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경은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예수진은 그대로 자버린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필경 새벽 4시라 그녀도 졸려서 눈이 막 내려올 지경이었다.그때 육현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가자.”그냥 인사치레로 건넨 말인데.이 순간 따뜻한 이불 속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더 강렬했지만 어쩔 수 없이 육현경을 따라 야식을 먹으러 나갔다.길가에 있는 포장마차에 자리 잡고 앉았다.다행히 한밤중이라 인적이 드물고 완벽하게 무장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오빠. 적게 마시면 안 돼?”예수진이 말렸다.자리에 앉자마자 필사적으로 술을 들이부어서 도저히 봐줄 수 없었다.눈앞에 이렇게 많은 안주를 두고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이렇게 마시면 입 돌아간다고요.육현경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마셨다.“이연 언니랑 싸웠어?”예수진은 어쩔 수 없이 이유를 캐물었다.그가 술잔을 들고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나와 싸우지 않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처리하지.화라도 내면 적어도 내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겠는데 말이야.“오빠, 이연 언니와 심아윤. 세 사람 대체 무슨 상황이야?”원하는 대답을 얻지 못하자 예수진의 급한 성격이 발동했다.며칠 전에 육현경이 할아버지한테 감시당해서 자세한 상황을 알아내지 못했다.지금 딱 말하기 좋은 시간인데 그가 또 침묵 모드로 들어갔다.“나 심아윤과 결혼하지 않아.”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근데 지금 온 국민이 두 사람이 결혼하는 줄 알고 있잖아.”예수진의 말투가 거칠어졌다.“육 씨와 심 씨가 공개적으로 결혼을 발표했는데 그 인간들 멍청한 것도 아니고 자기 얼굴에 침을 뱉겠냐고!”육현경이 입술을 깨물었다.확실히 어려웠다.그날 모두 앞에서 결혼을 발표할 때 솔직히 그도 한동안 멍해 있었다.그동안 항상 할아버지를 존중했었는데 이렇게 선처리 후보고를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하기 싫어하는 일은 누구도 막지 못했다.심아윤과 결혼하기 싫다
육현경이 술잔을 움켜쥐었다.“솔직히 말해서 오빠는 내 사촌이지만 이번 일만큼은 이연 언니가 오빠한테 목맬 가치가 없다고 봐. 그런 과거를 안고 살아온 사람이 아주 어렵게 자신감을 갖고 한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또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난 상상 못 하겠어. 나중에라도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야.”예수진은 너무 괴로웠다.그렇게 좋은 여자인데 팔자가 왜 이렇게 사나워.한 번 또 한 번 상처를 받게 하고 끝이 없어!“이연이…”육현경이 술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이대로 떠나버릴까 봐 두려워.”그녀가 살아온 지난날을 잘 알아서 두렵고, 자신의 마음을 꼭 닫아버리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까 봐, 이대로 떠나버릴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그에게 시간이 필요했다.결혼하기 싫어도 육 씨 가문의 안위를 무시하고 심 씨 가문과 얼굴을 붉힐 수 없었다.그리고 친척들과 할아버지와의 혈연 관계도 끊어낼 수 없는 노릇이다.심지어 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해도 소이연에게 상처를 주는 건 똑같았다.그가 명성, 재산, 권력을 포기한다면 강력한 세력들 앞에서 소이연을 보호할 수 없다.결혼을 무르려면 전략적인 과정이 필요하다.하지만 목적에 도달하기 전에 소이연이 멀리 떠나버릴까 봐 걱정이다.그때면 다시는 소이연을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소이연은 한번 마음을 접은 일에는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다.문서인에게도 그랬다.오늘 저녁에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을 봤지만 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옛정이 되살아나서 만난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그녀의 성격은 그토록 강인해서 절대 돌아서는 법을 모른다.그래서 그녀를 찾아가 기다려 달라고 자신에게 실망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예수진은 그의 말을 듣고 또 안쓰러웠다.내심이 강한 육현경이 이런 말을 할 때 그의 마음은 오죽할까?얼마나 좋아하면 잃어버릴까 봐 이토록 노심초사할까?또 얼마나 좋아하면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을 내려놓을까?예수진은 두 사람을 어떻게 위로해
예수진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맥주병을 보면서 물었다.“오빠, 더 마실 거야?”오빠의 주량이 좋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마셨으니 취할 만도 하지.나도 지금 머리가 어지러운데…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가? 아무튼 더 마시면 엄청 취할 것 같아.“기다리고 있어.”육현경이 입을 열었다.“누구를?”“기사.”예수진은 그제야 모두 술을 마신 상태라는 것이 생각났다.그리고 소이연의 차를 운전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역시 우리 오빠는 취해도 제정신이라니깐.오빠의 이런 면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이성적인 사람은 보통 잘못을 쉽게 저지르진 않아.하지만 이런 사람한테는 제대로 스트레스를 풀거나 잘 쉬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예수진은 어쩔 수 없이 육현경과 함께 술을 마셨다.마시고 있는데 육현경이 갑자기 물었다.“너 아직도 계지원 좋아해?”예수진은 넘기려던 술을 그대로 뿜어버렸다.육현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쳐다보았다.“쯧쯧.”그녀는 재빨리 티슈를 뽑아 식탁에 묻은 술을 닦고는 자신의 입도 닦았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했다.“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내가 미쳤다고 인정하겠어?육현경은 예수진을 지그시 쳐다보았다.그녀는 그의 눈빛에 머리가 욱신거렸다.아, 다시 생각해 보니 눈치 빠른 오빠가 내 속내를 모를 리 없잖아?내가 단순한 토끼라면 오빠는 늙은 여우니까.“이제는 안 좋아해.”예수진은 부인했다.하지만 좋아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앞으로도 그래야 할 거야.”육현경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응?”이 오빠 정말 내 친오빠가 맞아?오빠가 실연했을 때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술도 같이 마셔주고 위로도 해주고 여자친구를 대신 달래주고!그런데 오빠는?내 기분이 어떻든 상관도 안 하고 뭐? 앞으로도 그래야 할 거라고?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내가 그 사람한테 절절 매는 줄 알겠다!그래. 사실 그렇긴 하지.그런데 좀 위로해 주면 죽냐?나처럼 멘탈이 강한 사람이어야 8년 동안 짝사랑이나
계지원은 그녀를 놓아준 뒤 더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육현경 곁으로 다가가서 물었다.“혼자 걸을 수 있겠어?”그는 육현경이 많이 마셨다는 것을 눈치챘다.“응.”“가자.”계지원의 말에 육현경은 몸을 일으켰지만 취기 때문에 비틀거렸다.계지원은 결국 그를 부축해서 조수석에 앉혔다.예수진은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가면서 같이 차에 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현경이 말로는 이 차가 소이연 씨 차라던데. 차를 돌려줄 겸 너도 데려다줄게. 타.”계지원의 말에 예수진은 뒷좌석에 올라탔다.차는 도로에서 안정적으로 달렸다.길에 차가 거의 없었지만 계지원은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운전했다.그는 한결같이 부드럽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얹혀살아서 그런가? 난 이 사람이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그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 내가 반했을지도…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왜 계지원을 좋아했는지 모르겠어.내 주위에 널린 게 잘생기고 훌륭하고 돈 많은 남자인데 말이야.아, 이건 하늘이 나에게 내린 벌일 거야!피할 수 없는 그런…차가 갑자기 길가에 멈춰 섰다.예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뭐 하시는 거죠?”“현경이가 연고 좀 사달라고 해서. 조금만 기다려줘.”계지원의 대답에 예수진은 의아했다.누가 다쳤기에 연고를 사? 오빠는 안 다쳤는데.아, 참. 내 손등이 좀 부은 것 같은데…그녀는 어두운 가로등 불빛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계지원은 연고를 사 왔고 육현경을 사우스 타운에 데려다주었다.“잠깐만 기다려. 나 현경이 데려다주고 올게.”“네.”예수진은 너무 졸려서 하품만 하고 있었다.계지원이 육현경을 데려다주고 차에 다시 탔을 때, 예수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그녀는 피곤했는지 가벼운 코골이 소리가 들려왔다.계지원은 그녀가 깰까 봐 더 천천히 운전했고 안정된 속도를 유지했다.소이연의 차고에 도착한 그는 주차를 마친 뒤 뒷좌석 문을 열었다.예수진은 뒷좌석에 뻗어 있었고 살짝 벌어진 입 옆으로 침이 흘렀다.정말 잘 자네.계지원의
계지원은 입을 열었다.“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수진이가 잠드는 바람에…”“아, 괜찮아요. 원래…”소이연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먼저 수진 씨를 침대에 눕히죠.”계지원은 더 묻지 않고 예수진을 소이연의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예수진은 잠에 들어서부터 지금까지 미동도 없었다.그녀를 내려놓은 계지원은 소이연의 방에서 나왔다.소이연은 그를 배웅해 주려고 따라나갔는데 객실에 나온 계지원은 그녀한테 아까 사놓은 연고를 건네주었다.소이연이 멈칫하자 계지원은 설명해 주었다.“현경이가 전해달래요.”소이연은 입술을 깨물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늘 저녁에 장지원한테 감금당하는 바람에 목에 아주 큰 멍이 들었다.나는 그가 못 본 줄 알았는데…“고마워요.”소이연은 연고를 건네받았다.그녀는 계지원을 난처하게 만들기 싫었고 작은 일에 연연하기 싫었던 것이다.계지원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이 갔다.소이연 씨가 이토록 침착한 걸 보면 정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난 현경이가 다시 소이연 씨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장담 못 하겠어.“아, 참.”계지원은 말을 이었다.“그 안에 숙취에 도움 되는 약도 있어요. 내일 아침 수진이가 숙취 심하면 그 약 한 알 주면 돼요. 부탁할게요.”“알겠어요.”소이연은 대답하고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계 감독님, 만약 수진 씨를 행복하게 할 자신이 없다면 선은 지켜주세요.”계지원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겠죠.”소이연은 솔직하게 말했다.“네.”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고 소이연의 말 뜻을 이해한 것 같았다.그는 예의 있게 인사를 했다.“실례했어요. 저는 이만 가볼게요.”“아닙니다.”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두 사람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는데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예수진과 얽힌 관계라서 그런 것 같았다.아니, 육현경과 얽힌 사람이라 그런가?계지원은 집을 나섰고 소이연은 방으로 돌아왔다.예
예수진은 전화기 너머로도 소이연이 얼마나 바쁜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언니는 바삐 돌아야만 안 좋은 일을 잊어버릴 수 있나 봐.나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작은 배역으로부터 시작해서 늘 앞으로 달리기만 했어.소이연은 휴대폰을 놓고 회의실로 향했다.오전에는 경쟁입찰에 대해 토론을 하고 오후에는 새로운 브랜드 창립에 대해 연구해야 했다.한 기업이 계속해서 발전하려면 부단히 개발해야 한다.회의가 끝날 때는 이미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소이연은 계속해서 수십 개 지어는 수백 개의 OA 지시 요청을 검토했다.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소이연은 한눈 보고는 끊었지만 얼마 안 지나 전화벨이 또 울렸다.모르는 번호였기에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받았다.“여보세요.”“안녕하세요. 저는 남원 경찰서 민경인데요. 어제 장지원 씨와 문서인 씨 폭행 사건에 대한 조사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소이연 씨께서 직접 오셔서 또 한 번 조사서를 작성하셔야 할 것 같아요.”“네. 지금요?”소이연은 재빨리 대답했다.“지금 오시면 더 좋고요.”“바로 갈게요.”소이연은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사무실을 나섰다.장문기는 그녀가 퇴근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는지 놀라워했다.“회장님.”“나 컴퓨터 안 껐어. 안에 OA 지시 요청 있는데 그것 좀 검토해 줘. 모르는 것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거나 문자 보내고.”“알겠습니다.”장문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소이연은 택시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그녀의 운전 실력이 좋지도 않거니와 어젯밤에 제대로 자지도 못했기에 피로 운전을 할 수도 있어서 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한 것이다.경찰서에 도착한 그녀는 문서인을 발견했다.문서인이 그녀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하기 싫어서 받지도 않았던 것이다.그녀는 업무를 처리하느라고 어젯밤 장지원에 관한 일을 잊어버렸다.“소이연 씨, 문서인 씨. 저를 따라 사무실로 가시죠. 관건적인 디테일에 대해 다시 확인해 주셔야 해요.”민경은 두 사람한테 말했다.“네.”소이연은 조사에 임하
소이연은 이렇게 쓰러질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어젯밤에 거의 자지 못하고 오늘 업무량도 많았지만 그녀는 늘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문서인 앞에서 그녀는 쓰러졌다.쓰러진 찰나,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예수진은 집에서 소이연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그녀는 오늘 모든 스케줄을 미루고 장안시에서 제일 유명한 셰프한테 영양식을 예약했다. 소이연이 요즘 살도 많이 빠지고 팔목도 가늘다 못해 건드리면 부러질까 봐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었던 것이다.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연 언니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파.이연 언니는 분명 나보다 강하고 우수하고 예쁘고 어른스럽지만 꽤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이야…아름답고 강하지만 많은 풍파를 겪은 사람.그녀는 저녁 7시 반까지 기다리다가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아니, 이 언니는 어젯밤에 자지도 못하고 오늘 하루 종일 일했으면 됐지.또 새벽까지 야근하겠다는 거야, 뭐야?언니는 본인이 아이언맨인 줄 아나 봐.예수진은 씩씩거리면서 소이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거신 전화기는 꺼져…”언니 전화가 꺼졌다고? 그럴 리 없어.이연 언니는 늘 24시간 전화를 켜두고 다녔어. 배터리가 다 나가서 전화가 꺼질 리도 없고.언니는 누구보다도 세심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이니까.예수진은 원래 급한 성격이라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그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이연의 차 키를 들고나갔고 곧장 은하 그룹으로 향했다.도착한 그녀는 소이연 사무실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그 바람에 장문기는 깜짝 놀랐다.그는 소이연을 대신해 OA 지시 요청을 검토하고 있다가 모르는 부분이 있어서 그녀에게 문자했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이번에는 전화를 걸려 했는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던 것이다.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본 그는 더더욱 놀랐다.이… 이 분은 내가 제일 좋아하던 연예인 예수진 씨잖아!실물을 영접한 것도 놀라운데 이렇게 가깝다니!나 환각이 생긴 건가?이때 그는 예수진이 급히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육 씨 그룹 대표 사무실.육현경은 전화를 끊은 뒤 다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지원아, 문서아한테 문서인 집에 있는지 물어봐 줘.”“무슨 일 있어?”“물어보고 문자 줘. 있는지 없는지만 알면 돼.”그는 말을 마친 뒤 바로 전화를 끊었고 다른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장안시에 모든 감시 카메라를 돌려서 소이연이 퇴근 후에 어디로 갔는지 알아봐. 그리고 장안시 안에서 소이연을 찾아내! 그리고 소이연에 관한 소식이 있으면 곧바로 나한테 전화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마.”“네. 바로 출동하겠습니다.”전화 한편에서 공손하게 대답했다.전화를 끊으려던 육현경은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싶었다.“소이연 휴대폰 마지막 통화기록이 누구인지도 알아봐.”“네.”그는 전화를 끊었고 마침 계지원한테서 문자가 와있었다.“문서인 씨 집에 안 계신대.”그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고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문서인, 제 무덤을 파다니…지난번에 그가 문 씨 그룹을 인수하지 않은 것은 계지원을 위해서였다.문서아와 계지원이 사귀고 있으니 그는 계지원의 체면을 지켜주려고 했다.하지만 지금은…육현경의 낯빛은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졌다.이명진은 곁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묻지도 못했다.하지만 육현경의 모습을 본 그는 큰일이 벌어졌음을 감지했다.대표님한테 큰일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사모님에 관한 일이겠지.이명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강하고 완벽하신 대표님은 왜 사랑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실까.깨어난 소이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저혈당으로 인해서 쓰러진 것이 분명했다.그녀는 그제야 온 하루 아무것도 먹지 않았단 사실을 알아차렸다.너무 피곤하면 입맛도 없다.“깼어?”귓가에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소이연은 고개를 돌렸고 문서인과 눈이 마주쳤다.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위험 앞에서 본능적으로 긴장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아무리 아닌 척해도 숨길 수 없었다.그녀는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침대에 묶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