별히 관리했죠.”“오늘 저녁에 망고 케이크 있었죠?” 임씨 집안의 한 사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천우진은 변명하지 않고 급히 집사를 불렀다.집사가 말했다. “오늘 망고 케이크를 샀습니다. 작은 도련님과 아가씨들께 드리려고 유명한 파티세리에서 주문했습니다.하지만 저희는 절대 아영 아가씨
“내가 어떻게 알아?” 소이연은 조금 화가 났다.비록 지금 몸이 이렇게 약한 임아영에게 성질을 내면 안 되지만, 그녀 스스로 망고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먹은 건 자기 잘못 아닌가?“누가 아무거나 주래, 얘는 몸이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다고. 알아들어?!” 루카스는 또 다른 이유를 대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내가 준 거 아니야. 자기가 먹고 싶다고 먹은 거야.” 소이연은 왠지 모르게 제어가 안 됐다.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니, 그녀도 화를 참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분명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면서 먹고 싶어 했다고? 알레르기가 심장병을 유발하는 건 알아?얘 태어날 때부터 심장병 있었고, 얘 심장 바꿨던 건 아냐고! 알레르기가 심장병을 재발시키는데 얘가 죽을 생각으로 먹고 싶어 했겠냐고!”루카스는 이어서 퍼부었다.소이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녀는 임아영이 왜 자기 목숨까지 걸고 장난을 치는지 알 수 없었다.단지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먹기 위해서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건가?“네가 주지만 않았어도, 얘가 거절을 못 하는 일은 없었을 거고, 먹지도 않았을 거야!” 루카스는 소이연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체면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천우진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듯 말했다. “이연 씨도 금방 천씨 가문으로 돌아왔으니, 아영 씨에 대해서 모르는 게 당연해요.”“나도 아영이 상태 알려주는 건 잊었네.” 할아버지도 말했다.당연히 두둔하는 것이었다.“루카스도 흥분해서 그래, 아영이도 이런 일이 없는 지 오래됐으니까.” 할머니도 분위기를 풀어보려 급히 말했다.“몰랐으니까 죄가 없다.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지.”비록 할머니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책임을 묻는 듯한 말투였다.소이연은 뭔가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천우진이 그녀를 말렸다.소이연은 스스로 진정하려고 노력했다. 임아영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 시점에 더 말해봤자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불만을 일으킬 것이다.이 지경에도 모두 다 자기만 생각하고 있
소이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할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그저 침묵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사실 할아버지는 계속 느끼고 있었지만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부담 가지지 마라. 할아비는 너 이해해. 그때 내가 그러지만 않았어도......” 할아버지는 한숨을 푹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오늘 저녁엔 내가 임씨 집안사람들 앞에서 널 지켜주지 못한 건 그쪽이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그래. 아무리 뭐라고 해도 화만 돋우고, 그럼 너한테 더 불만을 가질 게 뻔해. 아영이 몸만 괜찮아지면 내가 다시 내 동생한테 잘 얘기해 볼게.”“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일찍 가서 쉬거라. 너도 힘들었을 테니.”“할아버지도 일찍 쉬세요.”소이연은 할아버지 방에서 나왔다.사실 그녀는 그의 관심과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정말 이렇게 낯선 집안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방으로 돌아오자, 육민이 기다리고 있었다.“이렇게 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어?” 소이연은 자연스럽게 육민에게 물었다.“루카스가 그렇게 뭐라고 했는데 화 안 나요?” 육민은 직설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화나, 근데 이해는 돼.”그때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은 신경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진정하고 나니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누구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이 위험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그녀는 심지어 지금 그와 말싸움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의미가 없었다.육민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소이연을 보고 있었다.“예를 들어, 엄마가 위험에 처했는데, 그게 루카스 때문이라면 민이도 루카스한테 화낼 꺼야?”“네.” 육민은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그런 거지. 자기가 아끼는 사람이라면 다들 이런 반응일 거야. 아영 씨는 루카스 여자친구고, 사랑하는 사람이니까.루카스는 엄마가 아영 씨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생각하고 성질을 내는 거니까, 이해할 수 있어.”소이연이 설명했다. “엄마가 화낸 건 루카스가 엄마를 억울하게 했기 때문이야.”“그럼 제대로 말하면 되잖아요! 전 루카스가 엄마
“걱정 안 해. 잘 클 거니까.”“네.” 육민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루카스보다 더 클 거예요.”“......”허, 그럴 필요는 없다.그는 190이 넘었고, 그 키로는 좋은 여자친구를 찾기 쉽지 않다.육민이 간 뒤, 소이연은 가식적인 얼굴을 내려두었다.오늘은 정말 기분이 좋지 않다.이튿날 아침.소이연의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방문을 열자, 천우진이 방문 앞에서 피곤한 얼굴로 서있었다.병원에 갔다가 이제서야 온 건가?그럼 임아영은?천우진은 미안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미안해, 아침부터 깨웠네.”천우진은 그녀가 불면증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다.최근 천씨 집안에서 지내면서 수면제를 사는 것을 계속 까먹어,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애초에 깨운 것도 아니었다.“아영 씨는 어떻게 됐어요?” 소이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괜찮아요. 이제 위험한 시기는 넘겼어요.” 천우진은 말을 마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심각해요? 도대체 무슨 병이길래?”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몇 마디 더 물었다.“태생부터 심장병이 있었어요. 그때의 의학 기술은 아직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아서 뱃속에 있을 때는 모르고 있다가, 태어나고 나서 위독 통지서를 몇 번 받긴 했지만, 실제로 위험한 정도는 아니었어요.그 뒤로, 임씨 집안사람들을 따라 해외로 나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죠.그래서 외국에서 치료를 잘 받고 있는 줄로만 알았고, 저도 5살 이후로 쭉 못 보다가 어제 본 거예요.”소이연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어제 병원에 따라가서 심장을 바꿨다는 사실을 알았고, 지금은 너무 잘 맞아서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정상인이랑 똑같이 아주 오랫동안 살 수 있대요. 그리고 소위 말하는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알레르기였어요.몸에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면 심장에 큰 영향을 줘서 심장이 일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있대요.그래서 어제 루카스가 그렇게 화를 낸 거예요. 진짜 죽을 수도 있었거든요.”“네.” 소이
이제 송문수도 정신을 차렸으니 하지수는 본인도 원래의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송문수의 사무실이 워낙 커서 둘이 같이 쓴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기에 그녀는 사무실을 옮기는 건 나중으로 미뤄두고 컴퓨터를 켜기 시작했다.하지수가 OA의 서류들을 훑어보려 할 때 송문수의 비서가 마침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는 하지수를 보자마자 놀란 기색을 비추며 인사를 건넸다.“하 대표님, 오셨어요?”“네, 그런데 어떻게 여기 있어요? 송 대표님이랑 같이 회의 참석한 거 아니었어요?”“회의라니요?”“지금 회의 중 아니에요?”“저희 오전 회의 없어요, 오후 3시에 첫 회의에요.”“그럼 송 대표는 어디 갔어요? 거래처랑 계약하러 간 거예요 아니면 현장 나간 거예요?”어디를 가든 대동하던 비서도 없이 혼자 나선 송문수에 하지수는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대표님 오늘 안 나오셨어요.”“아침에 연락 오셔서 개인적인 일 때문에 좀 늦는다고 저한테 오후 회의자료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거 다 프린트해서 지금 대표님 책상에 올려두려고 들어오는 길이었고요.”제 손에 들린 서류들을 들어 보이며 말하는 비서에 하지수의 미간은 더욱더 찌푸려졌다.집안일은 다 허영지와 하지수가 책임지고 있는데 출근 시간까지 늦춰가며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이 도대체 뭔지 하지수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알겠어요, 나가서 일 보세요.”“네.”서류를 송문수 책상 위에 올려둔 비서가 인사를 하며 나가자 서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곧바로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내보았다.[문수 씨, 지금 어디야?][나 회사에 있지, 왜 그래?]보낸 지 1초 만에 온 답장이었지만 내용은 역시나 거짓말이었다.대체 무슨 일을 하길래 저를 속이는 건가 싶었던 하지수는 오락가락했던 지난날 송문수의 태도를 떠올렸다.생리가 온 그날만 해도 하지 못해서 안달 나 하던 사람이 생리가 끝났다는 데도 저를 피하는 게 안 그래도 이상했는데 하지수는 설마 송문수에게 이제 제가 필
아까는 앉아서도 잘만 자더니 제대로 누우니 오히려 잠이 오지 않아 송문수는 하지수를 기다리며 한참을 뒤척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보이지 않은 인영에 그는 문을 살짝 열고 문틈 사이로 거실 쪽을 내다보았다.그리고는 하지수가 아직도 거실에서 티비를 보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사실 송문수는 인내심이 없는 게 아니라 하지수가 그녀가 쓰던 방으로 들어가 버릴까 봐 그게 걱정돼서 확인한 것이었다.그 뒤로도 몇 번 더 훔쳐보던 송문수는 마침내 티비를 끄는 하지수에 깜짝 놀라 침대로 달려가 자는 척을 했다.한편 드디어 티비를 끈 하지수는 먼저 본인 방으로 가 세수를 마친 뒤에야 송문수의 방안으로 들어섰다.자고 있는 송문수를 발견한 그녀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이불을 들추고 그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오랜만에 푹 자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싶었지만 하지수는 본능적으로 자꾸 송문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그 때문에 자는 척하던 송문수는 온몸이 경직되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하지수랑만 있으면 몸이 멋대로 긴장하는 거라 그건 송문수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런데 곧이어 제 몸에 닿아오는 부드럽고 따뜻한 하지수의 온기가 느껴지자 송문수는 모든 긴장이 풀리면서 이래서 사람들이 연애를 하는구나 싶었다.하지수가 있으니 평범하던 세상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다음날부터는 송문수도 일 때문에 바빴고 하지수도 아버님의 생일 파티 준비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니 둘이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현저히 줄어들었다.사실 둘 중에 더 바쁜 건 송문수였다.그래서 하지수도 평소에는 그 얼굴도 자주 볼 수 없었다.항상 밤늦게 귀가하는 송문수는 터덜터덜 들어와 잠든 하지수를 품에 안고 자다가 그녀가 깨어나기도 전에 출근해버렸다.밤에는 분명 온기가 느껴졌는데 일어날 때는 늘 비어있는 옆자리에 하지수는 못내 서운한 감정도 들면서 송문수가 자신을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는 하지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그녀에게 입을 맞춰왔다.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이어나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지수의 입술을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엄청 부드럽네.”야한 꿈을 꾸는 게 틀림없어 보이는 남자의 행동에 하지수는 화가 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더니, 이제 좀 정신 차리나 했더니 꿈속에서까지 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 여자친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문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눈 좀 떠봐.”생리도 끝나지 않은 와중에 이렇게 꿈을 꾸는 남자랑은 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수는 이번에는 그가 깨어나길 바라며 아까보다 좀 더 힘을 주어 흔들었다.“무슨 꿈이 이렇게 진짜 같아?”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워진 송문수는 그제야 눈을 뜨며 말했다.“그럼 꿈이 아닌가 보지.”“꿈이 아니라고?!”하지수가 짚어줘서야 꿈이 아닌 현실임을 자각한 송문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꿈에 누가 나왔는데 그래?”누가 나오긴, 송문수의 꿈에 나올 사람은 늘 하지수 한 명뿐이었다.전에는 꿈속에서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게 현실이 되어버려 순간 당황한 것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턱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은 굳이 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나 어떻게 잠든 거야?”평소에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성격인데 이상하게 하지수 앞에만 서면... 속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가 없었다.“피곤했나 봐.”진실이라는 게 알아서 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하지수도 모른 척 말을 돌리는 송문수를 따라가 주었다.괜히 끝까지 캐물어서 상처받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서였다.“매일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쩌다 쉬는 날도 밖에서 돌아다니기만 했잖아. 얼른 씻고 자, 내일부터 또 출근해야지.”“너는?”하지수의 재촉에 방으로 들어가던 송문수는 갑자기 걸음을 멈
“맛있어.”처음으로 주방에 들어간 남자가 이런 맛을 낸 건 객관적으로 대단한 일이라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토록 바라는 칭찬을 결국 해주었다.사실 이미 사약 같은 맛일 거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꽤나 달달해서 하지수도 놀라웠다.한편 원하던 칭찬을 들은 송문수는 신나서 채널을 돌리며 물었다.“이거 맞지?”“응.”“법률 채널이네?”여자들은 다 예능이나 멜로 드라마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어울리지 않게 이런 지루한 채널을 좋아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법 좋아해서 대학 때도 법 배운 거야. 난 이런 거 좋아해.”“그래.”하지수의 말에 그제야 그녀가 변호사였다는 걸 떠올린 송문수였다.그렇게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는 걸 알아차리자 한 번 더 감동받은 송문수는 저도 하지수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겠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어 그녀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나도 같이 봐.”그의 제안이 의외였지만 이렇게 완벽한 판례분석이라면 송문수도 관심 있어 할 것 같아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잘 접하지 않던 분야라 처음엔 싫어할 수 있어도 그 속에서 다룬 사건들을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기고 그러면서 법률 지식까지 알게 되니 그거야말로 일거양득일 것이다.역시나 하지수는 법조인답게 바로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잘 보던 송문수는 시간이 지속될수록 점점 지루해하고 있었다.당장이라도 핸드폰을 꺼내 게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제가 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던 그는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티비에 빨려 들어갈 듯 열중하고 있던 하지수가 정신을 차리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송문수는 이미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몸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져 있었고 고개도 반쯤 돌아가 있는 누가 봐도 불편한 자세를 하고도 잘 자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지루하면 지루하다고 말이라도 하지.하지수는 미련한 송문수가 감기라도 걸릴까 봐 담요도 덮어주었다.하지만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