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육민을 말을 듣고 침묵했다.그러고 보니 그녀가 매번 심문헌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면 열 번에 아홉은 육현경을 마주쳤다.그녀도 약간 의아했다.육현경은 원래 이렇게 자주 외출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그저 육현경이 병원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그도 그럴 것이 심문헌은 방금 침대에 누웠다가도 밖에 나가려고 온갖 방법을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빠 얼굴에 붕대도 계속 감고 있을 필요가 없었어요. 의사가 몇 번이나 아빠한테 붕대를 풀지 않으면 상처에 환기가 안 돼서 회복하는데 오히려 안 좋다고 했는데 아빠는 붕대를 꼭 감아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빠는 아마도 얼굴의 흉터가 너무 흉해서 엄마가 보면 노랄까 봐 그런 것 같아요.”육민은 진지하게 말했다.소이연은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몰랐다.육현경과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지만 결국 그들 사이는 인연이 부족했다.그래서 그냥 이렇게 지나가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각자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냥 앞으로 멀리 떨어져 각자 갈 길을 가면 된다고 다짐했다.“맞다. 아빠는 또.”“민이야.”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육민의 말을 끊었다.육민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네 아빠의 마음은 엄마도 알아. 하지만 감정은 상호적인 거야. 엄마가 사랑했을 때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을 때는 또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 모든 것이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어.”“하지만.”“미안해 민아.”소이연은 사과했다.“너한테 완전한 가정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가 약속할게. 엄마가 누구와 결혼하든 엄마가 또 아이를 낳아도 민이는 엄마의 인생에서 영원히 대체할 수 없는 존재야.”육민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이때 소이연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보고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엄마 일 해야 해.”“그럼 엄마
그러나 정원으로 가는 길에 계단이 있었다.심문헌은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계단이 조금 높아서 휠체어로 바로 내려가면 휠체어가 넘어질 것 같았다.하지만 일어서자니 주변에 몸을 지지해 줄 만한 물건이 없었다.그렇다고 기어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만약 억지로 계단을 내려갔다가 갈비뼈를 다시 다치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그는 소이연과 빨리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심문헌이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귓가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뭐 하고 있어요?”“악.”심문헌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그의 비명과 동시에 휠체어가 계단 아래로 굴러갔다.곧 그는 자기 몸이 바닥에 나뒹굴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 인영이 갑자기 그의 앞으로 오더니 신속하게 그를 품에 안았고 그의 몸에 떨어지려던 휠체어도 그 사람이 온몸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휠체어는 바로 그 사람이 몸 위로 떨어져 그대로 등에 맞았지만 그 사람은 그 무게를 이겨내며 심문헌의 몸에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심문헌은 깜짝 놀란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서야 아파하고 있는 천우진을 발견했다.하지만 천우진은 이를 꽉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괜찮아요?”심문헌은 긴장하며 물었다.천우진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문허 씨는요?”“난 괜찮아요.”심문헌은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냥 놀랐을 뿐이다.이 순간 그는 천우진의 품에 안겨 있으니 보호를 잘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이때 천우진이 휠체어를 밀어내며 심문헌을 다시 들어 휠체어에 앉혔다.“어디로 가려고요?”천우진이 물었다.“정원에서 바람 좀 쐬려고요.”“다음에 나올 때는 도우미를 불러요.”“다들 바쁜 것 같아서요. 그리고 친하지도 않고.”심문헌은 조금 미안한 듯 말했다.“그럼 날 불러요.”천우진이 말했다.“그쪽이 더 바쁘잖아요.”심문헌은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천우진은 그를 자기 집에 불러놓고 결국 소이연과
심문헌은 그 말을 이해했지만 천우진의 입으로 들으니 조금 불쾌했다.‘아니 내가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지금 날 이렇게 대하는 거야? 설마 내가 천우진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육현경이 임씨 가문을 무너뜨린 것보다 가치가 없다는 거야?’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지만 심문헌은 말하지 않았다.천우진은 심문헌의 기분을 눈치채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육현경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인재예요. 그때 심씨 가문과 싸울 때부터 나는 육현경을 내 곁으로 데려와 일하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후에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은 더욱 불가능해졌죠.”심문헌은 대꾸하지 않았다.‘아니 육현경이 대단한 건 나도 알아. 근데 지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생각 없는 거 아니야?’마침 이때 도우미가 점심 식사를 갖고 왔다.밖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 점심을 먹었다.“밖에서 먹으니까 어때요? 공기도 좋은데.”천우진은 심문헌의 의견을 물었다.“이미 다 준비해 놓고 나한테 묻는 건 뭐예요? 가식인가?”천우진은 웃으며 부인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젠장.”심문헌은 식사하다 말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왜요?”천우진도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나 혼자 먹었어요. 이연이는 어떻게 해요? 그리고 민이는요?”심문헌은 많이 미안한 듯 말했다.천우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그는 심문헌이 사레가 걸리기라도 한 줄 알았다.천우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누나는 아직 일하고 있으니까 다 끝나면 아래층에 내려와서 먹을 거예요. 내가 도우미한테 준비해 두라고 했어요. 그리고 민이는 점심에 병원에 갔으니까 육현경하고 먹을 거예요.”“아.”심문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자기가 방금 별일이 아닌 것에 아주 크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천우진 씨.”심문헌은 갑자기 또 뭔가 생각난 듯싶었다.“왜요?”“내가 이연 씨한테 정식으로 프러포즈해야 할까요?”천우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
“그게 뭐가 같아요?”“일이 잘 끝나지 않으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우리 돈이에요.”소이연은 그를 설득했다.심문헌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이연이 엄숙하게 말했다.“이제는 정말 우리 두 사람의 돈이에요. 예전에는 각자 조금 손해를 보면 끝이지만 이제 같이 손해를 보면 큰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심문헌은 소이연의 말에 조금 설득당했다.“연애 때문에 가문을 망하게 할 수는 없어요.”소이연이 덧붙였다.“그럼 나한테 매일 영상통화 한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당연하죠. 약속할게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언제 가는 거예요?”“지금요.”“소이연 씨.”심문헌은 화가 났다.그와 조금도 함께 있지 않고 이렇게 그가 퇴원하자마자 가버리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회사에서 회의해야 하는데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몇 가지 세부 사항들은 온라인으로 설명하기가 힘들거든요.”“그래도 밥은 먹어야죠?”“알았어요. 그럼 밥만 먹고 갈게요.”소이연이 양보했다.점심을 다 먹은 뒤 소이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다급하게 떠났다.천우진은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민이하고 문헌 씨는 너한테 맡길게.”소이연은 정말 고마워하며 말했다.“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부담 갖지 말고 나한테 맡겨.”“그래. 그럼 나 갈게.”“장안에 도착하면 전화해.”“알겠어.”소이연은 바로 퍼스트 클래스 게이트로 들어갔다.체크인하고 의자에 앉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옆자리에 누군가 왔다.소이연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그 순간 서로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 조금 놀랐다.두 사람 다 침묵하며 마치 모르는 사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진심으로 여기서 육현경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퇴원했지? 그리고 왜 장안에 가는 거야? 민이는 어디 있지?’육민이를 떠올린 소이연은 또 오늘 육민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육민이는 육현경이 일부러
“볼 일이 좀 있거든.”소이연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마음속으로는 천우진보고 육민을 데려와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육민이 홀로 서울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장안에서 일을 다 보면 바로 돌아갈 거니까 육민을 갔다 왔다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 생각을 바로 접었다.“그러면 내가 민이를 데려올...”“그럴 필요 없어.”육현경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이연은 그의 말을 끊었다.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사실 소이연이 자신을 배척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심하게 배척하고 있다는 것을.그는 말없이 일등석의 크고 편안한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고 일부러 몸을 돌려 소이연을 등진 채 자는 척했다.소이연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잡지를 계속 보았다.비행 도중.기내는 줄곧 조용했다.승무원이 기내식을 나눠줄 때도 육현경은 아무 반응 없이 계속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잤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그가 곤히 잠든 줄 알았다.그렇지 않고서 말이 안 되니까.비행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원래 조용하던 기내에 순간 아찔한 비명이 들렸다.평소대로 비행기를 탔으면 모를까.하필 최근에 연달아 여러 개의 항공사고가 벌어져서 지금 이 상황은 누구라도 겁을 먹기 마련이었다.소이연은 원래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그런데 옆자리 여자애의 비명이 너무 험상궂었다.그 여자애는 소리를 지르면서 울어댔다.“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흑흑. 남자 친구가 저를 기다리고 있고 저희 부모님은 자식이 저밖에 없어요... 흑흑...”“아가씨, 아가씨, 괜찮아요. 이건 정상적인 기류... 아...”승무원의 위로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더 강하게 흔들려 모든 사람이 다시 한번 놀라움을 겪었다.이번 흔들림은 조금 전의 흔들림과 달랐는데 마치 비행기가 중력을 잃고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이 추락은 최소한 몇 초 동안 유지되었다.이에 따라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할 수
육현경은 소이연을 귀띔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심지어 비행기가 더 오래... 더 오래 비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는 군침을 삼켰다.심장은 질서 없이 빠르게 뛰었다.한참 지나,비행기는 드디어 착륙했다.착륙하는 순간, 옆자리의 여자애는 또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이제, 이제 다시는 비행기를 안 탈거야. 흑흑...”여자애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이때 소이연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여자애처럼 반응이 크지는 않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소이연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드디어 자신이 육현경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소이연은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육현경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의 손놀림을 민첩하게 눈치채고는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두 사람은 조금 어색해졌다.다행히 비행기는 이미 활주를 끝내어 모든 승객이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소이연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먼저 떠나가 버렸다.육현경은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그는 일부러 소이연과 거리를 두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이 자신을 정말 싫어할까 봐 많이 두려웠다.두 사람은 앞뒤로 비행기에서 내렸다.“아가씨.”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던 여자애였다.“왜 혼자 가세요? 남자 친구는 어쩌고요?”여자애도 앞사람으로 비행기에서 내린 모양이었다.방금 너무 놀라서 1초라도 비행기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그 사람은 저의 남자 친구가 아니에요.”소이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에이, 설마? 그분이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는 게 보였어요. 두 사람 무조건 싸웠나 보네요.”여자애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비록 그분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제가 그때 많이 놀랐었지만, 저는 그분의 눈에서 아가씨에 대한 걱정과 숨길 수 없는
소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차피 만나고 나면 계지원은 다 알 수 있었다.소이연은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이연 씨, 안 기다릴 건가요?”계지원은 약간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현경이가 맞는지 아닌지 안 기다릴 건가요? 비록 저도 속임수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가볼게요”소이연은 무덤덤하게 말하고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계지원은 소이연의 행동이 아무리 봐도 살짝 이상한 것 같았다.아예 안 믿는 건지 아니면...계지원은 심장이 두근거렸다.육현경이 그에게 전화를 건 순간부터 그는 안절부절못했다.예수진에게 알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보다 더 격동할까 봐.계지원은 그냥 그렇게 휠체어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쭉 지켜봐도 육현경이 보이지 않았다.계지원이 자기가 역시나 속았다고 생각하는 그 때 갑자기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저 한 눈 보았을 뿐인데.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진짜 현경이가 맞는 걸까?’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해도 느낌이 너무 비슷했다.그러나 계지원은 여전히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는 바로 다가가서 확인을 취하지 않았다.‘이 세상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루카스라는 모델도 현경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결국 같은 사람이 아니었잖아.’계지원은 마음속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그 남자는 계지원의 휠체어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계지원은 그가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그 남자는 입을 열었다.“작은 삼촌, 오랜만이야.”작은 삼촌이라고 했다.진짜 육현경이었다.목소리, 느낌, 모든 것이 너무 비슷했다.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다 큰 사내인 계지원은 지금, 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종래로 육현경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육현경은 지금 그의 눈앞에 실제로 서 있었다.그는 육현경에게 이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알고 있다고 하니 계지원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육현경은 줄곧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이었다.계지원은 육현경을 장안의 7성급 럭셔리 호텔에 데려다준 후 바로 가버린 것이 아니라 육현경과 함께 로얄 스위트룸에 들어갔다.육현경은 계지원이 보는 앞에서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 내렸다.다 벗어 내리는 순간, 계지원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그는 육현경의 얼굴이... 이렇게 망가졌을 줄 꿈에도 몰랐다.계지원은 하마터면 받아들이지 못했다.“많이 놀랐어?”육현경은 오히려 평온했다.“아니.”계지원이 다급하게 대답했다.“왜 이렇게 된 거야?”“아무튼 안 좋은 일을 겪긴 했어.”육현경은 냉담하게 말했다.“근데 의사한테 이미 다 알아봤어. 성형수술을 하면 회복할 가능성이 크대.”“그래.”계지원이 대꾸했다.그 시각 계지원은 뭘 말해야 할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아플 따름이었다.그는 심지어 육현경이 소이연을 속이려고 하는 것은 그의 이 망가진 얼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나 혼자서도 문제없을 것 같긴 한데... 수술할 때 마취제도 놓아야 하고 수술 중에 무슨 문제라도 생길 경우, 날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의사가 결정을 못 내릴 것 같아서 네가 나랑 같이 가줬으면 좋겠어. 너 요새 바빠?”육현경이 물었다.“안 바빠. 내가 같이 가줄게.”계지원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아무리 바빠도 육현경이 수술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다만.계지원이 물었다.“위험한 수술이야?”“위험하지는 않아. 그냥 만일의 사고를 대비해서 그렇다는 거지.”육현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내일 오전 아홉 시에 장안시 제1 개인 병원에서 전문의와 회진하기로 했어. 그럼, 그때 나랑 같이 가자.”“좋아.”“이제 다른 일은 없으니까, 너도 일찍 들어가서 쉬어. 나도 이제 쉴 거야.”“현경아.”계지원은 육현경을 불렀다.“나한테 이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
그 말에 더 신이 난 송문수는 평소에는 그냥 사진도 찍기 싫어하던 사람이 하지수와 함께 필터가 잔뜩 씌여진 카메라 앞에서 바보같이 웃어 보였다.사진을 다 찍은 두 사람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영화가 시작하기 전이라 하지수는 빠르게 인스타를 올려버렸다.아무 문구도 없이 올려버린 셀카에 하도경이 곧바로 댓글을 달았다.[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니죠?][이 바보같이 웃고 있는 게 진짜 송문수에요?]계지원과 육현경도 이내 좋아요를 눌렀고 예수진은 본인다운 댓글을 달았다.[이젠 남자 친구 생겼다고 나랑은 영화 안 본다는 거지?][송문수 웃는 거 진짜 바보 같긴 하다.][무슨 영화 봐요? 재밌어요?]소이연까지 댓글을 달고 회사 사람들도 수많은 좋아요를 보내며 각양각색의 축하 인사를 해오자 하지수는 깜짝 놀라버렸다.평소에 감명 깊게 본 문구나 올리던 하지수가 갑자기 일상을 올려버리니 사람들의 반응이 폭주해버린 것 같았다.그에 하지수는 답장이라도 하려 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송문수에 핸드폰을 가방에 찔러넣을 수밖에 없었다.“영화 곧 시작하는 데 뭐해?”“아무것도 아니야.”처음에는 송문수와의 데이트라는 생각에 설레어 영화에 집중을 못 했지만 영화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수록 하지수는 점점 그 내용에 깊이 빠져들어 버렸다.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도 넋을 놓고 있었는데 저를 흔드는 송문수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끝났으니까 이제 가자.”차에 올라타서도 아무 말도 안 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왜 영화 보고 나와서 한마디도 안 해?”미간을 찌푸린 채 묻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오히려 본인이 더 따져 묻고 싶었다.누가 데이트하러 나와서 를 보냐고.너도 날 죽일 거냐는 질문을 할 수는 없으니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하지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설마 나도 널 죽일 거냐 뭐 그런 질문이 하고 싶은 거야?”그런데 그때 송문수가 헛
처음에는 그냥 곁눈질로만 보던 송문수는 제 눈에 들어온 낯선 하지수의 모습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그녀의 옷차림에 그의 심장은 빠르게 쿵쾅대기 시작했다.이게 연애라는 건가 싶어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뻘쭘했던 하지수가 물어왔다.“나 별로야?”역시나 이런 여성스러운 원피스는 저한테 안 어울리는 건가 싶어 예수진의 말을 믿은 걸 후회하는 하지수였다.“나 옷 갈아입고... 아!”본인도 이런 착장이 어색해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송문수가 하지수의 팔을 잡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릴 것만 같아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문수 씨, 왜 그래?”제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며 물어오는 하지수를 바라본 송문수는 그녀와 한참 동안 시선을 맞추다가 말했다.“나 못 참을 것 같아.”“응?”“못 참겠어.”의문문이 서술문으로 바뀌는 순간, 둘의 상황도 완전히 변해버렸다.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안 그래도 괴로웠는데 치마까지 입으며 자신을 유혹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영화 보러 안 가?”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하는 그녀의 모습조차 예뻐 보였던 송문수는 그딴 영화는 개나 줘버리고 그저 그녀의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망할 놈의 생리 때문에 또 한 번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이 상황이 죽을 만큼 힘들었던 송문수는 예전에 누렸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벌을 이렇게 받는 건가 싶기도 했다.“가자.”“나가자 이제.”송문수와의 키스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더 있다가는 그가 이성을 잃고 자신을 덮쳐 피가 사방으로 흐르게 될까 봐 하지수는 그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잠깐만.”“왜?”하지만 송문수는 허리에 두른 팔을 풀 생각이 없는지 괜히 시간을 끌며 하지수 쪽으로 점점 더 다가갔다.훅 들어온 얼굴 공격에 볼이 빨개진 하지수는 속으로
핸드폰을 돌려받은 송문수가 아무런 해명도 없이 바로 방에 들어가 버리자 혼자 남은 하지수는 화해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다시 전처럼 쌀쌀맞게 구는 송문수에 고민 상담이라도 하려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다들 바빠요?]한참 지나서 소이연이 답장을 보내왔다.[아니요, 왜 그래요 지수 씨?]어젯밤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왜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던 하지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키보드를 켠 채 고민만 하고 있었다.[지수 씨?][왜 그래 지수야?]예수진까지 답장을 보내오자 하지수는 그냥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말해버렸다.[문수 씨가 또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그에 예수진은 토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고 소이연도 물음표 하나를 보내왔다.[문수 씨도 오늘 출근 안 하니까 같이 시간 좀 보내려고 했거든. 그런데 밥 먹을 때도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거야. 누구랑 얘기하는지 가끔가다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자가 너무 많이 와서 내가 핸드폰 전해주려고 잠깐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한테 소리치는 거 있지? 다른 여자랑 문자 하는 거 내가 볼까 봐 그런 사람처럼 너무 이상하잖아.]하지수가 말한 다른 여자들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이었기에 소이연과 예수진은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나마 반응이 빠른 예수진이 빠르게 소이연에게 개인 톡을 보냈다.[지수가 문수를 오해한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요?][잠깐만요, 일단 너무 충동적으로 그러진 말아요 우리.][문수 씨가 서프라이즈 하려고 얼마나 많이 신경 썼는데 우리가 이렇게 스포 해버리면 엄청 화낼 거에요.][그럼 어떡해요? 지수 울 것 같은데.][그냥 문수 씨한테 주의하라고 알려주죠?][아무튼 송문수는 진짜 바보라니까요.]화끈한 성격답게 욕부터 내뱉은 예수진은 셋이 함께 있는 단톡방 안에서 송문수에게 따로 주의를 주고는 다시 아까의 톡방으로 돌아가 하지수도 위로해주었다.그렇게 하지수가 한창 예수진과 소이연한테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
혼자 술을 마시던 하도경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먼저 나가떨어져 버린 셋을 비웃고 있었다.아무래도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던 사람들이라 주량이 턱없이 약한 것 같았다.알딸딸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도경은 몸은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정신줄은 잡고 있어 다행히 두 발로 걸을 수는 있는 정도였다.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하도경은 예수진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미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같아 그저 밖으로 나갔다.자신이 예수진을 완전히 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처도 무뎌지니 전만큼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온 하도경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술기운까지 더해져 잠에 들려던 찰나, 둘둘씩 짝을 지어 제 앞을 벗어나던 친구들이 떠올랐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씩씩거렸다.여자친구 있는 게 별것도 아닌데 혼자만 없으니 괜히 더 서러운 것 같았다....다음날, 효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진은 원활한 교류를 위해“비밀작전팀”이라는 단톡방을 개설했는데 거기에 소이연과 송문수를 초대하고 아침부터 문자를 쉴 새 없이 보내고 있었다.예수진이 보내온 로맨틱한 프러포즈 장소가 하도 많아 송문수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뭐가 이렇게 많아? 그냥 하나로 통일하면 안 돼? 나 이거 다하다가는 힘들어서 죽어.][누가 다하래? 여기서 고르라고.][조금 복잡하긴 하네요.]송문수가 어이없어하자 소이연이 나서서 정리하기 시작했다.[일단 셋 다 별로인 것부터 빼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로 몇 개만 추려보죠.][난 이연 씨말에 동의, 역시 이연 씨가 나서야 좀 믿음이 간다니까요.][송문수, 너 말 똑바로 안 하면 나 여기 나간다?][아, 미안해. 그놈의 성질 진짜.]예수진 앞에서는 늘 기고 들어가야 했던 송문수는 이번에도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계획 빨리 짜고 프러포즈에 필요한 도구
송문수가 나간 뒤 예수진은 계지원의 얼굴이라도 닦아주려고 수건을 가지러 가려 했는데 그 순간 갑자기 몸을 일으킨 계지원에게 손목이 잡혀버렸다.“수진아.”“깼어? 머리는 안 아파? 오늘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안 아파, 나 안 취했어.”걱정스런 아내의 질문에 계지원이 태연하게 답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진짜?”“응.”“그럼 연기였어?”“응.”“친구들 상대로 너무 한 거 아니야 당신?”“내가 취하면 너는 누가 챙겨? 배도 점점 불러오는데.”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계지원에 감동한 예수진은 잔뜩 부른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물었다.“그럼 나 걱정돼서 그만 마신 거야?”“당연하지, 너 말고 내가 걱정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진 예수진은 큰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말했다.“내가 애만 낳으면 당신이랑 당신 친구들이랑 밤새 같이 술 마셔 줄게.”“...”거실에 남은 송문수와 하도경은 때를 모르고 술을 마시고 있었지만 하지수는 취하기 전에는 그만두지 그들을 알기에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하지만 소이연도 떠나고 예수진도 남편을 돌보러 들어가 버리니 심심했던 그녀는 영화나 찾아볼까 싶어 리모컨을 들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지수 씨, 문수 취한 것 같은데요?”이미 테이블에 엎어져 버린 송문수는 그 와중에 하도경의 말을 들은 건지 갑자기 중얼거렸다.“나 안 취했어, 아직 더 마실 수 있다고. 하도경, 내가 오늘 너보다 먼저 취하면 나 이제 송문수가 아니야.”딸꾹질을 하면서도 오기를 부리는 송문수에 하도경이 그를 밀어내며 대꾸했다.“술도 못 마시면서 뭐 날 이긴다고 난리야, 너 한 10년은 연습해야겠다.”“너 나 무시하냐?”하도경의 말에 발끈한 송문수가 제대로 앉아보려 했지만 이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진 채 눈을 끔뻑이며 술잔을 찾아 헤맸다.“문수 씨 취했어, 이제 그만 가자.”힘겹게 송문수를 일으켜 세우던 하지수는 하도경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물었다.“도경 씨는
친구인 계지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물어볼 게 있다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일단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해.”“뭔데 그래?”“나 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하려고.”망설임 없이 말하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송문수가 하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를 하다니, 예수진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표정은 왜 그래, 내가 프러포즈한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저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바로 입을 다물며 물었다.“너 진심이야?”“당연하지.”“진짜 지수랑 잘살아 보려고?”“응.”“밖에 나가서 이상한 짓도 안 하고?”도무지 송문수를 믿을 수 없었던 예수진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안 한다니까.”“어떻게 장담하는데.”“어떻게 하면 믿을래?”“남자들이 하는 말은 믿는 게 아니랬어.”제가 무슨 말을 해도 예수진이 믿지 않을 것 같아 송문수는 한숨을 쉬며 큰 용기를 내어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다.“나 감옥에서 나온 뒤로 여자들 만난 적 없어.”“뭐?”“그러니까 지수랑 우연히 한 거 말고는 여자 만져본 적도 없다고.”“진짜?”“내가 뭐하러 널 속여.”“그럼 맹세해, 거짓말하면 평생 남자 구실 못하는 거야.”자꾸 되묻는 것도 슬슬 짜증 나는데 저런 말까지 하는 예수진에 송문수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못하겠어?”“한다 해, 내가 한 말 다 진짜고 만약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난 이제 남자 아니야.”“대박이다, 송문수.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송문수가 맹세를 하자마자 예수진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 좀 도와줘. 전에 지수가 나랑 결혼한 건 지수를 위한 결혼이 아니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지수가 마음에 들어 할만한 결혼식을 하고 싶어.”“진작 그랬어야지.”“나는 이런 쪽엔 워낙 소질이 없잖아, 낭만적인 것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생각 좀 해줘.”송문수는 멋쩍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