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지원과 하지수는 방금 수술실에서 나온 육현경이 이 소식을 듣고 혈압이 상승할까 봐 걱정했고,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예수진을 바라봤다.육현경도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가 아직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환각이 들린다고 생각하고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곧이어 의료진들은 육현경을 VIP 병실로 옮겼고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한 뒤 밖으로 나갔다.병실에는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고, 얼마 뒤, 육현경이 수술을 받는 동안 걱정되는 마음에 소이연이 파혼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복도에 앉아서 수술 결과만을 기다리던 육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촌 고모, 삼촌이 결혼을 취소했어요? 두 사람이 오늘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요?”예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소이연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육민이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고 물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나서야 답했다.“응, 민이 엄마가 파혼당했대. 그래도 네 엄마는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니까 곧바로 훌훌 털어버릴 거야, 게다가 고모들도 옆에서 위로해 주잖아.”육민이는 사실 속으로 자기의 엄마와 아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떴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이때, 계지원이 갑자기 심장박동기를 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현경아, 너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은데...”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계지원은 계속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너 이러면 의사 선생님 다시 부른다.”육현경은 그녀의 결혼 취소 소식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고, 계지원의 놀림이 시작되자, 얼른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예수진도 덩달아 웃으면서 그를 놀렸다.“그렇게 기뻐?”육현경은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감으면서 속으로 연신 심호흡했다.그러나 예수진은 그를 놀리는 데 혈안이 되어 멈출 줄 몰랐다.“소문에 의하면 오늘 문헌 씨가 결혼식 도중에 갑자기 후회된다면서 파혼 선언을 했고, 이연이도 괴로웠는지 곧장 별장으로 돌아갔대. 이연이가 다시 솔로
육민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러면 내일 다시 아빠 보러 올게요.”“그래.”계지원을 따라 순순히 병실을 나서는 육민이와 달리, 예수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육현경을 놀려댔다.“나 지금은 이연이랑 절친이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사실 육현경은 겉으로 시크한 척했어도 속으로는 자꾸만 나대는 심장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네 사람이 밖을 나간 순간, 그는 참아왔던 숨을 크게 내쉬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육현경의 머릿속에는 온통 하루빨리 몸을 추슬러서 퇴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장안 공항.병원에서 나온 천우진은 심문헌에게 계속 연락하면서 그가 묵었던 호텔, 심씨 가문의 사업처와 신혼집까지 찾아다녔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가 휴대폰까지 꺼버렸다.수소문 끝에 심문헌의 비행기 탑승 정보를 알아낸 그는 부랴부랴 공항으로 달려갔다.‘상처 한 번 받았다고 부모님께 쪼르르 달려가?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네!’천우진은 주저 없이 공항 VIP 라운지로 들어갔고, 이내 손에 면사포를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안마의자에 앉아 있는 심문헌을 발견했다.사실 천우진은 소이연의 연락을 받을 때부터 심문헌이 그저 그녀와 육현경의 행복을 위해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정말 바보 아니야? 이렇게 사랑하면서 왜 혼자 상처를 떠안으려고 하는 거지?’그는 심문헌에게로 다가갔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조용히 앉았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지만,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심문헌은 아직도 천우진이 자기의 옆에 앉아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이때 스튜어디스가 조심스럽게 심문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손님, 비행기에 탑승하실 시간입니다.”심문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은 후, 앞만 보고 걸어갔고, 천우진도 이 상황이 재밌는지 싱긋 웃더니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비행기에 탑승한 심문헌
심문헌은 갑작스러운 천우진의 등장에 말문이 막혔다.“당신...”이어 그는 천우진이 자기의 흉한 모습을 다 봤을 거라는 생각에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천우진은 그가 뭐 하려는지 예상이라도 한 듯 빠르게 그의 입을 막으면서 말했다.“쉿! 비행기 안에서 떠들면 안 되죠, 조용해요!”그러나 심문헌은 천우진의 모든 행동이 자기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져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고 결국 온몸이 떨릴 정도의 힘으로 그의 손바닥을 물어버렸다.천우진은 갑자기 손바닥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심문헌은 자기의 입안에서 피 냄새가 진동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물고 있던 이빨에 힘을 풀었다.하지만 천우진은 자기의 손을 거두지 않고 먼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좀 진정이 됐어요?”심문헌이 말없이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진정했으면 됐어요.”얼마 후, 심문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우진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잇자국과 핏자국을 보고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천우진이 자기를 고의로 놀린 것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곧이어 천우진은 냅킨으로 손바닥에 난 핏자국을 깨끗이 닦은 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결국 참다못한 심문헌이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그냥 이렇게 내버려두려고요?”“그렇지 않으면요?”“치료 안 해요?”“피도 별로 나지 않았는데 치료는 무슨, 괜찮아요.”“...”그러나 다음 순간, 천우진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그러면 문헌 씨가 대신 소독해 줄래요?”심문헌은 당황한 나머지 눈까지 희번덕거리며 말했다.“내가 도라에몽인 줄 알아요? 소독약을 왜 가지고 다니겠어요.”“침으로도 소독할 수 있어요.”“천우진 씨, 당신 변태예요?”천우진은 격양된 심문헌의 목소리 때문에 일부 승객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했다.“쉿!”심문헌은 심호
갑작스러운 스튜어디스의 등장에 심문헌은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안녕하세요,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제가 어쩌다가 손이 물리게 되었는데 소독한 후 거즈로 싸매줄 수 있을까요?”“네, 잠시만요.”스튜어디스가 멀어지자, 얼굴이 파랗게 질린 심문헌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지금 날 놀리는 거죠?”천우진은 심문헌의 반응이 재밌는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그의 호탕에 죽이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지만, 비행기 안에서 소란을 피울 수 없었기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으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심문헌은 천우진을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또다시 고개를 창가 쪽으로 돌렸다.곧이어 스튜어디스가 구급상자를 들고 와서 천우진의 상처를 간단하게 치료해 줬고, 비행기에서 내릴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공항을 빠져나오던 심문헌은 계속 뒤따라오는 천우진에게 대뜸 화를 냈다.“천우진 씨 왜 자꾸 날 따라오는 거죠?”“이연이가 당신이랑 함께 있으라고 했거든요.”심문헌은 소이연이라는 존재가 가슴에 박힌 못인 것처럼 이름만 들어도 명치가 아파 나는 것 같았다.“괜찮으니까 이럴 필요 없어요.”“난 당신이 필요해요.”심문헌은 당최 알 수 없는 그의 의도에 분노하면서 물었다.“내가 왜 당신이랑 같이 있어야 하죠?”“당신이 그 많은 하객 앞에서 내 동생에게 파혼을 선언한 걸로 나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생겼거든요. 나한테도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요.”“당신이 파혼당한 것도 아닌데 무슨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거죠?”심문헌은 더 이상 그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아서 말을 이어 나갔다.“나한테서만 멀리 떨어지면 되니까 마음대로 해요.”“낙성은 너무 낯선 곳이란 말이에요.”“그럼, 다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면 되잖아요.”“그게... 신분증을 잃어버렸어요.”“그러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죠?”“방금 잃어버렸거든요.”“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정말이에요.”심문헌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천우진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그
“천우진, 당신...”천우진은 대뜸 심문헌의 팔을 끌어당기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가요! 당신의 홈그라운드인 낙상에 왔으니까 이제 당신이 날 대접할 차례에요!”“난 동의할 수 없어요.”그러나 천우진은 있는 힘껏 그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얼마 후, 심문헌은 신분증이 없어 호텔에 묵을 수 없는 천우진을 어쩔 수 없이 낙성에 있는 개인 명의의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천우진이 먼저 말을 꺼냈다.“나 배고픈데 먹을 거 있어요?”“...”그는 곧장 밖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지금 저녁 7시라고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가 홀쭉해졌어요.”심문헌도 그제야 자기도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하루 종일 공복 상태라는 걸 깨달았고 마루에 앉으면서 물었다.“뭘 좋아해요?”천우진은 소파에 앉아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면서 답했다.“난 다 괜찮아요, 그나저나 오늘은 술을 마시고 싶네요.”곧이어 심문헌의 시선을 눈치챈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안 돼요? 오늘은 정말 너무나 피곤한 하루였다고요. 이럴 때 술이 들어가면 정말 편하게 잘 수 있어요.”심문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배달 앱을 켜서 여러 가지 음식을 주문했고, 곧바로 담배를 피우러 넓은 베란다로 나갔다.‘가뜩이나 심란한데 이렇게 와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다니! 혼자 가만히 내버려둘 수는 없는 건가?’천우진은 심문헌의 외로워보이는 뒷모습을 보면서 이건 하늘의 계획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있었다.30분 후.초인종 소리가 울리자, 천우진은 부랴부랴 문을 열고 주문한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반듯하게 차려놓은 후, 베란다로 나가서 어두운 얼굴로 난간에 엎드려있는 심문헌을 잡아끌었다.“얼른 와서 밥 먹어요.”심문헌은 천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난 생각이 없으니까 혼자 먹어요... 어어어!”결국 심문헌은 반항도 못 하고 천우진의 엄청난 힘에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천우진은 심문헌에게 방석을 건넨 후, 이내 맥주 한 병까지 따서 건넸다.“난 술
심문헌은 내일이면 당장 이 아파트에서 쫓겨날 천우진과 더 이상의 실랑이를 벌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는 앞에 놓인 꼬치구이와 술을 번갈아 먹었다.늦은 시간임에도 창밖은 가로등 등불로 인해 환했다.얼마 후, 천우진은 취기가 조금 올라오는 느낌에 곧장 베란다로 나가서 조금 전 심문헌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바람을 쐬었다.그는 출장 때문에 낙성에 와본 적은 있어도 유유자적하게 도시를 만끽할 시간이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밤공기를 마시면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이곳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취기가 가신 그는 밤바람이 차다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돌려 거실을 보니 심문헌이 이미 술에 취해서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천우진은 곧장 거실로 들어가서 인사불성이 된 심문헌을 부축했다.곧이어 심문헌은 온몸이 갑자기 허공에 붕 뜬 느낌이 불편한 건지,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불편해.”“조금만 참아요, 침대에 누우면 편안해질 거예요.”심문헌은 침대에 눕자마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 헛구역질했다.“욱!”“잠깐만 참아요, 내가 화장실로 데려다줄게요...”“욱!”그러나 심문헌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과 천우진의 옷에 토를 하고 말았다.천우진은 더러워진 옷을 보고 눈을 질끈 감더니 크게 심호흡하고는 물었다.“아직도 속이 울렁거려요?”“아니요.”심문헌은 그의 물음에 간단하게 답한 뒤,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천우진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더러워진 옷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바닥까지 청소하고 나서 샤워하러 들어갔다.그는 다 씻고 난 뒤에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고 결국 욕실 선반 위에 놓인 가운을 닥치는 대로 걸쳐 입었다.그 가운은 천우진에게 조금 작긴 해도 못 입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욕실에서 나온 천우진은 심문헌이 침대에 누운 채 셔츠가 불편한지 계속 잡아당기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그에게로 다가가서 셔츠, 바지와 양말을 벗겨주었다.곧이어 그가 심문헌에게 따뜻
천우진은 곧 욕실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서둘러 들어갔다.그는 다음 순간, 심문헌이 바닥에 벌렁 나자빠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 나서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했지만, 갑자기 들리는 고른 숨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욕실 바닥에서 자다니!’천우진은 심문헌을 다시 침대에 눕히려고 안다가 생각을 바꿔 욕조로 향했고 더러워진 그의 몸도 씻겨줬다....다음 날.심문헌은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잠에서 깼고 곧장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온몸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고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게다가 그는 필름이 끊겨서 자기가 어떻게 침대에서 자게 되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더욱 괴로웠다.곧이어 몸을 뒤척이던 심문헌은 자기의 등 뒤로 사람의 온도가 느껴지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조심스럽게 몸을 돌린 후, 등 뒤에 있던 사람의 넓은 등에 선명한 긁힌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자기의 입을 틀어막았다.‘어젯밤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곧이어 그는 심호흡하며 자기의 감정을 추스른 뒤,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일어서서 다가갔다.그러나 옆 사람의 얼굴 대부분이 이불 속에 파묻혀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이불을 들추는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자기의 옆에 누워서 자던 사람이 천우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이때 천우진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눈앞에 있는 심문헌을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아침이에요.”곧이어 그는 놀란 눈으로 침대에 떨어질 뻔한 심문헌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일어나는 모습이 그렇게 무서운가?’그가 이불을 젖히고 심문헌을 부축하려고 하자, 심문헌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이불 열지 말아요, 보고 싶지 않아요!”천우진은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
천우진은 기지개를 켠 다음 베개를 침대맡에 세우고 기대면서 말했다.“어젯밤 당신이 술에 취해서 말도 아니었어요!”심문헌은 다짜고짜 천우진을 향해 소리쳤다.“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그러나 심문헌의 과장된 반응에 천우진은 어젯밤 자기가 그에게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뭐가 그의 미움을 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게다가 어젯밤 심문헌은 씻겨주는 내내 어린애처럼 반항하면서 천우진의 등을 여기저기 사정없이 긁어놨다.천우진은 심문헌을 한번 훑어보면서 물었다.“아직도 술이 덜 깼어요?””그래요, 나 아직 술이 덜 깼어요. 어젯밤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책임질 필요도 없겠죠?”“...”그 순간, 천우진은 심문헌이 지금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다시 말해서 사람을 죽이고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나요?”심문헌은 갑자기 어젯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이 후회되었다.“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글쎄요?””당신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난 당신의 결혼 생활을 깨뜨릴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까 어젯밤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죠. 나도 그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죠!”심문헌은 그의 말에 바락바락 화를 냈다.“당신을 위해서 내린 결정인데,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사실 내 결혼은 형식적인 결혼일 뿐이에요.”심문헌은 천우진의 충격적인 발언에 엄청나게 놀랐고 눈에는 혐오감으로 가득했다.“뭐라고요? 당신이 사기 결혼을 했단 말이에요?”천우진은 심문헌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사실 내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바로 사고로 죽은 내 친한 친구예요. 그녀가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어 친구는 불의의 사고로 친구를 떠났고 난 내 친구의 아이가 완전한 가정
“문수 씨.”하지수는 송문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 송문수가 화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송승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어쨌든 한 가족이 아닌가.그녀는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승우 오빠를 병원에 보내야 하잖아.”하지수는 큰 소리로 송문수에게 말하자 송문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사실 송승우는 별일 없었다. 송문수는 격투기를 배운 적이 있기에 사람의 어느 부위가 다치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송승우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때렸어도 급소를 때리지 않았다.하지수는 송문수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긴급구조 요청을 하였다.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하지수는 송승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바닥에 쓰러진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송승우의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송문수와 싸울 힘이 없었다.사실 하지수도 요새 송승우와 송문수가 자주 싸우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은 벌써 두 번째였다.어렸을 때 두 형제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지금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유치하게 싸우다니!이윽고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조대원들은 들것으로 송승우를 구급차에 태웠다.하지수도 따라서 올라탔지만 송문수는 타지 않았다.하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와서 송문수를 잡아당겨서 같이 구급차에 올라탔다.구급차 안은 매우 조용하였다.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에 아직 분노의 불꽃이 튕기는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송승우는 응급실로 옮겼다.하지수와 송문수는 로비에서 기다렸다. 송문수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쪽에 서 있었다.사실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에도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문수 씨도 얼굴과 몸에 난 상처를 검사하지 않을래?”“필요 없어. 외상이라 금방 나을 거야”송문수가 이렇게 말하자 하지수도 강요하지 않았다.잠시 후, 송승우는 응급실에서 나왔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모두 외상이라 별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입원 수속
“놓지 못해?”송문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이거 놔요.”하지수도 송승우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송승우의 눈빛에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는 더욱 세게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파요!”송문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놓으라고 했다!”그는 송승우의 팔을 끌어당기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에 송승우는 통증을 느꼈으나 승부욕 때문에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송문수가 힘을 줄수록 그도 더욱 힘을 줘서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송승우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걸 놔. 나와 지수의 일에 끼어들지 마.”“끼어들지 말라고?”송문수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형이 잊은 것 같은데 지수는 내 와이프야. 우린 부부이지만 형과 지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지금 형이 내 와이프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너!”송문수의 쏘아붙인 말에 송승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예전에 송승우는 하지수가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송문수를 안중에 넣지도 않았고 그들의 결혼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송문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지수가 좋아한 사람은 나야!”송승우는 수치심에 더 약이 올라서 노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반박할 힘도 없었고 송문수의 말이 들려왔다.“지수가 누구를 좋아하든 지금은 내 여자야. 누구도 데려갈 수 없고 누구도 지수를 괴롭힐 수 없다고! 셋까지 셀 테니 지수를 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송승우는 끄덕하지도 않고 송문수를 노려보았다.“하나.”“둘.”송문수는 ‘셋’을 세는 대신 주먹을 들고 송승우의 얼굴을 세게 강타했다.송문수의 한 방을 맞은 송승우는 코피를 흘렸고 아픔으로 이내 하지수를 놓아주었다.그러나 송승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승우 씨, 사과 따위 이제 필요 없어요.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아무 탈 없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끝내는 거예요. 승우 씨는 문수 씨 형이잖아요. 게다가 저도 어릴 때부터 송씨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척 같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하지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했다.송승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하지수는 뒤를 돌아 송문수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도 여전히 많이 피곤했다. 송문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자고 싶었다.크레지가 아직 오지 않은 이상, 기술 투자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막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손은 또다시 송승우에 의해 붙잡혔다.하지수가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송문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승우의 행동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그가 앞으로 다가가 하지수를 데려오려던 순간, 송승우가 갑자기 말했다.“지수 씨, 방금 당신의 행동은 모든 걸 말해줬어요!”“무슨 행동이요?”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제가 불렀을 때, 제 쪽으로 다가왔잖아요. 그게 지수 씨 마음속에 있는 진심이에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저한테로 오세요. 하지수 씨, 제가 잘 해줄게요. 지수 씨를 혼자 두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맹세할게요...”“아니요.”하지수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하지수를 바라보는 송승우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찼다.“승우 씨가 불었을 때 따라간 건 무의식적으로 간 거예요. 잠에서 덜 깬 상태라서 누가 불렀어도 갔을 거예요. 승우 씨인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게요. 낯선 목
송문수는 하지수가 일어나서 송승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송승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그래, 지수 씨도 아직 날 신경 쓰고 있다니까. 숨기려 해도 어떻게 숨기겠어?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진심이 드러나는 거지.’송문수는 멀어져 가는 하지수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살짝 멈칫했다. 하지수를 강제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사실 그는 항상 하지수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말이다.하지수는 송승우 앞으로 걸어갔고 송승우가 먼저 손을 뻗더니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그러나 그가 손을 뻗자 하지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승우 씨?”그녀는 그제야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조금 전까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이제와사 분명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흐릿할 뿐이었다.“너무 늦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송승우가 그녀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하지수는 급히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그러자 송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아까는 잠에서 덜 깨서 그랬어요. 전 문수 씨랑 같이 갈 거예요.”“뭐라고요?”송승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까지 연기할 거예요?”“네?”하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저를 놀리는 게 재밌으세요?”송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하지수는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송승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제가 잘못한 걸로 하죠.”그가 갑작스레 사과를 하자 하지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사과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사과를 하는 거야?’“미안했어요. 어쩔 수 없이 떠난 거라고는 하지만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잖아요. 결혼식장에 지수 씨 혼자 남겨두고 간 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하지수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
하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어색한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문수 씨도 부끄러워하는 건가?’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하지수는 소파에 앉아 몰래 송문수를 쳐다보았다.그는 그저 고위직 직원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었다.‘단지 어색해서 그런 건가?’송문수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해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체면을 세우려고 그러는 건가?’하지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크레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관련 부서가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송문수와 하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논의하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새벽 2시가 되었지만 송문수는 아직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까지도 각 부서와 회의를 하면서 협력 계획과 판매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회의가 끝난 후에도 송문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송문수는 그제야 그의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서류든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더 신중해졌고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사인을 했다.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서류를 처리하고 나서야 송문수는 퇴근을 하려고 하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송문수의 기억 속에 하지수는 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많이 피곤한 걸까?’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야
송문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더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송문수가 점점 더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하지수도 그를 더 지지해 주고 싶었고 송문수로 하여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하지수는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노트북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습관처럼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들어갔다.그녀는 비록 알림을 꺼 놓았지만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메시지가 있으면 항상 첫 번째로 확인하곤 했다.그런데 그때, 그룹 채팅에 있는 메시지를 본 하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었다.송문수가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보낸 것이었다.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송문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채팅방에는 여전히 ‘하지수’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문수 씨,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린 거 아니야?”하지수가 물었다.“어?”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수는 송문수 앞에 서서 그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타자를 해놓고 아직 보내지 않은 ‘하지수’도 있었다.송문수도 그제야 자신이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입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이 타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이 온통 하지수로 가득 찬 건 사실이었다.그때, 채팅방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회장님 지금 하 매니저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그걸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보낸 거고?]메시지는 보내지자마자 삭제되었고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도 잘못 보냈네!”그룹 채팅에 두 개의 삭제 기록이 나타났다.송문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제야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하지수’라는 메시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메시지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이
송승우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하지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게 송문수를 고른 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하지수는 송승우의 사무실을 떠나 바로 송문수의 사무실로 갔다.송문수는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회사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유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에도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느님도 부지런한 사람을 도울 거라 믿으며 송문수가 앞으로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형이 뭐라고 했어?”송문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자기 개인 비서로 되어달라고 하더라고.”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송문수랑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최대한 마음을 다할 생각이었다.송문수는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지수가 그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지수가 형 요구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알겠다고 했겠지...’이렇게 생각한 송문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썼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로 결심한 이상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거절했어.”하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문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분명 그녀의 말에 설렌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반면, 하지수는 송문수에게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송문수는 자기한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왜 거절했는데?”송문수가 차분하게 물었다.“문수 씨한테 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수는 웃으며
하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았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어린 시절 그녀는 항상 송승우를 믿었고 그가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었다. 송승우는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송승우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게다가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하지수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송승우는 하지수와 송문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수가 몇 번이나 말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지금은 송문수와 잘 지내고 있고 송승우와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라고 말이다.그리고 송문수가 지금 송씨 그룹의 대리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송문수의 결정이 회사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말이다. 송문수한테 도움이 더 필요했고 송문수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생각이 없는 건가?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거지?’“왜요? 제가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했나요?”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 정말 제대로 일하려고 온 거 맞아요? 아니면 그냥 문수 씨를 못 믿어서 온 건가요? 문수 씨가 회사를 잘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감시하러 온 거냐고요!”“당연히 일하러 온 거죠. 아니면 왜 연구소 일까지 내려놓고 회사로 왔겠어요! 그리고 또...”“아까 지수 씨가 그러셨잖아요. 송문수를 못 믿냐고요. 맞아요. 전 송문수 그 자식 못 믿어요. 송문수가 회사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성과를 하나 냈다고 교만해져서 마음대로 하려 할 겁니다.”“갑자기 드는 생각인데요. 승우 씨는 왜 그렇게 문수 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하지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아니라면 왜 문수 씨를 그렇게 모욕하고 내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겠어...’하지수의 능력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송문수가 회사의 대체적인 상황을 잘 파악한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단지 송문수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재능이 있어서 해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송문수가 매일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하지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지어는 날마다 새벽까지 야근을 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게다가 차에서 보는 서류들도 모두 송씨 그룹과 관련된 문서였다.송문수는 원래 시간만 나면 게임을 하거나 먹고 자고 놀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송문수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된 것 같았다....송문수의 말대로 하지수는 다음 주에 회사로 찾아올 크레지를 위해 연관 업무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송문수와 하지수가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사님들도 점점 두 사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맡긴 업무에 대해 불평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바로 행동에 옮기기만 했다.그러면서 송문수와 하지수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었고 회사도 더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후,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요즘 들어서 그녀는 송문수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송문수는 자주 회사의 전문 용어나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 계획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지수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올 수 있으세요?”그때, 송승우가 갑자기 하지수를 불렀다.하지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송문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네 마음대로 해.”송문수는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질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지수는 속으로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송문수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하지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