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병실 안.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예수진의 시선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웠다.그에 대한 미움과 증오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그녀는 정말 그가 너무 미웠다.이 모든 비극이 마치 그에게서부터 시작된 것 같았다.그가 대역 배우를 찾아주지 않았다면, 촬영장에서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육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렇게 갑자기 들통나지 않았을 것이다.계지원, 이 사람이 바로 재앙이 아닐까?그를 만난 뒤로, 그녀는 정말 좋았던 적이 없었다.“몸 잘 챙겨.” 계지원이 평온하게 말했다.이마의 상처에도 마치 아픔을 못 느낀다는 듯,그녀를 위로할 뿐이었다.그녀는 정말 그의 갑작스러운 호의가 싫었다.그녀는 그가 아닌 모든 사람의 동정심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계지원은 병실을 떠났다.문을 나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로 쓰러졌다.육현경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괜찮겠어?”계지원은 어지러운 듯 한참 뒤에야 진정한 뒤 말했다. “괜찮아.”“어제 수혈 얼마나 했어?” 육현경이 물었다.“얼마 안 돼.”육현경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 “일단 다친데부터 해결하자.”“그래.”두 사람은 진찰실로 들어갔다.의사 선생님은 계지원의 이마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셨고, 육현경은 옆에서 말했다. “수진이한테 이런 일이 생겼으니, 나는 도리상 고모 편에 설 수밖에 없어.”계지원은 말이 없었다.침묵은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박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이번 일은 수진이의 잘못이 아닌, 윗사람의 원한이야.어쨌든 수진이는 이번 사건의 가장 핵심 인물이니까 죄가 없더라도 관계를 이어갈 순 없어. 우리 고모가 잔인하다고 할 수도 없고.다른 사람이었어도 자기 친딸은 밖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남의 자식이 당연하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으면 받아들일 수 없었을 거야.중요한 건, 그 애가 자기 남편이랑 바람난 여자의 딸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배신의 산물이야.”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나 먼저 간다.” 육현경은 치료가 거의 끝나가는 계지원의 상처를 보며 말했다. “소이연 쪽 사건도 해결하러 가야 해. 나 지금 시간 없어. 어쨌든 난 네 모든 선택을 존중해.”“현경아.” 계지원이 정중하게 말했다. “고맙다.”육현경은 계지원의 어깨를 살짝 치며 말했다. “한 집식구는 두말하면 잔소리야.”계지원은 조금 감동스러웠다.육현경이 그런 말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다 안다는 듯 위로까지 해주었다.오래 보지 않은 사람은 육현경이 강할 뿐만 아니라 따뜻하다는 것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육현경은 병원에서 나왔다.그는 차에서 창밖의 경치를 보며 무거운 한숨만 내쉬었다.사실 머릿속에는 갑자기 예수진이 어렸을 때 그를 쫄래쫄래 쫓아다니며 오빠라고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작았던 아이가 벌써 이렇게나 컸다......그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육현경은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은하 그룹 재무 담당자의 개인 계좌에서 해외 송금 기록이 여러 개 발견되었습니다.”“나한테 보내줘.”“네.”육현경은 눈살을 찌푸렸다.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소이연 사건이었다.육현경은 송금 기록을 보고 소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로운 단서 찾았어.”“응?” 소이연도 집에서 그녀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연구하고 있었다.누락된 내용이 있는지 보고 있었다.왠지 모르게, 집에 예수진이 없으니 굉장히 허전했다.“내가 가서 얘기해 줄게.”“알겠어.” 그녀는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는지 그에게 물었다. “수진 씨 전화기 꺼져있던데, 오늘 스케줄 있어?”“...... 이따가 다시 얘기해.”소이연은 육현경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어젯밤 그녀는 예수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육현경이 그녀에게 예수진은 스케줄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을 전했다.그녀도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연예인인데 바쁜 건 늘 있는 일이었다.하지만 오늘도 예수진의 휴대폰은 꺼져있었고 그녀는 갑자기 불안
“진짜 똑똑하다.” 육현경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소이연은 알게 모르게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지금 육현경은 어린아이를 대하듯 애지중지하고 있었다.이런 모습이 왠지 낯설었다.그녀는 말을 돌렸다. “이따가 얘기해 주겠다던 수진 씨 일도 알려줘. 무슨 일 있어?”육현경은 얼굴이 조금 어두워지며 말했다.“너도 아주 힘들 시기라 굳이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난 감히 너한테 거짓말 못 하잖아.”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그 “감히”라는 단어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육현경은 정말 소심했다.“수진이 어젯밤 촬영장에서 사고 났었어. 아직도 병원이야......”“뭐?”“걱정하지 마. 비록 큰 사고였지만 상태 괜찮아. 간 손상으로 출혈이 많았을 뿐이야.지금은 이미 깨어났고, 별일 없으면 일주일이면 퇴원할 수 있어.” 육현경이 설명했다.“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소이연은 조금 화난 듯 말했다. “적어도 내가 가서 같이 있어 줄 수는 있잖아.”그녀는 예수진이 자신에게 콩팥도 떼어줄 것처럼 잘해준 것을 떠올렸다.그런 예수진이 사고를 당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생각할수록 화가 났다.“일단 진정해.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육현경은 소이연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이어서 말했다. “수진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수혈해야 했는데, 수진이 혈액형이 AB형이었어.”“그래서?”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우리 고모랑 고모부 두 분 다 A형이야.”“......” 소이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당연히 알아들었다.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 육현경을 쳐다보았다.육현경은 그녀가 속으로 추측한 말과 어젯밤에 있었던 모든 일을 그녀에게 말해주었다.소이연은 아주 오랫동안 조용히 있었다.그녀는 예수진이 자기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된 뒤에 얼마나 힘들어할지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었다.“나 병원에 다녀올게.” 소이연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했다.“소이연.” 육현경이 그녀를 잡았다.소이연은 화가 가득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았다.“
“그건 내 일이고.”“게다가, 수진이가 널 만나줄지도 모르겠어. 걔도 자존심이 있잖아.한순간에 백조에서 미운 오리 새끼가 됐는데 걔가 태연히 다른 사람을 만날 거라고 생각해?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 우리가 시간을 좀 줘야 해......”“육현경......”“중요한 건, 계지원이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야.” 육현경은 소이연의 말을 끊었다.소이연은 멍해져 곧바로 말했다. “계지원한테 뭘 기대해?계지원은 수진 씨가 육씨 가문 아가씨일 때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수진 씨가 이렇게 됐다고 한들 이 흙탕물에 발이나 담그겠어?!게다가 고모님이 아무도 수진 씨 못 도와주게 한다며. 양자인 계지원이 무슨 능력이 있어서?수진 씨와 같이 육씨 가문에서 쫓겨나고 싶대?! 계지원이 수진 씨를 위해서 그렇게 할 수 있겠어?!”“내가 예전에 말했었잖아. 계지원이 예수진을 거절하는 건 옳은 일이야.” 육현경이 말했다.소이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그가 무슨 말을 하던, 그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육현경은 천천히 또 자세히 모든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소이연은 깜짝 놀랐다.순식간에 육씨 가문의 큰 사건을 두 가지나 알게 되었다.“그래서, 넌 지금 계지원을 믿어야 해.” 육현경이 결론지었다.소이연은 망설여졌다.“나도 너와 수진이 관계에 대해서 잘 알고, 나도 너희가 잘 지내는 거에 반대하지 않아.수진이는 착한 아이야. 육씨 가문 사람이든 아니든, 잘 지낼 가치가 있어.다만 너도 수진이한테 전화해 봐서 알겠지만, 휴대폰이 계속 꺼져있어. 이건 다른 사람이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겠지.” 육현경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육현경의 의견에 동의하는 셈이었다.혹시 예수진은 지금 정말 진심으로 혼자 있고 싶은 게 아닐까......일주일 뒤.소이연 소송 사건은 여전히 실검에 올라있었고, 어딜 가나 구설에 오르내렸다.하지만 예수진이 육씨 가문 사람이 아니었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이것도 이해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빽빽한 가랑비가 예수진의 몸 위로 떨어졌다.퇴원할 때 의사는 아직 몸이 약한 상태이니 꼭 몸 관리를 잘하고 따뜻하게 굴어야 야며 격렬한 운동도 하지 말고 집에서 한 달 동안 쉬라고 하였다.하지만 이것들은 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러 내보냈다.그녀는 어느 순간 목숨도 소중하지 않은데 다른 것이 왜 중요하냐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냥 이렇게 혼자 쓸쓸히 길을 걷고 있었다.신기한 건 그녀가 그렇게 유명한데, 정말 엄청나게 유명한 탑 급 연예인인데도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곁눈질로 그녀를 보는 시선들은 마치 미친 사람을 쳐다보듯 했다.미친 사람이 아니면 또 누가 이런 비 오는 날 비를 피하지도 않고, 뛰지도 않고 다 맞고 있을까.예수진의 발걸음은 한 네온사인 앞에 멈췄다.위에 걸려있던 큰 광고는 그녀의 광고였지만, 이미 다른 광고로 바꾸는 중이었다.아직 비가 오고 있었지만 정말 기다려졌다.그녀는 떼어진 광고판을 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트럭 안으로 던져지더니 일꾼은 트럭을 몰고 가버렸다.모든 지역에 이제 그녀의 사진은 없었다.그녀는 마치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다시는 찾을 수 없게.하늘은 점점 어두워졌다.오전부터 밤이 되도록 걸었다.예수진의 발걸음은 육씨 가문 별장 대문 앞에 멈춰 섰고, 익숙한 건물을 보며 갑자기 실성한 듯 웃기 시작했다.왜 여기까지 온 걸까.그녀는 갈 곳이 없어서 목적 없이 걸었을 뿐인데.자기도 모르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이제는 들어갈 수도 없다.이렇게 가까운 데 멀게만 느껴진다는 게 이런 뜻이었구나.하지만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쳐버렸다.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그녀는 그대로 축축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비가 멈추지 않는 하늘을 보며 가로등 아래서 그렇게 웃고 있었다.그녀는 아마도 다시는 즐겁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얼마나 지났을까.밤은 점점 더 깊어져 갔고,우산 하나가 그녀의 머리 위에 나
하지만 아직도 이렇게 힘들 줄, 정말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오늘 널 부른 것은, 네가 불쌍해서가 아니다. 단지 네 진짜 신분을 깨닫게 해주려는 것이었어.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시는 육씨 가문 앞에 나타나지 말거라.우리는 널 다시 받아들일 수 없어.” 육청호는 그녀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예수진, 네가 예준모의 혼외 자식이 아니었다면 우리 육씨 가문도 너한테 이렇게 쌀쌀맞게 대하진 않았을 거다.”맞다.그녀의 잘못은 그녀가 혼외자라는 것이었다.허락되지 않는 탄생이었다.“하지만, 제 잘못이 아니잖아요? 제가 태어나고 말고를 선택할 수 없잖아요.” 예수진이 말했다.화내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다만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왜 제가 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거죠?”육청호의 굳센 시선에 감정의 파도가 일었다. “네 잘못은 없다. 다만 이런 일이 네게 일어났으니, 네가 받아들여야지.”예수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세상은 원래 이렇게 불공평한 거였구나.그녀는 한 번도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었는데도 이렇게 복수를 당했다.“네 생각에 우리가 널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 널 받아들이는 건 우리 육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이고,예준모가 우리 머리 위에 올라타도록 내버려 두는 짓이다. 우리 육씨 가문도 견디기 힘들 것이야.” 육청호는 천천히 말했다. “육씨 가문은 이 사람을 잃을 수 없어.”육씨 가문은 장안시에서 제일가는 재벌인데, 이렇게 꽉 막혔다니.“가라.” 육청호가 쫓아내며 말했다.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멀리 가면 갈수록 좋다.”“네.” 예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받아들이는 것 외에 또 뭘 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육씨 가문 사람이 아니다.심지어 그녀는 육씨 가문의 수치이다.그녀는 육청호의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건강하세요.”책상에 올려둔 육청호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어렸을 때부터 사랑으로 키운 아이에게 어떻게 감정이 없겠는가.
예수진이 침묵하면서 계단으로 내려갔다.한마디도 하지 않고 집중해서 층계를 하나씩 내리 디뎠다.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여기서 버티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가 절반쯤 내려왔을 때 갑자기 한 그림자가 곁에 나타났다.예수진은 누가 왔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데려다줄게.”귓가에 계지원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놀랄까 걱정되어 목소리를 잔뜩 깔고 말한 것이다.“됐어요.”예수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가장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계지원이다.“수진아.”“계지원.”계단 입구에서 육은숙이 싸늘하게 불렀다.그녀의 손을 부축하던 계지원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예수진이 그것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다행히 계지원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그녀가 쓰러져서 입원한 동안 계지원이 떠난 후 다시는 오지 않았던 때처럼 말이다.그는 정말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한 번도… 그녀에게 어떤 기대도 주지 않았다.“잊지 마. 네가 어떻게 육씨 가문에 남게 되었는지.”육은숙이 뒤에서 계지원에게 경고했다.예수진은 그의 안색도 살피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본인이나 잘 챙겨요. 계지원.”계지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럴 능력이 없으면 주제넘게 굴지 말아요.”예수진이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으며 떠났다.그녀는 지금 이 순간 정말 피곤했다.마치 이 세계와 작별하는 것처럼 진이 빠졌다.육 씨 저택에서 나오자 웃음이 나왔다.자신이 엄청 대단해 보였다.그런 상황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걸어서 나왔다.하지만 결국은 참지 못하고 축축하게 젖은 도로에 주저앉았다.육씨 저택에서 멀리 떨어졌겠지?
소이연의 재판이 아직 3일이 남았다.하지만 소씨 그룹에서 연간 행사를 조용히 치르지 않고 각 언론 매체에 보도되었다.그 사실이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소이연이 소송에 휘말렸지만 소씨 가문은 상관하지 않고 여전히 행사를 진행한다. 뉴스가 실검에 오르자 자연스럽게 곳곳에 논쟁이 벌어졌다.어떤 사람은 소씨 가문이 너무 냉정하다고 했다. 어쨌든 소이연은 소씨 가문의 큰 아가씨인데 그녀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어떤 사람들은 소이연은 워낙 소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고 그녀가 소씨 가문을 떠났으니 자신이 선택한 길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논쟁이 조금 커졌다.연간 행사일 저녁, 소씨 가문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유백희는 매체 앞에서 엄숙하게 말했다.“소이연은 19살부터 우리 가문과 인연을 끊었어요. 지금 그런 일을 저질러서 가슴이 아프지만 전혀 동정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을 성실하게 가지 않고 굳이 나쁜 길을 고집한다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어르신, 소이연 씨가 19살 때 무슨 일로 소씨 가문과 관계를 끊게 되었습니까? 소이연이 미혼으로 아이를 낳아서 소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했습니까? 그래도 소씨 핏줄인데 그런 실수를 했다고 바로 매정하게 쫓아내다니 너무 냉정한 거 아닙니까?”기자가 의문을 제기했다.“그것뿐이 아닙니다. 소이연은 성품이 악랄하고 어른을 존중하지 않았으며 자기 남동생과 여동생을 괴롭혔어요. 그 해 소이연은 미혼인 몸으로 아이를 낳고도 잘못을 고치지 않고 점점 더 악랄하게 변해갔어요. 지금 한 짓거리들만 봐도 본성이 나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우리 소씨 가문이 호구도 아니고 왜 은혜도 모르는 인간의 편을 들어줘야 합니까? 사람마다 한계라는 것이 있습니다.”“제가 알기로는 소이연이 사업적으로 재능이 있고 능력도 출중하다고 들었어요. 디자인 실력 또한 놀라운 수준이죠. 지금 은하 그룹은 소이연의 인솔하에 반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기세를 제압할 수 없는 장안 최대의 다크호스라고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