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과 육현경이 다시 룸으로 돌아갔다.룸에 들어서기 바쁘게 육현경은 하도경에게 끌려 술 마시러 갔다.소이연은 불편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혼자 노래를 신청해 불렀다.룸에서 각자 알아서 술을 마시거나 노래를 부르며 나름대로 즐겼다.어느새 늦은 밤이 되었다.예수진이 얼마나 마셨는지 소이연의 몸에 눕다시피 기대어 혀꼬부랑 소리를 내며 물었다.“오빠가 방금 언니한테 무슨 짓을 했어요?”“아무 짓도 안 했어요.”소이연이 재빨리 고개를 휘저었다.“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예수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두 사람이 들어오고 나서 오빠 기분이 확 달라졌어요. 처음엔 억지로 술을 마시더니 지금은 알아서 막 들이붓는데요?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소이연은 안절부절못했다.“알 것 같아요.”예수진은 마치 지나온 사람처럼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그런 게 아니에요.”소이연이 다급하게 설명했다.하지만 예수진은 이미 그쪽으로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그런 건 뭔데요? 오빠 팔뚝에 손톱자국이 있던데. 솔직히 말해 봐요. 오빠 기술이 좋았어요? 역시 잘생긴 사람들은 잘 꼬시죠?”거침없는 말에 소이연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예수진!”소이연이 허둥대며 해명하려고 할 때 머리 위에서 육현경의 엄숙한 소리가 들렸다.예수진이 흠칫 놀랐다.방금까지 하도경이랑 술을 마시던데 눈이 소이연 몸에라도 달린 거야?“화장실 급해!”예수진이 도망치듯 달려가자 소이연이 참지 못하고 웃었다.육현경을 이토록 무서워할 줄은 몰랐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육현경이 말없이 그저 웃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선뜻 친해지기 쉬운 사람은 아니었다.“가자.”육현경이 소이연에겐 부드럽게 대했다.“저 사람들은?”소이연이 물었다.이미 밤 12시를 넘은 시간이다.“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육현경이 담담하게 말했다.“당신이 가면 어떡해?”“이미 12시 지났어. 내 생일도 지났으니 더는 주인공이 아니야.”육현경은 당연하다
계지원도 꽤 마셨으니 일찍 갔겠지.예수진은 소파에 던진 가방을 집어들고 룸에서 나오려고 했다.“우웩!!”그때 룸 화장실에서 누군가 구토하는 소리가 들렸다.잠시 망설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화장실에 들어가 보았다.계지원이 변기를 부둥켜안고 고통스럽게 오바이트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예수진이 입술을 오므렸다.한 잔 마셔도 취하는 인간이 오버한다 했어. 내일 촬영도 있으면서.똑똑한 예수진은 오늘 저녁에 많이 마실 걸 알고 미리 내일 휴가를 냈다.계지원은 하다하다 담즙까지 토했다.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다들 술을 그리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서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 알코올과 접촉하지 않았다.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은 탓인지 일어나자마자 몸이 옆으로 쏠리며 바닥에 넘어질 것 같았다.그때 익숙한 그림자가 다가오더니 아담한 몸으로 낑낑 대며 겨우 그를 부축해주었다.순간 진한 향수 냄새가 계지원의 코를 찌르자 동공이 흔들렸다.“에취!”계지원이 재채기를 심하게 했다. 그는 향수 알레르기가 있었다.향수 냄새가 진할수록 알레르기 반응도 심했다.예수진은 그걸 알고 일부러 진하게 뿌린 것이다. 계지원과 가까이 접촉하는 걸 막기 위해서.오늘 밤 하도경과 술을 마시게 되면 계지원이 알아서 피할 거라 생각했었다.예수진이 계지원을 천천히 내려놓았다.계지원이 연달아 재채기를 하자 그녀가 멀리 떨어져 섰다.“아직 안 갔어?”계지원이 싸늘하게 물었다.그가 찬물로 얼굴을 씻더니 갑자기 몸을 꼿꼿이 폈다.방금 죽을 지경으로 토하던 사람 같지 않았다.“가려던 참이었어요.”“하도경이 너를 데려다 주지 않았어?”계지원이 눈살을 찌푸렸다.하도경이 자기 입으로 예수진을 데려다 주겠다고 해서 시름 놓고 화장실에 들어온 것이었다.“그 정도로 취했는데, 내 발로 가는 게 더 빨라요.”계지원이 깨끗한 물티슈를 몇 장 뽑아서 얼굴과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가자, 내가 데려다줄게.”계지원이 마신 것을 전부 토해냈으니 별 탈 없어 보이긴 해
택시가 드디어 육 씨 저택에 도착했다.계지원이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벽 쪽으로 달려가 또 구토하기 시작했다.얼마나 토했으면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당장 위까지 토해낼 기세였다.“개인 의사를 부를까요?”“에취!”예수진이 다가가기도 전에 계지원이 또 재채기를 했다.구토하면서 재채기까지, 정말 안쓰러워서 도저히 눈 뜨고 봐줄 수 없었다.“의사를 불러 줄게요.”예수진이 뒤로 물러서며 말하고는 집으로 들어갔다.기진맥진한 계지원은 나중에 개인 의사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예수진이 씻고 나왔을 때 계지원의 방문이 열리고 전등이 켜져 있었다.들어갈까 말까 머뭇거리다 결국 들어갔다.마침 의사가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는 계지원에게 수액을 놓고 있었다.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큰 병이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계지원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개인 의사가 예수진을 보더니 공손하게 불렀다.“아가씨.”“상태 어때요?”예수진이 물었다.“술을 무리하게 마셨어요. 오늘 밤에 수액을 맞고 지켜봐야 알아요. 만약 호전되지 않으면 내일 병원에 들러서 다른 위병이 없는지 위내시경을 받아야 합니다.”“그렇게 심각해요?”“계지원 씨는 본래 만성 위염이 있어서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과하게 마셔서 몸이 버티지 못하고 있어요.”의사가 주의를 주었다.“앞으로 적게 마시라고 일러주세요.”“네.”예수진이 대답했다.“수액은 언제까지 맞아야 되죠?”“두 시간 정도요.”지금 새벽 1시다. 문제는 내일 계지원은 촬영이 있었다.“제가 옆에서 지키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가씨.”의사의 말에 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서 나갔다.방에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머릿속에 온통 계지원이 술을 마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도 하도경이 예수진과 술을 마시려고 할 때마다 계지원이 술잔을 들었던 것 같았다.예수진이 이불을 뒤집어썼다.제발 내게 어떤 기대도, 어떤 희망도 주지 말라고!…그날 밤.육현경은 소이연을
소이연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갈 때까지, 가겠다고 대답했던 남자는 여전히 문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늦었어. 얼른 가서 쉬어.”소이연이 다시 재촉했다.“알았어.”대답은 성실하게 했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소이연이 이를 악물고 문을 닫아버렸다.집에 들어간 뒤, CCTV를 켜 보았다. 육현경이 아직도 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참 어이가 없었다.소이연이 문을 벌컥 열며 물었다.“간다면서?”“갑자기 할 말이 생각났어.”육현경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생일 선물을 못 받았어.”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오늘 밤 헤어질 생각만 하느라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 괜히 귀찮아지는 게 싫었다.“그냥 간단하게 말로 해도 돼.”육현경이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가 암시했다.왠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밤새 이곳에 버티고 서 있을 것 같았다.소이연이 심호흡을 마치고 성큼성큼 육현경 앞으로 다가왔다.그녀가 그의 목을 껴안더니 까치발을 들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육현경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그 눈빛에 소이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얼른 가.”“의외네. 이연 씨는 몸으로 보상하는 걸 좋아했구나.”육현경이 입꼬리를 올리며 과시했다.술이 깨지 않아서 거슴츠레하던 눈이 갑자기 맑아졌다.“난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이득을 봤다고 잘난 체하는 모습에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그래도 몸으로 보상하는 게 마음에 들어.”육현경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자 두 사람의 분위기도 점점 애매해졌다.빨갛던 소이연의 얼굴이 당장 폭발할 것 같이 뜨거웠다.“잘 자.”육현경이 마침내 돌아섰다.소이연은 쾅 문을 닫아버리고 두 손으로 뜨거운 얼굴을 감쌌다.저도 모르게 예수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오빠가 잘 꼬시죠?’그래, 완전 선수야.대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을 만나면 이 정도로 노련해질 수 있는 거야?…이튿날.어제 저녁에 너무 늦게 잔 데다 불명증까지 더해져 늦은 아침이 되어서
유백희는 자신의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소승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유백희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그녀의 말에 토 한 번 단 적 없는 소승영이었는데…지금 그는 병원에서, 그것도 의사와 간호사들 앞에서 그녀를 손가락질까지 하면서 욕을 했다.그녀는 자신이 나이를 먹고서 아들한테 욕먹는 것이 수치스러웠다.“네가 감히 내 앞에서 언성을 높여?”유백희는 이런 대우를 받은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눈시울이 붉어졌고 소승영을 가리키던 손도 덜덜 떨렸다.소승영은 분노한 상태였기에 유백희의 감정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만약 소이연이 일을 벌여서 소씨 그룹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고 장안시 “효자”라고 불리던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는다면 유백희가 감옥에 들어가든 말든 그가 알 바 아니었다.소승영은 소이연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어머니가 알아서 하세요!”소승영은 이 말을 끝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유백희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아들이 자신을 병원에 내버려 둔 채 떠나가는 뒷모습을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어머니.”양화랑도 함께 병원에 왔는데 유백희와 소승영이 싸우는 것을 보고는 다급히 말렸다.“승영 씨 마음도 좀 이해해 주세요. 요즘 소씨 그룹 때문에 바쁜 사람인데 어머니 때문에 경찰서에도 다녀오고 변호사한테도 자문을 신청했어요. 소이연이 합의 보지 않겠다 하면 소이연한테 있는 증거로 어머니는 고의 상해죄로 최고 3년형을 선고받을 거예요. 어머니는 감옥에서 3년이 아니라 1년. 아니, 1달도 버티지 못하실 거예요.”“정말이야?”유백희는 믿지 않았다.그녀는 소이연을 사람 취급한 적이 없었다.소이연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소이연에게 손찌검을 하고 욕했기에 소이연이 그녀한테 반항할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정말이에요! 승영 씨 말대로 소이연한테 사과하세요. 친손녀니까 어머니와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합희할 거예요.”양화랑은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유백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소이연에게 머리를
물어보지도 않고 바로 승낙하다니.소이연은 대화창에 또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우리 민이도…”그녀는 머뭇대다가 결국 삭제했고 화장실을 나와서 옷을 갈아입은 뒤에 장 보러 갔다.저녁 준비… 나 혼자서 잘할 수 있겠지? 어렵지 않을 거야.소이연은 식재료를 사 온 뒤, 레시피를 알려주는 앱을 다운로드하고 레시피에 따라 요리하기 시작했다.늦은 저녁.현관문 벨 소리가 울렸다.소이연은 앞치마를 입은 채 현관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주었다.육현경은 검은색 정장 차림에 은색 넥타이를 하고서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아주 정식적으로 차려입은 것 같았고 그의 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퇴근하자마자 온 거야.”육현경은 그가 왜 이렇게 입고 있는지 설명했다.소이연은 미소를 지었다.그녀는 단순히 그 이유 때문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들어와.”소이연은 육현경이 준 꽃다발을 안았고 그에게 슬리퍼를 건네주었다.육현경은 슬리퍼로 갈아 신고 집으로 들어섰다.이 집에서 어딘가 익숙한 향기가 나…반찬 냄새… 말고도 또 뭔가가 있는데.육현경은 식탁에 놓인 여러 접시의 요리를 발견했다.양념갈비찜, 고등어구이, 깐쇼새우, 김치볶음 그리고 삼계탕이었다.어떤 요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소이연은 주방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내가 도와줄…”육현경은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아!”소이연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기름이 그녀에게로 튀었기 때문이다.놀란 소이연은 뒤로 물러났고 그 모습에 육현경은 픽 웃었다.소이연은 늘 침착하고 얌전한 모습이었는데 오늘처럼 진실한 모습은 흔하지 않았다.“아니야. 너 소파에 앉아 쉬고 있어. 다 되었어.”소이연은 제꺽 대답했다.육현경은 난장판이 된 주방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잘 썰어놓은 소고기와 준비된 각가지 재료를 보아 소고기 튀김을 하려는 것 같았다.화력이 관건인 요리에 도전하다니… 용기가 가상하군.육현경은 소이연이 실력을 발휘하는 데 방해될까 봐 주방을 나갔다.저렇게 큰 주방에서 기름이 무서워 거실까지 뒷걸
소이연은 육현경한테 권했다.“얼른 먹어봐.”그녀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 찬 채 반짝이고 있었다.육현경은 젓가락으로 고등어구이를 집었고 우아하게 입에 넣고 음미했다.그의 표정 변화가 선명하지 않아서인지 소이연은 맛있다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육현경도 평가하지 않고 묵묵히 음미하다가 갈비찜을 먹어보았다.그러고는 모든 요리를 다 맛보았다.그러더니 이내 와인잔을 들어 와인을 홀짝였다.“맛있어?”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육현경은 천천히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아냈다.“괜찮네. 맛있어.”“진짜?”소이연은 곧바로 먹어보려 했다.육현경의 큰 손이 그녀의 손 위에 얹어졌다.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음식물 중독은 나 하나로 족해.”육현경은 차분하게 말했다.말을 마친 그는 와인을 마셨다.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의 뜻을 알아챘다.그녀는 육현경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이 처음 차려본 음식을 맛보려 했다.소이연은 갈비찜을 먼저 먹어보았다.입에 넣은 순간, 그녀의 작은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나타났다.그녀는 제꺽 뱉었다.아니, 갈비찜인데 왜 이렇게 쓰지?소이연의 그런 모습을 본 육현경은 미소를 지은 채 음료를 건네주었다.소이연은 그가 준 음료를 꿀꺽꿀꺽 마셨다.그러고는 육현경을 쳐다보았다.“어떻게 이런 걸 먹은 거야?”“내가 워낙 거절을 못 해서 말이야.”“아…”“사실 소이연 셰프가 해준 라면이 맛있었어.”육현경은 넌지시 건의했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예수진처럼 직접 만들어서 먹이고 싶었으나 이 요리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소이연은 식탁에 놓인 요리를 치우고 주방에 가서 라면을 두 봉지 끓였다.그녀는 라면에 와인을 마시는 육현경을 쳐다보았다.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빛이 나는구나.“미안해. 내가 내 요리 실력을 과대평가했나 봐.”소이연은 고개를 숙인 채 라면을 먹으면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괜찮아. 집에 한 사람이라도 요리할 줄 알면 돼.”육현경은 직설적으로 얘기했다.소이연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분위기가 사뭇 뜨거워졌다.소이연은 어두운 과거도, 문서인의 바람도 견뎌내고서 이렇게 빨리 새로운 시작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래서인지 그녀는 이 연애에 큰 자신심이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었다.육현경이 그녀의 심금을 울린 건지, 그녀가 생각만큼 차갑게 굴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이 세계에 조금이나마 기대가 있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적막이 흐르고 두 사람은 어색해했다.“넌… 예전에 너와 잠자리를 가졌던 그 사람이 미워?”육현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침착한 그의 얼굴에 긴장이 엿보였다.소이연은 육현경이 이 시점에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녀는 그 사건 후로 남자를 멀리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미워.”그녀의 대답에 육현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때 그 사람은 맨정신이었어. 내가 하지 말라고, 날 다치지 말라고 계속 빌었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어.”과거를 떠올리던 소이연의 마음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었다.“만약에 말이야, 네가 기억했던 것과 달리 네 몸은 아주 성실했다면… 어떡할 거야?”육현경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은 탓에 소이연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뭐라고?”소이연은 다시 물었다.그녀의 오른쪽 귀는 일시적인 난청을 앓고 있어서 왼쪽 귀로 들어야 하는데 작은 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다.“다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육현경은 질문을 바꿔 물었다.“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소이연은 확고하게 말했다.“난 그를 제대로 본 적 없어. 그의 얼굴도 못 봤고 그가 누구인지도 몰라. 난 그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할 거야! 자기 기만일지라도…”육현경은 입술을 깨물더니 소이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소이연의 손의 떨림을 느낀 그는 손을 뗐다.그녀가 이 스킨십에 반감이 든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소이연은 육현경이 손을 떼는 순간,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육현경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최대한… 너라는 존재에 익숙해질 게.”소이
“문수 씨.”하지수는 송문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 송문수가 화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송승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어쨌든 한 가족이 아닌가.그녀는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승우 오빠를 병원에 보내야 하잖아.”하지수는 큰 소리로 송문수에게 말하자 송문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사실 송승우는 별일 없었다. 송문수는 격투기를 배운 적이 있기에 사람의 어느 부위가 다치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송승우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때렸어도 급소를 때리지 않았다.하지수는 송문수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긴급구조 요청을 하였다.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하지수는 송승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바닥에 쓰러진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송승우의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송문수와 싸울 힘이 없었다.사실 하지수도 요새 송승우와 송문수가 자주 싸우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은 벌써 두 번째였다.어렸을 때 두 형제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지금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유치하게 싸우다니!이윽고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조대원들은 들것으로 송승우를 구급차에 태웠다.하지수도 따라서 올라탔지만 송문수는 타지 않았다.하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와서 송문수를 잡아당겨서 같이 구급차에 올라탔다.구급차 안은 매우 조용하였다.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에 아직 분노의 불꽃이 튕기는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송승우는 응급실로 옮겼다.하지수와 송문수는 로비에서 기다렸다. 송문수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쪽에 서 있었다.사실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에도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문수 씨도 얼굴과 몸에 난 상처를 검사하지 않을래?”“필요 없어. 외상이라 금방 나을 거야”송문수가 이렇게 말하자 하지수도 강요하지 않았다.잠시 후, 송승우는 응급실에서 나왔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모두 외상이라 별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입원 수속
“놓지 못해?”송문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이거 놔요.”하지수도 송승우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송승우의 눈빛에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는 더욱 세게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파요!”송문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놓으라고 했다!”그는 송승우의 팔을 끌어당기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에 송승우는 통증을 느꼈으나 승부욕 때문에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송문수가 힘을 줄수록 그도 더욱 힘을 줘서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송승우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걸 놔. 나와 지수의 일에 끼어들지 마.”“끼어들지 말라고?”송문수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형이 잊은 것 같은데 지수는 내 와이프야. 우린 부부이지만 형과 지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지금 형이 내 와이프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너!”송문수의 쏘아붙인 말에 송승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예전에 송승우는 하지수가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송문수를 안중에 넣지도 않았고 그들의 결혼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송문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지수가 좋아한 사람은 나야!”송승우는 수치심에 더 약이 올라서 노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반박할 힘도 없었고 송문수의 말이 들려왔다.“지수가 누구를 좋아하든 지금은 내 여자야. 누구도 데려갈 수 없고 누구도 지수를 괴롭힐 수 없다고! 셋까지 셀 테니 지수를 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송승우는 끄덕하지도 않고 송문수를 노려보았다.“하나.”“둘.”송문수는 ‘셋’을 세는 대신 주먹을 들고 송승우의 얼굴을 세게 강타했다.송문수의 한 방을 맞은 송승우는 코피를 흘렸고 아픔으로 이내 하지수를 놓아주었다.그러나 송승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승우 씨, 사과 따위 이제 필요 없어요.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아무 탈 없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끝내는 거예요. 승우 씨는 문수 씨 형이잖아요. 게다가 저도 어릴 때부터 송씨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척 같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하지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했다.송승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하지수는 뒤를 돌아 송문수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도 여전히 많이 피곤했다. 송문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자고 싶었다.크레지가 아직 오지 않은 이상, 기술 투자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막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손은 또다시 송승우에 의해 붙잡혔다.하지수가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송문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승우의 행동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그가 앞으로 다가가 하지수를 데려오려던 순간, 송승우가 갑자기 말했다.“지수 씨, 방금 당신의 행동은 모든 걸 말해줬어요!”“무슨 행동이요?”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제가 불렀을 때, 제 쪽으로 다가왔잖아요. 그게 지수 씨 마음속에 있는 진심이에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저한테로 오세요. 하지수 씨, 제가 잘 해줄게요. 지수 씨를 혼자 두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맹세할게요...”“아니요.”하지수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하지수를 바라보는 송승우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찼다.“승우 씨가 불었을 때 따라간 건 무의식적으로 간 거예요. 잠에서 덜 깬 상태라서 누가 불렀어도 갔을 거예요. 승우 씨인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게요. 낯선 목
송문수는 하지수가 일어나서 송승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송승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그래, 지수 씨도 아직 날 신경 쓰고 있다니까. 숨기려 해도 어떻게 숨기겠어?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진심이 드러나는 거지.’송문수는 멀어져 가는 하지수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살짝 멈칫했다. 하지수를 강제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사실 그는 항상 하지수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말이다.하지수는 송승우 앞으로 걸어갔고 송승우가 먼저 손을 뻗더니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그러나 그가 손을 뻗자 하지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승우 씨?”그녀는 그제야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조금 전까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이제와사 분명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흐릿할 뿐이었다.“너무 늦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송승우가 그녀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하지수는 급히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그러자 송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아까는 잠에서 덜 깨서 그랬어요. 전 문수 씨랑 같이 갈 거예요.”“뭐라고요?”송승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까지 연기할 거예요?”“네?”하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저를 놀리는 게 재밌으세요?”송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하지수는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송승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제가 잘못한 걸로 하죠.”그가 갑작스레 사과를 하자 하지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사과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사과를 하는 거야?’“미안했어요. 어쩔 수 없이 떠난 거라고는 하지만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잖아요. 결혼식장에 지수 씨 혼자 남겨두고 간 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하지수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
하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어색한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문수 씨도 부끄러워하는 건가?’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하지수는 소파에 앉아 몰래 송문수를 쳐다보았다.그는 그저 고위직 직원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었다.‘단지 어색해서 그런 건가?’송문수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해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체면을 세우려고 그러는 건가?’하지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크레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관련 부서가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송문수와 하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논의하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새벽 2시가 되었지만 송문수는 아직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까지도 각 부서와 회의를 하면서 협력 계획과 판매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회의가 끝난 후에도 송문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송문수는 그제야 그의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서류든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더 신중해졌고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사인을 했다.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서류를 처리하고 나서야 송문수는 퇴근을 하려고 하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송문수의 기억 속에 하지수는 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많이 피곤한 걸까?’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야
송문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더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송문수가 점점 더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하지수도 그를 더 지지해 주고 싶었고 송문수로 하여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하지수는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노트북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습관처럼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들어갔다.그녀는 비록 알림을 꺼 놓았지만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메시지가 있으면 항상 첫 번째로 확인하곤 했다.그런데 그때, 그룹 채팅에 있는 메시지를 본 하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었다.송문수가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보낸 것이었다.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송문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채팅방에는 여전히 ‘하지수’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문수 씨,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린 거 아니야?”하지수가 물었다.“어?”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수는 송문수 앞에 서서 그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타자를 해놓고 아직 보내지 않은 ‘하지수’도 있었다.송문수도 그제야 자신이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입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이 타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이 온통 하지수로 가득 찬 건 사실이었다.그때, 채팅방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회장님 지금 하 매니저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그걸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보낸 거고?]메시지는 보내지자마자 삭제되었고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도 잘못 보냈네!”그룹 채팅에 두 개의 삭제 기록이 나타났다.송문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제야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하지수’라는 메시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메시지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이
송승우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하지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게 송문수를 고른 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하지수는 송승우의 사무실을 떠나 바로 송문수의 사무실로 갔다.송문수는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회사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유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에도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느님도 부지런한 사람을 도울 거라 믿으며 송문수가 앞으로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형이 뭐라고 했어?”송문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자기 개인 비서로 되어달라고 하더라고.”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송문수랑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최대한 마음을 다할 생각이었다.송문수는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지수가 그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지수가 형 요구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알겠다고 했겠지...’이렇게 생각한 송문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썼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로 결심한 이상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거절했어.”하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문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분명 그녀의 말에 설렌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반면, 하지수는 송문수에게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송문수는 자기한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왜 거절했는데?”송문수가 차분하게 물었다.“문수 씨한테 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수는 웃으며
하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았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어린 시절 그녀는 항상 송승우를 믿었고 그가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었다. 송승우는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송승우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게다가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하지수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송승우는 하지수와 송문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수가 몇 번이나 말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지금은 송문수와 잘 지내고 있고 송승우와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라고 말이다.그리고 송문수가 지금 송씨 그룹의 대리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송문수의 결정이 회사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말이다. 송문수한테 도움이 더 필요했고 송문수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생각이 없는 건가?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거지?’“왜요? 제가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했나요?”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 정말 제대로 일하려고 온 거 맞아요? 아니면 그냥 문수 씨를 못 믿어서 온 건가요? 문수 씨가 회사를 잘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감시하러 온 거냐고요!”“당연히 일하러 온 거죠. 아니면 왜 연구소 일까지 내려놓고 회사로 왔겠어요! 그리고 또...”“아까 지수 씨가 그러셨잖아요. 송문수를 못 믿냐고요. 맞아요. 전 송문수 그 자식 못 믿어요. 송문수가 회사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성과를 하나 냈다고 교만해져서 마음대로 하려 할 겁니다.”“갑자기 드는 생각인데요. 승우 씨는 왜 그렇게 문수 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하지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아니라면 왜 문수 씨를 그렇게 모욕하고 내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겠어...’하지수의 능력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송문수가 회사의 대체적인 상황을 잘 파악한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단지 송문수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재능이 있어서 해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송문수가 매일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하지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지어는 날마다 새벽까지 야근을 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게다가 차에서 보는 서류들도 모두 송씨 그룹과 관련된 문서였다.송문수는 원래 시간만 나면 게임을 하거나 먹고 자고 놀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송문수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된 것 같았다....송문수의 말대로 하지수는 다음 주에 회사로 찾아올 크레지를 위해 연관 업무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송문수와 하지수가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사님들도 점점 두 사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맡긴 업무에 대해 불평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바로 행동에 옮기기만 했다.그러면서 송문수와 하지수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었고 회사도 더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후,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요즘 들어서 그녀는 송문수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송문수는 자주 회사의 전문 용어나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 계획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지수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올 수 있으세요?”그때, 송승우가 갑자기 하지수를 불렀다.하지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송문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네 마음대로 해.”송문수는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질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지수는 속으로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송문수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하지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