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은 계지원의 말을 듣고 기분이 꽃처럼 확 밝아졌다.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계지원의 옆에서 함께 술을 돌렸다.누가 봐도 예수진의 행복은 숨길 수가 없었다.그들 네 사람은 육은숙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육은숙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잠깐 예수진을 쳐다보고는 곧 시선을 돌렸다.예수진은 입술을 오므렸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아까 무대에서도 말했듯이, 육은숙이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었다.어차피 그녀는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결국, 화나는 건 육은숙 자신일 것이다.“현경아, 이연아, 축하해.”육은숙이 먼저 말을 꺼냈고 육현경 두 사람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게 굴었다.“고마워요. 고모.”육현경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육은숙이 소이연을 바라보자 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육현경을 따라 말했다.“고마워요. 고모님.”육현경은 마음이 일렁였지만, 겉으로는 침착함을 유지했다.육은숙은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어른이었다.그러니 소이연이 ‘고모’라고 부르는 것은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육현경은 마음이 벅차올랐다.육은숙이 말했다.“내일 일찍 집에 와. 내가 집에서 기다릴게.”“네.”육현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예수진이 나섰다.“내일 저랑 지원 씨도 갈 거니까, 음식 좀 넉넉히 준비해주세요.”육은숙은 예수진을 쳐다봤다.예수진의 말투는 아주 당당했다.육은숙은 시선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굶어 죽지는 않겠어.”예수진은 웃었다.육은숙의 태도는 별로였지만, 거절은 하지 않는 걸 보면 그녀에게는 완전히 속수무책인 것 같았다.술을 돌리고 난 뒤, 몇 사람은 또 다른 테이블로 갔다.이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겨우 술자리가 끝났다.예수진은 이미 배가 고파서 견디기 힘들었다.그들은 함께 주빈석에 앉았다.예수진은 밥을 먹으면서 소이연에게 물었다.“언니, 배 안 고파요? 나 진짜 배고파 죽겠어요. 결혼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네요.”소이연은 웃으며 말했다.“천천히 먹어요. 그래도 신부인데
점심 피로연이 끝난 뒤, 예수진은 방으로 돌아갔다.이곳은 골프장 클럽이었고, 내부에는 객실도 있었다.오늘 결혼식을 올린 두 커플은 이곳을 전부 대여해, 손님들이 쉬거나 놀 수 있게 했다.예수진은 잠을 자러 갔다.반면 하지수는 여전히 소이연의 곁에 남아 그녀와 함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꼭 마치 예수진이 고용한 일꾼 같았다.“지수 씨, 가서 좀 쉬세요.”소이연은 하지수의 피로를 느낄 수 있었다.아침부터 일찍 일어났고, 이제 술까지 마셨으니 분명 쉬고 싶을 터였다.“그럼 언니는요?”“난 괜찮아요. 일이 끝나면 나도 좀 쉬러 갈 거예요.”“알겠어요.”하지수는 하품하며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불러요.”“알았어요.”하지수는 자리를 떠나 객실로 향했다.그녀는 룸서비스에서 방 카드를 받은 뒤, 비몽사몽 한 상태로 방으로 걸어갔다.솔직히 지금은 너무 졸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방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드레스가 예쁘긴 했지만, 너무 꽉 끼어서 답답했던 것이다그녀는 옷을 다 벗고 제대로 숨 한번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옷을 벗자마자 하지수는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막 침대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침대 위에 남자가 누워있는 걸 보았다.그녀는 깜짝 놀랐다.이거, 혼자 쓰는 방이 아니었나?!설마 같이 써야 하나?“소리는 왜 질러?”송문수가 나른한 목소리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오늘 계지원의 들러리를 서기 위해 일찍 일어난 그는 밥을 먹고 난 뒤, 방에 와서 먼저 자고 있었다.막 잠이 들었을 때 방에서 나는 소리에 잠에서 깬 그는 하지수가 옷을 벗고 나체로 자기 침대에 기어오르는 걸 보았다.이 상황에서 과연 누가 소리를 질러야 하지?하지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잠시 멍하니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어떻게 그가 여기 있는 거지?!송문수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그렇다면 그녀는 도대체 누구를 예상했던 걸까.“너 왜 여기 있어?”하지수가 물었다.“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아니, 내 말은...
하지수의 몸이 송문수에게 닿았다.송문수는 얼굴을 찌푸렸다.하지수가 일부러 이러는 건가?송문수의 목젖이 살짝 움직였고 혹시라도 이상한 소리가 나올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몸은 점점 더 경직되어 갔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려 했다.어차피...그는 이런 일에 익숙해서 쉽게 흔들릴 리 없었다.그러니 하지수같이 순진한 사람에게 유혹당할 정도는 아니었다...음.송문수는 속으로 낮게 한숨을 쉬었다.하지수는 지금 불장난을 하고 있었다.그녀의 다리는 그의 허벅지 위에 얹혀 있었고, 몸은 그의 등에 밀착돼 있었다.“하지수, 너 지금 나 유혹하는 거야?”송문수가 물었다.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해서 오히려 무섭게 느껴졌다.하지수는 이 순간 송문수의 감정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했다.그럼에도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맞아.”“기술이 좀 부족한데...”“그럼 가르쳐줘.”하지수가 대담하게 말했다.“나는 즐길 줄밖에 몰라.”하지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난 다 잤으니 너 푹 자.”송문수는 침대에서 바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하지수는 욕실 문이 닫히는 쪽을 바라보며 눈가가 빨개졌다.송문수는 도대체 얼마나 그녀를 싫어하는 걸까?!그녀의 몸이 닿기만 해도 씻어야 할 정도로 싫어하는 걸까.이런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어떤 발전이 있을 수 있을까?그녀는 계속 버텨야 하는 걸까?...결혼식 저녁 파티는 점심에 비해 훨씬 자유로웠다.특별한 격식 없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이야기를 나누며 축하하는 자리였다.이런 연회는 주최자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물론 너무 일찍 자리를 뜨는 것도 안 되지만, 너무 늦게까지 있을 필요도 없었다.예수진의 상태는 괜찮았다.그녀는 점심에 술을 마시고 방으로 가서 잠을 잤고 손님을 접대하는 일은 육현경과 소이연에게 맡겨버렸기 때문이다.저녁이 되자 예수진은 기운이 넘쳤지만, 소이연은 연신 하품을 하며 정신이 없어 보였다.“졸려? 이제 돌아가서 잘래?”육현경은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모습만 봐도 예수진의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었다.오늘의 예수진은 조금 얄미웠지만, 이렇게 즐거워하는 걸 보니 모든 게 다 용서될 것 같았다.이 순간 예수진은 지나가는 손님들과 계속해서 술을 마셨고, 점점 더 흥겨워했다.계지원은 예수진과 약간 떨어진 자리에 앉아 미소를 지으며 활짝 핀 꽃처럼 웃고 있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자, 내 행복을 빌...”예수진은 술을 따르다가 말을 멈췄다.그녀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육은숙이었기 때문이다.‘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안 갔나? 육 여사님은 자기관리에 가장 철저한 사람이었잖아?’예수진은 입술을 오므리고 조금 더 침착해지려 애썼다.그녀는 술잔을 들며 말했다.“형님, 제가 한 잔 올릴게요.”“...”육은숙의 안색은 원래도 좋지 않았지만, 예수진의 형님이라는 호칭을 듣고는 더 심각해졌다.“촌수로 따지면 맞잖아요.”예수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그녀가 잘못 부른 것도 아닌데.육은숙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여자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술을 찾다니, 이게 무슨 꼴이냐.”“당신이 그랬잖아요. 인생은 즐길 수 있을 때 즐기라고. 내가 성인 됐을 때 당신이 날 데리고 술집에 가서 어른들의 세계를 보여줬고 내 주량도 테스트해주면서 그 주량만 넘지 않으면 맘껏 마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나 아직 그 주량도 안 넘었거든요.”예수진의 말에 육은숙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어릴 때부터 육은숙은 예수진을 꽤 자유롭게 키웠다.예수진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그녀가 술을 좋아하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이 마셔주곤 했다.“나한테는 축하하러 왔어요?”예수진은 갑자기 화제를 바꿨다.육은숙이 먼저 다가온 게 신기했던 것이다.육은숙은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축하 같은 건 안 해.”육은숙은 냉랭하게 말했다.“그럼, 여기 왜 왔어요? 돌았어요?”예수진이 툭 내뱉었다.“예수진!”육은숙은 진심으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자신을 진정
육은숙은 예수진을 바라봤다.‘예수진은 지금 설교를 하는 거야? 무슨 자격으로 나를 가르쳐? 내가 딸을 어떻게 대하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물론, 그냥 내 생각을 말한 것뿐이에요. 당신이 육가희를 어떻게 대하든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예수진은 어깨를 으쓱했다.육은숙은 예수진의 말에 다시 할 말을 잃었다.갑자기 예수진한테 말려버린 느낌이었다.“난 저쪽으로 가볼게요. 아직 술 마시자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예수진은 술잔을 흔들며 말했다.“형님도 편하게 노세요.”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육은숙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형님’이라는 호칭만 들으면 가슴이 벌렁거려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예수진은 어쩜 그렇게 자연스럽게 ‘형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엄마.”육가희가 다가와서 물었다.“예수진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별 얘기 안 했어.”육은숙은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육가희도 더는 묻지 않았다.예수진이 뻔뻔한 건 그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그녀는 지금 하도경과의 일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른 건 관심도 없었다.“엄마, 희연 아줌마한테 얘기 좀 해줄래요? 도경 씨는 아예 나한테 신경도 안 쓴단 말이에요. 도경 씨는 아줌마 말을 잘 듣잖아요. 엄마는 아줌마랑 친하니까 아줌마더러 도경 씨를 설득하라고 하면...”“가희야.”육은숙이 육가희의 말을 끊었다.육가희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많은 일은 네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어야 해.”육가희는 믿기지 않는 듯 육은숙을 쳐다봤다.육은숙은 항상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는 편이었고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오늘은 왜 이러는 걸까?“너도 이제는 스스로 성장해야 한다고 생각해. 네 나이도 적지 않잖아. 그러니 더 이상 나한테 의지할 수만은 없지. 나도 늙을 테니까.”육은숙은 솔직히 말했다.“감정 문제는 우리가 끼어들면 오히려 일이 복잡해져. 이번엔 네가 스스로 해결해보는 게 좋을 거야.”“하지만..
소이연은 잠시 멍해졌다.육현경은 서둘러 손을 놓았다. 방금은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는데 소이연이 싫어할 줄은 몰랐다.“미안해, 난...”그러나 소이연이 먼저 육현경의 손을 잡았다.육현경은 잠시 멈칫했다.“가자.”소이연이 말했다.육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는 뚜렷한 미소가 번졌다.두 사람은 웨딩카에 탔다.어쩐지 조금 우스웠다. 올 때는 안 탔는데, 돌아갈 때는 타고 있으니 말이다.차 안은 다소 고요했다.소이연도 말이 없었고 육현경도 아무 말이 없었다.육현경은 아직도 조금 긴장한 듯했다.대체 왜 긴장하는 걸까?그 순간 소이연의 마음이 살짝 멈칫했다.오늘 밤은 신혼 첫날밤이잖아...소이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순간 그녀의 심장도 저절로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민이는?”소이연은 긴장을 감추려 말문을 열었다.“민이는 문 씨 아저씨가 먼저 데리고 갔어.”육현경이 말했다.“아직 어려서 밤을 새우기엔 무리야.”“응.”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시 물었다.“우린 지금 육 씨 별장으로 가는 거야?”“아니. 내가 따로 준비한 신혼집으로 가.”육현경이 대답했다.소이연은 입술을 오므렸다. 그러니까 그들만 따로 산다는 얘기다.따로 산다면...그녀가 또 물었다.“그럼 민이는 신혼집에 있어?”“아니. 육 씨 별장으로 보냈어.”육현경이 말했다.그러니까...오늘 밤은 육현경과 둘만 있는 거였다.목적이 너무, 분명했다.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한참 후, 웨딩카는 마침내 육현경이 준비한 신혼집에 도착했다.이것도 별장이었고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이 사람은 정말 산 중턱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은둔 생활을 선호하는 건가?육현경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그러고 나서 신사답게 소이연 쪽의 차 문을 열어주었다.소이연은 차에서 내려 눈앞의 별장을 바라보았다.왜 이렇게 어두컴컴한 거지?설마 별장에 정전이 된 건가?이곳은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불빛도 없고, 소란스러운 소리도 없이 그저
소이연은 돌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별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녀는 끝까지 걸어가 멈췄다.고개를 돌리는 순간, 수많은 조명이 동시에 켜지면서 마치 하늘의 별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소이연은 그 광경에 진심으로 놀랐다. 이곳의 조명은 그들이 전에 갔던 섬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멋졌다.육현경이 이를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들였을지 그녀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그런데 이 모든 게 정말 자신을 위해 준비된 거란 말인가?진은지를 위한 게 아니라?만약 오늘 그녀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의 모든 준비는 헛수고가 아니겠는가?소이연은 육현경을 흘끗 쳐다보았다.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별장 정원 한가운데 커다란 전자 스크린이 눈에 들어왔다.이때 그 스크린에서 갑자기 그녀의 사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습들이었다.소이연은 깜짝 놀랐다.그는 이 사진들을 어떻게 구한 거지?이 사진들은 그녀조차도 찾지 못한 것들이었다.육현경은 그녀의 의문을 눈치챈 듯 말했다.“너희 아버지를 찾아갔어.”소이연은 입술을 오므렸다.“네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결혼식에 초대하지 않았던 거야.”육현경이 말했다.“하지만 너희 집에서 사진을 많이 가져왔어. 이 사진들, 너도 굳이 그 집에 두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하긴.그녀는 어릴 적 사진들이 많았다. 그 사진들은 모두 어머니가 찍어준 것들이었다.소이연의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만약 어머니가 아직 계셨다면...“천씨 가문도 장안에 초대하려고 했지만, 혹시라도 네가...”육현경은 말을 잠시 멈췄다.소이연은 그가 자신이 결혼을 승낙하지 않을 경우, 이렇게 당돌하게 천씨 가문 사람들을 초대했다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걱정하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어쩌면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을지도 모른다.육현경은 정말로 세심하게 고려하고 있다.게다가 이제야 와서 육현경은 자신에게 단지
“괜찮아.”육현경이 웃으며 말했다.“네 엄마가 내 옆에 있다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해.”소이연은 이 장면을 바라보며 육현경의 입가에 번진 그 다정하고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았다...그녀는 지금, 이 순간의 복잡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그러니까 그녀가 여전히 육현경과 진은지가 열애 중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사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화면이 바뀌었다.육민이 육현경과 진은지에게 어떻게 가족사진을 찍을지 상의하는 장면이었다.세 사람이 잠시 논의한 후에 그녀가 등장했고 셋이서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이 이어졌다.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육현경을 바라보았다.그는 긴장된 모습으로 손을 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지만 결국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지 못했다.화면이 다시 바뀌었다.이번에는 오후에 육현경이 주방에서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이었다.육민은 영상 속에서 재촉했다.“엄마가 곧 내려올 거예요. 아빠, 이모, 빨리 포즈를 취해요.”곧이어 육현경과 진은지가 함께 케이크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바로 소이연이 지난번 별장에서 보았던 두 사람의 다정하고 즐거운 모습이었다.알고 보니, 모두 거짓이었던 것이다.그녀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영상 속에서 육민은 육현경더러 그녀에게 쿠키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부탁하고 있었다.당시 그녀는 온전히 쿠키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어 육현경의 표정을 전혀 보지 못했다.게다가 육현경은 그녀의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도 볼 수가 없었다.그러나 지금 이 영상을 통해서야 그녀는 비로소 알았다. 육현경이 자기를 그렇게 깊고 애틋하게 쳐다보고 있었던걸...그때의 그녀는 오히려 그가 젊고 싱싱하고 스릴 있는 걸 좋아한다고 여겼었다.화면이 다시 바뀌었다.육현경이 자신을 취하게 하는 장면이었다.술에 취하기 전에, 육민은 그와 함께 어떻게 하면 하룻밤을 묵을 수 있을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정말 이 두 사람은...소이연은 육현경을 힐끗 쳐다보았다.육현경은 입술을 오므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