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하지수에게 말했다.“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저는 먼저 문헌 씨랑 저쪽에 가서 결혼식을 준비할게요.”“네.”“아, 맞아요. 민이는요?”소이연은 갑자기 육민이가 떠올랐다.“조금 전 민이가 천우진 씨와 함께 나가는 걸 봤어요. 아마도 육현경 씨를 만나러 간 것 같은데 제가 한번 확인해 드릴까요?”“네, 고마워요.”소이연과 심문헌은 한쪽으로 걸어갔다.하지수는 전화를 걸어 육민의 행방을 알아봤다.확인한 뒤 소이연에게 말해주려고 찾아갔을 때, 소이연은 이미 사회자와 다시 절차를 정하고 있었다.그 후, 결혼식은 다시 진행되었다.로비의 사람은 일부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이 가지는 않았다.소이연과 심문헌 두 사람은 어찌 됐든 다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라 많은 사람은 다 그들의 체면을 봐주어야 했다.더군다나 신혼부부 두 사람이 계속해도 된다고 하니 다들 더 이상 위험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무대 위에, 소이연과 심문헌은 나란히 서 있었다.아름다운 신부와 멋진 신랑, 참으로 천생연분 같았다.사회자는 센스를 발휘해 다시 현장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끌어올렸다.그러고는 예정된 절차대로 진행해 나갔다.“신랑 심문헌 군, 당신은 소이연 양을 아내로 맞이하시겠습니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 내 몸처럼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도와주고 보호하며 진실한 남편으로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지켜줄 것을 굳게 맹세하십니까?”심문헌은 눈길을 돌려 소이연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소이연을 바라보는 순간, 그의 눈동자는 잠시 멈칫했다.소이연은 분명 마음이 딴 곳에 가 있었다.그녀는 힘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손은 부케를 들고 있었지만 아주 세게 꽉 잡고 있었다.“신랑 군?”심문헌이 대답이 없자, 사회자는 하는 수 없이 귀띔해 주었다.그 순간, 소이연은 그제야 심문헌의 눈길이 줄곧 자기 몸에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심문헌을 보면서 방긋 웃었
“이제 심문헌 군과 소이연 양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사회자는 아주 격앙해서 선포하였다.“신랑은 이제 신부에게 애정을 담아 뽀뽀를 해주시면 되겠습니다.”말이 끝나자, 식장 안에는 열렬한 박수갈채가 울려 퍼졌으며 무대 위에도 아름다운 폭죽이 터졌다.결혼식은 점점 절정에 이르렀다.심문헌과 소이연은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심문헌은 줄곧 소이연을 보고 있었으며 소이연의 두 눈도 그윽하게 심문헌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불빛은 그들의 눈동자를 비추어 반짝반짝 빛나게 했다.“이연 씨.”심문헌은 가볍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네.”“당신은 제 아내가 되어 줄 건가요?”심문헌이 물었다.“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었다.그 누구도 그녀를 강요해 결정을 내리게 할 수 없었다.그녀는 원칙성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후회하지 않겠어요?”“후회 안 해요.”소이연은 고개를 흔들었다.그녀는 심문헌에게 시집을 가면 모든 중점을 두 사람의 가정에 둘 것이었다.그 누구도 그녀의 결정에 영향 끼칠 수 없었다.“하지만 저는 제가 후회할까 봐 두려워요.”심문헌은 씁쓸하게 얘기했다.소이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심문헌을 쳐다보았다.“저는 제가 이연 씨에게 행복한 가정을 줄 수 없을까 봐 두려워요.”“왜요?”소이연은 조금 긴장해졌다.심문헌은 무엇을 하나 다 잘 해내는 그런 사람이었다.그런 심문헌이 두려워하다니 소이연은 믿기지 않았다.“문헌 씨...”“저는 이연 씨가 지금 저를 사랑하려고, 저랑 함께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아요. 하지만 저는 이연 씨가 억울해하는 것을 차마 볼 수는 없어요.”“저는 억울하지 않아요.”“이연 씨가 억울해할까 봐 무서워요.”“문헌 씨, 잠시 진정 좀 하세요.”소이연은 심문헌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뜬금없는 감정을 달래주려고 했다.“문헌 씨와 함께 있어서 저는 행복해요. 저에게 잘해줘서, 너무 잘해줘서 저는 진짜 감동이에요,”“그래서 감동 때문에 저랑 결혼
심문헌은 소이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이연 씨, 나 이제 지쳤어요. 당신은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예요, 그런 당신과 결혼하고 싶었던 마음은 정말로 진심이었고 당신한테 후회하지 않을 완벽한 결혼식도 선사해 주고 싶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무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조금 망설여지네요.”“문헌 씨...”그는 마음을 다해 소이연에게 사과했다.“이연 씨, 정말 미안해요.”사실 소이연도 심문헌이 자기가 여전히 육현경을 사랑하고 있음에도 억지로 결혼식을 진행한다고 믿고 갑작스럽게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기에 순수하고 깨끗한 그의 마음에 더 이상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곧이어 심문헌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 위에 쓴 면사포를 떼어냈다.“내가 멋대로 이렇게 많은 하객 앞에서 결혼을 번복해서 당신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네요, 미안해요.”하객들도 두 사람이 키스해야 할 타이밍에 갑자기 면사포를 벗겨내는 장면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심문헌은 면사포를 손에 꽉 쥐면서 말했다.“난 당신이랑 결혼 못 하겠어요.”소이연은 오히려 이 모든 원인이 그에 대한 자기의 감정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결혼을 동의한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명치가 욱신거렸고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그녀의 눈물에 심문헌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그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얼른 손을 내렸고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한마디 했다.“오늘 결혼식은 없던 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조금 전 벌어졌던 심각한 상황에서도 결혼식을 취소하지 않은 두 사람을 보면서 서로의 감정이 끈끈하다고 여겼던 하객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번복에 너도나도 놀란 토끼 눈을 떴고 장내는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심문헌은 모든 책임을 자
사실 소이연도 우울해진 기분 탓에 다른 것들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았고 스태프들한테 뒤처리를 맡긴 후, 하지수를 따라 조용히 예식장을 빠져나왔다.곧이어 두 사람은 예식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고, 그 차가 예약했던 웨딩카라는 걸 발견한 소이연은 억눌렀던 감정이 다시 터질 것만 같았다.하지수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이연아...”소이연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태연하게 말했다.“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하지수는 소이연과 심문헌이 깊은 감정을 나눈 사이가 아니었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파혼을 당해서 마음이 심란한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는 예수진처럼 행복하지도 않은 결혼 생활을 하는 것보다 낫지 않냐는 팩트를 날릴 수도 없었고, 다른 위로의 말들도 떠오르지 않아 고개만 가로저었다.한편, 소이연은 하지수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채지 못한 채 한참 동안 휴대폰을 들고 망설이다가 천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연아, 의사 선생님께서 현경 씨가 다행히 급소를 다친 게 아니라서 수술이 끝난 후, 일주일 정도 경과를 지켜보다가 퇴원할 수 있다고 했어. 큰 문제가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결혼...”소이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문헌 씨가 결혼을 엎었어요.”“...”그 순간, 전화기 너머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소이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결혼식이 취소돼서 하객들도 돌아갔고 나도 방금 예식장에서 나오는 길이에요, 난...”평소 자기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천우진이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그의 앞에서만큼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천우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연아, 어디로 가고 있어? 현경 씨는 계지원과 예수진한테 맡기면 되니까 내가 지금 당장 너한테로 갈게.”그러나 소이연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난 괜찮아요. 아마 문헌 씨가 더 괴로워하고 있을 거니까 차라리 그한테 가줘요.”천우진
하지수는 곧장 그의 표정 변화를 읽고 말을 이어 나갔다.“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이연이가 충동적인 일을 할 얘도 아니고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예요. 혼자 조용히 있고 싶다고 했으니까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알겠어.”“그런데 나가려던 참이었죠?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빨리 가봐요.”그녀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더니 자기를 바라보는 천우진을 위로하고 수술실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그곳에는 계지원과 예수진이 조바심이 가득한 얼굴로 서서 육현경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예수진은 하지수가 다가오는 걸 발견하고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지수야, 왔어?”“응.”“이연이 결혼식은 어떡하고 여기에 왔어?”“우진 씨가 아무 말도 안 했어?”“응?”“문헌 씨가 결혼식 도중에 파혼 선언을 했어.”“뭐라고?”예수진의 큰 목소리에, 데스크에 있던 간호사들이 일제히 그녀를 바라봤고, 하지수도 놀란 얼굴로 다급히 그녀에게 목소리를 낮추라는 제스처를 했다.“여기 병원이야, 호들갑 떨지 말고 진정해! 그리고 육현경의 수술을 진행하던 의사 선생님이 네 목소리에 놀라 실수하면 어떡해!”“알겠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이연이를 죽을 만큼 사랑하던 문헌 씨가 결혼을 왜 번복해? 이연이가 엎지 않은 게 확실해?”“응. 아마도 이연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고심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아.”“대박!”“넌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나도 기쁠 줄 알았는데 이연이가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화가 나네...”“넌 정말 변덕이 너무 심해! 조금 전까지 이연이를 뭐라고 말하더니 이제 와서 또 마음이 쓰이는 거야?”“그게...”예수진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하게 물었다.“그나저나 이연이는 왜 같이 안 왔어?”“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조금 전에 파혼당한 얘가 무슨 정신으로 여기를 오겠어! 이연이도 사람인데 지금은 혼자
계지원과 하지수는 방금 수술실에서 나온 육현경이 이 소식을 듣고 혈압이 상승할까 봐 걱정했고, 동시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예수진을 바라봤다.육현경도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가 아직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환각이 들린다고 생각하고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곧이어 의료진들은 육현경을 VIP 병실로 옮겼고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설명한 뒤 밖으로 나갔다.병실에는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고, 얼마 뒤, 육현경이 수술을 받는 동안 걱정되는 마음에 소이연이 파혼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복도에 앉아서 수술 결과만을 기다리던 육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사촌 고모, 삼촌이 결혼을 취소했어요? 두 사람이 오늘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요?”예수진은 고개를 숙인 채 소이연과 문자를 주고받다가 육민이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고 물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나서야 답했다.“응, 민이 엄마가 파혼당했대. 그래도 네 엄마는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니까 곧바로 훌훌 털어버릴 거야, 게다가 고모들도 옆에서 위로해 주잖아.”육민이는 사실 속으로 자기의 엄마와 아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들떴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이때, 계지원이 갑자기 심장박동기를 보더니 다급하게 말했다.“현경아, 너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은데...”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고, 계지원은 계속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너 이러면 의사 선생님 다시 부른다.”육현경은 그녀의 결혼 취소 소식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고, 계지원의 놀림이 시작되자, 얼른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예수진도 덩달아 웃으면서 그를 놀렸다.“그렇게 기뻐?”육현경은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감으면서 속으로 연신 심호흡했다.그러나 예수진은 그를 놀리는 데 혈안이 되어 멈출 줄 몰랐다.“소문에 의하면 오늘 문헌 씨가 결혼식 도중에 갑자기 후회된다면서 파혼 선언을 했고, 이연이도 괴로웠는지 곧장 별장으로 돌아갔대. 이연이가 다시 솔로
육민이는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러면 내일 다시 아빠 보러 올게요.”“그래.”계지원을 따라 순순히 병실을 나서는 육민이와 달리, 예수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육현경을 놀려댔다.“나 지금은 이연이랑 절친이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해!”사실 육현경은 겉으로 시크한 척했어도 속으로는 자꾸만 나대는 심장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다.네 사람이 밖을 나간 순간, 그는 참아왔던 숨을 크게 내쉬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기까지 했다.육현경의 머릿속에는 온통 하루빨리 몸을 추슬러서 퇴원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야!’...장안 공항.병원에서 나온 천우진은 심문헌에게 계속 연락하면서 그가 묵었던 호텔, 심씨 가문의 사업처와 신혼집까지 찾아다녔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그가 휴대폰까지 꺼버렸다.수소문 끝에 심문헌의 비행기 탑승 정보를 알아낸 그는 부랴부랴 공항으로 달려갔다.‘상처 한 번 받았다고 부모님께 쪼르르 달려가?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네!’천우진은 주저 없이 공항 VIP 라운지로 들어갔고, 이내 손에 면사포를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안마의자에 앉아 있는 심문헌을 발견했다.사실 천우진은 소이연의 연락을 받을 때부터 심문헌이 그저 그녀와 육현경의 행복을 위해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렸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정말 바보 아니야? 이렇게 사랑하면서 왜 혼자 상처를 떠안으려고 하는 거지?’그는 심문헌에게로 다가갔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아무 말 없이 옆에 조용히 앉았다.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지만,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심문헌은 아직도 천우진이 자기의 옆에 앉아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이때 스튜어디스가 조심스럽게 심문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손님, 비행기에 탑승하실 시간입니다.”심문헌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닦은 후, 앞만 보고 걸어갔고, 천우진도 이 상황이 재밌는지 싱긋 웃더니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비행기에 탑승한 심문헌
심문헌은 갑작스러운 천우진의 등장에 말문이 막혔다.“당신...”이어 그는 천우진이 자기의 흉한 모습을 다 봤을 거라는 생각에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천우진은 그가 뭐 하려는지 예상이라도 한 듯 빠르게 그의 입을 막으면서 말했다.“쉿! 비행기 안에서 떠들면 안 되죠, 조용해요!”그러나 심문헌은 천우진의 모든 행동이 자기를 놀리는 것처럼 느껴져 화가 더욱 치밀어 올랐고 결국 온몸이 떨릴 정도의 힘으로 그의 손바닥을 물어버렸다.천우진은 갑자기 손바닥에서 밀려오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을 뿐,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심문헌은 자기의 입안에서 피 냄새가 진동해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물고 있던 이빨에 힘을 풀었다.하지만 천우진은 자기의 손을 거두지 않고 먼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제 좀 진정이 됐어요?”심문헌이 말없이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진정했으면 됐어요.”얼마 후, 심문헌은 다시 고개를 돌려 천우진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남은 잇자국과 핏자국을 보고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천우진이 자기를 고의로 놀린 것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곧이어 천우진은 냅킨으로 손바닥에 난 핏자국을 깨끗이 닦은 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결국 참다못한 심문헌이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그냥 이렇게 내버려두려고요?”“그렇지 않으면요?”“치료 안 해요?”“피도 별로 나지 않았는데 치료는 무슨, 괜찮아요.”“...”그러나 다음 순간, 천우진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그러면 문헌 씨가 대신 소독해 줄래요?”심문헌은 당황한 나머지 눈까지 희번덕거리며 말했다.“내가 도라에몽인 줄 알아요? 소독약을 왜 가지고 다니겠어요.”“침으로도 소독할 수 있어요.”“천우진 씨, 당신 변태예요?”천우진은 격양된 심문헌의 목소리 때문에 일부 승객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발견하고는 그에게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했다.“쉿!”심문헌은 심호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