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은.”“됐어요.”천우진은 이미 심문헌을 차에 내려주었다.심문헌은 왠지 모르게 화가 치밀었다.소이연은 두 사람의 케미를 쭉 지켜보았다.‘내 눈이 잘못된 건가? 뭔가 느낌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데?’“이연 씨.”심문헌이 그녀를 불렀다.“네.”그제야 소이연은 다급하게 정신을 차렸다.그녀는 자기 생각이 너무 순수하지 못하다가 자책했다.차는 진씨 가문에 도착했고 먼저 심문헌을 방에 데려다주었다.모든 규칙을 알려준 다음에 소이연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그동안 그녀는 대부분 자택 근무를 하고 있었다.좀 이따가 또 화상 회의가 있었다. 그녀는 먼저 오늘 회의 내용을 살펴본 뒤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게 정리해야 했다.마침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고개를 들어보니 육민이 조심스럽게 커피를 들고 방에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그동안 그녀가 심문헌을 돌보느라 육민과 함께 할 시간이 거의 없었다.지금 이런 육민의 모습을 보니 소이연은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그녀가 육민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은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전에 그녀는 육현경에게 절대로 육민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육민에게 소홀해지고 있었다.“엄마. 아직도 바빠요?’육민은 커피를 그녀의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물었다.“고마워.”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반 시간 뒤에 화상 회의가 있어.”“그럼 엄마 방해하지 않을게요.”육민은 다정하게 말했다.“민아. 엄마한테 할 얘기 있는 거 아니야?”소이연이 물었다.육민은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회의까지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앉아 봐.”소이연은 다급하게 의자를 갖고 와 육민을 그녀의 옆에 앉혔다.“나 그동안 아빠하고 시간을 보냈어요.”육민이 말했다.“응 엄마도 알아. 아빠는 회복이 잘 되고 있어?”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녀는 육민이 부모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소이연은 육민을 말을 듣고 침묵했다.그러고 보니 그녀가 매번 심문헌을 데리고 산책하러 나가면 열 번에 아홉은 육현경을 마주쳤다.그녀도 약간 의아했다.육현경은 원래 이렇게 자주 외출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그저 육현경이 병원에 있는 것이 답답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그도 그럴 것이 심문헌은 방금 침대에 누웠다가도 밖에 나가려고 온갖 방법을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빠 얼굴에 붕대도 계속 감고 있을 필요가 없었어요. 의사가 몇 번이나 아빠한테 붕대를 풀지 않으면 상처에 환기가 안 돼서 회복하는데 오히려 안 좋다고 했는데 아빠는 붕대를 꼭 감아야 한다고 고집했어요.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빠는 아마도 얼굴의 흉터가 너무 흉해서 엄마가 보면 노랄까 봐 그런 것 같아요.”육민은 진지하게 말했다.소이연은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말 몰랐다.육현경과 이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했지만 결국 그들 사이는 인연이 부족했다.그래서 그냥 이렇게 지나가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더 이상 그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각자 살아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냥 앞으로 멀리 떨어져 각자 갈 길을 가면 된다고 다짐했다.“맞다. 아빠는 또.”“민이야.”소이연은 어쩔 수 없이 육민의 말을 끊었다.육민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네 아빠의 마음은 엄마도 알아. 하지만 감정은 상호적인 거야. 엄마가 사랑했을 때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고. 아빠가 엄마를 사랑했을 때는 또 엄마가 아빠를 사랑하지 않았어. 그 모든 것이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걸 증명해 주고 있어.”“하지만.”“미안해 민아.”소이연은 사과했다.“너한테 완전한 가정을 줄 수 없어서 미안해. 하지만 엄마가 약속할게. 엄마가 누구와 결혼하든 엄마가 또 아이를 낳아도 민이는 엄마의 인생에서 영원히 대체할 수 없는 존재야.”육민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이때 소이연의 핸드폰이 울리는 것을 보고 작은 입술을 깨물었다.“엄마 일 해야 해.”“그럼 엄마
그러나 정원으로 가는 길에 계단이 있었다.심문헌은 시도해 보려고 했지만 계단이 조금 높아서 휠체어로 바로 내려가면 휠체어가 넘어질 것 같았다.하지만 일어서자니 주변에 몸을 지지해 줄 만한 물건이 없었다.그렇다고 기어 내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만약 억지로 계단을 내려갔다가 갈비뼈를 다시 다치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그는 소이연과 빨리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심문헌이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귓가에서 한 목소리가 들렸다.“뭐 하고 있어요?”“악.”심문헌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깜짝 놀랐다.그의 비명과 동시에 휠체어가 계단 아래로 굴러갔다.곧 그는 자기 몸이 바닥에 나뒹굴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한 인영이 갑자기 그의 앞으로 오더니 신속하게 그를 품에 안았고 그의 몸에 떨어지려던 휠체어도 그 사람이 온몸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휠체어는 바로 그 사람이 몸 위로 떨어져 그대로 등에 맞았지만 그 사람은 그 무게를 이겨내며 심문헌의 몸에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심문헌은 깜짝 놀란 마음을 안정시키고 나서야 아파하고 있는 천우진을 발견했다.하지만 천우진은 이를 꽉 깨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괜찮아요?”심문헌은 긴장하며 물었다.천우진은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문허 씨는요?”“난 괜찮아요.”심문헌은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냥 놀랐을 뿐이다.이 순간 그는 천우진의 품에 안겨 있으니 보호를 잘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마음이 복잡했지만 그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이때 천우진이 휠체어를 밀어내며 심문헌을 다시 들어 휠체어에 앉혔다.“어디로 가려고요?”천우진이 물었다.“정원에서 바람 좀 쐬려고요.”“다음에 나올 때는 도우미를 불러요.”“다들 바쁜 것 같아서요. 그리고 친하지도 않고.”심문헌은 조금 미안한 듯 말했다.“그럼 날 불러요.”천우진이 말했다.“그쪽이 더 바쁘잖아요.”심문헌은 왠지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천우진은 그를 자기 집에 불러놓고 결국 소이연과
심문헌은 그 말을 이해했지만 천우진의 입으로 들으니 조금 불쾌했다.‘아니 내가 그래도 생명의 은인인데. 지금 날 이렇게 대하는 거야? 설마 내가 천우진의 목숨을 구해줬는데 육현경이 임씨 가문을 무너뜨린 것보다 가치가 없다는 거야?’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지만 심문헌은 말하지 않았다.천우진은 심문헌의 기분을 눈치채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육현경은 내가 아주 존경하는 인재예요. 그때 심씨 가문과 싸울 때부터 나는 육현경을 내 곁으로 데려와 일하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 후에 많은 일이 있었고 지금은 더욱 불가능해졌죠.”심문헌은 대꾸하지 않았다.‘아니 육현경이 대단한 건 나도 알아. 근데 지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너무 생각 없는 거 아니야?’마침 이때 도우미가 점심 식사를 갖고 왔다.밖에 있는 테이블에 놓고 점심을 먹었다.“밖에서 먹으니까 어때요? 공기도 좋은데.”천우진은 심문헌의 의견을 물었다.“이미 다 준비해 놓고 나한테 묻는 건 뭐예요? 가식인가?”천우진은 웃으며 부인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젠장.”심문헌은 식사하다 말고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왜요?”천우진도 그 모습을 보고 놀랐다.“나 혼자 먹었어요. 이연이는 어떻게 해요? 그리고 민이는요?”심문헌은 많이 미안한 듯 말했다.천우진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그는 심문헌이 사레가 걸리기라도 한 줄 알았다.천우진은 담담하게 말했다.“누나는 아직 일하고 있으니까 다 끝나면 아래층에 내려와서 먹을 거예요. 내가 도우미한테 준비해 두라고 했어요. 그리고 민이는 점심에 병원에 갔으니까 육현경하고 먹을 거예요.”“아.”심문헌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자기가 방금 별일이 아닌 것에 아주 크게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천우진 씨.”심문헌은 갑자기 또 뭔가 생각난 듯싶었다.“왜요?”“내가 이연 씨한테 정식으로 프러포즈해야 할까요?”천우진은 입술을 오므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담담
“그게 뭐가 같아요?”“일이 잘 끝나지 않으면 결국 손해 보는 건 우리 돈이에요.”소이연은 그를 설득했다.심문헌이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소이연이 엄숙하게 말했다.“이제는 정말 우리 두 사람의 돈이에요. 예전에는 각자 조금 손해를 보면 끝이지만 이제 같이 손해를 보면 큰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심문헌은 소이연의 말에 조금 설득당했다.“연애 때문에 가문을 망하게 할 수는 없어요.”소이연이 덧붙였다.“그럼 나한테 매일 영상통화 한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당연하죠. 약속할게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언제 가는 거예요?”“지금요.”“소이연 씨.”심문헌은 화가 났다.그와 조금도 함께 있지 않고 이렇게 그가 퇴원하자마자 가버리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회사에서 회의해야 하는데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몇 가지 세부 사항들은 온라인으로 설명하기가 힘들거든요.”“그래도 밥은 먹어야죠?”“알았어요. 그럼 밥만 먹고 갈게요.”소이연이 양보했다.점심을 다 먹은 뒤 소이연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다급하게 떠났다.천우진은 그녀를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다.“민이하고 문헌 씨는 너한테 맡길게.”소이연은 정말 고마워하며 말했다.“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부담 갖지 말고 나한테 맡겨.”“그래. 그럼 나 갈게.”“장안에 도착하면 전화해.”“알겠어.”소이연은 바로 퍼스트 클래스 게이트로 들어갔다.체크인하고 의자에 앉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옆자리에 누군가 왔다.소이연은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그 순간 서로 옆에 앉은 사람을 보고 조금 놀랐다.두 사람 다 침묵하며 마치 모르는 사이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진심으로 여기서 육현경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병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퇴원했지? 그리고 왜 장안에 가는 거야? 민이는 어디 있지?’육민이를 떠올린 소이연은 또 오늘 육민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육민이는 육현경이 일부러
“볼 일이 좀 있거든.”소이연은 담담한 말투로 대답했다.마음속으로는 천우진보고 육민을 데려와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육민이 홀로 서울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이 있을까 봐 걱정되었다.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어차피 장안에서 일을 다 보면 바로 돌아갈 거니까 육민을 갔다 왔다가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그 생각을 바로 접었다.“그러면 내가 민이를 데려올...”“그럴 필요 없어.”육현경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이연은 그의 말을 끊었다.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사실 소이연이 자신을 배척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심하게 배척하고 있다는 것을.그는 말없이 일등석의 크고 편안한 의자에 머리를 기대었고 일부러 몸을 돌려 소이연을 등진 채 자는 척했다.소이연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잡지를 계속 보았다.비행 도중.기내는 줄곧 조용했다.승무원이 기내식을 나눠줄 때도 육현경은 아무 반응 없이 계속 의자에 기대어 잠을 잤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은 그가 곤히 잠든 줄 알았다.그렇지 않고서 말이 안 되니까.비행기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원래 조용하던 기내에 순간 아찔한 비명이 들렸다.평소대로 비행기를 탔으면 모를까.하필 최근에 연달아 여러 개의 항공사고가 벌어져서 지금 이 상황은 누구라도 겁을 먹기 마련이었다.소이연은 원래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그런데 옆자리 여자애의 비명이 너무 험상궂었다.그 여자애는 소리를 지르면서 울어댔다.“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흑흑. 남자 친구가 저를 기다리고 있고 저희 부모님은 자식이 저밖에 없어요... 흑흑...”“아가씨, 아가씨, 괜찮아요. 이건 정상적인 기류... 아...”승무원의 위로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비행기가 갑자기 더 강하게 흔들려 모든 사람이 다시 한번 놀라움을 겪었다.이번 흔들림은 조금 전의 흔들림과 달랐는데 마치 비행기가 중력을 잃고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이 추락은 최소한 몇 초 동안 유지되었다.이에 따라 그럭저럭 평정심을 유지할 수
육현경은 소이연을 귀띔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심지어 비행기가 더 오래... 더 오래 비행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는 군침을 삼켰다.심장은 질서 없이 빠르게 뛰었다.한참 지나,비행기는 드디어 착륙했다.착륙하는 순간, 옆자리의 여자애는 또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이제, 이제 다시는 비행기를 안 탈거야. 흑흑...”여자애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이때 소이연도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여자애처럼 반응이 크지는 않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소이연은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마음을 조금 가라앉혔다.그리고 바로 그 순간, 드디어 자신이 육현경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소이연은 손가락을 살짝 움직여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육현경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의 손놀림을 민첩하게 눈치채고는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두 사람은 조금 어색해졌다.다행히 비행기는 이미 활주를 끝내어 모든 승객이 비행기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소이연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먼저 떠나가 버렸다.육현경은 조금 느리게 움직였다.그는 일부러 소이연과 거리를 두었다.육현경은 소이연이 자신을 정말 싫어할까 봐 많이 두려웠다.두 사람은 앞뒤로 비행기에서 내렸다.“아가씨.”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던 여자애였다.“왜 혼자 가세요? 남자 친구는 어쩌고요?”여자애도 앞사람으로 비행기에서 내린 모양이었다.방금 너무 놀라서 1초라도 비행기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그 사람은 저의 남자 친구가 아니에요.”소이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에이, 설마? 그분이 아가씨를 정말 좋아하는 게 보였어요. 두 사람 무조건 싸웠나 보네요.”여자애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비록 그분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제가 그때 많이 놀랐었지만, 저는 그분의 눈에서 아가씨에 대한 걱정과 숨길 수 없는
소이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어차피 만나고 나면 계지원은 다 알 수 있었다.소이연은 몸을 일으켜 떠나려고 했다.“이연 씨, 안 기다릴 건가요?”계지원은 약간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현경이가 맞는지 아닌지 안 기다릴 건가요? 비록 저도 속임수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가볼게요”소이연은 무덤덤하게 말하고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계지원은 소이연의 행동이 아무리 봐도 살짝 이상한 것 같았다.아예 안 믿는 건지 아니면...계지원은 심장이 두근거렸다.육현경이 그에게 전화를 건 순간부터 그는 안절부절못했다.예수진에게 알릴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보다 더 격동할까 봐.계지원은 그냥 그렇게 휠체어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그러나 쭉 지켜봐도 육현경이 보이지 않았다.계지원이 자기가 역시나 속았다고 생각하는 그 때 갑자기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그저 한 눈 보았을 뿐인데.피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진짜 현경이가 맞는 걸까?’아무리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해도 느낌이 너무 비슷했다.그러나 계지원은 여전히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는 바로 다가가서 확인을 취하지 않았다.‘이 세상에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루카스라는 모델도 현경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결국 같은 사람이 아니었잖아.’계지원은 마음속으로 숨을 깊게 들이쉬면서 자신을 진정시켰다.그 남자는 계지원의 휠체어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계지원은 그가 웃는 것처럼 느껴졌다.그 남자는 입을 열었다.“작은 삼촌, 오랜만이야.”작은 삼촌이라고 했다.진짜 육현경이었다.목소리, 느낌, 모든 것이 너무 비슷했다.다른 사람일 리가 없다.다 큰 사내인 계지원은 지금, 이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그는 종래로 육현경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육현경은 지금 그의 눈앞에 실제로 서 있었다.그는 육현경에게 이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
만약 하지수가 송승우의 교통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가 그런 하지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나 있을지 송문수는 지금 모든 게 미지수였다.송승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정말 친오빠처럼 생각했던 하지수는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서울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해 있대.”“나 서울 가야겠어.”“그래요 여보.”마침내 정신을 차린 허영지가 입을 열자 송기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갈 거면 다 같이 가야죠. 오늘 파티는 일다 취소하죠.”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문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파티장 취소할 테니까 지수 너는 서울 가는 티켓이랑 차량 좀 준비해줘.”“알겠어.”이미 혼이 반쯤 나간 부모님을 모시려면 본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하지수는 바로 기사에게 연락하며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그리고는 한 시간 뒤에 출발인 항공편까지 끊어놓았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송문수는 서둘러 파티를 취소하고 있었는데 직원을 시켜 손님들께 나중에 아버지와 직접 찾아뵙고 취소이유를 말씀드리고 사과까지 드린다는 말도 전하게 했다.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송문수는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느라 바삐 돌아치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하지만 다들 송승우를 걱정하고 있어서 확 달라진 송문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린 송씨 일가는 바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나와 있던 송승우의 동료가 그들을 맞아주었다.“아주머니, 아저씨 오셨어요? 저는 승우 형 직장 동료 이찬혁이라고 합니다. 형은 안에서 수술 중이에요.”“우리 아들 많이 심한가요 지금?”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걱정을 멈출 수 없었던 송기명이 이찬혁을 붙잡고 묻자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저도 좀 전에 연락받고 온 거라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몰라요. 형이 실려 올 때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도...”
문자를 본 허영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사모님,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왜 그러십니까?”특종을 잡은 것마냥 달려드는 기자들에 송씨 일가 사람들도 다 같이 허영지를 주목했다.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그를 보며 송기명이 물었다.“여보, 왜 그래요?”아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시울만 붉히고 있자 조급해 난 송기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엄마, 무슨 일 있어요?”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긴장한 채로 물어왔지만 허영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그에 미간을 찌푸린 송문수는 아직 켜져 있는 엄마의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는데 그 역시 문자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송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핸드폰으로 뭘 봤길래 사모님이 저러시는 겁니까?”기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그는 바로 허영지의 핸드폰을 들고 기자회견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 한 말씀 해주세요!”하지만 그런 무시에도 굴하지 않는 기자들이 송문수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시작했다.송문수의 표정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챈 하지수도 입술을 말아 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복도로 나오자 송문수는 이미 통화 중이었는데 통화가 거듭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송문수의 표정이 저 정도로 굳어있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뜻이었다.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본 적 없던 표정이라 하지수는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음주운전으로 잡혀갈 때도 침착하기만 하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하지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은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갔다.밖으로 나온 허영지와 송기명도 그저 장난 전화이길 바라며 송문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
“오해 아닙니다, 전에는 저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변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송 회장님의 입원 때문입니까?”“제 우상이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도 하나의 이유죠. 제 눈에 아버지는 늘 이 집안을 지키는 영웅이셨고 절대 늙지도 않을 것 같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니까 그때 이 집안을 책임질 사람은 저뿐이더라고요.”이젠 다 커서 자신의 고초도 이해해주는 어엿한 아들을 보며 송기명은 아주 감동스러워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아내인 하지수 씨입니다.”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모든 카메라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갑작스러운 이목에 놀랄 새도 없이 송문수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아내가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회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밤을 새우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던 사람입니다. 성격 안 좋은 저를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면서 제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를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진짭니까?”“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저희 사이좋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철이 없어서 아내한테 상처 주는 일도 많이 해서 사이가 위태로웠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지금 혹시 사모님한테 고백하시는 겁니까?”기자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붉히는 송문수를 보며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파파라치한테 찍힐 때도 이미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까지 휘두르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쑥스러움이 많아졌나 싶어 다들 당황해하고 있는데 하지수는 그의 모습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그간의 이상하던 태도와 관계를 피했던 이유도 더 이상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송승우 씨는 왜 오지 않으신 겁니까, 오늘은 불참하시나요?”“두 분은
화장을 마치고 머메이드 드레스로 갈아입은 하지수는 불빛 아래에서 더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며 아무래도 자신이 허영지를 가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송문수를 불러보았다.“문수 씨, 이게 진짜 괜찮다고?”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한 질문이었지만 송문수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 이거 네 거 맞다니까.”“진짜 어머님이 준비하신 거 맞지?”“너 나 안 믿을 거야?”송문수가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하지수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입을게.”정말 허영지의 뜻이라면 하지수도 걱정할 게 없었다.사실 평소 하지수에게 검소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허영지였기에 그녀가 이런 드레스를 준비했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이번 기회에 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인가보다 하며 하지수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가자 이제.”“엄마가 인터뷰 있다고 빨리 오래. 사진도 찍어야 한대.”“그래.”차에 탄 뒤에도 송문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리를 덜덜 떨며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하지수가 그를 부르자 송문수는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문수 씨.”“어?”“더워?”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차 안에서도 땀을 흘리는 게 이상해서 한 질문인데 송문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아니.”“땀 나는데?”“그래?”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던 송문수가 또 말을 바꾸자 하지수는 그를 수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좀 더운 것 같기도 해.”“오늘 왜 이래? 당신 좀 이상한 것 같아.”“아무것도 아니야.”송문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하지수가 아니었다.“어디 아파?”“그럴 리가, 나 소처럼 건강한 남자야, 병도 잘 안 걸린다고.”“...”누가 봐도 오바하는 것 같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싶어 하지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매체들에서는 더 빨리 와 있었기에 기자들과 송기명, 허영지 모두 그들 부
아침 일찍 디자이너를 불러 단장을 마친 송기명과 허영지는 나이 들면 가만히 잊지 못한다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른 시간부터 호텔로 향했다.그리고는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차피 송문수는 전화를 잘 받지 않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하지수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이미 습관처럼 몸에 배 있었다.좀 전에 일어나서 스타일링을 받고 있던 하지수는 시부모님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네, 저희 일어났어요. 문수 씨는 씻고 있고 저는 화장하고 있어요.”“네, 먼저가 계시면 저희도 금방 갈게요. 8시 전엔 도착할 거에요.”통화를 마친 하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본인이 주인공도 아닌데 화장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았다.게다가 원래는 송문수와 커플룩으로 어머니께서 맞춰주신 복고풍 드레스를 입기로 했으니 어찌저찌 의상을 수정하다 보니 오늘 입어야 할 건 민소매인 머메이드 드레스가 되어버렸다.예쁘긴 예쁘지만 꾸민 티가 너무 많이 나서 고민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불렀다.“문수 씨, 나 진짜 이거 입어? 이거 어머니가 골라주신 것도 아닌데...”오늘 아침은 하지수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 송문수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있었다.그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하지수는 제 옆에 없는 송문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출근할 때도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서야 화를 내며 일어내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60세 생일파티라 신경을 쓰는 건가 싶어 하지수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었다.“뭐라고?”그런데 제가 한참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낸 송문수가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자 하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오늘 뭐 발언이라도 할 거야?”“아니, 왜?”“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해?”“내, 내가? 아, 아니야! 그럴 리가!”“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송문수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고 하지수는 또
아내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괜히 사람을 붙였다가 제 프러포즈를 망칠까 봐 겁났던 송문수는 결국 자신이 소이연, 예수진과 함께 꾸미는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러자 친구들의 놀림은 당연했고 육현경과 계지원은 임신한 사람을 부려먹는다고 구박까지 했지만 프로젝트가 이미 막바지에 돌입했기에 송문수는 온갖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이면서 도와달라고 읍소를 했다.그렇게 가장 성가신 친구들한테까지 알리고 나니 모든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기다리고 기다리던 송기명의 생일파티 당일이 되자 세상은 아주 시끄러워졌는데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계속 기사를 내대는 기자들 때문에 언론도 시끌벅적했다.그런데 기사의 대부분은 송기명이 아니라 송문수에 대한 것이었다.그에게 송승우라는 훌륭한 형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송 씨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게 망나니 같은 송문수라는 기사에 다들 놀라고 있었다.그러면서 그에 대한 찬양기사가 일파만파 퍼져나가자 송승우도 그걸 보게 되었다.아버지의 생일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야근을 몰아 한 덕에 오늘 시간을 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송문수를 추앙하는 기사들이 늘어나자 점점 언짢아졌다.몇 년 전만 해도 송문수는 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망나니였는데 이제는 제가 그의 배경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사람들이 제가 아닌 송문수에게 관심을 쏟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운전을 하면서도 방송을 듣고 있던 송승우는 생일파티의 주인공인 송기명보다 송문수에 대한 말이 더 많이 나오자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도 미간을 펴지 못했다.지금 시간은 6시지만 비행기는 7시 출발이라 호텔에 도착하면 10시는 넘을 것 같아 송승우는 부모님께 먼저 연락을 드려 양해를 구했다.송승우에게 너그러웠던 부모님은 역시나 안 좋은 소리 한마디도 없이 오히려 서두르지 말라며 그를 걱정해주었다.어릴 때부터 받아왔던 편애였지만 오늘의 송승우는 왠지 그게 저에 대한 방치 같았다.이젠 부모님에게도 송문수라는 대단한 아들이 하나 더 생겼으니 저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지수 씨의 의심을 풀어주는 거예요.]허를 찌르는 소이연의 말에 송문수는 조심스레 하지수를 바라보았다.하지수도 송문수에게 모든 신경을 쏟고 있었던 터라 제게 보내지는 시선을 느끼자마자 고개를 들어버려 둘은 의도치 않게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하지만 찔리는 게 있었던 송문수가 먼저 눈을 피하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송문수 역시 잘못한 것도 없는 제가 왜 하지수를 피하는지 몰랐지만 몸이 먼저 한 반응이라 어쩔 수 없었다.[그건 저도 모르겠어요.][아니면 오전에 어디 갔었다고 대충 둘러대기라도 해봐.][안돼요, 그럼 더 수상하잖아요. 우리가 방금 지수 씨 달래주자마자 문수 씨가 해명하면 지수 씨도 우리가 알려줬다는 거 눈치챌 거에요. 지수 씨가 우릴 탓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 방법은 별로 인 것 같아요.][그럼 어떡해요?]예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소이연이 말했다.[그냥 이대로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 ?][? ? ?][서프라이즈는 원래 이런 거에요. 실망을 하면 할수록 감동이 큰 법이죠. 어차피 다음 주가 디데이인데 며칠만 더 버티다가 프러포즈 잘하면 되죠.]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왠지 불안했던 송문수가 물었다.[그게 서프라이즈가 될까요? 괜히 놀래키는 거면 어떡해요? 그리고 지수가 나 안 받아줄 수도 있는데...][너 진짜 바보냐? 아니다, 너한테는 바보라는 말도 아까워. 진짜 지수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거야?][걱정 마요, 절대 거절은 안 할 거예요.]예수진의 핀잔과 소이연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그들을 믿으며 대화방을 나왔다.[알겠어요 그럼.]여자들과의 대화를 마치자 남자들의 단톡방에서 또 송문수를 찾아댔다.[문수야, 지수 씨는 요즘 괜찮아?][뭐가?][이연이랑 수진 씨 요즘 지수 씨 자주 불러내진 않아?][아니? 왜 그러는데.][수진이랑 이연 씨 요즘 이상한 것 같아서, 둘이 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봐도 대답도 잘 안 하고
한편 여자들의 단톡방에서는 소이연이 한창 하지수를 위로해주고 있었다.[지수 씨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에요? 나랑 수진 씨는 문수 씨 요즘 많이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많이 변하긴 했죠, 그래서 나도 망나니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싶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은 쉽게 안 바뀌는 것 같아요. 뭐 기대를 한 내 잘못이죠, 기대를 안 하면 실망도 안 할 텐데.][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지수 씨한테 진짜 진심인 것 같아요. 그리고 만약 밖에 다른 여자를 뒀다면 문수 씨 성격에 그렇게 숨길까요?]그 말에 하지수도 공감한 건지 잠시 벙쪄있었다.그 시각 예수진은 혹여 자신이 끼어들었다가 일을 망칠까 봐 그냥 숨죽이고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었다.아무리 생각해봐도 송문수의 비밀을 지켜주는 동시에 하지수를 의심을 해소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예수진은 그 어려운 걸 단번에 해내는 소이연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송문수 씨 성격에 왜 굳이 지수 씨를 속이겠어요? 결혼한 지 그렇게 오래됐어도 그런 적은 없었잖아요.]전에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만날 때도 전혀 숨기지 않던 사람이긴 했으니 하지수는 점점 소이연의 말에 설득되고 있었다.[그러니까 자꾸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정말 그냥 바쁜 일이 있는데 지수 씨한테 말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죠. 부부라면 서로를 좀 더 믿어야 하는 거예요. 서로에게 시간을 더 줘야 감정도 더 깊어지는 거죠. 같이 산다는 게 원래 두 사람이 맞춰가는 과정이잖아요?]아까는 화가 나서 눈물이 계속 나왔는데 소이연의 말을 듣고 나니 하지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정말 소이연이 없었다면 진작에 우울증에 걸려버렸을 것 같았다.[그래 지수야, 좋은 쪽으로 생각해. 나도 전엔 송문수 좋게 안 봤는데 요즘엔 정말 달라진 것 같더라니까. 그러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알겠어, 언니도 고마워요!]고민이 해결되자 셋은 이내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상황이 해결된 것 같자 예수진은 다른 단톡방으로 넘어가 송문수에
예수진의 문자를 본 소이연은 바로 그녀에게 따로 문자를 보냈다.[진정하고 일단 지수 씨가 뭐라고 하는지부터 봐요.][문수 씨가 꼭 서프라이즈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우리도 도와야죠.][알겠어요, 조심할게요.][수진이 너도 알고 있었어?][내가 뭘 알겠어, 난 아무것도 모르지]갑자기 달라진 예수진의 태도에 하지수는 바로 되물었다.[그럼 아까 한 말은 무슨 뜻인데?][그냥 송문수가 갑자기 딴사람이 된 것 같단 소리지, 전엔 망나니 같던 놈이 이젠 일도 잘하잖아. 지원 씨가 문수 칭찬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그러면서 하도경한테 분발하라고 맨날 뭐라 한다니까.]장문의 문자를 보내 아까의 실수를 만회한 예수진 덕분에 하지수도 더 이상 그녀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물론 말 자체는 의심스러웠지만 하지수는 오랜 친구인 예수진이 자신을 속일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일이 아니라 사생활 말이야.][사생활도 많이 정리된 거 아니었어? 둘이 잘 지냈잖아.][내 착각일 수도 있지 뭐.][그건 또 무슨 말이야?]예수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하지수가 이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이연 언니가 귀국한 날 나 사실 문수 씨랑 관계 할 뻔했거든, 그런데 그날 하필 생리가 터진 거야.][그래서?][못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문수 씨가 엄청 아쉬워했었어. 하도 하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처럼 굴어서 시한폭탄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니까.][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계속해봐.][그런데 지금은 생리 끝난 지 며칠이나 됐는데 아무 말도 없는 거 있지? 내가 몇 번이나 슬쩍 말했는데 내 몸엔 손도 안 대더라.]이번에는 예수진이 답장하기도 전에 소이연이 먼저 문자를 보냈다.[혹시 문수 씨가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런 건 아닐까요? 남자들은 상황에 따라 몸 상태도 다르잖아요. 너무 힘들면 못 할 수도 있죠.][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죠, 요즘 일찍 나가고 늦게 들어오니까. 그런데 내가 오늘 문수 씨 보려고 회사 왔거든요? 회사에 있다던