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육현경한테 권했다.“얼른 먹어봐.”그녀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가득 찬 채 반짝이고 있었다.육현경은 젓가락으로 고등어구이를 집었고 우아하게 입에 넣고 음미했다.그의 표정 변화가 선명하지 않아서인지 소이연은 맛있다는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육현경도 평가하지 않고 묵묵히 음미하다가 갈비찜을 먹어보았다.그러고는 모든 요리를 다 맛보았다.그러더니 이내 와인잔을 들어 와인을 홀짝였다.“맛있어?”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육현경은 천천히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아냈다.“괜찮네. 맛있어.”“진짜?”소이연은 곧바로 먹어보려 했다.육현경의 큰 손이 그녀의 손 위에 얹어졌다.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음식물 중독은 나 하나로 족해.”육현경은 차분하게 말했다.말을 마친 그는 와인을 마셨다.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의 뜻을 알아챘다.그녀는 육현경의 손을 뿌리치고 자신이 처음 차려본 음식을 맛보려 했다.소이연은 갈비찜을 먼저 먹어보았다.입에 넣은 순간, 그녀의 작은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나타났다.그녀는 제꺽 뱉었다.아니, 갈비찜인데 왜 이렇게 쓰지?소이연의 그런 모습을 본 육현경은 미소를 지은 채 음료를 건네주었다.소이연은 그가 준 음료를 꿀꺽꿀꺽 마셨다.그러고는 육현경을 쳐다보았다.“어떻게 이런 걸 먹은 거야?”“내가 워낙 거절을 못 해서 말이야.”“아…”“사실 소이연 셰프가 해준 라면이 맛있었어.”육현경은 넌지시 건의했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예수진처럼 직접 만들어서 먹이고 싶었으나 이 요리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소이연은 식탁에 놓인 요리를 치우고 주방에 가서 라면을 두 봉지 끓였다.그녀는 라면에 와인을 마시는 육현경을 쳐다보았다.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빛이 나는구나.“미안해. 내가 내 요리 실력을 과대평가했나 봐.”소이연은 고개를 숙인 채 라면을 먹으면서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괜찮아. 집에 한 사람이라도 요리할 줄 알면 돼.”육현경은 직설적으로 얘기했다.소이연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분위기가 사뭇 뜨거워졌다.소이연은 어두운 과거도, 문서인의 바람도 견뎌내고서 이렇게 빨리 새로운 시작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그래서인지 그녀는 이 연애에 큰 자신심이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었다.육현경이 그녀의 심금을 울린 건지, 그녀가 생각만큼 차갑게 굴지 않았던 건지 아니면 이 세계에 조금이나마 기대가 있었던 건지 잘 모르겠다.적막이 흐르고 두 사람은 어색해했다.“넌… 예전에 너와 잠자리를 가졌던 그 사람이 미워?”육현경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침착한 그의 얼굴에 긴장이 엿보였다.소이연은 육현경이 이 시점에 왜 그 얘기를 꺼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그녀는 그 사건 후로 남자를 멀리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미워.”그녀의 대답에 육현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때 그 사람은 맨정신이었어. 내가 하지 말라고, 날 다치지 말라고 계속 빌었는데도 그는… 멈추지 않았어.”과거를 떠올리던 소이연의 마음에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있었다.“만약에 말이야, 네가 기억했던 것과 달리 네 몸은 아주 성실했다면… 어떡할 거야?”육현경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은 탓에 소이연은 제대로 듣지 못했다.“뭐라고?”소이연은 다시 물었다.그녀의 오른쪽 귀는 일시적인 난청을 앓고 있어서 왼쪽 귀로 들어야 하는데 작은 소리는 거의 듣지 못했다.“다시 그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육현경은 질문을 바꿔 물었다.“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야.”소이연은 확고하게 말했다.“난 그를 제대로 본 적 없어. 그의 얼굴도 못 봤고 그가 누구인지도 몰라. 난 그를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할 거야! 자기 기만일지라도…”육현경은 입술을 깨물더니 소이연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소이연의 손의 떨림을 느낀 그는 손을 뗐다.그녀가 이 스킨십에 반감이 든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소이연은 육현경이 손을 떼는 순간,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육현경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최대한… 너라는 존재에 익숙해질 게.”소이
다음날.소이연은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에 뜬 육현경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자기야, 좋은 아침.”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그녀는 이 메시지를 볼 때 무의식적으로 웃었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했다.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한 뒤, 집을 나섰다.사무실 앞에 막 도착했을 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소승영, 유백희 그리고 양화랑과 마주쳤다.“이연아, 왔어?”양화랑은 열정적으로 그녀를 맞이했다.소이연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기에 힐끗 쳐다보고는 사무실로 들어가 걸상에 앉았다.그들도 따라서 들어왔다.소승영은 먼저 살갑게 입을 열었다.“이연아, 할머니가 오늘 너한테 사과하러 직접 오신 거야.”그는 말하고 나서 유백희한테 눈짓을 했다.이 상황이 되어서도 유백희는 소이연한테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것이 불쾌했다.하지만 감옥에 들어가기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어차피 그녀한테는 소이연을 괴롭힐 방법이 넘쳐나기 때문이다.먼저 급한 불부터 끄는 것이 중요했다.유백희는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고 열정적으로 다가가 소이연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소이연은 거절했다.민망해진 유백희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이연아, 그날은 이 할미가 잘못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급한 성격이라 화가 나면 손부터 나가니 원… 그래서 널 때린 건 정말 미안하단다. 맞을 때 귀를 좀 다쳤다 해서 서양 인삼과 제비집을 이렇게 사 왔단다.”그녀는 들고 있던 선물 박스를 제꺽 소이연 사무실 책상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소이연은 힐끗 쳐다보고는 시큰둥해 있었다.유백희의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지만 소승영의 눈짓에 또 한 번 참았다.“이연아, 할머니가 잘못했다. 이 늙은 할미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지? 아니면 이 할미가 무릎이라도 꿇을까?”유백희는 말을 이었다.“우리는 가족이잖니. 내가 이 나이 먹고 감옥 간다면 너도 마음이 아프잖니.”소이연은 이 소 씨 가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그들은 일이 커져서 소 씨 가
“제가 할머니한테 뭘 어쩌겠어요.”소이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유백희는 소이연이 이대로 넘어가는 줄 알고 속으로 기뻐했다.흥. 애송이 같은 년이 감히 나한테 덤벼?넌 내 상대가 아니야.“우리는 가족이니까 서로 잘잘못을 따지지 않아도 된단다. 네 뜻이 그렇다면 경찰서에 가서 합의하겠다고…”“저한테 소씨 그룹 주식을 10 퍼센트 주세요.”소이연은 유백희의 말을 끊었다.그녀의 말에 소승영과 양화랑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양화랑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이연아, 너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니? 점점 기어오르려고 하는구나!”“소씨 그룹의 일에 왜 외부인이 끼어드세요? 무슨 자격으로 저를 평가하냐고요.”소이연은 양화랑을 차갑게 쏘아보았다.양화랑은 소이연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고 얼굴이 빨개진 채 침묵했다.“안된다.”소승영은 확고하게 세 글자를 내뱉었다.이런 부분에서는 타협하지 않았다.“그럼 법정에서 뵙죠.”소이연은 예상했단 듯이 대답했다.“소이연!”소승영은 참지 못하고 끝내 폭발했다. 그의 말에는 가시가 가득했다.“욕심이 한도 끝도 없는 년! 내가 소씨 그룹 주식을 너한테 10퍼센트나 줄 거라고 생각했니?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 많은 걸 가져가겠단 거야! 꿈도 꾸지 마!”유백희도 소이연에게 주식을 주는 일에 동의하지 않았다.하지만 소승영의 단호한 말투에 그녀의 마음도 썩 편치 않았다.소이연의 비웃음 섞인 눈빛은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10퍼센트 주식은 제 몫이에요.”소이연은 차갑게 대답했다.“네 몫이라고? 웃기는 소리는 집어…”“제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 소씨 그룹의 20퍼센트 주식을 소유하고 계셨어요.”소이연은 소승영의 말을 끊고 확고하게 말했다.“어머니가 남기신 유언에는 은하그룹을 저에게 넘겨주겠단 말씀 빼고는 다른 말은 없었어요. 변호사한테 자문도 해봤는데 다른 재산에 대해 특별히 지정하지 않았다면 상속권의 규정에 따라 배우자와 자녀는 평등하게 분배해야 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소유하고 계셨던 소
양화랑은 눈시울을 붉혔다.유백희한테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그녀도 이제야 알았다.그녀는 소이연의 귀가 안 들리는 것이 연기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맞은 후에는 먹먹해진 귀 때문에 괴로워했다.하지만 그녀는 소이연처럼 유백희를 고소할 수 없었다.그럴 용기가 없었기에 참아야만 했다.하지만 그녀는 소이연이 소씨 그룹 주식의 10퍼센트를 가진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이었다.양화랑은 지독한 여자였지만 소승영과 유백희 앞에서는 연약한 척했다.“어머니, 다 오해예요. 저는 그저 이연이가 너무 욕심부리는 것 같아서…”“닥쳐!”유백희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기에 양화랑의 구질구질한 변명을 들어줄 리 없었다.소이연이 정말로 욕심부린 건지 아닌지는 그녀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소이연에게 어쩌지는 못하고 이만 부득부득 갈고 있다는 것이다.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 집안사람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녀가 유백희한테 맞았을 때, 양화랑과 소나은도 그녀처럼 옆에서 보고만 있다가 불난 집에 부채질 하기까지 했다.다 돌아가게 되어있어.소이연의 표정을 본 양화랑은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네가 감히 날 비웃어?비웃는 것뿐만 아니라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소이연 이 년이 설마… 내가 어머니를 꼬드긴 걸 눈치챈 거야?그래서 어머니가 은하그룹에 와서 걔 뺨을 친 것까지?그때 맞은 매가 이렇게 그녀의 얼굴로 돌아오게 되었다.“내일 변호사한테 연락해서 주식양도 계약서를…”소승영은 화를 간신히 참았다.“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다 준비했거든요. 아버지는 사인만 해주세요.”소이연은 준비한 계약서를 소승영 앞에 들이밀었다.소승영은 주식양도 계약서를 보더니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소이연 이 년의 손바닥 안에서 내가 놀아났구나!그가 제 발로 찾아가 모욕을 당한 셈이다.그는 계약서를 재빨리 훑고는 말했다.“너 경찰서에 가서 합의 보겠다고 해.”소이연 확고하게 말했다.“먼저 사인부터 하세요.”소승영은 더 뭐라고 하고 싶었으나 소이연이
실시간 검색어는 어떻게 해도 그 열기가 식지 않았다.누군가 뒤에서 일부러 조종하는 것처럼 일주일 동안 한국에는 그 일 이외의 이슈가 없었다.실시간 검색어에는 오로지 소나은과 문서인 두 사람뿐이었고 악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두 가문의 주식도 개장하는 즉시 하한가로 떨어졌다.이대로 가다가는 두 가문 모두 스캔들로 인한 파산 위기에 들어설 것이 뻔했는데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문덕수는 문씨 그룹의 회장과 고위 인사들이 있는 자리에서 문서인을 모욕했다.“문서인, 너는 실시간 검색어 하나도 내리지 못해? 이렇게 오래 끌면서 문씨 그룹을 파산시킬 생각이야?”문서인은 그의 말에 극도로 불쾌해졌다.그는 열기가 식으면서 기사가 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계속 실시간 검색어에 뜰 줄은 몰랐다. 그는 누군가 손을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그 사람이 누군지는 불 보듯 뻔했다.소이연이 육현경한테 이쁨 받네?내 손을 다치지도 않던 년이 몸으로 육현경을 꼬시다니!문서인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했다.“오늘 내로 처리할게요.”“문서인, 이 번이 내가 주는 마지막 기회야!”문덕수는 이 한마디만 남겨놓고 자리를 떠났다.다른 사람들도 그의 뒤를 따라 나갔고 문서인만 그 자리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문서인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서아야.”“오빠, 무슨 일인데? 나 지금 메이크업하고 저녁에 패션 행사에 가야 돼.”문서아는 귀찮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문서아는 자신의 기분을 중요시했고 문씨 그룹은 안중에도 없었다.“네가 저녁에 참가하는 패션 행사에 예수진도 있어?”“걔는 왜?”문서아의 표정이 굳어졌다.문서아는 예수진을 라이벌로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레벨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녀는 예수진이 스폰서와의 잠자리를 통해 이 자리까지 왔다고 생각했다.나도 스폰서 하나 물었으면 예수진 너 같은 년은 나한테 상대도 안 돼.“그래서 예수진도 있냐고.”문서인은 두 번 말하기 싫었지만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있어!
계지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옷을 갈아입으려고 웃옷을 벗자마자 누군가 그의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어울리지 않는 기다란 드레스에 진한 화장을 한 문서아가 그의 대기실 문 앞에 서있었다.“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문서아의 연기는 다소 과장되었고 속이 뻔히 보이는 발연기였다.그러고는 바로 나가는 척 뒤를 돌다가 드레스의 끝을 밟았다.그녀는 아주 교묘하게 계지원의 품에 쏙 안겼다.계지원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잡아주었고 문서아는 그 틈을 타 계지원의 품에 얼굴을 갖다 댔다.그의 단단한 가슴은 탄력이 좋았다.계지원은 문서아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발견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그가 문서아를 밀어내려 할 때, 문 앞에 서있는 예수진을 발견했다.예수진은 이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계지원과 문서아를 담담히 바라보았다.그녀의 입가에 비웃음이 서려있었다.그렇게 하고 싶으면 호텔을 가든지.발정 난 개도 아니고.“제 차에 넥타이를 두고 가서요.”예수진은 계지원을 향해 담담히 말했다.두 사람은 촬영이 끝나고 같이 이곳으로 왔다.그녀의 매니저가 계지원한테 함께 가자고 열정적으로 요청한 바람에 같이 그녀의 차에 탄 것이다.계지원은 문서아를 제꺽 밀어냈고 문서아는 불쾌해했다.예수진과 계지원 사이에 역시 무언가가 있단 말이야.아니면 계지원의 넥타이가 왜 쟤 차에 있겠어!예수진 이 년이 설마 내 배역을 뺏으려고 계지원을 유혹한 거 아니야?아, 짜증 나!계지원은 예수진한테 가서 넥타이를 받았다.그의 손가락이 예수진의 손가락에 닿자 그녀는 바로 손을 털었다.마치 더러운 것에 닿은 것처럼 말이다.계지원의 손이 허공에서 주춤했다.“하던 거, 마저 하세요.”예수진은 말을 마친 뒤 떠났다.예수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계지원의 눈빛은 애틋했다.그는 문서아가 곁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계 감독님, 예수진 씨랑 무슨 사이에요? 감독님 넥타이가 왜 예수진 씨 차에 있어요?”문서아의 가증스러운 목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문서아 씨, 무슨
문서아는 계지원의 차가운 시선에 못 이겨 자리를 떠났다.나 문서아, 내 손에 넣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패션 행사.스타들이 레드 카펫을 밟고 입장하는 순서가 다가왔다.스타는 주최 측에서 정해준 차례대로 입장했다.문서아의 인기로는 앞 순서에 있어야 했지만 가문의 영향력 때문에 주최 측에서는 그녀의 순서에 신경을 써주었다.더군다나 주최 측과 문씨 그룹이 합작하는 시기라서 그녀를 마지막 두 번째에 안배해 주었다.하지만 문서아가 입장할 순서가 되었는데 그녀는 컨디션 문제로 거절했다.레드 카펫이 10분간 비어있었지만 주최 측은 문서아한테 강요할 수 없었다.이 바닥에서 문서아가 금수저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감히 건드리지 못했다.주최 측은 어쩔 수 없이 예수진을 찾아 입장하게 했다.예수진은 주최 측을 난처하게 만드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매니저 다인은 아주 불쾌해했다.그녀가 일어나서 레드 카펫을 밟으려 할 때 우연히 스태프의 말을 들었다.“문서아 씨, 입장 준비해 주세요.”그러니까 문서아가 마지막에 등장한다고?예수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저는 지금 입장할 수 있지만 저를 끝으로 레드 카펫 부분은 끝난 거예요. 제 뒤로 다른 사람이 걷는다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제가 이 행사에 참여할 때 주최 측에서 저한테 약속한 거라고요.”스태프는 그녀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문서아가 컨디션 문제로 입장하지 않은 건 마지막에 등장하려고 한단 것을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아니면 합작 건은 없던 거로 하죠.”예수진은 확고하게 말했다.다인은 예수진의 강압적인 태도에 깜짝 놀랐다.그녀는 평소에 예수진에게 너무 착해서는 안되고 자신의 영향력을 필요한 곳에서 꼭 써먹어야 한다는 말을 입이 마르게 했었다.이제야 빛을 보는구나.다인은 뿌듯해났다.스태프는 곧바로 상사에게 회보하러 갔다.한참 후.다인의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매니저 회사의 사장이었다.“예?”다인의 목소리는 꽤나 컸다.“문서아가 이 바닥에서 누가 알아준다고 마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