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몇 층?” 계지원이 물었다.연인 사이에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이 자신과 같이 있어준다면 기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3층.”계지원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도착하자, 계지원은 하도경을 부축해 걸어가 큰 대문 앞에 섰다.계지원은 원래 하도경을 두고 가려고 했지만, 하도경이 도저히 똑바로 서지 못했다. 손을 놓자마자 바닥으로 넘어질 것이 틀림없었다.그는 이를 악물고 초인종을 눌렀다.문은 아주 빨리 열렸다.화사한 얼굴이었다.그녀는... 사람을 꼬시려는 듯 아주 타이트한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한눈에 봐도 다 보였지만, 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가까운 것 같기도 하고 보일 듯 말 듯했다.예수진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계지원을 보는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하루 사이에 두 번이나 만나다니.예수진은 이게 악연인지 생각하고 있었다.계지원은 시선을 돌려 해명했다. “하도경이 너한테 일찍 오려고, 송문수 취하게 만들고 자기도 취해서 내가 데려왔어.”예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우선 내가 부축해서 들어갈게. 아마 혼자 걸을 힘이 없는 것 같아.” 계지원은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 같았다.차분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예수진이 방문을 열었다. “부탁할게.”그녀는 그를 서먹하게 대했다.계지원이 현관을 지나 신발을 벗었다.하도경을 부축하고 있어, 손을 뻗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발로 벗어야만 했다.“됐어. 그냥 들어오면 돼.” 예수진은 계지원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녀는 몸을 숙여 하도경의 신발을 갈아 신겨주고 있었다.예수진의 것과 똑같은 커플 털 실내화였다. 아주 따뜻해 보였다.“어차피 곧 갈 거잖아.” 예수진이 덧붙여 말했다.계지원은 더 이상 신발을 벗으려 하지 않았다.예수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그녀는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어떤 자세를 해도 다 보였다.방금 몸을 숙였을 때, 이미... 아주 잘 보였다.계지원이 하도경을 부축해 들어가면서 물었다. “어느 방에 재워?”“내
계지원의 말이 끝나고 난 뒤에도 예수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예수진은 그냥 예의상 얘기한 것뿐이었다.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계지원이 시선은 아래에 두고 입을 열려던 그때.“내가 물 틀어줄게.” 예수진이 침대에서 내려왔다.그녀는 계지원의 옆을 지나 바깥의 공용 샤워실로 가 물을 틀어주었다.물을 틀고는 다시 침실로 돌아와 잠옷과 남자 반바지를 찾았다.하도경은 여기에 옷을 두지 않았다. 여기에서 자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오늘 그가 자고 갈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해, 민소매 원피스를 살 때, 하도경을 위해 커플 잠옷과 반바지 두 개도 사두었다.예수진이 걸어와 계지원에게 말했다. “우선 잠옷 입어.”“고마워.”예수진은 그에게 옷을 가져다주고는 그의 곁을 지나쳐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계지원은 예수진이 쪼그리고 앉아 하도경의 토사물을 치우는 것을 보고 있었다.예수진은 어렸을 때부터 육씨 가문에서 컸기 때문에, 옷이 오면 손을 뻗고, 밥을 주면 입을 벌렸다.그 덕에 집안일은 해본 적도 없었고, 음식은 더더욱 할 줄 몰랐다...환경이 그녀를 변하게 한 건지, 하도경이 그녀를 변하게 한 건지 모르겠다...계지원은 뒤돌아 나갔다.예수진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계지원의 차가운 뒷모습이 보였다.예수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계지원은 아마 그녀가 이렇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겠지.육씨 가문에 있을 때, 그녀는 정말 교활한 사람이었다.예수진이 바닥 청소를 한 뒤, 다시 뜨거운 수건으로 하도경의 얼굴, 손을 닦아주고, 신발과 외투를 벗기고 그가 좀 더 편하게 있을 수 있게 해주었다.모든 걸 다 끝내고, 화장실에 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니, 그제야 자신이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잠시 감정이 요동치는 눈빛이었지만 이내 다시 진정했다.계지원에게 그녀는 아무런 매력이 없다.아무것도 안 입어도 없는데, 이런 건 신경도 안 쓸 것이다.그래도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저녁 하도경과는
그에게 건네준 그 순간.두 사람의 손등이 한 시야 안에 있었다.예수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잠옷을 바라보았다.그녀가 입은 잠옷은 하도경의 잠옷과 커플 잠옷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오늘 밤이 지나면 같이 입을 거라고 생각해, 먼저 화장실에 가져다 두고, 별 생각 없이 입은 것이었다...예전엔 정말 꿈에서라도 계지원과 같은 지붕 아래 똑같은 옷을 입고 싶었는데.그렇게 바라고도 손에 넣지 못한 것을 자신이 완전히 포기한 뒤에야 이렇게 쉽게 이뤄냈다.하늘은 그녀와 장난치는 걸 정말 좋아하나 보다.그녀가 계지원에게 드라이기를 건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어차피 계지원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자기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입던 그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방금 그녀는 이게 하도경의 잠옷이라는 것도 명확히 설명했다.그녀와 하도경의 커플 잠옷은 당연한 일이다.예수진은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하도경에게 줄 간식을 준비하고 있었다.계지원은 예수진을 흘끗 보고, 그녀가 입고 있는 그와 똑같은 잠옷을 보고 있었다...그는 시선을 떨구었다.눈은 조금 충혈되었다.계지원은 다시 화장실로 가 머리를 말렸다.예수진은 꿀물과 떡볶이를 침대 옆 테이블에 두고, 하도경이 깊이 잠든 것 같아 깨우지 않았다.조금 생각하던 그녀는 다시 거실의 화장실로 가 문을 두드렸다. “계지원, 벗은 옷 나 줘.”계지원이 문을 열었다.머리는 반쯤 말린 상태였다. “뭐라고?”예수진은 더 이상 얘기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화장실의 세면대 앞에 계지원이 방금 벗은 옷들이 있었다.옷에는 하도경의 토사물들이 있었다.예수진은 그대로 가져갔다.계지원이 급히 말리며 말했다. “뭐 하게?”예수진은 낯빛이 조금 어두워져 말했다. “빨아주게. 아니면 하도경 옷 입고 가게?”이렇게 추운 날 계지원은 길에서 얼어 죽을 것이다.“나, 내가 알아서 빨게.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세탁기가 빨고, 건조하면 돼
이 냄새… 어딘가 익숙했다.예수진이 먼저 옷을 벗으며 계지원을 유혹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그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냄새가 바로 그 냄새였다. 조금만 더 자극적이었다면 아마 그의 비염이 도졌을 것이다.하지만 그 냄새는 여전히 마력이라도 있는 듯 그의 모든 고민거리를 내려놓게 만들었고, 아무 생각 없이 그녀와…마음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방어선이 그녀를 밀쳐내게 했다.그는 그때 그녀가 흘린 눈물과 그녀의 슬픔, 그리고 그녀의 쓸쓸함을 억지로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나던 냄새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생생하게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여전히 그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지금 그녀는 다른 남자를 위해 제일 좋아하던 향수를 다시 뿌리고 있었다.정말 이제 다 괜찮아져서 다시 저 향수를 쓴 걸까?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그녀에게서 이 냄새를 맡은 적이 없었다.올라간 계지원의 입꼬리가 그의 두 눈을 흐릿하게 만들었다.그는 머리를 말린 후 욕실을 빠져나왔다.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지금쯤 예수진은 하도경과 함께 안방에 있을 것이다.하도경은 지금 취해 있었고,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였다.그리 크지 않는 거실에 앉은 계지원은 조금 불안해졌다.내가 여기 앉아도 되는 걸까?여기에 언제까지 있어도 되는 거지?그는 감히 예수진에게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는 그렇게 거실 정중앙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예수진은 겨우 하도경에게 꿀물을 먹여주었다. 취해서인지 그는 정신이 조금 혼미했다. 너무 많이 토한 탓에 뭐라도 마시게 해서 그의 위를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사실 그녀도 술에 취한 적이 있었다.예전에 그녀는 여러가지 사람과 일들을 잊기 위해서 자주 술에 취하곤 했다. 그녀는 술에 취하면 더 편히 잠에 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공복으로 술을 들이키게 된다면 다음날 몸이 엄청 불편해진다.예수진은 안방에서 나오며 잠시 후 하도경에게 뭐라도 먹일 생각을
빨개진 하도경의 얼굴을 보며 예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다 송문수 그 개 같은 놈 때문에 하도경이 이렇게 취해버린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그녀는 기분이 언짢아졌다.다음에 만나기만 해봐라!내가 아주 죽을 때까지 술 먹여버릴 거니까!“물…” 하도경은 불편했는지 몸을 뒤척거렸다.“물 마실래?” 예수진이 그에게 다가갔다.“물 마실래…” 그는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잠깐만 기다려.” 하도경이 이렇게까지 물을 찾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꿀물을 더 준비하지 않은 것이었다.그녀는 황급히 안방을 빠져나왔고, 나오자마자 텅 빈 거실을 보게 되었다. 계지원은 거실에 없었다.간 건가?예수진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목마르다는 하도경 말 때문에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그녀는 빠르게 꿀물을 타고는 하도경을 부축하며 그것을 그에게 먹여주었다.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예수진을 쳐다보았고 한참 후에야 그녀를 알아보게 되었다. “수진아, 미안해…”하도경도 자기가 술에 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사실 오늘, 그는 예수진과 함께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려고 했었다.“지금은 일단 넘어가자. 일단 술부터 깨고, 나중에 다시 얘기해!” 예수진이 그를 협박했다.“내가, 내가 꼭 보상해 줄게…” 하도경은 양심이 조금 찔렸다.“나도 너 가만 안 둘 거야. 하지만 지금은 네 몸 챙기는 게 더 급선무야. 착하지? 죽 좀 먹어.”“입맛이 없어…”“그래서 안 먹는다는 말이야?”“먹을게.” 하도경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그의 반응에 예수진은 미소를 지었다.하도경의 이목구비는 착하고 앳됐다.지금 이 순간, 억울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은 예수진으로 하여금 그를 괴롭히고 싶게 만들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하도경의 볼살을 꼬집기 시작했다.하도경의 피부는 무척이나 좋았다. 비록 살이 많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얼굴에 포동포동한 젖살이 남아있었다.“아파.” 불편한지 하도경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아픈 거 알았으면 다음부터 이렇게 많이 마시지 마.”
계지원은 예수진이 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정도로 작았다.하지만 결국 그의 말은 예수진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너랑 하도경, 사이 엄청 좋아 보이더라.” 계지원이 웃으며 말했다.“그래서 엄청 기뻐?” 예수진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아니…”“너한테 고마워해야지.”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가 날 거절하지 않았다면 하도경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은 몰랐을 거야. 내가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는 줄 몰랐어.”그 말에 계지원의 목젖이 미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감히 표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제어가 안될까 걱정되었다.“너도 예상 못했을 거야. 내가 하도경이랑 만나게 될 줄은?” 그녀는 그를 쳐다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사실 하도경, 줄곧 몰래 날 좋아하고 있었어.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고 줄곧 숨기고 있었던 거지. 고백하면 친구도 못하게 될까 봐. 내가 곤란에 빠졌을 때, 하도경이 물불 안 가리고 날 도와줬어. 내가 역경 속에서 벗어난 후에야 좋아한다며 나에게 고백을 했지.”계지원은 두 사람의 연애사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하도경 아니었으면, 지금의 난 내가 아니었을 거야.”만약 그때 하도경이 그녀를 살려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녀가 얼마나 타락했을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그녀는 인간의 본성이 어떤 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특히 연예계에서.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무척이나 쉬웠다.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도, 그 앞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는 사람도 무척이나 적었다.그녀는 하도경이 너무 고마웠다.그는 예수진이 가장 도움이 필요하던 때 그녀 앞에 나타나주었다. 정말이지 너무 고마웠다.“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됐잖아.” 예수진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지원, 나 예전에는 네가 너무 미웠거든? 네가 나한테 정 없이 구는
방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단번에 열려버렸다.문 열자마자 하도경이 예수진을 깔고 바닥에 누워 있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자세가… 무척이나 야릇했다.예상치 못한 장면에 계지원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그는…사실 그는 방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다. 단지 울려 퍼지는 굉음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그래서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방안으로 뛰쳐 들어온 것이었다.이런 상황을 마주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계지원!” 예수진이 갑자기 막 자리를 떠나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그녀의 말이 계지원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방해하려고 한 건 아닌데…”“여기 와서 나 좀 도와줘. 하도경이 화장실에 가고 싶대.” 예수진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방금 그녀는 하도경을 부축하며 그를 화장실에 데려다주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취한 탓에 하도경은 중심을 잡지 못했고 그대로 그녀의 몸 위로 쓰러지게 되었다.하도경을 부축하기에는 그녀의 힘은 역부족이었고, 두 사람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하마터면 다칠 뻔했다.하도경이 깔고 누운 탓에 예수진은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계지원은 그런 그들 앞에 다가가 열심히 그를 부축하기 시작했다.하도경은 비틀거리며 입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수진아, 내가 다치게 한 건 아니지? 수진아…”“아, 아니.” 예수진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하지만 말과 달리 그녀의 엉덩이는 깨질 듯이 아팠다.하도경, 대체 오늘 얼마나 마신 거야!“화장실에 데려가면 되는 거지?” 계지원이 예수진에게 물었다.하도경은 지금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응.”계지원은 하도경을 화장실까지 부축해 주었다.변기 앞, 하도경은 흐릿한 정신으로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참을 노력했는데도 바지는 내려가지 않았다.그때 예수진이 화장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됐어?”“일단 들어오지 마.”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는 황급히 손을 뻗어 예수진의 시선을 가려버렸다.“왜 바지가 안 내려가지…” 하도경의 목소리에
예수진은 계지원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 “물 좀 마셔.”계지원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물잔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단둘이 같이 있게 되자 두 사람은 조금 불편해졌다.“늦었다. 이제 그만 가봐. 하도경은 내가 챙기면 돼. 오늘은 고마웠어.” 그녀는 말투는 무척이나 진지했다.오늘 밤, 그는 하도경을 집으로 데려다주고, 화장실을 보는 것도 도와주었다. 씻겨도 주고, 잠옷까지 갈아 입혀 주었다. 그녀는 그의 모든 행동이 너무 고마웠다.“그렇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도경이 내 친구이기도 하잖아.”“아무튼 시간이 늦었어.” 예수진은 더 이상 계지원과 인사치레 말을 건네고 싶지 않았다.그를 쫓아내는 말투였다.그녀의 말에 계지원은 안방을 벗어나 바로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예수진은 의례적으로 그를 문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그녀는 대문을 나서면서 일찍 쉬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예상 밖으로 대문은 이미 닫혀 있었다.대체 얼마나… 내가 보기 싫은 거야?계지원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천천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장안시에는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작디작은 눈송이였다.마치 깨져버린 그의 마음과 같았다. 아무도 모를 정도로 조심스러웠다.…다음날.깨질 듯한 두통에 하도경은 결국 깨어나게 되었다.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본 후에야 그는 겨우 정신 차렸다. 예수진의 집이었다.그는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고, 오픈식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는 예수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깨어난 그의 모습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눈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마법이 있었다.“깼어?” 예수진이 물었다.“나 어젯밤에…”“개처럼 마셨지.”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솔직했다.“나, 나… 이게 다 송문수 그 개 같은 놈 때문이야.” 하도경은 모든 화를 송문수에게 풀어버렸다.예수진은 준비해 놓은 아침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됐어. 어젯밤에 이미 충분히 욕했어. 지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