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육현경에게서 더는 답장이 오지 않았다.소이연은 입술을 오므리며 고개를 돌려 육민에게 물었다."민이야, 오늘 밤 아빠 야근이래. 나랑 같이 우리 집으로 갈래?""좋아."육민은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엄마 집으로 놀러 가고 싶어."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집에 도착한 후, 소이연은 육민에게 애니메이션을 켜주고 육민을 위해 요리를 할 생각에 빠졌다.비록 해외에서 오랜 시간 혼자 지내왔지만 돈을 벌기 바쁘다 보니 혼자 요리해 먹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 돈이 없을 때는 라면만 먹었고 돈이 있으면 배달 음식을 먹었다.긴 고민 끝에 그녀는 결국 배달을 택했다.고급 레스토랑의 배달 음식이면 안전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소이연은 육민의 옆에 앉아 배달 앱에 집중하고 있었다."엄마, 나 다른 채널 돌려봐도 돼?"육민이 물었다."응, 마음대로 해도 돼."소이연은 리모컨을 가리켰다.육민은 리모컨을 들고 스스로 TV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소이연은 음식을 주문한 뒤에야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머리를 들어 육민이가 보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놀랍게도 우주 과학에 관한 내용이었다."너 이거 알아들을 수 있어?"소이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응."육민의 표정은 태연했다."......"밤 7시, 두 사람은 같이 저녁을 먹었다.육민은 가정 교육이 잘 되어서 밥 먹을 때 절대 떠들지 않았다.밥을 먹고 나서 육민은 소이연을 도와 뒷정리도 말끔하게 했다. 그러고는 또 소이연한테 TV를 같이 보자고 했다. 그들은 예능 프로그램을 틀었다.두 사람이 나란히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모습은 너무나 따뜻해 보였다."저 사람 예수진이야."육민은 화면에서 나온 리얼리티 쇼 참가자인 여배우를 가리키더니 흥분하며 말했다.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저 사람 좋아해?""좋아해.""사람 보는 눈이 있네."소이연이 말했다.예수진은 확실히 예뻤다. 그리고 또 순수한 아름다움이 포인트인 그녀
"엄마, 볼이 왜 빨개?"육민은 한바탕 손짓을 하고 나서야 그녀의 표정에서 이상함을 발견했다.그러더니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육민의 시선 때문에 소이연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그녀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저 어린애가 아무 뜻 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걸.그녀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잠깐만, 일단 내 옷이라도 가져올게.""알겠어."육민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소이연은 흰 티를 육민에게 입혀주었다. 무릎까지 딱 떨어져서 바지는 필요가 없어 보였다.그녀는 육민을 자기의 포근한 침대에 앉히고 육민의 머리카락을 드라이기로 말려주기 시작했다.머리를 말리는 동안 육민은 피곤했는지 그 자세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머리를 다 말리고 소이연이 뒷정리하는 사이 육민은 어느새 그녀의 침대에서 소르르 잠에 들었다.너무나 귀여운 육민의 모습에 소이연은 심장마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육민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그러고는 휴대폰 들고 밝기를 조절한 다음 육현경에게 문자를 보냈다."민이 잠들었으니까 그냥 자게 내버려 두고 내일 데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문자를 보냈지만 이번에는 칼답이 아니었다.소이연은 잠시 답장을 기다리다가 휴대폰을 옆에 놓더니 샤워가운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한참 뒤, 소이연이 씻고 나오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소이연은 다급히 인터폰을 확인했다. 육현경이 문 앞에 서 있었다.‘내 문자 못 본 거야?!’그녀는 문을 열면서 말했다.“민이 잠들었다니까요."육현경의 시선은 이내 그녀의 옷차림으로 향했다.소이연은 급기야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숙였다. 문을 열고 나서야 가운차림에 속옷도 입지 않았다는 게 생각났다..."쾅!".문은 거세게 닫혀 버렸다.육현경은 입술을 오므렸다.소이연은 다급히 방으로 들어가 단정한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젖은 머리까지 정리하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미안해요, 오래 기다렸죠. 들어와요."육현경은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슬리퍼는?""잠깐
“…”소이연은 그가 메시지를 못 본 줄 알았다.“그럼 왜 왔어요?”“밥 먹으러요.”진짜 할 말이 없었다.“화장실은 어디 있어요?”육현경이 물었다.“방에 있어요.”혼자 살기 때문에 공용 화장실을 거실과 연결해 투명한 서재로 만들었다.육현경이 방에 들어갔다.침대에서 곤히 잠든 육민을 보고 화장실에 들어갔다.소이연이 돌아서려던 순간, 갑자기 뭔가 떠올랐다.육현경이 문을 닫자마자 화장실에 버럭 뛰어들었다.육현경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이연 씨, 이게 지금…”소이연은 순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갈아입은 옷과 속옷들을 치우지 않았던 것이다.한 손에 옷을 움켜쥐고 다급하게 몸 뒤에 숨겼다.육현경이 보고 피식 웃었다.소이연이 옷을 갖고 바로 돌아서 나가려고 했다.“이현 씨.”육현경이 뒤에서 불렀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린 순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육이현이 글쎄 브라를 들고 있는 것이었다.그것도 가느다란 손가락에 걸고 높이 쳐들었다.방금 실수로 바닥에 떨어트린 걸 주은 거야?어떤 물건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걸 모르나?이건 실례라고!소이연이 홱하고 빼앗아 도망치 듯 나왔다.귀까지 빨개졌다.…육현경이 화장실에서 나올 때 소이연은 소파에 앉아 이미 진정한 뒤였다.다 큰 성인들끼리 부끄러워할 것 없어.소이연이 육현경을 보내려고 일어서는데 그가 손에 드라이기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소이연은 의아했다.육현경이 소이연과 가장 가까운 거리의 콘센트를 찾아 드라이기를 꽂으며 말했다.“머리 말려 줄게요.”“…”“민이 잘 챙겨주고 저녁까지 차려줘서 고마워요.”“드레스는 이미 선을 넘었어요.”소이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매장에서 환불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육현경이 말을 이었다.“당신이 다른 사람이 사주는 드레스를 입는 게 싫지만 훌륭한 사업가라면 최대의 잉여 가치를 거절하면 안 되거든요.”소이연은 이 남자가 이토록 예의 바르게 제 욕심을 차리는 것에 감탄했다.육현경은 더는 말하지 않고
그동안 알고 지내면서 육현경은 이름 외에 자신의 가문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맞습니다.”육현경이 대답하더니 이내 물었다.“언제 알았어요?”“방금.”소이연이 대답했다.“어렵지 않았어요. 성이 육 씨이고 홀아비에 씀씀이도 적지 않았으니까.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은 건…”육현경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소문보다 훨씬 잘 생겼어요.”“고마워요, 칭찬으로 받아 줄게요.”“…”소이연은 그저 사실을 말할 뿐이었다.“숨길 생각은 없었어요.”육현경이 직언했다.솔직히 소이연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 아직 물건을 사서 주고받는 사이까진 아니었으니까.오늘 물어본 것도 마침 17일이 육 어르신 칠순 잔치가 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니 시간을 내라고 했을 때 구체적으로 무엇을 시킬지 그 정도는 알 필요가 있다 생각했다.“누가 나를 소방관이라고 하길래 내가 설명하면 거짓말한다고 할 것 같아서요. 17일에 정식으로 소개를 하려고 했어요.”육현경이 아무렇지 않다는 말투로 말했다. 살짝 비꼬는 느낌도 있었다.소이연은 누굴 비꼬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 사람은 항상 눈썰미가 안 좋았어요.”육현경이 피식 웃었다.문서인에 대한 평가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늦었어요. 일찍 쉬고 민이 잘 부탁할게요.”“조심히 가세요.”육현경을 보내고 그제야 소이연이 침대로 돌아왔다.살면서 처음으로 침대에 다른 누군가를 들였다.이런 느낌은 너무 묘해서 전혀 싫지 않았다.희미한 불빛에 육민이 쌔근거리면서 자는 모습이 보였다.마음이 왠지 모르게 따뜻해졌다.이튿날 아침.소이연이 간단하게 아침을 차렸다.토스트, 계란과 우유.육민은 소이연이 무엇을 만들든, 계란후라이를 태워도 연속 맛있다고 칭찬했다.칭찬 소리에 기분이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둘이서 아침을 다 먹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소이연이 문을 열자 문씨 아저씨가 공손히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이연 아가씨. 우리 집 큰도련님께서 고객을 만나야 돼서 제가 작은 도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진짜예요?”“그럼.”내일이면 육 어르신의 칠순 생신이다.확답을 듣고서야 육민이 웃으면서 아저씨를 따라나섰다.소이연도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화장하고 출근길에 나섰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장문기가 초청장 한 장을 들이밀었다.“육씨 그룹 어르신께서 내일 저녁에 생신연회를 여신대요. 회장님도 초대하셨어요.”소이연이 열어보았다. 초청장에 자신의 이름이 웅건한 필체로 멋지게 적혀 있었다.육현경이 직접 쓴 것 같은 느낌 적인 느낌.그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소이연이 고개를 들어 소나은을 바라봤다.“언니 찾으러 왔어요.”소이연이 장문기한테 나가 보라하고 초청장을 서랍에 넣었다.“어제 내가 일 때문에 나갔어. 회사 사이트에 내가 무단 결근했다는 것까지 올려야겠어?”소나은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따지러 왔다.출근하자마자 컴퓨터 창에 뜬 공식홈페이지 메시지를 보고 뚜껑이 열릴 뻔했다.어엿한 총괄 경영자로서 무단결근 통보를 받다니 이건 남의 웃음거리가 되란 말 아니야?“회사에도 회사의 규칙이 있으니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해야지.”“언니도 어제 무단결근했잖아?”“회사는 내 거야.”소이연이 차갑게 바라보았다.“그 말은 회사의 규정은 내게 무효라는 말이야.”소나은은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파랗게 질렸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받아들일 수 없으면 은하그룹에서 나가도 돼.”소이연이 여전히 싸늘하게 말했다.이 기회에 나를 쫓아내려고? 누가 속을 줄 알아?“무단결근한 건 내가 잘못했어. 다음엔 안 그럴게.”소나은은 순순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소이연이 냉소했다.“그럼 나가 봐.”소나은이 이를 악물고 돌아서는 순간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그동안 소이연에게서 받은 억울함과 치욕을 반드시 배로 갚아주겠다고 결심했다.사무실에 돌아왔지만 소나은의 안색은 여전히 보기 흉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혀서야 전화를 받았다.“서아야.”“내일 소이연도 육씨 어르신 생신파티에 초대받았어?”소나은이 기억을 더듬
호화로운 연회장 내에 이미 손님으로 가득 찼다.장안 상류사회에서 정상급 인사들이 전부 모였다.소나은은 들뜬 표정으로 소승영 그리고 양화랑, 소준환과 함께 연회장으로 들어갔다.육씨 연회에는 일반 그룹은 물론 아무리 재벌 집 자녀라고 해도 부모들의 중시를 받지 않으면 참가할 수 없었다.오늘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신분의 상징이자 큰 영광을 뜻했다.“나은아!”멀리서 문서아가 불렀다.“아버지. 친구 보러 갈게요.”“그래.”소승영이 당부했다.“행동거지를 조심해. 오늘 연회는 평소 연회와 달라서 무례하게 굴면 안 된다.”“당신도 참, 걱정 마세요. 나은이 일찍부터 철 들었다고요.”양화랑이 자랑스럽게 말하자 소승영이 흐뭇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소나은이 신난 표정으로 문서아에게 다가갔다.문서아 옆에 문서인이 있었다. 문서인은 상류사회의 젊은 도련님들과 함께 있었다.“서인 오빠.”소나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문서인은 미소만 지을 뿐 너무 친밀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아직 대외에 소이연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기에 소나은과의 관계를 드러내면 안 되었다.두 사람은 강 건너 바라보듯 눈길만 주고받았다.“서인아, 네가 육씨네 큰도련님을 만나봤다면서?”그때 한 도련님이 문서인에게 물었다.“만났어.”문서인이 대답했다.“그래도 네가 체면이 있구나.”도련님이 감탄했다.“전에 내가 육 도련님을 만나러 갔을 땐 문전 박대를 받았거든.”“나도.”다른 도련님도 맞장구를 쳤다.“그 도련님은 대체 어떻게 생겼다냐?”“우리가 어떻게 문서인과 비교할 수 있어?”또 누군가 말했다.“서인은 혼자 힘으로 문씨 가문을 일으켰어. 장안에서도 쟁쟁한 인물이지. 우리와 달라.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같이 생매장당할 신세 아니라고.”그 말에 모두 껄껄 웃었다.농담소리 같지만 문서인을 칭찬하는 말은 진심이었다.“이따가 육 도련님을 보면 우리한테 소개해줘. 우리 아빠가 그렇게 육 도련님과 친분을 맺으라고 하신다. 같은 젊은이끼리 많이
“설마 누구랑 같이 왔나?”문서아가 그럴 만한 가능성을 말했다.소나은도 그럴 거라 믿었다.두 여자가 반응하기 전에 문서인이 소이연에게 다가가는 걸 보았다.소이연이 연회장에 들어온 순간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다.그래도 태연하게 행동했다.문서인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태연하게 행동해야 했다.“네가 어떻게 왔어?”문서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여긴 육씨 가문 연회야. 문씨 연회가 아닌 이상 내게 물을 자격이 없을 것 같은데?”소이연이 비꼬아 말했다.“소씨 가문에서도 너를 데리고 오지 않았는데 은하그룹이 어떻게 육씨 초청장을 받을 수 있지? 너 어떻게 들어온 거야?”“그래서 뭘 의심하는데?”“소이연, 연회에 함부로 들어오는 건 아주 창피한 일이야.”문서인이 매섭게 말했다.그 말에 소이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됐다.”문서인이 갑자기 태도를 바뀌며 호의적인 표정을 지었다.“내 옆에 있어. 누가 물어보면 나랑 같이 왔다고 둘러댈게. 필경 다른 사람들 눈에 우리 아직 사귀는 사이로 보이니까.”그러면서 소이연의 손을 덥석 잡았다.하지만 소이연이 바로 뿌리쳤다.문서인이 돌변했다.“소이연. 억지 부리지 마. 지금 너를 돕는 거라고.”“네 호의 따위 필요 없어.”소이연이 싸늘하게 거절했다.“각자 알아서 챙겨.”말을 끝낸 소이연이 문서인 앞을 지나갔다.문서인이 험상궂은 얼굴로 소이연의 뒷모습을 쳐다봤다.눈부신 긴 드레스가 그녀에게 너무나 잘 어울려 아름답기 그지없었다.“미쳐버리겠어.”문서아가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을 냈다.“오빠도 참, 뭐 하러 소이연 신경을 써.”소나은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분명 헤어졌으면서 아직도 소이연을 잊지 못하는 거야?절대 문서인을 빼앗길 수 없어!“서아야.”소나은이 문서아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소이연이 몰래 들어왔다면 우리가…”그 말에 문서아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두 사람이 연회장 입구로 다가갔다.소이연은 연회장 한 켠에 서서 샴페인 한 잔을 가볍게 마셨다.
“서인이 여자친구 아니에요?”그때 지나가던 도련님이 아는 척해왔다.문서인과 친분이 조금 있어 소이연과 만난 적이 있었다.소이연이 예쁘게 생긴 건 진작에 알았지만 오늘 저녁 소이연은 너무 예뻐서 알아보지 못했다.“서인이랑 같이 왔어요? 제가 가서 서인이 불러올게요.”이 도련님은 그래도 호의적인 편이었다.필경 예쁜 여자에겐 마음이 약해지는 편이니까.게다가 소이연이 살짝 안쓰럽기까지 했다.“문서인은 저런 여자 어디가 좋아서 사귀었나?”옆에서 또 여자의 비꼬는 목소리가 들렸다.“지난번에 두 사람 약혼이 무산되지 않았어? 하느님도 문서인이 이런 여자한테 물들이는 게 싫었나 보지.”소이연은 덤덤하게 들을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습관이 되었으니 정말 뭐라고 말하든 괜찮았다.고개를 숙여 지갑에서 초청장을 꺼내려고 할 때 문서인이 그 도련님한테 불려 왔다.“문 선생님.”직원이 깍듯하게 말을 건넸다.“아가씨가 초청장 없이 연회장에 들어왔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혹 도련님과 함께 입장하신 건가요?”문서인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방금 소이연이 무시했던 태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이연, 너 왜 왔어?”문서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몸이 불편해서 안 온다고 했잖아.”자신이 소이연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소이연이 코웃음을 쳤다.소나은은 문서인이 소이연을 도와줄까 봐 무척이나 긴장했었다.그런데 방금 문서인의 말에 기분이 상쾌했다.이러면 소이연도 거짓말을 못하겠지?소문이 난다면 얼굴도 들지 못하고 다니게 될 거야.“정말 초청장도 없이 들어왔다니 너무 웃기다!”옆에 한 여자가 노골적으로 비꼬았다.“소이연은 정말로 상류층의 웃음거리야.”“무슨 상류층까지. 진작에 소씨네 가문에서 제명당했잖아. 문서인과 사귀지 않았다면 누가 상대해 주겠어?”“빨리 쫓아내지 않고 뭐하는 거야? 창피해 죽겠어.”직원이 문서인의 말을 듣고 바로 소이연에게 직언했다.“죄송합니다. 아가씨. 초청장이 없으면 연회에 들어올 수…”말이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
“미안해 문수 씨... 평소엔 이때가 아니라서 나도 몰랐어...”“응.”이 일은 애초에 하지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던 송문수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수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며 3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던 그인지라 오늘에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일주일을 더 기다리게 된 이 상황에 송문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한숨을 쉬는 송문수를 본 하지수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줄로 알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다음에 다시 할까?”하지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 생리 끝나면 당장 해.”자신한테 자꾸 일이 생겨버려 송문수가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하지수는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청심환을 하나 먹고는 말했다.“그럼 편히 자, 난 내 방 가서 잘게.”“어디 간다는 거야?”“내 방 가야지.”“하지수, 네 발로 직접 내 방 찾아와 놓고 이제 돌아가겠다는 거야?”갑자기 터진 생리 때문에 관계를 못 가진 것도 화가 나는데 사람까지 가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송문수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나 생리 와서 어차피 못하잖아.”“그게 왜?”“아까 문수 씨도 생리 끝나면 하자고 했잖아. 지금 하는 건 나도 좀...”송문수가 되묻자 하지수는 아주 난감해하며 답했다.“하지수, 넌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까 너 안 놔줬으면 여기 진작에 피바다 됐어.”“...”“관계까지 할 사이에 뭘 내외를 하고 그래. 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앞으로 쭉 같이 자자고? 나랑?”“왜, 싫어?”“아니.”당연히 싫진 않았지만 하지수는 그저 송문수가 관계도 없는 잠을 자신과 함께 자겠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그렇게 순진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빨리 와서 자. 아까 너무 움직였더니 피곤해.”송문수가 먼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자 하
송문수의 입술이 하지수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에 닿을 때,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 해보는 하지수는 온몸이 떨려왔다.태어나서 딱 한 번, 송문수와 차에서 해본 게 전부인 그녀는 송문수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그렇게 하지수를 안달 나게 하던 송문수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걸 확신하고는 점차 행동을 대범하게 하기 시작했다.자연의 섭리인 것마냥 물 흐르듯 움직임을 이어나가던 송문수가 갑자기 멈췄을 때 하지수는 온몸이 뜨거워 나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온몸이 나른해진 그녀는 송문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 송문수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가 그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제 아래에 누워있는 하지수를 보며 정말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된 송문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문수 씨?”하지만 하지수는 아까는 그렇게 늑대처럼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거친 숨만 연신 내뱉는 게 이상했다.“문수 씨...”“지수야.”송문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그 숨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피부에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곧 자신이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곁을 내주면서 왜 자기 앞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건지 하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본인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서 송문수가 싫어하는 걸까 봐 자연스레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송문수가 잔뜩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 생리 왔어.”“뭐?”송문수의 말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송문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속옷에 피 묻어있어, 아마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수치스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이틀 뒤가 예정일인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