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앙큼한 어린이가 내 딸이라고?“오늘 저희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겨준 화동 어린이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사회자는 일부러 하연이를 가리키며 말했고 장내는 또다시 웃음소리가 들끓었다.이렇게 웃음꽃이 끊임없는 결혼식은 처음이다.“그럼 계속 결혼식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신랑 신부는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세요.”사회자가 다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그들의 커플링은 다시 제작된 것이다.프러포즈 때 받았던 반지는 예수진의 손에 끼워져있었다.그리고 오늘 계지원은 조심스레 결혼반지를 그녀의 약지에 끼워줬다.반지가 화려한 건 아니지만 계지원이 특별히 외국에 가서 직접 디자인한 반지라 예수진은 어떻게 봐도 이뻐 보였다.“신랑 신부는 계속 반지 교환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사회자가 다시 한번 귀뜸해 줬다.예수진이 잠깐 자신의 결혼반지에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그러다가 사회자의 말에 재빨리 정신을 차렸는데 그런 어리바리한 모습에 하객들은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그녀는 반지를 조심스레 계지원의 약지에 끼워줬다.그렇게 두 사람은 반지를 서로에게 끼워주는 데 성공했고 이는 보는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었다.예수진은 계지원의 손에 자신과 똑같은 반지가 끼워진 모습을 보고는 순간 울컥했다.“이제 정식으로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습니다!”사회자가 높이 외치자 음악 소리와 함께 결혼식은 절정에 달했다.“이제 다음 순서는...”사회자는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신랑분께서 신부님에게 뽀뽀하는 시간이 있겠습니다!”현장은 순간 열렬한 박수 소리로 들끓기 시작했다.예수진과 계지원은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계지원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가 몸을 일으켜 서려고 했다.그의 모습에 관계자는 재빨리 계지원에게 지팡이를 가져다줬다.계지원이 지팡이를 넘겨받으려던 순간 예수진은 그대로 계지원의 품에 안기다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그대로 그의 입에 입을 맞췄다.화끈한 신부의 모습에 모든 사람이 놀랐다.어떤 신부가 이렇게까지 적극적일까.물론 두 사람은 지금
하객들은 가만히 예수진을 바라보았다. 계지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을 직접 보게 된 사람들은 분명 다시 한번 그에게 사랑 고백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예수진의 성격이라면 전 세계에 자랑하고도 남는 사람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때.예수진이 마이크에 대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저는 오늘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저의 엄마인 가연 여사님.”가연은 지금 하객석에 앉아 있다.그리고 무대에서 임무를 완수하고 내려온 하연이를 품에 안고 있었는데 갑자기 예수진이 자신을 언급하자 순간 긴장해서 온몸이 굳어버렸다.“맞아요. 저분은 제 어머니지만 전 한 번도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한동안 아주 미워했었거든요. 저 사람만 아니었다면 제 인생이 그렇게까지 무너지지 않았을 테니까요. 누가 고고한 육씨 가문의 아가씨가 사실은 한 가정부의 딸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예수진의 말에 장내는 삽시에 고요해졌다.그들도 당시 예수진이 얼마나 힘들고 절망적이었을지 대략 짐작이 갔다.“정말 제 엄마로 받아들이기도 싫고 아예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었습니다...”예수진은 가연을 바라보며 말했는데 가연의 눈시울은 어느새 빨개진 채 조용히 눈물을 쏟고 있었다.사실 예수진이 그녀를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모질지 못한 그녀는 결국 엄마로 받아들였다.“하지만 전 그렇게 하지 못했죠.”예수진이 말을 이었다.“제가 만약 그런 선택을 했었더라면 아마 평생 후회했을 겁니다.”가연은 하연이를 안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후회하는 건 분명 가연, 그녀였기 때문이다.그때 일시적인 충동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저분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엄마이고 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줬으나 그 방법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죠.”그러다가 다시 가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세상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해도 저는 이해해요. 엄마!”예수진은 처음으로 그녀를 불러보았다.가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하연이는 자기 외할
예수진은 몇 번이고 심호흡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뒤 다시 입을 열었다.“그리고 두 번째로 고마웠던 사람은...”“남편!”예수진이 머뭇거리자 하객 중 누군가가 먼저 그녀의 말을 가로채는 바람에 현장은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어버렸다.예수진은 애써 웃음을 참고 계속 말을 이었다.“하도경, 너 빨리 밥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구나?”맞다.방금 큰 소리로 외친 사람은 다름 아닌 하도경이었다.하도경은 지금 애써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고 축복해 주고 있는 모양이다.예수진의 말에 하객들은 저마다 미소를 지었다.오늘 이 결혼식은 웃기기도 또 감동적이기도 했다.예수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하도경, 실망하게 해서 미안한데 내 남편이 아니야. 그리고 아직 할 말이 많아서 식사하려면 멀었어.” 하도경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리고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예수진은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두 번째로 고마운 분은 바로 육은숙, 육 여사님.”육은숙도 당연히 이 자리에 있었다.육현경의 결혼식이자 또 계지원의 결혼식이기도 하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참석해야 했다.하여 방금 예수진이 가연에게 한 고백도 모두 듣게 되었는데 사실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예수진을 싫어했고 심지어 지금도 여전히 미워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의 우스갯거리가 되는 것도 너무 싫었다.근데 오늘 예수진이 자기 결혼식에서 가연을 언급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심지어 고맙다고 인사까지 했다.“제 존재 자체가 아마 당신에게는 아주 큰 고역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요. 근데 어떡해요. 제가 그만 남동생한테 시집가게 된 바람에 이제부터는 아주 시도 때도 없이 만나게 되어버렸네요.”예수진의 말을 들은 육은숙의 얼굴은 삽시에 어두워졌다.역시나 저 여자한테서는 뭔가를 기대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잠시나마 예수진이 정말로 그들의 옛 모녀의 정을 그리워할 줄 알았는데...모녀라...육은숙의 마음이
“하여 저는 여태껏 저를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드리고 아낌없이 사랑해 줘서 감사하다고 꼭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아무리 큰 충격을 받았더라도 의연하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까지 비록 저희 사이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아직까지 저를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예수진은 허리를 굽혀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육은숙은 비록 입술을 앙다물고 아무런 반응도 없어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새 눈가가 빨개져 있었다.그리고 두 눈에서는 눈물이 마구 차올랐지만 애써 삼켰다.육은숙은 그녀가 지금까지도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여태껏 자신이 모질게 대했던 일들만 기억하고 자신처럼 서로가 미워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또다시 예수진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아직 그녀의 출생 비밀을 몰랐을 때 예수진은 아주 귀엽고 또 기특해서 육은숙이 많이 예뻐해 줬다.육은숙은 고개를 돌려 애써 예수진의 눈빛을 피했다.예수진은 그녀의 냉담한 모습을 보고는 살짝 실망했지만 아예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었다.육은숙이 얼마나 고고한 사람인데 어떻게 한순간에 과거의 그 한을 다 풀 수 있겠는가!자존심도 센 사람인데 당시 믿었던 사람에게 심하게 배신당하고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을 육은숙은 아마 평생 예수진을 원망할 것이다.예수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그녀는 단지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내뱉고 싶었는데 실제로 말하고 나니 엄청 후련했다.“이제부터 저는 당신을 미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겠어요. 제가 미워도 어쩔 수 없네요. 어쨌든 이 일에 대해서 저는 이제 더 이상 마음속에 담아두지 않으려 합니다. 나중에 당신과 만나게 되어도 제가 먼저 인사할 것이고 말도 걸 거예요. 싫어도 참아주세요. 화를 내도 그냥 못 본 척할거니까요.”예수진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푸흡!”눈치 없는 하도경이 또다시 웃음소리를 냈다.“저기 도경아, 잠시라도 진지해 줄 수 없을까?”이제 보니 일부러 저
“내 마음이 느껴져?”예수진이 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계지원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이제 시작한다.”예수진이 무대 쪽을 가리키며 계지원에게 말했다.계지원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그는 예수진의 감정에 익숙해져야 했다. 이런 분위기를 2초도 못 견디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러다가 계지원도 무대 쪽을 바라보았다.어쩔 수 없이 예수진의 말대로 오늘 결혼식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지금이라고 인정해야 했다.사회자의 말대로 육현경은 다시 무대 위에 올라가 중앙 자리에 섰다.그리고 사회자는 아까보다 긴 오프닝 멘트를 하다가 다시 맞은 편의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우리 신부님의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 입장!”성의 커튼이 또다시 천천히 걷어지며 문이 열렸다.모든 하객의 시선이 한곳을 쏠렸는데 안에 서 있는 신부의 복장이 하얀 드레스가 아니었다...그렇다.안에 서 있던 신부가 진은지가 아닌 그녀의 들러리였다.그녀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명하면 좋을지, 이걸 지금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신도 잘 모르는 듯 한껏 난감한 얼굴로 서있었다.웬 들러리의 등장에 하객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소이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니 육현경이 한껏 실망한 얼굴로 자리에 서 있었다.결혼 당일 신부에게 바람맞게 되었으니, 아마 그 누구도 이런 일은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사실 소이연은 처음부터 진은지가 오늘 결혼식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의심했었다.진은지의 성격이라면 지금까지 얌전히 안에서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고 아무런 기척도 없을 리가 없었다.게다가 아직 충분히 자유롭게 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여자라 일시적으로 결혼을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그리고 결혼해서도 지금처럼 노는 행동은 아주 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이때.성안에 있던 들러리는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어쨌든 자신의 결혼식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되어 재빨리 육현경에게 다
진은지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몇 초간 머뭇거렸다.순간 하객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저마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리고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육현경과 소이연 쪽으로 향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소이연은 그저 말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진은지가 자신을 언급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이때, 진은지가 다시 말을 이었다.“현경 씨가 다정한 사람이란걸 알고 있고 진심으로 당신과 남은 인생을 함께하고 싶었어요. 근데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저보다는 소이연 씨가 현경 씨랑 더 잘 어울리네요. 당신이 소이연 씨에게 마음이 있단 걸 알고 있지만 계속 애써 숨기는 느낌이었는데 혹시 소이연 씨가 당신을 거절할까 두려워서인가요?”“사실 같은 여자로서 느낄 수 있는데 소이연 씨도 여전히 당신한테 마음이 있어요. 두 사람이 지금 왜 일부러 서로를 멀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몰래 민이한테도 물어봤는데 비록 저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가 다시 원래 사이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했어요.”소이연이 고개를 돌려 육민이쪽을 바라보았는데 그는 아까부터 쭉 육현경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였지만 키는 이미 170cm가 훌쩍 넘어 있었는데 이번 육현경의 결혼식에도 자신이 그의 들러리가 되어주겠다고 했다.그는 양복 차림에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는데 한눈에 보아도 지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 같았다.진은지가 계속 말을 이었다.“육현경 씨, 비록 오늘 저는 그 자리에 가지 않았지만 당신이 조금 더 용감했으면 좋겠어요. 당당하게 한 발짝 나아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자기 행복을 되찾았으면 좋겠어요. 저도 당신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게요.” 진은지는 활짝 웃으며 한마디를 더 추가했다.“화이팅!”그렇게 영상은 끝났다.이렇게 되면 육현경의 오늘 결혼식에는 신부가 없다.신부가 식전에 도망쳤다고 봐야 한다.하객들의 의견도 분분했다.사실 오늘 결혼식에 온 하객 중 신부가 누군지 모르고 온 사람들도 있
그렇게 육현경을 가만히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지만 눈시울은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지금 육현경이 오늘 결혼할 신부한테 바람맞은게 가슴이 아파서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지...순간 자신이 지금 어떻게 답해야 할지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도 모를 정도로 마음이 심란해지기 시작했다.“진은지 씨가 한 말이 다 맞아. 사실...”육현경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사실 오늘 이 결혼은 바로 너를 위해 준비한 거야.”소이연은 순간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오늘 진은지의 부재가 사실 그녀로서는 진작에 짐작했던 일이다. 예전부터 놀기를 좋아했던 사람이라 한순간에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그와 결혼하기에는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오늘 이 결혼식이 자신을 위해 준비했다는 육현경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육현경은 진은지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녀가 오늘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단 말인가.소이연은 약간 기분이 나빴다.만약 그녀더러 빨리 이 민망할 상황에서 구제해달라고 부탁했더라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필경 오늘 이 일은 참으로 두고두고 창피한 일이니까.상류 사회를 놓고 말하면 거의 매장당할 수준과 마찬가지였다.“나랑 진은지 씨는 그저...”육현경이 심호흡을 한번 한 뒤 다시 말을 이었다.“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기였을 뿐이야.”소이연의 눈살이 순간 찌푸려졌다.‘무슨 연기?’“난 이런 방식으로라도 널 붙잡고 싶었어. 심지어 날 불쌍하게 여겨줄 줄 알았거든. 어쨌든 진은지 씨의 사생활도...”육현경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굳이 진은지의 사생활까지 들먹이기는 싫었다.“나도 결혼 전날까지 혹시나 네가 이 결혼을 막아주지 않을까 하는 환상도 잠시 갖고 있었어. 물론 넌 나에게 계속 주의를 주었지. 근데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네가 너무 착해서 그저 인도주의적인 조언을 나에게 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육현경은 애써 감정을 추스르고 소이연과 눈을 마주치며 다시 말을 이었다.“방금 진은
길어지는 침묵은 사람들의 기대감만 더욱 크게 만들었다.모든 사람이 소이연의 답만 기다리고 있었다.어쨌든 오늘 육현경의 절절한 사랑을 눈앞에서 보았다.하지만 소이연쪽은...지금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아직까지도 잘 몰랐다.하여 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육민이도 옆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이것이 자기 아버지의 마지막 기회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만약 어머니가 이 상황에서도 아버지를 거절한다면 이제 그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볼 수 있다.하지만 그는 두 사람이 다시 합쳐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고 만약 여기서 어머니를 잃게 되면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슬퍼할지...소이연을 위해서 육현경이 사실 많은 일을 했다.싫으면서도 진은지와 커플 연기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마음을 붙잡고 싶어 했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와 결혼하려 했다...“미안해.”소이연이 드디어 입을 열었는데 첫 마디가 그에 대한 사과였다.육현경은 허탈함에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눈시울은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마음 아픈 건 둘째로 치고 이렇게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에게 준 상처가 너무 커서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 된 건가?자신이 무리했단 사실은 인정하지만 여전히 욕심을 부리고 싶었다.그는 다시 일어서려다가 순간 어지러움에 몸이 휘청거렸다.몸집도 커다란 사람이 지금 이 순간 누군가 건드리기만 해도 픽 쓰러질 것 같아 보였다.예수진은 그런 육현경의 모습이 너무 가슴이 아팠다.그리고 처음으로 그가 불쌍하다고 여겨졌다.어릴 때부터 육현경은 무엇 하나 부러운 것 없이 자란 아이라 영원히 거만하고 고고하고 두려울 게 없는 사람일 것 같았으나 지금 이 순간은 너무 초라해 보였다.유일하게 울던 모습을 본 것도 바로 오래전 자기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였으니. 그것도 육현경이 어렸을 때라 가족을 잃었을 때의 나약함을 당연하게 여겼을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