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차에서 내린 계지원이 보였다.육가희는 계지원을 따라 작은 포장마차에 앉았다.정말 이 상류사회로 들어오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인데, 주변에 모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예를 들면 계지원.그는 그냥 작은 포장마차에 앉아 떡볶이를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모두 쳐다보았다.그들 사이에서 계지원이 출중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주 특출나다.두 사람은 각자 한 접시를 시켰다.계지원이 한 입 먹었다.조금 달았다.게다가 사실 그는 단 음식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맛있어요?” 육가희가 물었다.“네.” 계지원이 대답했다.육가희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미지근했다.육가희도 눈치가 빨라,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것을 먹고 있었다.“사장님, 떡볶이 2인분 주세요. 1인분은 포장, 1인분은 먹고 갈게요.”갑자기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지원은 포크를 들고 있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그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먹고 있었다.옆에 있던 의자에 누군가 앉았다.포장마차의 자리는 아주 좁았고, 떡볶이를 먹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대부분 합석해 있었다.예수진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는 것에 익숙해졌다.그녀는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앉았다.하도경이 몇 시에 오는 지도 몰랐다.그녀는 치마를 벗고 두꺼운 패딩을 입고 떡볶이를 먹으러 나왔다.너무 배가 고팠고, 하도경이 송문수와 술을 먹으러 갈 것을 생각하면 집에 왔을 때 단 게 먹고 싶을 것 같아 1인분은 포장한 것이다.이제 막 앉았는데, 예수진 역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누군가의 느낌...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아주 오래된 듯, 계속 있었던 것 같았다.그녀는 사실 애초에 옆에 있는 사람들 보지 않았다.하지만 그 순간 깨달았다.그녀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려 다른 자리를 찾고 있었다.“예... 수진?” 육가희가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듯 그녀를 불렀다.
“너 여기 근처 살아?” 육가희가 그녀에게 물었다.“응.”“여기 되게 좋아 보이는데.” 육가희가 조용히 말했다.“그래서 네 생각에 내가 살 곳은 개미굴이라는 거야?” 예수진의 말투는 약간 충동적이었다.“난 그런 뜻이 아니라. 나도 엄마가 너한테 그렇게 대한 거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느껴...”“됐어. 너랑 너희 엄마 감정이 깊은 건 나한테 말 안 해줘도 돼.” 예수진의 그녀의 말을 끊었다.육가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는 예수진에게 그렇게 나쁜 태도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예수진은 결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가죠.” 계지원은 포크를 내려놓고 육가희에게 말했다.“저 아직 다 안 먹었는데요?” 육가희는 떡볶이를 정말 좋아했다. 게다가 이 집은 정말 맛있었다.“사장님한테 포장해 달라고 할게요.” 계지원이 말했다. “차에 먼저 타요.”계지원이 차 키를 육가희에게 주었다.육가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삼촌.”그녀는 말을 하면서 열쇠를 받아 들고 자리를 떴다.예수진은 차갑게 웃었다.계지원은 누구에게나 다 잘 해준다.이 추운 겨울, 자기가 추워도 육가희에게 포장을 해주고, 그녀가 춥지 않도록 해줬다.사실 예수진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왜 그렇게 그녀에게 못 해주는 걸까.도대체 그녀의 어디가 그렇게 미운 걸까.그녀는 도대체 육가희보다 얼마나 더 못난 걸까?아, 아니다.그녀가 계지원을 좋아하기 시작한 뒤로, 계지원은 그녀를 싫어한 것이다. 그제야 그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었다.예전엔 그녀에게도 아주 잘해줬었다.혹시 육가희에게도 그런 게 아닐까?계지원이 사장님이 포장해 준 떡볶이를 받아 들고 자리를 뜨려던 그 순간.“계지원, 육가희가 좋아하면 어쩌려고 그래?” 갑자기 예수진이 물었다.계지원은 떡볶이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이것만 알아 둬,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려면 사람도 봐 가면서 해야지.”계지원은 조용히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예수진은 살짝 웃었다.이상하게 갑자기
“그럼 어떤 사람 좋아하는데요?”“중요하지 않아요. 어쨌든 하도경은 당신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상처받기 싫거나 난처한 상황 만들고 싶지 않으면, 가서 어머니께 하도경에게 마음 없다고 말씀드려요. 이런 생각 안 하시게.”계지원은 차갑게 말했다.육가희의 눈이 조금 빨개졌다.그녀는 이 사회에 이제 겨우 용기를 내서 발을 뗐다.친구를 사귀는 것이 그녀의 첫걸음이었다.하지만 계지원에게 가로막혔다.“하지만, 저는 엄마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엄마도 저 위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육가희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감정은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하지만 저는 엄마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데...”“유명해지고 싶어요?” 계지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육가희는 의아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다.그녀는 계지원이 그녀에게 냉담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금 이 상황에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하도경 포기하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계지원이 조건을 걸었다.육가희는 마음이 흔들렸다.그녀가 육씨 가문으로 돌아온 것은 육씨 가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다.그래서 모두에게 할 수 있는 한 비위를 맞췄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이 더욱 중요했고, 연예계에 들어간 것도 계속 꿈꾸던 일이었다.그녀는 예수진을 매우 부러워했고, 대역이었지만 계지원의 작품을 연기한 적이 있었다. 그녀 역시 그가 좋은 감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만약 계지원이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도와준다면, 그녀는 훨씬 빠르게 유명해질 것이다.“고민해 봐요.” 계지원도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차가 육씨 저택에 도착했다.육가희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용기를 내 물었다. “삼촌 저 속이는 거 아니죠?”“아니에요.” 계지원은 확신에 찬 말투였다.“그럼 제가 가서 하도경한테 마음 없다고 말할게요.”“네.” 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연락할게요. 빠르면 6개월 안에 거의 TOP 급으로 만들어 줄 수 있어요. 늦어도 1년.”“감
하도경이 계지원에게 물었다.그래도 계지원과 육현경은 친척이니까, 아는 것이 많을 것이다.“아마 아닐 거야. 그래도 잘 모르겠네.” 계지원은 할 말을 찾고 있었다.며칠 전 소이연의 추측으로 결국 육현경이 그에게 맡긴 일을 해내지 못한 것도 양심에 찔렸다.지금 소이연은 낙성시에서 잘 지내는지 모르겠다.어쨌든 소이연은 그 뒤로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육현경도 계속 돌아오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비록 그는 심씨 가문 쪽의 구체적인 상황을 잘 모르지만, 느낌상 긴장 상태인 것을 알 수 있었다.“현경이가 우리 중에서 어릴 때부터 제일 똑똑하고, 제일 잘 생겼고, 성적도 제일 좋았는데, 결국 제일 마음대로 못 사네.” 하도경이 어이없는 듯 감탄하며 말했다.“이게 바로 능력이 좋을수록 책임도 크다는 건가?”“넌 너 관리나 잘해.” 송문수가 하도경에게 말했다.“너랑 나 같은 식충이들이 어떻게 현경이의 야망을 알겠어. 네 술이나 마셔.”하도경이 가장 참기 힘든 건 송문수의 도발이었다.두 사람은 또 목숨 걸고 마시기 시작했다.저녁 9시가 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모두 취했다.송문수는 소파에 누워 꼼짝도 안 했고, 하도경은 화장실에서 장기까지 토해낼 듯했다.계지원은 하도경에게 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병원 데려다줄까?”“나, 욱... 나 괜찮아... 송문수 저 새끼, 취했어?” 하도경이 물었다.“취했어. 소파에서 꼼짝도 안 해.”“진짜, 쟤는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거야.” 하도경이 모진 말을 뱉으며, 토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한참 뒤.하도경이 이리저리 부딪히며 변기에서 일어나 수도꼭지를 틀어 세수를 했다.“가게? 데려다줄게.” 하도경은 딱 봐도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다.그는 보통 라이브 방송을 켜지 않는다.“안 가. 나 여자친구 집 갈 거야. 오늘 약속했어.” 하도경이 정신도 못 차리고 말했다.“죽일 놈의 송문수, 이제야 취하다니...”오늘 저녁 하도경이 이렇게 목숨을 걸고 송문수와 술을 마신 것은
“그럼 몇 층?” 계지원이 물었다.연인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자신과 같이 있어준다면 기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3층.”계지원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도착하자, 계지원은 하도경을 부축해 걸어가 큰 대문 앞에 섰다.계지원은 원래 하도경을 두고 가려고 했지만, 하도경이 도저히 똑바로 서지 못했다. 손을 놓자마자 바닥으로 넘어질 것이 틀림없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초인종을 눌렀다.문은 아주 빨리 열렸다.화사한 얼굴이었다.그녀는... 사람을 꼬시려는 듯 아주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한눈에 봐도 다 보였지만, 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보일 듯 말 듯했다.예수진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계지원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하루 사이에 두 번이나 만나다니.예수진은 이게 악연인지 생각하고 있었다.계지원은 시선을 돌려 해명했다. “하도경이 너한테 일찍 오려고, 송문수 취하게 만들고 자기도 취해서 내가 데려왔어.”예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내가 부축해서 들어갈게. 아마 혼자 걸을 힘이 없는 것 같아.” 계지원은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차분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예수진이 방문을 열었다. “부탁할게.”그녀는 그를 서먹하게 대했다.계지원이 현관을 지나 신발을 벗었다.하도경을 부축하고 있어, 손을 뻗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발로 벗어야만 했다.“됐어. 그냥 들어오면 돼.” 예수진은 계지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몸을 숙여 하도경의 신발을 갈아 신겨주고 있었다.예수진의 것과 똑같은 커플 털 실내화였다. 아주 따뜻해 보였다.“어차피 곧 갈 거잖아.” 예수진이 덧붙여 말했다.계지원은 더 이상 신발을 벗으려 하지 않았다.예수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그녀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어떤 자세를 해도 다 보였다.방금 몸을 숙였을 때, 이미... 아주 잘 보였다.계지원이 하도경을 부축해 들어가면서 물었다. “어느 방에 재워?”“내
계지원의 말이 끝나고 난 뒤에도 예수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예수진은 그냥 예의상 얘기한 것뿐이었다.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계지원이 시선은 아래에 두고 입을 열려던 그때.“내가 물 틀어줄게.” 예수진이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계지원의 옆을 지나 바깥의 공용 샤워실로 가 물을 틀어주었다.물을 틀고는 다시 침실로 돌아와 잠옷과 남자 반바지를 찾았다.하도경은 여기에 옷을 두지 않았다. 여기에서 자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오늘 그가 자고 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 민소매 원피스를 살 때, 하도경을 위해 커플 잠옷과 반바지 두 개도 사두었다.예수진이 걸어와 계지원에게 말했다. “우선 잠옷 입어.”“고마워.”예수진은 그에게 옷을 가져다주고는 그의 곁을 지나쳐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계지원은 예수진이 쪼그리고 앉아 하도경의 토사물을 치우는 것을 보고 있었다.예수진은 어렸을 때부터 육씨 가문에서 컸기 때문에, 옷이 오면 손을 뻗고, 밥을 주면 입을 벌렸다.그 덕에 집안일은 해본 적도 없었고, 음식은 더더욱 할 줄 몰랐다...환경이 그녀를 변하게 한 건지, 하도경이 그녀를 변하게 한 건지 모르겠다...계지원은 뒤돌아 나갔다.예수진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계지원의 차가운 뒷모습이 보였다.예수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계지원은 아마 그녀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겠지.육씨 가문에 있을 때, 그녀는 정말 교활한 사람이었다.예수진이 바닥 청소를 한 뒤, 다시 뜨거운 수건으로 하도경의 얼굴, 손을 닦아주고, 신발과 외투를 벗기고 그가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게 해주었다.모든 걸 다 끝내고, 화장실에 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니, 그제야 자신이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잠시 감정이 요동치는 눈빛이었지만 이내 다시 진정했다.계지원에게 그녀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아무것도 안 입어도 없는데, 이런 건 신경도 안 쓸 것이다.그래도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저녁 하도경과는
그에게 건네준 그 순간.두 사람의 손등이 한 시야 안에 있었다.예수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잠옷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입은 잠옷은 하도경의 잠옷과 커플 잠옷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오늘 밤이 지나면 같이 입을 거라고 생각해, 먼저 화장실에 가져다 두고, 별 생각 없이 입은 것이었다...예전엔 정말 꿈에서라도 계지원과 같은 지붕 아래 똑같은 옷을 입고 싶었는데.그렇게 바라고도 손에 넣지 못한 것을 자신이 완전히 포기한 뒤에야 이렇게 쉽게 이뤄냈다.하늘은 그녀와 장난치는 걸 정말 좋아하나 보다.그녀가 계지원에게 드라이기를 건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어차피 계지원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입던 그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방금 그녀는 이게 하도경의 잠옷이라는 것도 명확히 설명했다.그녀와 하도경의 커플 잠옷은 당연한 일이다.예수진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하도경에게 줄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계지원은 예수진을 흘끗 보고, 그녀가 입고 있는 그와 똑같은 잠옷을 보고 있었다...그는 시선을 떨구었다.눈은 조금 충혈되었다.계지원은 다시 화장실로 가 머리를 말렸다.예수진은 꿀물과 떡볶이를 침대 옆 테이블에 두고, 하도경이 깊이 잠든 것 같아 깨우지 않았다.조금 생각하던 그녀는 다시 거실의 화장실로 가 문을 두드렸다. “계지원, 벗은 옷 나 줘.”계지원이 문을 열었다.머리는 반쯤 말린 상태였다. “뭐라고?”예수진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화장실의 세면대 앞에 계지원이 방금 벗은 옷들이 있었다.옷에는 하도경의 토사물들이 있었다.예수진은 그대로 가져갔다.계지원이 급히 말리며 말했다. “뭐 하게?”예수진은 낯빛이 조금 어두워져 말했다. “빨아주게. 아니면 하도경 옷 입고 가게?”이렇게 추운 날 계지원은 길에서 얼어 죽을 것이다.“나, 내가 알아서 빨게.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세탁기가 빨고, 건조하면 돼
이 냄새… 어딘가 익숙했다.예수진이 먼저 옷을 벗으며 계지원을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냄새가 바로 그 냄새였다. 조금만 더 자극적이었다면 아마 그의 비염이 도졌을 것이다.하지만 그 냄새는 여전히 마력이라도 있는 듯 그의 모든 고민거리를 내려놓게 만들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와…마음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방어선이 그녀를 밀쳐내게 했다.그는 그때 그녀가 흘린 눈물과 그녀의 슬픔, 그리고 그녀의 쓸쓸함을 억지로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나던 냄새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여전히 그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지금 그녀는 다른 남자를 위해 제일 좋아하던 향수를 다시 뿌리고 있었다.정말 이제 다 괜찮아져서 다시 저 향수를 쓴 걸까?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그녀에게서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없었다.올라간 계지원의 입꼬리가 그의 두 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그는 머리를 말린 후 욕실을 빠져나왔다.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지금쯤 예수진은 하도경과 함께 안방에 있을 것이다.하도경은 지금 취해 있었고,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였다.그리 크지 않는 거실에 앉은 계지원은 조금 불안해졌다.내가 여기 앉아도 되는 걸까?여기에 언제까지 있어도 되는 거지?그는 감히 예수진에게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는 그렇게 거실 정중앙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예수진은 겨우 하도경에게 꿀물을 먹여주었다. 취해서인지 그는 정신이 조금 혼미했다. 너무 많이 토한 탓에 뭐라도 마시게 해서 그의 위를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사실 그녀도 술에 취한 적이 있었다.예전에 그녀는 여러가지 사람과 일들을 잊기 위해서 자주 술에 취하곤 했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더 편히 잠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공복으로 술을 들이키게 된다면 다음날 몸이 엄청 불편해진다.예수진은 안방에서 나오며 잠시 후 하도경에게 뭐라도 먹일 생각을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
송문수는 자신마저도 취해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입술을 뗀 하지수가 오랜만에 얌전해진 송문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신의 키스에 몸을 맡기며 가만히 있기만 하는 그에 하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문수 씨, 내가 하는 키스가 그렇게 별로야?”별로라니, 흥분해서 자칫하면 이성이 끊길뻔했는데.여기서 입을 열면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아 송문수는 이번에도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어디가 별론지 얘기해주면 내가 고칠게, 응?”송문수는 아까부터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부단히도 움직이는 그의 울대가 그의 초조함을 대변하고 있었다.하지수 앞에서만큼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송문수라 하지수가 한마디만 더 하면 그는 정말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지수...”그래서 그만하라고 말하려 하는데 하지수가 본인의 손가락을 송문수의 입에 가져다 댔다.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진 지 아는 송문수는 지금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이대로 가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데,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하지수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그런데 하지수는 점점 과감해지는 건지 이젠 하다 하다 손까지 집어넣어 송문수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곳이면 그게 어디든 불에 덴 듯 뜨거워 났다.송문수 역시 술을 마신 몸이라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느슨해져서 이 상황을 즐기는 일이 없게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하지 마 하지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손을 움직여왔다.“아!”그러다 결국 송문수에게 손이 잡혀버린 그녀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송문수를 올려다봤다.자칫하면 그곳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뭐가 아쉬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송문수는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그만해 하지수.”“왜?”“별장에 데려다줄게.”저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으면 송문수도 빨려 들어갈
술에 취한 하지수의 고집을 당해낼 수 없었던 송문수는 결국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밤늦은 시간에 별장에 들어가면 다른 가족들을 깨울 수도 있으니 집에서 잠만 재운다는 핑계를 대가며 말이다.송문수가 하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수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가지 마.”손끝에서 느껴지는 하지수의 온기에 송문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하지수, 잘 봐. 나 송문수야.”“알아, 네가 송문수인 거. 나 버린 무책임한 놈이잖아 너!”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송문수가 감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왜 날 송승우한테 넘긴 거야? 내가 물건이야? 네가 뭔데 날 송승우한테 준다 만다냐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지수는 침대에 올라 선 채 송문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그러다가 넘어져.”“안 넘어져.”하지수는 송문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질문만 퍼부었다.“왜 날 밀어내는 건데! 내가 어디가 별로야? 몸매가 별로야 아니면 내가 못생겼어? 뭘 그렇게 일일이 다 따지고 들어? 넌 보는 눈이 그렇게 높아?”“일단 누워.”“싫어.”송문수가 그녀를 잡아주려고 손을 뻗으면 하지수는 곧장 몸을 돌려 피하곤 했다.그렇게 휘청대는 하지수를 보는 게 송문수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다.“내 말에 대답부터 해. 왜 날 싫어하는 거야?”“난 너 싫어한다고 안 했어.”그의 대답에 송문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하지수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넌 그냥 내가 싫은 거잖아! 나 말고 밖에 있는 그 못된 여자들을 더 좋아하는 거잖아. 나도 그 여자들처럼 변하면 나 좋아해 줄 거야?”“그런 거 아니야.”“변명하지마! 넌 그냥 몸매 좋고 능숙한 그런 여자들만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혼자 화를 내는 하지수가 송문수는 어이없기만 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아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예수진:[저 둘이 나랑 지원 씨보다 더한 것 같아요.]소이연:[수진 씨도 본인들이 너무했다는 건 아네요.]예수진:[... 송문수랑 지수 얘기나 해요.]소이연:[일단 오늘은 지수 씨도 스트레스 풀게 그냥 놔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봐요.]예수진:[그래요.]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하지수는 5병의 맥주를 모두 비워냈다.이미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해롱해롱해지고 몸에 힘도 빠지자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속도 쓰리고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아팠다.누가 자신을 억누르는 것만 같은 느낌에 하지수는 당장이라도 속 시원히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습관적으로 또 참아내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탓에 늘 불안에 떨며 살아와서 그런지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감정을 숨기고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이는 게 하지수라는 사람이었다.“다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나.”예수진이 말을 꺼내자 소이연도 남편을 보며 말했다.“현경아, 시간도 늦었는데 우리도 이만 갈까?”아내 바라기였던 육현경은 이미 입가에 가져다 댄 술잔도 바로 내려놓고는 그녀를 따라나섰다.그들이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하도경 역시 예수진의 눈짓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그럼 나도 갈게.”아직 술을 덜 마신 게 아쉽긴 했지만 예수진의 눈빛을 당해낼 수 없었던 하도경은 결국 소이연 부부의 뒤를 따라갔다.모두가 자리를 뜨자 예수진은 그제야 술을 퍼마시고 있는 송문수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수 집에 좀 데려다줘.”“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해.”“안돼, 난 손님 집에서 안 재워.”“하도경은 너희 집에서 잤잖아.”“지수랑 하도경이랑 같아? 걔는 내 남편이 될뻔한 사이였잖아.”아무 말이 막 하는 예수진 때문에 계지원은 마음이 아파왔다.하룻밤 사이에 두 남자의 마음을 후벼 파 놓은 예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터뜨리는 송문수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어쨌든 아직은 이혼 전이니까 네가 지수 남편이야. 지수 안전은 너한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