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 대기실 안은 웃음꽃이 활짝 피어있었다.이때, 하지수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작은 소리로 물었다.“육현경 씨 쪽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네.”그녀의 말에 소이연이 입술을 달싹였다.하지만 예수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어떻게 되든 말든. 결혼하는 여자도 내 마음에는 하나도 안 드는데 알아서 하겠지.”하지수가 웃으며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난 그저 지금 뉴스에 육현경 씨에 관련된 기사는 하나도 없고 실시간 검색에도 전부 다 네 결혼 이야기로 도배된 게 신기할 뿐이야.”“당연하지.”예수진은 한껏 뿌듯한 얼굴로 답했다.“톱 스타랑 최고 감독의 결혼인데 당연히 떠들썩하겠지. 그리고 모두가 아마 시기하고 질투하고 부러워할 거야.”예수진은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오늘만큼은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그렇게 몇몇 사람들은 또 얼마간 대기실에서 웃고 떠들고 있었다.이때, 관계자가 조심스레 들어오더니 그들에게 알렸다.“신부님, 곧 입장하겠습니다.”순간 예수진은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큰 것 같기도 했다.“어떡해, 나 무서워.”“너 배우잖아. 그러면 레드 카펫도 많이 밟아봤을 텐데 이런 작은 의식 따위에 질 거야?”하지수가 그녀를 도발했다.“그거랑 같아? 레드 카펫은 어쩔 수 없이 돈 받고 하는 거고 이건 내 인생이 걸린 나를 위한 의식이잖아.”예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는 생각에 흥분돼 미치겠어...”“됐어. 빨리 가기나 해. 더 꾸물거렸다가는 좋은 시간이 다 지나가겠다.”하지수가 그녀를 다시 한번 재촉했다.예수진은 하지수의 모습에 입을 악물었다.분명 그녀의 행복을 질투하는 것 같았다.그러다가 재빨리 치맛자락을 손에 쥐고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하연은 이미 관계자의 도움으로 먼저 지정된 자리에 앉아 있었다.오늘 결혼식의 화동을 맡았기에 먼저 가서 물건들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소이연과 하지수도 예
말이 끝나자마자 두 개 성의 레이스 문이 천천히 열렸다.안에서 예수진은 한껏 긴장된 얼굴로 숨을 깊게 들이 마셨다.아무리 오늘날을 손꼽아 기대했다고 해도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그래도 여배우인지라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음악에 맞춰 천천히 성에서 걸어 나왔다.레드 카펫 양옆에는 생화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그 옆에서 하객들이 그녀를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예수진은 아버지가 없거니와 계지원도 다리가 불편한 관계로 혼자 신부 입장한 뒤 계지원과 같이 무대에 서기로 했다.그러다가 몇 걸음을 걷더니 문득 옆을 바라보았다.뒤따르던 소이연과 하지수도 계속 옆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는데 다른 한 성에서 신부가 나오지 않는 모습에 이상함을 느꼈다.하객들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결혼식이 진행 중이니 누구하나 먼저 입을 열어 묻지는 않았다.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예수진은 무대 중앙에 도착했고 곧바로 계지원한테 다가갔다.그런데도 어쩔 수 없이 자꾸 텅 빈 다른 신부의 자리로 시선이 갔다.사회자도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한 얼굴로 육현경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상의하는 듯싶었다.어쨌든 지금 그의 신부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 두 사람은 몇 초간 대화를 주고받다가 사회자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마이크를 들었다.“비록 오늘은 합동결혼식이지만 의식은 각각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육현경 신랑분은 잠시만 자리에서 신부님을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정식으로 신랑 계지원 씨와 신부 예수진 씨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큰 박수로 맞이해주세요!”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예식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두 분은 한 발짝만 앞으로 서주세요.”사회자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예수진은 계지원의 휠체어를 끌고 무대 중앙까지 갔다.소이연과 하지수도 무대로 올라갔는데 소이연은 또다시 작은 성 쪽을 바라보았다.성의 문이 방금 열렸다가 다시 닫혔는데 분명 안에는 신부가 없었다.그렇다는 뜻인 즉...소이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오므리다가 그녀
하연이는 아장아장 걸어가더니 계지원과 예수진에게 반지를 건네줬다.핑크색 공주 드레스 차림의 아이를 본 하객들은 그녀의 귀여운 모습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우리 꼬마 화동이 반지를 잘 전달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사회자는 열정적으로 말하다가 허리를 굽히고 하연에게 물었다.“혹시 오늘 저 두 사람에게, 즉 엄마 아빠에게 할 말이 있을까요?”하연이는 커다란 눈망울로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마이크에 대고 답했다.“여동생 갖고 싶어요.”그녀의 말에 장내는 또다시 웃음소리로 들끓었다.엉뚱한 모습이 엄마인 예수진과 똑 닮은 것 같았다.계지원과 예수진도 어느새 사람들과 같이 웃고 있었다.방금 한 말은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니었다.분명 이런 절차가 있을 것 같아 예수진은 사전에 하연에게 만약 사회자가 물어보면 꼭 두 사람이 백년해로 맺어지길 축복한다고 말하라고 연습까지 시켰었다.또한 대사까지 잘 적어서 외우도록 시켰는데 결국에는 대사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애드립을 친 것이다.사회자가 웃으며 되물었다.“남동생은 안 되나요?”하연이는 다시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답했다.“안 되는 건 아니에요.”그녀의 애어른 같은 말투 때문에 사람들은 또다시 박장대소했다.이때 하연이 다급히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남동생이랑 여동생을 다 갖고 싶어요. 아니면 아빠 엄마가 그냥 쌍둥이를 낳아주세요. 그럼, 남자인지 여자인지 따지지 않아도 되잖아요.”하연의 말에 사회자는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농담을 건넸다.“하연이의 소원을 분명 아빠 엄마가 잘 알아들었을 거예요. 그리고 만약 오늘 저녁에 하연이가 얌전히 자기 방에서 자고 엄마 아빠 방에 가서 두 사람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하연이에게 남동생이나 여동생이 생길 거니까 기다려요.”“진짜요?”하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회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그에게 말했다.“전 안 믿을래요.”“진짜예요.”“근데 저번에 외할머니도 그렇게 말하셨어요. 아니, 여러 번 똑같은 말 했어요. 매번 엄마랑 아빠가 같이
저 앙큼한 어린이가 내 딸이라고?“오늘 저희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겨준 화동 어린이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사회자는 일부러 하연이를 가리키며 말했고 장내는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끓었다.이렇게 웃음꽃이 끊임없는 결혼식은 처음이다.“그럼 계속 결혼식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신랑 신부는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세요.”사회자가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그들의 커플링은 다시 제작된 것이다.프러포즈 때 받았던 반지는 예수진의 손에 끼워져있었다.그리고 오늘 계지원은 조심스레 결혼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줬다.반지가 화려한 건 아니지만 계지원이 특별히 외국에 가서 직접 디자인한 반지라 예수진은 어떻게 봐도 이뻐 보였다.“신랑 신부는 계속 반지 교환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사회자가 다시 한번 귀뜸해 줬다.예수진이 잠깐 자신의 결혼반지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사회자의 말에 재빨리 정신을 차렸는데 그런 어리바리한 모습에 하객들은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그녀는 반지를 조심스레 계지원의 약지에 끼워줬다.그렇게 두 사람은 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주는 데 성공했고 이는 보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예수진은 계지원의 손에 자신과 똑같은 반지가 끼워진 모습을 보고는 순간 울컥했다.“이제 정식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사회자가 높이 외치자 음악 소리와 함께 결혼식은 절정에 달했다.“이제 다음 순서는...”사회자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신랑분께서 신부님에게 뽀뽀하는 시간이 있겠습니다!”현장은 순간 열렬한 박수 소리로 들끓기 시작했다.예수진과 계지원은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계지원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가 몸을 일으켜 서려고 했다.그의 모습에 관계자는 재빨리 계지원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줬다.계지원이 지팡이를 넘겨받으려던 순간 예수진은 그대로 계지원의 품에 안기다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대로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화끈한 신부의 모습에 모든 사람이 놀랐다.어떤 신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일까.물론 두 사람은 지금
하객들은 가만히 예수진을 바라보았다. 계지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직접 보게 된 사람들은 분명 다시 한번 그에게 사랑 고백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예수진의 성격이라면 전 세계에 자랑하고도 남는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때.예수진이 마이크에 대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저는 오늘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저의 엄마인 가연 여사님.”가연은 지금 하객석에 앉아 있다.그리고 무대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내려온 하연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수진이 자신을 언급하자 순간 긴장해서 온몸이 굳어버렸다.“맞아요. 저분은 제 어머니지만 전 한 번도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한동안 아주 미워했었거든요. 저 사람만 아니었다면 제 인생이 그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누가 고고한 육씨 가문의 아가씨가 사실은 한 가정부의 딸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예수진의 말에 장내는 삽시에 고요해졌다.그들도 당시 예수진이 얼마나 힘들고 절망적이었을지 대략 짐작이 갔다.“정말 제 엄마로 받아들이기도 싫고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었습니다...”예수진은 가연을 바라보며 말했는데 가연의 눈시울은 어느새 빨개진 채 조용히 눈물을 쏟고 있었다.사실 예수진이 그녀를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모질지 못한 그녀는 결국 엄마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 그렇게 하지 못했죠.”예수진이 말을 이었다.“제가 만약 그런 선택을 했었더라면 아마 평생 후회했을 겁니다.”가연은 하연이를 안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후회하는 건 분명 가연, 그녀였기 때문이다.그때 일시적인 충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저분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엄마이고 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줬으나 그 방법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죠.”그러다가 다시 가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세상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해도 저는 이해해요. 엄마!”예수진은 처음으로 그녀를 불러보았다.가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하연이는 자기 외할
예수진은 몇 번이고 심호흡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두 번째로 고마웠던 사람은...”“남편!”예수진이 머뭇거리자 하객 중 누군가가 먼저 그녀의 말을 가로채는 바람에 현장은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예수진은 애써 웃음을 참고 계속 말을 이었다.“하도경, 너 빨리 밥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맞다.방금 큰 소리로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하도경이었다.하도경은 지금 애써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고 축복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예수진의 말에 하객들은 저마다 미소를 지었다.오늘 이 결혼식은 웃기기도 또 감동적이기도 했다.예수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하도경, 실망하게 해서 미안한데 내 남편이 아니야.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많아서 식사하려면 멀었어.” 하도경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리고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예수진은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두 번째로 고마운 분은 바로 육은숙, 육 여사님.”육은숙도 당연히 이 자리에 있었다.육현경의 결혼식이자 또 계지원의 결혼식이기도 하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했다.하여 방금 예수진이 가연에게 한 고백도 모두 듣게 되었는데 사실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예수진을 싫어했고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미워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너무 싫었다.근데 오늘 예수진이 자기 결혼식에서 가연을 언급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심지어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다.“제 존재 자체가 아마 당신에게는 아주 큰 고역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요. 근데 어떡해요. 제가 그만 남동생한테 시집가게 된 바람에 이제부터는 아주 시도 때도 없이 만나게 되어버렸네요.”예수진의 말을 들은 육은숙의 얼굴은 삽시에 어두워졌다.역시나 저 여자한테서는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잠시나마 예수진이 정말로 그들의 옛 모녀의 정을 그리워할 줄 알았는데...모녀라...육은숙의 마음이
“하여 저는 여태껏 저를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아낌없이 사랑해 줘서 감사하다고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아무리 큰 충격을 받았더라도 의연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까지 비록 저희 사이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아직까지 저를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예수진은 허리를 굽혀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육은숙은 비록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런 반응도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새 눈가가 빨개져 있었다.그리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육은숙은 그녀가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여태껏 자신이 모질게 대했던 일들만 기억하고 자신처럼 서로가 미워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또다시 예수진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아직 그녀의 출생 비밀을 몰랐을 때 예수진은 아주 귀엽고 또 기특해서 육은숙이 많이 예뻐해 줬다.육은숙은 고개를 돌려 애써 예수진의 눈빛을 피했다.예수진은 그녀의 냉담한 모습을 보고는 살짝 실망했지만 아예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었다.육은숙이 얼마나 고고한 사람인데 어떻게 한순간에 과거의 그 한을 다 풀 수 있겠는가!자존심도 센 사람인데 당시 믿었던 사람에게 심하게 배신당하고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을 육은숙은 아마 평생 예수진을 원망할 것이다.예수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그녀는 단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내뱉고 싶었는데 실제로 말하고 나니 엄청 후련했다.“이제부터 저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겠어요. 제가 미워도 어쩔 수 없네요. 어쨌든 이 일에 대해서 저는 이제 더 이상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으려 합니다. 나중에 당신과 만나게 되어도 제가 먼저 인사할 것이고 말도 걸 거예요. 싫어도 참아주세요. 화를 내도 그냥 못 본 척할거니까요.”예수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푸흡!”눈치 없는 하도경이 또다시 웃음소리를 냈다.“저기 도경아, 잠시라도 진지해 줄 수 없을까?”이제 보니 일부러 저
“내 마음이 느껴져?”예수진이 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계지원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이제 시작한다.”예수진이 무대 쪽을 가리키며 계지원에게 말했다.계지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는 예수진의 감정에 익숙해져야 했다. 이런 분위기를 2초도 못 견디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계지원도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어쩔 수 없이 예수진의 말대로 오늘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지금이라고 인정해야 했다.사회자의 말대로 육현경은 다시 무대 위에 올라가 중앙 자리에 섰다.그리고 사회자는 아까보다 긴 오프닝 멘트를 하다가 다시 맞은 편의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우리 신부님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 입장!”성의 커튼이 또다시 천천히 걷어지며 문이 열렸다.모든 하객의 시선이 한곳을 쏠렸는데 안에 서 있는 신부의 복장이 하얀 드레스가 아니었다...그렇다.안에 서 있던 신부가 진은지가 아닌 그녀의 들러리였다.그녀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명하면 좋을지, 이걸 지금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신도 잘 모르는 듯 한껏 난감한 얼굴로 서있었다.웬 들러리의 등장에 하객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소이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육현경이 한껏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었다.결혼 당일 신부에게 바람맞게 되었으니, 아마 그 누구도 이런 일은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사실 소이연은 처음부터 진은지가 오늘 결혼식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했었다.진은지의 성격이라면 지금까지 얌전히 안에서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고 아무런 기척도 없을 리가 없었다.게다가 아직 충분히 자유롭게 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여자라 일시적으로 결혼을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그리고 결혼해서도 지금처럼 노는 행동은 아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이때.성안에 있던 들러리는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어쨌든 자신의 결혼식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어 재빨리 육현경에게 다
“문수 씨.”하지수는 송문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 송문수가 화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송승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어쨌든 한 가족이 아닌가.그녀는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승우 오빠를 병원에 보내야 하잖아.”하지수는 큰 소리로 송문수에게 말하자 송문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사실 송승우는 별일 없었다. 송문수는 격투기를 배운 적이 있기에 사람의 어느 부위가 다치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송승우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때렸어도 급소를 때리지 않았다.하지수는 송문수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긴급구조 요청을 하였다.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하지수는 송승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바닥에 쓰러진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송승우의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송문수와 싸울 힘이 없었다.사실 하지수도 요새 송승우와 송문수가 자주 싸우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은 벌써 두 번째였다.어렸을 때 두 형제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지금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유치하게 싸우다니!이윽고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조대원들은 들것으로 송승우를 구급차에 태웠다.하지수도 따라서 올라탔지만 송문수는 타지 않았다.하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와서 송문수를 잡아당겨서 같이 구급차에 올라탔다.구급차 안은 매우 조용하였다.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에 아직 분노의 불꽃이 튕기는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송승우는 응급실로 옮겼다.하지수와 송문수는 로비에서 기다렸다. 송문수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쪽에 서 있었다.사실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에도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문수 씨도 얼굴과 몸에 난 상처를 검사하지 않을래?”“필요 없어. 외상이라 금방 나을 거야”송문수가 이렇게 말하자 하지수도 강요하지 않았다.잠시 후, 송승우는 응급실에서 나왔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모두 외상이라 별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입원 수속
“놓지 못해?”송문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이거 놔요.”하지수도 송승우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송승우의 눈빛에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는 더욱 세게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파요!”송문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놓으라고 했다!”그는 송승우의 팔을 끌어당기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에 송승우는 통증을 느꼈으나 승부욕 때문에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송문수가 힘을 줄수록 그도 더욱 힘을 줘서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송승우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걸 놔. 나와 지수의 일에 끼어들지 마.”“끼어들지 말라고?”송문수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형이 잊은 것 같은데 지수는 내 와이프야. 우린 부부이지만 형과 지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지금 형이 내 와이프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너!”송문수의 쏘아붙인 말에 송승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예전에 송승우는 하지수가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송문수를 안중에 넣지도 않았고 그들의 결혼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송문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지수가 좋아한 사람은 나야!”송승우는 수치심에 더 약이 올라서 노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반박할 힘도 없었고 송문수의 말이 들려왔다.“지수가 누구를 좋아하든 지금은 내 여자야. 누구도 데려갈 수 없고 누구도 지수를 괴롭힐 수 없다고! 셋까지 셀 테니 지수를 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송승우는 끄덕하지도 않고 송문수를 노려보았다.“하나.”“둘.”송문수는 ‘셋’을 세는 대신 주먹을 들고 송승우의 얼굴을 세게 강타했다.송문수의 한 방을 맞은 송승우는 코피를 흘렸고 아픔으로 이내 하지수를 놓아주었다.그러나 송승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승우 씨, 사과 따위 이제 필요 없어요.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아무 탈 없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끝내는 거예요. 승우 씨는 문수 씨 형이잖아요. 게다가 저도 어릴 때부터 송씨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척 같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하지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했다.송승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하지수는 뒤를 돌아 송문수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도 여전히 많이 피곤했다. 송문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자고 싶었다.크레지가 아직 오지 않은 이상, 기술 투자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막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손은 또다시 송승우에 의해 붙잡혔다.하지수가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송문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승우의 행동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그가 앞으로 다가가 하지수를 데려오려던 순간, 송승우가 갑자기 말했다.“지수 씨, 방금 당신의 행동은 모든 걸 말해줬어요!”“무슨 행동이요?”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제가 불렀을 때, 제 쪽으로 다가왔잖아요. 그게 지수 씨 마음속에 있는 진심이에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저한테로 오세요. 하지수 씨, 제가 잘 해줄게요. 지수 씨를 혼자 두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맹세할게요...”“아니요.”하지수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하지수를 바라보는 송승우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찼다.“승우 씨가 불었을 때 따라간 건 무의식적으로 간 거예요. 잠에서 덜 깬 상태라서 누가 불렀어도 갔을 거예요. 승우 씨인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게요. 낯선 목
송문수는 하지수가 일어나서 송승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송승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그래, 지수 씨도 아직 날 신경 쓰고 있다니까. 숨기려 해도 어떻게 숨기겠어?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진심이 드러나는 거지.’송문수는 멀어져 가는 하지수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살짝 멈칫했다. 하지수를 강제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사실 그는 항상 하지수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말이다.하지수는 송승우 앞으로 걸어갔고 송승우가 먼저 손을 뻗더니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그러나 그가 손을 뻗자 하지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승우 씨?”그녀는 그제야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조금 전까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이제와사 분명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흐릿할 뿐이었다.“너무 늦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송승우가 그녀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하지수는 급히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그러자 송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아까는 잠에서 덜 깨서 그랬어요. 전 문수 씨랑 같이 갈 거예요.”“뭐라고요?”송승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까지 연기할 거예요?”“네?”하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저를 놀리는 게 재밌으세요?”송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하지수는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송승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제가 잘못한 걸로 하죠.”그가 갑작스레 사과를 하자 하지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사과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사과를 하는 거야?’“미안했어요. 어쩔 수 없이 떠난 거라고는 하지만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잖아요. 결혼식장에 지수 씨 혼자 남겨두고 간 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하지수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
하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어색한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문수 씨도 부끄러워하는 건가?’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하지수는 소파에 앉아 몰래 송문수를 쳐다보았다.그는 그저 고위직 직원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었다.‘단지 어색해서 그런 건가?’송문수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해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체면을 세우려고 그러는 건가?’하지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크레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관련 부서가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송문수와 하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논의하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새벽 2시가 되었지만 송문수는 아직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까지도 각 부서와 회의를 하면서 협력 계획과 판매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회의가 끝난 후에도 송문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송문수는 그제야 그의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서류든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더 신중해졌고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사인을 했다.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서류를 처리하고 나서야 송문수는 퇴근을 하려고 하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송문수의 기억 속에 하지수는 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많이 피곤한 걸까?’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야
송문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더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송문수가 점점 더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하지수도 그를 더 지지해 주고 싶었고 송문수로 하여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하지수는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노트북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습관처럼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들어갔다.그녀는 비록 알림을 꺼 놓았지만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메시지가 있으면 항상 첫 번째로 확인하곤 했다.그런데 그때, 그룹 채팅에 있는 메시지를 본 하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었다.송문수가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보낸 것이었다.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송문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채팅방에는 여전히 ‘하지수’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문수 씨,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린 거 아니야?”하지수가 물었다.“어?”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수는 송문수 앞에 서서 그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타자를 해놓고 아직 보내지 않은 ‘하지수’도 있었다.송문수도 그제야 자신이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입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이 타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이 온통 하지수로 가득 찬 건 사실이었다.그때, 채팅방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회장님 지금 하 매니저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그걸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보낸 거고?]메시지는 보내지자마자 삭제되었고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도 잘못 보냈네!”그룹 채팅에 두 개의 삭제 기록이 나타났다.송문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제야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하지수’라는 메시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메시지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이
송승우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하지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게 송문수를 고른 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하지수는 송승우의 사무실을 떠나 바로 송문수의 사무실로 갔다.송문수는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회사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유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에도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느님도 부지런한 사람을 도울 거라 믿으며 송문수가 앞으로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형이 뭐라고 했어?”송문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자기 개인 비서로 되어달라고 하더라고.”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송문수랑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최대한 마음을 다할 생각이었다.송문수는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지수가 그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지수가 형 요구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알겠다고 했겠지...’이렇게 생각한 송문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썼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로 결심한 이상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거절했어.”하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문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분명 그녀의 말에 설렌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반면, 하지수는 송문수에게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송문수는 자기한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왜 거절했는데?”송문수가 차분하게 물었다.“문수 씨한테 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수는 웃으며
하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았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어린 시절 그녀는 항상 송승우를 믿었고 그가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었다. 송승우는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송승우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게다가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하지수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송승우는 하지수와 송문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수가 몇 번이나 말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지금은 송문수와 잘 지내고 있고 송승우와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라고 말이다.그리고 송문수가 지금 송씨 그룹의 대리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송문수의 결정이 회사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말이다. 송문수한테 도움이 더 필요했고 송문수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생각이 없는 건가?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거지?’“왜요? 제가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했나요?”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 정말 제대로 일하려고 온 거 맞아요? 아니면 그냥 문수 씨를 못 믿어서 온 건가요? 문수 씨가 회사를 잘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감시하러 온 거냐고요!”“당연히 일하러 온 거죠. 아니면 왜 연구소 일까지 내려놓고 회사로 왔겠어요! 그리고 또...”“아까 지수 씨가 그러셨잖아요. 송문수를 못 믿냐고요. 맞아요. 전 송문수 그 자식 못 믿어요. 송문수가 회사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성과를 하나 냈다고 교만해져서 마음대로 하려 할 겁니다.”“갑자기 드는 생각인데요. 승우 씨는 왜 그렇게 문수 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하지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아니라면 왜 문수 씨를 그렇게 모욕하고 내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겠어...’하지수의 능력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송문수가 회사의 대체적인 상황을 잘 파악한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단지 송문수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재능이 있어서 해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송문수가 매일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하지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지어는 날마다 새벽까지 야근을 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게다가 차에서 보는 서류들도 모두 송씨 그룹과 관련된 문서였다.송문수는 원래 시간만 나면 게임을 하거나 먹고 자고 놀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송문수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된 것 같았다....송문수의 말대로 하지수는 다음 주에 회사로 찾아올 크레지를 위해 연관 업무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송문수와 하지수가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사님들도 점점 두 사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맡긴 업무에 대해 불평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바로 행동에 옮기기만 했다.그러면서 송문수와 하지수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었고 회사도 더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후,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요즘 들어서 그녀는 송문수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송문수는 자주 회사의 전문 용어나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 계획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지수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올 수 있으세요?”그때, 송승우가 갑자기 하지수를 불렀다.하지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송문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네 마음대로 해.”송문수는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질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지수는 속으로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송문수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하지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