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헌은 내일이면 당장 이 아파트에서 쫓겨날 천우진과 더 이상의 실랑이를 벌이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는 앞에 놓인 꼬치구이와 술을 번갈아 먹었다.늦은 시간임에도 창밖은 가로등 등불로 인해 환했다.얼마 후, 천우진은 취기가 조금 올라오는 느낌에 곧장 베란다로 나가서 조금 전 심문헌이 서 있던 자리에 서서 바람을 쐬었다.그는 출장 때문에 낙성에 와본 적은 있어도 유유자적하게 도시를 만끽할 시간이 없었는데 오늘 이렇게 밤공기를 마시면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니 이곳이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취기가 가신 그는 밤바람이 차다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돌려 거실을 보니 심문헌이 이미 술에 취해서는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천우진은 곧장 거실로 들어가서 인사불성이 된 심문헌을 부축했다.곧이어 심문헌은 온몸이 갑자기 허공에 붕 뜬 느낌이 불편한 건지, 악몽을 꾸고 있는 건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불편해.”“조금만 참아요, 침대에 누우면 편안해질 거예요.”심문헌은 침대에 눕자마자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어 헛구역질했다.“욱!”“잠깐만 참아요, 내가 화장실로 데려다줄게요...”“욱!”그러나 심문헌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바닥과 천우진의 옷에 토를 하고 말았다.천우진은 더러워진 옷을 보고 눈을 질끈 감더니 크게 심호흡하고는 물었다.“아직도 속이 울렁거려요?”“아니요.”심문헌은 그의 물음에 간단하게 답한 뒤,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잠이 들어버렸다.천우진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더러워진 옷을 벗어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바닥까지 청소하고 나서 샤워하러 들어갔다.그는 다 씻고 난 뒤에야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걸 발견했고 결국 욕실 선반 위에 놓인 가운을 닥치는 대로 걸쳐 입었다.그 가운은 천우진에게 조금 작긴 해도 못 입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욕실에서 나온 천우진은 심문헌이 침대에 누운 채 셔츠가 불편한지 계속 잡아당기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그에게로 다가가서 셔츠, 바지와 양말을 벗겨주었다.곧이어 그가 심문헌에게 따뜻
천우진은 곧 욕실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놀라 서둘러 들어갔다.그는 다음 순간, 심문헌이 바닥에 벌렁 나자빠진 채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고 나서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을까 봐 걱정했지만, 갑자기 들리는 고른 숨소리에 할 말을 잃었다.‘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욕실 바닥에서 자다니!’천우진은 심문헌을 다시 침대에 눕히려고 안다가 생각을 바꿔 욕조로 향했고 더러워진 그의 몸도 씻겨줬다....다음 날.심문헌은 따스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잠에서 깼고 곧장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온몸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고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게다가 그는 필름이 끊겨서 자기가 어떻게 침대에서 자게 되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서 더욱 괴로웠다.곧이어 몸을 뒤척이던 심문헌은 자기의 등 뒤로 사람의 온도가 느껴지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거야!’조심스럽게 몸을 돌린 후, 등 뒤에 있던 사람의 넓은 등에 선명한 긁힌 자국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내 자기의 입을 틀어막았다.‘어젯밤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곧이어 그는 심호흡하며 자기의 감정을 추스른 뒤, 상대방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일어서서 다가갔다.그러나 옆 사람의 얼굴 대부분이 이불 속에 파묻혀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이불을 들추는 그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자기의 옆에 누워서 자던 사람이 천우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폭발할 것만 같았다.이때 천우진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눈앞에 있는 심문헌을 바라보며 말했다.“좋은 아침이에요.”곧이어 그는 놀란 눈으로 침대에 떨어질 뻔한 심문헌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내가 일어나는 모습이 그렇게 무서운가?’그가 이불을 젖히고 심문헌을 부축하려고 하자, 심문헌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이불 열지 말아요, 보고 싶지 않아요!”천우진은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
천우진은 기지개를 켠 다음 베개를 침대맡에 세우고 기대면서 말했다.“어젯밤 당신이 술에 취해서 말도 아니었어요!”심문헌은 다짜고짜 천우진을 향해 소리쳤다.“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그러나 심문헌의 과장된 반응에 천우진은 어젯밤 자기가 그에게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는데 뭐가 그의 미움을 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게다가 어젯밤 심문헌은 씻겨주는 내내 어린애처럼 반항하면서 천우진의 등을 여기저기 사정없이 긁어놨다.천우진은 심문헌을 한번 훑어보면서 물었다.“아직도 술이 덜 깼어요?””그래요, 나 아직 술이 덜 깼어요. 어젯밤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책임질 필요도 없겠죠?”“...”그 순간, 천우진은 심문헌이 지금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는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다시 말해서 사람을 죽이고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나요?”심문헌은 갑자기 어젯밤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신 것이 후회되었다.“지금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글쎄요?””당신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요. 난 당신의 결혼 생활을 깨뜨릴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까 어젯밤 있었던 일은 없던 걸로 하죠. 나도 그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않을게요.”“하지만 이제 와서 아무것도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죠!”심문헌은 그의 말에 바락바락 화를 냈다.“당신을 위해서 내린 결정인데,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예요?”“사실 내 결혼은 형식적인 결혼일 뿐이에요.”심문헌은 천우진의 충격적인 발언에 엄청나게 놀랐고 눈에는 혐오감으로 가득했다.“뭐라고요? 당신이 사기 결혼을 했단 말이에요?”천우진은 심문헌의 상상력에 혀를 내두르면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사실 내 아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요, 바로 사고로 죽은 내 친한 친구예요. 그녀가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어 친구는 불의의 사고로 친구를 떠났고 난 내 친구의 아이가 완전한 가정
장안시.일주일 동안 마음을 다스린 소이연은 이제 가끔 그 일이 떠오르면 조금의 감정 변화가 생기긴 해도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좋아졌다.그녀가 회사에 출근하자, 직원들은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도 뒤에서 수군댈 뿐 아무런 내색을 하지 못했다.소이연은 곧장 그동안 쌓였던 업무들을 처리한 후, 천우진에게 연락할지 말지 계속 고민했다.사실 그녀는 심문헌과 계속 친구로 남고 싶었기에 그를 위로하러 간 천우진이 일주일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자,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몇 번의 통화음이 울린 후, 천우진이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소이연은 평소와 달리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나른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하며 물었다.“어젯밤 대체 무슨 일을 했길래 아직도 자고 있어요?”“방금 깨났어, 밤을 새운 건 아닌데...”소이연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이번 주 내내 어디 있었던 거예요?”“왜 그래? 무슨 일 있어?”“문헌 씨를 위로해달라는 내 부탁을 잊은 건 아니죠? 설마 서울로 돌아갔어요?”천우진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소이연은 수상함을 감지하고 다시 물었다.“혹시 나한테 숨기는 일이라도 있어요?”그러나 천우진은 그 어떠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그게...”“설마 문헌 씨를 위로해 주러 안 갔어요? 나한테 말이라도 해주지, 오빠가 이렇게... 아, 됐어요. 나도 오빠가 바쁜 거 알아요. 내가 직접 연락해 볼게요.”그녀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락을 끊은 후, 이를 악물면서 심문헌에게 연락했다.곧이어 통화 연결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은 상황에서 심문헌이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이연 씨.”소이연은 문득 심문헌이 그녀가 연락할 걸 예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문헌 씨,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에요.”“...”“난 괜찮아요, 이연 씨는요?”“나도 괜찮아요.”“그게...”심문헌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계속 우물쭈물하면서 옆
심문헌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한 사람과의 인연이 끝난 거였기에 마음속에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아있었다.그날 오후. 상무는 소이연에게 그동안의 업무를 보고했다.“이사님,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뭐죠?”“장안 KPW 쇼핑몰과의 계약이 10월에 만료되어 재계약을 논의하려고 담당자를 찾아갔더니 쇼핑몰이 다른 회사로 인수된 관계로 다음 달 초부터 모든 브랜드의 재입점을 다시 논의한다고 하더라고요.”소이연은 예정에도 없던 돌발상황에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다들 열심히 노력하는 시기에 이게 웬 날벼락이야!’사실 쇼핑몰로서 모든 매장의 재입점을 다시 논의한다는 건 상당한 시간과 인력이 소요되었기에, 설령 백화점이 재인수된다고 해도 이례적인 일이었다.쇼핑몰 대표가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닐 테고, 그렇다고 해서 높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 때문에 모든 브랜드에 똑같은 입찰 조건을 제시하는 규정을 깬다는 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게다가 운하패션 매장은 현재 쇼핑몰의 주력으로 가장 좋은 위치에 있으면서 오프라인 매장이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매출을 유지하고 있었다.소이연은 브랜드가 쇼핑몰에서 큰 매출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미지 효과라는 생각이 들자, 다른 브랜드들이 그 자리를 노렸을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쇼핑몰 담당자와 미팅을 잡아주세요.”“네, 알겠습니다.”상무가 나간 뒤, 소이연은 곧장 KPW 쇼핑몰의 상황과 브랜드 매장 수익 등을 다시 계산하면서 이 지점만은 절대 뺏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잠시 후, 상무는 부랴부랴 그녀의 사무실로 들어오면서 말했다.“이사님, 그쪽에서 계속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내주지 않습니다.”“시간이 없대요?”“이번 주 내내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소이연은 쇼핑몰 측의 반복되는 거절로 보아 운하패션 매장을 다른 브랜드한테 줄 거라는 확신이 더욱 들었다.“쇼핑몰을 새로 인수한 회사와 담당자 정보를 확인해 주세요.”“네.”얼마 지나지 않아, 상무는 그녀가 요구한 자료들
얼마 후, 소이연은 SYX컴퍼니에 들어서자마자 데스크 직원에게 제지당했다.“안녕하세요, 누구를 찾으십니까?”“대표님을 찾아뵈러 왔습니다.”“혹시 사전에 미팅을 잡으셨나요?”“아니요.”“죄송합니다, 사전 예약이 없으면 대표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그녀도 새로 설립된 회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걸 알고 있었고 자기가 무작정 쳐들어간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상냥하게 물었다.“그러면 대표님은 보통 몇 시쯤 퇴근하시나요?”“글쎄요, 일찍 퇴근하실 때도 있으시고, 늦게 퇴근하시거나 심지어 밤을 새우시는 때도 있습니다.”소이연은 문득 이 회사가 짧은 시간 내에 발전할 수 있는 건 대표의 노력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맙습니다.”“아니에요.”소이연이 회사 로비를 떠날 생각이 없자, 상무는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 물었다.“대표님?”“여기서 죽치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방금 데스크 직원이 그 대표가 회사에서 밤을 새울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그러면 우리도 밤을 새우면서 나오기를 기다려야죠.”상무는 업무에 있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절대 그만두지 않는 소이연의 성격을 잘 알기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곧장 로비에 준비된 소파에 앉아 SYX컴퍼니의 대표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들고 온 노트북으로 회사 업무들을 처리했다.한편, 빌딩 꼭대기 층.이명진은 넓고 호화로운 사무실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육현경에게 말했다.“사모님께서 지금 회사 로비에 계신다고 합니다.”육현경은 그의 말에 서명하던 걸 멈추더니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사실 이 모든 건 육현경의 계략이었고, 그는 소이연이 자기를 찾아올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육현경은 이내 이명진에게 지시를 내렸다.“그녀한테 커피와 디저트를 준비해 줘.”이명진은 육현경이 목적을 달성했음에도 왜 그녀를 만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올라오라고 하지 않으실 겁니까?”“일단은 내 말대로
상무도 마찬가지로 이 회사의 대표가 돈만 많은 바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대표님, 계속 기다리실 계획입니까?”소이연은 곧장 시간을 한 번 보더니 SYX컴퍼니의 대표가 정말로 밤을 새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호하게 답했다.“당연하죠.”상무도 울며 겨자 먹기로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밤 11시.이명진은 또다시 육현경의 사무실에 들어가서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아직도 로비에 계신답니다.”육현경은 곧장 그녀의 고집스러운 성격에 웃음을 터뜨렸고, 이명진이 다시 물었다.“계속 기다리게 하실 건가요? 로비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탓에 난방이 잘되지 않아서 지금 엄청나게 추울 겁니다...”이명진은 육현경의 눈빛을 읽고 재빨리 말을 이어 나갔다.“당장 로비의 난방 온도를 높이라고 하겠습니다.”“올라오라고 해.”“정말입니까?”“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해.”“...”“대기실 온도를 잘 조절하고 과일과 따뜻한 우유를 준비해.”“알겠습니다.”이명진은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곧바로 그의 지시를 수행했다.SYX컴퍼니 로비.데스크 직원이 소이연에게 다가와서 공손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 곧 퇴근하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계속 기다리시려면 대기실로 올라가세요. 대표님께서 퇴근 후에 20분 정도 시간을 내어드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소이연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좋아요.”그녀는 드디어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아 부랴부랴 상무를 데리고 대기실로 향했다.대기실은 엄청나게 화려했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추웠던 로비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따뜻했을 뿐만 아니라, 과일과 따뜻한 우유까지 준비되어 있었다.‘너무 자상한 거 아니야?’이때 데스크 직원이 소이연에게 말했다.“마음대로 드셔도 됩니다.”소이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회사의 손님 접대 방식이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대표님은 손해를 보는 게 두렵지 않은가 봅니다?”데스크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소이연은 곧 직원한테 이런
“네, 맞습니다.”육현경은 차분하게 말했다. 소이연은 그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된 듯했다. 소이연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렇게 나를 놀리는 거야? 재미있어?”“오해야. 너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일정이 정말 빡빡하게 잡혀 있었고 네가 갑작스럽게 온 거야.”육현경은 이명진을 불렀다.“일정표를 현경이에게 보여줘.”“오늘 말고.”소이연은 이를 악물고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소이연은 육현경이 오늘 하루 정말로 시간이 없다는 것을 믿었다. 아무래도 새로 설립된 회사가 이렇게 넓은 사업을 확장하는데 바쁘다는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소이연이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육현경, 당신 일부러 쇼핑몰의 입찰을 다시 모집한 거지?”“맞아.”육현경이 인정했다. “당신!”“하지만 너를 대상으로 한 건 아니야.”소이현은 육현경을 지켜보았다. “명진아, 우리 쇼핑몰의 재입찰 계획서를 가져와.”“네.”이명진은 급히 찾아와 숨을 헐떡이며 육현경에게 건넸다. 육현경은 직접 소이현에게 건넸다.“이것이 우리 회사의 재입찰 배경, 분석, 계획 및 효과야. 네가 검토해 봐.”소이현은 육현경을 한번 쳐다보고는 문서를 받아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 문서는 사실상 상업 기밀이었다. 하지만 육현경이 보여주겠다고 한 이상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문서는 재입찰의 이유를 매우 상세히 분석해 놓았다. 재입찰 후에는 쇼핑몰의 개혁도 예정되어 있으며 예상 수익은 기존보다 10% 증가할 것으로 보였다. 이런 이익 가치는 육현경이 이 일을 다시 진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이현은 오랫동안 읽어보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문서를 육현경에게 돌려주었다. 소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가려 했다. “재입찰은 다음 달에 예정되어 있으니 소이현씨도 충분히 준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육현경이 일깨워주었다. 소이현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소이현은 육현경을 다시 돌아보며 물었다. “진짜로 장난치는 거야?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